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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마태복음 조용기 목사............... 조회 수 5545 추천 수 0 2010.02.22 09:13:02
.........
성경본문 : 마11:28-30 
설교자 : 조용기 목사 
참고 : 2009. 7. 5. 성찬주일 4부 설교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 11:28~30)


<서론>
오늘 저는 여러분에게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는 말씀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우리는 서로 고통스러운 짐이나 책임을 짊어지지 않으려고 합니다. 한 가정에도 무거운 짐을 남편은 아내에게 맡기고 싶고 아내는 남편에게 맡기고 싶습니다. 할 수 있으면 이웃에게는 무거운 짐을 맡기더라도 우리는 안지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짐을 지면 괴롭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나 어찌할 수 없이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짐을 지고 태어납니다. 아담과 하와의 혈통을 받은 인생은 원하든 원하지 않든 태어나자마자 죄인이요 불의한 자요 병든 자요 저주받은 자요 죽음에 이르는 병에 걸린 실존적인 고통스러운 존재인 것입니다. 피할 수가 없어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다 피하는 이 무거운 짐을 다 내게로 가져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은 다 내게로 오라. 한 두 명만 오라는 것도 아니고 부자와 훌륭한 사람만 오라는 것도 아니고 교육 많이 받은 사람이나 못 받은 사람 갈려서 말씀하시지 아니하시고 다오라. 형형색색의 무거운 짐을 지고 오라. 내가 그 짐을 맡아주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왜 우리의 이 짐을 맡이 주시려고 하시는지요. 우리 인생들은 어찌할 수없이 하루하루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눈물을 흘리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무슨 짐이 그렇게 무겁습니까? 우리는 밖에 드러내놓지 않지만 우리 마음속에 있는 죄책과 정죄의 짐이 있습니다.
저는 아버님이 94살에 돌아가시고 어머님이 94살에 돌아가셨는데 이 세상에 살아계실 동안에는 목회한다고 바빠서 매주일 찾아뵙지도 못하고 전화나 하고 그렇게 했는데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난 다음에 늘 마음속에 정죄감이 있습니다. 아버지 어머님을 잘 모시지 못했다. 그 정죄감이 굉장히 괴롭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이런 정죄감을 마음속에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좀 더 잘해줄 걸 내가 좀 더 도와줄 걸.. 그러나 그러지 못하는 것이 인생인 것입니다. 결과는 마음의 정죄감인 것입니다.

<본론>
1. 인생의 수고하고 무거운 짐
시편 38편 4절에 “내 죄악이 내 머리에 넘쳐서 무거운 짐 같으니 내가 감당할 수 없나이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중세 카톨릭 교회의 ‘면죄부’는 16세기에 마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키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원래 면죄부는 원래 착한 일을 한 사람에게 그의 죄를 사해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다가 교회는 기도를 많이 하는 사람에게도 죄를 사해주는 면죄부를 주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는 로마의 베드로 성당을 건축하는데 돈이 부족하자 미리 면죄부를 사면 앞으로 지을 죄도 용서 되고, 면죄부에 이름이 적힌 사람은 누구나 천국에 갈 수 있다고 말을 했습니다. 더구나 면죄부를 사서 이미 돌아간 조상의 죄까지 사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많은 사람들이 줄지어 면죄부를 샀고 교회는 극도로 타락해지고 만 것입니다. 돈 주고 죄 사함을 받고 돈 주고 천국에 가는 것입니다. 어떠한 사람이 술이 만취가 되어서 횡설수설 하고 있기에 “아니 당신 예수를 믿으면서 어떻게 이런 생활을 합니까?” “난 면죄부 벌써 사 놓았어. 앞으로 10년 동안 살아갈 면죄부 사 놓았기 때문에 10년 동안 얼마든지 죄 지어도 좋아.” 이게 교회가 이렇게 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사람은 죄의 짐을 벗어 보려고 온갖 수단 방법을 다 써봅니다. 할 수만 있다면 다른 사람에게 떠맡기고 자기는 죄에서 면하고 싶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아, 네가 왜 내가 먹지 말라는 실과를 먹었느냐?” 하니까 “하나님이 지어주신 저 여자가 먹으라고 하기 때문에 먹었다.”고 했습니다. 아담이 만일 그때 “하나님 내가 죄지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하면 인류 역사가 달라졌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버리려고 하면 왜 찾습니까? “아담아, 아담에 네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이 아담이 에덴 동산 나무 뒤에 숨은 것 몰라서 그렇게 했습니까? 알면서도 스스로 회개하고 나오기 위해서 “아담아 어디 있느냐?” 그를 부르셨는데 그냥 뛰어 나와서 회개했으면 좋았겠는데 “내가 벌거벗으므로 부끄러워 나가지 못하겠나이다.”그러면 내가 먹지말라는 선악과를 먹었느냐? “하나님이 지어주신 저 여자가 나를 꼬임으로 내가 먹었나이다.” 책임은 하나님께 있고 저 여자에게 있고 나에게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버림받은 것입니다. 이것이 아담의 죄 뿐 아니라 우리들도 그 전통을 받아서 무엇이든지 다른 사람에게 죄를 떠맡기고 나는 죄 없다. 나는 깨끗하다. 그렇게 하려고 애를 씁니다만 그대로 되지를 않습니다. 타락한 인간의 힘으로는 아무리 애를 쓰고 힘을 써도 죄책과 정죄의 짐을 벗을 수가 없습니다. 오직 죄 짐을 벗을 수 있는 길은 예수님 앞에 나와서 회개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주님이 도와주지 아니하시면 우리의 힘으로 우리의 죄책을 벗어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또 세속의 타락의 짐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타락해서 우리는 부패한 인간이 되었습니다. 겉으로는 깨끗한 채하고 교육을 받고 점잖고 훌륭한 사람처럼 옷을 깨끗이 입고 있지만 내부에는 부패한 탐욕과 욕심과 방탕의 정신이 꽉 들어차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여기에서 해방되기를 원합니다. 아무리 해방되기를 원해서 울고불고 기도해도 힘으로도 안 되고 능으로도 안 되는 것입니다. 이것도 무거운 짐인 것입니다. 여러분 술주정뱅이 보고 알콜 그만 마시라고 하면 안마시겠다고 말하는 사람 없습니다. 그리고 늘 마셔요. 도박꾼도 늘 안한다 안한다 하면서 늘 도박해요. 방탕한 사람도 방탕 안한다 안한다 하면서 늘 방탕해요. 자기 힘으로 못하니까 그런 것입니다. 거기에다가 우리는 심신의 질병의 짐을 지고 있는 것입니다. 한평생 살면서 한번도 마음이나 몸에 병들지 않는 사람은 없어요. 몸의 병도 무섭지만 마음의 병도 무서워요. 왜, 오늘날 서로 시기하고 분노하고 질투하고 탐욕과 욕심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마음에 상처를 얼마나 줍니까? 모든 사람들은 마음에 상처를 입고 피를 흘리고 사는 것입니다. 거기에다가 이름도 모를 병들이 수없이 생겨서 우리는 육체의 고통을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생활비 중에서 치료비가 막대하게 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생활고의 짐이 있는 것 입이다. 요사이는 수많은 사람이 직장을 잃고 길거리에 허덕이게 된 것입니다. 비정규직 직업을 가진 사람은 일시에 거지가 되어서 손 털고 나왔습니다. 자식들은 학교에 다니고 아들은 대학 입학시험 준비를 하는데 아버지와 어머니는 비정규직으로 쫓겨났습니다. 이것 어떻게 합니까? 이런 우리 생활의 비참한 문제를 빨리 국회가 해결해 줘야 되는데 국회의원들은 무엇 한다고 낮잠만 자고 아무 일도 안하는 것입니까? 정치적인 자기들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서로 밀고 당기고 싸우고 국민들은 죽든 말든 내버려 놓는 것입니다. 무엇이 애국입니까? 국민을 잘살게 하는 것이 애국인 것입니다. 국회가 왜 있습니까? 국민들을 살게 하기 위해서 국회가 있는 것입니다. 비정규직을 가진 사람들이 길거리에 눈물을 흘리고 헤매이는데 서로 네탓 네탓 하는 것입니다. 여당 탓이다. 야당 탓이다. 정부 탓이다. 생활고의 짐이 얼마나 심합니까? 우리 국민들이 현실의 삶이 얼마나 고통스럽습니까? 아담과 하와의 자손들은 저주를 받아서 아무리 잘살려고 노력해도 고통이 쌓이고 괴로움이 쌓이고 어려움이 쌓이는 것입니다. 이 짐을 누가 벗겨 주겠습니까? 또 결국에는 죽음과 무의 짐이 있는 것입니다. 사람은 죽잖아요. 보편적으로 죽고 싶지 않습니다. 저도 죽고 싶지 않아요. 저도 오래 살고 싶어요. 그러나 오래 살지 못하고 몸은 늙어가는 것입니다. 마음은 안 늙습니다. 그런데 몸이 늙어 가요. 어떻게 이 짐을 우리가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날 이 세상에 사는 사람들은 이 무거운 짐 때문에 굉장히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것입니다. 스트레스가 어디서 오느냐. 수고하고 무거운 죄짐, 부정의 짐, 질병의 짐, 가난의 짐, 죽음의 짐 다 스트레스인 것입니다. 현대인들이 매우 보편적으로 경험하고 있는 한 가지 질병을 꼽으라하면 ‘스트레스’일 것입니다. 스트레스는 우리의 지성을 마비시키고 감성을 혼란시키며 의지를 무력화하여 우리 삶을 무너뜨립니다. 또한 마음의 슬픔과 불안을 증대시켜 고혈압, 심장마비, 위궤양, 불면증, 각종 암 등의 원인이 됩니다. 오늘날 현대인들의 질병 중에 80퍼센트 이상이 스트레스 때문에 온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 연구에서 스트레스를 수치로 환산했습니다. 그 결과 가장 큰 스트레스로 배우자나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을 때를 100으로 한다면, 남편이나 아내가 죽었을 때의 스트레스는 100입니다. 가장 어마어마한 스트레스를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남편을 사랑하거든 먼저 죽지 마세요. 또 아내를 사랑하거든 먼저 죽지 마세요. 남아 있는 사람이 당하는 스트레스는 엄청난 것입니다. 부부가 이혼했을 때는 스트레스 73, 자신이 사고를 당했을 때는 스트레스 53, 결혼 할 때 스트레스 50, 실직했을 때 스트레스 47, 가까운 친구가 죽었을 때 스트레스 37, 많은 액수의 빚을 졌을 때 스트레스 31, 자녀가 가출했을 때 스트레스 30, 직장 상사와의 갈등이 스트레스 23 등으로 마음이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현대인들은 이러한 스트레스로부터 벗어나기 위하여 취미활동을 하거나 여행을 하거나, 운동을 하거나 애를 쓰는 것입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스트레스에서 놓여남을 받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인생의 죄책과 정죄의 짐, 세속의 타락의 짐, 생활고와 심신의 질병의 짐, 죽음과 무의 짐 등을 감당하기 위하여 애쓰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스트레스가 사라지느냐. 사라지지 않습니다. 어떻게 해야 이 스트레스를 벗어버릴 수가 있는 것입니까?

2. 주님께 와서 짐을 맡겨라
주님께 와서 짐을 맡기는 도리밖에 없는 것입니다.
모든 슬픔, 고통, 괴로운 짐을 주님께 맡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가 스트레스에서 해방될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주께 기도로 아뢰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빌립보서 4장 6절로 7절에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하나님의 평강이 내려와서 마음과 생각을 지켜서 스트레스에서 해방시켜 주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33장 3절에는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고 말한 것입니다.
코카콜라의 창업주인 아더 캔들러는 알콜중독자로 늘 술에 취하여 있으면서 사람들 앞에서는 “나는 술 끊는다.”고 큰소리를 늘 했습니다. 그러나 술에 취해서 술 끊지 못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술에 취해서 집으로 돌아가는데 갑자기 벼락같은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죄의 본능을 이겨야 성공할 수 있느니라.” 깜짝 놀랐습니다. 집에 와서 그 이야기를 하니까 바로 그때에 그 아내가 “주님, 우리 남편이 술중독에서 고침을 받게 하옵소서.”라며 기도하고 있을 때였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날 이후로부터 시작해서 희한하게 술맛이 딱 떨어지고 아예 술을 쳐다보기도 싫었었습니다. 열심히 일을 해서 코카콜라 회사를 세웠고 오늘날 코카콜라로써 세계적인 부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 모두를 향해 주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른데 가지 마라. 내게로 오라. 내게 마음을 쏟아 놓으라. 그러면 너희가 스트레스에서 해방될 수 있게 내가 만들어 주겠다고 말한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이 십자가를 통하여 다 맡아 주님이 청산해 줌을 알고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도 청산하셨지요. 불의와 추악도 청산했지요. 질병도 청산했지요. 저주도 청산했지요. 죽음도 청산했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풍성히 얻게 만들어 주기를 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하겠다는 것은 이미 십자가에서 청산했기 때문에 죄의 빚을 청산하고 부정의 빚을 청산하고 질병의 빚을 청산하고 가난과 고난의 빚을 청산하고 종의 빚을 청산했기 때문에 다 내게로 오라. 다 빚어서 면제시켜 주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시편 68편 19절에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주 곧 우리의 구원이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셀라)”
날마다 우리의 짐을 져 주시기를 원하시는 것이 우리 하나님의 선하신 뜻인 것입니다.
수염난 할아버지가 식당 앞에 서있는 캔터키 프라이드 치킨은 커넬 샌도슨은 세상 뜨기 전에 저하고 친했습니다. 캔사스에 우리 하나님의 성회 교회 성도였습니다. 60에 사업에 실패해서 정신병원에 들어갔습니다. 혼동상태에 빠져서 고통 속에 자살하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른 아침에 일어나니까 예배당에서 노래 소리가 들리더랍니다. 너 근심 걱정 말아라 주 너를 지키라. 주 날개 아래 피하라 주 너를 지키리. 그래서 정신없이 일어나서 잠옷 입은 그대로 그 성당을 찾아가서 보니까 똑같이 미친 여자가 하나 꿇어 앉아서 노래를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도 미쳤는데 미친 여자가 와서 노래를 부르고 있는데 그 노랫소리가 얼마나 마음에 감동이 되는지 그 여자 옆에 꿇어 앉아서 통곡을 하고 울었습니다. “내가 하나님 없이 60평생을 살다가 이 꼬라지가 되었으니 주님 날 살려달라”고 이상하게 마음이 상쾌해지면서 정신이 맑아지고 그는 정신병에서 해방되어 나왔습니다. 나와 있는데 마침 2차대전이 끝나서 많은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왔는데 먹을 것이 없어 고통 당할 때 그는 프라이드 치킨을 만들어야 되겠다는 생각이 나서 닭 몇 마리를 사가지고서 들판에 나가서 구이를 만들었습니다. 몇 번이나 만들어서 자기가 먹어보고 실패하고 또 먹어보고 실패하고 그러다가 캔터키 치킨을 개발해서 세웠는데 엄청나게 개발되고 발전되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그를 만났을 때는 자가용 비행기로 온 미국 전국에 돌아다니면서 전도하고 간증하고 다니고 사업은 다 맡겨 놓은 것을 보았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내어 맡겨야 우리가 이 스트레스에서 해방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내어 맡기지 못하면 스트레스에서 해방 못되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상대를 믿고 자기를 맡기는 것입니다. 제가 어릴 때는 경상남도 울주군 삼남면 교동리 31번지 진장이라는 곳에 살았습니다. 그런데 제가 학교를 다닌 곳은 언양입니다. 진장과 언양 사이에는 시냇물이 흐르는데 요사이 보면 조그마한 개울물 같은데 그때는 큰 강같이 보였었습니다. 거기에 시멘트 콘크리트 다리가 하나밖에 없는데 비가 오면 언제나 넘쳐요. 흙탕물이 거기로 넘치기 때문에 학교를 마치고 난 다음에 집에 돌아올 수가 없어요. 그러면 나는 항상 시내에 있는 우리 고모집에 갑니다. 고모 아버지가 굉장히 몸이 건실하고 튼튼하셨기 때문에 “고모 아버지, 나 집에 가야 되겠는데 날 좀 도와주소.” 그러면 “응~ 가지 가지!” 곧장 나오셔서 내 손을 잡고 그 물가에 오면 물이 막 지동같이 흘러가는 것입니다. 아휴 겁이 나고 정신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날 “등에 업혀라. 내 목을 꼭 잡으라!” 내가 업혀서 등목을 꽉 잡고 있으면 그가 바지를 걷어 올리고 그 다리 위를 지나가는데 내가 보니까 그 흙탕물이 무릎까지 찼어요. 세게 물이 흐르는데 그는 천천히 한발자국 두발자국 떼나갑니다. 만일 넘어지면 나는 박살나는 것입니다. 끝장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언제나 안전하게 나를 건너다 주는 것입니다. 그 물이 건널 때까지 내가 등허리에 얼마나 찰싹 붙었는지 말도 못하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이처럼 상대를 믿고 의지하는 것입니다. 상대를 믿지 못하면 의지하지 못해요. 우리가 변호사에게 의뢰할 때 사건을 변호사에게 맡겨야지 맡기지 못하면 변호사가 변호인 할 수가 없어요.
시편 55편 22절에도 “네 짐을 야훼께 맡기라 그가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원히 허락하지 아니하시리로다”
맡겨야 주님이 책임을 지고 붙들어 주시지요.
베드로전서 5장 7절에도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는 어린 시절부터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그런데 10대 시절 신앙을 버리고 자신의 생각과 마음대로 방황하다가 55세가 되었을 때 신앙을 회복한 후, “신앙론”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생의 55년을 살아오는 동안 최초의 15년 간의 소년기를 제외하고는 안식을 경험하지 못했다. 안식을 알지 못하고 살아 왔다. 18세 되던 해에 친구와 함께 하나님을 부정하고 기독교를 떠나기로 결심했다. 나는 종교를 포기하는 것이 내 삶의 자유를 얻는 것 같았다. 당시에는 나는 종교는 심지어 속박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내 나이 55세가 되어 내가 버린 어머니의 품과 같은 신앙의 품으로 돌아왔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로 돌아왔다. 그리고 예수님 안에서 나는 참된 안식을 발견했다.”고 말한 것입니다. 참된 안식은 예수님께로 돌아오는 길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의 모든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이미 다 짊어지고 가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께로 나오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뛰어서 주님 품에 안겨야 되는 것입니다. 마음에 평안과 안심을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4장 27절에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근심을 하지 말라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에게 평안을 주겠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근심이 오면 밀어내야 되는 것입니다. 불안이 오면 밀어내야 되는 것입니다. 기도로써 다 토해 버리고 하나님께 마음문을 열어 놓으면 내 입을 넓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는 주님이 평안으로 채워 주겠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8장 20절에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공기와 같이 계시므로 우리는 눈에 안보여도 이 자리에 계십니다.
여러분, 마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하지 않았습니까? 하도 반대하는 사람도 많고 원수도 많아서 견딜 수가 없어 불면증에 걸렸습니다. 그래서 하루는 아무래도 잠을 잘 수가 없어서 하나님께 엎드려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천지는 누구 것입니까? 하나님 것이지요. 기독교는 누구의 것입니까? 하나님의 것이지요. 인생은 누구의 것입니까? 하나님의 것이지요. 하나님의 것을 왜 내가 운전을 해야 되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이 운전하시고 내 것은 내가 운전할 것인데 하나님이 우주와 만물을 운전해 주시옵소서. 나는 잠이나 자겠습니다.” 그리고 자고 난 다음에 신경안정을 얻고 하나님께 온전히 맡기고 난 다음 평안을 얻어서 종교개혁을 할 수 있었다고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인간에게는 불가능한 것이라도 하나님은 할 수가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하심이 없다고 말했는데 우리는 자꾸 우리 인간을 생각하고 우리가 못하니 하나님도 못 하는 줄 아는데 그렇지가 않습니다. 우리가 못하는 것 하나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생의 짐은 이런 실존적인 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관계에 굉장한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 짐은 하나님이 짊어주지 않고 우리가 짊어져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있는 죄나 불의 추악, 저주, 죽음 같은 것은 십자가가 다 해결해 주는데 나하고 남편하고 서로 싸우고 나하고 이웃하고 싸우고 직원들 직장에 같이 사는 인간관계를 하나님이 내가 다 맡아 줄 테니까 걱정하지 말아라 그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3. 삶과 인간관계의 짐
우리 인간관계는 주님이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말한 것입니다. 인간관계는 예수님의 온유하고 겸손한 본을 따서 배우면 쉼을 얻는다고 말씀한 것입니다. 마음이 온유하다는 것은 마음이 따뜻하고 부드러운 사람을 말하고 성경은 온유한 자가 땅을 차지한다고 말씀한 것입니다. 저주는 항상 우리 주위에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면 모든 저주를 이기고 모든 갈등과 알력을 이기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어느 정도 온유하라고 했느냐. 어느 정도 겸손하라고 했냐면 마태복음 5장 38절로 42절에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저는 오랜 세월 동안 설교하면서 이 성경구절은 뛰어 넘었습니다. 괴로우니까. 나는 절대 그렇게 못해요. 오른뺨을 치면 왜 왼뺨을 왜 도로 대야 되는 것입니까? 송사해서 속옷을 달라고 하는데 왜 겉옷까지 줍니까? 그런 바보 같은 것이 어디 있습니까? 억지로 오리를 가야되는데 내가 왜 십리까지 왜 따라 갑니까? 그래서 내가 주님이 요구해도 너무 과도한 것을 요구하셨다고 생각했는데 세월이 흐르고 나이가 먹고 인생을 살아보니까 온유하고 겸손해서 나를 양보하므로 논쟁이 안 걸리는 것과 마음의 평화를 얻는 것이 부귀, 영화, 공명보다 훨씬 낫다는 것입니다. 마음의 평화의 가치는 돈으로 계산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마음이 불안하면 행복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지위가 높고 권력이 있어도 마음이 불안한 사람이 무슨 행복이 있는 것입니까? 행복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거짓이 없는 참말인 것입니다.
마태복음 5장 5절에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그렇게 하면 다 뺏기고 거지가 될 줄 아는데 성경은 온유한 자가 땅을 차지하니 풍부한 평강으로 즐기리라. 온유한 사람이 땅을 차지한다. 우리가 세계 역사를 볼지라도 독재자들이 세계를 정복한 것 같으나 다 망하고 말았습니다. 온유한 나라가 결국엔 잘되고 잘사는 것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주위에도 주먹쓰고 깡패질하고 흉악한 사람이 잘 살줄 아는데 잘 못삽니다. 마음이 부드럽고 따뜻하고 겸손한 사람이 잘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온유하고 겸손한 사람의 편에 있는 것입니다.
시편 37편 11절에 “그러나 온유한 자들은 땅을 차지하며 풍성한 화평으로 즐거워하리로다”고 말한 것입니다.
남아프리카의 흑인 민권 운동가인 넬슨 만델라는 백인들의 핍박을 받아서 44살에 감옥에 갇혀 27년 동안 감옥살이 했습니다. 그래서 44살에 들어간 그가 72살에 출옥을 했습니다. 좋은 청춘은 감옥에서 다 버렸습니다. 그러면 백인들이 흑인을 짓밟아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 얼마나 이를 갈고 통곡스럽습니까? 청춘을 감옥에서 살고 72살에 세상에 나왔으니 뭘 하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또다시 흑인 민족 해방운동을 전개해서 76세에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대통령에 당선되었습니다. 나는 이 전기를 읽고 깜짝 놀랐습니다. 저는 2년 전에 은퇴했기 때문에 나는 자꾸 은퇴한 사람이다. 나는 이제 일할 필요 없다. 모든 것이 나는 끝장났다. 그렇게 생각했는데 이제 내 나이 겨우 73살입니다. 넬슨 만델라는 76살에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그것을 보고 내가 깜짝 놀랐습니다. 그 소리해서는 안 되겠구나. 살아있을 동안에는 주의 일 해야 되겠구나. 그것을 느꼈었습니다. 보통 사람 같았으면 대통령이 되었으면 그 마음에 청춘을 다 빼앗아간 백인들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했을 것입니까? 원한 갚지요. 칼을 뽑지요. 나 정도 되어도 반쯤 칼 뽑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는 대통령이 되자마자 백인에 대한 용서와 화해를 선언하고 흑백이 함께 어울려 사는 조화되는 나라가 되자고 선언했습니다. 복수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악을 악으로 갚지 않았습니다. 넬슨 만델라야 말로 오른뺨을 치는 자에게 왼뺨 돌려대고 속옷을 달라면 겉옷까지 주고 오리를 가자면 십리까지 가고 구하는 자에게 주고 달라는 자에게 다 주고 산 모범적인 사람인 것입니다. 넬슨 만델라가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우리도 그렇게 해야 되는 것입니다. 결국 그렇게 한 사람이 대통령이 되고 높은 자리에 올라가지 않았었습니까? 예수님은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우리 삶의 인간 관계에서 온유한 마음을 가져주는 것이 성자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마음이 온유한 자가 성자가 되는 것입니다. 지는 것 같으나 나중에 보면 온유한 자가 이기는 것입니다. 지금 북한이 저렇게 어마어마하게 협박하고 공갈하고 무섭게 굽니다. 그러나 나는 성경을 읽고 늘 웃습니다. 그렇게 협박하고 공갈해도 나중에 이기는 것은 온유한 우리 대한민국이 이깁니다. 강한 자는 부러집니다. 주먹을 좋아하는 자는 주먹으로써 망하는 것입니다. 원수를 원수로 갚지 말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 12장 19절로 21절에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원수가 배가 고프다고 하는데 먹여줘라.원수가 목이 마르다고 하면 물을 마셔주라. 악을 선으로써 악을 이겨라. 그 머리에 숯불을 쌓아 놓아라. 머리에 숯불 올리고 있으면 머리가 타 내려 오지 않습니까? 그 숯불은 뭡니까? 감동의 숯불을 머리에 얹어 주는 것입니다. 원수가 우리에게 와도 우리가 선을 베풀므로 그 마음이 감동이 되어서 아예 숯불을 머리에 인 것처럼 타내려 가지 않을 수 없게 만들어 주라는 것입니다.
나는 이 사실을 1862년에 간행 한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 이라는 소설책에서 발견하고 굉장히 감동을 입었습니다. 이 소설의 주인공 청년 장 발장은 빵 한 조각 훔친 죄로 19년 감옥살이를 했습니다. 그가 19년 감옥살이를 하고 나왔는데 아무도 재워주는 사람이 없어요. 아무 여관에 가도 방을 내주지 않고 어느 누구도 장발장을 피했습니다. 그래서 성당에 들어갔는데 신부가 반갑게 맞이해 주어서 객실에 넣어 주어서 잠재워 주고 밥도 주고 물도 줬습니다. 그리고 은쟁반에 은촛대를 얹은 촛대를 갖다가 불을 켜 주었습니다. 그리고 잘 자고 내일에 일어나라고 했습니다. 이 사람이 은촛대를 보니까 욕심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은촛대 촛대만 두고서 쟁반은 자기 짐속에 넣어 가지고서 신부에게 인사도 안하고 달아났습니다. 길거리에 걸어가다가 경찰의 불신심문을 받으니 경찰관이 그 짐을 보니까 은촛대의 은쟁반이 나오거든 보통 은쟁반은 보통 집에 없습니다. 그래서 성당에서 가져온 것을 알고 성당으로 끌고 갔습니다. 이제 이 사람은 감옥에 들어가면 종신토록 감옥에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부가 반기면서 뛰어 나와서 하는 말이 “아니, 내가 갈 때 촛대도 가져 가라고 했는데 왜 촛대는 안가져가고 쟁반만 가져갔느냐?” 어리벙벙했습니다. 경찰관도 어리벙벙해서 “아니 무슨 말이오?” “내가 어제 저녁에 이 사람에게 당부하기를 직업도 없고 갈데올데 없으니까 내일 아침 자고 갈 때 은쟁반에 은촛대를 가져가면 돈 좀 될테니까 은쟁반과 은촛대를 가지고 가라고 했는데 아침에 내가 그 방에 와보니까 은쟁반만 가져가고 촛대는 안가지고 갔더라.” 그리고 빨리 뛰어 들어가더니 촛대를 들고 “이것도 가져 가라.” 그래서 경찰관이 머쓱해서 그냥 놔주고 가버렸습니다. 그러니까 이 장발장이 이 신부 앞에 무릎을 꿇어 엎드렸습니다. 그 머리에 숯불을 얹어 놓았습니다.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통곡을 하고 “나는 이 세상에 몰인정과 무시만 당해 왔는데 이런 용서와 사랑은 내 평생에 당해본 적이 없으니 나는 이 길을 청산하겠다.” 완전히 변화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열심히 일을 해서 큰 부자가 되고 나중에는 그 도시에 시장까지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는 것입니다. 이 장발장은 만일 신부가 촉대를 가져갔다고 잡아서 족쳤더라면 영원히 흉악한 사람이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사랑이 사람의 마음을 변화시키지 율법이 사람의 마음을 변화시키지 않습니다. 율법은 사람으로 하여금 변명하게 하고 원수를 갚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사랑은 무장해제를 시키는 힘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온유하고 겸손하다는 것은 온유한 것은 따뜻한 마음과 부드러운 마음입니다. 사랑입니다. 온유한 마음을 가지면 원수를 변화시킬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겸손한 마음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겸손한 마음은 자기를 낮추고 이웃을 존경하는 마음, 섬기는 마음입니다.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고 남을 섬기는 마음이 겸손한 마음인 것입니다.
빌립보서 2장 3절에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라고 한 것입니다.
오늘날 세상에는 전부 나 잘났다고 선전하는 것입니다. 자기 선전하는 시대인데 나보다 남을 높여주고 내가 남 섬겨주는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평안을 얻는 길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3장 12절에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고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헨리 나우웬은 미국의 유명한 하버드 대학 교수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는 교수직을 버리고 장애인 사역을 나가기로 결심을 하고 교수직을 버리니까 사람들이 아연실색을 했습니다. “당신같이 훌륭한 교수가 교수를 버리고 장애인 도우미로 나가다니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 헨리 나우웬은 이렇게 대답 했습니다. “내가 높은 자리에 있을 때는 사람들의 칭송을 늘 받고 사람의 높임을 받아서 예수님 만나기가 힘들었습니다. 그러나 내가 높은 자리를 떠나서 장애인들 도우미가 되고 낮은 자리에 오니까 예수님이 바로 나와 같이 계십니다. 나는 예수님과 함께 살기 위해서 다시 하버드 대학으로 돌아가지 않는다.”고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섬기는 삶, 그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사셨던 겸손한 삶인 것입니다. 한번은 예수님께서 대아에 물을 떠서 허리에 타올을 질끈 묶고 제자들을 전부 줄 세워서 앞에 앉히고 제자들의 발을 씻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센달을 신고 다녔기 때문에 발이 더러웠습니다. 손님집에 가면 제일 먼저 종이 와서 발부터 먼져 씻겨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발을 씻기는 일은 종이하는 일인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직접 제자들의 발을 씻깁니다. 제자들이 얼굴을 들 수 없어서 홍당무가 되었습니다. 베드로 차례가 오니까 베드로가 “주님 절대 내 발은 못 씻깁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내가 네 발을 못 씻기면 너는 나와 상관이 없다.” “그러면 머리도 씻겨 주십시오.” “발만 씻으면 전신은 깨끗하기 때문에 머리까지 씻을 필요 없다. 한번 목욕한 사람은 발만 씻으면 된다.” 거기도 의미가 심장한 것입니다. 한번 구원 받았으면 새로 구원받고 또 새로 구원받을 필요가 없다. 한번 구원 받았으면 영원히 구원 받은 것이다. 발은 행위만 씻으면 된다. 잘못 한 것 회개만 하고 씻으면 되는 것이고 새로 구원받을 필요는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중에 그들 보고 말하기를 “네가 나를 선생이요 주라고 말하는데 과연 맞는 말이다. 내가 너의 선생과 주다. 선생과 주가 무릎을 꿇고 너희들 발을 씻겼으니 너희들도 서로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고 남을 섬기고 발을 씻기는 사람이 되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의 발을 씻긴 예수님께서 마가복음 10장 45절에 말하기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온유와 겸손을 가지고 인생을 살면 분노와 미움과 원한이 사라집니다. 하나님께 다 맡기고 평안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부정적인 도전에 대하여 응전하지 않습니다. 많은 스트레스에서 해방됩니다. 그러므로 인간관계에서 마음에 평안을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4.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예수님께서는 바로 나의 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내가 온유하고 겸손하게 인생을 산 것처럼 이것은 너희가 인생을 살아가는 멍에다. 멍에란 뭡니까? 짐을 짊어지는 도구인 것입니다. 짐승들이 멍에 없이 짐을 지면 가죽이 벗겨지는 것입니다. 멍에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안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의 멍에를 지고 내게 배우면 무겁지 않고 휴식을 가진다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4장 2절로 3절에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는 말이 있습니다.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라. 겸손하고 온유한 멍에를 걸머지면 마음에 미움이 사라지고 분노가 사라지는 것입니다. 온유와 겸손의 멍에를 짊어지고 나가면 다 하나님께 맡기고 자기는 마음이 평안해 질 수 있습니다. 온유와 겸손의 멍에를 목에 메고 가면 부정적인 도전에 대해서 응답하지 않습니다. 남이 온갖 흉을 보고 욕을 해도 대꾸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온유와 겸손을 걸머지고 나가면 스트레스를 받지 않습니다. 스트레스가 사라지는 것입니다. 나 잘났다고 하고 날 주장할 때 스트레스가 생기지 나를 버린 사람에게 스트레스가 생기지 않습니다.

<결론>
우리는 예수님께 나아가 내 개인이 하나님 앞에서 짊어진 짐도 맡기고 나의 사회에서 인간관계로 오는 짐은 온유와 겸손의 멍에를 짊어지고 예수님을 뒤따라 배워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본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남편은 아내에 대해서 온유하고 겸손하고, 아내도 남편에 대해서 온유하고 겸손하면 거기에 무슨 알력이 생기고 스트레스가 생기겠습니까? 우리가 다 서로 자기 잘났다고 말하고 무정하고 몰인정하고 폭력을 사용하고 그렇게 하니까 투쟁이 있고 분노가 있고 고통이 있고 괴로움이 있지요. 예수님의 멍에를 매고 예수님께 배우면 인간관계에서 평안을 얻습니다. 실존적인 무거운 짐은 십자가에서 다 해결되었고 인간관계에 무거운 짐은 온유와 겸손의 멍에를 매고 살면 마음의 짐이 점점 사라지고 평안하게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가르침을 받아서 예수님 믿고 죄짐을 벗어 버리고 세속 짐을 벗어 버리고 병의 짐도 벗어 버리고 저주의 짐도 벗어 버리고 죽음의 짐도 벗어 버리고 평안을 얻으십시다. 또 예수님을 따라서 온유와 겸손의 멍에를 걸머지고 어느 곳에 가든지 온유하고 겸손해야지, 온유하고 겸손해야지. 그렇게 하면 마음에 평안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며칠 전에 우리 교회 교역자가 수술을 해서 병원에 입원했는데 내가 심방을 갔습니다. 그런데 면회 시간이 정해져 있어서 들어갈 수 없는데 어떻게 해서 인도가 되어서 들어가려고 하는데 문이 짝 열리는데 그 안에 있는 조그마한 손자뻘 되는 소녀가 나를 확 밀어 제켜 버려요. 나가라고.. 그러니 손자뻘 되는 애가 눈을 부릅뜨고서 나보고 나가라고 했습니다. 밀려 나왔습니다. 마음에 얼마나 분노가 올라오는지 이것을 한 주먹에 없애 버릴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 말씀이 내 마음을 잡았어요. 온유하고 겸손해라. 네가 여기 책임자가 아닌데 저기는 책임자니까 자기 책임을 다하는 것이다. 온유하고 겸손해라. 내가 그 자리에 서서 회개를 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내가 온유하고 겸손하지 못하고 분노를 낸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 온유와 겸손의 짐을 멥니다. 그러니 마음에 미운 생각이 싹 사라지고 분노도 없어지고 스트레스도 사라지고 마음이 평안해졌어요. 그 다음에 내가 시간이 되어서 문이 열려 들어갈 때 그 어린 소녀 앞에 내가 허리를 굽혀 인사했습니다. 고맙다고.. 사람이 화를 내서 순간적으로 분노를 가질 수 있습니다. 분노를 내면 심장병 걸리고 분노를 참으면 암이 걸립니다. 분노를 식혀 버리면 아무것도 안 걸려요. 온유와 겸손은 분노를 식혀 버리는 것입니다. 스트레스를 털어 버리는 것입니다. 알력을 없애 버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라가는 삶이 가장 행복한 삶을 산다는 것을 알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우리 고개 숙여 기도드리겠습니다.
살아계신 아버지 하나님, 우리 주 예수께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은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겠다고 말씀하셨는데 우리가 주님 십자가를 바라보고 우리의 짐을 십자가에 맡기고 인간관계는 온유하고 겸손함으로써 멍에를 걸머지므로 평안하게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은혜를 베풀어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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