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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예화 542. 한나라 회음후 한신 대장군
淮陰漂母(회음표모)-跨下之辱(과하지욕)-背水陣(배수진)-多多益善(다다익선) 등의 고사성어는 모두 楚漢戰(초한전)의 영웅 한나라 淮陰侯 韓信 大將軍(회음후 한신 대장군)과 관련된 것입니다.
한신은 중국 江蘇省 淮陰(강소성 회음) 출신의 몰락한 왕손이었다. 한신은 성 밖 강에서 매일 굶주린 채 낚시를 하였다. 강에 빨래하러 나온 여인들 중 하나가 한신을 동정하여 수십 일 동안 점심을 나눠 주었다. 한신 왈 “고맙소, 훗날 내가 뜻을 이루면 크게 보답 하겠소”. 그러자 여인 크게 노하여 왈 “사내 대장부가 제 밥벌이도 못하는 주제에 그 무슨 헛된 소리요. 그래도 왕손인데 굶기를 밥 먹듯 하는 것이 불쌍해서 내가 좀 도와주었을 뿐이오. 내가 그대의 큰 보답을 바라고 도운 것이 아니오!” 하였다. 이것을 淮陰漂母(회음표모)라 한다.
고려시대 李齊賢(이제현 1287-1367)은 淮陰漂母墓(회음표모묘)라는 시를 남겼다.
婦人猶解識英雄(부인유해식영웅: 오히려 한 부인이 영웅을 알아보았구나)
一見慇懃慰困窮(일견은근위곤궁: 부인은 곤궁한 한신을 불쌍히 여겨 돌아보았네)
自棄爪牙資敵國(자기조아자적국: 스스로 인재를 버림으로 적국을 도왔구나)
項王無賴目重瞳(항왕무뢰목중동: 항우의 눈동자가 둘이란 건 다 부질없는 소리다)
훗날 한신은 회음후가 되어 표모를 찾았으나 그 녀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고 그 녀의 무덤을 제후의 무덤만큼 크게 만들어 주는 것으로 一簞食一瓢飮-일단사일표음에 보답하였다. 사진으로 보니 그 녀의 무덤은 경주 왕릉만큼 컸다.
한신은 비록 가난하였으나 왕손의 품위를 잃지 않기 위하여 왕손 신분을 나타내는 칼을 항상 차고 다녔다. 어느 날 저자거리를 지나다가 같은 왕손 출신 건달들을 만났다. 패거리의 우두머리는 “어이, 한신, 꼴에 왕손이라고 칼은 차고 다니는구나. 나와 한번 겨루어 보자! 네가 죽을 각오가 되어 있다면 그 칼로 나를 찌르라, 그리하지 못하겠거든 내 다리 아래를 기어가라” 하며 시비를 걸어왔다. 많은 구경꾼들이 모여 들었다. 한신은 피하려고 하였다. 의기양양해진 우두머리는 “네 놈이 나의 사타구니 아래로 기어서 지나간다면 모르거니와, 오늘 이 한 판은 피할 수 없을 것이야!” 하였다. 사마천의 사기 淮陰侯列傳(회음후열전)에 의하면 이 때의 장면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於是韓信孰視之 俛出跨下 蒲伏(어시한신숙시지 면출과하 포복)-이 때 한신은 그 우두머리를 말없이 한참 동안 孰視(숙시)하다가-노려보다가 머리를 숙이고 무릎을 꿇고 그의 가랑아 사이로 蒲伏(포복)하여 지났다! 기었다는 말이다. 이것을 跨下之辱(과하지욕) 이라 한다.
自己否認(자기부인)이란 이렇게 참는 것이다!
淮陰漂母(회음표모)-跨下之辱(과하지욕)-背水陣(배수진)-多多益善(다다익선) 등의 고사성어는 모두 楚漢戰(초한전)의 영웅 한나라 淮陰侯 韓信 大將軍(회음후 한신 대장군)과 관련된 것입니다.
한신은 중국 江蘇省 淮陰(강소성 회음) 출신의 몰락한 왕손이었다. 한신은 성 밖 강에서 매일 굶주린 채 낚시를 하였다. 강에 빨래하러 나온 여인들 중 하나가 한신을 동정하여 수십 일 동안 점심을 나눠 주었다. 한신 왈 “고맙소, 훗날 내가 뜻을 이루면 크게 보답 하겠소”. 그러자 여인 크게 노하여 왈 “사내 대장부가 제 밥벌이도 못하는 주제에 그 무슨 헛된 소리요. 그래도 왕손인데 굶기를 밥 먹듯 하는 것이 불쌍해서 내가 좀 도와주었을 뿐이오. 내가 그대의 큰 보답을 바라고 도운 것이 아니오!” 하였다. 이것을 淮陰漂母(회음표모)라 한다.
고려시대 李齊賢(이제현 1287-1367)은 淮陰漂母墓(회음표모묘)라는 시를 남겼다.
婦人猶解識英雄(부인유해식영웅: 오히려 한 부인이 영웅을 알아보았구나)
一見慇懃慰困窮(일견은근위곤궁: 부인은 곤궁한 한신을 불쌍히 여겨 돌아보았네)
自棄爪牙資敵國(자기조아자적국: 스스로 인재를 버림으로 적국을 도왔구나)
項王無賴目重瞳(항왕무뢰목중동: 항우의 눈동자가 둘이란 건 다 부질없는 소리다)
훗날 한신은 회음후가 되어 표모를 찾았으나 그 녀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고 그 녀의 무덤을 제후의 무덤만큼 크게 만들어 주는 것으로 一簞食一瓢飮-일단사일표음에 보답하였다. 사진으로 보니 그 녀의 무덤은 경주 왕릉만큼 컸다.
한신은 비록 가난하였으나 왕손의 품위를 잃지 않기 위하여 왕손 신분을 나타내는 칼을 항상 차고 다녔다. 어느 날 저자거리를 지나다가 같은 왕손 출신 건달들을 만났다. 패거리의 우두머리는 “어이, 한신, 꼴에 왕손이라고 칼은 차고 다니는구나. 나와 한번 겨루어 보자! 네가 죽을 각오가 되어 있다면 그 칼로 나를 찌르라, 그리하지 못하겠거든 내 다리 아래를 기어가라” 하며 시비를 걸어왔다. 많은 구경꾼들이 모여 들었다. 한신은 피하려고 하였다. 의기양양해진 우두머리는 “네 놈이 나의 사타구니 아래로 기어서 지나간다면 모르거니와, 오늘 이 한 판은 피할 수 없을 것이야!” 하였다. 사마천의 사기 淮陰侯列傳(회음후열전)에 의하면 이 때의 장면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於是韓信孰視之 俛出跨下 蒲伏(어시한신숙시지 면출과하 포복)-이 때 한신은 그 우두머리를 말없이 한참 동안 孰視(숙시)하다가-노려보다가 머리를 숙이고 무릎을 꿇고 그의 가랑아 사이로 蒲伏(포복)하여 지났다! 기었다는 말이다. 이것을 跨下之辱(과하지욕) 이라 한다.
自己否認(자기부인)이란 이렇게 참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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