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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경기장에서 성도가 누리는 기쁨

요한복음 김필곤 목사............... 조회 수 2337 추천 수 0 2010.02.14 23:58:40
.........
성경본문 : 요16:20-24 
설교자 : 김필곤 목사 
참고 : 열린교회 http://www.yeolin.or.kr 
20020616
월드컵 도전 48년 만에 16강 진출의 쾌거를 이뤄낸 금요일 저녁 히딩크 감독은 단숨에 국민적‘영웅’으로 뛰어올랐고 온 나라가 그야말로 환희와 기쁨의 도가니로 변한 것 같았습니다. 전국 방방곡곡이 온통 환희와 감동으로 가득찼고, 하루가 지난 15일에도 이 같은 흥분과 기쁨은 가라앉지 않는 것 같습니다. 전국민이 축구로 하나되어 오랜만에 환희와 기쁨을 만끽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어느 교회 목사님은 얼굴에 패인팅을 하고 교인들과 함께 열광적으로 응원을 하며 기뻐했다고 합니다. 부산에서는 16강 흥분한 나머지 '영혼이 되어 12번째 선수가 되겠다'며 30대 후반 남자가 부산 해운대 백사장에서 분신자살을 기도하는 일도 일어났습니다. 그는 유서에서 "거스 히딩크 감독 이하 선수들의 땀, 눈물, 열광적인 함성, 물결같은 불길로 첫승의 기쁨을, 저 개인에게는, TV앞에 앉아있던 저에게는 제 생애 가장 큰 생일 선물이기도 했습니다"라고 썼다고 합니다. 그는 후송 과정에서도 '필승 코리아' 구호를 외쳤다고 합니다. 왜 사람들은 이렇게 기뻐할까요? 이유는 단순합니다. 한국 팀이 승리했기 때문입니다. 미국이 승리했다면 이렇게 기뻐하지 않습니다. 한국팀이 패배했다면 이렇게 기뻐하지 않습니다. 프로이트(1856∼1939)는 기쁨을 선천적인 감정의 하나로서 육체적인 쾌감이라 설명합니다. C.B.브리제스는 유아 50명을 대상으로 관찰했더니, 감정은 단순한 흥분으로부터 출발하여 그것이 쾌 ·불쾌로 나누어지고, 쾌감이 기쁨으로 발달하여 희망으로 분화된다고 말하였습니다. 이런 사람들의 말을 참고해 볼 때 기쁨이란 오감각을 통해 쾌를 느끼는 것이고 일반적으로 욕구가 충족되었을 때, 무엇인가를 성취하였을 때 느끼는 감정입니다. 기쁨의 종류를 좀 나누어 설명할 때 이것을 우리는 받아서 얻는 기쁨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Ⅰ. 성취의 기쁨
축구에서 승리해서 얻는 기쁨은 주어서 얻는 기쁨이라기 보다는 소유의 기쁨이고 성취의 기쁨입니다. 승리해서 기쁘고, 소유해서 기쁘고, 합격해서 기쁘고, 사랑받아서 기쁘고, 자신이 소중하게 여기는 것을 손에 넣어서 기뻐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돈을 벌어서 기쁘고, 선거에 당선되어 기쁘고, 명예를 얻고 기쁘고, 연구 성과를 얻어 기쁘고, 장난감을 얻어 기쁜 것과 같이 욕구가 충족되어 기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 기쁨은 소유의 기쁨, 성취의 기쁨, 욕구 충족의 기쁨입니다. 아브라함 마슬로우(Abraham Maslow)고 말하는 생리적욕구, 안전욕구, 사회적 욕구(소속감), 존경욕구(인정받으려는 욕구, 사랑의 욕구), 자아실현 욕구 등이 충족되어 기뻐하는 기쁨입니다.
1) 이러한 기쁨의 특징은 욕구가 실현될 때만 기쁘다는 것입니다.
욕구를 실현하지 못하거나 받은 것을 상실하면 금방 슬픔에 잠기고 기쁨이 큰 만큼 슬픔도 크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욕구가 실현되지 않으면 슬퍼하고 절망하고 비관하고 좌절하지만 실현되면 기뻐하고 희망을 갖게 됩니다.
2) 이 기쁨의 특징은 오래 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감각적인 기쁨입니다. 영국 속담에 이런 말이 있지 않습니까? "하루를 기쁘게 살려면 이발을 하라. 한 주일을 기쁘게 살려면 승마(자동차)를 사라. 한 달을 기쁘게 살려면 결혼을 하라. 한 해를 기쁘게 살려면 새집을 지어라. 평생을 기쁘게 살려면 정직하게 살아라."라는 말입니다. 일리 있는 속담이라고 생각됩니다. 소유에 의한 기쁨, 성취에 의한 기쁨이라는 것은 한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있을 때만 누리는 기쁨이라는 것입니다.
3)그런데 이 성취 소유에 의한 기쁨의 특징 중 아주 좋지 않은 것은 도덕성 윤리성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 백성은 포르투칼을 이겨 승리의 기쁨을 누리는데 포르투칼 선수와 백성은 슬픔과 고통의 눈물을 흘리는 것입니다. 욕구 충족이나 소유, 성취의 기쁨이라는 것은 좀더 깊이 생각해보면 도덕성, 즉 윤리성이 배제되어 있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윤리성과는 관계없이 기뻐하는 것입니다. 가령 어떤 도둑이 도둑질을 해서 자기가 가지고 싶어하던 것을 소유할 때도 엔돌핀은 분비됩니다. 성취감에 기뻐합니다. 어떤 사기꾼이 남을 속이고 남을 괴롭히면서 자기의 목표를 달성했을 때에도 엔돌핀은 나옵니다. 성 범죄자가 지나가는 여인을 강간해 놓고도 기뻐합니다. 이 기쁨은 승자와 패자가 같이 누리는 기쁨은 아닙니다. 약자는 고통받고 고통 위에 서서 승자는 기뻐하는 기쁨입니다. 조금 심하게 말하면 아프카니스탄 사람들이 무수히 죽고 짓밟혔는데도 미국 사람들이 전쟁에서 승리했다고 기뻐하는 것과 같습니다. 오사마 빈 라덴이 세계 무역 센타를 비행기로 폭파기키는 장면을 보고 기뻐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릇된 스포츠에서는 인간의 공격성이 경기 규범으로 미화되어 대리 만족적인 기쁨을 누릴 따름입니다. 소유와 승리의 기쁨이 원시적이고 육체적이고, 일시적이고, 감정적인 기쁨이고 잘못 나가면 동물적이고 파괴적인 가학적인 기쁨이 되어 버립니다. 저는 교회에서 목회자가 패인팅을 하고 성도들을 모아 놓고 광적으로 응원하면서 열광하며 기뻐하는 모습을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기독교는 승리를 섬기는 승리교도 축구를 섬기는 축구교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겼다고 스님들이 열광하는 모습을 보면서도 어디지 마음 한 구석에 저런 것은 아닌데 하는 생각이 듭니다.
지난 3월 31일, 서울 상암 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부활절연합예배는 표어가‘부활의 영광! 월드컵 승리!’였습니다. 저는 한심하다고 생각합니다. 불교는 어떠했습니까? 연등이 축구공으로 바뀌었습니다. 종교는 종교의 본연의 역할을 해야 합니다. 월드컵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총성없는 전쟁입니다.‘축구는 평화시의 전쟁이다’이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잠재된 민족주의는 축구라는 이벤트를 통해 극대화되고, 월드컵은 민족주의에 기대어 생명을 이어가는 권력자들에게 더 없이 좋은 축제가 아니겠습니까? 운동하는 목적이 신체를 건강히 하고 상대방과의 관계를 깊게 하는 것이라는 말은 교과서적인 말이 통합니까? 전쟁의 절대 가치는 오직 승리입니다. 이등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월드컵 경기 결과를 둘러싼 온갖 거래와 추문들이 무성한 것이고 오직 승리만 목적으로 싸우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축구 영웅들의 현란한 몸 동작에 넋을 놓고 기뻐하고 있는 동안 영악한 소수의 사람들은 자신의 주머니를 두둑이 채우는 것입니다. 축구 재벌이 나오고 축구가 본질적인 스포츠 정신을 망각하는 것입니다. 스포츠는 스포츠일 따름입니다. 스포츠라는 것은 승패를 떠나 과정을 즐길 때 스포츠 본연의 임무를 다하는 것입니다.

Ⅱ 주는 기쁨
성취, 욕구 충족, 승리의 기쁨보다 좀더 나은 기쁨은 주는 기쁨입니다. 공유의 기쁨입니다. 있는 것을 주고 가진 것을 나눔으로 얻는 기쁨입니다.
1)이 기쁨의 특징은 승자나 패자나 함게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힘있는 자나 힘없는 자나, 약자나 강자나, 부한 자나 가난한 자가 같이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2)이 기쁨은 일시적이 아니라 기간이 오래갑니다. 이 기쁨은 열광적이지 않고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잔잔히 흘러나옵니다.
3)이 기쁨은 도덕성이 있고 윤리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도덕적인 기쁨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받아서 기쁘고 주어서 기쁩니다. 희생하여 얻는 기쁨, 봉사하여 얻는 기쁨, 남을 도움으로 얻는 기쁨, 아낌없이 주어서 얻는 기쁨, 헌신하여 얻은 기쁨 등이 이런 기쁨입니다. 이 기쁨은 축구 경기에서 이겼다고 환호하는 것과는 질적으로 다른 기쁨입니다. 오래도록 삶에 활기를 줍니다. 모두를 기쁘게 하고 모두를 승자로 만들어 버립니다. 이 기쁨은 소유나 패배와는 상관없이 지속이 됩니다.

Ⅲ. 누리는 기쁨
그런데 이런 기쁨보다 한 차원이 다른 또다른 기쁨이 있습니다. 기쁨 중에는 특이한 기쁨이고 아무나 누릴 수 있는 기쁨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모신 사람들만 이 누릴 수 있는 기쁨입니다. 이 기쁨은 항구적입니다. 아무도 어떤 것도 빼앗을 자가 없는 기쁨입니다. 이미 주어진 것으로 누리는 기쁨입니다. 문제는 누리느냐 못누리느냐의 문제입니다. 이 기쁨이 어떤 기쁨이겠습니까?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기쁘입니다. 22절에 나와 있습니다. 한 번 읽어 보겠습니다. 이 기쁨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아 누리는 기쁨이고(20), 해산 후에 누리는 기쁨과 같이 생명으로 인한 기쁨이고(21)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는 기쁨입니다(22) 이 기쁨 누리고 살고 싶지 않으십니까? 우리는 어떻게 이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까?

1.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남을 누림으로 이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요 16: 22).
이미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입니다. 어떤 환경에서도 부활하신 주님을 누림으로 이 기쁨을 소유할 수 있습니다.
제자들이 곡하고 애통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제까지 자신들에게 기쁨을 주셨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때문입니다. 19절에 보면 조금있으면 예수님을 보지 못할 것을 말씀합니다. 이제 약 9시간이 지나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히십니다. 그 때 제자들은 애통하고 곡하나 세상은 기뻐합니다. 그러나 조금 있으면 볼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3일만에 부활하실 예수님을 보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날 때는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됩니다(20). 이 기쁨은 해산한 여인이 아이를 보는 순간 지난 고통을 기억하지 않는 것과 같은 기쁨입니다(21). 이 기쁨은 그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습니다. 승리하여 얻는 기쁨, 소유하여 얻은 기쁨, 남에게 주어서 얻는 기쁨 그 기쁨의 수준이 아닙니다. 승리해도 기뻐할 수 있고 실패해도 기뻐할 수 있는 기쁨입니다. 병들어도 기뻐할 수 있고 건강해도 기뻐할 수 있는 기쁨입니다. 감옥에 가도 기뻐할 수 있고 핍박을 받아도 기뻐할 수 있는 기쁨입니다. 단순한 육신적 기쁨이 아니라 영혼의 기쁨입니다. 외적인 기쁨이 아니라 내적인 기쁨이고 맑은 날이나 흐린날이나 언제든지 기뻐할 수 있는 기쁨입니다. 일시적 기쁨이 아니라 영원한 기쁨입니다. 죽음을 이기고 승리하신 예수님을 만난 기쁨입니다. 이 예수님의 말씀대로 근심에 쌓인 제자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기뻐합니다. 그 기쁨은 죽음도 빼앗아 가지 못했습니다. 주님을 만나 제자들의 모습을 보십시오. 요한복음 20장 20절입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요 20:20)" 제자들은 주님을 뵙고 기뻐서 어찌할 줄을 몰랐습니다. 사도행전을 보십시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그들의 삶이 어떻게 달라졌습니까? 그들은 예수께 경배를 드린 후에 기쁨에 넘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습니다.(눅 24:52)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행 2:46)" "그 성에 큰 기쁨이 있더라 (행 8:8)"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이 충만하니라 (행 13:52)" 라고 했습니다. 안디옥에서 쫓겨가면서도
기쁨이 충만했습니다. 능욕을 받아고 기뻐했습니다.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행 5:41)" 바울과 실라는 감옥에서도 기뻐합니다. 바울을 죽을 지라도 기뻐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봉사 위에 내가 나를 관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빌 2:17)" 스데반은 순교를 당하면서도 천사의 얼굴을 하고 죽습니다. 마게도냐 교회는 환난의 많은 시련 극한 가난 가운데서도 넘치는 기쁨이 있었습니다.(고후 7 : 4). 왜 그렇습니까?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소유의 기쁨 정도가 아닙니다. 도덕적으로 베푸는 것으로 오는 기쁨이 아닙니다. 존재의 기쁨이고 영적인 기쁨이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신령한 기쁨입니다. 길잃은 아이가 가장 기뻐하는 것은 빵이 문제가 아닙니다. 집이 문제가 아닙니다. 부모를 만나는 것입니다. 우리의 죽음의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메시야를 만났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딸이 되었습니다. 일시적인 것이 아닙니다. 한 번 아들이 되면 영원한 아들이고 천국에 이르도록 그 어떤 것도 이 기쁨을 빼앗아 갈 수 없습니다. 이 기쁨은 충만한 기쁨입니다. 이 기쁨이 있습니까? 신앙 생활하면서도 이 기쁨이 없이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신앙인이 되어서도 이런 기쁨을 누리지 못하고 기뻐하지 못하는 것은 죄입니다. 단테의 {신곡}에 보면 지옥 맨 밑바닥에 많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들에게 "무슨 죄를 짓고 여기 왔느냐?"고 물으니까 안내하는 사람의 말이 "다른 죄가 아니라 이 사람들은 세상에 살 때 믿는다고 하면서 기쁘게 살지 못하고 늘 우울하게 한숨만 쉬며 산 죄 때문에 여기에 왔다"고 하더랍니다. 신앙인이란 기뻐하는 사람들입니다. 무신론적 철학자 니체는 본래 독실한 기독교 가정에서 자랐지만 무신론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예수를 믿을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 이유는 그들이 생활에서 기쁨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프리카에서 한평생을 산 슈바이쳐 박사는 "물 없는 강처럼 기쁨 없는 그리스도인, 기쁨 없는 신앙, 기쁨이 없는 사랑이 세상을 피곤하게 만든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전서에서 신앙인의 3대 삶의 지침을 말합니다. 그것을 "항상 기뻐하라 (살전 5:16) 쉬지 말고 기도하라 (살전 5:17)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살전 5:18)" 이것은 신앙인의 삶의 3대 원리입니다. 그 중 무엇이 가장 앞서 있습니까? 항상 기뻐하는 것입니다. 소요리 문답에서 사람의 제일 된 목적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하는 것과 좋아하는 것과 즐기는 것은 다른 것입니다. 공자도 이런 말을 했습니다. "지지자 불여호지자, 호지자 불여낙지자:논어 옹야편"라는 말입니다. '아는 자는 좋아하는 자만 못하고, 좋아하는 자는 즐기는 자만 못하다.'라는 말입니다. 인생에는 지와 호와 낙의 3단계가 있는 데 이 중에서 최고의 단계는 낙의 단계라고 말합니다. 일리있는 말이라고 생각됩니다. 음악을 아는 사람과 좋아하는 사람과 즐기는 사람은 다릅니다. 진정 음악의 경지에 이르는 사람은 음악을 즐기는 사람입니다. 천지 자연을 즐기고 우리의 생활을 즐기고 우리의 일을 즐길줄 알아야 합니다. 그 어려운 피난 생활에서도 여호와로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다윗이나 전쟁의 위험 속에서도 여호와를 즐거워하는 하박국 선지자나 이사야, 예레미야 선지자 등은 모두 이 경지에 이른 사람들입니다. 하박국 선지자의 고백을 보십시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로 나의 높은 곳에 다니게 하시리로다 (합 3:17-19)"
다윗의 고백을 보십시오.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므로 내가 요동치 아니하리로다
이러므로 내 마음이 기쁘고 내 영광도 즐거워하며 내 육체도 안전히 거하리니 (시 16:8-9)"
환경이 문제가 아닙니다. 조건이 문제가 아닙니다. 승리가 문제가 아닙니다. 욕구 충족이 문제가 아닙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면 아무도 빼앗을 수 없는 기쁨을 평생 누릴 수 있을 줄 믿습니다. 우리는 이미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입니다. 이 기쁨을 누리느냐 누리지 못하는냐는 우리의 선택의 문제입니다. 이제 선택의 문제만 남아 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기쁨으로 살 것인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기는 만났지만 계속적으로 소유하지 못하고 성취하지 못하여 슬퍼하고 애통해 살 것인가 입니다.

2. 우리는 기도로 응답의 약속을 믿고 이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24).
주님은 이 땅에서 승리하고 필요를 채움받고 성취하는 것을 무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땅에 주님계실 때 주님 만난 사람들을 필요를 채움받아 기쁨을 회복했습니다. 눈먼자가 눈을 뜹니다. 혈루증 여인이 났게 됩니다. 굶주린 자들이 빵을 먹고 12바구니나 거두었습니다. 자아 실현을 하지 못하는 자들이 주님 만나 자아실현을 합니다. 사랑받지 못하는 사마리아 연인이 사랑을 받고 인간 대접을 받습니다. 주님 만나면 모든 것을 잃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이제 주님께서 육신의 몸을 입고 지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약속해 주고 있습니다. 이제 지상에서 주님이 그들과 육신적인 모습으로 함께 있어 그들의 필요를 채워 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이름으로 아버지께 구하면 하나님 아버지께서 모든 것으로 채워 주실 것을 약속해 주시고 있습니다(23). 24절을 한 번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구하라 그리하며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기도를 통하여 기쁨을 충만히 채울 수 있습니다. 명예가 없고 물질이 없고 건강이 부족하다 할지라도 기도를 통해 기쁨을 뺏았는 장벽을 넘을 수 있도록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특권으로 주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사용하도록 우리에게 허락해 주었습니다. 아무나 사용하는 것 아닙니다. 오직 우리 주님을 메시야로 구주로 모신 사람들에게만 주신 특권입니다. 기도를 통해 응답받을 때 기쁨을 누려보고 있습니까? 저는 목회하면서 많이 체험하고 있습니다. 성도들 가정 가정을 위해 기도할 때 인간적으로 가능하지 않은 것들이 하나 하나 이루어지는 모습을 보면서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습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사용하면 기쁨을 방해하는 요소가 물러가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그대로 행합니다. 다락방의 120명의 성도들을 보십시오. 행 1 : 12-14에서 다락방에 모인 120명이 합심으로 기도합니다. 오순절 성령을 받습니다. 그들의 기쁨을 방해하는 모든 두려움이 살아집니다. 기쁨이 충만합니다. 베드로가 옥에 갇혔습니다. 그들은 무엇을 합니까? 행 12:1 이하를 보십시오 합심하여 기도합니다. 베드로가 옥에 풀려납니다. 기쁨이 넘치게 됩니다. 근심이 살아지게 됩니다. 바울과 실라 빌립보 감옥에 갇혀 있을 때 기도합니다. (행 16 : 25) 옥문이 열리고 쇠사슬이 풀리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기쁨을 방해하는 요소들이 살아집니다. 구약에 나오는 한나를 보십시오. 아이를 낳지 못합니다. 남편이 첩을 얻었습니다. 얼마나 고통스럽겠습니까? 밥맛이 나겠습니까? 성경에 보면 한나는 번민하고(삼상1 : 6), 울고(삼상1 : 7), 마음이 괴롭고(삼상1 ; 10), 슬퍼했다고 했습니다(삼상 1 : 15), 그러나 그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었습니다. 슬픔을 이길 수 있는 길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그리고 사무엘을 선물로 받습니다. 원더풀입니다. 언제가 제 친구 목사님 이야기를 했지 않습니까? 아들을 낳고 더플이라고 지었다고요. 한나의 고백을 보십시오(삼상 2: 1). "내 마음이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내 뿔이 여호와를 인하여 높아졌으며 내 입이 내 원수들을 향하여 크게 열렸으니 이는 내가 주의 구원을 인하여 기뻐함이니이다 (삼상 2:1)" 에스더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죽음이 앞에 노여있습니다. 인종청소를 당할 위기입니다. 그는 죽으면 죽으리라고 금식하며 기도합니다. 결국 어떻게 됩니까? "이 달 이 날에 유다인이 대적에게서 벗어나서 평안함을 얻어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고 애통이 변하여 길한 날이 되었으니 이 두 날을 지켜 잔치를 베풀고 즐기며 서로 예물을 주며 가난한 자를 구제하라 하매 (에 9:22)" 문제가 있다고 복잡하다고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고 예수 믿는 사람은 너무나 울상으로 살지 말아야 합니다. 웃고 살아야 합니다. 기도하여 한나와 같은 기쁨을 에스더와 같은 기쁨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기도하여 꼭 이루어져서 기쁨을 누리는 것은 아닙니다. 기도할 때 우리 하나님은 아니오로 응답할 수도 있고 다른 것으로 응답해 줄 수도 있고 기다리라는 응답을 줄 수도 있습니다. 꼭 내 마음의 원을 이루었기 때문에 기뻐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하면 그 응답이 어떻게 이루어지든 그것이 가장 좋은 하나님의 방법인 줄 알고 기뻐하는 것입니다. 기도함으로 하나님과 교제하고 기도함으로 하나님을 신뢰하고 기도함으로 하나님과 인격적인 만남을 가짐으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것을 최선으로 알고 기뻐하는 것입니다. 바울도 때로는 기도하여 자기가 원하는대로 받지 못할 때도 있었고 모세도 그랬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으로 인해 슬퍼하지 않았습니다. 기뻐했습니다. 자신들에게 주신 은혜가 가장 족한 것으로 알았습니다. 상실하는 것 보고 슬퍼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롬8:18)"습니다.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우리 주님 만난 기쁨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기쁨의 장애물을 기도로 극복하시기 바랍니다. 이미 우리는 기도의 능력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제 이미 받은 기도로 기쁨을 누려야 합니다.
유명한 악성 베토벤이 서른 두 살에 가장 슬픈 편지 한 장을 썼다고 합니다. 그것은 스스로 자기가 미리 써 놓은 유서였다고 합니다. "나는 6년 동안 나아질 거라고 희망 속에 살았다. 하루하루 절망의 연속이었다. 나는 귀머거리가 되었다. 잠시후면 나의 삶을 마감하게 될 것이나 불우한 존재여." 자기가 작곡한 노래 소리를 들을 수 없습니다. 귀머거리 작곡가, 절망적입니다. 기쁨이 없습니다. 그는 다시 눈물로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나서 다시 이렇게 썼다고 합니다. "오 하나님이여 불우한 인생을 마치기 전에 온전한 기쁜 날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단 하루만이라도 기쁨을 만끽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내 영혼, 내가 작곡한 이 음악을 단 하루만이라도 깨끗한 귀로 들어볼 수 있게 해주세요." 이것이 그의 소원이었다고 합니다. 그 후 그는 24년 동안을 귀머거리로 살면서 계속 작곡 활동을 했습니다. 그가 마지막으로 교향곡 제9 번의 작곡은 쉴러의 '기쁨의 송시'라고 하는 시를 가사로 작고하였다고 합니다.l 이 교향곡 9번이 초연 되었을 때 많은 사람들이 박수 갈채를 하고, 기립박수를, 아우성을, 환호로 이렇게 박수를 할 때, 그는 저 뒷전에 앉아서 악보를 넘기며 빙그레 웃고 있었다고 합니다. 환호성도 들리지 않고 노래 소리도 들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는 혼자서 듣는 노래가 따로 있습니다. 하늘의 노래를 혼자서 들으며 혼자서 즐기며 기뻐했던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기쁨이 있습니다. 이미 우리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사람들입니다. 기도의 능력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제 부활하신 주님과 기도의 능력을 누림으로 기쁨이 넘치는 삶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인생 경기장에서 성도가 누리는 기쁨/요16:20-24/20020616 김필곤 목사(열린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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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12 에스겔 경기장에서 선수로 선택받은 자의 자세 겔2:1-7  김필곤 목사  2010-02-14 2247
» 요한복음 인생 경기장에서 성도가 누리는 기쁨 요16:20-24  김필곤 목사  2010-02-14 2337
2910 에스더 경기장의 중심 인물 에4:13-17  김필곤 목사  2010-02-14 2694
2909 고린도전 신앙의 월드컵 고전9:24-27  김필곤 목사  2010-02-14 2686
2908 요한복음 불확실한 미래 앞에서 평안을 누리는 삶 요14:25-31  김필곤 목사  2010-02-14 3029
2907 창세기 하나님의 눈으로 보자 창47:1-14  최장환 목사  2010-02-12 2627
2906 창세기 징계와 연단 ..... 창27:41-46  이정원 목사  2010-02-12 2342
2905 창세기 하나님께서 길을 막으실 때 ..... 창27:30-40  이정원 목사  2010-02-12 2534
2904 창세기 아버지를 속이는 야곱..... 창27:14-29  이정원 목사  2010-02-12 2273
2903 창세기 사람의 불순종과 하나님의 뜻..... 창27:1-13  이정원 목사  2010-02-12 2605
2902 시편 감사의 제사..... 시50:7-15  이정원 목사  2010-02-12 2302
2901 창세기 예배를 회복하자! ..... 창26:23-35  이정원 목사  2010-02-12 3003
2900 창세기 성도가 사는 방식..... 창26:12-25  이정원 목사  2010-02-12 2322
2899 창세기 반복되는 실수, 변함없는 은혜..... 창26:1-11  이정원 목사  2010-02-12 2967
2898 창세기 팥죽과 장자권..... 창25:27-34  이정원 목사  2010-02-12 3914
2897 창세기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 창25:19-26  이정원 목사  2010-02-12 2470
2896 누가복음 천국과 지옥 눅16:19-31  이동원 목사  2010-02-11 4255
2895 누가복음 잔치에의 초대 눅14:16-24  이동원 목사  2010-02-11 3849
2894 고린도전 예배와 질서의 문제 고전11장  이동원 목사  2010-02-11 2748
2893 고린도전 역사와 현실 고전10장  이동원 목사  2010-02-11 2901
2892 미가 하나님의 마음을 알자. 미6:1-16  최징환목사  2010-02-11 3196
2891 요한계시 목마른 사람을 위한 복음 계22:12-21  정용섭 목사  2010-02-10 2936
2890 요한복음 누가 내 어머니인가? 요19:25-27  정용섭 목사  2010-02-10 3343
2889 마태복음 믿음은 가능한가? 마17:14-20  정용섭 목사  2010-02-10 2620
2888 사도행전 다비타 쿰! 행9:36-43  정용섭 목사  2010-02-10 3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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