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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묘

정채봉동화 정채봉............... 조회 수 1702 추천 수 0 2010.02.03 17:48:04
.........
성묘

소년의 아버지는 술망태였다.  
항시 뿌연 막걸리 자국이 옷섶에서 지워질 날이 없었다.

소년의 은근한 자랑은 학교의 사친회장이 같은 마을에 사는 숙이 아버지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소년의 부끄러움은 술망태가 그의 아버지라는 사실이었다.

소년의 아버지는 숙이네에 가서 품을 팔았다.
숙이 아버지가 지나가면서 "돼지가 왜 저 모양이야?"
하고 혼잣말만 해도 소년의 아버지는  갈퀴 같은 손으로 돼지의 등을 득득 긁곤 했다. 

세밑이었다.  숙이네에서 돌아온 아버지를 소년은 밤늦게까지 기다렸다.
지게뿔에 소년의 새 신발을 달아매고 김이 나는 떡함지를 지고 돌아올 아버지를.

그러나 소년의 아버지는 온통 머리 끝까지 술에 젖은 채 빈 지게로 돌아왔다.
짚가리에 쓰러지면서 주정을 했다.
"이젠 자식을 깔머슴으로 들여보내라고...흥."

설날 아침은 차고 맑았다.
소년의 아버지는 할아버지가 쓰시던 탕건과 갓을 찾아 썼다.  
버선을 신고 대님을 치면서 말했다.
"우리집도 뼈대가 있는 집안이다.  그 센 뼈를 부드럽히려고 내가 술을 과히 들었지만서두..."

성묘를 마치고 재를 넘어 올 때였다.  
소년의 아버지가 조끼 주머니 속에서 무엇인가를 꺼내었다.
그것은 고구마였다.

소년은 아버지가 건네주는 고구마를 솔밭 속에다 던져버렸다.
"설날에 고구마 먹는 집이 어디 있는가요?  
나는 숙이네에 가서 깔머슴을 살면서 떡 먹을라요."

소년의 아버지가 눈 덮인 먼산 봉우리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나는 올 설이 어느 해보다도 자랑스럽다.  
비럭질해서 떡 싸들고 온 날보다도 이렇게 마음이 편할 수가 없다.  
명심해 두어라.  부자집 개로 발끝에 채이면서 사는 것보다도 못 먹더라도
내 맘 지니고 사는 것이 조상님께는 떳떳하구나."

이번에는 소년이 아버지가 되었다.  아이를 데리고 아버지의 산소를 찾아왔다.
떡을 잘못 먹고 배탈이 났는지 아이가 칭얼대었다.
솔밭 속으로 아이를 들여보내 놓고 나자 고구마 내음이 솔밭으로 부터 흘러 나왔다.
'아아, 아버지.'
소년은 가슴 위에 두 손을 모았다. 올 설에도 먼산 봉우리는 눈을 이고 있었다.

정채봉 <멀리가는향기/샘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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