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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생명의 길

갈라디아 정용섭 목사............... 조회 수 2191 추천 수 0 2010.02.16 20:1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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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갈2:15-21 
설교자 : 정용섭 목사 
참고 : http://dabia.net/xe/39128 

emoticon  2007.06.24.

오늘 기독교 종파는 로마가톨릭, 동방정교회, 프로테스탄트, 이렇게 크게 셋으로 구분됩니다. 프로테스탄트 안에서도 여러 교파가 있습니다. 루터교, 장로교, 구세군, 성공회, 감리교, 성결교 등, 아주 복잡하게 세분화되어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처음에는 하나의 기독교였다가 이렇게 갈라졌다고 생각하겠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2천 년 전 교회가 처음 시작할 당시에도 유대 기독교, 디아스포라 기독교, 이방 기독교, 이렇게 크게 셋으로 나뉘었습니다. 유대 기독교는 주로 팔레스틴에 살고 있는 유대인들로 구성된 공동체인데, 유대교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디아스포라 기독교는 주로 소아시아 지역에 흩어져 있던 유대인으로 구성된 공동체인데, 유대교와 느슨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방 기독교는 비유대인들로 구성된 공동체인데, 유대교와 분명한 선을 긋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오늘의 세 종파보다도 초기의 세 공동체 사이의 차이가 더 크다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이런 설명을 이상하게 생각하실 겁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이 모두 예수님을 믿는다면 별로 다를 게 없는데, 뭐가 다르냐고 말입니다. 물론 그들이 모두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한다는 점에서는 다를 게 없습니다만 유대교와의 관계에서 결정적으로 다릅니다. 특히 예루살렘을 본거지로 삼는 유대기독교와 안디옥을 본거지로 삼는 이방기독교는 서로 좁혀질 수 없을 정도로 큰 알력 관계에 있었습니다. 그 속사정이 갈라디아서 1,2장에 언급되어 있습니다. 소위 안디옥 사건이 그 배경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이후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은 예루살렘에서 작은 모임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며,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전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그런데 이 복음이 차츰 다른 지역으로 퍼져나가면서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예수님을 믿게 된 이방인들도 율법을 지켜야 하는지에 관한 논란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율법을 여전히 지키고 있던 유대기독교들 앞에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 벌어진 것입니다. 우여곡절 끝에 그들은 이방인 기독교인들에게는 율법을 강요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이 문제가 그렇게 간단한 게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동생인 야고보와 베드로를 중심으로 한 사도들이 그렇게 결정했다고 하더라도 모든 유대기독교인들의 동의를 얻을 수는 없었습니다. 크고 작은 불평이 튀어나왔습니다. 예루살렘의 율법주의자들은 이방 기독교인들도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요구를 꾸준히 펼쳤습니다.

이런 와중에 베드로가 안디옥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이미 이방인도 예수님을 믿고, 성령을 받았다는 사실을 인정한 사람입니다. 그는 안디옥에서 이방기독교인들과 가깝게 지내면서 서슴없이 밥도 같이 먹었습니다. 그때 예루살렘의 야고보가 보낸 사람들이 그 자리에 들이닥쳤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강조하는 할례파들이었습니다. 베드로는 그들이 두려워서 슬그머니 그 자리를 피했습니다. 그러자 다른 유대기독교인들도 이방인 신자들과 밥을 안 먹은 체하며 물러났고, 심지어 바나바까지도 그렇게 가식적인 행동을 했다고 합니다.(갈 2:11-14) 바울은 공개적으로 베드로를 비판했습니다. “유대인이면서 유대인같이 살지 않고 이방인같이 사는 당신이 어떻게 이방인들에게 유대인처럼 살라고 강요할 수 있겠습니까?”(갈 2:14)

도대체 유대기독교와 이방기독교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기에 베드로가 이방인과 함께 밥을 먹다가 슬그머니 그 자리를 피했으며, 바울은 공개석상에서 그에게 면박을 주었을까요? 이런 문제는 2천 년 전 그 당시에만 해당되지 오늘 우리와는 상관이 없다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본질은 그 당시 기독교인들이나 오늘 우리에게나 똑같이 중요합니다. 여기서 문제의 핵심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이 왜 그렇게 중요한지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이 설명합니다. 바울은 유대 기독교의 영향권에 들었던 갈라디아 교회를 향해서 아주 명백한 목소리로 자신이 왜 예루살렘의 유대기독교 지도자들과 신앙적으로 투쟁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설명하는 중입니다. 그의 설명을 들어보세요.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바울의 관심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맺는 것이었습니다. 16절에서 세 번이나 반복해서 그것을 말합니다. 개역성서와 루터성서는 그것을 ‘의로워지는 것’이라고 번역했습니다.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 들어간다는 것은 의로워진다는 것과 똑같습니다. 이런 신앙적 용어는 오늘 현대인들에게 별로 절실하게 다가가지 않을 겁니다. 지금 열심히 돈 벌어서 가족들과 잘 먹고 잘 사는 게 중요하지 의로워진다는 게 뭐 중요하냐 하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성서시대 사람들이 의를 생각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이 의로움에서만 사람이 진정한 평화를 얻을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의라는 단어를 평화로 바꿔놓고 생각해보십시오. 우리에게 평화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습니다. 아무리 돈을 많이 벌거나 사회적인 지위를 얻었다고 하더라도 그것만으로는 우리의 삶의 평화가 보장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여러분이 잘 알 것입니다.

성서말씀에 참여한 사람들은 바로 그 사실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참된 평화는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서만 주어진다고 말입니다. 평화는 우리가 억지로 만들어내는 것이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의로움은 우리가 억지로 만들어내는 것이 아닙니다. 돈이나 지성이 그것을 우리에게 줄 수 없습니다. 심지어 미모와 건강도 우리에게 평화를 주지 못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래서 성서의 사람들은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손으로 만질 수도 없습니다. 보이지도 않는 하나님을 어떻게 찾으며, 믿을 수 있을까요? 아버지와 어머니를 섬기고 싶어도 그분들이 없다면 결국 우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 대신에 보이는 율법을 섬겼습니다. 그 율법은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명령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 율법을 실천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고 인정받는 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율법을 토라라고 부릅니다.

여러분이 잘 알고 있는 대로 십계명은 토라의 엑기스입니다. 이 십계명을 기초로 해서 많은 종교적 규범이 발전했습니다. 창세기로부터 신명기까지에 이르는 모세오경, 그 이외에도 온갖 종류의 성문법과 불문법들이 그것입니다. 우리와 비교하자면 헌법을 위시해서 여러 종류의 법전과 조례 및 시행세칙 등이 모두 율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평생 그 율법을 지키면서 살았습니다. 그걸 잘 지키는 사람은 의로운 사람이고 지키지 못하는 사람은 죄인입니다. 요즘 우리도 법을 잘 지키는 사람을 모범시민이라고 하고, 법을 지키지 않는 사람을 범죄인으로 취급해서 감옥에 가두기도 합니다.

이렇게 율법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면서 살던 유대인들 중에서 예수님을 믿는 이들이 생겼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여전히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것이 그들의 전통입니다. 그들은 태어날 때부터 그런 말을 들었고 평생 그런 생각으로 살아왔습니다. 그들로서는 아주 당연한 생각입니다. 이렇게 바꿔놓고 생각해보세요. 오늘날 예수님을 믿는다고 해도 여전히 대한민국의 법을 지키는 건 당연한 일이겠지요. 할례파 기독교인들의 주장이 그렇게 터무니없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문제는 자기들만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이방기독인들에게까지 강요했다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이런 주장을 단호하게 거부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갈라디아서만이 아니라 로마서에서도 똑같이 그런 주장을 했습니다. 그는 용기가 대단한 사람입니다. 그 당시 예루살렘의 유대기독교 지도자들은 막강한 교권을 행사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동생인 야고보를 중심으로 열두 제자들이 모두 유대기독교의 핵심 멤버였습니다. 그들에게 잘못 보이면 신상에 해로웠을 겁니다. 그래도 그는 겁 없이 그들과 전혀 다른 목소리를 냈습니다. 16a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우리는 사람이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에 놓이는 길이 율법을 지키는 데 있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데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 뒤로 비슷한 말을 반복해서 강조합니다.

여러분은 바울의 이 주장을 너무 뻔한 이야기라고 생각할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2천 년 전 그 당시로 돌아가서 생각해보십시오. 아무나 생각할 수 있는 게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바울에게 감사해야 합니다. 그가 아니었다면 기독교는 이런 중요한 복음을 지켜내지 못했을지 모릅니다. 사람은 율법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로워진다는 바울의 주장은 그 당시로서는 혁명적인 것이었습니다.
율법을 지키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고 인정받는 유일한 길로 생각하던 그 당시 사람들이 바울의 이런 주장을 받아들이기가 얼마나 힘들었을는지 상상해보십시오. 예를 들어서, 십일조 헌금이 바로 하나님의 명령이며, 따라서 십일조 헌금을 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는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에게 “그렇지 않다.” 하는 말이 귀에 들어올 리가 없습니다. 지금이나 2천 년 전이나 사람들은 무언가 가시적인 성과가 있어야만 그것을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율법을 지키는 것은 분명히 눈에 보이는 성과입니다. 일주일에 서너 번 금식하고, 철야기도하고, 구제하는 일들은 누가 보이게도 그럴듯해 보입니다. 일반적인 삶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성과를 많이 올리는 사람을 우리는 추켜세웁니다. 바울은 그런 것으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갖는 게 아니라고 단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렇게 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믿음은 겉으로 보이는 업적이 아닙니다. 오히려 업적을 포기할 때만 믿음이 가능합니다.

여기서 무엇을 믿느냐가 중요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여러분이 다 아는 이야기일 겁니다. 그러나 단지 아는 것과 실제로 그 세계로 들어가는 것과는 전혀 다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사실이 무엇인지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종교적인 업적, 세속적인 업적주의에 머물러 있는 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말은 곧 그에게서 일어난 사건을 믿는다는 뜻입니다. 그는 십자가에 처형당했습니다. 가장 처참하고 저주스러운 십자가의 죽음을 믿는다는 것 자체가 쉽지 않습니다. 우리가 십자가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삶에 집착하면서 어떻게 십자가를 믿는다는 말인가요?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을 믿습니다. 이 땅에서 누릴 생명을 연장하는 것에만 모든 마음을 쏟고 있는 사람이 어떻게 전혀 다른 생명의 완성인 부활을 믿는다는 말인가요?

신앙은 거룩한 도박이다.

이런 점에서 믿음은 자기의 전체 존재를 거는 결단입니다. 속된 표현으로 믿음은 거룩한 도박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우리의 현재의 삶과 미래의 삶까지 포함한 전제 삶을 판돈으로 거는 거룩한 도박입니다. 우리의 노력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게 우리의 미래를 맡기는 선택이며 결단이기 때문에 그렇게 부를 수밖에 없습니다. 21b절을 보십시오. “만일 사람이 율법을 통해서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을 수 있다면 그리스도의 죽음은 헛일이 될 것입니다.” 바울이 분명하게 말합니다. 율법을 지킴으로 의로워질 수 있다면, 또는 구원받을 수 있다면 그리스도의 죽음은 헛일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결국 우리의 믿음도 헛일이 되고 맙니다. 도박은 잘 하면 대박이지만 잘못하면 깡통입니다.

바울의 신앙적 싸움은 배수진을 친 형국입니다. 적당하게 타협할 수 있는 그 지점을 넘어섰습니다. 그는 율법주의, 할례주의와 끝장토론을 벌이는 중입니다. 도대체 누가 헛된 것을 따르는 사람들일까요? 누가 하나님의 은총을 헛된 것으로 만드는 사람일까요? 21a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하느님의 은총을 헛되게 하지는 않습니다.” 아마 바울이 하나님의 은총을 헛되게 한다고 비판하는 사람들이 주변에 있었겠지요.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결국 하나님의 은총을 받을 수 없는 것 아니냐, 하고 말입니다.

여러분은 율법적으로 조금 실패해도 큰 문제는 없습니다. 업적이 없어도 문제가 안 됩니다. 아니 사람은 그런 것으로 완전한 성공을 거둘 수 없습니다. 율법주의, 업적주의는 오히려 생명을 파괴합니다. 율법에 의해서 십자가 처형을 당하신 예수님을 하나님은 궁극적인 생명으로 불러내셨습니다. 이 사건 이후로 사람은 그 어떤 인간적 노력으로도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고 인정받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태양이 뜨면 손전등이 필요 없듯이 말입니다. 우리는 모두 예수 그리스도에게 거룩한 배팅을 한 사람들입니다. 참된 생명에 참여할 수 있는 하나님의 은총이 여러분에게 임할 것입니다. 이미 임했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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