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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마26:47-5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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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정용섭 목사 |
참고 : | http://dabia.net/xe/38743 |
2006. 8.13.
유다의 배신
인류 역사에서 배신은 늘 반복되어 왔습니다. 사랑하던 사람에게 배신당하는 일은 드라마에 자주 나오는 소재입니다. 친구에게서 배신당하는 일도 가끔 일어납니다. 예수님도 제자인 가룟 유다로부터 배신당하셨습니다. 유다는 예수님에게 무언가 큰 불만이 있었을까요? 아니면 성서기자들이 설명하고 있는 대로 단지 은 30냥이라는 돈에 욕심이 있었을까요? 그리고 예수님은 왜 제자들을 잘 간수하지 못했을까요? 어쨌든지 오늘 본문은 이런 배신이 실현되는 장면에 대한 설명입니다.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고 제자들에게 몇 마디 말씀을 마칠 즈음에 유다가 다가왔습니다. 유다 뒤로는 대사제들과 원로들이 보낸 무장한 사병(私兵)들이 따르고 있었습니다. 유다는 그 병사들과 이미 암호를 짜두었습니다. 자기가 입 맞추는 사람이 바로 예수님이라고 말입니다. 그들의 인사법은 늘 그렇게 뺨을 맞대는 것이기 때문에 입 맞춘다는 게 특별히 이상한 행동은 아닙니다. 유다는 “선생님, 안녕하십니까?” 하고 예수님에게 인사를 드렸습니다. 예수님은 유다를 향해서 “자 이 사람아, 어서 할 일이나 하라.”고 말씀하셨고, 그러자 병사들이 달려들어 예수님을 체포했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에 따르면 예수님이 병사들에게 체포당하시자 “예수와 함께 있던 사람들 중 하나가” 칼을 빼어 대사제의 종의 귀를 쳐서 잘라 버렸다고 합니다. 요한복음 기자는 그를 베드로라고 명시하고 있는데 반해서 공관복음 기자들은 이름을 밝히지 않습니다. 그들은 베드로의 폭력 사건을 직접적으로 거론하기 거북한 사정이 있었겠지요. 어쨌든지 이 사람이 칼을 휘둘렀는데 대사제의 귀를 잘랐다고 합니다. 하필이면 배나 팔도 아니고 귀일까요? 목을 찌르려고 하다가 실수로 귀를 자른 건지, 아니면 처음부터 귀를 목표로 한 건지 불분명합니다. 예수님은 그 제자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아라. 칼을 쓰는 사람은 칼로 망하는 법이다.” 아주 유명한 구절입니다. 이 경구는 그리스도교의 비폭력주의를 강조하는 근거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이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아버지께 청하기만 하면 당장에 열 두 군단도 넘는 천사를 보내 주실 수 있다는 것을 모르느냐? 그러나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반드시 일어나리라고 한 성서의 말씀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 예수님이 기도하셨다면 실제로 이 세상의 악을 징벌할 천사들이 내려왔을까요? 이런 질문은 의미 없습니다. 성서는 역사소설이 아니라 예수님의 정체가 누구인가를 설명하는 신앙고백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과 똑같은 방식이 아니라 전혀 다른 방법으로 구원하신다는 뜻입니다. 사람들은 그걸 인정하기 싫어합니다. 아예 그런 쪽으로 생각하기를 싫어합니다. 힘을 갖고 출세하고, 성공하는 방식으로만 의미 있는 인생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그런 방식으로는 성서의 말씀이 이루어질 수 없다고 말합니다.
예수의 운명?
칼을 휘두른 제자에게 그런 말씀을 하신 다음에 예수님은 자신을 체포한 사람들을 향해서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전에 내가 날마다 성전에 앉아서 가르치고 있을 때에는 나를 잡지 않다가 지금은 칼과 몽둥이를 들고 잡으러 왔으니 내가 강도란 말이냐?”(55절) 이 말씀은 곧 대사제와 유대 원로들을 향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유대교를 허물기 위한 비밀단체를 만들거나 테러를 자행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는 떳떳하게 회당과 성전에서 가르치셨습니다. 드러내 놓고 많은 사람들 앞에서 활동하시던 예수님을 그들은 손도 대지 못하다가 이렇게 아무도 모르는 밤중에 찾아 온 것입니다. 그 당시 최고의 공권력을 갖고 있던 대사제들의 행동은 아주 비열했습니다. “내가 강도란 말이냐?”는 예수님의 말씀은 “당신들이 강도 아니냐?”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부조리한 이 사건을 이렇게 정리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예언자들이 기록한 말씀을 이루려고 일어난 것이다.” 이 말씀이 있은 다음에 제자들은 예수님을 버리고 모두 달아났다고 합니다. 이게 바로 예수님이 마지막 순간에 처한 형편이었습니다. 대사제들은 강도처럼 밤중에 예수님을 체포했으며, 자신의 제자들은 모두 도망갔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예수님은 예언이 성취된 것이라고 설명하셨습니다. 이 말은 곧 그가 자신에게 다가온 불행한 운명을 하나님의 뜻으로 알고 그대로 받아들였다는 의미입니다.
오늘 우리는 아주 어려운 주제를 만났습니다. 만약 예수님에게 일어난 사건을 예언의 성취라고 한다면 결국 그리스도교는 역사결정론과 다를 게 없습니다. 요즘의 생물학적 용어로 만한다면 유전자결정론과 다를 게 없습니다. 과연 예수님의 사건은 예언자들에 의해서 이미 예언된 것이 그대로 실현된 것이며, 더 나아가 우리의 삶도 역시 그런 운명 안에서 놓여 있는 걸까요? 오늘 본문과 함께 이 질문 안으로 들어갑시다.
운명의 짐
우리는 예수님의 체포로부터 시작되는 십자가 처형에 이르는 일련의 상황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에게 죽음이 임박했다는 사실을 어느 정도 눈치 채고 있었을 겁니다. 유대교 고위층들과의 갈등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리라는 걸 예수님이 몰랐을 리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기의 죽음을 암시하는 말씀을 몇 번이나 하셨습니다. 그리고 가룟 유다의 이상한 행동도 예수님의 눈에 들어왔을 겁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무슨 조치를 취해야 하는 것 아니었을까요? 유다를 설득해서 배신을 못하게 하든지, 아니면 유대 고위층의 공격을 피하기 위해 당분한 자리를 피할 수도 있었을 겁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은 그런 시도를 전혀 하지 않으시고 모든 운명을 그대로 받아들였을까요?
우리는 지금 예수님이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실 수밖에 없다는 대답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대답이 과연 옳은가요? 옳다면 왜 옳은가요? 우리는 일단 이렇게 질문해봅시다. 인류 구원이 왜 한 인간의 죽음을 통해서 이루어져야 합니까? 예수님이 죽지 않고 살아서 인류를 구원할 수 있는 길은 전혀 없었을까요? 그 이유는 무엇인가요? 그리고 반드시 십자가의 죽음이어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요? 인간은 십자가로 죽지 않아도 결국 죽습니다. 늙어서도 죽고, 병들어서도 죽고, 사고가 나서도 죽습니다. 왜 십자가의 죽음만 인류 구원의 길이라는 말인가요?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사실은 예수님이 인류 구원을 위해서 일부러 십자가의 죽음을 선택한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향해서 이미 결정된 프로그램을 차근히 밟아간 게 아닙니다. 겟세마네의 기도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는 게 그 반증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의 마음이 괴로워 죽을 지경이 되었다고 호소하면서 자기를 위해서 기도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하시고자만 하시면 무엇이든 다 하실 수 있으시니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소서.”(마 26:39) 예수님은 분명히 십자가의 죽음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십자가의 죽음이 인류 구원의 유일한 길이었다고 한다면 그가 왜 이걸 마다했겠습니까? 예수님은 지금 왜 죽어야 하는지 확신이 없습니다. 그래서 죽음을 피해보고 싶다는 심정으로 기도했습니다.
그 기도의 결론은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 기도가 하나님에게 절대적으로 순종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기도는 그렇게 단순한 것만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뜻과 아버지의 뜻이 여기서 대립해 있습니다. 예수님의 뜻은 십자가를 피해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뜻은 십자가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 순간에 그것이 무엇인지 아직은 드러나지 않았다는 말씀입니다. 이게 바로 예수님이 처해있는 실존입니다. 이 말을 더 밀고 나가보십시오. 예수님은 지금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충분히 알지 못한 채 죽음에 직면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의 정신적인 충격과 혼란이 어떠하리라는 건 짐작이 갑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이렇게 외쳤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 예수님은 이렇게 마지막 숨을 거두기 직전 까지 자신의 운명과 투쟁했습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예수님의 사건이 예언의 성취라는 사실에서 중요한 건 예수님이 감당해야만 했던 삶의 무게입니다. 자신의 영혼을 포기해야 할 정도로 심각하게 다가온 무의미와 두려움과 혼란이 없었다면 예언의 성취라는 건 말장난에 불과합니다.
오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섭리를 편리하게 이용하고 있습니다. “그게 바로 주님의 뜻입니다.”하는 말을 입버릇처럼 되뇌고 있습니다. 모든 삶의 과정이 바로 주님의 뜻이라는 생각이야 틀린 게 아니지만 자신의 감당해야 할 삶의 무게를 회피하는 근거로 그런 말을 하는 게 문제입니다. 공부할 때 공부하지 않고, 노동해야 할 때 노동하지 않으면서 자기의 삶을 합리화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건 숙명주의일 뿐이지 예언의 성취라는 신앙과는 거리가 멉니다.
예수를 뒤따름
여기서 마태복음 기자가 전하는 그 이야기의 뉘앙스를 정확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56절 말씀을 다시 읽겠습니다. 루터성경으로 읽겠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일어났습니다. 이로써 예언서가 성취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의도적으로 예언서의 내용을 성취하기 위해서 그대로 따르신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이 운명주의자가 아니라는 건 앞에서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의 의도, 의지, 생각을 포기하고 오직 하나님 나라에만 집중하셨습니다. 운명을 거슬러 투쟁했지만 예수님은 결국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에 자신의 운명을 걸었습니다.
이것을 별 것 아니라고 생각할 분들이 있을지 모르겠군요. 그렇지 않습니다. 인류 역사에서 오직 한분, 예수 그리스도만이 이렇게 하나님 나라와 일치하셨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그 하나님의 나라, 바로 하나님의 뜻에 자기를 전적으로 의존하고 살았습니다. 예수님의 이런 선택으로 그의 삶에 예언이 성취되었습니다. 그 예언의 성취는 체포와 십자가 처형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부활에까지 이릅니다. 십자가 처형은 하나님의 뜻을 따르려는 예수님의 의지에 따라서 일어난 예언의 성취이지만, 부활은 하나님의 개입에 의해서 일어난 예언의 성취입니다. 이렇게 예수 사건은 우리와 동일했던 예수의 순종과 하나님의 개입을 통해서 일어난 예언의 성취입니다. 이런 점에서 그는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며, 메시아이며, 우리의 구주이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바로 그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와 “예언의 성취”는 어떤 연관이 있습니까? 우리 스스로 예언의 주체가 될 수는 없습니다. 예언의 성취는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해당됩니다. 바로 그 주님이 제자들에게 자신을 따르라고 말씀하셨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그 제자들은 바로 우리를 포함합니다. 즉 우리는 예언의 성취인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잘 생각하십시오. 우리는 단지 예수님의 가르침을 준수하는 게 아니라 예수라는 인격을 따르는 겁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비슷한 고상한 인격을 얻기 위해서, 또는 삶의 정신적인 여유를 얻기 위해서 예수님을 따르는 게 아니라 우리의 운명을 맡기기 위해서 따르는 겁니다.
간혹 어떤 분들은 그리스도교 신앙을 어떤 그리스도교적인 정신을 배우는 것쯤으로 설명합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건 사랑을 실천하는 거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리스도교적인 휴머니즘은 이 세상을 조금 더 인간답게 만들기 위해서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건 그런 도덕심이나 정신적 가치를 확보하는 게 아닙니다. 2천 년 전 우리와 똑같은 조건으로 살았던 한 사람, 예언이 그의 삶에 성취된 한 사람에게 우리의 운명을 맡기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간접적으로 예언의 성취와 연결됩니다. 이렇게 우리는 간접적으로 진리와 연결됩니다.
예수님을 따른다고 해서 현재 우리에게 어떤 확실한 것이 보장되지는 않습니다. 예수님이 배신당하고, 체포당한 것처럼 우리의 삶이 불안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고, 그 뜻에 철저하게 순종한 것처럼, 그래서 결국 예언의 성취가 일어난 것처럼 예수님을 신뢰하고 따른다면, 그리고 그 약속을 믿는다면 여러분에게 예언의 말씀들이 성취될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말입니다. 이미 예수님의 삶에서 성취되었고, 그를 통해서 우리도 참여하게 될 그 예언의 말씀은 구원, 생명, 영원한 생명, 부활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교 신앙의 초석입니다. 아멘.
유다의 배신
인류 역사에서 배신은 늘 반복되어 왔습니다. 사랑하던 사람에게 배신당하는 일은 드라마에 자주 나오는 소재입니다. 친구에게서 배신당하는 일도 가끔 일어납니다. 예수님도 제자인 가룟 유다로부터 배신당하셨습니다. 유다는 예수님에게 무언가 큰 불만이 있었을까요? 아니면 성서기자들이 설명하고 있는 대로 단지 은 30냥이라는 돈에 욕심이 있었을까요? 그리고 예수님은 왜 제자들을 잘 간수하지 못했을까요? 어쨌든지 오늘 본문은 이런 배신이 실현되는 장면에 대한 설명입니다.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고 제자들에게 몇 마디 말씀을 마칠 즈음에 유다가 다가왔습니다. 유다 뒤로는 대사제들과 원로들이 보낸 무장한 사병(私兵)들이 따르고 있었습니다. 유다는 그 병사들과 이미 암호를 짜두었습니다. 자기가 입 맞추는 사람이 바로 예수님이라고 말입니다. 그들의 인사법은 늘 그렇게 뺨을 맞대는 것이기 때문에 입 맞춘다는 게 특별히 이상한 행동은 아닙니다. 유다는 “선생님, 안녕하십니까?” 하고 예수님에게 인사를 드렸습니다. 예수님은 유다를 향해서 “자 이 사람아, 어서 할 일이나 하라.”고 말씀하셨고, 그러자 병사들이 달려들어 예수님을 체포했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에 따르면 예수님이 병사들에게 체포당하시자 “예수와 함께 있던 사람들 중 하나가” 칼을 빼어 대사제의 종의 귀를 쳐서 잘라 버렸다고 합니다. 요한복음 기자는 그를 베드로라고 명시하고 있는데 반해서 공관복음 기자들은 이름을 밝히지 않습니다. 그들은 베드로의 폭력 사건을 직접적으로 거론하기 거북한 사정이 있었겠지요. 어쨌든지 이 사람이 칼을 휘둘렀는데 대사제의 귀를 잘랐다고 합니다. 하필이면 배나 팔도 아니고 귀일까요? 목을 찌르려고 하다가 실수로 귀를 자른 건지, 아니면 처음부터 귀를 목표로 한 건지 불분명합니다. 예수님은 그 제자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아라. 칼을 쓰는 사람은 칼로 망하는 법이다.” 아주 유명한 구절입니다. 이 경구는 그리스도교의 비폭력주의를 강조하는 근거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이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아버지께 청하기만 하면 당장에 열 두 군단도 넘는 천사를 보내 주실 수 있다는 것을 모르느냐? 그러나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반드시 일어나리라고 한 성서의 말씀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 예수님이 기도하셨다면 실제로 이 세상의 악을 징벌할 천사들이 내려왔을까요? 이런 질문은 의미 없습니다. 성서는 역사소설이 아니라 예수님의 정체가 누구인가를 설명하는 신앙고백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과 똑같은 방식이 아니라 전혀 다른 방법으로 구원하신다는 뜻입니다. 사람들은 그걸 인정하기 싫어합니다. 아예 그런 쪽으로 생각하기를 싫어합니다. 힘을 갖고 출세하고, 성공하는 방식으로만 의미 있는 인생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그런 방식으로는 성서의 말씀이 이루어질 수 없다고 말합니다.
예수의 운명?
칼을 휘두른 제자에게 그런 말씀을 하신 다음에 예수님은 자신을 체포한 사람들을 향해서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전에 내가 날마다 성전에 앉아서 가르치고 있을 때에는 나를 잡지 않다가 지금은 칼과 몽둥이를 들고 잡으러 왔으니 내가 강도란 말이냐?”(55절) 이 말씀은 곧 대사제와 유대 원로들을 향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유대교를 허물기 위한 비밀단체를 만들거나 테러를 자행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는 떳떳하게 회당과 성전에서 가르치셨습니다. 드러내 놓고 많은 사람들 앞에서 활동하시던 예수님을 그들은 손도 대지 못하다가 이렇게 아무도 모르는 밤중에 찾아 온 것입니다. 그 당시 최고의 공권력을 갖고 있던 대사제들의 행동은 아주 비열했습니다. “내가 강도란 말이냐?”는 예수님의 말씀은 “당신들이 강도 아니냐?”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부조리한 이 사건을 이렇게 정리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예언자들이 기록한 말씀을 이루려고 일어난 것이다.” 이 말씀이 있은 다음에 제자들은 예수님을 버리고 모두 달아났다고 합니다. 이게 바로 예수님이 마지막 순간에 처한 형편이었습니다. 대사제들은 강도처럼 밤중에 예수님을 체포했으며, 자신의 제자들은 모두 도망갔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예수님은 예언이 성취된 것이라고 설명하셨습니다. 이 말은 곧 그가 자신에게 다가온 불행한 운명을 하나님의 뜻으로 알고 그대로 받아들였다는 의미입니다.
오늘 우리는 아주 어려운 주제를 만났습니다. 만약 예수님에게 일어난 사건을 예언의 성취라고 한다면 결국 그리스도교는 역사결정론과 다를 게 없습니다. 요즘의 생물학적 용어로 만한다면 유전자결정론과 다를 게 없습니다. 과연 예수님의 사건은 예언자들에 의해서 이미 예언된 것이 그대로 실현된 것이며, 더 나아가 우리의 삶도 역시 그런 운명 안에서 놓여 있는 걸까요? 오늘 본문과 함께 이 질문 안으로 들어갑시다.
운명의 짐
우리는 예수님의 체포로부터 시작되는 십자가 처형에 이르는 일련의 상황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에게 죽음이 임박했다는 사실을 어느 정도 눈치 채고 있었을 겁니다. 유대교 고위층들과의 갈등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리라는 걸 예수님이 몰랐을 리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기의 죽음을 암시하는 말씀을 몇 번이나 하셨습니다. 그리고 가룟 유다의 이상한 행동도 예수님의 눈에 들어왔을 겁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무슨 조치를 취해야 하는 것 아니었을까요? 유다를 설득해서 배신을 못하게 하든지, 아니면 유대 고위층의 공격을 피하기 위해 당분한 자리를 피할 수도 있었을 겁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은 그런 시도를 전혀 하지 않으시고 모든 운명을 그대로 받아들였을까요?
우리는 지금 예수님이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실 수밖에 없다는 대답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대답이 과연 옳은가요? 옳다면 왜 옳은가요? 우리는 일단 이렇게 질문해봅시다. 인류 구원이 왜 한 인간의 죽음을 통해서 이루어져야 합니까? 예수님이 죽지 않고 살아서 인류를 구원할 수 있는 길은 전혀 없었을까요? 그 이유는 무엇인가요? 그리고 반드시 십자가의 죽음이어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요? 인간은 십자가로 죽지 않아도 결국 죽습니다. 늙어서도 죽고, 병들어서도 죽고, 사고가 나서도 죽습니다. 왜 십자가의 죽음만 인류 구원의 길이라는 말인가요?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사실은 예수님이 인류 구원을 위해서 일부러 십자가의 죽음을 선택한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향해서 이미 결정된 프로그램을 차근히 밟아간 게 아닙니다. 겟세마네의 기도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는 게 그 반증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의 마음이 괴로워 죽을 지경이 되었다고 호소하면서 자기를 위해서 기도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하시고자만 하시면 무엇이든 다 하실 수 있으시니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소서.”(마 26:39) 예수님은 분명히 십자가의 죽음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십자가의 죽음이 인류 구원의 유일한 길이었다고 한다면 그가 왜 이걸 마다했겠습니까? 예수님은 지금 왜 죽어야 하는지 확신이 없습니다. 그래서 죽음을 피해보고 싶다는 심정으로 기도했습니다.
그 기도의 결론은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 기도가 하나님에게 절대적으로 순종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기도는 그렇게 단순한 것만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뜻과 아버지의 뜻이 여기서 대립해 있습니다. 예수님의 뜻은 십자가를 피해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뜻은 십자가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 순간에 그것이 무엇인지 아직은 드러나지 않았다는 말씀입니다. 이게 바로 예수님이 처해있는 실존입니다. 이 말을 더 밀고 나가보십시오. 예수님은 지금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충분히 알지 못한 채 죽음에 직면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의 정신적인 충격과 혼란이 어떠하리라는 건 짐작이 갑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이렇게 외쳤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 예수님은 이렇게 마지막 숨을 거두기 직전 까지 자신의 운명과 투쟁했습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예수님의 사건이 예언의 성취라는 사실에서 중요한 건 예수님이 감당해야만 했던 삶의 무게입니다. 자신의 영혼을 포기해야 할 정도로 심각하게 다가온 무의미와 두려움과 혼란이 없었다면 예언의 성취라는 건 말장난에 불과합니다.
오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섭리를 편리하게 이용하고 있습니다. “그게 바로 주님의 뜻입니다.”하는 말을 입버릇처럼 되뇌고 있습니다. 모든 삶의 과정이 바로 주님의 뜻이라는 생각이야 틀린 게 아니지만 자신의 감당해야 할 삶의 무게를 회피하는 근거로 그런 말을 하는 게 문제입니다. 공부할 때 공부하지 않고, 노동해야 할 때 노동하지 않으면서 자기의 삶을 합리화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건 숙명주의일 뿐이지 예언의 성취라는 신앙과는 거리가 멉니다.
예수를 뒤따름
여기서 마태복음 기자가 전하는 그 이야기의 뉘앙스를 정확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56절 말씀을 다시 읽겠습니다. 루터성경으로 읽겠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일어났습니다. 이로써 예언서가 성취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의도적으로 예언서의 내용을 성취하기 위해서 그대로 따르신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이 운명주의자가 아니라는 건 앞에서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의 의도, 의지, 생각을 포기하고 오직 하나님 나라에만 집중하셨습니다. 운명을 거슬러 투쟁했지만 예수님은 결국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에 자신의 운명을 걸었습니다.
이것을 별 것 아니라고 생각할 분들이 있을지 모르겠군요. 그렇지 않습니다. 인류 역사에서 오직 한분, 예수 그리스도만이 이렇게 하나님 나라와 일치하셨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그 하나님의 나라, 바로 하나님의 뜻에 자기를 전적으로 의존하고 살았습니다. 예수님의 이런 선택으로 그의 삶에 예언이 성취되었습니다. 그 예언의 성취는 체포와 십자가 처형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부활에까지 이릅니다. 십자가 처형은 하나님의 뜻을 따르려는 예수님의 의지에 따라서 일어난 예언의 성취이지만, 부활은 하나님의 개입에 의해서 일어난 예언의 성취입니다. 이렇게 예수 사건은 우리와 동일했던 예수의 순종과 하나님의 개입을 통해서 일어난 예언의 성취입니다. 이런 점에서 그는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며, 메시아이며, 우리의 구주이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바로 그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와 “예언의 성취”는 어떤 연관이 있습니까? 우리 스스로 예언의 주체가 될 수는 없습니다. 예언의 성취는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해당됩니다. 바로 그 주님이 제자들에게 자신을 따르라고 말씀하셨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그 제자들은 바로 우리를 포함합니다. 즉 우리는 예언의 성취인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잘 생각하십시오. 우리는 단지 예수님의 가르침을 준수하는 게 아니라 예수라는 인격을 따르는 겁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비슷한 고상한 인격을 얻기 위해서, 또는 삶의 정신적인 여유를 얻기 위해서 예수님을 따르는 게 아니라 우리의 운명을 맡기기 위해서 따르는 겁니다.
간혹 어떤 분들은 그리스도교 신앙을 어떤 그리스도교적인 정신을 배우는 것쯤으로 설명합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건 사랑을 실천하는 거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리스도교적인 휴머니즘은 이 세상을 조금 더 인간답게 만들기 위해서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건 그런 도덕심이나 정신적 가치를 확보하는 게 아닙니다. 2천 년 전 우리와 똑같은 조건으로 살았던 한 사람, 예언이 그의 삶에 성취된 한 사람에게 우리의 운명을 맡기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간접적으로 예언의 성취와 연결됩니다. 이렇게 우리는 간접적으로 진리와 연결됩니다.
예수님을 따른다고 해서 현재 우리에게 어떤 확실한 것이 보장되지는 않습니다. 예수님이 배신당하고, 체포당한 것처럼 우리의 삶이 불안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고, 그 뜻에 철저하게 순종한 것처럼, 그래서 결국 예언의 성취가 일어난 것처럼 예수님을 신뢰하고 따른다면, 그리고 그 약속을 믿는다면 여러분에게 예언의 말씀들이 성취될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말입니다. 이미 예수님의 삶에서 성취되었고, 그를 통해서 우리도 참여하게 될 그 예언의 말씀은 구원, 생명, 영원한 생명, 부활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교 신앙의 초석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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