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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미의 반석

요한복음 길희성 형제............... 조회 수 1971 추천 수 0 2009.12.28 02: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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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요1:1-18 
설교자 : 길희성 형제 
참고 : 새길교회 2009.11.1 주일설교 
sgsermon.jpg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의미의 반석
[요한복음 1 : 1~18]
길희성 형제

인간은 의미를 먹고 사는 존재. 빵으로만 살 수 없고 보람과 의미를 느껴야 살 수 있는 존재입니다. 의미란 무엇입니까? 아마도 우리는 가치 있는 것, 추구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을 추구할 때 우리의 행위나 삶이 ‘의미가 있다’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그 반대로, ‘무의미한’ 삶이란 크든 작든 그러한 가치 있는 것을 발견하지 못했거나 발견했다 해도 그것을 추구하지 못하는 삶일 것입니다. 무엇을 추구해야 할지 모르는 삶, 나의 삶을 가치 있게 만들 것을 아직 깨닫거나 발견하지 못한 삶, 그래서 그냥 살기 위해 사는 맹목적인 삶이 무의미한 삶일 것입니다.

가치란 추구할만한 대상, 욕망의 대상이라는 점에서 목적을 뜻합니다. 가치는 곧 목적이 됩니다. 어떤 행위가 의미 있다는 말은 그것이 추구할만한 가치와 목적이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자기가 지금 무엇을 추구하는지, 무슨 목적으로 행동하고 살고 있는지를 모르는 사람은 무의미한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일 것이며, 목적과 방향을 상실한 삶, 그래서 의욕과 보람을 느끼지 못하는 삶일 것입니다.


 인간은 삶 속에서 끊임없이 어떤 의미, 가치, 목적, 그리고 이유 같은 것을 추구하면서 그것을 얻기 위해 행동합니다. 하나가 이루어지면 곧 다른 하나가 목적과 가치로 등장해서 삶의 의미를 제공하고 삶의 동력이 됩니다. 삶은 크고 작은 의미의 연속입니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사회적 맥락 속에서, 사회가 인정하고 요구하는 의미의 틀 속에서 습관적이고 관습적인 의미를 추구하면서 삽니다. 사회가 주로 의미와 무의미의 경계를 그어주고, 거기에 따라 ‘의미 있는’ 행동을 하며 사는 것이지요.


 우리는 가끔 왜 내가 반드시 이렇게 행동해야 하며 이렇게 살아야 하는지를 자문해보곤 합니다. 그럴 때마다 대답이 곤혹스러워지며 당혹감을 느끼기도 합니다. “남들이 다 그렇게 하니까”라고 밖에는 대답이 안 나오기 때문이지요. 우리는 사회에서 배운 대로, 사회가 요구하는 가치 기준과 의미의 기준에 따라 행동하며 살기 때문입니다.


 가끔 용기 있는 사람들이 사회적 통념을 벗어나서 자기 마음대로, 자기가 정말 좋아하는 것, 가치가 있다고 생각되는 것을 추구하면서 살기도 합니다. 그야말로 ‘튀는’ 인생을 사는 사람들이지요. 멋진 인생이지만 모험적 인생이며 흔히 고생을 자초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용기 있게 사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대다수 범인들은 사회가 요구하는 의미의 기준과 체계에 순응하며 살고 있는 것입니다.


 며칠 전 한 신문에서, 우리 한국 사회를 향해 날카로운 비판의 칼날을 들이대는 일에 둘째라면 서러울 박노자 씨의 글,“대한민국에서 인간답게 사는 길?”이란 칼럼을 읽은 일이 있습니다. 글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제가 가끔 가다가 국내 고등학생이나 대학생들에게 “한국 사회에서 인간답게 살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이냐? 출세를 위해 공부 아닌 공부에 매달리는 것부터 더 이상 참기 힘들지만, 제 주위에서 그 어떤 대안적인 삶의 방식도 볼 수 없어 답답해 죽을 지경이다. 평생 그렇게 살아야 할 것 같아 왜 사는지 모르겠다”와 같은 질문을 받곤 합니다. 사람마다 질문하는 방식은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대략적인 골자는 거의 같습니다. ‘신분’과 ‘돈’이 지배하는 사회가 싫은데, 가족 등 주변의 압력이 있어서 ‘모두들’처럼 살아야 한다는 것은 너무 비참하게 느껴진다, 대안이 무엇이냐, 이것입니다.


 과연 대한민국의 고등학교 교육과 대학 교육이 이렇게 ‘공부 아닌 공부’를 하고 있는지는 더 생각해보아야 하겠지만, 거의 모든 학생들이 출세와 돈과 신분을 위해 공부하고 있는 것은 사실일 것이며, 거기에는 학생들 자신의 의사보다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끝까지 참고 견디고 승리하기를 바라고 강요하는 부모들의 집착, 그리고 선생님들의 채찍질이 더 큰 몫을 하고 있을 것입니다. 문제는 대안이 없어 보여 답답하다는 것입니다. 인간답게, 의미 있게 살고 싶은데, 마땅한 대안이 없다는 것이지요. 한국 학생들, 젊은이들의 최대 고민이 아닐까 생각되며, 그것을 탈피하려면 여간한 용기가 있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어느 한 네티즌이 단 댓글이 경청할 만합니다: “한국사회가 깝깝하다면 우선적으로 ‘탈물질주의자’가 되어야 합니다. 온갖 소비문화와 향락을 즐기길 원하면서 다른 사회를 꿈꾸는 모순적 행태는 버려야 합니다.” 이런 용기가 없다면, 치열한 교육열로 유명한 우리 사회에서는, 아무리 교육 제도 개선을 한다 해도, 참고 견디는 수밖에 별 도리가 없지 않겠냐 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리고 그 네티즌이 지적한 다음과 같은 사실 또한 의미심장합니다!: “한국인들이 깝깝한 이유는 물질주의자의 비율이 높다는 것입니다. 물론, 현대 자본주의 국가들에서는 물질주의자들의 비율이 높은 게 일반적 현상이지만 한국은 그 정도가 특히 심하다는 문제이지요. 미국이나 유럽에서는 대략 20% 가량이 물질주의를 거부하는 ‘탈물질주의자’로 분류되는데, 한국에서는 고작 6% 수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환경보호 운동이나 인권운동 등 탈물질적인 가치관이 확산되지 못하고 이런 운동들은 아주 초보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죠. 유럽에서 녹생당이 소수당이지만 그래도 꾸준히 인기를 얻고 있는 것과 비교하면 한국의 상황은 깝깝하기만 합니다.” 우리 한국인들의 천박한 물질주의 문화를 꼬집은 지적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부모, 학생, 선생, 기독교인이든 아니든 할 것 없이 우리 모두에 해당하는 말일 것입니다.


 나만 의미를 추구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타인의 행위도 의미를 묻고 이해하며 살고 있으며, 어떤 뉴스를 접해도 우리는 사회적 맥락과 상식 속에서 해석하고 이해합니다.


 하지만 인생에는 이러한 일상적인 의미 이해의 틀과 기제가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 일이 종종 일어납니다. 도저히 나의 상식이나 경험, 사회적 통념이나 관습으로 이해할 수 없는 무의미한 일, 무가치하고, 맹목적으로 보이는 일들이 일어나서 우리를 혼란스럽게 합니다. 그렇게 되면, 지금까지 별 탈 없이 작동해오던 의미 체계가 도전을 받고 무력해집니다. 이른바 ‘의미의 위기’라는 것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의미의 위기가 심각해지면, 곧 우리의 삶 자체를 위협하는 삶의 위기, 인생의 위기가 됩니다.


 가령 갑자기 치유하기 어려운 병에 걸린다든지, 극심한 고통을 안겨주는 병에 걸리면, 이 고통 앞에서 다른 모든 것들이 무의미해지는 것을 우리는 느낍니다. 고통의 극복 외에는 다른 어떤 가치나 목적도 필요 없다고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극심한 고통은 모든 의미를 무력화시킵니다. 제 아무리 좋은 일이라 해도, 평상시에 보람, 의미, 가치가 있다고 여기던 일이나 숭고한 이념이나 사상이라도, 당장은 무가치하고 무의미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또 죽음을 앞둔 사람에게도 물론 의미의 위기는 심각합니다. 지금까지 작동하던 삶의 의미의 기제 자체가 무력화됩니다. 지금까지 나의 행동을 이끌고 나의 삶을 지탱해주던 의미체계가 갑자기 붕괴되면서, 일상적 행위가 무의미하게 보이고 세계가 낯설어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지금까지 그런대로 나의 삶의 의미를 지탱해주던 직장을 갑자기 잃는다거나 사업의 실패도 의미의 위기로 나타날 것입니다.


 의미의 위기는 개인의 삶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회 전체가 의미의 위기에 빠질 때도 있습니다. 커다란 사회적 혼란이나 위기는 그 사회에 몸담고 살았던 사람들 대다수를 의미의 위기로 몰아넣습니다. 전쟁이나 엄청난 천재지변들, 아니면 십년 전에 겪었던 외환 위기나 최근 월가에서부터 시작한 세계적 경제 위기 같은 것들이 그렇습니다. 그런가 하면 사회에서 경험하는 엄청난 도덕적 부조리도, 도덕적으로 산다는 것이 과연 의미가 있는 것인지 회의를 자아내며 우리의 삶을 도덕적 의미의 위기로 몰아넣습니다. 선악, 시비의 판단 기준이 모호해지고 무의미해지는 것이지요.


 우리는 이렇게 개인적, 사회적, 세계적 의미의 위기를 만날 때면, 나 개인의 삶의 의미뿐만 아니라, 더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하게 됩니다. 도대체 인간의 삶이란, 사회란, 역사란, 아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와 우주가 도대체 어떤 궁극적인 의미 같은 것이 있는 것인지 묻게 됩니다. 그야말로 ‘큰 의미,’ ‘거대 의미’의 문제를 묻게 되는 겁니다.


 그런 골치 아픈 문제 집어 치우고 살자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런 거대 의미 같은 것은 있지도 않고, 설사 있다 해도 알 수도 없는 일이니, 그저 인생의 작은 의미, 작은 가치, 작은 재미만 보면서 살다가 가면 된다는 인생관으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큰 의미가 없는데 작은 의미라는 것이 과연 있을 수 있을까? 가령,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와 사회와 역사 자체가 무의미하다면, 가령 우리도 모르는 음모와 속임수 혹은 어떤 운이나 운명 같은 것에 의해 움직이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것을 알고도 여전히 조금마한 의미에 집착하면서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설령 나는 개인적으로 그렇게 할 수 있다 해도, 그마나 이 자그마한 의미와 행복마저 박탈당하고 사는 우리 사회와 세계의 수많은 인생들의 삶의 의미는 무엇일지, 나의 인생만 운 좋게 가치와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며 살 수 있을지 의문이 드는 것입니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모든 의미 찾기를 포기하고, 아예 노골적으로 인생은 무자비한 생존경쟁일 뿐이라든지, 아니면 순전히 우연이고 알 수 없는 운명의 장난일 뿐이라고 결론 내리고 마음 편히 사는 것이 더 정직할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 놈은 운 좋게 태어나 행복하게 살다 가고, 어느 놈은 운이 나빠서 지지리 고생만 하다 간다고 생각하면 될 것이며, 그 이상의 어떤 의미 같은 것을 바라고 추구하는 것은 헛되고 어리석은 일이라고 생각하면서 사는 것이 차라리 마음이라도 편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정말 우리가 그렇게 할 수만 있다면 말입니다.


 하지만 신앙을 가진 사람들, 특히 우주만물과 인간을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 세계와 역사를 주관하시는 역사의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 신앙은 그렇게 생각할 수 없습니다. 모든 일에 의미가 있고, 모든 사람의 인생이 의미와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며, 세계와 역사 전체가 하나님께서 정하신 의미가 존재한다고 믿고 살기 때문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소경인 사람의 삶도 예수께서는 의미와 목적이 있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아니, 참새 한 마리의 죽음도 의미가 있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 하물며, 수많은 세계 어린이들의 굶주림이야 말할 것 있겠습니까?


 사실 세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의미와 목적이 있다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 신앙의 근본 입장입니다. 개별적 사건 하나하나가 의미가 있다고 믿으며, 무의미하게 보이는 악이 존재한다 해도 전체적 맥락에서 보면 어떤 깊은 의미를 지닌다고 믿습니다. 비록 우리가 아직 하나님의 섭리를 전부, 투명하게 알지 못한다 해도, “믿는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합동하여 선을 이룬다”는 믿음을 가지고 신앙인들은 사는 것입니다.


 심지어 죽음까지도 선하신 하나님의 의미의 손길 아래 있다는 것이 신앙인의 입장이입니다. 특히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과 부활의 영광을 기억하며 사는 믿음의 사람들은 어떠한 고난이나 무의미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의미의 승리를 굳게 믿고 사는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모든 것에 의미가 있다고 믿는 하나님 신앙은 실로 엄청난 의미의 부담을 안겨주는 신앙이며, 이런 신앙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에게 인생과 역사는 의미와 무의미의 거대한 싸움이나 다름없습니다. 각자의 인생을 보람 있게 하고 의미 있게 해주는 이런 저런 작은 의미들은 많이 있겠지만, 정말 하나님께서 주관하시는 인류 역사 전체가 그 모든 고통과 비극에도 불구하고 의미가 있는 것인지, 그리고 신비를 간직한 채 침묵하고 있는 이 방대한 우주의 존재와 그 장구한 생명 진화의 역사가 어떤 의미를 지닌 것인지 우리는 묻게 됩니다.


 요즈음처럼 청명한 가을 하늘과 아름다운 산천을 볼 수 있는 눈을 주시고 풍성한 수확의 기쁨도 누릴 수 있는 인생을 주신 하나님께 저절로 감사와 찬송이 흘러나옵니다. 시편 8편 기자는 일찍이 이 모든 축복을 보고 누릴 수 있는 인간 존재의 신비를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님께서 이렇게까지 생각하여 주시며, 사람의 아들이 무엇이기에 주님께서 이렇게까지 돌보아 주십니까? 주님께서는 그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그에게 존귀와 영화로운 왕관을 씌어 주셨습니다. 주님께서 손수 지으신 만물을 다스리게 하시고, 모든 것을 그의 발아래 두셨습니다.”


 우주와 자연이 아무리 아름답고 신비하다 해도, 이 아름다움과 신비를 의식하는 존재인 인간이 없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인간이 없다면 거대한 우주의 존재도 의미가 없을 것이며, 인간 탄생에 이르기 위한 140억년의 기나긴 우주의 역정도 아무 의미 없는 하나의 거대한 해프닝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을 단지 ‘인간중심주의’라고 쉽게 매도할 수 있을까요? 아무리 생각해도 그럴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인간이 없으면 우주가 무의미하다는 것은 당연한 이야기, 하나마나한 말이라고 생각할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의미를 묻는 일은 인간만 할 수 있는 일인데, 인간이 없다면 우주의 의미는 물을 사람도 없으니 당연히 우주는 무의미할 테니까 말입니다. 인간이 없으면, 의미니 뭐니 하고 묻는 것 자체가 불가능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이 방대한 우주 속에 의미를 묻고 추구하는 인간이라는 존재가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는 여전히 신비롭기만 하며, 무슨 커다란 의미 같은 것이 존재할 것이라는 생각을 떨쳐버리기 어렵습니다. 이 방대한 우주에 의미를 물을 수 있는 인간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실로 가벼이 여길 일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왜 인간은 여타 사물들처럼 단순히 그냥 존재하지 않고, 자기 존재를 의식하며 세계와 인생의 존재의 의미를 묻습니까? 인간이 즉자적 존재일 뿐 아니라 자기 존재를 의식하며 초월할 수 있는 대자적 존재라는 사실, 장구한 우주 역사와 생명 진화의 과정 속에서, 이렇게 자기 존재를 의식하고 의미를 묻는 존재의 출현이 아무런 의미가 없는 현상이란 말입니까?


 의미를 물을 수 있는 인간 존재의 출현 자체가 무슨 의미가 있는 일인지, 아니면 순전한 우연인지요? 140억년의 우주 역사 속에서 지구라는 생명을 잉태할 수 있는 특별한 별이 형성되고 그 속에서 수십억 년의 장구한 생명의 진화과정을 통해 의식을 지닌 인간의 출현했다는 사실이, 무수한 돌연변이들의 연속과 ‘자연 선택’이라는 원리의 합작품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입니까?


 성급한 결론일지는 몰라도, 답은 간단합니다: 바로 의미를 물을 수 있고 의미를 찾는 존재인 인간의 출현 자체가 우주 탄생과 생명 진화의 의미일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여전히 인간중심주의적 사고라고 비난 받을지 몰라도, 바로 이 인간중심주의라는 것을 의식하는 존재의 출현 자체도 단순히 인간중심주의라고 치부해서는 안 될 것 같다는 말입니다.


 의식을 지닌 인간의 출현으로 인해 무거운 침묵만 지키고 있던 방대한 물질계가 스스로를 의식하게 되었습니다. 의미를 묻게 되었습니다. 신체를 지닌 인간은 분명 자연의 일부며 자연에 속한 존재지만, 정신을 지닌 인간은 단순히 자연의 일부이면서도 그 이상이라는 것이 동서고금의 모든 위대한 종교와 철학 사상의 일치된 견해입니다. 예외가 있다면, 인간의 정신마저도 물질로 환원시켜버리려는 현대 서구의 유물론 사상과 물리주의 철학, 그리고 인간을 동물의 차원으로 끌어내리려는 일련의 무책임한 진화론뿐입니다.


 인간은 흙에서 와서 흙으로 돌아갈 존재지만, 동시에 성서는 인간이 하나님의 모상으로 지음 받은 특별한 존재라는 것, 다시 말해 하나님을 닮아서 초월적 존재임을 증언합니다.


 최근, 환경-생태계 위기로 인해 인간중심주의가 마치 모든 문제의 근원이며 원죄와 같이 취급되고 있지만, 무엇이든 지나치면 아니 감만 못한 법입니다. 환경위기를 해결하는 데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이 단지 자연환경의 일부일 뿐이라면, 도대체 우리 인간들이 환경문제에 대해 신경을 쓰고, 환경에 대해 도덕적 책임을 질 필요가 어디 있습니까? 얼마 전 우리 교회에서 한 기획토론에서처럼, 동물의 권리까지 우리가 논할 이유나 의미가 어디 있는지 묻게 됩니다.


 인간은 바로 만물을 지배하고 다스릴 수 있는 초월적 존재이기에 만물에 책임을 지는 것이지요. 여타 생물들과 달리, 인간은 자유를 지닌 존재로서 자기 행동과 삶의 방식을 의식하고 바꿀 수 있는 존재이며, 도덕적 책임을 질 수 있고 져야만 하는 존재인 것입니다. 스스로에게 인간중심주의라는 자기비판도 가할 수 있고 그것을 극복하고자 하는 것도 바로 인간이 초월적 존재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인간중심주의든 그것을 비판하는 사상이든, 인간이 완전히 자연의 일부가 아니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그런 인간더러 완전히 자연의 일부처럼, 동식물이나 무생물처럼 자기를 의식하지 말고 그냥 자연 속에 파묻혀 얌전히 살라 하면 되겠습니까? “인간을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그에게 존귀와 영화로운 왕관을 씌어 주셨습니다. 주님께서 손수 지으신 만물을 다스리게 하시고, 모든 것을 그의 발아래에 두셨습니다”는 시편 기자도 이것을 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자연의 순리에 따라 순응하며 살라는 자연주의적 인생관도, 인간이 이미 자연을 이탈한 존재이기 때문에 나오는 발상입니다. 개나 돼지가 자연주의를 외칠 필요가 있으며, 그럴 수가 있기나 하겠습니까? 모든 철학, 종교, 이념, 사상, 문학, 예술이 가능한 것은 인간이 의식을 소유한 정신적 존재이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연약하기 그지없는 인간, 그야말로 독극물 한 방울이면 목숨이 끝날 존재인 ‘생각하는 갈대’가 온 우주보다도 위대하다는 파스칼의 말은 과장되기는 했어도 진리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존재하니까 우주가 의미 있다는 말은 한 가지 결정적 오해는 반드시 피해야만 합니다. 인간이 의미를 만들어 내는 존재는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인간이 의미의 창출자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인간이 자기 자신을 만들어내지 못하듯이, 없는 의미를 만들어내지는 못합니다. 의미는 발견하는 것이지 만들어내는 것이 아닙니다. 근대 서구식 인본주의는 도가 지나쳐서 마치 인간이 의미의 창출자, 가치의 창출자인 것처럼 생각하기까지에 이르렀지만, 이는 그야말로 인간중심주의이며 주관주의의 극치이며 교만입니다. 그러한 교만한 휴머니즘은 끝내 자충수가 되고 부메랑이 되어 돌아와서 인류를 파멸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을 것입니다.


 인간이 존재하니까 우주만물이 의미가 있는 것이라 해도, 인간이 의미를 만들어내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말입니다. 의미는 창조주 하나님에 의해 창세 때부터 이미 주어져 있는 것이며, 우리는 이 의미를 발견하고 깨달아 사는 존재일 뿐입니다.


 없는 의미, 존재하지도 않는 의미를 어떻게 인간이 만들어낸다는 말입니까? 우리는 세계의 존재와 구조와 성격 자체에 창조주 하나님에 의해 심어진 의미를 읽어야만 합니다. 만약 세계 자체가 과학적 유물론자들이 생각하는 대로 그야말로 소립자들의 맹목적 움직임의 산물일 뿐이라면, 그리고 모든 일들이 엄격한 물리적 인과관계의 지배에 따라 일어날 뿐이라면, 도대체 어떤 의미가 궁극적 의미를 지닐 수 있겠습니까? 사람은 죽으면 흙으로 돌아가는 허무한 존재라면, 우리 인생이 과연 궁극적으로 의미가 있을 것입니까?


 내가 남긴 업적, 작품, 저서, 사상, 사업, 유산, 자손, 그리고 내가 추구하던 가치들이 과연 의미의 보루가 된다고 자위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추구하고 있는 정의, 사랑, 평화, 인권 같은 가치들이 정말 우주 자체, 세계 자체에 기반을 둔 하나님의 뜻이 아니고, 우리 인간들이 고안해낸 것들이라면, 정말 그것들이 영원하고 절대적인 가치가 될 수 있을지 의심이 드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이 추구하고 있는 숭고한 가치들이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 자체의 성격과 무관하다면, 그런 가치들이 어떻게 객관적이고 보편적일 수 있을까요? 결국 인간의 주관적 선택에 불과할 것입니다. 음식 맛이 사람마다 다르듯이, 사람들이 추구하는 가치들도 상대적일 뿐이라는 가치 상대주의를 피할 수 없을 것이며, 이러한 상대주의가 현대 서구 세계에 편만하게 된 것은 결단코 우연이 아닙니다.


 가치와 의미란 우리의 주관적 선택 이전에, 그것과 무관하게, 이미 세계와 인생 자체에 주어져 있든지 아니든지 둘 중의 하나라고 저는 믿습니다. 이 유신론과 무신론, 의미와 무의미의 라디칼한 선택을 놓고, 하나님을 믿는 우리 신앙인들은 거대한 정신적 싸움을 싸워야 하는 것입니다.


 의미를 묻고 이해하는 존재인 인간이 없으면 이 우주가 무의미하듯이, 우주가 의미와 무관하며 무의미하다면 우리 인생 또한 무의미할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아침 봉독한 요한복음 1장의 하나님의 말씀이 뜻하는 바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태초에 말씀, 로고스가 계셨으며 만물이 이 말씀을 통해 창조되었다는 것, 그리고 이 태초의 말씀이 육신이 되어서 우리 가운데 사셨다는 이 사상만큼 인류 역사에 큰 영향력을 미친 사상도 드믈 것입니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이 세계를 창조하셨다는 창세기의 말씀과 짝을 이루는 말입니다.


 이 요한복음의 말씀에 대해서, 특히 로고스 개념에 대해서는 수도 없는 많은 논문들이 써졌지만, 우리는 가장 평범하고 일반적인 의미로 그것을 이해해도 무방합니다. 로고스는 말, 생각, 지성, 이성, 지혜로 해석하면 되고, 우리 인간의 말이나 이성이나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무한하고 절대적인 말, 생각, 지혜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인간의 말과 로고스는 바로 하나님 자신의 말과 로고스에 의존하고 있으며, 하나님의 말씀인 로고스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인간은 역시 하나님을 닮은 초월적 존재라는 것이 기독교의 근본 인간관이지요. 다만 하나님의 말씀과 지혜는 무한하며 하나님의 영원한 필연적 속성임에 반해서, 인간의 말과 지혜는 하나님으로부터 온, 그리고 하나님께 의존하는 유한한 것들이라는 결정적 차이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로고스를 통해서 우주만물을 창조하셨으며, 이 로고스의 지혜와 질서가 우주만물을 관통해서 지배하고 있으며 우리가 추구하고 있는 모든 차이와 의미의 원천이지만, 만물 가운데서 하나님의 모상으로 창조된 인간만이 이 하나님의 로고스를 알고 거기에 참여하고 있는 특별한 존재입니다. 인간만이 이성을 지닌 존재, 언어를 사용하는 존재, 그리고 자신의 존재 근거인 우주의 로고스, 즉 하나님의 생각과 뜻을 헤아리고 이해할 수 있는 위대한 존재인 것입니다.


 영국의 유명한 신학자 존 맥쿼리(John Macquarrie)는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는 말을 “태초에 의미가 있었다”는 말로 해석해서 저에게 큰 충격을 준 일이 있습니다. 그야말로 정신이 버쩍 드는 경험이었고, 한 동안 그 의미를 곰곰이 새겨 본 일이 있습니다. 생각할수록 탁월한 해석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의미라는 것은 우리가 사용하는 말, 생각, 지혜, 이성, 의식, 정신과 따로 떼어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며, 우주의 의미는 우주를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의 말, 생각, 뜻, 목적, 정신과 분리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맥쿼리가 자유롭게 현대적으로 번안한 요한복음 1장 1절부터 18절의 말씀을 소개합니다:


 1절-의미는 모든 것의 근본이다. 의미는 우리가 ‘하나님’이라고 부는 것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으며, 실로 의미와 하나님은 실제상 동일하다. 2절-태초에 하나님이 계셨다는 말은 태초에 의미가 있었다는 말이다. 3절-만물은 의미 있게 만들어졌으며, 만들어진 것 가운데 의미 없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4절-생명은 의미를 향한 충동이며, 생명은 자기를 의식하는 인간, 의미의 담지자이며 수령자로 출현했다. 5절-그리고 의미는 무의미의 위협을 통해 빛을 발한다. 왜냐하면 무의미가 의미를 이기지 못했기 때문이다...... 9절-모든 사람은 참 빛으로 세상에 오는 의미의 한 몫을 지니고 있다. 10절-의미가 세상에 있었으며 세상 속에 스스로를 육화하고 있었으나, 세상은 의미를 인식하지 못했다. 11절-그리고 의미의 담지자인 인간조차도 그것을 거부했다. 12절-그러나 그것을 수령하고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능력을 받았다. 13절-그리고 이것은 진화나 혹은 인간의 노력으로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운 행위를 통해서 일어났다. 14절-왜냐하면 의미가 은혜와 진리로 충만한 한 인간 존재에서 육화되었기 때문이며, 우리는 그에게서 만물이 그리고 향하고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다...... 16절-우리가 인격적 언어로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인정할 수 있는 그로부터 우리는 충만한 은혜를 받았기 때문이다. 17절-모세를 통해서 율법의 명령이 왔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은혜와 진리가 왔다. 18절-하나님은 신비지만, 아버지의 생명을 나눈 아들이 그를 계시했다. (Macquarrie, Jesus Christ, 106-7)


 우리가 요한복음 1장의 말씀을 “태초에 의미가 있었다”는 뜻으로 취한다면, 의미와 무의미의 거대한 싸움에서 우리 그리스도인은 끝까지 의미의 편에 설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경우라도 의미를 포기하고는 살 수 없는 것입니다. 어떤 고난과 시련이 닥쳐와도, 어떤 무의미한 일들이 벌어져도, 우리는 우주와 인생은 근본적으로 의미로 창조되었고 의미로 관통되어 있는 세계임을 부정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부정하는 순간, 우리는 하나님이 지으신 세계와 인생을 포기하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입니다.


 의미는 이미 주어져 있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들이 제멋대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에 의해 창세 때부터 객관적으로 주어져 있습니다. 인간을 창조하시기 전부터 의미는 이미 존재했으며, 우주와 생명의 장구한 역사는 이 하나님의 로고스, 하나님의 뜻과 생각, 이 ‘거대 의미’가 실현되어가는 과정이라는 믿음을 우리는 가지게 됩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은 태초에 의미가 있었으며 이 의미를 통해 우주만물이 창조되었다는 선포보다도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이 우주적 의미가 예수라는 한 인간의 몸에 육화되었다는 이른바 성육신의 놀라운 진리를 선포하고 있습니다.


 우주의 탄생과 장구한 역사, 그리고 생명 진화의 장구한 역사의 의미가 의식을 지닌 인간 존재, 로고스를 지닌 인간의 출현에 있었다면, 이제 인간 출현의 의미와 전 인류 역사의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새로운 인간, 새로운 존재, 참 인간, 참 사람의 탄생에 있다는 것을 함축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모상으로서의 인간의 본성을 가장 완벽하게 구현한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탄생에서, 우주와 인생의 의미와 목적이 결정적인 실현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의식을 지닌 인간 존재의 출현 이래 인류가 끊임없이 무의미와 싸우면서 의미를 찾으려고 노력해 왔다면, 이제 이 의미가 예수 그리스도라는 한 인간의 탄생에서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정도로 확실하고, 구체적으로, 결정적으로 드러났다는 것이 요한복음의 증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인생의 의미의 보루이며 반석이십니다. 어떤 환란과 시련이 닥쳐와도, 어떤 무의미가 우리 인생을 위협해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한 분만 붙잡고 있으면 의미 있는 삶을 살 수 있고, 우주와 인생의 의미를 긍정하며 살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가 추구하고 있는 크고 작은 의미들의 완성이며 규범이며, 구체적인 척도와 평가 기준이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의미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 위에 우리 인생의 집을 짓고 살면, 실패나 좌절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야말로 비바람이 쳐도 흔들리지 않는 반석 위에 지은 집이 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라는 하나님의 말씀, 의미의 반석을 떠나서 딴 의미를 찾거나 딴 집을 지으려 하면, 우리가 지은 집은 모래 위에 지은 집처럼 비바람이 몰아치면 허무하게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사실, 우리 인생을 무너트리는 것은 시시 때때로 몰려오는 시련과 풍파, 고난과 고통 자체가 아니라, 그것으로 인한 삶의 의미의 위기와 붕괴입니다. 고난은 인생을 붕괴시키기 전에 의미에 대한 우리의 믿음을 무너트립니다. 이런 고통, 이런 고난을 감내하면서도 내가 살아야만 하는지, 나의 삶이 진정 가치가 있는지 회의와 절망이 우리를 사로잡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 어떤 경우라도, 세상의 그 어떤 힘이나 세력이라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의미로부터 우리를 앗아갈 수 없는 의미의 반석입니다. 바울 사도는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삶의 기쁨과 의미를 확신에 찬 믿음으로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들도, 권세자들도, 현재 일도, 장래 일도, 능력도, 높음도, 깊음도, 그 밖에 어떤 피조물도,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로마서 8: 38-39).


 나의 삶이 어떤 과정으로 진행되든지, 역사의 우여곡절과 고난이 어떠하든지, 하나님의 지혜이며 말씀이신 로고스 위에, 영원한 의미 자체이며 모든 의미의 원천이자 초석이며 완성이고 규범이신 예수 그리스도라는 의미의 반석 위에 무너지지 않는 의미의 집을 지으며 의미 있는 삶을 사시기를 기원합니다. 인생이 엉망진창이 되고 역사가 거꾸로 가는 듯 하고, 느닷없이 천재지변이 닥쳐와도, 말씀으로 우주와 인생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신실하신 사랑, 그리고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와 함께 이 땅에 거하시면서 그 사랑을 몸으로 보여주시고 증언해주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와 영원토록 함께 하실 것임을 믿습니다.


 태풍 한 번 없이 지나간 올 가을, 유난히도 눈부신 가을의 끝자락에 서서, 다시 한 번 삶의 기쁨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은총을 감사하게 됩니다. 우리에게 어떤 시련과 좌절이 닥쳐와도, 이 아름다운 세상을 잠시라도 보게 하시고 그 가운데서 영원하신 하나님을 만나도록 말씀으로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무엇보다도, 그의 아들이며 우주와 인생을 떠받치는 말씀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셔서, 세상의 그 무엇도 우리에게서 인생의 의미를 앗아갈 수 없도록 아빠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을 보여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다 함께 감사와 찬송을 드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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