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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창16:7-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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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이정원 목사 |
참고 : | 참사랑교회 http://charmjoun.net |
2003·10·25
사람이 어떻게 예수 믿고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을까요? 믿음 좋은 부모에게서 태어나면 될까요? 대개 믿음 좋은 부모 밑에서 태어나고 자란 사람들은 믿고 구원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경우도 얼마든지 볼 수 있습니다. ‘신은 죽었다’고 외쳤던 니체도 목사의 아들이었다고 합니다. 반면에 오랫동안 우상을 섬기던 가정에서 태어나 자란 사람들 중에서 예수 믿고 구원받은 사람들이 얼마든지 많습니다. 그렇다면 예수 믿고 구원받는 것은 출생이나 환경에 의해서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럼 사람들은 어떻게 예수를 믿고 구원받게 되는 것일까요? 주님께서 이 문제에 대해서 분명하게 말씀해주셨습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난 자들이니라”(요1:12-13) 하나님께서 친히 택하사 마음을 열어 믿게 하셔야만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스마엘에게서 이 사실을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아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었습니다. 얼마나 큰 은혜이며 축복입니까?
인간의 실패를 은혜로 덮으시는 하나님
아브라함과 사라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고 인간적인 방법을 사용한 결과 그 가정에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사라의 몸종 하갈은 자신이 아브라함의 아이를 잉태한 것을 알고 여주인 사라를 멸시했습니다. 사라는 이 문제를 가지고 아브라함을 비난하고 공격했습니다. 아브라함은 가장으로서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사라에게 마음대로 처리하라고 말했습니다. 사라는 하갈을 학대했고, 하갈은 사라의 학대를 견디지 못하여 도망치고 말았습니다. 가정의 질서가 파괴되고, 하나님 백성의 권위와 품위가 땅에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의 가정에는 하나님의 은총이 사라지고 어두운 그림자가 덮이게 되었습니다.
특히 사라가 아브라함의 아이를 잉태한 채 집을 나가 도망쳐버렸다는 것은 매우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만일 하갈이 이대로 나가서 죽는다면 그것은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잊을 수 없는 상처가 되지 않겠습니까? 하갈이 스스로 아브라함의 아이를 잉태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일은 사라가 생각해낸 것이었으며 아브라함이 동의했던 것입니다. 하갈에게 아브라함의 아이를 잉태케 한 것은 아브라함과 사라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그 여종을 학대하여 도망치게 하고, 도망친 여종이 밖에 나가 굶어죽거나 들짐승들에게 물려 죽는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사람들이 이것을 보고 뭐라고 말하겠습니까? 자기 집에 있는 종 하나도 제대로 돌보지 못하는 주제에 무슨 복의 근원이 되겠느냐고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을 누가 믿겠습니까? 그것은 또 얼마나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일이 되겠습니까?
네 여주인에게 돌아가라.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엉망진창이 되어버린 문제를 수습하시기 위해서 친히 이 문제에 개입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광야로 도망친 하갈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사래의 여종 하갈아,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 이 질문은 하갈의 양심을 자극하고 그녀의 본분을 기억하게 하는 질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질문에 대하여 하갈은 “나는 나의 여주인 사래를 피하여 도망하나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갈에게 “네 여주인에게로 돌아가서 그 수하에 복종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광야로 도망쳐 나온 하갈은 매우 심한 곤경에 빠졌던 것 같습니다. 광야는 마실 물과 먹을 음식이 없는 곳이었기 때문에 굶어죽을 위험에 처해졌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곤경에 처한 하갈에게 나타나셔서 여주인에게로 돌아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갈은 주인을 멸시하고 거역한 죄를 회개하고 집으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그러나 하갈에게 다시 돌아가는 일은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의 집에는 그녀를 학대하는 사라가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하갈이 다시 돌아가 여주인 사라의 수하에 복종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돌아갔을 때 하갈은 비로소 안전하고 평안해질 수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평안을 얻고자 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마음이 편치 못하고 괴로운 것은 순종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갈등이 있는 것은 자아를 포기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자아를 깨뜨려 순종하기 전에는 우리는 결코 참 평안을 얻을 수 없습니다. 내 생각과 고집을 버리고 겸손히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하면 참된 평안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이스마엘도 사랑하신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하갈에게 그녀가 아들을 낳을 것인데 그 아들의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11절). 그리고 그의 자손이 크게 번성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10절).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사라의 불신앙과 실수로 태어나게 될 이스마엘까지도 축복해주셨습니다.
또 하갈이 낳을 아들 이스마엘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가 사람 중에 들나귀 같이 되리니 그 손이 모든 사람을 치겠고 모든 사람의 손이 그를 칠찌며 그가 모든 형제의 동방에서 살리라”(12절) 이 말씀 가운데서 우리는 장차 이스마엘의 자손들이 어떤 삶을 살아가게 될 것인가를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들나귀처럼 사납고 길들여지지 않는 기질을 가지게 될 것이며, 모든 민족과 적대적인 관계를 가지고 살게 될 것이었습니다. 지금의 아랍 민족들이 바로 이스마엘의 후손들입니다. 이들은 역사적으로 많은 테러와 폭력을 자행해왔습니다. 최근 미국의 무역빌딩을 여객기로 폭파해서 수천 명의 사람을 죽게 한 911 사태도 이들이 저지른 일이었습니다. 특히 유대인들에 대한 이들의 적개심은 얼마나 뿌리 깊고 집요한지 모릅니다. 그들은 지금도 끊임없이 테러를 계획하고 실행에 옮기고 있습니다.
이스마엘의 출생에 관하여
아브라함과 사라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끝까지 기다렸더라면 이스마엘은 태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들이 불신앙적이고 인간적인 방법을 사용한 결과 태어난 아들이 바로 이스마엘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마엘은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아들, 태어날 필요가 없는 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왜 잘못 태어난 이스마엘의 출생에 대해서 왜 이렇게 자세히 기록하고 있을까요? 거기에는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스마엘을 낳은 후 100세에 이삭을 낳았습니다. 이스마엘과 이삭은 같은 아브라함의 아들입니다. 그런데 이삭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이스마엘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지 못했습니다. 이삭은 하나님의 큰 축복을 받았고, 이스마엘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왜 같은 아브라함의 아들인데 이렇게 다를까요? 그것은 이 두 아들이 근본적인 차이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삭은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태어난 아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마엘은 하나님의 말씀과는 전혀 상관없이 사라의 몸종인 애굽 여자 하갈에게서 태어났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 백성이 되는가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려면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정하신 바가 있어야만 합니다. 같은 아브라함에게서 태어났지만 이스마엘은 하나님의 말씀과 상관없이 태어났고, 이삭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따라 태어났습니다. 아브라함에게서 태어났다고 해서 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 좋은 부모에게서 태어났다고 해서 그 사람이 자동적으로 하나님 백성이 되지는 않습니다. 착한 심성을 가지고 태어나서 좋은 교육을 받는 것으로 하나님 백성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백성은 하나님의 택하심과 부르심을 통해서 됩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이것이 너무나도 신비롭고 오묘하여 기적중의 기적이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자신만 보아도 그렇습니다. 어떻게 나 같은 사람이 예수 믿고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가 있었을까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나를 택하시고, 성령께서 내 마음에 오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의심없이 믿게 해주셨습니다. 말씀과 성령으로 거듭나게 하신 것입니다. 완전히 새 사람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부모를 잘 만나서 된 것도 아니요, 내가 착해서 된 것도 아니며, 열심히 노력해서 된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택하셔서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해주신 것이 얼마나 큰 은혜이며 축복입니까? 우리는 이 구원의 은혜를 생각할 때마다 감격하며 감사할 것밖에 없습니다.
들나귀
하나님께서는 이스마엘이 들나귀 같은 자가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가 사람 중에 들나귀 같이 되리니 그 손이 모든 사람을 치겠고 모든 사람의 손이 그를 칠찌며 그가 모든 형제의 동방에서 살리라”(12절) 이것은 이스마엘의 기질에 대한 말씀입니다. 들나귀는 좀처럼 길들여지지 않는 강한 야생을 가진 짐승입니다. 이 말씀은 이스마엘은 도저히 하나님 말씀으로 길들여지지 않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이스마엘이 결코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들나귀와 같은 기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을 주시고 선지자들을 부지런히 보내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저희가 홀로 처한 들나귀처럼 앗수르로 갔고 에브라임은 값 주고 연애하는 자들을 얻었도다”(호8:9)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끝까지 자기 마음대로 범죄하여 결국 멸망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사람은 다 들나귀 같은 기질을 가지고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이 예외없이 범죄하여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를 당할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3:10-12) 따라서 사람은 아무도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사 들나귀 같은 우리의 죄를 십자가에서 대신 담당하게 하심으로 우리를 구원해주셨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53:6) 들나귀 같은 우리가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게 된 것입니다.
들나귀 같은 기질을 버리라.
모든 사람이 들나귀 같은 기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구원받은 성도들도 이러한 기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 백성된 성도라면 마땅히 하나님 말씀의 말씀에 순종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그렇지 못합니다. 여전히 내 마음대로 하고 싶어 합니다. 기어이 죄를 짓고야 맙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과 성령으로 이러한 우리의 들나귀 기질을 변화시키십니다. 그런데 끝까지 말씀과 성령으로 길들여지지 않으려고 하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예배만 마치면 누가 뭐래도 바로 예배당을 빠져나가 버립니다. 절대로 성경공부에는 참여하지 않기로 결심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교회를 그렇게 오래 다녔으면서도 말씀을 묵상하거나 기도하는 일을 절대로 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목사가 아무리 강조해도 들은 척도 하지 않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들나귀 같은 성도들입니다. 그것이 좋은 것입니까? 가장 치명적인 것입니다. 이것을 꺾지 않으면 절대로 믿음이 자라지 않습니다. 변화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아무리 믿어도 변화되지 않는 사람, 아무리 말씀을 들어도 자신과는 무관하게 생각하는 사람, 끝까지 들나귀 기질을 고집하는 사람은 이스마엘입니다. 그 사람은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것입니다. 오늘 당신은 어떻습니까?
오늘 우리 모두가 내 안에 있는 들나귀 기질을 버리기 원합니다. 이것을 꺾어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시켜야 할 것입니다. 들나귀 기질이 꺾이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힘입지 못합니다. 자아가 철저히 죽어지기를 바랍니다. 세상과 나는 간 곳 없고 구속한 주만 보이기를 바랍니다. 이제 내 안에 사는 것은 나 자신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기를 바랍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2:20)
감찰하시는 하나님
하갈은 아브라함의 아이를 잉태한 채로 광야로 도망쳤습니다. 그러나 광야는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이었습니다. 더구나 하갈은 아이를 잉태한 나이 어린 여자였습니다. 하갈은 광야에서 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하갈에게 나타나셔서 위로해주시고 아이의 장래에 대해 말씀해주셨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하갈에게 나타나신 것은 하갈 자신에게도 뜻밖의 일이었습니다. 그녀는 지금까지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시며, 아브라함의 집에서나 나타나시는 분으로 알았습니다. 그런데 이 광야에서, 그것도 여주인에게서 도망쳐 나온 자신에게 하나님께서 나타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갈은 이렇게말했습니다. “하갈이 자기에게 이르신 여호와의 이름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이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어떻게 여기서 나를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뵈었는고 함이라”(13절)
하나님께서는 언제 어디서나 우리를 지켜보시며 돌보아 주십니다.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통촉하시오며 나의 길과 눕는 것을 감찰하시며 나의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주께서 나의 전후를 두르시며 내게 안수하셨나이다 이 지식이 내게 너무 기이하니 높아서 내가 능히 미치지 못하나이다”(시139:2-6) 하나님께서 항상 나를 지켜보고 계신다는 것은 불순종하는 사람들에게는 너무나도 부담스럽고 두려운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성도, 하나님 뵙기를 원하는 성도에게는 말할 수 없이 큰 은혜요 축복입니다.
하갈은 광야에서 뜻밖에도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하나님을 만난 하갈은 너무나도 놀라고 감격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같은 여종까지도 사랑하시고 귀하게 여겨주신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만난 사라는 여주인에 대한 분노와 원한도 다 풀렸습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갈 용기를 갖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이 얼마나 귀하고 복된 일입니까? 오늘 당신도 이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 만나게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중에 하나님의 음성 듣게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어루만지시는 손길을 체험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세상에 수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그 중에서 특별히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아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특별히 사랑해주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구원받아 천국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크고 귀한 은혜입니까? 이제부터 우리는 들나귀 같은 기질을 죽이고 버려야 합니다. 그래서 구원받은 하나님 백성다운 모습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하나님 뵙기를 사모하십시오. 하나님께서 반드시 당신을 만나주실 것입니다. 하나님 만난 사람은 아름답게 변화되고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된 우리를 기꺼이 만나주십니다.
사람이 어떻게 예수 믿고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을까요? 믿음 좋은 부모에게서 태어나면 될까요? 대개 믿음 좋은 부모 밑에서 태어나고 자란 사람들은 믿고 구원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경우도 얼마든지 볼 수 있습니다. ‘신은 죽었다’고 외쳤던 니체도 목사의 아들이었다고 합니다. 반면에 오랫동안 우상을 섬기던 가정에서 태어나 자란 사람들 중에서 예수 믿고 구원받은 사람들이 얼마든지 많습니다. 그렇다면 예수 믿고 구원받는 것은 출생이나 환경에 의해서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럼 사람들은 어떻게 예수를 믿고 구원받게 되는 것일까요? 주님께서 이 문제에 대해서 분명하게 말씀해주셨습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난 자들이니라”(요1:12-13) 하나님께서 친히 택하사 마음을 열어 믿게 하셔야만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스마엘에게서 이 사실을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아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었습니다. 얼마나 큰 은혜이며 축복입니까?
인간의 실패를 은혜로 덮으시는 하나님
아브라함과 사라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고 인간적인 방법을 사용한 결과 그 가정에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사라의 몸종 하갈은 자신이 아브라함의 아이를 잉태한 것을 알고 여주인 사라를 멸시했습니다. 사라는 이 문제를 가지고 아브라함을 비난하고 공격했습니다. 아브라함은 가장으로서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사라에게 마음대로 처리하라고 말했습니다. 사라는 하갈을 학대했고, 하갈은 사라의 학대를 견디지 못하여 도망치고 말았습니다. 가정의 질서가 파괴되고, 하나님 백성의 권위와 품위가 땅에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의 가정에는 하나님의 은총이 사라지고 어두운 그림자가 덮이게 되었습니다.
특히 사라가 아브라함의 아이를 잉태한 채 집을 나가 도망쳐버렸다는 것은 매우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만일 하갈이 이대로 나가서 죽는다면 그것은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잊을 수 없는 상처가 되지 않겠습니까? 하갈이 스스로 아브라함의 아이를 잉태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일은 사라가 생각해낸 것이었으며 아브라함이 동의했던 것입니다. 하갈에게 아브라함의 아이를 잉태케 한 것은 아브라함과 사라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그 여종을 학대하여 도망치게 하고, 도망친 여종이 밖에 나가 굶어죽거나 들짐승들에게 물려 죽는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사람들이 이것을 보고 뭐라고 말하겠습니까? 자기 집에 있는 종 하나도 제대로 돌보지 못하는 주제에 무슨 복의 근원이 되겠느냐고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을 누가 믿겠습니까? 그것은 또 얼마나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일이 되겠습니까?
네 여주인에게 돌아가라.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엉망진창이 되어버린 문제를 수습하시기 위해서 친히 이 문제에 개입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광야로 도망친 하갈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사래의 여종 하갈아,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 이 질문은 하갈의 양심을 자극하고 그녀의 본분을 기억하게 하는 질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질문에 대하여 하갈은 “나는 나의 여주인 사래를 피하여 도망하나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갈에게 “네 여주인에게로 돌아가서 그 수하에 복종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광야로 도망쳐 나온 하갈은 매우 심한 곤경에 빠졌던 것 같습니다. 광야는 마실 물과 먹을 음식이 없는 곳이었기 때문에 굶어죽을 위험에 처해졌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곤경에 처한 하갈에게 나타나셔서 여주인에게로 돌아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갈은 주인을 멸시하고 거역한 죄를 회개하고 집으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그러나 하갈에게 다시 돌아가는 일은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의 집에는 그녀를 학대하는 사라가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하갈이 다시 돌아가 여주인 사라의 수하에 복종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돌아갔을 때 하갈은 비로소 안전하고 평안해질 수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평안을 얻고자 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마음이 편치 못하고 괴로운 것은 순종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갈등이 있는 것은 자아를 포기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자아를 깨뜨려 순종하기 전에는 우리는 결코 참 평안을 얻을 수 없습니다. 내 생각과 고집을 버리고 겸손히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하면 참된 평안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이스마엘도 사랑하신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하갈에게 그녀가 아들을 낳을 것인데 그 아들의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11절). 그리고 그의 자손이 크게 번성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10절).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사라의 불신앙과 실수로 태어나게 될 이스마엘까지도 축복해주셨습니다.
또 하갈이 낳을 아들 이스마엘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가 사람 중에 들나귀 같이 되리니 그 손이 모든 사람을 치겠고 모든 사람의 손이 그를 칠찌며 그가 모든 형제의 동방에서 살리라”(12절) 이 말씀 가운데서 우리는 장차 이스마엘의 자손들이 어떤 삶을 살아가게 될 것인가를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들나귀처럼 사납고 길들여지지 않는 기질을 가지게 될 것이며, 모든 민족과 적대적인 관계를 가지고 살게 될 것이었습니다. 지금의 아랍 민족들이 바로 이스마엘의 후손들입니다. 이들은 역사적으로 많은 테러와 폭력을 자행해왔습니다. 최근 미국의 무역빌딩을 여객기로 폭파해서 수천 명의 사람을 죽게 한 911 사태도 이들이 저지른 일이었습니다. 특히 유대인들에 대한 이들의 적개심은 얼마나 뿌리 깊고 집요한지 모릅니다. 그들은 지금도 끊임없이 테러를 계획하고 실행에 옮기고 있습니다.
이스마엘의 출생에 관하여
아브라함과 사라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끝까지 기다렸더라면 이스마엘은 태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들이 불신앙적이고 인간적인 방법을 사용한 결과 태어난 아들이 바로 이스마엘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마엘은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아들, 태어날 필요가 없는 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왜 잘못 태어난 이스마엘의 출생에 대해서 왜 이렇게 자세히 기록하고 있을까요? 거기에는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스마엘을 낳은 후 100세에 이삭을 낳았습니다. 이스마엘과 이삭은 같은 아브라함의 아들입니다. 그런데 이삭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이스마엘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지 못했습니다. 이삭은 하나님의 큰 축복을 받았고, 이스마엘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왜 같은 아브라함의 아들인데 이렇게 다를까요? 그것은 이 두 아들이 근본적인 차이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삭은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태어난 아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마엘은 하나님의 말씀과는 전혀 상관없이 사라의 몸종인 애굽 여자 하갈에게서 태어났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 백성이 되는가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려면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정하신 바가 있어야만 합니다. 같은 아브라함에게서 태어났지만 이스마엘은 하나님의 말씀과 상관없이 태어났고, 이삭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따라 태어났습니다. 아브라함에게서 태어났다고 해서 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 좋은 부모에게서 태어났다고 해서 그 사람이 자동적으로 하나님 백성이 되지는 않습니다. 착한 심성을 가지고 태어나서 좋은 교육을 받는 것으로 하나님 백성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백성은 하나님의 택하심과 부르심을 통해서 됩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이것이 너무나도 신비롭고 오묘하여 기적중의 기적이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자신만 보아도 그렇습니다. 어떻게 나 같은 사람이 예수 믿고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가 있었을까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나를 택하시고, 성령께서 내 마음에 오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의심없이 믿게 해주셨습니다. 말씀과 성령으로 거듭나게 하신 것입니다. 완전히 새 사람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부모를 잘 만나서 된 것도 아니요, 내가 착해서 된 것도 아니며, 열심히 노력해서 된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택하셔서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해주신 것이 얼마나 큰 은혜이며 축복입니까? 우리는 이 구원의 은혜를 생각할 때마다 감격하며 감사할 것밖에 없습니다.
들나귀
하나님께서는 이스마엘이 들나귀 같은 자가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가 사람 중에 들나귀 같이 되리니 그 손이 모든 사람을 치겠고 모든 사람의 손이 그를 칠찌며 그가 모든 형제의 동방에서 살리라”(12절) 이것은 이스마엘의 기질에 대한 말씀입니다. 들나귀는 좀처럼 길들여지지 않는 강한 야생을 가진 짐승입니다. 이 말씀은 이스마엘은 도저히 하나님 말씀으로 길들여지지 않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이스마엘이 결코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들나귀와 같은 기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을 주시고 선지자들을 부지런히 보내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저희가 홀로 처한 들나귀처럼 앗수르로 갔고 에브라임은 값 주고 연애하는 자들을 얻었도다”(호8:9)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끝까지 자기 마음대로 범죄하여 결국 멸망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사람은 다 들나귀 같은 기질을 가지고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이 예외없이 범죄하여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를 당할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3:10-12) 따라서 사람은 아무도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사 들나귀 같은 우리의 죄를 십자가에서 대신 담당하게 하심으로 우리를 구원해주셨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53:6) 들나귀 같은 우리가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게 된 것입니다.
들나귀 같은 기질을 버리라.
모든 사람이 들나귀 같은 기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구원받은 성도들도 이러한 기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 백성된 성도라면 마땅히 하나님 말씀의 말씀에 순종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그렇지 못합니다. 여전히 내 마음대로 하고 싶어 합니다. 기어이 죄를 짓고야 맙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과 성령으로 이러한 우리의 들나귀 기질을 변화시키십니다. 그런데 끝까지 말씀과 성령으로 길들여지지 않으려고 하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예배만 마치면 누가 뭐래도 바로 예배당을 빠져나가 버립니다. 절대로 성경공부에는 참여하지 않기로 결심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교회를 그렇게 오래 다녔으면서도 말씀을 묵상하거나 기도하는 일을 절대로 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목사가 아무리 강조해도 들은 척도 하지 않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들나귀 같은 성도들입니다. 그것이 좋은 것입니까? 가장 치명적인 것입니다. 이것을 꺾지 않으면 절대로 믿음이 자라지 않습니다. 변화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아무리 믿어도 변화되지 않는 사람, 아무리 말씀을 들어도 자신과는 무관하게 생각하는 사람, 끝까지 들나귀 기질을 고집하는 사람은 이스마엘입니다. 그 사람은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것입니다. 오늘 당신은 어떻습니까?
오늘 우리 모두가 내 안에 있는 들나귀 기질을 버리기 원합니다. 이것을 꺾어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시켜야 할 것입니다. 들나귀 기질이 꺾이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힘입지 못합니다. 자아가 철저히 죽어지기를 바랍니다. 세상과 나는 간 곳 없고 구속한 주만 보이기를 바랍니다. 이제 내 안에 사는 것은 나 자신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기를 바랍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2:20)
감찰하시는 하나님
하갈은 아브라함의 아이를 잉태한 채로 광야로 도망쳤습니다. 그러나 광야는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이었습니다. 더구나 하갈은 아이를 잉태한 나이 어린 여자였습니다. 하갈은 광야에서 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하갈에게 나타나셔서 위로해주시고 아이의 장래에 대해 말씀해주셨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하갈에게 나타나신 것은 하갈 자신에게도 뜻밖의 일이었습니다. 그녀는 지금까지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시며, 아브라함의 집에서나 나타나시는 분으로 알았습니다. 그런데 이 광야에서, 그것도 여주인에게서 도망쳐 나온 자신에게 하나님께서 나타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갈은 이렇게말했습니다. “하갈이 자기에게 이르신 여호와의 이름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이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어떻게 여기서 나를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뵈었는고 함이라”(13절)
하나님께서는 언제 어디서나 우리를 지켜보시며 돌보아 주십니다.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통촉하시오며 나의 길과 눕는 것을 감찰하시며 나의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주께서 나의 전후를 두르시며 내게 안수하셨나이다 이 지식이 내게 너무 기이하니 높아서 내가 능히 미치지 못하나이다”(시139:2-6) 하나님께서 항상 나를 지켜보고 계신다는 것은 불순종하는 사람들에게는 너무나도 부담스럽고 두려운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성도, 하나님 뵙기를 원하는 성도에게는 말할 수 없이 큰 은혜요 축복입니다.
하갈은 광야에서 뜻밖에도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하나님을 만난 하갈은 너무나도 놀라고 감격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같은 여종까지도 사랑하시고 귀하게 여겨주신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만난 사라는 여주인에 대한 분노와 원한도 다 풀렸습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갈 용기를 갖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이 얼마나 귀하고 복된 일입니까? 오늘 당신도 이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 만나게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중에 하나님의 음성 듣게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어루만지시는 손길을 체험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세상에 수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그 중에서 특별히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아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특별히 사랑해주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구원받아 천국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크고 귀한 은혜입니까? 이제부터 우리는 들나귀 같은 기질을 죽이고 버려야 합니다. 그래서 구원받은 하나님 백성다운 모습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하나님 뵙기를 사모하십시오. 하나님께서 반드시 당신을 만나주실 것입니다. 하나님 만난 사람은 아름답게 변화되고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된 우리를 기꺼이 만나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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