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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눅9:46-4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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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정용섭 목사 |
참고 : | http://dabia.net/xe/38765 |
2006.10.8.
어린이
본문에 따르면 제자들은 자기들 중에서 누가 제일 높으냐, 하는 문제로 말다툼을 벌였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생활하고 말씀을 직접 들은 제자들이 왜 이런 수준밖에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대목입니다. 특히 예수님의 공생애 과정에서 지금은 십자가 처형을 당할지 모른다는 위기가 고조되는 순간이었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제자들의 철없는 행동거지가 딱하게 보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일반적으로는 그들처럼 누가 높은 사람인가 하는 신경전과 말다툼 속에서 살아갑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총이 아니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게 옳은 것 같습니다.
오늘의 이 이야기는 다른 공관복음서에도 그대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걸 보면 이 이야기의 역사적 진정성은 매우 높은 것 같습니다. 가장 먼저 기록된 마가복음은 “길에서 무슨 일로 다투었느냐?”(막 9:33) 하는 예수님의 질문으로부터 시작합니다. 마태복음은 마가나 누가와 달리 제자들이 다투었다는 사실을 언급하지 않은 채 “하늘나라에서는 누가 가장 위대합니까?” 하고 질문하셨습니다.(마 18:1) 이 마태복음의 진술에서도 역시 제자들이 지위에 대한 관심이 높았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함께 읽은 누가복음에 따르면 예수님은 어린이 하나를 데려다가 곁에 세우시고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이를 받아들이면 곧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며, 또 나를 받아들이면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48a) 마가복음은 예수님이 어린이를 안고서 말씀하셨다고 기록합니다. 그 당시에 어린이는 완전한 인격을 갖춘 사람으로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어린이는 제자들의 관심이었던 높은 자리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습니다. 사람의 숫자에도 들지 못하는 어린이에 관해서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들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헬라와 로마 선생들은 어린이를 앞에 내세우면서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관용과 겸손, 그리고 용기를 가르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전혀 달랐습니다. 구체적으로 어린이를 내세우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어린이를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예수님이 내세운 어린이는 생물학적으로 나이가 어린 사람들을 가리킬 뿐만 아니라 한 사회에서 가장 낮은 자리에서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그들은 너무 자리가 낮기 때문에 아예 높은 자리에 올라갈 생각을 하지 못합니다. 그들에게는 낮은 자리와 높은 자리라는 개념조차 없습니다. 그들은 인도의 불가촉천민에 해당되는 사람들일 수도 있고, 아파트나 대학교 경비실에서 24시간 교대로 근무하는 사람들일 수도 있겠지요. 똑똑한 사람이라면 아무도 원하지 않는 그런 위치에 놓인 사람들입니다.
고대사회와 마찬가지로 현대사회도 더 이상 사회적 지위 상승이 불가능한 사람들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어린이처럼 사회적으로 가장 낮은 자리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사회에서 인격체가 아니라 하나의 사물로 다루어질 뿐이라는 말씀입니다. 가능한대로 말썽부리지 않고 그 자리에서 자기가 맡은 일만 잘하면, 그것으로 최소한의 생존이 보장될 뿐입니다. 이런 사회적 전통과 구조를 우리는 아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삽니다. 이런 일들은 인격이 아주 왜곡된 사람들에게서만 일어나는 현상이 아니라 현대사회의 일반적인 현상입니다. 우리에게 우체국 창구에서 만나는 직원은 우편물을 처리해주는 기계로만 보입니다. 은행직원이나 학교직원들도 역시 사무적으로 업무를 처리해주는 기계입니다. 그들이 우리에게 인격으로 다가오는 일은 별로 없습니다. 오늘 우리 삶의 특징은 서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당시 사회적으로 가장 낮은 자리에 있던 어린이를 받아들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단지 어린이를 받들라는 의미만이 아니라 모든 인간관계가 새로운 차원으로 올라서야 한다는 요청입니다. 모든 사람을 인격적으로 받아들이는 삶의 차원이 우리에게 필요하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어린이를 굳이 내세운 이유는 우리가 높은 사람과의 관계는 말하지 않아도 잘들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높은 사람에게는 잘 보이려고 애를 쓰지만 낮은 사람은 무시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 조금 더 냉정하게 생각하면 현대인들은 낮은 사람만이 아니라 높은 사람과도 정상적인 관계를 맺지 못합니다. 우리는 모두 서로 받아들일 줄 모릅니다. 만약 어린이와 그런 신분의 사람들을 받아들일 줄 안다면, 우리는 그때부터 지위가 높은 사람과도 정상적인 관계를 회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그런데 예수님은 어린이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원래 “예수님의 이름으로”는 어떤 능력을 보일 때 사용되던 어구입니다. 귀신을 좇아낸다든지 병든 사람을 고칠 때 사용된 용어입니다. 그런대 오늘 본문에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어린이를 받아들이라고 표현되었습니다. 이게 무슨 뜻일까요?
가장 단순하게 생각한다면, 그 표현은 제자직의 중요성을 의미하는 말씀일지 모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무슨 일을 하든지 예수님의 제자라는 사실을 전제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조금 더 나아가서, 어린이처럼 사회적으로 낮은 위치에 있는 사람들을 돕는 교회의 일들은 그저 복지향상이나 봉사의 차원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한 일이어야 한다는 뜻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내 이름으로”라는 관용어가 예수님의 기적과 연관된다는 사실에 근거해서 앞의 주장과는 다른 뜻으로 사용된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즉 어린이를 받아들이는 일은 기적을 행하는 것과 같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두 가지 의미입니다.
첫째, 어린이를 받아들이는 일은 기적을 행사하는 것처럼 어렵습니다. 자신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는, 오히려 귀찮기 만한 대상을 마음 깊은 곳에서 받아들이는 일은 보통 사람에게 거의 불가능합니다. 저에게 기적의 능력이 없듯이 저에게는 어린이를 받아들일 능력이 없습니다. 약간 흉내를 낼 수는 있지만 오래가지 못합니다.
둘째, 어린이를 받아들이는 일은 그야말로 하나님이 일으키시는 기적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이 발생하는 통로입니다. 사회적으로 낮은 사람들이 받아들여지는 사회가 된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나라가 열리는 사건과 같습니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은 바로 이런 기적들이 일어나기를 기다리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기적과 같은 혁명이 이 사회에 일어날 수 있도록 자신의 전체 존재를 던지는 사람들입니다. 아마 우리 스스로는 그런 일을 성취해낼 수 없을 겁니다. 교회도 그런 능력이 없습니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에게서 오듯이 어린이를 받아들이는 일도 역시 하나님에게서 나옵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제자들인 우리는 하나님의 그런 일이 일어나는 걸 최소한 방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더 나아가서 우리를 통해서 그런 일들이 일어날 수 있도록 기다리고, 나름으로 최선의 준비를 해야 합니다. 이런 일들이 예수님의 제자인 우리를 통해서 조금씩 확대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예수님은 이런 삶에 참여하는 것이 곧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린이와 하나님
예수님은 이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받아들이면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어린이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하나님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라는 뜻이 됩니다. 이 말씀을 삼중의 원으로 된 도표와 비교할 수 있습니다. 가장 작은 원은 어린이이고, 그 원을 둘러싼 더 큰 원은 예수님이며, 가장 바깥쪽의 원은 바로 하나님입니다. 어린이와 하나님이 거의 일치하는 도표입니다. 이 말씀은 상당히 파격적인 발언입니다. 어린이가 곧 하나님이라는 의미로 새길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과연 이 말씀이 옳습니까? 어린이를 우리가 인격적으로 받아들이면 그것이 곧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하나님을 받아들이는 것과 똑같습니까? 어린이처럼 낮은 위치에 있는 사람들, 즉 외국인 노동자, 미혼모, 알코올중독자, 고아와 과부, 부랑자들이 곧 하나님이라는 말이 가능한가요? 그들을 인격적으로 보살피고, 그들과 마음으로 하나 된다는 것은 그리스도인에게 그 무엇보다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어린이나 어린이 같은 이들이 곧 하나님 자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그런 이들과 같은 실체로 나타날 수는 있겠지만 그들이 곧 하나님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설명하신 어린이, 예수, 하나님이라는 이 도식은 잘못된 것일까요? 단지 상징에 불과한 말씀입니까?
우리가 예수님의 이 말씀을 조금 더 정확하게 이해하려면 본문의 맥락, 그리고 그리스도교 신앙 전체 틀과 연결해서 검토해야 합니다. 지난주에 우리는 예수님이 베드로를 향해서 “사탄아! 내 앞에서 물러가라.”고 말씀하신 대목을 짚었습니다. 이 사건 뒤에 얼마 지나지 않아서 오늘의 말씀이 나옵니다. 승리자 메시아 상에 젖어서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제자들은 오늘 본문에서도 여전히 높은 자리에만 관심을 보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제자들 앞에 어린이를 내세웠습니다. 이것도 제자들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습니다. 어린이의 자리는 가장 낮은 곳입니다. 예수님이 처형당한 십자가도 가장 낮은 자리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제자들은 하나님의 구원과 통치를 늘 높은 자리로만 생각했지만 하나님은 낮은 자리를 통해서도 자신의 일을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낮은 곳과 천한 곳으로부터도 구원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강한 톤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어린이의 낮은 자리를 받아들이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받아들이는 것이 곧 가장 높은 하나님을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높음과 낮음
오늘 말씀에서 누가가 전한 예수님의 결론은 다음과 같습니다. “너희 중에서 제일 낮은 사람이 제일 높은 사람이다.”(48b) 이 말씀에서 이제 인간이 생각하고 있는 낮음과 높음이라는 고착된 구도가 완전해 해체됩니다. 어린이의 자리가 오히려 높은 자리입니다. 십자가의 수치가 가장 큰 영광입니다.
제가 이렇게 설명해도 제 딸들은 별로 실감이 나지 않을 것 같군요. 제 딸들의 머릿속에는 높고 낮은 자리가 너무나 분명하게 정리되어 있어서 다른 생각을 하기 어려울 겁니다. 공부하기 싫지만 낮은 자리를 면하기 위해서, 높은 자리에 올라서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공부해야겠지요. 다른 일반 신자들의 생각도 여기서 크게 다르지 않을 겁니다. 자기 자신이나 자식들이 이 사회의 상층에 속하는 판사, 변호사나 의사, 기업가가 되는 걸 최고의 자랑으로 생각할 겁니다. 높은 자리에 대한 관심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교회생활에서 가장 큰 관심도 역시 교회 부흥에 놓여 있습니다. 자립도 못하는 작은 교회를 받아들이는 게 곧 하나님을 받아들이는 것과 같다고 생각하는 신자들이 얼마나 될까요?
저는 사람들의 그런 소박한 생각 자체를 이상하다고 말씀드리는 게 아닙니다. 일부러 가난하게 살아야 한다거나 사회생활에서 뒤쳐져야 한다는 말씀도 아닙니다. 또는 늘 가난한 사람과 소외된 사람들과만 함께 지내야 한다는 말씀도 아닙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이 청빈과 윤리적인 삶을 중요하게 제시하기는 하지만 그것을 억지로 강요하지는 않습니다.
오늘 말씀은 누가 제일 높으냐, 하고 서로 다투고 있는 제자들에게 주신 말씀이라는 사실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모든 사람들은 높은 자리, 고상한 인격과 문화생활, 우아한 종교생활을 절대적인 것으로 생각하고 삽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통치가 그런 것과 근본적으로 차원을 달리한다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천하다고 생각하는 그런 자리에서도 자신의 구원을 행사하십니다. 세리와 죄인들도 역시 아브라함의 자손입니다. 아니 그들은 자신의 업적을 내세우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바리새인들보다 하나님 나라에 더 가깝습니다.
여러분, 오늘 말씀은 높음과 낮음에 대한 우리의 생각이 얼마나 가소로운지를 알라는 경고입니다. 제일 낮은 사람이 제일 높은 사람이라는 이 역설을 실질적으로 알아들어야 합니다. 구원의 리얼리티인 기쁨, 자유, 평화, 사랑은 높고 낮음과 전혀 상관없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이라는 점에서 이 말씀은 옳습니다. 이 선물을 받은 사람은 아무리 낮은 자리에 처했어도 주눅이 들지 않으며, 낮은 사람 앞에서 교만하지 않습니다. 그들과 함께 하나님의 구원을 함께 일구는 일에 최선을 다 합니다. 이런 삶에는 높음과 낮음이 실제로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어린이
본문에 따르면 제자들은 자기들 중에서 누가 제일 높으냐, 하는 문제로 말다툼을 벌였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생활하고 말씀을 직접 들은 제자들이 왜 이런 수준밖에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대목입니다. 특히 예수님의 공생애 과정에서 지금은 십자가 처형을 당할지 모른다는 위기가 고조되는 순간이었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제자들의 철없는 행동거지가 딱하게 보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일반적으로는 그들처럼 누가 높은 사람인가 하는 신경전과 말다툼 속에서 살아갑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총이 아니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게 옳은 것 같습니다.
오늘의 이 이야기는 다른 공관복음서에도 그대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걸 보면 이 이야기의 역사적 진정성은 매우 높은 것 같습니다. 가장 먼저 기록된 마가복음은 “길에서 무슨 일로 다투었느냐?”(막 9:33) 하는 예수님의 질문으로부터 시작합니다. 마태복음은 마가나 누가와 달리 제자들이 다투었다는 사실을 언급하지 않은 채 “하늘나라에서는 누가 가장 위대합니까?” 하고 질문하셨습니다.(마 18:1) 이 마태복음의 진술에서도 역시 제자들이 지위에 대한 관심이 높았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함께 읽은 누가복음에 따르면 예수님은 어린이 하나를 데려다가 곁에 세우시고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이를 받아들이면 곧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며, 또 나를 받아들이면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48a) 마가복음은 예수님이 어린이를 안고서 말씀하셨다고 기록합니다. 그 당시에 어린이는 완전한 인격을 갖춘 사람으로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어린이는 제자들의 관심이었던 높은 자리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습니다. 사람의 숫자에도 들지 못하는 어린이에 관해서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들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헬라와 로마 선생들은 어린이를 앞에 내세우면서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관용과 겸손, 그리고 용기를 가르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전혀 달랐습니다. 구체적으로 어린이를 내세우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어린이를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예수님이 내세운 어린이는 생물학적으로 나이가 어린 사람들을 가리킬 뿐만 아니라 한 사회에서 가장 낮은 자리에서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그들은 너무 자리가 낮기 때문에 아예 높은 자리에 올라갈 생각을 하지 못합니다. 그들에게는 낮은 자리와 높은 자리라는 개념조차 없습니다. 그들은 인도의 불가촉천민에 해당되는 사람들일 수도 있고, 아파트나 대학교 경비실에서 24시간 교대로 근무하는 사람들일 수도 있겠지요. 똑똑한 사람이라면 아무도 원하지 않는 그런 위치에 놓인 사람들입니다.
고대사회와 마찬가지로 현대사회도 더 이상 사회적 지위 상승이 불가능한 사람들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어린이처럼 사회적으로 가장 낮은 자리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사회에서 인격체가 아니라 하나의 사물로 다루어질 뿐이라는 말씀입니다. 가능한대로 말썽부리지 않고 그 자리에서 자기가 맡은 일만 잘하면, 그것으로 최소한의 생존이 보장될 뿐입니다. 이런 사회적 전통과 구조를 우리는 아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삽니다. 이런 일들은 인격이 아주 왜곡된 사람들에게서만 일어나는 현상이 아니라 현대사회의 일반적인 현상입니다. 우리에게 우체국 창구에서 만나는 직원은 우편물을 처리해주는 기계로만 보입니다. 은행직원이나 학교직원들도 역시 사무적으로 업무를 처리해주는 기계입니다. 그들이 우리에게 인격으로 다가오는 일은 별로 없습니다. 오늘 우리 삶의 특징은 서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당시 사회적으로 가장 낮은 자리에 있던 어린이를 받아들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단지 어린이를 받들라는 의미만이 아니라 모든 인간관계가 새로운 차원으로 올라서야 한다는 요청입니다. 모든 사람을 인격적으로 받아들이는 삶의 차원이 우리에게 필요하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어린이를 굳이 내세운 이유는 우리가 높은 사람과의 관계는 말하지 않아도 잘들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높은 사람에게는 잘 보이려고 애를 쓰지만 낮은 사람은 무시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 조금 더 냉정하게 생각하면 현대인들은 낮은 사람만이 아니라 높은 사람과도 정상적인 관계를 맺지 못합니다. 우리는 모두 서로 받아들일 줄 모릅니다. 만약 어린이와 그런 신분의 사람들을 받아들일 줄 안다면, 우리는 그때부터 지위가 높은 사람과도 정상적인 관계를 회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그런데 예수님은 어린이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원래 “예수님의 이름으로”는 어떤 능력을 보일 때 사용되던 어구입니다. 귀신을 좇아낸다든지 병든 사람을 고칠 때 사용된 용어입니다. 그런대 오늘 본문에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어린이를 받아들이라고 표현되었습니다. 이게 무슨 뜻일까요?
가장 단순하게 생각한다면, 그 표현은 제자직의 중요성을 의미하는 말씀일지 모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무슨 일을 하든지 예수님의 제자라는 사실을 전제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조금 더 나아가서, 어린이처럼 사회적으로 낮은 위치에 있는 사람들을 돕는 교회의 일들은 그저 복지향상이나 봉사의 차원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한 일이어야 한다는 뜻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내 이름으로”라는 관용어가 예수님의 기적과 연관된다는 사실에 근거해서 앞의 주장과는 다른 뜻으로 사용된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즉 어린이를 받아들이는 일은 기적을 행하는 것과 같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두 가지 의미입니다.
첫째, 어린이를 받아들이는 일은 기적을 행사하는 것처럼 어렵습니다. 자신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는, 오히려 귀찮기 만한 대상을 마음 깊은 곳에서 받아들이는 일은 보통 사람에게 거의 불가능합니다. 저에게 기적의 능력이 없듯이 저에게는 어린이를 받아들일 능력이 없습니다. 약간 흉내를 낼 수는 있지만 오래가지 못합니다.
둘째, 어린이를 받아들이는 일은 그야말로 하나님이 일으키시는 기적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이 발생하는 통로입니다. 사회적으로 낮은 사람들이 받아들여지는 사회가 된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나라가 열리는 사건과 같습니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은 바로 이런 기적들이 일어나기를 기다리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기적과 같은 혁명이 이 사회에 일어날 수 있도록 자신의 전체 존재를 던지는 사람들입니다. 아마 우리 스스로는 그런 일을 성취해낼 수 없을 겁니다. 교회도 그런 능력이 없습니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에게서 오듯이 어린이를 받아들이는 일도 역시 하나님에게서 나옵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제자들인 우리는 하나님의 그런 일이 일어나는 걸 최소한 방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더 나아가서 우리를 통해서 그런 일들이 일어날 수 있도록 기다리고, 나름으로 최선의 준비를 해야 합니다. 이런 일들이 예수님의 제자인 우리를 통해서 조금씩 확대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예수님은 이런 삶에 참여하는 것이 곧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린이와 하나님
예수님은 이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받아들이면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어린이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하나님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라는 뜻이 됩니다. 이 말씀을 삼중의 원으로 된 도표와 비교할 수 있습니다. 가장 작은 원은 어린이이고, 그 원을 둘러싼 더 큰 원은 예수님이며, 가장 바깥쪽의 원은 바로 하나님입니다. 어린이와 하나님이 거의 일치하는 도표입니다. 이 말씀은 상당히 파격적인 발언입니다. 어린이가 곧 하나님이라는 의미로 새길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과연 이 말씀이 옳습니까? 어린이를 우리가 인격적으로 받아들이면 그것이 곧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하나님을 받아들이는 것과 똑같습니까? 어린이처럼 낮은 위치에 있는 사람들, 즉 외국인 노동자, 미혼모, 알코올중독자, 고아와 과부, 부랑자들이 곧 하나님이라는 말이 가능한가요? 그들을 인격적으로 보살피고, 그들과 마음으로 하나 된다는 것은 그리스도인에게 그 무엇보다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어린이나 어린이 같은 이들이 곧 하나님 자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그런 이들과 같은 실체로 나타날 수는 있겠지만 그들이 곧 하나님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설명하신 어린이, 예수, 하나님이라는 이 도식은 잘못된 것일까요? 단지 상징에 불과한 말씀입니까?
우리가 예수님의 이 말씀을 조금 더 정확하게 이해하려면 본문의 맥락, 그리고 그리스도교 신앙 전체 틀과 연결해서 검토해야 합니다. 지난주에 우리는 예수님이 베드로를 향해서 “사탄아! 내 앞에서 물러가라.”고 말씀하신 대목을 짚었습니다. 이 사건 뒤에 얼마 지나지 않아서 오늘의 말씀이 나옵니다. 승리자 메시아 상에 젖어서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제자들은 오늘 본문에서도 여전히 높은 자리에만 관심을 보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제자들 앞에 어린이를 내세웠습니다. 이것도 제자들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습니다. 어린이의 자리는 가장 낮은 곳입니다. 예수님이 처형당한 십자가도 가장 낮은 자리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제자들은 하나님의 구원과 통치를 늘 높은 자리로만 생각했지만 하나님은 낮은 자리를 통해서도 자신의 일을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낮은 곳과 천한 곳으로부터도 구원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강한 톤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어린이의 낮은 자리를 받아들이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받아들이는 것이 곧 가장 높은 하나님을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높음과 낮음
오늘 말씀에서 누가가 전한 예수님의 결론은 다음과 같습니다. “너희 중에서 제일 낮은 사람이 제일 높은 사람이다.”(48b) 이 말씀에서 이제 인간이 생각하고 있는 낮음과 높음이라는 고착된 구도가 완전해 해체됩니다. 어린이의 자리가 오히려 높은 자리입니다. 십자가의 수치가 가장 큰 영광입니다.
제가 이렇게 설명해도 제 딸들은 별로 실감이 나지 않을 것 같군요. 제 딸들의 머릿속에는 높고 낮은 자리가 너무나 분명하게 정리되어 있어서 다른 생각을 하기 어려울 겁니다. 공부하기 싫지만 낮은 자리를 면하기 위해서, 높은 자리에 올라서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공부해야겠지요. 다른 일반 신자들의 생각도 여기서 크게 다르지 않을 겁니다. 자기 자신이나 자식들이 이 사회의 상층에 속하는 판사, 변호사나 의사, 기업가가 되는 걸 최고의 자랑으로 생각할 겁니다. 높은 자리에 대한 관심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교회생활에서 가장 큰 관심도 역시 교회 부흥에 놓여 있습니다. 자립도 못하는 작은 교회를 받아들이는 게 곧 하나님을 받아들이는 것과 같다고 생각하는 신자들이 얼마나 될까요?
저는 사람들의 그런 소박한 생각 자체를 이상하다고 말씀드리는 게 아닙니다. 일부러 가난하게 살아야 한다거나 사회생활에서 뒤쳐져야 한다는 말씀도 아닙니다. 또는 늘 가난한 사람과 소외된 사람들과만 함께 지내야 한다는 말씀도 아닙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이 청빈과 윤리적인 삶을 중요하게 제시하기는 하지만 그것을 억지로 강요하지는 않습니다.
오늘 말씀은 누가 제일 높으냐, 하고 서로 다투고 있는 제자들에게 주신 말씀이라는 사실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모든 사람들은 높은 자리, 고상한 인격과 문화생활, 우아한 종교생활을 절대적인 것으로 생각하고 삽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통치가 그런 것과 근본적으로 차원을 달리한다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천하다고 생각하는 그런 자리에서도 자신의 구원을 행사하십니다. 세리와 죄인들도 역시 아브라함의 자손입니다. 아니 그들은 자신의 업적을 내세우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바리새인들보다 하나님 나라에 더 가깝습니다.
여러분, 오늘 말씀은 높음과 낮음에 대한 우리의 생각이 얼마나 가소로운지를 알라는 경고입니다. 제일 낮은 사람이 제일 높은 사람이라는 이 역설을 실질적으로 알아들어야 합니다. 구원의 리얼리티인 기쁨, 자유, 평화, 사랑은 높고 낮음과 전혀 상관없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이라는 점에서 이 말씀은 옳습니다. 이 선물을 받은 사람은 아무리 낮은 자리에 처했어도 주눅이 들지 않으며, 낮은 사람 앞에서 교만하지 않습니다. 그들과 함께 하나님의 구원을 함께 일구는 일에 최선을 다 합니다. 이런 삶에는 높음과 낮음이 실제로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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