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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행14:19-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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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필곤 목사 |
참고 : | 열린교회 http://www.yeolin.or.kr |
옛날에 짚신을 삼아 장터에 나가 파는 아버지와 아들이 있었답니다. 장터에 나란히 앉아 전을 벌이고 파는데 이상하게도 아버지 것은 쉽게 팔리는데 아들의 것은 팔리지 않았습니다. 아버지와 비교해 볼 때 아무리 봐도 기술에 차이가 없는데 어째서 자기 것이 팔리지 않는지 그 이유를 몰랐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에게 물었답니다. 그런데 아버지께서 가르쳐 주지 않았습니다. 임종 때 아들이 애원하며 물었습니다.“아버지, 돌아가시기 전에 제발 비결을 가르쳐 주십시오”아버지가 숨이 넘어가면서 해 준 말은 “털”한 마디였다고 합니다. 아들이 짚신을 다시 꼼꼼히 비교해 보니 아버지 것은 부푸러기가 잘 다듬어져 있었다고 합니다. 바로 비법은 끝마무리였다고 합니다. 상품가치는 끝마무리에 있다고 합니다. 끝마무리는 1%의 수고가 들어가지만 100%의 효과가 난다는 것입니다. 상품 뿐 아니라 인생살이도 그렇습니다. 대인 관계도 그렇습니다. 끝마무리가 좋아야 합니다. 직장 생활하면서 10년 동안 열심히 일했는데 마지막 마무리를 잘 못하면 사람들은 그 잘못한 것만 기억하고 그 직장은 추억의 직장이 될 수가 없습니다. 신앙 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지막 죽음의 순간까지 끝마무리를 잘 하는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바울과 바나바가 1차 선교 사역을 끝마무리하는 장면입니다. 이제까지 수리아 안디옥에서 출발하여 살라미, 바보, 앗달리아, 버가, 비디시아 안디옥, 이고니온, 루스드라, 더베까지 갔다 다시 돌아서 이고니온, 비디디아 안디옥, 버가, 앗달리아, 수리아 안디옥으로 돌아 와 선교 보고를 하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 직장을 마무리하고 다른 직장을 가는 것처럼, 한 학교를 마무리하고 상급학교에 진학하는 것처럼, 인생을 마무리하고 천국에 가는 것처럼 한 차례의 선교 여행을 마무리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근거로 우리가 어떻게 하면 모든 일에 있어서 끝마무리를 잘 할 수 있을 것인가를 교훈 받고자 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끝마무리를 잘하는 신앙인이 될 수 있겠습니까?
1. 마지막까지 변화는 하지만 변절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가룟 유다처럼 변절자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사람들이 끝이 안 좋은 이유가 왜 그렇습니까? 그 이유 중의 하나가 변절입니다. 배반입니다. 초심을 잃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잘 합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변절됩니다. 위기가 오면 변절됩니다. 자신의 이익에 맞지 않으면 변절합니다. 우리 신앙인은 끝마무리를 잘 하려면 신앙의 변절자가 되지 말아야 합니다. 신앙의 절개와 지조를 명예에 팔아 먹고 돈에 팔아먹고 쾌락에 팔아 먹고, 권력에 팔아먹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그렇다고 변화를 추구하지 말라는 말은 아닙니다. 우리는 죽는 순간까지 끊임없는 변화해야 합니다. 본문을 잘 살펴 보면 바울과 바나바의 사역이 변화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가면서는 복음을 선포하는 일을 주로 하였습니다. 그러나 돌아보면서는 복음을 선포하는 것보다는 다른 일을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무슨 일을 합니까? 22절을 보십시오.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거하라고 합니다." 굳게 한다는 말은 이미 있는 무엇인가에 부가적인 확신을 주는 것입니다. 즉 신앙의 뿌리를 깊게 하기 위해, 성숙한 신앙인이 되도록 믿음 안에 거하라고 교훈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은 들은 사람들은 갈 때 다르고 올 때 다르다고 변질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갈 때는 주님을 믿으면 죄사함을 받고 의롭게 되며 승리를 약속하더니 갈 때는 핍박을 말하느냐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바울과 바나바가 변절자가 된 것이 아닙니다.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전에는 믿지 않는 자들이었습니다. 이제는 제자들입니다. 사람은 같아도 상황은 달라진 것입니다. 그래서 전에는 복음을 선포했지만 이제는 양육을 하는 것입니다. 23절을 보십시오. 장로를 세워 위탁하는 것입니다.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전술과 전략은 얼마든지 바뀌어 질 수 있습니다. 바울은 유대인에게는 유대인의 모습으로 이방인에게는 이방인의 모습으로 가난한 자에게는 가난한 자의 모습으로 부한 자에게는 부한 자의 모습으로 끊임없이 변화를 추구하였습니다. 왜요 주님을 전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는 고백합니다.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빌 1:20-21)" 변절은 예고하고 다가 오는 것이 아닙니다. 합리적 이유를 가지고 자신도 모르게 변절되는 것입니다.
프랑스의 작가 알퐁스 도테가 쓴 '고셰 신부의 불로 장생주'란 꽁트가 있습니다.
가난을 미덕으로 삼던 프레몽트르 수도원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재정이 바닥이 나버리고 말았습니다. 수도원의 뾰쪽탑이 무너져 내리고 창문들은 깨어져 나갔지만, 그런 것을 손볼 여유가 전혀 없었습니다. 더욱이 깨어져버린 종마저도 다시 살 형편이 되지 못해, 신부님들은 나무로 딱따기를 쳐서 기도시간을 알리곤 했습니다. 마침 그 수도원에는 고셰라는 이름을 가진 수사가 있었는데, 그가 하는 일이란 고작 젖소 두 마리를 돌보는 일이었습니다. 가난에 찌들릴대로 찌들린 수도원의 재정상태를 늘 가슴아프게 생각 하던 고셰 수사는 수도원장의 허가 하에, 젖소 돌보던 일을 중단하고 '불로장생주'를 만들기로 했습니다. 어릴 때 자기를 키워 준 양부모가 불로장생주의 전문가였기에, 그때 어깨 너머로 배운 것을 기억해 가면서 6개월 동안 밤낮으로 애쓴 결과, 마침내 고셰 수사는 불로 장생주를 빚는 데 성공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 다음날부터 고셰 수사가 빚은 불로 장생주는 프랑스 전역으로 불티나게 팔려 나갔고, 가난에 찌들리던 프레몽트르 수도원은 하루아침에 돈방석에 앉게 되었습니다. 수도원의 건물은 웅장하게 고쳐졌고, 뾰쪽탑은 하늘을 찌를 듯이 높아졌습니다. 그 모든 것이 고셰 수사 덕분이었습니다. 그 빛나는 공적으로 인해 고셰 수사는 신부님의 서품을 받게까지 되었습니다. 수도원의 그 누구도 이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어느 날 저녁, 신부님들이 모두 모여 경건하게 저녁미사를 드리고 있을 때였습니다. 갑자기 누군가가 뛰어들어 괴성을 지르며 혀 꼬부라진 소리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는 것이었습니다. 얼마나 술을 마셨던지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채, 자기 자리를 찾지도 못하고 비틀거리는 고셰 수사였습니다. 그는 자신이 만든 불로장생주가 잘 빚어졌는지를 확인하기 위하여 매일 그 술을 시음해보다가, 그만 알콜 중독자가 되어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경건하게 미사를 드리던 다른 신부님들은, 술주정을 하는 고셰 수사를 향해 "사단아 물러가라!"고 외치면서 그를 밖으로 끌어내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신부님들은 다시 경건하게 미사를 계속했습니다. 그 이튿날 아침 수도원 원장은 고셰 수사에게 앞으로는 성당 출입을 삼가고, 주조장에서 불로장생주만 빚으면서 거기에서 혼자 기도할 것을 명령했습니다.
마음씨 착한 고셰 수사는 수도원장의 명령을 따랐습니다. 매일 술을 빚고 그 술을 시음해 보면서 주조장 밖으로는 한 발자국도 나갈 엄두를 내지 못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수도원장이 주조장을 찾아 왔을 때, 고셰 수사는 수도원장에게 눈물로 간청했습니다. 이제 술을 그만 만들겠으니, 예전처럼 젖소 돌보는 일을 하게 해달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수도원장은 고셰 수사의 간청을 일언지하에 거절했습니다. 그리고는 자비로운 주님께서 모든 것을 책임지실 것인즉, 아무 염려 말고 소신껏 수도원을 위해 열심히 불로장생주만 빚으라고 도리어 격려를 해주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고셰 수사는 계속해서 술을 빚었고, 그 술은 날마다 날개돋친 듯이 팔려 나갔으며, 수도원은 쉴 틈 없이 돈을 긁어모았습니다. 그리고 매일 미사가 끝날 때에 수도원장은 이렇게 말하는 것을 잊지 않았습니다. "우리 수도원을 위해 봉사하고 있는 사랑하는 고셰 신부를 위해 기도합시다."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미사에 참여한 모든 사람들은, 고셰 수사를 위하여 간절히 축복기도를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기도소리를 들으면서 고셰 수사의 영혼과 육체는 주조장안에서 서서히 죽어 가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수도원 원장이나 수도사처럼 변절되어서도 안되고 고셰 수사처럼 변절되어 서도 안됩니다. 사명을 잃어 버린 변절자, 신앙을 잃어 버린 변절자, 목적을 잃어 버린 변절자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그렇다고 변화를 멈추어서도 아니됩니다. 변화를 멈추는 순간 성숙과 성장은 없습니다. 죽을 때까지 변화되어야 합니다.
2. 후퇴는 하지만 마지막까지 포기는 하지 말아야 합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1차 선교 여행 중 죽음의 위기를 당하였습니다. 이고니온에서 악감을 품은 자들이 돌로 쳐죽이려고 하자 도망 나왔습니다. 루스드라에서는 앉은 뱅이를 일으키자 그들 바울과 바나바를 신처럼 떠받들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이었습니다. 19절을 보십시오. 어리석은 군중들은 바울을 돌로 치고 죽은 줄 알고 성밖으로 버렸습니다. 그러나 살았습니다. 그리고 루스드라 성에 들어갔다가 이튼 날 바로 바나바와 함께 더베로 피신을 합니다. 어떤 사람은 비겁하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포기가 아닙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한 전략이면 전술입니다. 후퇴하는 것이 반드시 포기하는 것은 아니고 사명을 이루기 위해서는 얼마든지 후퇴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끝마무리를 잘 하는 방법입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이 다시 그 성에 머물러 있으면서 개죽음으로 인생을 마칠 것을 원하였겠습니까? 21절을 보십시오. 더베에서 포기한 것이 아닙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미암아 많은 제자를 삼았습니다. 무조건 밀어붙이는 것만 능사는 아닙니다. 지뢰가 있으면 피해가야 합니다. 지뢰가 있는 줄 알고도 그곳에 들어가는 것은 만용이고 스스로 죽음을 재촉하는 것입니다. 폭풍이 불면 다음날 가면 되는 것입니다. 바람 부는 날은 쉬어가면 되는 것입니다. 이 보 전진을 위해 일보 후퇴하는 것은 비겁도 아니고 변절도 창피한 것도 아닙니다. 문제는 나에게 주어진 사명을 끝까지 완수하느냐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바울과 바나바를 보십시오. 26절을 보십시오. 표준 번역에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거기에서 배를 타고 안디옥으로 갔다. 이 안디옥은 그들이 선교 활동을 하려고 하나님의 은총에 몸을 내맡기고 나선 곳이다. 이제 그들은 그 일을 다 이루었다. (행 14:26)" 처음 출발했던 곳입니다. 그곳에 와서 고백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은혜로 맡긴 일 다 이루었다는 것입니다. 끝까지 이루는 것입니다. 그것이 끝마무리를 잘 하는 것입니다. 이 땅에 단 한 번 주어진 인생입니다. 주님께서 피값을 주시고 사신 인생입니다. 온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는 생명입니다. 시험 한 번 잘 못보았다고 포기해서는 않됩니다. 사업 한 번 실패했다고 결혼 한 번 잘 못했다고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후퇴는 있을 수 있으나 후회나 포기는 있을 수 없습니다. 숨을 멈추는 순간까지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68세 할아버지와 62세 할머니고 대입 고입 검정고시를 보는 것을 보지 않습니까? 72세 유정숙 할머니가 "내 마음의 기도 무지개로 피어오르고"(자유지성사 발간)라는 시집을 내어 등단하지 않습니까? 사람들은 말하기를 어릴 때는 기가 다리에 있다가 청년 때는 생식기로 중년 때는 배로 노년 때는 입으로 올라와 죽을 때가 되면 눈으로 가 인생을 하직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어린이는 다리를, 청년은 생식기를, 중년은 배를 채우기 위해 먹기를 즐겨하고 노년이 되면 아무것도 하기 싫고 단지 생각만 많아지고 말만 많아져 잔소리만 하는 쓸모 없는 인간이 되어져 간다고 합니다. 그러나 신앙인에게는 쓸데 없는 소리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힘이 없으면 기도로 할 수 있습니다. 윈스턴 처칠을 보십시오. 76세 때 수상에 다시 올랐고, 78세에 노벨 평화상을 받기까지 젊은이답게 일하였습니다. 38세에 선교 사역을 시작한 씨바이쩌는 77세에도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 집념을 불태우다가 77세에 노벨 평화상을 받았습니다. 뉴욕주 롱 아일랜드 오이스터베이 감리교회의 찰즈 맥코이 목사는 71세에 새출발을 했습니다. 인도 선교사 한 분이 설교를 한 후 교인들에게 선교사 지망을 호소했습니다. 한 사람도 희망자가 없자 담임목사인 맥코이 목사의 의향을 들었습니다. "71세라도 늦지 않았소?"하는 질문에 "늙은 나무에 더 좋은 열매가 맺힐 수도 있다"는 대답이었습니다. 이날 결심하고 선교사가 된 맥코이 목사는 86세에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15년간을 중국의 아편 중독자들을 위하여 사랑을 쏟았던 것입니다. "사람의 나이는 절대로 그 사람이 살아온 햇수로 계산되어서는 안되고 사람의 나이는 그 사람이 이룩해 놓은 일에 의해 계산되어져야 한다. 달리 아무것도 헤아릴 것이 없을 경우가 아니고서는 결코 그 사람이 살아온 햇수를 헤아리지 말라."고 미국의 철학자 란프왈도 에머슨이 말한 것처럼 인생이란 나이가 문제가 아닙니다. 타티안은 98세에 그의 거작 "르판트의 전쟁"을 그렸으며 미켈란젤로는 80이 넘어서 그의 대작을 만들어 냈습니다. 성경에 보면 아브라함은 90세에 가나안을 찾아갔습니다. 모세는 80세 때에 이스라엘 민족을 가나안으로 인도했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80세가 넘어서 가나안으로 들어가 그 땅을 정복하였습니다. 85세가 된 갈렙은 자신의 공적을 자랑하며 평안히 안주하기보다는 아낙 자손이 진을 치고 있는 땅을 정복하리라는 희망을 가지고 여호와께 의지하며 나아가 승리하는 것을 봅니다.(수14:7-12)
애늙은이가 되지 말아야합니다. 이제 나이 10대, 20대 후반이라고, 이제 나이 30대, 40대, 50대라고 마음이 팍 늙어버린 애 늙은이들을 볼 때가 있습니다. 나는 다 잃었다고 아무것도 없다고 하나님 쓰시기에 부족하다고 포기해 버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얼마가 있느냐가 문제가 아닙니다. 어떻게 사용하느냐의 문제입니다.
요세 이런 이야기 있지 않아요. 평등시리즈 유머 말입니다. 40대가 되면 지식의 평등이 온다는 것입니다. 옛날에 공부한 거 다 말짱 헛것이라는 것입니다. 컴퓨터를 압니까? 애들 부르는 노래를 압니까? 40이 되면 옛날에 대학을 나왔던 안나왔던 똑같아 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식의 평등화가 온다' 고 합니다. 50이 되면 외모의 평등화가 온다고 합니다. 젊었을 때는 생긴 사람있고 좀 안생긴 사람있지 50이 넘으면 똑같다는 것입니다. 다 배나오고 얼굴을 주름 지고 한국 사람 감자 모양으로 둥글둥굴하고요 맛사지 해봐도 별거 아니다는 것입니다. 60이 되면은 성의 평등이 온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남녀가 다 섞여버려서 여자인지, 남자인지 알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주책이 없다는 것이지요. 아무데서나 춤추는 것 남자나 여자나 똑같다는 것입니다. 70이 되면요 건강의 평등이 온다는 것입니다. 건강한 사람도 그만, 건강 못한 사람도 그만, 어차피 다 그만큼 그만큼 늙어간다고 해요 80이 되면 재물의 평등이 온다고 해요. 돈이 있으면 뭐해요, 먹지 못하고 누리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90이 넘으면요 생사의 평등이 온다고 해요. 살았으나 사는 것이 아니고 죽으나 사나 그게 그거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남기는 것은 평등하지 않습니다. 인생은 얼마나 누렸으냐로 평가하는 것이 아닙니다. 얼마나 남겼느냐 얼마나 베풀었느냐로 평가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주신 사명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이루어야 합니다.
3. 맡김 받은 나와 내일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맡기신 분의 일을 해야 하고 그분을 드러내야 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나와 내일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하나님의 일을 드러내야 합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파송한 안디옥 교회에 와서 선교 보고를 합니다. 무슨 보고를 합니까? 27절 보십시오. 많은 회중들이 모였습니다. 영웅담을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자신들이 루스드라에서 앉은 뱅이를 일으킨 일을 말할 수 있습니다. 바보에서 복음 전하는 것을 방해하는 무당 엘루마를 눈멀게 한 일을 만할 수 있습니다. 돌에 맞아 죽을 뻔 하였는데 살아난 이야기를 할 수 있습니다. 자신들을 하나님이 사용하여 이렇게 큰 일을 하였다고 하나님을 말하면 은근히 자신들을 자랑할 수 있습니다. 얼마나 사람들이 그런 짓을 많이 합니까? 신유 은사 받았다고 병을 고쳐 주고 나중에는 고침받은 사람들 집을 다 바치게 하여 땅사고 공장하고 기업만드는 사람들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 재림한다고 해 놓고 자기는 8억 짜리 집사고 감시 초소 만들고 살아가는 사람도 있었지 않았습니까? 결국 하나님을 이용하여 자기 이름 내고 자기 일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출세를 위해 세상에서 모든 것을 이용하는 것처럼 단지 교회만 나닐 따름이지 똑같이 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하나님도 자기를 위해 이용합니다.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신앙 최고 좋은 것처럼 비판은 잘합니다. 교회가 어떻고 목사님이 어떻고 비판은 참피언입니다. 비판한다고 세금내는 것은 아니니까 자유이겠지만 자신의 모습은 비판 하는 사람보다 훨씬 못합니다. 그런 사람들 다 끝마무리가 좋지 않습니다. 사울의 끝마무리가 얼마나 비참합니까? 성령으로 출발한 그가 악령으로 끝마무리를 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 일을 맡겼는데 그것으로 자기일 했기 때문입니다. 집착이 생기고 교만해지고 안하 무인이 된 것입니다. 엘리 제사장도 그렇지 않습니까? 얼마나 신실한 사람이었습니까? 결국 그 자식이 비참하게 죽고 자신은 목이 부러져 죽지 않았습니까? 아간을 보십시오. 같이 출발한 사람입니다. 그 탐욕 다스리지 못하다가 온 가족이 돌무더기에 묻히지 않았습니까? 아나니아와 삽비라 보십시오. 좋은 일 하려다가 오히려 비참한 죽음을 당하지 않았습니까? 이세벨 같은 사람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IQ 높은 연못가의 개구리 이야기를 아시지 않습니까? 연못가에 있던 개구리 중에 IQ 높은 개구리 한 마리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 개구리는 하늘을 날아다니는 새들을 보고 부러워하였습니다. 어느 날 하늘을 날고 있는 새 한 마리에게‘야! 여기 나뭇가지가 있는데, 네가 한쪽 끝을 입으로 물고, 나는 다른 쪽 끝을 물고 있겠다. 네가 나무를 물고 날면, 나는 더불어 날겠지, 내가 하늘을 날 아 갈 수 있도록 도와주겠니!’라고 부탁하였습니다. 새는 그 부탁을 흔쾌히 들어주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그 개구리는 하늘을 날고 있었습니다. 이 광경을 본 다른 개구리들이 부러워하면서“야,그런 기발한 생각을 누가 생각했니?”라고 물었습니다. 하늘을 날고 있던 개구리는 자신의 재능을 자랑하고 싶었습니다.“누가 하긴 누가 해, 내가 했지”라고 말하는 순간, 그 개구리 나뭇가지에서 떨어져 개골개골하면서 땅에 떨어져 장렬한 죽음을 했다는 이야기가 아닙니까?
바울과 바나바는 그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자기들과 함께 행하신 모든 일과 하나님께서 이방 사람들에게 믿음의 문을 열어 주신 것을 보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일을 나타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끝마무리 잘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죽으심으로 우리를 살려 하나님의 자녀 삼아 주시고 덤으로 사는 인생을 주었습니다. 이제는 먹든 마시는 무엇을 하던 주의 영광을 드러내야 합니다. 바울은 고백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 2:20)" 이 고백이 마지막 주님 앞에 서는 순간까지 우리의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신발 한 켤레의 사랑>(요단)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바클레이는 영국 런던의 빅토리아 정거장에서 기차를 탔다고 합니다. 기차가 출발한 지약 10분쯤 지났을 때, 맞은 편에 앉아 있던 한 청년이 경련을 일으키며 의자에서 기차 바닥으로 떨어지더니 마구 몸을 뒤틀며 무섭게 떨었습니다. 간질이었습니다. 그러자 그와 함께 앉아 있던 청년이 그를 의자 위로 들어 올려 눕히고,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주며, 머리 밑에 베개를 받쳐주고, 담요를 덮어주는 것이었습니다. 그 청년은 바클레이를 향하여 말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제 친구에게 이런 일이 일어날 줄 몰랐습니다. 보통 한 달에 한 번 정도 간질이 오는데, 바로 이틀 전에 있었거든요. 이렇게 빨리 또 올 줄은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청년은 계속 말을 이었습니다. "이 친구와 저는 월남전쟁에서 함께 싸운 전우입니다. 이 친구는 영국인이고, 저는 미국인입니다. 베트콩과의 전투에서 우리 둘은 모두 중상을 입게 되었습니다. 저의 한쪽 다리는 날아가 버렸죠." 이야기를 계속하며 바지를 걷어 올리는데 자세히 보니 의족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친구는 바로 자기 옆에서 터진 수류탄으로 인해 한 쪽 가슴이 엉망이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를 구조하러 오던 헬리콥터는 베트콩의 포화를 맞고 추락 해 버렸지요. 우리에게는 죽는 일밖에는 없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이 친구가 두 발로 일어섰습니다. 그러더니 내 군복을 움켜잡고 나를 끌고 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한 발자국을 디딜 때마다 가슴에 박힌 수류탄 파편 때문에 신음했습니다. 나는 결국 죽을 몸이니 그냥 놔두고 가라고 계속해서 말렸지만 그는 '네가 죽으면 나도 죽는다'고 하면서 악착같이 나를 끌고 갔습니다. 자기 혼자 살 길을 찾기에도 필사적인 상황에, 그는 결국 나를 이끈 채 정글 밖으로 나올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구출되었지요." 그는 잠시 멈추더니 말을 이었습니다. "3년 전 나는 이 친구에게 간질 증상이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나는 마침 독신이었기에, 미국의 집을 팔고, 은행의 돈을 찾아서 친구를 돌보기 위해 영국으로 왔습니다. 이 친구에게는 언제나 곁에서 돌봐주어야 할 사람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그 후로 나는 친구와 늘 이렇게 함께 있습니다. 이것이 지금껏 살아온 우리들의 이야기입니다." 바클레이는 청년에게 말했습니다. "나에게 조금도 사과할 필요 없습니다. 두 분의 이야기는 내가 들은 이야기 중 가장 귀하고 아름다운 이야기입니다." 청년은 마지막으로 말했습니다. "내 친구가 나를 위해 해 준 일을 생각한다면, 내가 그를 위해 하지 못할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우리 주님 오실 때 끝마무리 잘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겠습니까? 끝마무리 잘하는 교회는 어떤 교회이겠습니까? 이런 사람들이 많은 교회입니다. 내일 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은혜로 주님의 일 많이 하는 사람들이 많은 교회입니다. 탈랜트가 있고 장관이 있고 박사가 많고 재벌이 있는 교회가 좋은 교회가 아닙니다. 그것을 가지고 복음을 위해 일하는 교회입니다. 비록 셋방살이 하면서 옮겨 다닌다 하여도 10명이 모인다 하여도 수만명의 가라지가 모여 움직이는 교회보다는 복음을 믿는 신앙인들이 모여 주님의 일을 하는 교회가 마지막 마무리를 잘 하는 교회입니다.
우리가 나를 위해 십자가에 돌아가신 우리 예수님을 위해 하지 못할 일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내일 하는 사람이 끝마무리 잘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끝까지 주님께서 맡겨준 일을 하는 사람이 끝마무리 잘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우리 주님으로부터 마지막 날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마 25:23)"라는 칭찬을 듣습니다.
끝마무리 잘하는 신앙인/행14:19-28/김필곤 목사
1. 마지막까지 변화는 하지만 변절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가룟 유다처럼 변절자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사람들이 끝이 안 좋은 이유가 왜 그렇습니까? 그 이유 중의 하나가 변절입니다. 배반입니다. 초심을 잃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잘 합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변절됩니다. 위기가 오면 변절됩니다. 자신의 이익에 맞지 않으면 변절합니다. 우리 신앙인은 끝마무리를 잘 하려면 신앙의 변절자가 되지 말아야 합니다. 신앙의 절개와 지조를 명예에 팔아 먹고 돈에 팔아먹고 쾌락에 팔아 먹고, 권력에 팔아먹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그렇다고 변화를 추구하지 말라는 말은 아닙니다. 우리는 죽는 순간까지 끊임없는 변화해야 합니다. 본문을 잘 살펴 보면 바울과 바나바의 사역이 변화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가면서는 복음을 선포하는 일을 주로 하였습니다. 그러나 돌아보면서는 복음을 선포하는 것보다는 다른 일을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무슨 일을 합니까? 22절을 보십시오.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거하라고 합니다." 굳게 한다는 말은 이미 있는 무엇인가에 부가적인 확신을 주는 것입니다. 즉 신앙의 뿌리를 깊게 하기 위해, 성숙한 신앙인이 되도록 믿음 안에 거하라고 교훈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은 들은 사람들은 갈 때 다르고 올 때 다르다고 변질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갈 때는 주님을 믿으면 죄사함을 받고 의롭게 되며 승리를 약속하더니 갈 때는 핍박을 말하느냐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바울과 바나바가 변절자가 된 것이 아닙니다.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전에는 믿지 않는 자들이었습니다. 이제는 제자들입니다. 사람은 같아도 상황은 달라진 것입니다. 그래서 전에는 복음을 선포했지만 이제는 양육을 하는 것입니다. 23절을 보십시오. 장로를 세워 위탁하는 것입니다.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전술과 전략은 얼마든지 바뀌어 질 수 있습니다. 바울은 유대인에게는 유대인의 모습으로 이방인에게는 이방인의 모습으로 가난한 자에게는 가난한 자의 모습으로 부한 자에게는 부한 자의 모습으로 끊임없이 변화를 추구하였습니다. 왜요 주님을 전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는 고백합니다.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빌 1:20-21)" 변절은 예고하고 다가 오는 것이 아닙니다. 합리적 이유를 가지고 자신도 모르게 변절되는 것입니다.
프랑스의 작가 알퐁스 도테가 쓴 '고셰 신부의 불로 장생주'란 꽁트가 있습니다.
가난을 미덕으로 삼던 프레몽트르 수도원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재정이 바닥이 나버리고 말았습니다. 수도원의 뾰쪽탑이 무너져 내리고 창문들은 깨어져 나갔지만, 그런 것을 손볼 여유가 전혀 없었습니다. 더욱이 깨어져버린 종마저도 다시 살 형편이 되지 못해, 신부님들은 나무로 딱따기를 쳐서 기도시간을 알리곤 했습니다. 마침 그 수도원에는 고셰라는 이름을 가진 수사가 있었는데, 그가 하는 일이란 고작 젖소 두 마리를 돌보는 일이었습니다. 가난에 찌들릴대로 찌들린 수도원의 재정상태를 늘 가슴아프게 생각 하던 고셰 수사는 수도원장의 허가 하에, 젖소 돌보던 일을 중단하고 '불로장생주'를 만들기로 했습니다. 어릴 때 자기를 키워 준 양부모가 불로장생주의 전문가였기에, 그때 어깨 너머로 배운 것을 기억해 가면서 6개월 동안 밤낮으로 애쓴 결과, 마침내 고셰 수사는 불로 장생주를 빚는 데 성공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 다음날부터 고셰 수사가 빚은 불로 장생주는 프랑스 전역으로 불티나게 팔려 나갔고, 가난에 찌들리던 프레몽트르 수도원은 하루아침에 돈방석에 앉게 되었습니다. 수도원의 건물은 웅장하게 고쳐졌고, 뾰쪽탑은 하늘을 찌를 듯이 높아졌습니다. 그 모든 것이 고셰 수사 덕분이었습니다. 그 빛나는 공적으로 인해 고셰 수사는 신부님의 서품을 받게까지 되었습니다. 수도원의 그 누구도 이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어느 날 저녁, 신부님들이 모두 모여 경건하게 저녁미사를 드리고 있을 때였습니다. 갑자기 누군가가 뛰어들어 괴성을 지르며 혀 꼬부라진 소리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는 것이었습니다. 얼마나 술을 마셨던지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채, 자기 자리를 찾지도 못하고 비틀거리는 고셰 수사였습니다. 그는 자신이 만든 불로장생주가 잘 빚어졌는지를 확인하기 위하여 매일 그 술을 시음해보다가, 그만 알콜 중독자가 되어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경건하게 미사를 드리던 다른 신부님들은, 술주정을 하는 고셰 수사를 향해 "사단아 물러가라!"고 외치면서 그를 밖으로 끌어내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신부님들은 다시 경건하게 미사를 계속했습니다. 그 이튿날 아침 수도원 원장은 고셰 수사에게 앞으로는 성당 출입을 삼가고, 주조장에서 불로장생주만 빚으면서 거기에서 혼자 기도할 것을 명령했습니다.
마음씨 착한 고셰 수사는 수도원장의 명령을 따랐습니다. 매일 술을 빚고 그 술을 시음해 보면서 주조장 밖으로는 한 발자국도 나갈 엄두를 내지 못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수도원장이 주조장을 찾아 왔을 때, 고셰 수사는 수도원장에게 눈물로 간청했습니다. 이제 술을 그만 만들겠으니, 예전처럼 젖소 돌보는 일을 하게 해달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수도원장은 고셰 수사의 간청을 일언지하에 거절했습니다. 그리고는 자비로운 주님께서 모든 것을 책임지실 것인즉, 아무 염려 말고 소신껏 수도원을 위해 열심히 불로장생주만 빚으라고 도리어 격려를 해주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고셰 수사는 계속해서 술을 빚었고, 그 술은 날마다 날개돋친 듯이 팔려 나갔으며, 수도원은 쉴 틈 없이 돈을 긁어모았습니다. 그리고 매일 미사가 끝날 때에 수도원장은 이렇게 말하는 것을 잊지 않았습니다. "우리 수도원을 위해 봉사하고 있는 사랑하는 고셰 신부를 위해 기도합시다."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미사에 참여한 모든 사람들은, 고셰 수사를 위하여 간절히 축복기도를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기도소리를 들으면서 고셰 수사의 영혼과 육체는 주조장안에서 서서히 죽어 가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수도원 원장이나 수도사처럼 변절되어서도 안되고 고셰 수사처럼 변절되어 서도 안됩니다. 사명을 잃어 버린 변절자, 신앙을 잃어 버린 변절자, 목적을 잃어 버린 변절자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그렇다고 변화를 멈추어서도 아니됩니다. 변화를 멈추는 순간 성숙과 성장은 없습니다. 죽을 때까지 변화되어야 합니다.
2. 후퇴는 하지만 마지막까지 포기는 하지 말아야 합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1차 선교 여행 중 죽음의 위기를 당하였습니다. 이고니온에서 악감을 품은 자들이 돌로 쳐죽이려고 하자 도망 나왔습니다. 루스드라에서는 앉은 뱅이를 일으키자 그들 바울과 바나바를 신처럼 떠받들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이었습니다. 19절을 보십시오. 어리석은 군중들은 바울을 돌로 치고 죽은 줄 알고 성밖으로 버렸습니다. 그러나 살았습니다. 그리고 루스드라 성에 들어갔다가 이튼 날 바로 바나바와 함께 더베로 피신을 합니다. 어떤 사람은 비겁하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포기가 아닙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한 전략이면 전술입니다. 후퇴하는 것이 반드시 포기하는 것은 아니고 사명을 이루기 위해서는 얼마든지 후퇴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끝마무리를 잘 하는 방법입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이 다시 그 성에 머물러 있으면서 개죽음으로 인생을 마칠 것을 원하였겠습니까? 21절을 보십시오. 더베에서 포기한 것이 아닙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미암아 많은 제자를 삼았습니다. 무조건 밀어붙이는 것만 능사는 아닙니다. 지뢰가 있으면 피해가야 합니다. 지뢰가 있는 줄 알고도 그곳에 들어가는 것은 만용이고 스스로 죽음을 재촉하는 것입니다. 폭풍이 불면 다음날 가면 되는 것입니다. 바람 부는 날은 쉬어가면 되는 것입니다. 이 보 전진을 위해 일보 후퇴하는 것은 비겁도 아니고 변절도 창피한 것도 아닙니다. 문제는 나에게 주어진 사명을 끝까지 완수하느냐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바울과 바나바를 보십시오. 26절을 보십시오. 표준 번역에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거기에서 배를 타고 안디옥으로 갔다. 이 안디옥은 그들이 선교 활동을 하려고 하나님의 은총에 몸을 내맡기고 나선 곳이다. 이제 그들은 그 일을 다 이루었다. (행 14:26)" 처음 출발했던 곳입니다. 그곳에 와서 고백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은혜로 맡긴 일 다 이루었다는 것입니다. 끝까지 이루는 것입니다. 그것이 끝마무리를 잘 하는 것입니다. 이 땅에 단 한 번 주어진 인생입니다. 주님께서 피값을 주시고 사신 인생입니다. 온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는 생명입니다. 시험 한 번 잘 못보았다고 포기해서는 않됩니다. 사업 한 번 실패했다고 결혼 한 번 잘 못했다고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후퇴는 있을 수 있으나 후회나 포기는 있을 수 없습니다. 숨을 멈추는 순간까지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68세 할아버지와 62세 할머니고 대입 고입 검정고시를 보는 것을 보지 않습니까? 72세 유정숙 할머니가 "내 마음의 기도 무지개로 피어오르고"(자유지성사 발간)라는 시집을 내어 등단하지 않습니까? 사람들은 말하기를 어릴 때는 기가 다리에 있다가 청년 때는 생식기로 중년 때는 배로 노년 때는 입으로 올라와 죽을 때가 되면 눈으로 가 인생을 하직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어린이는 다리를, 청년은 생식기를, 중년은 배를 채우기 위해 먹기를 즐겨하고 노년이 되면 아무것도 하기 싫고 단지 생각만 많아지고 말만 많아져 잔소리만 하는 쓸모 없는 인간이 되어져 간다고 합니다. 그러나 신앙인에게는 쓸데 없는 소리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힘이 없으면 기도로 할 수 있습니다. 윈스턴 처칠을 보십시오. 76세 때 수상에 다시 올랐고, 78세에 노벨 평화상을 받기까지 젊은이답게 일하였습니다. 38세에 선교 사역을 시작한 씨바이쩌는 77세에도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 집념을 불태우다가 77세에 노벨 평화상을 받았습니다. 뉴욕주 롱 아일랜드 오이스터베이 감리교회의 찰즈 맥코이 목사는 71세에 새출발을 했습니다. 인도 선교사 한 분이 설교를 한 후 교인들에게 선교사 지망을 호소했습니다. 한 사람도 희망자가 없자 담임목사인 맥코이 목사의 의향을 들었습니다. "71세라도 늦지 않았소?"하는 질문에 "늙은 나무에 더 좋은 열매가 맺힐 수도 있다"는 대답이었습니다. 이날 결심하고 선교사가 된 맥코이 목사는 86세에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15년간을 중국의 아편 중독자들을 위하여 사랑을 쏟았던 것입니다. "사람의 나이는 절대로 그 사람이 살아온 햇수로 계산되어서는 안되고 사람의 나이는 그 사람이 이룩해 놓은 일에 의해 계산되어져야 한다. 달리 아무것도 헤아릴 것이 없을 경우가 아니고서는 결코 그 사람이 살아온 햇수를 헤아리지 말라."고 미국의 철학자 란프왈도 에머슨이 말한 것처럼 인생이란 나이가 문제가 아닙니다. 타티안은 98세에 그의 거작 "르판트의 전쟁"을 그렸으며 미켈란젤로는 80이 넘어서 그의 대작을 만들어 냈습니다. 성경에 보면 아브라함은 90세에 가나안을 찾아갔습니다. 모세는 80세 때에 이스라엘 민족을 가나안으로 인도했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80세가 넘어서 가나안으로 들어가 그 땅을 정복하였습니다. 85세가 된 갈렙은 자신의 공적을 자랑하며 평안히 안주하기보다는 아낙 자손이 진을 치고 있는 땅을 정복하리라는 희망을 가지고 여호와께 의지하며 나아가 승리하는 것을 봅니다.(수14:7-12)
애늙은이가 되지 말아야합니다. 이제 나이 10대, 20대 후반이라고, 이제 나이 30대, 40대, 50대라고 마음이 팍 늙어버린 애 늙은이들을 볼 때가 있습니다. 나는 다 잃었다고 아무것도 없다고 하나님 쓰시기에 부족하다고 포기해 버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얼마가 있느냐가 문제가 아닙니다. 어떻게 사용하느냐의 문제입니다.
요세 이런 이야기 있지 않아요. 평등시리즈 유머 말입니다. 40대가 되면 지식의 평등이 온다는 것입니다. 옛날에 공부한 거 다 말짱 헛것이라는 것입니다. 컴퓨터를 압니까? 애들 부르는 노래를 압니까? 40이 되면 옛날에 대학을 나왔던 안나왔던 똑같아 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식의 평등화가 온다' 고 합니다. 50이 되면 외모의 평등화가 온다고 합니다. 젊었을 때는 생긴 사람있고 좀 안생긴 사람있지 50이 넘으면 똑같다는 것입니다. 다 배나오고 얼굴을 주름 지고 한국 사람 감자 모양으로 둥글둥굴하고요 맛사지 해봐도 별거 아니다는 것입니다. 60이 되면은 성의 평등이 온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남녀가 다 섞여버려서 여자인지, 남자인지 알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주책이 없다는 것이지요. 아무데서나 춤추는 것 남자나 여자나 똑같다는 것입니다. 70이 되면요 건강의 평등이 온다는 것입니다. 건강한 사람도 그만, 건강 못한 사람도 그만, 어차피 다 그만큼 그만큼 늙어간다고 해요 80이 되면 재물의 평등이 온다고 해요. 돈이 있으면 뭐해요, 먹지 못하고 누리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90이 넘으면요 생사의 평등이 온다고 해요. 살았으나 사는 것이 아니고 죽으나 사나 그게 그거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남기는 것은 평등하지 않습니다. 인생은 얼마나 누렸으냐로 평가하는 것이 아닙니다. 얼마나 남겼느냐 얼마나 베풀었느냐로 평가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주신 사명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이루어야 합니다.
3. 맡김 받은 나와 내일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맡기신 분의 일을 해야 하고 그분을 드러내야 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나와 내일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하나님의 일을 드러내야 합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파송한 안디옥 교회에 와서 선교 보고를 합니다. 무슨 보고를 합니까? 27절 보십시오. 많은 회중들이 모였습니다. 영웅담을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자신들이 루스드라에서 앉은 뱅이를 일으킨 일을 말할 수 있습니다. 바보에서 복음 전하는 것을 방해하는 무당 엘루마를 눈멀게 한 일을 만할 수 있습니다. 돌에 맞아 죽을 뻔 하였는데 살아난 이야기를 할 수 있습니다. 자신들을 하나님이 사용하여 이렇게 큰 일을 하였다고 하나님을 말하면 은근히 자신들을 자랑할 수 있습니다. 얼마나 사람들이 그런 짓을 많이 합니까? 신유 은사 받았다고 병을 고쳐 주고 나중에는 고침받은 사람들 집을 다 바치게 하여 땅사고 공장하고 기업만드는 사람들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 재림한다고 해 놓고 자기는 8억 짜리 집사고 감시 초소 만들고 살아가는 사람도 있었지 않았습니까? 결국 하나님을 이용하여 자기 이름 내고 자기 일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출세를 위해 세상에서 모든 것을 이용하는 것처럼 단지 교회만 나닐 따름이지 똑같이 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하나님도 자기를 위해 이용합니다.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신앙 최고 좋은 것처럼 비판은 잘합니다. 교회가 어떻고 목사님이 어떻고 비판은 참피언입니다. 비판한다고 세금내는 것은 아니니까 자유이겠지만 자신의 모습은 비판 하는 사람보다 훨씬 못합니다. 그런 사람들 다 끝마무리가 좋지 않습니다. 사울의 끝마무리가 얼마나 비참합니까? 성령으로 출발한 그가 악령으로 끝마무리를 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 일을 맡겼는데 그것으로 자기일 했기 때문입니다. 집착이 생기고 교만해지고 안하 무인이 된 것입니다. 엘리 제사장도 그렇지 않습니까? 얼마나 신실한 사람이었습니까? 결국 그 자식이 비참하게 죽고 자신은 목이 부러져 죽지 않았습니까? 아간을 보십시오. 같이 출발한 사람입니다. 그 탐욕 다스리지 못하다가 온 가족이 돌무더기에 묻히지 않았습니까? 아나니아와 삽비라 보십시오. 좋은 일 하려다가 오히려 비참한 죽음을 당하지 않았습니까? 이세벨 같은 사람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IQ 높은 연못가의 개구리 이야기를 아시지 않습니까? 연못가에 있던 개구리 중에 IQ 높은 개구리 한 마리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 개구리는 하늘을 날아다니는 새들을 보고 부러워하였습니다. 어느 날 하늘을 날고 있는 새 한 마리에게‘야! 여기 나뭇가지가 있는데, 네가 한쪽 끝을 입으로 물고, 나는 다른 쪽 끝을 물고 있겠다. 네가 나무를 물고 날면, 나는 더불어 날겠지, 내가 하늘을 날 아 갈 수 있도록 도와주겠니!’라고 부탁하였습니다. 새는 그 부탁을 흔쾌히 들어주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그 개구리는 하늘을 날고 있었습니다. 이 광경을 본 다른 개구리들이 부러워하면서“야,그런 기발한 생각을 누가 생각했니?”라고 물었습니다. 하늘을 날고 있던 개구리는 자신의 재능을 자랑하고 싶었습니다.“누가 하긴 누가 해, 내가 했지”라고 말하는 순간, 그 개구리 나뭇가지에서 떨어져 개골개골하면서 땅에 떨어져 장렬한 죽음을 했다는 이야기가 아닙니까?
바울과 바나바는 그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자기들과 함께 행하신 모든 일과 하나님께서 이방 사람들에게 믿음의 문을 열어 주신 것을 보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일을 나타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끝마무리 잘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죽으심으로 우리를 살려 하나님의 자녀 삼아 주시고 덤으로 사는 인생을 주었습니다. 이제는 먹든 마시는 무엇을 하던 주의 영광을 드러내야 합니다. 바울은 고백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 2:20)" 이 고백이 마지막 주님 앞에 서는 순간까지 우리의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신발 한 켤레의 사랑>(요단)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바클레이는 영국 런던의 빅토리아 정거장에서 기차를 탔다고 합니다. 기차가 출발한 지약 10분쯤 지났을 때, 맞은 편에 앉아 있던 한 청년이 경련을 일으키며 의자에서 기차 바닥으로 떨어지더니 마구 몸을 뒤틀며 무섭게 떨었습니다. 간질이었습니다. 그러자 그와 함께 앉아 있던 청년이 그를 의자 위로 들어 올려 눕히고,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주며, 머리 밑에 베개를 받쳐주고, 담요를 덮어주는 것이었습니다. 그 청년은 바클레이를 향하여 말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제 친구에게 이런 일이 일어날 줄 몰랐습니다. 보통 한 달에 한 번 정도 간질이 오는데, 바로 이틀 전에 있었거든요. 이렇게 빨리 또 올 줄은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청년은 계속 말을 이었습니다. "이 친구와 저는 월남전쟁에서 함께 싸운 전우입니다. 이 친구는 영국인이고, 저는 미국인입니다. 베트콩과의 전투에서 우리 둘은 모두 중상을 입게 되었습니다. 저의 한쪽 다리는 날아가 버렸죠." 이야기를 계속하며 바지를 걷어 올리는데 자세히 보니 의족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친구는 바로 자기 옆에서 터진 수류탄으로 인해 한 쪽 가슴이 엉망이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를 구조하러 오던 헬리콥터는 베트콩의 포화를 맞고 추락 해 버렸지요. 우리에게는 죽는 일밖에는 없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이 친구가 두 발로 일어섰습니다. 그러더니 내 군복을 움켜잡고 나를 끌고 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한 발자국을 디딜 때마다 가슴에 박힌 수류탄 파편 때문에 신음했습니다. 나는 결국 죽을 몸이니 그냥 놔두고 가라고 계속해서 말렸지만 그는 '네가 죽으면 나도 죽는다'고 하면서 악착같이 나를 끌고 갔습니다. 자기 혼자 살 길을 찾기에도 필사적인 상황에, 그는 결국 나를 이끈 채 정글 밖으로 나올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구출되었지요." 그는 잠시 멈추더니 말을 이었습니다. "3년 전 나는 이 친구에게 간질 증상이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나는 마침 독신이었기에, 미국의 집을 팔고, 은행의 돈을 찾아서 친구를 돌보기 위해 영국으로 왔습니다. 이 친구에게는 언제나 곁에서 돌봐주어야 할 사람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그 후로 나는 친구와 늘 이렇게 함께 있습니다. 이것이 지금껏 살아온 우리들의 이야기입니다." 바클레이는 청년에게 말했습니다. "나에게 조금도 사과할 필요 없습니다. 두 분의 이야기는 내가 들은 이야기 중 가장 귀하고 아름다운 이야기입니다." 청년은 마지막으로 말했습니다. "내 친구가 나를 위해 해 준 일을 생각한다면, 내가 그를 위해 하지 못할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우리 주님 오실 때 끝마무리 잘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겠습니까? 끝마무리 잘하는 교회는 어떤 교회이겠습니까? 이런 사람들이 많은 교회입니다. 내일 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은혜로 주님의 일 많이 하는 사람들이 많은 교회입니다. 탈랜트가 있고 장관이 있고 박사가 많고 재벌이 있는 교회가 좋은 교회가 아닙니다. 그것을 가지고 복음을 위해 일하는 교회입니다. 비록 셋방살이 하면서 옮겨 다닌다 하여도 10명이 모인다 하여도 수만명의 가라지가 모여 움직이는 교회보다는 복음을 믿는 신앙인들이 모여 주님의 일을 하는 교회가 마지막 마무리를 잘 하는 교회입니다.
우리가 나를 위해 십자가에 돌아가신 우리 예수님을 위해 하지 못할 일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내일 하는 사람이 끝마무리 잘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끝까지 주님께서 맡겨준 일을 하는 사람이 끝마무리 잘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우리 주님으로부터 마지막 날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마 25:23)"라는 칭찬을 듣습니다.
끝마무리 잘하는 신앙인/행14:19-28/김필곤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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