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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고난

마가복음 정용섭 목사............... 조회 수 2078 추천 수 0 2009.12.29 11:2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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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막6:14-29 
설교자 : 정용섭 목사 
참고 : http://dabia.net/xe/38740 
emoticon 2006. 7.30.

세례요한의 죽음
마가복음 기자는 세례요한의 죽음을 아주 소상하게, 보기에 따라서는 지나칠 정도로 진부하게 설명했습니다. 병행구인 누가복음 9:7-9절은 예수의 소문을 들은 헤로데가 세례요한의 일로 걱정한다는, 아주 간단한 사실보도로 끝납니다. 마태복음 14:1-12절은 마가복음을 거의 그대로 따라가고 있지만 길이가 짧습니다. 복음서 중에서 전체 길이가 가장 짧은 마가복음이 요한의 죽음에 대해서만은 가장 길게 보도하고 있는 셈입니다. 이것은 마가에게 요한의 죽음이 그만큼 충격적이었다는 의미인가요? 마가가 설명하는 요한의 죽음에 얽힌 사연을 따라가 봅시다.
세례요한이 활동하던 시기에 갈릴리와 베레아 지방의 분봉왕은 헤로데 대왕과 말테스 사이에서 태어난 헤로데 안티파스 왕이었습니다. 그가 바로 오늘 본문에 나오는 헤로데 왕입니다. 그는 이복동생인 헤로데 필립보의 아내였던 헤로디아와 결혼하기 위해서 이혼했습니다. 원래 헤로디아는 헤로데 대왕과 마리암 1세 사이에서 태어난 아리스토불로스의 딸로서 헤로데 안티바스의 조카인 셈입니다. 헤로디아는 작은 삼촌인 헤로데 필립보와 결혼했다가 이혼하고 이제 다시 큰 삼촌은 헤로데 안티파스와 결혼한 겁니다. 상당히 복잡한 집안입니다. 사실 옛 왕실은 어디를 막론하고 이런 일들이 드물지는 않았습니다. 어쨌든지 헤로데 안티파스와 헤로디아의 재혼을 놓고 세간에 말들이 많았습니다만, 왕족에 얽힌 일이니까 누구도 대놓고 비판하지는 못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세례요한이 헤로디아 안티파스의 잘못을 공개적으로 책망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세례요한을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여기까지는 대충 어디서나 있을만한 일들입니다. 헤로데 왕도 자기의 체면을 살리는 한도 안에서 세례요한에게 제재를 가하고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면 방면할 생각이 있었을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민중들이 요한을 예언자로 알았을 뿐만 아니라 헤로데 스스로도 세례요한의 책망을 옳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은 한 여자 때문에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는 말이 여기에 해당되는지 모르겠군요. 같은 잘못을 저질렀는데도 헤로데 왕은 양심의 가책을 받은 반면에 헤로디아는 오히려 원한을 품었다고 합니다. “헤로디아는 요한에게 원한을 품고 그를 죽이려고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막 6:19) 그녀는 요한을 처치해버릴 그 순간을 손꼽아 기다렸습니다.
이 뒤의 이야기는 간략하게 정리하겠습니다. 헤로데 왕의 생일에 헤로디아와 전남편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 춤을 추어 왕을 즐겁게 해주었습니다. 왕이 그 소녀에게 소원을 묻자 자기 어머니의 청을 그대로 전했습니다. 세례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서 가져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자기가 뱉은 말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헤로데 왕은 경비병을 시켜 요한의 목을 베어오게 했습니다. 일이 그대로 진행되었습니다.
그 당시에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영웅이 어처구니없이 죽었습니다. 술 취한 김에 “네 소원이 뭐냐?” 하고 호기를 부린 헤로데 왕의 말 한 마디에 세례요한은 죽었습니다. 이런 게 인간 역사인지 모릅니다. 아주 사소한 일이 엄청난 화를 불러왔습니다. 인류 역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장면의 하나가 이 세례요한의 죽음이라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다시 살아난 요한?
마가복음 전체 구조에서 볼 때 예상 외로 길게 보도된 요한의 죽음 이야기는 그것 자체로 결정적인 의미가 있는 건 아닙니다. 마가는 헤로데가 예수에 관한 소문을 듣고 세례요한을 죽인 자기 행동을 기억한 것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당시에 사람들은 예수를 다시 살아난 요한이라고 말하기도 하고, 엘리야라고도 하고, 예언자라고도 했습니다. 이런 소문은 예수님 당신 자신에게도 중요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더냐?” 하고 물은 적이 있습니다. 그때 제자들은 예수님에 관한 소문을 그대로 전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세례 요한, 엘리야, 예언자 중의 한 사람이라고 한다는 것입니다.(막 8:28) 오늘 본문에서 특히 예수가 다시 살아난 세례요한이라는 소문은 헤로데의 심경을 날카롭게 자극했을 것입니다. 도둑은 제 발이 저리기 마련입니다. 16절 말씀을 보십시오. “예수의 소문을 들은 헤로데 왕은 ‘바로 요한이다. 내가 목을 벤 요한이 다시 살아난 것이다.’ 하고 말하였다.” 마태, 마가, 누가복음만이 아니라 요한복음에 이르기까지 복음서 기자들은 한결같이 세례요한을 예수님과 긴밀히 연결시킵니다.
우리나라에게도 태몽이라는 게 있듯이 세례요한의 어머니 엘리사벳과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임신하는 순간에 천사가 그 사실을 미리 알려주었습니다. 세례요한의 경우에는 천사가 그의 아버지 사가랴에 나타났습니다. 세례요한은 예수님보다 먼저 대중을 향한 설교자로 나섰습니다. 모르긴 해도 예수의 출가도 세례요한의 활동과 무관하지 않을 겁니다. 예수님이 세례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을 정도로 두 사람 사이에는 비슷한 점이 많기는 했지만 차이점도 없지 않았습니다. 요단강에서 민중들에게 세례를 베푼 요한과 달리 예수님은 세례를 베풀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기적을 많이 행하셨지만 요한은 기적을 행하지 않았습니다.
복음서 기자들이 세례요한을 예수님의 운명에서 중요하게 생각한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그가 예수님의 길을 예비한 사람이었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요한은 길 자체가 아니라 길을 준비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빛 자체가 아니라 빛을 증언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요한복음 기자는 세례요한의 다음과 같은 증언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분은 내 뒤에 오시지만 사실은 내가 나기 전부터 계셨기 때문에, 나보다 앞서신 분이라고 말한 것은 바로 이분을 두고 한 말이다.”(요 1:15) 요한은 메시아의 길을 평탄하게 다듬고 준비한 사람이었습니다.
세례요한이 무슨 일을 실제로 했을까요? 그는 무슨 방식으로 예수님의 길을 예비했을까요? 바로 위에서 저는 세례요한의 활동 중에서 가장 특징적인 것이 세례를 베푼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요한은 사람들을 요단강 물속으로 잠기게 하는 방식으로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세례는 헬라어 ‘밥티조’의 번역인데, 그 단어는 씻긴다는 의미입니다.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은 사람들은 과거의 부끄러운 삶을 씻어버리고 새로운 삶을 살아가겠다고 다짐한 것입니다. 여기에는 실제의 행동도 포함되지만 마음이 더 중요하겠지요. 자신의 교만과 불의를 깨닫고 새롭게 살아가겠다는 결단이 바로 세례의 의미입니다. 마음의 밭이라는 예수님의 비유로 설명한다면 마음을 옥토로 바꾸는 것이겠지요. 일단 마음의 밭이 바르게 되어야 그곳에 떨어진 복음의 씨가 자랄 수 있습니다.

의로운 자의 고난
복음서 기자들이 세례요한을 주목한 이유 중에서 가장 결정적인 것은 그의 죽음입니다. 오늘 본문이 요한의 죽음을 장황하게 설명하고 있는 이유도 역시 그의 죽음이 예수님의 죽음을 암시하고 있다는 데에 놓여 있습니다. 그의 죽음은 핵심적으로 ‘무죄한 이의 고난’이라는 주제와 연결됩니다. 예수님의 표현을 빌린다면 세례요한은 여자가 낳은 자 중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광야에서 금욕적인 삶을 살면서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풀고 새로운 마음의 밭을 갈고 있었습니다. 매우 부도덕한 행위였지만 아무도 말하지 못하던 헤로데 안티파스와 헤로디아의 재혼을 비난했습니다. 그것이 빌미가 되어 요한은 죽었습니다. 무죄한 의인이 왜 이 세상에서 고난을 당해야 하나요?
이 주제는 성서 안에 일관되게 흐르고 있습니다. 형 카인에게 살해당한 아벨은 그 전형입니다. 엘리야 선지자도 아합 왕과 이세벨 왕비에게 심한 고난을 당했습니다. 욥기서의 주제도 역시 의로운 자의 고난이었습니다. 세례요한은 바로 이런 전통에 서 있는 사람입니다. 이 세상에는 왜 무죄한 자가, 의로운 자가 고난을 당하는 일이 일어나고 있을까요?
지난 수해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다치고, 재산을 잃었습니다. 남한만이 아니라 북한도 큰 피해를 보았다고 합니다. 그들이 그렇게 시련을 당할 이유가 따로 있는 걸까요? 지금 이스라엘이 레바논을 계속해서 폭격하고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갑니다. 특히 과반수가 어린아이들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전쟁이 벌어지는데도 유엔은 무기력하기만 합니다. 힘이 정의처럼 행세하는 게 인류역사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모독하고 민중을 선동했다는 죄목으로 십자가 처형을 당했습니다. 그는 세례요한처럼 의로운 분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모독한 게 아니라 바르게 선포한 분이었습니다. 그는 민중을 선동한 게 아니라 그들의 고난에 동참하신 것뿐입니다. 그 예수님은 그 당시에 가장 저주스러운 사형법인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은 의로운 자를 박해하는 인류역사에 대한 최후 선고였습니다.
지금 마가복은 기자는 그 당시 위대한 예언자, 의로운 사람 세례요한의 죽음을 통해서 예수님의 죽음을 예시하고 있습니다. 의로운 자가 그렇게 고난 받고 죽는다고 말입니다. 물론 모든 의로운 사람이 그렇게 죽는다거나, 고난 받는 사람은 누구나 의인이라는 말은 아닙니다. 우리의 상식으로 본다면 의로운 사람은 그만큼 존경을 받아야만 하는데, 이 세상은 그걸 용납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조금 더 엄밀하게 본다면 불의한 세상은 의로운 사람을 싫어할 수밖에 없습니다. 구약의 예언자들이 당한 고난이 이에 대한 증거입니다. 그들의 의로움이 인정받는 것은 그 당시의 역사가 흘러간 뒤에나 가능합니다.

종말론적 역사
세례요한의 죽음과 예수님의 죽음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의로운 자는 고난을 피하기 어렵습니다. 간혹 의로운 사람들이 현재의 역사에서 인정받는 경우가 있긴 하지만 그건 일반적인 게 아닙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하나님의 의로움을 별로 반기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게 자신들을 불편하게 만든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의로움은 세상이 거부한다고 해서 사라지는 게 아닙니다. 헤로데에 의해서 죽은 세례요한의 의로움은 역사가 흐른 다음에 인정받았듯이, 그리고 유대교의 종교권력과 로마의 정치권력에 의해서 십자가 처형을 당한 예수님이 부활의 생명을 통해서 인간 구원의 중심이 되셨듯이 하나님의 의로움은 인간의 불의를 뛰어넘습니다. 우리는 바로 그 사실을 바라보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게 곧 종말론적 신앙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런 종말론적 신앙으로 살아가기는 쉽지 않습니다. 일단 종말론적이라는 말 자체를 이해하기 힘들 뿐만 아니라 어느 정도 이해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자기 삶과 일치하는 건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일반적으로 현재 자기를 성취하는 것에 전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끝없이 하늘로 뻗쳐있는 사다리를 오르고 싶어 합니다. 꼭대기에 오를 수 없을뿐더러 설령 올랐다고 하더라도 더 올라가고 싶어서 불안해합니다. 우리는 지금 위로 올라갈 다리가 없는 사다리에 매달려 싸우고 있는지 모릅니다.
이에 반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우리 자신이 삶을 성취한다고 믿지 않습니다. 우리는 철저하게 의존적입니다. 생물학적으로도 우리는 이 세계의 생명체들과 유기적으로 연관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세계를 창조한 주인이 아니라 그 안에 들어간 피조물입니다. 결국 우리의 생명은 세계의 주인인 하나님의 생명에 일치될 때 성취됩니다. 이 말은 곧 현재의 삶에서 우리가 원하는 것이 성취되든지 않든지 그것을 절대화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절대적인 생명은 하나님에게 속한 것이지 우리가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비록 현재에 우리의 삶이 우리가 원하는 방식으로 성취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이 성취하실 미래의 참된 생명의 세계에 희망을 두는 태도가 바로 종말론적인 신앙입니다.
오늘 우리는 고난을 극도로 기피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섬기는 목회행위도 성공과 실패라는 잣대로 평가될 정도입니다. 우리 삶의 모든 부분이 이 세상에서 인정받는 성공중심주의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이런 사회에서 세례요한은 실패한 인생이 됩니다. 예수의 삶도 역시 실패로 간주될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말하는 실패와 성공은 그렇게 정확한 게 아닙니다. 실패했다고 해서 너무 좌절하지 말고, 성공했다고 해서 크게 자랑할 것도 없습니다. 참된 성공과 실패는 종말론적으로 평가될 겁니다. 이렇게 사는 사람은 현재 당하는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현재 얻는 행운에 도취되지 않습니다. 그 모든 것은 결국 하나님의 생명에 의해서 종말론적으로 평가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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