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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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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요일4:19-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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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필곤 목사 |
참고 : | 열린교회 http://www.yeolin.or.kr |
부부가 결혼하여 가장 오랜 산사람은 몇 년이나 같이 살 수 있을까요? 충북 청원에는 결혼하여 83년이나 같이 사신 분이 있습니다. 남편이 5섯살 아내가 아홉 살 때 약혼하여 4년 후에 결혼하여 지금 할아버지는 92살 할머니는 96살이라고 합니다. 5남 3녀를 낳았고 직계 자손만 무려 105명이 된다고 합니다. 이분들은 지금도 한약방을 하며 서로 존대말을 쓰면 지금까지 부부싸움 한 번 하지 않고 행복하게 산다고 합니다. 그런데 같이 살기는 살지만 늘 불만을 가지고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40년 동안을 같이 살았다고 합니다. 할머니는 늘 남편에 대하여 불만이었지만 어쩔 수 없이 살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노인정에서 야유회를 갔는데 그곳에서 스피드 큐즈가 있었다고 합니다. 할아버지가 문제를 내고 할머니가 답을 맞추게 되었는데 문제는 '천생연분'이었다고 합니다. 문제를 보고 할아버지는 '당신과 나 사이'라고 설명을 하였답니다. 그러자 할머니가 조금도 주저함 없이 '웬수'라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할아버지는 당황스럽지만 다시 설명하였다고 합니다. '두 글자 말고 네 글자' 그 때 할머니는 무엇이라고 했겠습니까? '평생웬수'라고 했다고 합니다. 서로 살면서 평생 웬수로 사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서로 같은 교회 다니면서, 서로 같은 회사 다니면서, 서로 같은 식구로 살면서 원수로 대하는 사람들도 종종 보게 됩니다. 우리 정치인들 보면 평생 원수들같이 보입니다. 사사건건 상대를 헐뜯고 비난합니다. 서로을 죽이려고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싸움질들을 합니다. 그걸 보는 국민들도 마음들이 오염되어졌습니다. 서로 사랑하는 마음들이 없습니다. 심지어는 사랑을 가장 강조하는 교인들마저 가만히 살펴보면 사랑이 식어진 것을 봅니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그리스도인인지 아닌지를 결정짓는데 있어서 유일한 표증은 사랑이다. 사랑만이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를 구별한다"고 했습니다. 페스탈로치는 "사람들이 서로 사랑 속에 있을 때 하나님이 가까이 오신다."고 말했습니다. 톨스토이는 "어디서도 하나님을 본 사람은 없으나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은 우리 품안에 깃들게 될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기독교 철학자로 라브리 운동을 하신 프란시스 쉐이퍼 박사는 사랑을 가르쳐 그리스도의 '제자의 뱃지'라는 말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랑하는 것을 통하여 예수님의 제자인 것을 사람들이 알게 될 것이라고 go했습니다. 독일의 시인 괴테가 그의 친구인 슈타인 여사에게 보낸 글을 보면 "우리들은 어디로부터 태어났을까? - 사랑으로부터, 우리들은 어떻게 되어 멸망할까? - 사랑이 없기 때문에, 우리들은 무엇으로 자기를 이길까? - 사랑에 의하여, 우리들도 사랑을 찾아낼 수 있을까? - 사랑에 의하여, 오랫동안 울지 않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 사랑 때문에, 우리들을 항상 연결하는 것은 무엇인가? - 사랑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사랑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1. 우리는 형제를 사랑해야 합니다(21).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사도 요한이 결론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형제를 사랑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21).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형제를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피값으로 산 한 형제 자매이며 한 식구입니다. 원수가 아닙니다. 경쟁의 대상이 아닙니다. 이용의 대상이 아닙니다. 사랑의 대상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하여 사도 요한은 이 사랑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7절부터 계속하여 강조하는 것은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11절을 보십시오.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사랑하는 것은 성도의 마땅한 의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사랑에 빚진 자들입니다. 국민이 국방의 의무를지지 않고 납세의 의무를지지 않으면 범죄하듯 신앙인은 형제에 대하여 사랑의 의무가 있는 사람입니다. 사랑의 의무를 회피하면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죄가 됩니다. 20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형제를 미워하면 그것을 거짓말이라고 합니다.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고 어떻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겠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서로를 사랑해야 합니다. 몇 개월 전 친구 목사님이 병원에 입원하여 문안하고 온 적이 있습니다. 그분은 아무런 조건 없이 간경화로 죽어가는 사람을 위해 자신의 간을 이식시켜 주었습니다. 단지 그리스도의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병문안을 하고 오면서 "내가 만약 우리 성도님이 간경화로 죽어 가고 있다면 간을 이식시켜 줄 수 있을까"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목사라는 것이 무엇인가? 결국 주님을 따르는 사람이고 주님을 따른다는 것이 주님의 사랑을 본받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주님의 사랑을 본받으며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다짐을 해보았습니다. 나이가 들면서 더욱 남는 것은 사랑이어야 합니다. 사랑의 용광로가 되어야 합니다. 세상 사람 사랑없다고 원망하지 말고 내가 사랑의 용광로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가 사랑이 없다고 다른 사람이 사랑이 없다고 원망하고 비난하지 말고 내가 사랑의 불화산이 되어야 합니다. 본래 요한도 사랑의 사도는 아니었습니다.
1)그는 편협한 열성분자였습니다. 어떤 일에 열심히 강한 사람일 수록 사랑이 별로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막3:17을 보십시오. 예수님이 그에게 별명을 줍니다. "(막3:17) 또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이니 이 둘에게는 보아너게 곧 우뢰의 아들이란 이름을 더하셨으며" 천둥 번개의 아들입니다. 그만큼 성격이 급하고 열정적이다는 말일 것입니다. 그와 같은 사실을 우리는 금방 성경을 통하여 발견할 수 있습니다. "(눅9:49) 요한이 여짜오되 주여 어떤 사람이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어 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와 함께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 편협한 사람입니다. 편가르기를 한 사람입니다. 흑백 논리로 사람을 생각한 사람입니다.
2) 그는 생명의 귀중성을 몰랐고 사랑이 없고 쉽게 격분하였던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사람들이 받아들이지 않자 어떻게 합니까?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 좇아 내려 저희를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 (눅9:55)"라고 했습니다.
3) 예수님 가까이에 있는 야심가였습니다.
"(막10:37) 여짜오되 주의 영광 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라고 하였습니다. 베드로와 라이벌 의식을 느끼고 산 사람입니다.
그러나 요한은 변하였습니다. 사랑을 실천하고 사랑을 외치는 사랑의 사도로 변화되었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그는 복음을 전하다 에베소에서 잡혔다고 합니다. 그는 복음을 전하다 독사굴에 던짐을 받고 물 속에 던짐받기도 하였지만 극적인 하나님의 보호로 살아났다고 합니다. 그의 몸은 만신창이 되어 들 것에 실려 다닐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는 들것에 실려 종종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에 참석하여 사람들에게 이런 설교를 하였다고 합니다. "소자들아 서로 사랑하라" 그러자 한 성도가 "선생님 그 설교는 수 십번도 더하였습니다. 이제 새 설교가 없습니까?" 요한은 다시 말하기를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그는 사랑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성경에 보면 그의 삶은 완전히 변화된 것을 봅니다. 앉은뱅이를 사랑하여 베드로와 함께 앉은 뱅이를 고쳐주다 옥에 갖힙니다(행3:12-4:4). 이제 더 이상 자신의 출세를 위해 신앙 생활을 하지 않습니다. 편협한 열성 분자가 아닙니다. 자신의 기분에 따라 사는 종교적 영웅주의자가 아닙니다. 사마리아에 가서 복음을 전합니다(행8:14). 베드로를 앞세워 일을 합니다.
2.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사랑한 그 사랑으로 형제를 사랑해야 합니다(19).
요한이 변화된 것은 주님의 사랑을 본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주님의 사랑의 멧세지를 들었습니다. "(요13: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그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십자가에 못박히시는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제자들이 다 도망갔지만 그 만은 십자가 앞에 나아갔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똑똑히 체험한 사람입니다. 갖은 수모를 당하고 조롱당하고 그 고통스러운 가시면류관을 쓰시고 손과 발에 못을 박히시면서까지 그들을 용서하고 사랑하시는 주님을 보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변화되었습니다. 완전히 사랑의 용광로로 변화되었습니다. 우리가 형제를 사랑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했습니다. 우리가 죄인되었을 때 우리를 사랑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지 못했을 때 우리를 하나님을 사랑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가 범죄할 때 그들을 기다린 것이 아닙니다. 그들을 먼저 찾아 가서 사랑하였습니다. 베드로가 저주하고 도망갔을 때 베드로가 회개하고 돌아 오기까지 기다린 것이 아닙니다. 우리 주님께서 먼저 베드로를 찾아가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질문을 하였습니다. 9,10절 보십시오. 독생자를 보내시는 사랑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랑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 사랑으로 형제를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의 출발점으로 볼 때 세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1) 우리의 사랑은 자기로 시작하는 사랑이 아닙니다. 자기 욕망에서 시작하는 사랑이 아닙니다. 이런 사랑은 철저히 이기적인 사랑이요, 에로스 적인 사랑입니다. 이용가치가 있으면 사랑하고 이용 가치가 없으면 버립니다. 보상적인 요구가 거절당하면 증오로 변하여 버리는 것이요, 그 사랑 뒤에는 미움이 따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사랑은 이런 사랑이 아닙니다. 염량세태(炎凉世態)란 말이 있습니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다'는 말입니다. 자기에게 이로우면 따라붙고 불리하면 배척합니다. '배가 고프면 붙고 배 부르면 떠나며 따뜻하면 모여들고 추우면 버리는 것입니다.
2) 우리의 사랑은 상대방로부터 시작되는 사랑도 아닙니다. 이것은 상대적인 사랑입니다. 저 사람이 나를 사랑하니까 사랑하는 것입니다. 조건적이고 상대적인 것입니다. 조건이 달라지면 금방 배신하고 증오하고 이용합니다
3) 우리의 사랑은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된 사랑입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사랑할 만한 가치가 없고 사랑해도 그 보상을 기대할 수 없음에도 먼저 사랑하여 주신 것입니다. 이 사랑으로 형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아무런 조건없이 주님께서 사랑했기 때문에 그 사랑으로 형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이 하나님의 본성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었기 때문에, 성령님께서 그 사랑을 할 수 있는 능력을 우리에게 주시기 때문에 그 사랑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신의 두 아들을 죽인 살인마를 자신의 양자로 삼은 손양원 목사님이 실천한 사랑입니다. 이것이 문둥이가 된 성자 다미엔 신부의 사랑의 실천입니다. 하와이 군도 몰리카 섬에서 문둥이들과 함께 살기 위해 자신도 문둥이가 된 다미엔이 실천한 사랑입니다.
오래 전에 삼포능자의 [사랑하며 용서하며]라는 책을 읽으며 감명을 받은 내용이 있습니다. 1954년 가을 연락선인 토오야 호가 태풍을 만나서 전복되었다고 합니다. 승객 몇 천명 중에서 1,011명이 이 날 밤의 조난으로 사망을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도오야 호에는 2명의 외국인 선교사가 탑승하고 있었는데 그들은 구명대가 없는 젊은 남녀에게 자기들의 구명대를 주고는 죽어갔다고 합니다. 그는 이 두 사람 중 한 사람의 선교사 사진을 자기 방에 지금도 걸어 놓고 있다고 쓰고 있었습니다. 자기 목숨을 희생하신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한 사람입니다.
미국 필라델피아에 네 사람의 군목을 위한 기념 예배당이 있다고 합니다. 그들의 사랑을 기념하기 위해서입니다. 사연이 이렇습니다. 1943. 1. 22 폭스, 구스, 폴링. 웨싱턴 군목이 '도체스터 호'에 승선하였다고 합니다. 그해 2월 3일 55분 독일 잠수함 u-233 이 도체스터 호에 접근하였답니다. 얼마가지 안아도체스터 호는 어뢰를 맞고 점점 물에 잠기기 시작했답니다. 네명의 군목은 잠기어 가는 함정 속에서 병사들을 진정시키고 구명정을 커내어 주기 시작하였답니다. 사용할 수 있는 구명정은 모두 바닥이 났습니다. 마지막 남은 구명정까지 모두 꺼내어 주고 그들은 갑판에 어깨를 맞잡고 섰습니다. 그들은 어깨를 맞잡고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배는 점점 가라안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날 배에 따고 있던 병사 904명 중 605명이 전사하였습니다. 물론 전사자 명단에는 장렬하게 죽어간 4명의 군목명단도 끼어 있었습니다. 1951. 미국 국민은 네 목사 기념 예배당을 건립했다고 합니다. 1961. 1. 18 의회 표결로 "그들의 영웅적 행위에 대한 특별훈장"을 수여하였고 그들이 천국에 간 2월 3일을 네 군목을 위한 기념일로 정하였다고 합니다.
주의 사랑으로 형제를 사랑해야 합니다. 내 마음에는 맞지 않고 아직 내 마음에 증오가 가시지 않고 아직 미운 감정이 정리 되지 않았고 계속해서 피해를 주고 괴롭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주님이 우리를 사랑한 방법으로 형제를 사랑해야 합니다. 그 때 우리 삶은 사랑의 기적이 일어날 것이고 우리 가정과 교회 사회는 사랑으로 감동이 넘치는 살만한 땅이 될 것입니다. 형제에 대한 미움이 생깁니까? 그러면 주님을 사랑한다는 고백을 해보십시오. 그 사랑 달라고 기도해 보십시오. 주님의 사랑을 받아야 사랑할 수 있습니다. 저도 마음에 미운 감정이 생길 때는 그저 앉아 10번이고 20번이고 50번이고 계속하여 주님을 사랑합니다라는 기도를 반복적으로 드립니다. 그리면 어느새 저의 마음에 주님의 사랑이 가득참을 느낄 때가 많습니다.
3. 우리는 사랑하라는 계명을 받았기 때문에 그 명령을 실천하는 사랑으로 형제를 사랑해야 합니다(21).
주님의 사랑으로 사랑을 실천하고 싶지 않아고 억지로라도 사랑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 신앙인의 삶입니다. 사랑은 해도 되고 안해도 되는 감정의 문제가 아닙니다. 사랑하라는 것은 우리 주님의 명령입니다. 거역하는냐 순종하느냐 둘 중의 하나입니다. 죄와 의의 문제입니다. 형벌과 상급의 문제입니다. 실천의 문제요 의지의 문제입니다. 창조와 파괴의 문제고, 삶과 죽음의 문제이고, 희망과 절망의 문제이고, 관계의 회복과 관계의 절단의 문제입니다. 사랑하면 창조되나 사랑하지 않으면 파괴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면 삶이 있으나 사랑하지 않으면 죽음이 임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면 희망과 관계회복이 있지만 사랑하지 않으면 절망과 관계의 절단이 오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인은 의지적으로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할 수 밖에 없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을 보십시오. 우리가 사랑하지 않으면 어떻게 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형제를 사랑할 수 밖에 없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1) 사랑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자녀라는 말을 하지말라는 것입니다(7절).
물론 사랑은 거듭남의 조건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난 사람인지를 확인할 수있는 조건이 됩니다. 즉 형제를 사랑하는 것을 보고 그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났음을 알 수 있다는 말입니다.
2) 사랑하지 않으면 하나님을 안다고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7).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대는 두 가지 길이 있는데 그 하나는 말씀을 통해서이고, 다른 하나는 순종을 통해서 입니다. 순종함으로 경험하지 않고는 하나님을 안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아직도 하나님을 잘 모르는 사람입니다.
3) 사랑하지 않으면 하나님을 모시고 산다는 말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16). 12-16절에서 네 번이나 강조됩니다.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어떻게 사랑하는냐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흠만코 상처 많이 주는 사람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느냐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기 때문에 사랑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말씀합니다. "요한복음 13장 34-35절에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라고 했습니다. 에릭 프롬은 그의 저서 '사랑의 예술'에서 사랑의 특성을 다섯 가지로 이야기했습니다. 사랑은 첫째로는 관심을 가지는 것, 둘째로는 책임을 느끼는 것, 세째로는 존중하는 것, 네번째로는 이해하는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주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성경 고전 13장에서는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상대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사랑의 사람으로 변화만 되면 문제는 해결되는 것입니다. 내가 용서하고 이해하고 존중해주고 내가 오래 참고 내가 주면 시간 지나면 모든 것은 해결되는 것입니다.
"사랑은 아름다워라"라는 책에서 본 이야기입니다. 대만에 육군사관학교 수영교사가 있었습니다. 그는 19세에 결혼을 하였습니다. 부모들이 전친한 사이라 그들이 태어나기도 전에 결혼 언약을 하고 혼기가 되자 결혼을 시켰습니다. 식을 올리고 신혼 첫날밤 가마를 타고 온 신부의 금란직보를 벗었을 때 신랑은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습니다. 얼굴이 온통 우박맞은 잿더미 모양의 곰보인데다 아주 박색이었습니다. 동갑내기 인데도 40여 세는 족히 넘어 보였습니다. 그는 어머니 방으로 도망 나와 밤새 잠을 못이루고 울먹였습니다. 어머니는 운명이러니 하고 체념하고 살으라고 그를 타 일렀습니다. 그는 기숙사로 도망가버렸습니다. 여름방학 때 강제로 아버지는 그를 대리고 왔으나 아내는 원망은커녕 눈쌀 한번 찡그리지 않고 열심히 집안 일을 잘 돌보았습니다. 갖은 냉대와 구박을 하였지만 아내는 부업을 하며 열심히 살았습니다. 결국 이들은 아들과 딸을 낳았습니다. 딸에 소용이는 대학을 졸업하고 교원생활을 하였고, 아들은 육사에 우수한 성적으로 육사에 제학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수영장에서 올맛는지 각막염으로 병원에 찾아갔을 때는 이미 시력을 잃어버린 때였습니다. 졸지에 장님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로부터 1년 뒤 각막이식 수술을 하면 시력을 되찾을 수 있다는 소식을 듣고 아내에게 그 말을 하자 아내는 환하게 웃으면서 대만불로 2만 달러 가량이 들어 있는 예금통장을 내놓았습니다. 그것은 오랫동안 그녀가 남몰래 모아놓은 피와 땀의 결실이었습니다. "당신은 저 같은 것하고는 다른 사람이니까요. 글을 읽을 수 없으면 눈 뜬 장님이니까요. 당신은 눈을 되 찾아야해요. 의사는 교통사고로 죽은 운전사가 아내에게 유언으로 6남매를 위해 자기의 여러 부분을 팔아 쓰라고 유언하여 그분의 것을 이식한다며 수술을 시작했습니다. 수술은 성공하여 1주일 동안 회복한 후 택시를 타고 딸에와 함께 집으로 왔습니다. 아내는 부엌에서 요리를 하고 있었는 데 그가 들어가지 무슨까닭인지 고개를 떨구었습니다. 그리고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이제 오십니까?라고 말했습니다. "고마워 고생 많이 시키었어"그는 앞으로 다가가 앉았습니다. 아내는 상을 다 보고 나더니 벽쪽으로 돌아 앉아 훌쩍이기 시작했습니다 "당신이 조금전 하신 그 말씀...그 말씀 만으로 저는 기뻐요. 제 인생은 결코 헛된 것이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아내는 울먹이며 떠듬떠듬 그렇게 중얼거렸습니다. 그때 딸에가 심상치 않은 기색으로 방으로 뛰어들어갔습니다. 소용이는 그녀의 어깨를 잡아 흔들며 격렬하게 울부짓었습니다. " 엄마. 아빠에게 모두 떨어바요! 엄마가 아버지에게 눈을 뽑아드렸다고 .자아 얼른 보여 드리란 말이어요 ""얘야 너무 목소리가 높구나 엄마는 당연한 일을 했을 뿐이란다" 그녀의 왼쪽 눈의 홍채는 수술전의 그의 눈처럼 흐려져 있었습니다.
"금화!"그가 아내의 이름을 부른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왜 이런 짓을 했소" 그는 그녀의 어깨를 쥐어 흔들며 소리 쳤습니다 "당신은 ...당신은 소중한 제 남편인 걸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습니다. 우리는 사랑해야 하고 사랑할 수 밖에 없는 하나님의 아들 딸들입니다. 십자가의 댓가를 치르고 한 가족된 사람들입니다.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이 느껴질 정도로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그렇게 많은 시간들이 있지 않습니다. 서로 사랑하기에도 부족한 시간들입니다.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부터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오늘 말씀 20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서로 사랑해야 할 형제/요한일서4:19-21/김필곤 목사
1. 우리는 형제를 사랑해야 합니다(21).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사도 요한이 결론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형제를 사랑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21).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형제를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피값으로 산 한 형제 자매이며 한 식구입니다. 원수가 아닙니다. 경쟁의 대상이 아닙니다. 이용의 대상이 아닙니다. 사랑의 대상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하여 사도 요한은 이 사랑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7절부터 계속하여 강조하는 것은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11절을 보십시오.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사랑하는 것은 성도의 마땅한 의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사랑에 빚진 자들입니다. 국민이 국방의 의무를지지 않고 납세의 의무를지지 않으면 범죄하듯 신앙인은 형제에 대하여 사랑의 의무가 있는 사람입니다. 사랑의 의무를 회피하면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죄가 됩니다. 20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형제를 미워하면 그것을 거짓말이라고 합니다.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고 어떻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겠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서로를 사랑해야 합니다. 몇 개월 전 친구 목사님이 병원에 입원하여 문안하고 온 적이 있습니다. 그분은 아무런 조건 없이 간경화로 죽어가는 사람을 위해 자신의 간을 이식시켜 주었습니다. 단지 그리스도의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병문안을 하고 오면서 "내가 만약 우리 성도님이 간경화로 죽어 가고 있다면 간을 이식시켜 줄 수 있을까"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목사라는 것이 무엇인가? 결국 주님을 따르는 사람이고 주님을 따른다는 것이 주님의 사랑을 본받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주님의 사랑을 본받으며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다짐을 해보았습니다. 나이가 들면서 더욱 남는 것은 사랑이어야 합니다. 사랑의 용광로가 되어야 합니다. 세상 사람 사랑없다고 원망하지 말고 내가 사랑의 용광로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가 사랑이 없다고 다른 사람이 사랑이 없다고 원망하고 비난하지 말고 내가 사랑의 불화산이 되어야 합니다. 본래 요한도 사랑의 사도는 아니었습니다.
1)그는 편협한 열성분자였습니다. 어떤 일에 열심히 강한 사람일 수록 사랑이 별로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막3:17을 보십시오. 예수님이 그에게 별명을 줍니다. "(막3:17) 또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이니 이 둘에게는 보아너게 곧 우뢰의 아들이란 이름을 더하셨으며" 천둥 번개의 아들입니다. 그만큼 성격이 급하고 열정적이다는 말일 것입니다. 그와 같은 사실을 우리는 금방 성경을 통하여 발견할 수 있습니다. "(눅9:49) 요한이 여짜오되 주여 어떤 사람이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어 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와 함께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 편협한 사람입니다. 편가르기를 한 사람입니다. 흑백 논리로 사람을 생각한 사람입니다.
2) 그는 생명의 귀중성을 몰랐고 사랑이 없고 쉽게 격분하였던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사람들이 받아들이지 않자 어떻게 합니까?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 좇아 내려 저희를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 (눅9:55)"라고 했습니다.
3) 예수님 가까이에 있는 야심가였습니다.
"(막10:37) 여짜오되 주의 영광 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라고 하였습니다. 베드로와 라이벌 의식을 느끼고 산 사람입니다.
그러나 요한은 변하였습니다. 사랑을 실천하고 사랑을 외치는 사랑의 사도로 변화되었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그는 복음을 전하다 에베소에서 잡혔다고 합니다. 그는 복음을 전하다 독사굴에 던짐을 받고 물 속에 던짐받기도 하였지만 극적인 하나님의 보호로 살아났다고 합니다. 그의 몸은 만신창이 되어 들 것에 실려 다닐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는 들것에 실려 종종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에 참석하여 사람들에게 이런 설교를 하였다고 합니다. "소자들아 서로 사랑하라" 그러자 한 성도가 "선생님 그 설교는 수 십번도 더하였습니다. 이제 새 설교가 없습니까?" 요한은 다시 말하기를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그는 사랑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성경에 보면 그의 삶은 완전히 변화된 것을 봅니다. 앉은뱅이를 사랑하여 베드로와 함께 앉은 뱅이를 고쳐주다 옥에 갖힙니다(행3:12-4:4). 이제 더 이상 자신의 출세를 위해 신앙 생활을 하지 않습니다. 편협한 열성 분자가 아닙니다. 자신의 기분에 따라 사는 종교적 영웅주의자가 아닙니다. 사마리아에 가서 복음을 전합니다(행8:14). 베드로를 앞세워 일을 합니다.
2.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사랑한 그 사랑으로 형제를 사랑해야 합니다(19).
요한이 변화된 것은 주님의 사랑을 본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주님의 사랑의 멧세지를 들었습니다. "(요13: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그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십자가에 못박히시는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제자들이 다 도망갔지만 그 만은 십자가 앞에 나아갔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똑똑히 체험한 사람입니다. 갖은 수모를 당하고 조롱당하고 그 고통스러운 가시면류관을 쓰시고 손과 발에 못을 박히시면서까지 그들을 용서하고 사랑하시는 주님을 보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변화되었습니다. 완전히 사랑의 용광로로 변화되었습니다. 우리가 형제를 사랑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했습니다. 우리가 죄인되었을 때 우리를 사랑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지 못했을 때 우리를 하나님을 사랑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가 범죄할 때 그들을 기다린 것이 아닙니다. 그들을 먼저 찾아 가서 사랑하였습니다. 베드로가 저주하고 도망갔을 때 베드로가 회개하고 돌아 오기까지 기다린 것이 아닙니다. 우리 주님께서 먼저 베드로를 찾아가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질문을 하였습니다. 9,10절 보십시오. 독생자를 보내시는 사랑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랑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 사랑으로 형제를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의 출발점으로 볼 때 세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1) 우리의 사랑은 자기로 시작하는 사랑이 아닙니다. 자기 욕망에서 시작하는 사랑이 아닙니다. 이런 사랑은 철저히 이기적인 사랑이요, 에로스 적인 사랑입니다. 이용가치가 있으면 사랑하고 이용 가치가 없으면 버립니다. 보상적인 요구가 거절당하면 증오로 변하여 버리는 것이요, 그 사랑 뒤에는 미움이 따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사랑은 이런 사랑이 아닙니다. 염량세태(炎凉世態)란 말이 있습니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다'는 말입니다. 자기에게 이로우면 따라붙고 불리하면 배척합니다. '배가 고프면 붙고 배 부르면 떠나며 따뜻하면 모여들고 추우면 버리는 것입니다.
2) 우리의 사랑은 상대방로부터 시작되는 사랑도 아닙니다. 이것은 상대적인 사랑입니다. 저 사람이 나를 사랑하니까 사랑하는 것입니다. 조건적이고 상대적인 것입니다. 조건이 달라지면 금방 배신하고 증오하고 이용합니다
3) 우리의 사랑은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된 사랑입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사랑할 만한 가치가 없고 사랑해도 그 보상을 기대할 수 없음에도 먼저 사랑하여 주신 것입니다. 이 사랑으로 형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아무런 조건없이 주님께서 사랑했기 때문에 그 사랑으로 형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이 하나님의 본성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었기 때문에, 성령님께서 그 사랑을 할 수 있는 능력을 우리에게 주시기 때문에 그 사랑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신의 두 아들을 죽인 살인마를 자신의 양자로 삼은 손양원 목사님이 실천한 사랑입니다. 이것이 문둥이가 된 성자 다미엔 신부의 사랑의 실천입니다. 하와이 군도 몰리카 섬에서 문둥이들과 함께 살기 위해 자신도 문둥이가 된 다미엔이 실천한 사랑입니다.
오래 전에 삼포능자의 [사랑하며 용서하며]라는 책을 읽으며 감명을 받은 내용이 있습니다. 1954년 가을 연락선인 토오야 호가 태풍을 만나서 전복되었다고 합니다. 승객 몇 천명 중에서 1,011명이 이 날 밤의 조난으로 사망을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도오야 호에는 2명의 외국인 선교사가 탑승하고 있었는데 그들은 구명대가 없는 젊은 남녀에게 자기들의 구명대를 주고는 죽어갔다고 합니다. 그는 이 두 사람 중 한 사람의 선교사 사진을 자기 방에 지금도 걸어 놓고 있다고 쓰고 있었습니다. 자기 목숨을 희생하신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한 사람입니다.
미국 필라델피아에 네 사람의 군목을 위한 기념 예배당이 있다고 합니다. 그들의 사랑을 기념하기 위해서입니다. 사연이 이렇습니다. 1943. 1. 22 폭스, 구스, 폴링. 웨싱턴 군목이 '도체스터 호'에 승선하였다고 합니다. 그해 2월 3일 55분 독일 잠수함 u-233 이 도체스터 호에 접근하였답니다. 얼마가지 안아도체스터 호는 어뢰를 맞고 점점 물에 잠기기 시작했답니다. 네명의 군목은 잠기어 가는 함정 속에서 병사들을 진정시키고 구명정을 커내어 주기 시작하였답니다. 사용할 수 있는 구명정은 모두 바닥이 났습니다. 마지막 남은 구명정까지 모두 꺼내어 주고 그들은 갑판에 어깨를 맞잡고 섰습니다. 그들은 어깨를 맞잡고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배는 점점 가라안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날 배에 따고 있던 병사 904명 중 605명이 전사하였습니다. 물론 전사자 명단에는 장렬하게 죽어간 4명의 군목명단도 끼어 있었습니다. 1951. 미국 국민은 네 목사 기념 예배당을 건립했다고 합니다. 1961. 1. 18 의회 표결로 "그들의 영웅적 행위에 대한 특별훈장"을 수여하였고 그들이 천국에 간 2월 3일을 네 군목을 위한 기념일로 정하였다고 합니다.
주의 사랑으로 형제를 사랑해야 합니다. 내 마음에는 맞지 않고 아직 내 마음에 증오가 가시지 않고 아직 미운 감정이 정리 되지 않았고 계속해서 피해를 주고 괴롭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주님이 우리를 사랑한 방법으로 형제를 사랑해야 합니다. 그 때 우리 삶은 사랑의 기적이 일어날 것이고 우리 가정과 교회 사회는 사랑으로 감동이 넘치는 살만한 땅이 될 것입니다. 형제에 대한 미움이 생깁니까? 그러면 주님을 사랑한다는 고백을 해보십시오. 그 사랑 달라고 기도해 보십시오. 주님의 사랑을 받아야 사랑할 수 있습니다. 저도 마음에 미운 감정이 생길 때는 그저 앉아 10번이고 20번이고 50번이고 계속하여 주님을 사랑합니다라는 기도를 반복적으로 드립니다. 그리면 어느새 저의 마음에 주님의 사랑이 가득참을 느낄 때가 많습니다.
3. 우리는 사랑하라는 계명을 받았기 때문에 그 명령을 실천하는 사랑으로 형제를 사랑해야 합니다(21).
주님의 사랑으로 사랑을 실천하고 싶지 않아고 억지로라도 사랑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 신앙인의 삶입니다. 사랑은 해도 되고 안해도 되는 감정의 문제가 아닙니다. 사랑하라는 것은 우리 주님의 명령입니다. 거역하는냐 순종하느냐 둘 중의 하나입니다. 죄와 의의 문제입니다. 형벌과 상급의 문제입니다. 실천의 문제요 의지의 문제입니다. 창조와 파괴의 문제고, 삶과 죽음의 문제이고, 희망과 절망의 문제이고, 관계의 회복과 관계의 절단의 문제입니다. 사랑하면 창조되나 사랑하지 않으면 파괴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면 삶이 있으나 사랑하지 않으면 죽음이 임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면 희망과 관계회복이 있지만 사랑하지 않으면 절망과 관계의 절단이 오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인은 의지적으로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할 수 밖에 없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을 보십시오. 우리가 사랑하지 않으면 어떻게 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형제를 사랑할 수 밖에 없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1) 사랑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자녀라는 말을 하지말라는 것입니다(7절).
물론 사랑은 거듭남의 조건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난 사람인지를 확인할 수있는 조건이 됩니다. 즉 형제를 사랑하는 것을 보고 그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났음을 알 수 있다는 말입니다.
2) 사랑하지 않으면 하나님을 안다고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7).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대는 두 가지 길이 있는데 그 하나는 말씀을 통해서이고, 다른 하나는 순종을 통해서 입니다. 순종함으로 경험하지 않고는 하나님을 안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아직도 하나님을 잘 모르는 사람입니다.
3) 사랑하지 않으면 하나님을 모시고 산다는 말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16). 12-16절에서 네 번이나 강조됩니다.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어떻게 사랑하는냐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흠만코 상처 많이 주는 사람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느냐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기 때문에 사랑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말씀합니다. "요한복음 13장 34-35절에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라고 했습니다. 에릭 프롬은 그의 저서 '사랑의 예술'에서 사랑의 특성을 다섯 가지로 이야기했습니다. 사랑은 첫째로는 관심을 가지는 것, 둘째로는 책임을 느끼는 것, 세째로는 존중하는 것, 네번째로는 이해하는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주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성경 고전 13장에서는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상대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사랑의 사람으로 변화만 되면 문제는 해결되는 것입니다. 내가 용서하고 이해하고 존중해주고 내가 오래 참고 내가 주면 시간 지나면 모든 것은 해결되는 것입니다.
"사랑은 아름다워라"라는 책에서 본 이야기입니다. 대만에 육군사관학교 수영교사가 있었습니다. 그는 19세에 결혼을 하였습니다. 부모들이 전친한 사이라 그들이 태어나기도 전에 결혼 언약을 하고 혼기가 되자 결혼을 시켰습니다. 식을 올리고 신혼 첫날밤 가마를 타고 온 신부의 금란직보를 벗었을 때 신랑은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습니다. 얼굴이 온통 우박맞은 잿더미 모양의 곰보인데다 아주 박색이었습니다. 동갑내기 인데도 40여 세는 족히 넘어 보였습니다. 그는 어머니 방으로 도망 나와 밤새 잠을 못이루고 울먹였습니다. 어머니는 운명이러니 하고 체념하고 살으라고 그를 타 일렀습니다. 그는 기숙사로 도망가버렸습니다. 여름방학 때 강제로 아버지는 그를 대리고 왔으나 아내는 원망은커녕 눈쌀 한번 찡그리지 않고 열심히 집안 일을 잘 돌보았습니다. 갖은 냉대와 구박을 하였지만 아내는 부업을 하며 열심히 살았습니다. 결국 이들은 아들과 딸을 낳았습니다. 딸에 소용이는 대학을 졸업하고 교원생활을 하였고, 아들은 육사에 우수한 성적으로 육사에 제학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수영장에서 올맛는지 각막염으로 병원에 찾아갔을 때는 이미 시력을 잃어버린 때였습니다. 졸지에 장님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로부터 1년 뒤 각막이식 수술을 하면 시력을 되찾을 수 있다는 소식을 듣고 아내에게 그 말을 하자 아내는 환하게 웃으면서 대만불로 2만 달러 가량이 들어 있는 예금통장을 내놓았습니다. 그것은 오랫동안 그녀가 남몰래 모아놓은 피와 땀의 결실이었습니다. "당신은 저 같은 것하고는 다른 사람이니까요. 글을 읽을 수 없으면 눈 뜬 장님이니까요. 당신은 눈을 되 찾아야해요. 의사는 교통사고로 죽은 운전사가 아내에게 유언으로 6남매를 위해 자기의 여러 부분을 팔아 쓰라고 유언하여 그분의 것을 이식한다며 수술을 시작했습니다. 수술은 성공하여 1주일 동안 회복한 후 택시를 타고 딸에와 함께 집으로 왔습니다. 아내는 부엌에서 요리를 하고 있었는 데 그가 들어가지 무슨까닭인지 고개를 떨구었습니다. 그리고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이제 오십니까?라고 말했습니다. "고마워 고생 많이 시키었어"그는 앞으로 다가가 앉았습니다. 아내는 상을 다 보고 나더니 벽쪽으로 돌아 앉아 훌쩍이기 시작했습니다 "당신이 조금전 하신 그 말씀...그 말씀 만으로 저는 기뻐요. 제 인생은 결코 헛된 것이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아내는 울먹이며 떠듬떠듬 그렇게 중얼거렸습니다. 그때 딸에가 심상치 않은 기색으로 방으로 뛰어들어갔습니다. 소용이는 그녀의 어깨를 잡아 흔들며 격렬하게 울부짓었습니다. " 엄마. 아빠에게 모두 떨어바요! 엄마가 아버지에게 눈을 뽑아드렸다고 .자아 얼른 보여 드리란 말이어요 ""얘야 너무 목소리가 높구나 엄마는 당연한 일을 했을 뿐이란다" 그녀의 왼쪽 눈의 홍채는 수술전의 그의 눈처럼 흐려져 있었습니다.
"금화!"그가 아내의 이름을 부른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왜 이런 짓을 했소" 그는 그녀의 어깨를 쥐어 흔들며 소리 쳤습니다 "당신은 ...당신은 소중한 제 남편인 걸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습니다. 우리는 사랑해야 하고 사랑할 수 밖에 없는 하나님의 아들 딸들입니다. 십자가의 댓가를 치르고 한 가족된 사람들입니다.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이 느껴질 정도로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그렇게 많은 시간들이 있지 않습니다. 서로 사랑하기에도 부족한 시간들입니다.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부터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오늘 말씀 20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서로 사랑해야 할 형제/요한일서4:19-21/김필곤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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