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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귀한 세가지 금은 황금, 소금, 지금 이라고 한다. 나도 좋아하는 세가지 금이 있다. 현금, 지금, 입금 이다 ㅋㅋㅋ(햇볕같은이야기 사역 후원 클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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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예화 546. The only is the best!
이 세상의 모든 분야(목회-정치-비즈니스-학문-예술-스포츠-과학 등)에서 남다른 성공을 이룬 사람들은 모두 그 자신만의 독특한 방식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남과 다른 오직 자기만이 할 수 있는 자기다운 방식으로 성공한 것입니다. 오직, 하나! 유일한 것이 곧 최고입니다(The only is the best!).
대만 제일의 갑부 왕융칭 포모사 회장도 그 대표적 사례입니다. 왕융칭은 가난하게 태어나 어려서부터 장사 길에 들어섰습니다. 왕은 1932년 16세 나이에 고향을 떠나 “자이” 라는 곳에서 쌀가게를 열었습니다. 자이에는 이미 30여 군데 쌀가게가 경쟁하고 있었습니다. 자본도 약하고 인맥도 없고 뒷골목에 위치한 그의 쌀가게를 찾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왕은 생각다 못해 직접 쌀자루를 메고 집집마다 찾아 다니며 팔아보았지만 별 소득이 없었습니다. 왕은 다른 가게에는 없는 자신만의 특별한 長點(장점)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절감하였습니다.
당시는 쌀의 도정 과정이 수동이었기 때문에 쌀에 잔돌과 모래가 섞여 있어 밥을 짓기 전에 쌀을 일어야 했습니다. 쌀을 파는 사람이나 사 먹는 사람이나 당연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모두들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이 작은 점에서 왕은 자기만의 장점을 찾아냈습니다. 왕은 두 동생을 동원하여 쌀에 섞인 잔돌과 모래를 모두 골라 낸 후 쌀을 팔기 시작한 것입니다. 얼마 후 “왕융칭네 가게 쌀은 밥 할 때 따로 쌀을 일 필요가 없다!” 하는 소문이 나면서 단골이 늘어나기 시작하였습니다. 마켓팅이란 판매의 예술이자, 다른 사람을 만족시키는 봉사이며, 가격 대비 품질을 높이는 지혜입니다. 왕은 같은 쌀이었지만 고객들이 쌀을 이는 수고를 덜어주는 서비스를 제공함으로서 다른 가게와의 차별화에 성공하였던 것입니다.
왕은 여기서 서비스의 힘을 깨달았습니다. 지금은 많이 달라졌지만 당시에는 쌀을 산 사람이 쌀을 가지고 가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젊은이라면 몰라도 여인이나 나이 든 노인에게는 쌀을 운반한다는 것이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 집의 장정들이 생계를 위하여 낮에 일을 하러 나가기 때문에 쌀을 사러 오는 사람들은 대개 여인이나 노인이었습니다. 왕은 이런 현실을 좌시하지 않고 고객의 집까지 쌀을 배달해 주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왕은 쌀을 배달하고, 그 집의 쌀독 크기, 어른-아이의 구체적인 가족 수, 식사량 등을 꼼꼼히 기록하였다가 고객이 쌀을 사러오기 전에 미리 쌀을 배달하였습니다. 혹간 고객이 쌀을 쌀독에 부어달라고 하는 경우, 쌀독에 남아 있는 쌀을 모두 퍼내고 쌀독을 깨끗이 닦고 새 쌀을 먼저 담은 후 남아 있던 쌀을 그 위에 부었습니다. 묵은 쌀의 변질을 막기 위한 조처였습니다.
왕융칭의 배달서비스는 오늘날의 배달서비스에 비추어보더라도 매우 탁월한 것이었습니다. 오늘날의 배달서비스란 것이 고객의 물건을 단순히 전달하거나 기껏해야 고객이 원하는 자리에 배달 물건을 놓아주는 정도가 고작이니까 말입니다.
名不虛傳(명불허전)! 왕융칭이 대만 최고의 갑부가 된 것은 운이 아니었습니다.
<참고: 왕중추 지음, 허유영 옮김, 디테일의 힘, 올림출판사>
이 세상의 모든 분야(목회-정치-비즈니스-학문-예술-스포츠-과학 등)에서 남다른 성공을 이룬 사람들은 모두 그 자신만의 독특한 방식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남과 다른 오직 자기만이 할 수 있는 자기다운 방식으로 성공한 것입니다. 오직, 하나! 유일한 것이 곧 최고입니다(The only is the best!).
대만 제일의 갑부 왕융칭 포모사 회장도 그 대표적 사례입니다. 왕융칭은 가난하게 태어나 어려서부터 장사 길에 들어섰습니다. 왕은 1932년 16세 나이에 고향을 떠나 “자이” 라는 곳에서 쌀가게를 열었습니다. 자이에는 이미 30여 군데 쌀가게가 경쟁하고 있었습니다. 자본도 약하고 인맥도 없고 뒷골목에 위치한 그의 쌀가게를 찾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왕은 생각다 못해 직접 쌀자루를 메고 집집마다 찾아 다니며 팔아보았지만 별 소득이 없었습니다. 왕은 다른 가게에는 없는 자신만의 특별한 長點(장점)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절감하였습니다.
당시는 쌀의 도정 과정이 수동이었기 때문에 쌀에 잔돌과 모래가 섞여 있어 밥을 짓기 전에 쌀을 일어야 했습니다. 쌀을 파는 사람이나 사 먹는 사람이나 당연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모두들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이 작은 점에서 왕은 자기만의 장점을 찾아냈습니다. 왕은 두 동생을 동원하여 쌀에 섞인 잔돌과 모래를 모두 골라 낸 후 쌀을 팔기 시작한 것입니다. 얼마 후 “왕융칭네 가게 쌀은 밥 할 때 따로 쌀을 일 필요가 없다!” 하는 소문이 나면서 단골이 늘어나기 시작하였습니다. 마켓팅이란 판매의 예술이자, 다른 사람을 만족시키는 봉사이며, 가격 대비 품질을 높이는 지혜입니다. 왕은 같은 쌀이었지만 고객들이 쌀을 이는 수고를 덜어주는 서비스를 제공함으로서 다른 가게와의 차별화에 성공하였던 것입니다.
왕은 여기서 서비스의 힘을 깨달았습니다. 지금은 많이 달라졌지만 당시에는 쌀을 산 사람이 쌀을 가지고 가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젊은이라면 몰라도 여인이나 나이 든 노인에게는 쌀을 운반한다는 것이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 집의 장정들이 생계를 위하여 낮에 일을 하러 나가기 때문에 쌀을 사러 오는 사람들은 대개 여인이나 노인이었습니다. 왕은 이런 현실을 좌시하지 않고 고객의 집까지 쌀을 배달해 주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왕은 쌀을 배달하고, 그 집의 쌀독 크기, 어른-아이의 구체적인 가족 수, 식사량 등을 꼼꼼히 기록하였다가 고객이 쌀을 사러오기 전에 미리 쌀을 배달하였습니다. 혹간 고객이 쌀을 쌀독에 부어달라고 하는 경우, 쌀독에 남아 있는 쌀을 모두 퍼내고 쌀독을 깨끗이 닦고 새 쌀을 먼저 담은 후 남아 있던 쌀을 그 위에 부었습니다. 묵은 쌀의 변질을 막기 위한 조처였습니다.
왕융칭의 배달서비스는 오늘날의 배달서비스에 비추어보더라도 매우 탁월한 것이었습니다. 오늘날의 배달서비스란 것이 고객의 물건을 단순히 전달하거나 기껏해야 고객이 원하는 자리에 배달 물건을 놓아주는 정도가 고작이니까 말입니다.
名不虛傳(명불허전)! 왕융칭이 대만 최고의 갑부가 된 것은 운이 아니었습니다.
<참고: 왕중추 지음, 허유영 옮김, 디테일의 힘, 올림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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