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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항해하면서 발견한 다시 읽고 싶은 글을 스크랩했습니다. 인터넷 공간이 워낙 넓다보니 전에 봐 두었던 글을 다시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래서 스크랩할만한 글을 갈무리합니다. (출처 표시를 하지 않으면 글이 게시가 안됩니다.) |
출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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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복이란 무엇인가? 행복을 정의하는 것이 쉽지 않은 것처럼 축복을 정의하는 것은 쉽지 않다. 대개의 사람들은 이름을 떨치고, 삶의 여유가 있어 풍성한 삶을 누리며, 육신적으로 강건한 모습 등을 ‘축복받았다’고 생각한다. 과연 그것들이 축복인가? 꼭 그렇지만은 않다. 인간의 축복은 인간의 눈에 드러나는 ‘삶의 결과’로 결코 평가될 수 없다. 인간의 축복 여부는 돈의 있고 없음에, 명예의 있고 없음에 따라 판별되지 않고 오직 하나님 앞에서만 진실한 판가름이 날 것이다.
사랑하는 대상이 살아만 주는 것 하나만이 지상 최대의 축복의 조건인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작고 기본적인 축복은 너무나도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 인생들에게 마태복음 5장에서 예수님은 너무나도 역설적인 말씀으로 ‘복 있는 자’를 정의하고 있다. 예수님은 누가 ‘복 있는 자’라고 말씀하시는가?
첫째, 예수님은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심령이 가난하다 함은 자기의 죄와 허물과 연약성을 깨닫고 “내가 얼마나 별 볼일 없는 존재인가?”를 인식하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너무나도 많은 사람들이 “네가 별 볼일 없다.”고 말한다. 자기 영혼의 위기는 보지 못하고 남의 걱정만 한다. “아무개는 조금 더 은혜 받아야 한다.”고 말하기 전에 스스로를 먼저 살필 줄 아는 겸손한 심령이 되라.
때때로 어떤 사람은 ‘자기의 겸손’을 지나치게 사랑한다. 그것도 가난한 심령이 아니다. 시인 헬렌 헌트 잭슨(Helen Hunt Jackson)은 이런 고백적 기도를 드렸다. “이제 알기에는 내 생각에 옳았다거나 겸손했던 것도 죄였나이다.”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고백하여 가난한 심령이 된다는 일은 참으로 고통스런 일이지만 가난한 심령은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 위해 꼭 입어야 할 옷이요,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은 이 가난한 심령의 계곡을 통해서 흐르게 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둘째, 예수님은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애통은 고난으로부터 생겨난 슬픔의 표시이다.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음은 고난을 당하는 자에게 복이 있다는 말인데 과연 평범한 사람이 이러한 역설을 받아들일 수 있는가? 이 역설을 받아들이기는 힘들지만 그래도 받아들여야 한다. 왜냐하면 고난의 가치는 그것이 주는 고통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고난을 통해 무엇인가를 얻을 수 있다는 데에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고난을 통해서 참으로 중요한 것, 즉 자기 자신의 참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사람은 울어야 할 경우는 울어야 한다. 자기를 위해, 그리고 타인을 위해...
셋째, 예수님은 온유한 자는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온유함이란 무엇인가? 온유함이란 단순히 부드러운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또한 약한 것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우유부단함을 나타내는 말은 더욱 아니다. 온유함이란 하나의 힘이 잘 조절되어 그것이 인격에 나타나는 덕성이다. 온유란 옛날 성현들이 그토록 중요시했던 ‘중용’의 정신과도 통한다. 임금과 거닐면서도 아첨하지 않는 자세, 거지와 거닐면서도 수치심을 느끼지 않는 태도, 이것이 바로 온유함이다. 온유한 성격으로는 아무 일도 이루지 못할 것 같지만 하나님은 온유한 사람을 축복하여 땅을 기업으로 얻도록 하신다.
넷째, 예수님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여러 삶의 순간을 지나치면서 수많은 불의를 목도하지만 그대로 지나친다. 불의를 불의라고 지적할 때 많은 불편과 고난이 예상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도는 불의를 지적하고 공의를 사랑해야 한다. 기독교는 산중에 숨어있는 은둔의 종교가 아니라 거리 한 복판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증거하는 종교이다. 하나님의 공의를 선포할 때 때때로 세상으로부터 어려움을 당하겠지만 하나님의 축복을 받게 된다. 그러나 불의를 지적할 때 고집, 편견, 폭력의 불의한 자세를 버리고 꼭 그리스도의 사랑을 수반시켜야 한다.
다섯째, 예수님은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주기보다는 받기를 좋아한다. 그래서 타인의 사랑과 관심을 받는 것을 축복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주님은 가난하고 약한 자에게 사랑을 주고 관심을 주는 일이 더욱 귀한 축복이라고 말씀하신다. 타인의 사랑과 관심을 받는 일은 인간으로부터 오는 축복을 얻는 것이지만 타인에게 사랑과 관심을 줌으로 말미암아서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축복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으로부터 오는 축복과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축복 중에 어느 것이 더욱 크고 귀한가?
어려워하는 자에게 사랑과 관심으로 접근하는 긍휼의 정신을 가지고, 어려움에 처한 이웃의 소식을 듣거든 이웃의 어려움을 함께 느끼고 그들을 도우려는 적극적 자세를 갖추라. 전 세계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참으로 문제되는 것은 바로 내 이웃에 대한 사랑이다. 이웃을 위해 희생과 노력을 요구하는 일에 능히 결단할 용기를 가지라. 그 용기를 통해 하나님의 놀라운 긍휼의 축복을 체험하게 된다.
여섯째, 예수님은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위선이 난무하는 사회에서 살아가기 위해 “어느 정도의 위선이 있어야 최소한의 행복이라도 취한다.”고 타협하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마음이 청결한 자의 복을 말씀하셨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의 약점을 남이 보지 않는 곳에서 은밀히 즐기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과 자신 앞에 솔직해지라. 세상의 모든 가면들은 볼 수 있는 구멍이 있어서 사물을 관찰할 수 있지만 위선의 가면은 구멍이 없어 인생들을 소경으로 만들게 된다. 위선의 가면을 쓴 소경의 축복은 불완전한 것이요, 위선의 가면을 벗고 마음을 청결히 한 후에야 비로소 자기 자신의 참 모습을 깨닫고 하나님을 볼 수 있는 놀라운 축복을 누리게 된다.
일곱째, 예수님은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일생을 큰 경기로 본다. 그런 사람들은 끊임없이 남들과 경쟁하고 있고 인생의 성공과 축복을 <승자의 우승컵>에서 찾는다. 즉 다른 사람의 눈에 눈물이 나오더라도 나의 입술에 웃음이 있기만 한다면 축복 받은 인생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인생을 경쟁관계로만 볼 때 결국 그 인생은 자멸로 이끌리게 되고 그런 사람들이 모인 사회는 반목과 대립 및 불안이 판치는 사회가 되어버린다.
이제 서로를 동반관계로 보고 그리스도처럼 화평의 도구가 되도록 노력하라. 솜과 같이 푹신푹신, 계란과 같이 둥글둥글 살아도 얼마 안 되는 인생인데 가시 같은 인생을 살아서야 되겠는가? 서로의 사정을 이해하며 화평의 도구가 되도록 노력하라! 불신자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아프게 하듯이 화해의 정신을 갖추지 못한 자도 불신자 못지않게 그리스도의 마음을 아프게 함을 깨닫고 상대방을 용서하라! 화평의 도구가 되고자 할 때 손해 보는 느낌이 들지라도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지는 놀라운 축복을 받게 된다.
여덟째, 예수님은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의’는 무엇인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들의 ‘의’가 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위해 핍박받는 일을 너무 슬퍼하지 말라. 초대교회 성도들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핍박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나’를 잃어버렸던 사람들이었다. 존재의 이유가 예수였고, 생존의 목적이 예수였고, 생활의 내용이 예수였기에 초대교회 성도들은 열병을 앓듯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사랑과 열정을 불태우다 기쁘게 순교의 잔을 마셨다. 이 땅에서 하나님과 함께 고난을 받는 사람들은 하늘나라에서 하나님과 함께 영광을 누리게 될 것이다.
모든 사람들은 복 받기를 진실로 바라고 있다. 아마 사람들의 첫 번째 관심사는 ‘복 받는 일’일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첫 번째 설교를 ‘복’으로부터 시작하셨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하셨던 복은 인간의 사고체계로 수긍하기에는 너무나도 획기적이었고, 너무나도 역설적이었다. 육신의 정욕에 빠져 <무엇을 하고자> 바쁜 인생들에게, 안목의 정욕에 빠져 <무엇을 가지고자> 바쁜 인생들에게, 이생의 자랑에 빠져 <무엇이 되고자> 바쁜 인생들에게 예수님은 정욕과 자랑을 감추어야 얻을 수 있는 성경적 축복을 가르쳐주신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 속에서 축복의 개념을 확실히 파악하고 ‘복 있는 자’의 위치에 서라. 인간의 의지가 양심과 도덕의 의지에 의해 부서졌을 때 인간은 인격이 되듯이, 인간의 의지가 그리스도의 의지에 의해 부서졌을 때 비로소 인간은 진실로 ‘축복된 자’가 된다. 그리스도가 가르쳐 주신 ‘복 있는 자’의 본을 따라가기 위해 최선을 다해보라! 그렇게 하다가 마침내 그리스도와 같은 비극을 현세에서 맞이하게 될지라도...
ⓒ 글 : 이한규 http://www.john316.or.kr
[샛별칼럼45]
8가지 역설의 축복
예수님은 누가 '복 있는 자'라고 말씀하시는가?
첫째, 예수님은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심령이 가난하다 함은 자기의 죄와 허물과 연약성을 깨닫고 "내가 얼마나 별 볼일 없는 존재인가?"를 인식하는 것이다.
둘째, 예수님은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애통은 고난으로부터 생겨난 슬픔의 표시이다.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음은 고난을 당하는 자에게 복이 있다는 말인데 과연 평범한 사람이 이러한 역설을 받아들일 수 있는가?
셋째, 예수님은 온유한 자는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온유함이란 단순히 부드러운 것, 약한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우유부단함을 나타내는 말은 더욱 아니다. 온유함이란 하나의 힘이 잘 조절되어 그것이 인격에 나타나는 덕성이다.
넷째, 예수님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여러 삶의 순간을 지나치면서 수많은 불의를 목도하지만 그대로 지나친다. 불의를 불의라고 지적할 때 많은 불편과 고난이 예상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도는 불의를 지적하고 공의를 사랑해야 한다.
다섯째, 예수님은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주기보다는 받기를 좋아한다. 그래서 타인의 사랑과 관심을 받는 것을 축복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주님은 가난하고 약한 자에게 사랑을 주고 관심을 주는 일이 더욱 귀한 축복이라고 말씀하신다.
여섯째, 예수님은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위선이 난무하는 사회에서 살아가기 위해 "어느 정도의 위선이 있어야 최소한의 행복이라도 취한다."고 타협하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마음이 청결한 자의 복을 말씀하셨다.
일곱째, 예수님은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오늘날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눈에 눈물이 나오더라도 나의 입술에 웃음이 있기만 한다면 축복 받은 인생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른 사람을 먼저 웃게 하라고 하신다.
여덟째, 예수님은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들의 '의'가 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위해 핍박받는 일을 너무 슬퍼하지 말라. 초대교회 성도들은 열병을 앓듯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사랑과 열정을 불태우다 기쁘게 순교의 잔을 마셨다. 이 땅에서 하나님과 함께 고난을 받는 사람들은 하늘나라에서 하나님과 함께 영광을 누리게 될 것이다.
ⓒ이한규 목사 <분당샛별교회 http://www.john316.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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