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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창11: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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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이정원 목사 |
참고 : | 참사랑교회 http://charmjoun.net |
2003·07·19
이 세상에서 가장 신기하고 오묘하고 복잡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사람입니다. 사람은 대단히 복잡하고 신기하며 오묘하고 탁월한 존재입니다. 이 세상의 그 무엇도 사람과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사람들 자신이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스스로를 만물의 영장이라고 부릅니다. 좀 더 심한 경우에는 사람이 곧 신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는가 하면, 사람은 신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실제로 자신이 신이라고 주장하는 인간들도 적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상이야말로 인간의 교만의 극치를 나타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상이며, 자신이 스스로 하나님 노릇을 하려는 시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가장 큰 죄로 여기십니다.
사람이 탁월하고 오묘한 존재인 것은 사실입니다. 성경은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사람은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는 사실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더구나 사람은 타락한 이후로 죄를 가진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 죄는 사람을 멸망으로 이끌어갑니다. 이 죄 때문에 인간은 가장 탁월하고 아름답고 오묘한 존재에서 가장 추하고 악하고 비참한 존재로 전락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아는 사람은 함부로 교만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절실하고 귀한 줄을 압니다. 그래서 겸손하게 하나님을 섬기며 그 분의 말씀을 따라 살기를 원합니다. 그렇게 살면 사람은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죄를 이기고 본래의 존귀하고 탁월한 존재로서 살아가게 됩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면 자신이 소망 없는 죄인임을 인정하십니까?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살 수도 없고 영원히 멸망당할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시인하십니까? 이러한 성도는 복이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는 사람이 하나님을 거역하고 대적하며 심지어는 하나님의 자리에까지 올라가려고 했던 사건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바벨탑 사건입니다.
홍수심판 이후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선하게 창조하셨으나 인간이 타락한 이후로 죄가 세상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이 죄는 갈수록 퍼지고 심해져서 마침내 세상에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홍수로 세상을 심판하셨습니다. 홍수 이후 하나님께서는 다시는 세상을 홍수로 심판하시지 않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람에게 땅에서 번성하여 충만하라고 축복해주셨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안심하고 다시 세상에서 번창해갔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퍼져가면서 이들에게는 다시 불신앙이 스며들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다시는 세상을 홍수로 심판하시지 않을 것이며, 언젠가 구주를 보내실 것이라는 언약을 더 이상 믿지 않았습니다. 이 불신앙은 곧 두려움으로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약속을 불신한 사람들은 서로 흩어지는 것과 다시금 홍수로 세상이 멸망당하게 될 것이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한 곳에 모여 홍수에도 끄떡없을 만한 높은 성을 쌓고, 흩어지지 말고 함께 살기로 했습니다. 사람들의 이러한 생각은 하나님의 자비로우신 약속을 불신한 결과였으며,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하나님의 축복된 명령을 정면으로 거역하는 것이었습니다. 더 나아가서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이름을 높임으로써 하나님을 배척하고 대적하려 했습니다. 그렇게 되면 사람은 다시 멸망을 당할 수밖에 없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언어를 혼잡케 하심으로 사람들의 도모를 저지시키셨고, 그들을 강제로 흩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바벨탑 사건입니다. 바벨탑 사건은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도전과 교만이었고, 하나님 없이 인간들이 스스로 하나님 행세를 하려는 극단적인 인본주의적 사건이었습니다.
불신앙과 두려움
노아의 방주가 머물렀던 아라랏 산으로부터 인류는 다시 번성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정착하기에 좋은 곳을 찾아 동쪽으로 이동해갔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시날 평지에 정착하기로 했습니다(2절). 그들은 서로 떨어지는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흩어졌다가 땅에서 영영 사라져버리는 것은 아닐까? 흩어졌다가 생소해지게 되면 서로 싸우고 죽이는 일이 일어나지는 않을까? 뭉쳐 있으면 어떠한 재난이 와도 함께 대처할 수 있을 것인데 괜히 흩어졌다가 힘없이 재난을 당해 죽지는 않을까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곳 시날 평지에 모여서 큰 성을 쌓고 함께 살기로 했습니다.
이러한 두려움이 어디서 왔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신실하신 언약을 불신하는 데서 왔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지 못하고 하나님의 은혜로우시고 자비로우심을 믿지 못하면 수많은 두려움에 시달릴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구원해주셨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면 죽음과 내세가 두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고 가장 선한 길로 인도해주신다는 것을 믿지 못하면 어려운 일을 당할 때 두려워하고 낙심하게 됩니다. 불신앙은 이렇게 어리석고 해로운 것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는 사람은 진정한 평안을 누릴 수 없습니다. 당신은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께서 당신을 사랑하시며 선하게 인도하심을 의심없이 믿습니까? 아무리 상황이 어렵고 앞길이 막막해도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나를 위한 선하시고 아름다우신 계획을 믿습니까? 이런 믿음을 가지고 있는 성도는 어떤 경우에도 낙심하거나 불안해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이런 성도는 주님께서 주시는 평안을 온전히 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비로우심과 은혜 베푸심과 그 신실하신 말씀을 굳게 믿고 언제나 참된 평안을 누리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획기적인 발명품 - 벽돌
사람들은 방주가 머물렀던 아라랏 산에서 동쪽으로 옮겨가다가 시날 평지에 이르자 거기서 정착하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사람들은 획기적인 물건을 발명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인류의 역사에 일대 혁명을 가져오게 된 벽돌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벽돌을 발명한 것은 현대에 컴퓨터를 발명한 것 이상으로 혁명적인 일이었습니다. 벽돌이 뭐가 그렇게 대단한 것이냐구요? 그 때까지 사람들에게는 집을 짓는 일이 가장 애로사항이었습니다. 나무나 풀은 너무 약해서 쉽게 망가지고 비를 가리기에 충분하지 못했습니다. 돌은 너무 무겁고 다듬지 않으면 별로 쓸모가 없었습니다. 또 높이 쌓아올릴 수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벽돌을 발명하고 벽돌로 집 짓는 기술이 개발되면서 사람들은 비로소 건물다운 건물을 지을 수가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시날 평지에는 벽돌을 구울 수 있는 흙이 얼마든지 있었고, 벽돌을 견고하게 쌓을 수 있는 역청도 많았습니다. 흙을 원하는 모양으로 만들어 구워내기만 하면 돌처럼 단단해졌습니다. 그리고 역청으로 연결해나가면서 쌓으면 얼마든지 크고 높은 건물을 만들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벽돌을 만들게 되었다는 것은 가히 혁명적인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부터 사람들은 아름답고 견고한 집을 짓고 편안하게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큰 성과 대를 쌓기로 했습니다.
탑을 쌓는 이유
사람들이 벽돌을 만들어 견고하고 좋은 집을 짓고 편안하게 사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벽돌을 만들게 되면서 사람들은 엉뚱한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자, 성과 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4절) 여기에는 하나님을 무시하고 인간의 영광을 한껏 드러내며, 인간 스스로 하나님의 자리에 앉겠다는 극단적인 불신앙과 인본주의적인 생각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성을 쌓기로 한 것은 편안하게 살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성과 대를 쌓아 하늘에 닿게 하자고 했습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의 간섭을 받지 않고 자기들 마음대로 살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지금까지 사람들은 감히 하나님을 거부하거나 하나님께 도전하려는 생각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벽돌을 만들게 되면서 그들의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이제는 우리도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 하나님 없이도 얼마든지 살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그들은 벽돌로 완벽하고 높은 탑을 쌓아 하나님을 몰아내고 간섭하지 못하시게 할 작정이었습니다. 바벨탑을 쌓은 것은 하나님께 대한 도전이었으며, 하나님을 자기들의 삶 속에서 몰아내고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성을 높이 쌓기로 한 또 하나의 이유는 자기들의 이름을 내기 위해서였습니다. 사람이 창조된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높이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타락한 이후 사람은 자기의 이름을 높이고 찬양하고자 하는 욕구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자신을 하나님의 자리에 올려놓는 일입니다. 그 대표적인 것을 우리는 북한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토록 아름다운 금강산에는 "위대한 수령 민족의 지도자 김일성 장군 만세"와 같은 문구들이 여기저기 새겨져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경향은 우리에게도 있습니다. 언젠가 산에 갔다가 사람들이 자기 이름을 새겨놓은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이렇게 자기 이름을 높이려는 시도는 산에서만 볼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사람들이 모여 사는 사회에서 이런 현상이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요즘에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것은 매스컴에 자기 이름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떻게 해서든지 높은 자리에 앉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위해서 많은 돈을 내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하나님을 섬기려고 하기보다는 자기 이름을 높이기 원합니다. 처음에 어렵고 비천할 때는 그렇지 않았는데, 좀 출세를 하고 살만 해지면 여지없이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교만해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기 이름을 높이려는 극단적인 시도는 인간이 스스로 신을 자처하는 데까지 나아갔습니다. 애굽의 왕들과 로마의 황제들은 스스로를 신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바벨탑을 쌓고자 한 것은 이렇게 사람들이 하나님을 무시하고 자기들의 이름을 높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또 높은 탑을 쌓아 흩어짐을 면하자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그 약속을 믿지 않게 되자 사람들에게는 두려움과 불안이 찾아왔습니다. 그래서 흩어지는 것을 두려워하게 된 것입니다. 함께 뭉쳐서 살면 어려움이 와도 함께 대처할 수 있을 것입니다. 따로 흩어져 살면 불안하지만 함께 있으면 안심이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사람이 함께 모여서 서로 사랑하고 의지하며 사는 것은 나쁜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정면으로 거역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하시고 그들에게 축복하시면서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함께 모여 살면서 흩어지지 말자고 했습니다. 지금도 사람들은 함께 뭉쳐 어떤 세력을 형성하기를 좋아합니다. 그래서 정당을 만들고, 무슨 협회를 만들고, 노동조합을 만들었습니다. 유엔이나 경제 블럭 같은 것을 만들었습니다. 이런 모든 것들은 흩어지지 말고 한데 뭉쳐 세력을 만들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야 힘이 생기고 안심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만들어진 단체와 세력들은 철저하게 자기들의 이익을 추구합니다. 그리고 자기들과 반대입장에 있는 사람들을 공격합니다. 이런 것들 때문에 우리 사회는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바벨탑을 쌓던 사람들의 생각과 통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사람들이 함께 모이고 뭉치지 않으면 두려워하고 불안해할까요? 그것은 하나님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기 때문에 자기들끼리 뭉쳐서 세력을 만들고 스스로를 보호하겠다는 것입니다. 바벨탑을 쌓으려 했던 것은 하나님을 거역한 인간의 죄악된 시도였습니다.
여호와의 강림
사람들이 높은 탑을 쌓으려고 했던 이유는 이렇게 하나님을 거부하고 하나님께 도전하는 것이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이 아니라 자기들의 이름을 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쌓는 성과 대를 보시려고 강림하셨습니다(5절). 이 말씀은 좀 이상한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너무 높고 멀어서 잘 보실 수가 없기 때문에 직접 보시려고 땅으로 내려오셨다는 말처럼 들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전능하셔서 어디서나 인간의 모든 행위과 생각을 완전하게 감찰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특별히 강림하셨다고 할 때는 직접 그 일에 개입하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강림하시는 것은 죄인들을 심판하시기 위한 것과, 믿음의 사람들에게 특별한 은혜와 축복을 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강림하신 것은 무엇을 위해서였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바벨탑을 쌓은 사람들을 심판하시는 것이 마땅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심판하시지 않았습니다. 사실 본문의 상황은 다시금 노아 때와 같이 홍수심판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다시는 세상을 그렇게 심판하시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심판하시는 대신 바벨탑을 쌓으려는 그들의 시도를 좌절시키시고 그들을 흩으셨습니다.
6절에도 이상한 말씀이 나옵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 무리가 한 족속이요 언어도 하나이므로 이같이 시작하였으니 이후로는 그 경영하는 일을 금지할 수 없으리로다" 이 말씀은 가만히 놔두면 사람들의 세력이 커지고 강해져 하나님께서 더 이상 그들을 통제하실 수 없게 될 것이라는 의미처럼 드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전능하시기 때문에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은 무슨 뜻일까요?
하나님께서는 무지개 언약을 통하여 마지막 심판 때까지 다시는 온 인류를 멸망시키지 않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지금 멸망을 자초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이대로 방치해두면 멸망을 당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서 어떤 조치를 취하셔야만 했습니다. 인류가 다시 멸망을 당하지 않고 마지막 심판 때까지 보존되려면 사람들이 지금 하고 있는 일을 막아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언어를 혼잡케 하셨습니다. 말이 통하지 않게 된 사람들은 더 이상 공사를 계속할 수가 없게 되었으며, 말이 통하는 사람들끼리 흩어지게 되었습니다(7-8절). 그래서 그들의 시도가 좌절되었지만, 사실은 세상이 멸망을 면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피조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께 의존하여 살도록 만드셨습니다. 그렇게 살 때 사람은 탁월하고 오묘하며 존귀한 존재가 될 수 있습니다. 사람은 결코 독립적인 존재가 아닙니다. 그런데 타락한 인간은 이것을 싫어합니다. 하나님을 떠나 독립하기를 원합니다. 자기가 원하는 대로 살고 싶어합니다. 마음대로 죄도 짓고 쾌락을 즐기며 살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부인하고 대적하고 거역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지 않고 자기의 이름을 높이 드러내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만입니다. 이것이 인본주의입니다. 이것이 바벨탑의 정신입니다. 여기서 인간의 모든 불행과 문제가 생깁니다. 이것 때문에 사람은 하나님의 심판을 당하게 됩니다.
혹시 오늘 우리 안에 바벨탑의 정신이 남아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을 배척하고 떠나서 내 마음대로 살려고 하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을 높이기보다는 나 자신이 높아지고자 하지는 않습니까? 이렇게 사는 사람들은 결코 성공할 수 없고 평안할 수 없으며 진정한 만족을 얻을 수 없습니다. 결국 비참하게 멸망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당신은 오직 하나님만을 온전히 의지하며 겸손하게 그 분의 은혜를 사모하는 믿음으로 사시기를 바랍니다. 오직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이런 성도는 하나님께서 인정하시고 은혜를 주시며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실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이번 여름에 영적인 휴가나 방학을 계획하고 있는 성도는 안 계실 줄로 압니다. 덥고 힘들다고 해서 신앙생활의 방학을 가지게 되면 사탄에게 공격을 당하기 십상입니다. 우리는 온 세상이 홍수로 멸망을 당할 때 그 홍수심판을 이겨낸 믿음의 거장 노아가 방심하여 매우 부끄럽고 후회스런 실수를 범하게 된 것을 보았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번 여름에는 휴가를 가지 마시라는 것은 아닙니다. 이제 휴가철이 되어 여러 가지 계획들을 가지고 계실 것입니다. 이 시점에서 한 가지 긴급제안을 드리고 싶습니다.
이번에 휴가를 떠나시거든 반드시 하나님을 새롭게 느끼고 발견하고 만나는 기회로 삼으시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동안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자연계를 접할 기회가 너무 없었습니다. 이렇게 도시에서 생활하는 분들은 더욱 그렇습니다. 사람들이 콘크리트와 아스팔트로 온통 땅을 뒤덮어 놓았기 때문에 흙을 밟아 본 적이 언제였는지 알 수도 없을 지경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콘크리트 빌딩 숲에서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동안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들보다는 인간들이 만든 것들 속에서 살아왔습니다. 이러한 환경에서는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기가 어렵습니다. 이제 휴가를 떠나시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자연을 맘껏 즐기실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아무 생각 없이 먹고 마시는 휴가가 되지 말고, 자연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을 묵상하는 기회가 되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하시면 하나님을 새롭게 만나는 은혜로운 휴가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육신과 영혼이 아울러 회복되는 휴가가 되시기 바랍니다.
언어의 혼잡
미국에 유학가서 학위를 받고 돌아온 분이 영어가 너무나도 어렵다고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우리 같은 사람들이 그런 말을 하면 수긍이 되지만 외국에서 오래 살면서 공부하여 학위까지 받은 사람들이 그런 말을 하는 것은 참 수긍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만큼 외국어는 배우기 힘듭니다. 요즘은 누구나 외국어를 한 두 개는 구사할 수 있어야 하는 세계화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외국어를 습득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피곤한 일입니까? 요즘은 초등학교, 아니 유치원 때부터 영어를 배웁니다. 요즘 대학생들은 일년 정도의 외국어 해외연수는 기본입니다. 그런데도 외국어는 어렵기만 합니다. 외국어의 장벽만 아니라면 공부하기가 얼마나 수월할까 하는 생각을 해 본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처음에는 인류의 언어가 하나였습니다. "온 땅의 구음이 하나이요 언어가 하나이었더라"(1절) 얼마나 편리했겠습니까? 외국어를 배울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쩌다 이렇게 된 것일까요? 원래 하나였던 언어가 이렇게 복잡하게 나뉜 것은 바벨탑 사건 때문이었습니다. 바벨탑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배척하고 자기들 마음대로 살겠다는 시도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지음 받은 인간이 자기들의 이름을 높이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더 나아가서 사람들은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하나님의 축복된 명령을 거역하고 흩어지지 말고 함께 모여서 살자고 했습니다. 그들은 흩어지는 것을 두려워했고, 홍수로 세상이 다시 멸망당하지 않을까 두려워했습니다. 그래서 높은 성과 대를 쌓고 함께 살기로 했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고 그 말씀을 믿지 않으면 이렇게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이렇게 하나님을 거역하고 대적하는 길로 나가면 멸망을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사람들이 바벨탑을 쌓는 공사현장에 강림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의 언어를 혼잡케 하셔서 그들을 흩어지게 하셨습니다. 이렇게 해서 바벨탑을 쌓으려는 그들의 시도는 좌절되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인류의 언어는 이처럼 다양하고 복잡하게 되었습니다.
현대의 바벨탑
바벨탑은 하나님을 배척하고 인간의 이름을 높이고자 하는 인본주의의 극치를 보여주는 사건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벨탑을 쌓는 현장에 강림하셔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케 하심으로 그들이 하고자 하는 일을 저지시키셨습니다. 사람들은 자기들의 목표를 이루지 못하고 흩어졌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크신 은혜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멸망을 자초하는 사람들의 일을 좌절시키심으로 그들이 멸망을 당하지 않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사방으로 흩어지게 하심으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축복, 즉"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는 말씀이 이루어지게 하셨습니다. 그렇게 해서 인류는 멸망을 당하지 않고 온 땅에 흩어져서 계속 번성해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후로도 인류는 계속해서 바벨탑을 쌓아왔습니다. 특히 현대에 와서는 이 바벨탑이 절정에 다다른 느낌이 듭니다. 마침내 인류는 하늘에 닿는 성과 대를 쌓은 것입니다. 사람들은 도시를 건설하고 크고 높은 건물들을 많이 지었습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온갖 기술과 문명을 발전시켜왔습니다. 교통과 통신이 급속도로 발전하여 세계는 한층 가까워졌습니다. 그래서 지구촌이라는 말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편리하고 놀라운 세상이 되었습니까? 그야말로 인간은 못하는 것이 없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이 인류를 보다 인간답게, 그리고 행복하게 만들 수 있을까요? 결코 그렇지 못합니다. 오히려 현대인들은 그들이 쌓은 바벨탑 때문에 비인간화되고 메말라가게 되었습니다. 현대인들은 그들이 만들어 놓은 바벨탑에 갇히게 된 것입니다. 아무리 문명이 발달하고 생활이 편리해져도 그것으로 죄의 문제가 해결될 수는 없습니다. 죄의 문제가 해결되지 못하면 인간은 결코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바벨탑 탈출하기
특히 도시 사람들은 온 세상이 콘크리트와 아스팔트로 도배된 가운데 땅이라고는 밟아보지도 못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바벨탑 속에서 사는 사람들은 마음이 지치고 강퍅해졌으며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바벨탑 속에 살기 때문에 하나님을 느끼며 은혜를 체험하는 일이 그만큼 어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모든 것이 온통 인간이 만들어 낸 것들인데 어디서 하나님의 솜씨와 은혜를 발견할 수 있겠습니까? 어디서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며 감동을 받을 수가 있겠습니까?
요즘에 우리 아이들이 좋아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산과 바다와 자연의 세계를 좋아합니까? 들꽃과 새소리를 좋아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놀이공원에서 기구타는 것을 좋아합니다. 게임하기를 좋아하고 가수들의 노래 따라 부르기를 좋아합니다. 인간이 만든 바벨탑이 일찌감치 우리 아이들을 사로잡아 버리고 있습니다. 그런 것들을 즐기면서 우리 어린이들이 무엇을 생각하겠습니까?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을 느낄 수가 있겠습니까? 그렇지 못합니다. 청소년들이나 어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바벨탑 속에 갇혀 인간성이 왜곡되고 하나님에 대해서 둔해져가고 있습니다.
고단하고 분주한 가운데서도 간혹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자연으로 눈길을 돌리도록 하십시오. 하늘과 나무와 풀과 새들을 보면서 하나님을 생각하십시오. 형편이 허락된다면 산과 들과 바다에 나가 하나님의 손길을 느껴보십시오. 그리고 매일의 삶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당신을 어루만지시고 인도하시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내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기억하고, 하나님의 자녀답게 사람들을 대하고 일들을 처리하도록 하십시오. 하나님 말씀 묵상하기를 게을리 하지 마십시오. 이렇게 하나님을 바라보는 가운데 당신의 삶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 되도록 하십시오. 이렇게 살면 우리는 현대의 바벨탑에 갇히지 않고 하나님 백성으로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언어가 다시 통일됨
처음에는 모든 인류가 하나의 언어를 사용했습니다. 얼마나 편리하고 좋았겠습니까? 그러나 죄 때문에 언어가 혼잡케 되어 오늘처럼 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혼잡해진 언어가 통일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준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사도행전의 오순절 성령강림 때 일어났습니다. 오순절에 성령께서 강림하시자 제자들은 성령의 충만을 받고 방언을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방언으로 설교할 때 세계 각국에서 모여든 사람들은 사도들의 설교를 각각 자기들이 살고 있는 나라말로 듣게 되었습니다. "다 놀라 기이히 여겨 이르되 보라 이 말하는 사람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의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찜이뇨 우리는 바대인과 메대인과 엘림인과 또 메소보다미아, 유대와 가바도기아, 본도와 아시아, 브루기아와 밤빌리아, 애굽과 및 구레네에 가까운 리비야 여러 지방에 사는 사람들과 로마로부터 온 나그네 곧 유대인과 유대교에 들어 온 사람들과 그레데인과 아라비아인들이라 우리가 다 우리의 각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하고"(행2:7-11)
이 사건이 보여주는 것이 무엇입니까? 성령께서 임하시면 이렇게 혼잡해지고 복잡해진 우리의 언어가 다시금 통일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죄로 인해 혼잡해진 것을 성령께서 회복시키시고 통일시키신다는 것입니다. 장차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될 것인데, 거기서 인류의 언어는 완전히 통일될 것입니다.
회복의 역사
성령께서는 언어의 혼잡만이 아니라 우리의 모든 갈등과 대립과 분열을 치유하십니다. 사람들이 싸우고 대립하며 갈등을 겪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죄 때문입니다. 죄는 가장 가까운 부부 사이에도 갈등과 대립이 생기게 만듭니다. 부모와 자식 사이에도, 친구와 친구 사이에도, 심지어는 성도들 사이에도 문제와 갈등이 생기게 합니다. 처음에는 좋은 의도를 가지고 시작한 일도 서로 싸우며 상처를 주고받으면서 끝내는 경우가 많습니다. 본심은 그렇지 않은데 대화를 하다보면 이상하게 말이 통하지 않고 오히려 갈등의 골이 깊어지는 것을 경험한 적이 많을 것입니다. 왜 그렇게 될까요? 그것은 우리 안에 있는 죄 때문입니다.
이러한 모든 갈등과 문제들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요? 우리 안에 성령께서 충만하게 임하셔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성령으로 충만해지면 마음이 통하게 되고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부부 사이의 갈등과 부모 자식간의 문제, 성도 사이의 모든 불편한 것들이 치유되는 것입니다. 죄가 가져온 분쟁과 갈등을 성령께서 회복시켜 주십니다. 오늘 우리 가운데 성령으로 인한 이러한 회복의 역사가 일어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남편과 아내 사이에 진정한 사랑과 신뢰가 회복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부모와 자녀 사이에도 친밀한 사랑이 회복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든 성도들이 성령으로 충만하여 우리 사이에 있는 모든 갈등과 문제들이 성령 안에서 녹아지고 치유되고 회복되기를 바랍니다.
죄를 억제시키시는 하나님의 은혜
오늘 우리가 이렇게 살아있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 때문입니다. 사람은 끊임없이 악한 것을 생각하고 죄를 짓는 존재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를 붙잡아주시지 않는다면 우리가 얼마나 많은 죄를 짓게 될지 모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마음을 억제시키시고, 환경과 공권력을 통해 통제하시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걷잡을 수 없도록 죄를 짓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죄로 인하여 비참하게 멸망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마치 사람들이 바벨탑을 쌓고 하나님을 대적하여 멸망을 당할 수밖에 없었는데, 하나님께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케 하심으로 그들의 도모를 좌절시킨 것과 같습니다. 그렇게 해서 인간은 멸망을 면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을 당신 개인에게 적용시켜 보십시오. 우리 마음 속에는 끊임없이 죄악된 생각이 맴돌고 있습니다. 우리 안에 이미 죄악된 본성이 자리잡고 있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사탄이 외부에서 우리의 죄성을 자극하고 유혹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죄지을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의 이러한 계획을 좌절시키십니다. 상황이 맞아 떨어졌다면 큰 죄를 지었을 것인데, 하나님께서 상황이 어긋나게 하셔서 죄를 짓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나마 죄를 덜 짓게 된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가 하고 싶은 대로 내버려 두셨더라면 우리는 모두 범죄하고 멸망을 당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이만큼 된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은혜를 베푸심으로 우리를 보존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우리는 아무 소망도 없는 존재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어야 한다.
오늘 인류는 급속도로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교통수단과 통신의 발달로 인류는 하나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외국어를 습득하여 전달해주고 있기 때문에 언어의 장벽도 대폭 완화되었습니다. 지구 반대편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도 이쪽에서 즉시 알 수 있고 볼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바벨탑을 쌓다가 언어가 혼잡해져서 좌절되었던 일이 이제 극복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바야흐로 세계는 하나가 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류가 그렇게 가까워지고 거의 하나가 된 것 같지만 사실은 전혀 그렇지 못합니다. 경쟁과 범죄는 더 심해지고, 빈부의 격차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벌어지고 있습니다. 굶주려 죽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먹고 남은 것을 처치하는 데 골머리를 앓고 있는 곳도 많습니다. 전쟁과 대립도 끊임없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은 갈수록 강퍅해지고 메말라가고 있습니다. 세계는 하나가 되어가고 있는데 이웃과는 담을 높이 쌓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나타나고 있는 현상들은 인류가 하나가 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인류가 진정으로 하나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기술과 정치와 문화로 이루어지지 못합니다. 인류가 진정으로 하나되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갈등과 차별과 대립이 해소됩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편지하면서 그들이 하나되기 위하여 그리스도의 마음을 본받으라고 권면했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게 되면 우리에게 있는 모든 갈등과 문제들이 확실하게 해결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람의 마음과 세상의 모든 문화를 얼마든지 새롭게 하실 수 있으십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본받으며, 더욱 복음 전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우리 자신이 회복되고 세상이 회복될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타락한 인류는 하나님을 거역하고 떠나 자기 맘대로 살기를 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특별한 조치를 취하지 않으셨더라면 인류는 지금까지 보존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어를 혼잡케 하사 바벨탑을 쌓던 사람들을 흩어지게 하셨습니다. 그 후 오늘까지 사람들은 쉬지 않고 바벨탑을 쌓아왔습니다. 그리고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바벨탑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인간은 점점 더 악해지고 메마르고 강퍅해졌습니다. 갈등과 대립과 혼란이 가중되었습니다. 과거처럼 핍박과 어려움이 많지 않은데도 오늘 사람들이 예수 믿고 은혜 받기가 힘든 것은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이 바벨탑을 극복하는 길은 무엇입니까? 이 모든 갈등과 분열과 혼잡과 대립으로부터 회복되는 길은 어디 있습니까? 오직 성령으로 충만해지는 것이요, 예수 그리스도를 닮는 것입니다. 날마다 말씀을 붙들고 살면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런 성도가 세상을 이기고 세상을 변화시키게 됩니다. 오늘 우리 모든 성도들은 성령충만하고 주님을 닮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말씀과 기도로 세상을 이기고 변화시키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신기하고 오묘하고 복잡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사람입니다. 사람은 대단히 복잡하고 신기하며 오묘하고 탁월한 존재입니다. 이 세상의 그 무엇도 사람과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사람들 자신이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스스로를 만물의 영장이라고 부릅니다. 좀 더 심한 경우에는 사람이 곧 신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는가 하면, 사람은 신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실제로 자신이 신이라고 주장하는 인간들도 적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상이야말로 인간의 교만의 극치를 나타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상이며, 자신이 스스로 하나님 노릇을 하려는 시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가장 큰 죄로 여기십니다.
사람이 탁월하고 오묘한 존재인 것은 사실입니다. 성경은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사람은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는 사실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더구나 사람은 타락한 이후로 죄를 가진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 죄는 사람을 멸망으로 이끌어갑니다. 이 죄 때문에 인간은 가장 탁월하고 아름답고 오묘한 존재에서 가장 추하고 악하고 비참한 존재로 전락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아는 사람은 함부로 교만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절실하고 귀한 줄을 압니다. 그래서 겸손하게 하나님을 섬기며 그 분의 말씀을 따라 살기를 원합니다. 그렇게 살면 사람은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죄를 이기고 본래의 존귀하고 탁월한 존재로서 살아가게 됩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면 자신이 소망 없는 죄인임을 인정하십니까?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살 수도 없고 영원히 멸망당할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시인하십니까? 이러한 성도는 복이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는 사람이 하나님을 거역하고 대적하며 심지어는 하나님의 자리에까지 올라가려고 했던 사건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바벨탑 사건입니다.
홍수심판 이후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선하게 창조하셨으나 인간이 타락한 이후로 죄가 세상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이 죄는 갈수록 퍼지고 심해져서 마침내 세상에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홍수로 세상을 심판하셨습니다. 홍수 이후 하나님께서는 다시는 세상을 홍수로 심판하시지 않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람에게 땅에서 번성하여 충만하라고 축복해주셨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안심하고 다시 세상에서 번창해갔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퍼져가면서 이들에게는 다시 불신앙이 스며들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다시는 세상을 홍수로 심판하시지 않을 것이며, 언젠가 구주를 보내실 것이라는 언약을 더 이상 믿지 않았습니다. 이 불신앙은 곧 두려움으로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약속을 불신한 사람들은 서로 흩어지는 것과 다시금 홍수로 세상이 멸망당하게 될 것이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한 곳에 모여 홍수에도 끄떡없을 만한 높은 성을 쌓고, 흩어지지 말고 함께 살기로 했습니다. 사람들의 이러한 생각은 하나님의 자비로우신 약속을 불신한 결과였으며,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하나님의 축복된 명령을 정면으로 거역하는 것이었습니다. 더 나아가서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이름을 높임으로써 하나님을 배척하고 대적하려 했습니다. 그렇게 되면 사람은 다시 멸망을 당할 수밖에 없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언어를 혼잡케 하심으로 사람들의 도모를 저지시키셨고, 그들을 강제로 흩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바벨탑 사건입니다. 바벨탑 사건은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도전과 교만이었고, 하나님 없이 인간들이 스스로 하나님 행세를 하려는 극단적인 인본주의적 사건이었습니다.
불신앙과 두려움
노아의 방주가 머물렀던 아라랏 산으로부터 인류는 다시 번성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정착하기에 좋은 곳을 찾아 동쪽으로 이동해갔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시날 평지에 정착하기로 했습니다(2절). 그들은 서로 떨어지는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흩어졌다가 땅에서 영영 사라져버리는 것은 아닐까? 흩어졌다가 생소해지게 되면 서로 싸우고 죽이는 일이 일어나지는 않을까? 뭉쳐 있으면 어떠한 재난이 와도 함께 대처할 수 있을 것인데 괜히 흩어졌다가 힘없이 재난을 당해 죽지는 않을까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곳 시날 평지에 모여서 큰 성을 쌓고 함께 살기로 했습니다.
이러한 두려움이 어디서 왔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신실하신 언약을 불신하는 데서 왔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지 못하고 하나님의 은혜로우시고 자비로우심을 믿지 못하면 수많은 두려움에 시달릴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구원해주셨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면 죽음과 내세가 두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고 가장 선한 길로 인도해주신다는 것을 믿지 못하면 어려운 일을 당할 때 두려워하고 낙심하게 됩니다. 불신앙은 이렇게 어리석고 해로운 것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는 사람은 진정한 평안을 누릴 수 없습니다. 당신은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께서 당신을 사랑하시며 선하게 인도하심을 의심없이 믿습니까? 아무리 상황이 어렵고 앞길이 막막해도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나를 위한 선하시고 아름다우신 계획을 믿습니까? 이런 믿음을 가지고 있는 성도는 어떤 경우에도 낙심하거나 불안해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이런 성도는 주님께서 주시는 평안을 온전히 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비로우심과 은혜 베푸심과 그 신실하신 말씀을 굳게 믿고 언제나 참된 평안을 누리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획기적인 발명품 - 벽돌
사람들은 방주가 머물렀던 아라랏 산에서 동쪽으로 옮겨가다가 시날 평지에 이르자 거기서 정착하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사람들은 획기적인 물건을 발명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인류의 역사에 일대 혁명을 가져오게 된 벽돌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벽돌을 발명한 것은 현대에 컴퓨터를 발명한 것 이상으로 혁명적인 일이었습니다. 벽돌이 뭐가 그렇게 대단한 것이냐구요? 그 때까지 사람들에게는 집을 짓는 일이 가장 애로사항이었습니다. 나무나 풀은 너무 약해서 쉽게 망가지고 비를 가리기에 충분하지 못했습니다. 돌은 너무 무겁고 다듬지 않으면 별로 쓸모가 없었습니다. 또 높이 쌓아올릴 수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벽돌을 발명하고 벽돌로 집 짓는 기술이 개발되면서 사람들은 비로소 건물다운 건물을 지을 수가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시날 평지에는 벽돌을 구울 수 있는 흙이 얼마든지 있었고, 벽돌을 견고하게 쌓을 수 있는 역청도 많았습니다. 흙을 원하는 모양으로 만들어 구워내기만 하면 돌처럼 단단해졌습니다. 그리고 역청으로 연결해나가면서 쌓으면 얼마든지 크고 높은 건물을 만들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벽돌을 만들게 되었다는 것은 가히 혁명적인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부터 사람들은 아름답고 견고한 집을 짓고 편안하게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큰 성과 대를 쌓기로 했습니다.
탑을 쌓는 이유
사람들이 벽돌을 만들어 견고하고 좋은 집을 짓고 편안하게 사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벽돌을 만들게 되면서 사람들은 엉뚱한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자, 성과 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4절) 여기에는 하나님을 무시하고 인간의 영광을 한껏 드러내며, 인간 스스로 하나님의 자리에 앉겠다는 극단적인 불신앙과 인본주의적인 생각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성을 쌓기로 한 것은 편안하게 살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성과 대를 쌓아 하늘에 닿게 하자고 했습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의 간섭을 받지 않고 자기들 마음대로 살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지금까지 사람들은 감히 하나님을 거부하거나 하나님께 도전하려는 생각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벽돌을 만들게 되면서 그들의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이제는 우리도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 하나님 없이도 얼마든지 살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그들은 벽돌로 완벽하고 높은 탑을 쌓아 하나님을 몰아내고 간섭하지 못하시게 할 작정이었습니다. 바벨탑을 쌓은 것은 하나님께 대한 도전이었으며, 하나님을 자기들의 삶 속에서 몰아내고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성을 높이 쌓기로 한 또 하나의 이유는 자기들의 이름을 내기 위해서였습니다. 사람이 창조된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높이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타락한 이후 사람은 자기의 이름을 높이고 찬양하고자 하는 욕구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자신을 하나님의 자리에 올려놓는 일입니다. 그 대표적인 것을 우리는 북한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토록 아름다운 금강산에는 "위대한 수령 민족의 지도자 김일성 장군 만세"와 같은 문구들이 여기저기 새겨져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경향은 우리에게도 있습니다. 언젠가 산에 갔다가 사람들이 자기 이름을 새겨놓은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이렇게 자기 이름을 높이려는 시도는 산에서만 볼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사람들이 모여 사는 사회에서 이런 현상이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요즘에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것은 매스컴에 자기 이름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떻게 해서든지 높은 자리에 앉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위해서 많은 돈을 내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하나님을 섬기려고 하기보다는 자기 이름을 높이기 원합니다. 처음에 어렵고 비천할 때는 그렇지 않았는데, 좀 출세를 하고 살만 해지면 여지없이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교만해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기 이름을 높이려는 극단적인 시도는 인간이 스스로 신을 자처하는 데까지 나아갔습니다. 애굽의 왕들과 로마의 황제들은 스스로를 신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바벨탑을 쌓고자 한 것은 이렇게 사람들이 하나님을 무시하고 자기들의 이름을 높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또 높은 탑을 쌓아 흩어짐을 면하자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그 약속을 믿지 않게 되자 사람들에게는 두려움과 불안이 찾아왔습니다. 그래서 흩어지는 것을 두려워하게 된 것입니다. 함께 뭉쳐서 살면 어려움이 와도 함께 대처할 수 있을 것입니다. 따로 흩어져 살면 불안하지만 함께 있으면 안심이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사람이 함께 모여서 서로 사랑하고 의지하며 사는 것은 나쁜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정면으로 거역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하시고 그들에게 축복하시면서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함께 모여 살면서 흩어지지 말자고 했습니다. 지금도 사람들은 함께 뭉쳐 어떤 세력을 형성하기를 좋아합니다. 그래서 정당을 만들고, 무슨 협회를 만들고, 노동조합을 만들었습니다. 유엔이나 경제 블럭 같은 것을 만들었습니다. 이런 모든 것들은 흩어지지 말고 한데 뭉쳐 세력을 만들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야 힘이 생기고 안심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만들어진 단체와 세력들은 철저하게 자기들의 이익을 추구합니다. 그리고 자기들과 반대입장에 있는 사람들을 공격합니다. 이런 것들 때문에 우리 사회는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바벨탑을 쌓던 사람들의 생각과 통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사람들이 함께 모이고 뭉치지 않으면 두려워하고 불안해할까요? 그것은 하나님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기 때문에 자기들끼리 뭉쳐서 세력을 만들고 스스로를 보호하겠다는 것입니다. 바벨탑을 쌓으려 했던 것은 하나님을 거역한 인간의 죄악된 시도였습니다.
여호와의 강림
사람들이 높은 탑을 쌓으려고 했던 이유는 이렇게 하나님을 거부하고 하나님께 도전하는 것이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이 아니라 자기들의 이름을 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쌓는 성과 대를 보시려고 강림하셨습니다(5절). 이 말씀은 좀 이상한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너무 높고 멀어서 잘 보실 수가 없기 때문에 직접 보시려고 땅으로 내려오셨다는 말처럼 들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전능하셔서 어디서나 인간의 모든 행위과 생각을 완전하게 감찰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특별히 강림하셨다고 할 때는 직접 그 일에 개입하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강림하시는 것은 죄인들을 심판하시기 위한 것과, 믿음의 사람들에게 특별한 은혜와 축복을 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강림하신 것은 무엇을 위해서였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바벨탑을 쌓은 사람들을 심판하시는 것이 마땅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심판하시지 않았습니다. 사실 본문의 상황은 다시금 노아 때와 같이 홍수심판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다시는 세상을 그렇게 심판하시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심판하시는 대신 바벨탑을 쌓으려는 그들의 시도를 좌절시키시고 그들을 흩으셨습니다.
6절에도 이상한 말씀이 나옵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 무리가 한 족속이요 언어도 하나이므로 이같이 시작하였으니 이후로는 그 경영하는 일을 금지할 수 없으리로다" 이 말씀은 가만히 놔두면 사람들의 세력이 커지고 강해져 하나님께서 더 이상 그들을 통제하실 수 없게 될 것이라는 의미처럼 드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전능하시기 때문에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은 무슨 뜻일까요?
하나님께서는 무지개 언약을 통하여 마지막 심판 때까지 다시는 온 인류를 멸망시키지 않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지금 멸망을 자초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이대로 방치해두면 멸망을 당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서 어떤 조치를 취하셔야만 했습니다. 인류가 다시 멸망을 당하지 않고 마지막 심판 때까지 보존되려면 사람들이 지금 하고 있는 일을 막아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언어를 혼잡케 하셨습니다. 말이 통하지 않게 된 사람들은 더 이상 공사를 계속할 수가 없게 되었으며, 말이 통하는 사람들끼리 흩어지게 되었습니다(7-8절). 그래서 그들의 시도가 좌절되었지만, 사실은 세상이 멸망을 면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피조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께 의존하여 살도록 만드셨습니다. 그렇게 살 때 사람은 탁월하고 오묘하며 존귀한 존재가 될 수 있습니다. 사람은 결코 독립적인 존재가 아닙니다. 그런데 타락한 인간은 이것을 싫어합니다. 하나님을 떠나 독립하기를 원합니다. 자기가 원하는 대로 살고 싶어합니다. 마음대로 죄도 짓고 쾌락을 즐기며 살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부인하고 대적하고 거역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지 않고 자기의 이름을 높이 드러내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만입니다. 이것이 인본주의입니다. 이것이 바벨탑의 정신입니다. 여기서 인간의 모든 불행과 문제가 생깁니다. 이것 때문에 사람은 하나님의 심판을 당하게 됩니다.
혹시 오늘 우리 안에 바벨탑의 정신이 남아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을 배척하고 떠나서 내 마음대로 살려고 하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을 높이기보다는 나 자신이 높아지고자 하지는 않습니까? 이렇게 사는 사람들은 결코 성공할 수 없고 평안할 수 없으며 진정한 만족을 얻을 수 없습니다. 결국 비참하게 멸망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당신은 오직 하나님만을 온전히 의지하며 겸손하게 그 분의 은혜를 사모하는 믿음으로 사시기를 바랍니다. 오직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이런 성도는 하나님께서 인정하시고 은혜를 주시며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실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이번 여름에 영적인 휴가나 방학을 계획하고 있는 성도는 안 계실 줄로 압니다. 덥고 힘들다고 해서 신앙생활의 방학을 가지게 되면 사탄에게 공격을 당하기 십상입니다. 우리는 온 세상이 홍수로 멸망을 당할 때 그 홍수심판을 이겨낸 믿음의 거장 노아가 방심하여 매우 부끄럽고 후회스런 실수를 범하게 된 것을 보았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번 여름에는 휴가를 가지 마시라는 것은 아닙니다. 이제 휴가철이 되어 여러 가지 계획들을 가지고 계실 것입니다. 이 시점에서 한 가지 긴급제안을 드리고 싶습니다.
이번에 휴가를 떠나시거든 반드시 하나님을 새롭게 느끼고 발견하고 만나는 기회로 삼으시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동안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자연계를 접할 기회가 너무 없었습니다. 이렇게 도시에서 생활하는 분들은 더욱 그렇습니다. 사람들이 콘크리트와 아스팔트로 온통 땅을 뒤덮어 놓았기 때문에 흙을 밟아 본 적이 언제였는지 알 수도 없을 지경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콘크리트 빌딩 숲에서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동안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들보다는 인간들이 만든 것들 속에서 살아왔습니다. 이러한 환경에서는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기가 어렵습니다. 이제 휴가를 떠나시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자연을 맘껏 즐기실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아무 생각 없이 먹고 마시는 휴가가 되지 말고, 자연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을 묵상하는 기회가 되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하시면 하나님을 새롭게 만나는 은혜로운 휴가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육신과 영혼이 아울러 회복되는 휴가가 되시기 바랍니다.
언어의 혼잡
미국에 유학가서 학위를 받고 돌아온 분이 영어가 너무나도 어렵다고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우리 같은 사람들이 그런 말을 하면 수긍이 되지만 외국에서 오래 살면서 공부하여 학위까지 받은 사람들이 그런 말을 하는 것은 참 수긍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만큼 외국어는 배우기 힘듭니다. 요즘은 누구나 외국어를 한 두 개는 구사할 수 있어야 하는 세계화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외국어를 습득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피곤한 일입니까? 요즘은 초등학교, 아니 유치원 때부터 영어를 배웁니다. 요즘 대학생들은 일년 정도의 외국어 해외연수는 기본입니다. 그런데도 외국어는 어렵기만 합니다. 외국어의 장벽만 아니라면 공부하기가 얼마나 수월할까 하는 생각을 해 본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처음에는 인류의 언어가 하나였습니다. "온 땅의 구음이 하나이요 언어가 하나이었더라"(1절) 얼마나 편리했겠습니까? 외국어를 배울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쩌다 이렇게 된 것일까요? 원래 하나였던 언어가 이렇게 복잡하게 나뉜 것은 바벨탑 사건 때문이었습니다. 바벨탑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배척하고 자기들 마음대로 살겠다는 시도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지음 받은 인간이 자기들의 이름을 높이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더 나아가서 사람들은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하나님의 축복된 명령을 거역하고 흩어지지 말고 함께 모여서 살자고 했습니다. 그들은 흩어지는 것을 두려워했고, 홍수로 세상이 다시 멸망당하지 않을까 두려워했습니다. 그래서 높은 성과 대를 쌓고 함께 살기로 했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고 그 말씀을 믿지 않으면 이렇게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이렇게 하나님을 거역하고 대적하는 길로 나가면 멸망을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사람들이 바벨탑을 쌓는 공사현장에 강림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의 언어를 혼잡케 하셔서 그들을 흩어지게 하셨습니다. 이렇게 해서 바벨탑을 쌓으려는 그들의 시도는 좌절되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인류의 언어는 이처럼 다양하고 복잡하게 되었습니다.
현대의 바벨탑
바벨탑은 하나님을 배척하고 인간의 이름을 높이고자 하는 인본주의의 극치를 보여주는 사건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벨탑을 쌓는 현장에 강림하셔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케 하심으로 그들이 하고자 하는 일을 저지시키셨습니다. 사람들은 자기들의 목표를 이루지 못하고 흩어졌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크신 은혜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멸망을 자초하는 사람들의 일을 좌절시키심으로 그들이 멸망을 당하지 않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사방으로 흩어지게 하심으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축복, 즉"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는 말씀이 이루어지게 하셨습니다. 그렇게 해서 인류는 멸망을 당하지 않고 온 땅에 흩어져서 계속 번성해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후로도 인류는 계속해서 바벨탑을 쌓아왔습니다. 특히 현대에 와서는 이 바벨탑이 절정에 다다른 느낌이 듭니다. 마침내 인류는 하늘에 닿는 성과 대를 쌓은 것입니다. 사람들은 도시를 건설하고 크고 높은 건물들을 많이 지었습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온갖 기술과 문명을 발전시켜왔습니다. 교통과 통신이 급속도로 발전하여 세계는 한층 가까워졌습니다. 그래서 지구촌이라는 말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편리하고 놀라운 세상이 되었습니까? 그야말로 인간은 못하는 것이 없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이 인류를 보다 인간답게, 그리고 행복하게 만들 수 있을까요? 결코 그렇지 못합니다. 오히려 현대인들은 그들이 쌓은 바벨탑 때문에 비인간화되고 메말라가게 되었습니다. 현대인들은 그들이 만들어 놓은 바벨탑에 갇히게 된 것입니다. 아무리 문명이 발달하고 생활이 편리해져도 그것으로 죄의 문제가 해결될 수는 없습니다. 죄의 문제가 해결되지 못하면 인간은 결코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바벨탑 탈출하기
특히 도시 사람들은 온 세상이 콘크리트와 아스팔트로 도배된 가운데 땅이라고는 밟아보지도 못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바벨탑 속에서 사는 사람들은 마음이 지치고 강퍅해졌으며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바벨탑 속에 살기 때문에 하나님을 느끼며 은혜를 체험하는 일이 그만큼 어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모든 것이 온통 인간이 만들어 낸 것들인데 어디서 하나님의 솜씨와 은혜를 발견할 수 있겠습니까? 어디서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며 감동을 받을 수가 있겠습니까?
요즘에 우리 아이들이 좋아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산과 바다와 자연의 세계를 좋아합니까? 들꽃과 새소리를 좋아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놀이공원에서 기구타는 것을 좋아합니다. 게임하기를 좋아하고 가수들의 노래 따라 부르기를 좋아합니다. 인간이 만든 바벨탑이 일찌감치 우리 아이들을 사로잡아 버리고 있습니다. 그런 것들을 즐기면서 우리 어린이들이 무엇을 생각하겠습니까?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을 느낄 수가 있겠습니까? 그렇지 못합니다. 청소년들이나 어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바벨탑 속에 갇혀 인간성이 왜곡되고 하나님에 대해서 둔해져가고 있습니다.
고단하고 분주한 가운데서도 간혹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자연으로 눈길을 돌리도록 하십시오. 하늘과 나무와 풀과 새들을 보면서 하나님을 생각하십시오. 형편이 허락된다면 산과 들과 바다에 나가 하나님의 손길을 느껴보십시오. 그리고 매일의 삶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당신을 어루만지시고 인도하시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내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기억하고, 하나님의 자녀답게 사람들을 대하고 일들을 처리하도록 하십시오. 하나님 말씀 묵상하기를 게을리 하지 마십시오. 이렇게 하나님을 바라보는 가운데 당신의 삶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 되도록 하십시오. 이렇게 살면 우리는 현대의 바벨탑에 갇히지 않고 하나님 백성으로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언어가 다시 통일됨
처음에는 모든 인류가 하나의 언어를 사용했습니다. 얼마나 편리하고 좋았겠습니까? 그러나 죄 때문에 언어가 혼잡케 되어 오늘처럼 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혼잡해진 언어가 통일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준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사도행전의 오순절 성령강림 때 일어났습니다. 오순절에 성령께서 강림하시자 제자들은 성령의 충만을 받고 방언을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방언으로 설교할 때 세계 각국에서 모여든 사람들은 사도들의 설교를 각각 자기들이 살고 있는 나라말로 듣게 되었습니다. "다 놀라 기이히 여겨 이르되 보라 이 말하는 사람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의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찜이뇨 우리는 바대인과 메대인과 엘림인과 또 메소보다미아, 유대와 가바도기아, 본도와 아시아, 브루기아와 밤빌리아, 애굽과 및 구레네에 가까운 리비야 여러 지방에 사는 사람들과 로마로부터 온 나그네 곧 유대인과 유대교에 들어 온 사람들과 그레데인과 아라비아인들이라 우리가 다 우리의 각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하고"(행2:7-11)
이 사건이 보여주는 것이 무엇입니까? 성령께서 임하시면 이렇게 혼잡해지고 복잡해진 우리의 언어가 다시금 통일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죄로 인해 혼잡해진 것을 성령께서 회복시키시고 통일시키신다는 것입니다. 장차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될 것인데, 거기서 인류의 언어는 완전히 통일될 것입니다.
회복의 역사
성령께서는 언어의 혼잡만이 아니라 우리의 모든 갈등과 대립과 분열을 치유하십니다. 사람들이 싸우고 대립하며 갈등을 겪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죄 때문입니다. 죄는 가장 가까운 부부 사이에도 갈등과 대립이 생기게 만듭니다. 부모와 자식 사이에도, 친구와 친구 사이에도, 심지어는 성도들 사이에도 문제와 갈등이 생기게 합니다. 처음에는 좋은 의도를 가지고 시작한 일도 서로 싸우며 상처를 주고받으면서 끝내는 경우가 많습니다. 본심은 그렇지 않은데 대화를 하다보면 이상하게 말이 통하지 않고 오히려 갈등의 골이 깊어지는 것을 경험한 적이 많을 것입니다. 왜 그렇게 될까요? 그것은 우리 안에 있는 죄 때문입니다.
이러한 모든 갈등과 문제들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요? 우리 안에 성령께서 충만하게 임하셔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성령으로 충만해지면 마음이 통하게 되고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부부 사이의 갈등과 부모 자식간의 문제, 성도 사이의 모든 불편한 것들이 치유되는 것입니다. 죄가 가져온 분쟁과 갈등을 성령께서 회복시켜 주십니다. 오늘 우리 가운데 성령으로 인한 이러한 회복의 역사가 일어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남편과 아내 사이에 진정한 사랑과 신뢰가 회복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부모와 자녀 사이에도 친밀한 사랑이 회복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든 성도들이 성령으로 충만하여 우리 사이에 있는 모든 갈등과 문제들이 성령 안에서 녹아지고 치유되고 회복되기를 바랍니다.
죄를 억제시키시는 하나님의 은혜
오늘 우리가 이렇게 살아있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 때문입니다. 사람은 끊임없이 악한 것을 생각하고 죄를 짓는 존재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를 붙잡아주시지 않는다면 우리가 얼마나 많은 죄를 짓게 될지 모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마음을 억제시키시고, 환경과 공권력을 통해 통제하시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걷잡을 수 없도록 죄를 짓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죄로 인하여 비참하게 멸망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마치 사람들이 바벨탑을 쌓고 하나님을 대적하여 멸망을 당할 수밖에 없었는데, 하나님께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케 하심으로 그들의 도모를 좌절시킨 것과 같습니다. 그렇게 해서 인간은 멸망을 면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을 당신 개인에게 적용시켜 보십시오. 우리 마음 속에는 끊임없이 죄악된 생각이 맴돌고 있습니다. 우리 안에 이미 죄악된 본성이 자리잡고 있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사탄이 외부에서 우리의 죄성을 자극하고 유혹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죄지을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의 이러한 계획을 좌절시키십니다. 상황이 맞아 떨어졌다면 큰 죄를 지었을 것인데, 하나님께서 상황이 어긋나게 하셔서 죄를 짓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나마 죄를 덜 짓게 된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가 하고 싶은 대로 내버려 두셨더라면 우리는 모두 범죄하고 멸망을 당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이만큼 된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은혜를 베푸심으로 우리를 보존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우리는 아무 소망도 없는 존재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어야 한다.
오늘 인류는 급속도로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교통수단과 통신의 발달로 인류는 하나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외국어를 습득하여 전달해주고 있기 때문에 언어의 장벽도 대폭 완화되었습니다. 지구 반대편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도 이쪽에서 즉시 알 수 있고 볼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바벨탑을 쌓다가 언어가 혼잡해져서 좌절되었던 일이 이제 극복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바야흐로 세계는 하나가 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류가 그렇게 가까워지고 거의 하나가 된 것 같지만 사실은 전혀 그렇지 못합니다. 경쟁과 범죄는 더 심해지고, 빈부의 격차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벌어지고 있습니다. 굶주려 죽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먹고 남은 것을 처치하는 데 골머리를 앓고 있는 곳도 많습니다. 전쟁과 대립도 끊임없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은 갈수록 강퍅해지고 메말라가고 있습니다. 세계는 하나가 되어가고 있는데 이웃과는 담을 높이 쌓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나타나고 있는 현상들은 인류가 하나가 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인류가 진정으로 하나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기술과 정치와 문화로 이루어지지 못합니다. 인류가 진정으로 하나되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갈등과 차별과 대립이 해소됩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편지하면서 그들이 하나되기 위하여 그리스도의 마음을 본받으라고 권면했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게 되면 우리에게 있는 모든 갈등과 문제들이 확실하게 해결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람의 마음과 세상의 모든 문화를 얼마든지 새롭게 하실 수 있으십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본받으며, 더욱 복음 전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우리 자신이 회복되고 세상이 회복될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타락한 인류는 하나님을 거역하고 떠나 자기 맘대로 살기를 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특별한 조치를 취하지 않으셨더라면 인류는 지금까지 보존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어를 혼잡케 하사 바벨탑을 쌓던 사람들을 흩어지게 하셨습니다. 그 후 오늘까지 사람들은 쉬지 않고 바벨탑을 쌓아왔습니다. 그리고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바벨탑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인간은 점점 더 악해지고 메마르고 강퍅해졌습니다. 갈등과 대립과 혼란이 가중되었습니다. 과거처럼 핍박과 어려움이 많지 않은데도 오늘 사람들이 예수 믿고 은혜 받기가 힘든 것은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이 바벨탑을 극복하는 길은 무엇입니까? 이 모든 갈등과 분열과 혼잡과 대립으로부터 회복되는 길은 어디 있습니까? 오직 성령으로 충만해지는 것이요, 예수 그리스도를 닮는 것입니다. 날마다 말씀을 붙들고 살면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런 성도가 세상을 이기고 세상을 변화시키게 됩니다. 오늘 우리 모든 성도들은 성령충만하고 주님을 닮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말씀과 기도로 세상을 이기고 변화시키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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