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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항해하면서 발견한 다시 읽고 싶은 글을 스크랩했습니다. 인터넷 공간이 워낙 넓다보니 전에 봐 두었던 글을 다시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래서 스크랩할만한 글을 갈무리합니다. (출처 표시를 하지 않으면 글이 게시가 안됩니다.)

새로운 설교의 가능성 -영화로 설교한다

목회독서교육 하정완 목사............... 조회 수 3066 추천 수 0 2010.01.28 14: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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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새로운설교(영화설교).hwp

영화로 설교한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가는 것은 강단으로부터 흘러나오는 말들이 그들에게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하기 때문이다. 설교는 그들 자신의 생활과 아무런 관련이 없으며, 그들을 위협하고 있는 많은 문제들을 설교자들의 설교가 그냥 지나치고 있기 때문이다"(칼 라너)

복음은 청년을 만나고 싶어한다

"설교가 자신들의 삶과 관계 없기 때문에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한다" 청년들이 교회를 떠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인 설교가 전혀 청년들의 삶과 관계없이 동떨어져서 움직이고 있다는 점이 청년들로 하여금 교회를 떠나게 하는 요인이 되게 하고 있다는 말이다. 다른 말로 바꾸면 복음이 청년들을 만나지 못하고 있다는 말이며, 그러므로 청년들은 자신의 심장을 뜨겁게 하는 예수를 만날 기회를 상실하고 있다는 말이 된다.

이같은 까닭은 정확하게 두가지 요인에서 시작된다고 말할 수 있다.

1. 하나는 삶의 자리가 배제된 설교에서 기인한다. 즉 삶의 정황은 배제된 채 텍스트만을 중요시하는 경향에서 시작된다.

2. 또 다른 하나는 텍스트가 배제된 채 지나치게 삶의 자리만을 강조하는 설교 때문에 발생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바른 설교이며 복음을 정확하게 전하는 첩경인가? 그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텍스트에서 복음을 정확하게 끄집어내는 것이 우선적으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을 우선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 우리가 먼저 알아야 할 것은 무엇인가?

편집사 비평과 양식사 비평의 공헌

복음서는 단순히 진공상태와 같은 환경에서 쓰여진 것이 아니라 역사적 예수의 복음과 초대교회의 삶의 자리에서 해석된 상황 그리고 복음서 기자의 삶의 자리를 함께 이해해야 기본적으로 복음의 정확한 내용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작업이 바르게 진행되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바르게 이해한 후에 우리는 비로소 오늘 우리의 삶의 자리에 맞는 예수님의 말씀을 해석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삶의 자리에 대한 이해

이제 필요한 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를 이해하는 것이다. 사실 복음이 마가 혹은 누가가 처한 교회의 상황에 처지에 맞게 복음이 해석되어 증거된 것처럼 우리에게 필요한 것도 오늘 우리의 시대와 회중을 정확하게 읽는 작업이 필요할 것이다. 그 작업이 이루어지지 않고서는 복음은 적절한 힘있는 옷을 입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마가복음의 경우들을 통해 함께 살펴보자.

초대교회에 의해 복음이라고 불리워지고 있는 내용은 예수님의 생애, 사역, 죽음 그리고 부활에 나타난 하나님의 구속행위에 관한 것이었다.

 마가가 말하는 복음을 알기 위해서 우리는 복음서보다 먼저 쓰여진 바울서신을 참조해야 한다.

그렇다면 바울이 받은 복음의 내용은 무엇인가? 한 마디로 말해서 고린도전서의 내용을 요약하면 "그리스도가 우리 죄를 위하여 죽고 부활했다"(고전15:3b,4b).

1. 마가복음 기자가 서 있던 자리(Sitz im Leben)

1)시대적인 문화의 자리


2)시대적인 역사의 자리
 

2. 마가가 전한 복음의 내용과 특징

마가복음은 켈러가 말한 것처럼 긴 서문이 달린 수난사이다. 마가가 수난을 강조하지만 강조되는 수난은 건드리에 의하면 수난이 아니라 영광임을 말하고 있다고 한다. 즉 마가는 십자가에 달린 예수는 패배가 아니라 영광의 승리임을 말하고자 한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그러한가?

1)메시야 비밀


2) 긴 수난이야기의 이유


3.  오늘날 상황에서 마가복음은 어떤 유익이 있는가?

결론적으로 설교자는 철저히 우리에게 주어진 텍스트를 분석하고 해석할 수 있는 기술과 능력 또한 영성을 지니고 있어야 하며, 그 말씀을 전해야 할 청중 곧 삶의 자리에 대한 정확한 이해, 문화적 적응력과 이해력을 가져야 할 것이다. 여기에 청중과 만날 수 있는 접촉점을 찾는 방법과 수사학적인 훈련, 논리적인 능력과 영성등이 필요할 것이다. 그래서 칼 바르트는 모름지기 설교자는 한 손에는 신문을 한 손에는 성경을 들고 있어야 한다고 상징적으로 말하였다.

세상을 이해하는 열쇠

세상을 이해하는 열쇠의 핵심은 문화에 있고, 단연 그 중심에는 영화가 있다. 우리가 철저히 설교자로서 신학적, 주석적 소양을 갖춘 것을 전제하여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문화에 대한 이해일 것이다.

시대정신

그런데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이 있다면 단순히 그 세상 풍속의 개념을 영화와 같은 대중문화에만 국한시킨다면 문제가 있다. 더욱이 영화를 희생양으로 삼는 것은 잘못된 접근이라고 말할 수 있다. 사실 영화는 그 시대의 정신을 반영한 것이라고 보아야 옳기 때문이다.

이제는 정상적이고 소박한 삶을 사는 사람들을 바보라고 세상은 말하기 시작한다. 그것들이 영화 속에 그려진 것이다. 그리고 그 영화를 보며 좋아하고 열광하는 것은 이미 사람들의 마음속에 그 같은 삶에 대한 동경과 사모함이 숨어있고 일반화되었다는 의미가 되는 것이다. 영화 "신라의 달밤"으로 예를 들어보자. 이 영화 속에 숨어있는 어떤 코드가 그것을 말해주는데, 그것은 한 마디로 말해서 지금 살고 있는 세상이 싫어서 벌어지는 느낌이라는 생각이 든다.

영화를 읽으면 세상이 보인다

그런데 그런 영화를 보려고 사람들이 봇물처럼 밀려들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여기서 우리는 이 시대의 영성을 보게된다. 쉽게 말해서 "악이 바친 세상"이라는 영성을 보게 된다. 사람들이 이 영화를 좋아하는 것은 한번 세상의 질서, 사는 방법을 뒤집어보고 싶어하는 욕구때문은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여기서 우리는 영화를 통하여 그 시대의 영성을 읽을 수 있다는 단초를 발견한다. 앞으로 폭력, 깡패는 영화의 영원한 주제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시대의 반영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 더 큰 문제는 조폭영화보다 수없는 포로노 영화들일 것이다, 지금도 영원히 망하지 않는 영화나 비디오는 에로비디오가 아닌가? 심지어 어떤 정신나간 목사는 자신의 아내와 정사 장면을 녹화하여 인터넷을 통하여 팔다가 들킨 일까지 벌어졌다. 이미 황폐해진 세상의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지금까지 보지 말라고 말해왔다

친구를 교과서 삼아 학급동료를 죽인 살인 사건 때문에 우리는 폭력영화가 좀 뜸하게 될 것이다라고 생각한다. 천만에 말씀이다. 이미 알다시피 조폭마누라와 킬러들의 수다가 엄청난 흥행을 거두었고 지금 "달마야 놀자" "흑수선"등이 개봉하였고 또한 개봉을 기다리는 영화도 계속 줄을 서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오히려 이제는 세상을 점령하고 있는 영화들을 보고 읽고 오히려 복음적 시각으로 영화를 해석하고 성경말씀을 통하여 적극적으로 영화를 해석하는 작업이 필요한 것이다. 그러므로 세상을 만나고, 뿐만아니라 기존 크리스천들에게는 영화를 해석하는 필터를 교육을 통하여 장착시켜주는 것이다.

어떤 영화를 볼 것인가?

수없이 쏟아지는 영화들 앞에 우리 교회는 사실 손놓고 쳐다보고 있는 것이 사실이며 아무런 가이드를 해주고 있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대표적인 뉴에이지 영화 "사랑과 영혼"과 같은 영화가 나오면 단순히 보지 말라고만 할 뿐 영화를 읽는 법도, 영화속에서 복음을 생각하는 법도 제시해주지 못하는 것이 사실이다.

한참 영화 "라이온 킹"이 상영될 때의 일이다.

뉴에이지 영화로 설교할 때

뉴에이지 영화가 주는 피해를 두말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그럼에도 피할 수 없는 것은 일반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단순히 뉴에이지 영화니까 보지 말아라 하는 소극적인 방법에서 그 영화들을 보는 방법들을 가르쳐야하고 더 적극적으로 교회가 그 영화들을 해석하고 바른 기독교적 세계관을 가지고 영화를 보는 방법을 가르쳐야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사실 우리들, 성숙한 크리스천들은 뉴 에이지 영화들을 안 볼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은 대다수의 크리스천과 불신자 그리고 초신자들은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뉴에이지 영화를 해석하고 설교해야 좋을까?

첫째, 사단의 논리들을 찾아서 집중한다.

둘째, 분명히 사단적인 논리가 숨어있는 영화이지만 그 속에 있는 위장된 선이겠지만, 단순히 사랑, 헌신 등에만 집중하여 부각시켜 준다. 여기서 핵심은 영화 속에 숨어있는 메타포만 찾아내는 것이다. 예를 들어 뉴에이지 영화 중에 부각된 영화는 "사랑과 영혼"이다. 개봉관에서만 450만을 동원한 영화인데, 누구나 웬만한 사람들은 다 봤다는 말이 된다. 그래서 나는 이 영화로 설교할 때 이 영화의 핵심을 엄청난 사랑에만 맞췄다. 그리고 결국은 그 사랑의 핵심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모아지게 하였다.
그럼 여기서 "사랑과 영혼"을 가지고 설교한 전문을 소개한다.


*사랑과 영혼
"당신의 목소리가 들려요"
요한복음 14:18-21

원제: Ghost
감독: 제리 주커
각본: 브루스 조엘 루빈
출연: 패트릭 스웨이지, 데미 무어, 우피 골드버그, 릭 어바일즈, 토니 골드윈 
장르: 드라마
관람등급: 15세 이상 관람가
러닝타임: 120분
제작년도: 1990년


사랑과 영혼은 대표적인 뉴에이지 영화입니다. 특히 영매가 등장하여 죽은 사람의 중개인이 된다는 황당한 설정이나 죽은 사람의 영혼이 하늘나라로 가지 않고 자의적으로 이 땅에 머물면서 자신의 의지대로 행동하는 것과 같이 비취므로 하늘나라를 마치 육적인 세계의 한 영역으로 해석한 것은 지극히 잘못된 설정입니다. 뿐만 아니라 귀신들이 훈련을 통하여 물질을 움직일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된다는 모습들에 가서는 점입가경에 이릅니다. 그러므로 만일 이 영화를 보면서 사후세계에 대한 이해를 이처럼 하거나 죽은 사람들의 행동으로 가능하다는 단순한 구도를 만든다면 보지 말아야 할 매우 위험한 영화입니다.

사실로 이 영화를 보지 않고 메타포가 가득한 영화로 이해한다면 사랑과 영혼은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가 분명히 있습니다. 예를 들어 백설공주와 일곱난장이의 이야기는 분명히 뉴에이지 작품입니다. 요정으로서 일곱난장이, 마귀의 현현인 왕비 그리고 백설공주... 그러나 우리는 이 이야기 속에서 권선징악 혹은 사랑의 위대함을 말하기 위한 메타포가 가득한 이야기로 이해합니다. 전혀 현실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랑과 영혼은 중요한 메타포가 가득히 들어있는 영화인 것입니다.


기막힌 사랑

이 영화의 스토리는 매우 간단합니다. 두 남녀, 몰리와 샘은 서로 사랑하고 결혼을 약속합니다. 그런데 어느날 연극을 보고 돌아오던 길에 샘은 괴한의 칼에 맞아 죽습니다. 그렇게 죽었기 때문에 떠나야 하는 상황에서 샘은 몰 리가 외치는 애절한 부르짖음 "Don't you leave me Sam. Hold on"을 듣고 자기를 데리러 온 천사들을 피해서 잠시라도 더 몰리와 함께 있으려고 시도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머뭇거리고 있으면서 샘은 자신의 죽음이 친구 칼이 자신의 돈을 가로채기 위하여 로페즈라는 깡패를 시켜서 자신을 죽인 것임을 알게 됩니다. 더욱이 큰 문제는 그런 것을 모르고 있는 자신의 사랑 몰리가 칼의 유혹에 넘어갈지도 모르는 상황에 빠져 들어가는 모습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더욱 이 땅을 떠날 수 없습니다. 드디어 귀신 샘은 사랑하는 몰리를 보호하고 자신을 죽인 칼과 로페즈에게 복수하는 일을 시작합니다.

우선 복수하는 일을 효과적으로 하기 위하여 샘은 물체를 움직이는 법을 지하철에서 억울하게 죽은 귀신의 도움을 받아 배웁니다. 그것은 샘이 할 수 있는 복수의 방법이었습니다. 그리고 샘은 체득한 기술들을 가지고 악당들과의 싸움에서 승리를 거둡니다. 이때 샘의 모습은 투명인간과 다를 바 없습니다.

동시에 샘은 몰리에게 진실을 알리고자 애를 씁니다. 위선된 칼의 모습과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음모들을 알리고자 애씁니다. 그때 샘은 오다 메라는 영매를 마치 자신의 통역관처럼 사용합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샘의 존재를 전혀 믿지 않던 몰리로 하여금 믿게끔 하는데 성공합니다.

오늘 저는 이 영화 속에 숨겨져 있는 위대한 메타포인 사랑에 대하여 말하고자 합니다. 죽어도 도무지 하늘나라로 갈 수 없는 애끓고 피절이는 사랑. 오늘 사랑과 영혼이 말하고자 하는 주제입니다. 저는 이 영화 속에 나타난 샘의 애절한 사랑을 보면서 한 편의 시를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13년 동안 후두암으로 판정을 받고 죽음을 기다리던 박정숙이라는 시인과 그 남편 김종씨의 애절한 사랑이 담긴 시집 "당신을 풀꽃이라 이름했을 때"에 수록된 "이 세상에 돌아온 것을"이라는 한 편의 시를 읽는 기분이었습니다.

"나는 죽었습니다
귀에서 잘 가라는 인사가 멀리서 멀리서 들려 왔습니다
남편의 음성과 ....."

우리가 이 시를 문제삼지 않는 것은 보이는 그림 속에 분명하게 드러나 보이는 메타포, 그림 언어 속에 기막힌 사랑이라는 메시지가 숨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 오늘 나누고 싶은 중요한 것은 우리가 단순히 메타포 혹은 그림언어로만 이해해야 하는 그림들을 성경은 실제로 그리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이 영화와 시에서 나오는 것처럼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내일이면 십자가에 매달려 죽어야 하는 상황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을 합니다.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 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터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았고 너희도 살겠음이라"(요14:18-19)

우리는 예수님의 이 말씀이 단순히 메타포가 아니라 실제로 우리에게 일어나는 사건이며, 그런 의미에서 크리스천은 그림언어들을 보면서 실제를 체험하는 사람들입니다. 저는 그 사실이 행복합니다. 뿐만 아니라 이 같은 예수님의 말씀 속에 기막힌 사랑이 녹아들어 있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당신의 목소리가 들려요

이제 몰리도 샘의 기막힌 사랑을 깨닫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하늘에 올라갈 수 없어서 몸부림치던 샘의 사랑을 깨닫습니다. 비로소 몰리의 간절함이 사무쳐 오릅니다. 사랑하는 샘을 보고 싶다는 사무침. 그때 놀랍게도 몰리는 볼 수는 없지만 샘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I can hear you."  이 영화의 핵심입니다. 도대체 몰리가 샘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던 비밀은 어디에 있을까요? 그것은 이제 샘의 일방적인 몰리를 향한 사랑 앞에 몰리가 깨닫는  샘의 사랑의 위대함 때문입니다. 샘의 사랑을 깨닫고 몰리가 이제 사모하게 되었을 때 몰리는 샘을 듣고 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제리 주커 감독은 사랑의 힘이 무한하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어쩌면 저는 제리 주커 감독이 다음의 요한복음 말씀을 가지고 힌트를 얻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가졌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이어서 말을 합니다.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요14:21)

영화 속에서 단순히 그림으로만 비취어지는 이야기를 예수님은 우리에게 실제로 말하고 계시고 크리스천은 그것을 믿는 사람인 것입니다. 즉 예수님의 목숨을 바친 애절한 사랑을 알고 이제 그 사랑을 이해하여 그 사랑을 좇아 살고자 하는 사람에게 예수님은 자신을 드러내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는 주님을 만날 수 있는 것일까요?

두말할 것도 없이 그 첫째는 주님의 사랑을 깨닫는 것입니다. 주님의 나를 향한 애절한 사랑을 아는 것입니다. 그것이 크리스천이 되는 첫 번째 스탶입니다. 사실 우리의 모든 문제는 주님의 기막힌 사랑을 깨닫지 못하는데서 출발합니다.

두 번째는 늘 주님의 사랑을 먼저 깨달으므로 이제 주님을 사랑하게 될 때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오늘 성경이 우리에게 약속하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좀더 구체적으로 사랑한다는 말의 의미를 "내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고 표현합니다. 단순히 마치 립싱크 하듯이 입술로만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삶 속에서 행동으로 지켜가는 자에게 당신을 드러내신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에 예수의 흔적이 없다면 그것은 우리의 신앙의 영역이 아직도 입술의 영역에서 벗어나 행동하는 신앙의 영역으로 이동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요즈음 광고 카피처럼 "사랑은 움직이는 거야" 그렇습니다. 사랑은 우리를 움직이게 만든다는 말입니다. 바꿔 말해서 움직이고 있다면 사랑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는 전혀 움직이지 않고 행동하지 않는 크리스천의 삶을 살았음을 시인하여야 합니다. 립싱크 하듯이 녹음기처럼 행동하지 않은 그림으로만 사는 크리스천은 아니었는지 생각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셋째, 그러나 영화설교를 시작할 때 그 영화 속에 숨어있는 폐해를 분명히 지적할 필요가 있는 것이 중요합니다.

영화로 설교하는 실제적 방법

우선 영화로 설교하는 것을 많은 사람들이 두려워하면서 던지는 몇가지 질문이 있는데 다음과 같다.

첫째, 보통 2시간 가량 진행되는 영화를 어떻게 할 것인가? 다 보고난 후 할 것인가? 아니면 보여주면서 할 것인가?

둘째, 만일 영화를 보여주면서 한다면 긴 상영시간 때문에 편집을 해야하는데, 편집을 위한 장비와 기술이 없는 상태에서 그림의 떡은 아닌가?

셋째, 특별히 영화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이 없는 상태에서 섣불리 영화설교를 하는 것은 위험하지 않은가?

마지막으로 어떤 영화를 영화설교로 선택할 것인가?

이같은 질문에 대하여 영화 "천국의 아이들"을 예로 들면서 몇가지로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중심을 잡아라.

둘째, 가장 중요한 것은 코드를 찾는 것이다. 이처럼 전체 주제가 정해지면 다음에 중요한 것은 영화설교를 끌어갈 수 있는 비밀코드를 찾는 것이 중요한데, 그것은 운동화였다. 그러므로 많은 영상이 있지만 운동화에 집중하며 전개할 필요가 있었다. "천국의 아이들"을 영화 설교하면서 보여주었던 장면들은 다섯 장면이었는데, 알리가 운동화를 잃어버리는 장면(3분56초), 운동화를 바꿔 신으며 다니는 장면(4분16초), 소년마라톤 대회 장면(3분41초), 1등하는 과정과 1등한 후 괴로워하는 장면(3분50초), 마지막으로 1등 했음을 동생 자라에게 시무룩하게 전해주는 장면과 연못에 발 담그고 붕어들이 달려오는 장면(2분58초)들을 선정하였다.
물론 영화를 편집하지 않았고 중요한 장면들을 보여주는 것으로 대신하였다. 이것은 비디오 플레이어와 영상 프로젝트만 있으면 되는 단순한 작업이었다.

그런데 이 작업은 그렇게 쉽지 않다. 그러므로 영화를 볼 때 코드를 찾아내는 핵심중에 하나는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천국의 아이들의 경우 내가 던진 질문은 "왜 일등을 하였는데 괴로웠는가"였다. 그 질문이 영화 전체의 비밀을 찾을 수가 있었다.

몇 가지 예

1. 데드맨 워킹의 경우

2. 쉰들러 리스트의 경우

셋째, 성경으로 읽어라. 영화에 대한 전문지식은 체계적으로 영화를 공부하지 않은 우리에게는 당연하다.

넷째로 중요한 것은 과감하게 버릴 수 있어야 한다.

다섯째, 사람들이 보는 영화면 모두 해석하라.

가끔 영화설교를 하고 싶다고 말하는 목회자들이 있는데, 청년들에게 접근하고 싶은 열정이 그런 결단을 하게 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영화설교를 잘 할 수 있는 핵심은, 청년목회를 잘 할 수 있는 핵심과 같다. 즉 청년을 좋아하고 청년을 열광하고 나 자신이 청년이 되어야 하는 것이 중요한 것처럼 영화를 좋아하고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전제조건이 있어야 한다.

비평적 크리스천이 되기까지

우리 교회에서는 영화설교하기 전 반드시 영화를 보고 올 것을 강조한다. 그리고 난후 설교를 들을 것을 요청한다. 이같은 방법은 매우 중요한 영화를 바르게 읽을 수 있는 시각을 갖게 하였던 것 같다.
즉 내가 먼저 본 영화를 설교자가 어떻게 기독교적인 시각으로 분석하는 가에 집중할 때 분명한 차이를 체험하게 되기 때문이다. 당연히 그것은 세계관의 차이이자 성경적으로 영화를 보는 시각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그런 차이를 느끼면서 교인들은 영화를 바르게 분석하는 도구들을 갖게 되는 것을 보았다. 아무리 사랑과 영혼같은 영화를 보더라도 충분히 거르고 볼 수 있는 필터를 갖게 되었다는 말이다. 결국 영화설교를 통하여 우리는 교인들이 나름대로 문화를 읽고 복음으로 해석하는 데까지 이르는 것을 목표로 해야 한다. 일정수준의 복음적 시각에서 영화를 읽을 수 있는 비평적 크리스천이 되도록 도와주어야 한다는 말이다.

무한정 다가오는 세상문화, 특히 영화로 대표되는 세상 앞에서 어떻게 그 영화들을 읽을 것인가 하는 문제는 선택의 차원이 아니라 필수과목으로 가르치고 인도하여야 한다는 사실에 이르게 된다. 바로 여기가 영화설교의 자리라고 생각한다.

예) 영화설교 (데드맨 워킹 전문)


*데드맨 워킹(Dead ma walking)
어떻게 그 말씀을 그들 안에 둘 것인가?
요한복음 8:31-38

감독:  팀 로빈스
출연:  수잔 서랜든 , 숀 펜
쟝르  드라마
상영시간  120분
관람대상  15세 이상 관람가
제작년도: 1995

십자가의 비명

S.1 십자가가 금속성 탐지기에 걸리는 소리(8:00-11:00)
데드맨 워킹, 이 영화는 우리에게 처음부터 매우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크리스천은 세상에 대하여 누구인가?" 어느 날 루이지애너의 흑인 빈민가에서 사역하고 있는 헬렌 브레전(수잔 서랜든)수녀는 한 사형수가 보낸 도움을 청하는 편지를 받습니다. 그러나 그녀가 만나야 할 사형수 매튜 폰슬렛(숀 펜)은 아무런 이유도 없이 젊은 남녀들을 죽이고 강간한 매우 흉악한 범죄자였습니다. 그래서 헬렌은 매튜를 만나기 위하여 감옥에 가게 되는데, 우리는 그 장면을 주의 깊게 볼 필요가 있습니다. 특히 감옥 검색대를 통과할 때 가슴에 달려있는 십자가가 금속탐지기에 걸려서 '삐익'이라는 금속성소리를 냅니다. 거기에 어떤 코드가 읽혀졌습니다.

김상준은 그의 책 "신화로 영화 읽기 영화로 인간 읽기"에서 십자가가 교도소 들어가는 입구에 설치된 금속탐지기에 걸려 나는 소리를 "비명"이라고 표현합니다. 그가 말한 것처럼 "교도소 또는 매튜 폰슬렛은 헬렌의 십자가가 상징하는 구원이나 속죄의 의미가 통하지 않는 장소이자 인물이라는 걸 간접적으로 보여준다"(310쪽) 그런데 "십자가 때문에 울린 금속탐지기의 비명은 십자가가 매튜 폰슬렛을 바꿀 수 있는 가장 무서운 무기일 수도 있다는 걸 의미한다"(311쪽)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같은 선상에서 좀더 다른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것은 금속탐지기의 비명이 아니라 십자가의 비명, 곧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외치는 주님의 울부짖음처럼 들렸습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눅 23:34)

그렇습니다. 우리가 정말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 곧 내 몸에 십자가를 지고 다니고 있다면 우리는 죽음 속에 있는 세상을 걸어갈 때 견딜 수 없는 소리를 낼 것입니다. 세상을 바라보면서 죽음을 맞이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예수의 비명을 지를 것입니다. 견딜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아직도 우리가 주님이 말씀하신 십자가를 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고 우리 자신이 그 십자가에 온전히 못 박혔음을 체험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악인

매튜는 헬렌에게 자신이 살해하거나 강간하지 않았고 자신은 피해자라고 오히려 주장합니다. 헬렌의 도움을 받고 죽음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노력이었습니다. 그래서 헬렌은 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노력을 기울이고 구명하려고 하지만 하면 할수록 매튜의 범죄는 더욱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더욱이 자신을 구명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 TV 인터뷰를 통하여 매튜는 백인우월주의에 입각한 인종차별주의자에다가 히틀러를 추앙하는 나찌주의자라고 하는 등 정치적인 발언들을 하지만, 그것은 자신의 추악한 면만 더 드러나는 꼴이 되고 맙니다.

이 같은 상황에서 주변의 피해자들과 사람들은 이 같은 짐승 같은 매튜를 돕고자 하는 헬렌을 비난합니다. 그래도 헬렌은 계속해서 매튜를 돕습니다. 더욱이 모든 구명노력이 수포로 돌아가고 사형이 확정되자 집행일까지 죽음을 준비하도록 도와주는 역할인 일종의 "영적인 상담자(spiritual advisor)"로 자신을 요청했을 때에도 기꺼이 그의 부탁을 들어줍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헬렌은 왜 이미 드러난 흉악한 범죄자, 그렇지만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지 않고 거짓을 일삼는 매튜를 도우려 하는 것일까요?

두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것은 바로 헬렌 안에서 끊임없이 울어대는 십자가의 비명 때문입니다. 헬렌은 매튜로부터 딸을 잃은 한 부모의 비난 앞에서 자신이 모든 것을 알면서도 이처럼 행하는 이유를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이 그렇게 본을 보이셨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큰 죄악을 지었을지라도 가치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 본을 십자가에서 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S.2 딸을 잃은 부모와의 대화(56'40-59'50)
우리 안에 십자가가 있습니다. 그 십자가에서 소리치는 울부짖음이 들리십니까? 혹시 완전 침묵은 아닙니까? 우리는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만 사랑할 수 있는 매우 제한적인 센서를 가진 크리스천이 아닙니까?
우리 크리스천들이 이 세상에서 아무런 힘도 갖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왜 우리 주변의 사람들이 교회로 오지 않습니까? 왜 예수님을 믿으려고 하지 않습니까? 그것은 우리 안에 십자가가 어둡게 내려진 암흑의 커튼 속에 갇혀있기 때문이고 그러므로 우리의 센서가 전혀 작동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처럼 우리가 소리를 지르지 않자 세상은 매우 떳떳하게 더 많은 죄를 범하고 악을 저지르는 것입니다. 죄악이 충만하다? 그것은 더 이상 십자가의 울부짖음을 우리들이 가리워놓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무런 힘도 없는 것입니다.

복음은 이제야 힘을 발휘한다

여기서 우리는 세상이 우리의 복음을 왜 듣지 않는지 그 이유를 깨닫게 됩니다. 그것은 우리 안에 십자가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권면도 말씀도 듣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복음이 휴지조각처럼 세상에서 날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십자가가 살아있고 그러므로 진정한 울부짖음을 갖고 있는 헬렌수녀에게 매튜는 마음을 엽니다. 그 복음을 듣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복음을 받아들이고 예수가 자신을 위해 죽으신 것을 인정하자 그때 헬렌수녀는 매우 중요한 말씀을 전합니다. "그렇다고 구원이 공짜로 얻어지는 것이 아네요. 구원을 얻으려면 스스로 해야 할 일이 있어요. 요한복음 8장을 보세요.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8:32)

S.3 복음 앞에 선 매튜(1:18'23-1:20'02)
진리는 곧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바로 사랑이십니다. 그러니까 이 진리는 단순히 시인하는 것 이상으로 알아야 하고 경험해야 합니다. 그래야 진정한 자유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지만 자유함이 없는 것은 진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진리를 체험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제 복음은 힘을 발휘합니다. 갑자기 매튜는 자신의 모든 잘못을 인정합니다. 그가 지었던 죄를 인정하게되었고, 뿐만 아니라 자신으로 고통 당한 피해자들을 위해 기도할 수 있는 모습으로... 정말로 자신의 죽음이 그 부모들에게 위로가 되기를 원하는 진정한 사람으로 변화됩니다. 그때 헬렌은 매튜가 고귀한 존재가 되었음을 선언합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선언이었습니다. You are son of God!

그러나 여기서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처럼 매튜가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깨닫게 된 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자신 안에서 끊임없이 울고 있는 십자가의 울부짖음을 좇아 사랑으로 다가온 헬렌수녀 때문이었다는 사실입니다. 매튜는 헬렌을 통하여 주님의 사랑을 만난 것입니다.

S.4 매튜의 고백(1:41'05-1:45'22)
그렇다면 왜 매튜는 그동안 진리이신 예수를 알지 못한 것이었을까요? 자신 안에 갇혀 있는 존재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오직 자신만 사랑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전엔 진정한 사랑을 몰랐어요. 나 자신 외에는 여자도 누구도 사랑한 적이 없어요"

요한은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곧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요1:5) 즉 자신이라는 어두움 안에 갇혔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게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임을 안다. 그런데 너희는 나를 죽이려고 한다. 내 말이 너희 속에 있을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요8:37)

자신을 자신의 왕으로 삼고 자기를 위하여 살아왔기 때문에 예수를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는 예수를 알게 되는 것입니까? 매튜는 어떻게 깨닫게 된 것입니까? 매튜는 매우 의미심장한 말을 합니다. "사랑을 발견하려면 죽어야 하나봐요"

여기서 사랑은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그 진리이신 사랑은 그 진리를 품은 사람, 곧 헬렌을 통하여 깨닫게 되었고, 그래서 자신을 향한 빗장을 풀고 내려놓았을 때 주님이라는 사랑이 보였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매튜가 안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놀랍게도 사랑이란 통로를 통해서 알려진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사랑이라는 얼굴

매튜가 사형장으로 끌려갈 때 간수는 이렇게 외칩니다. "Dead man walking!" 갑자기 이 외침은 저에게는 요한계시록 3장 1절의 "살았다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라는 사데교회를 향한 말씀과 에베소서 2장 1절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라는 말씀과 오버랩 되면서 이 세상 사람들이 보였습니다. 그러니까 아직 예수를 알지 못하는 모든 이들은 "데드맨" 곧 죽은 사람들이고 우리는 그들과 함께 걸어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곧 죽음이 다가올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우리에게서 무엇인가 보고싶어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사형장으로 가면서 계속 함께 있어주길 원하는 데드맨 매튜를 향하여 헬렌이 말합니다. "당신이 마지막 보는 게 사랑이라는 얼굴이길 바래요. 그러니 그들이 당신을 죽음으로 내몰 때 나를 봐요. 날 봐요. 내가 당신을 위한 사랑이라는 얼굴이 되어줄께요. You look at me. I will be face of love for you."

S.5 사랑이라는 얼굴(1:47'07-1:52'55)
오늘 세상, 곧 이미 죽음 가운데 있는 데드맨과의 워킹, 그것이 우리와 세상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사랑이라는 얼굴을 보고 싶어합니다. 바로 우리들, 이미 예수 안에서 죽음으로 예수의 십자가를 지고 그 울부짖음을 가진 우리들... 그 경험을 가진 자들만이 지니고 있는 사랑이라는 얼굴을 그들은 보고 싶어한다는 사실입니다. 그것만이 세상을 변화시킵니다. 그것만이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만듭니다.

사실 특별한 전도방법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우리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용해되어 있는가하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가 그들을 막아도 그들이 우리에게로 오는 것을 막을 길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사랑이라는 얼굴을 가질수 있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그 아름다운 얼굴, 사랑이라는 얼굴을 지닐 수 있게 되는 것입니까? 매튜의 장례식장에 그렇게 증오하던 아들을 잃었던 델라크로와씨가 찾아옵니다. 여전히 가슴에는 가득 미움이 남아있는데, 그곳에 찾아옵니다. 그는 자신이 찾아온 이유를 알지 못합니다. 그저 막연히 자신이 헬렌수녀 만큼 믿음을 갖지 못해서 아직도 미움이 가득한 것 같다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헬렌수녀의 믿음이 놀랍다는 표현이기도 합니다. 어떻게 하면 그런 믿음을 가질 수 있는가하는 물음이기도 합니다.

그때 헬렌은 매우 중요한 말을 합니다. "그것은 믿음의 문제가 아니에요. 그건 노력이에요." "It's Work!" 저는 이렇게 번역하고 싶습니다. "그것은 싸움입니다" "그것은 피입니다" "그것은 처절한 눈물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훈련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라는 진리는 우리를 통하여 이 세상에 전달되어집니다. 이 세상은 우리를  통하여서만 진리이신 예수를 만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자세히 말해서 우리의 삶 속에서, 우리 자신의 모습이 "face of love" 곧 사랑이라는 얼굴이 될 때 그들은 우리를 통하여 예수를 만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또 기억해야 할 것은 그 아름다운 얼굴은, 그 아름다운 믿음은 우리의 끝없는 훈련 곧 피흘리는 싸움과 절제와 눈물을 통하여 만들어진다는 것입니다. 자, 이제 다시 한번 시작하길 원합니다. 우리의 더욱 아름다워진 모습을 위하여 우리를 통하여 예수가 더욱 분명하게 진리로 증거 되기 위하여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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