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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막10:46~5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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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조용기 목사 |
참고 : | 2009. 7. 12. 주일 4부 설교 |
“그들이 여리고에 이르렀더니 예수께서 제자들과 허다한 무리와 함께 여리고에서 나가실 때에 디매오의 아들인 맹인 거지 바디매오가 길 가에 앉았다가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크게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그를 부르라 하시니 그들이 그 맹인을 부르며 이르되 안심하고 일어나라 그가 너를 부르신다 하매 맹인이 겉옷을 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께 나아오거늘 예수께서 말씀하여 이르시되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맹인이 이르되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그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따르니라”(막 10:46~52)
<서론>
“변화와 기적을 가져오는 믿음”이라는 제목으로 오늘 은혜를 나누고자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데리고 여리고에 오셨습니다. 여리고는 저주받은 도시입니다. 여호수아가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들어올 때 제일 먼저 이스라엘 백성을 저항한 성이 여리고성인데 그 여리고를 무너뜨리고 여호수아가 저주해 버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리고는 저주받은 곳입니다. 저주받은 땅에 예수님이 제자들을 데리고 들어오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사는 이 지구도 저주받은 곳 아닙니까? 하나님이 저주하여 가라사대 가시와 엉겅퀴가 나고 이마에 땀을 흘려야 먹고 살 것이라고 말했지 않습니까? 이 저주받은 땅에 누가 우리를 도와주러 오겠느냐? 저주받은 여리고에 찾아간 주님은 이 저주받은 지구에 있는 우리들을 살리려고 오신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여리고 성문 좋은 길목에 디매오 아들 거지 바디매오가 동냥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도 좋은 자리에 동냥을 하려면 상당히 빽이 있어야 되고 지연줄이 있어야 됩니다. 이러므로 디메오는 자기 아들을 위해서 힘을 많이 쓴 것 같습니다. 바디매오가 좋은 자리에 동냥을 할 수 있게 되었고 또 특별한 정부에서 내려준 옷을 입었습니다. 그 옷을 입어야 그 자리에 앉아서 동냥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디매오가 그곳에 앉아 있으면서 많은 사람이 여리고성에 들어오고 나가고 하는데 그 가운데서 늘 듣는 이야기가 제일 토픽이 예수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나사렛 예수란 분이 나타나셔서 온 유대 땅에 다니면서 기사와 이적과 표적을 행하고 문둥이도 장님도 절름발이도 다 고치신다. 그 말을 들을 때 귀를 아주 귀울였습니다. 한 두 사람이 하는 말이 아니라 지나가는 사람들마다 그 이야기 꽃을 피웠습니다. 그래서 바디매오의 가슴속에 소원이 일어났습니다. “나도 예수님을 만나서 이 장님의 신세를 면하고 싶다.” 그 간절한 마음의 생각이 있었습니다.
<본론>
1. 믿음은 들음에서 남
성경에는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로마서 10장 17절)고 바디매오가 예수님이 모든 병을 고친다는 이야기를 자꾸 들었으므로 치료하는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마음에 꽉 들어왔습니다.
마태복음 11장 5절에 보면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고 말씀했는데 이와 같은 말을 듣고 바디매오의 마음속에 믿음이 무럭무럭 자라기 시작한 것입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하나님 말씀을 읽고 듣고 묵상해야 생기는 것이지 우연히 생기지 않습니다.
기도의 사람, 고아의 아버지라고 불리던 죠지 뮬러의 전기를 읽어보면, 그는 3개월에 한 번씩 성경을 통독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일생 동안에 성경을 200번이나 읽었습니다. 사람들이 “오늘날 왜 그리스도인은 신앙이 약하고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없습니까?”라고 묻자 죠지 뮬러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항상 성경을 읽지 않기 때문입니다.” 5만 번 기도의 응답을 받은 죠지 뮬러의 믿음은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접하므로 얻은 능력인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서는 매일 성경을 읽을 수 있도록 우리가 일독성경을 나눠 드리지 않습니까? 그것도 매일 못 읽는 사람이 굉장히 많아요. 내일로 미루고 모레로 미루다가 그 다음 읽는 것을 집어 치워 버리는 것입니다. 그 말씀을 읽지 아니하면 하나님과의 교통이 없어집니다. 교통이 없어지면 멀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이 말씀을 반드시 매일같이 읽고 하나님과의 대화가 있어야 우리 마음속에 믿음이 살아나는 것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로마서 10장 17절)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우리의 천명인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날마다 말씀을 듣고 읽고 묵상하며 그 말씀이 우리 마음속에 간직될 때 비로소 굳건한 믿음을 가진 사람이 되고 풍파가 불어와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정체성을 확실히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어야 기회가 다가오는 것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있으면 언제고 그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여리고성에 올 줄은 아무도 몰랐지요. 그러나 바디매오는 예수님을 주야로 만나기를 원하고 예수님을 만나면 운명이 달라질 것을 기대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기회가 온 것입니다. 하루는 동냥을 하는데 사람들이 무수히 지나갑니다. 보통 때보다 더 많은 사람이 지나가요. 그래서 한 사람 붙잡고 물었습니다. “여보, 무슨 행사가 있습니까? 왜 사람들이 이렇게 많이 지나갑니까?” “이 사람아 바로 지금 앞에 나사렛 예수가 지나갔단다. 예수님을 따르는 군중들이 지나갔다.” 그 말을 듣자 바디매오의 귀가 번쩍했습니다.
마가복음 10장 46절에 보면 “그들이 여리고에 이르렀더니 예수께서 제자들과 허다한 무리와 함께 여리고에서 나가실 때에 디매오의 아들인 맹인 거지 바디매오가 길 가에 앉았다가”라는 것입니다.
그가 벌떡 일어나서 온 힘을 다하여 고함을 쳤습니다.
2. 부르짖는 기도
절대절명의 부르짖음인 것입니다.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마가복음 10장 47절)
보통으로 그냥 부른 것이 아닙니다. 있는 힘을 다해서 일생일대의 기회를 놓치면 안 되기 때문에 배가 오그라 들어갈 때까지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겨달라고 고함 고함을 쳤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찾을 때 간절한 마음으로 부르짖으면 많은 사람이 우리 부르짖음을 방해합니다. 사람들이 바디매오에게 와서 “시끄럽다. 고함치지 말라. 너 같은 맹인은 예수님이 돌보지 않는다. 이미 지나가셨다.” 그렇게 훼방을 합니다. 우리도 오늘날 기도를 하면 꼭 마귀가 훼방하는 것입니다. 크게 고함쳐서 소리쳐 기도하면 욕을 하고 “하나님이 귀가 먹었는가 고함쳐야 듣게..” 그런 소리를 저는 얼마나 많이 들었는지 모릅니다. 우리 한국에서 통성기도를 하기 시작한 것이 아마 우리 교회에서부터 먼저 시작한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모일 때마다 통성기도를 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미쳤다. 하나님이 귀가 먹었느냐? 조용히 기도하고 묵상해도 하나님이 다 알아들을 것인데 왜 부르짖느냐? 무식하게..”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나 부르짖는다는 것은 우리가 얼마나 간절히 주님을 찾느냐 그 뜻인 것입니다. 우리 성경에 보면 사람들의 방해와 마귀의 방해가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크게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마 10:48)
사람들이 잠잠하라고 하면 할수록 더 크게 고함을 쳤습니다. 사람들의 그 목소리보다 더 큰 소리로 예수님에게 들리도록 바디매오는 고함을 쳤습니다.
“부르짖으라”는 말은 히브리어에 ‘카라’에서 나온 말입니다. 카라라는 말은 “큰 소리로 외치다” “절규한다” 그 말인 것입니다. 달리기 경기장에서 달리는 선수들은 골인점이 눈앞에 보이면 속도를 더 이상 늦출 수가 없습니다. 오직 골인 점을 향해서 있는 힘을 다해서 죽도록 뜁니다. 저는 중?고등학교 때 800미터 선수였습니다. 800미터는 100미터 경주 하듯이 전력을 기울여 뛰어야 되는 것입니다. 결승점에 도달하게 되면 숨이 턱에 닺고 아예 넘어져 죽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결승점에 달할 때 그렇게 목숨을 걸고 뛰지 아니하면 꼴지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도 한가지인 것입니다. 하나님께 응답받을 때가 올 때에는 있는 힘을 다해서 몸부림치며 기도해야 되는 것입니다. 부르짖는다는 말은 바로 이와같이 간절히 몸부림치며 외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몸속에 조금도 힘을 남겨놓지 않고 전력을 기울여 부르짖는 것이 “부르짖는 기도”입니다. 우리가 있는 힘을 다해 기도하여 막다른 골목에 처하여 더 이상 물러갈 수 없는 절대절명의 처지에서 하나님께 부르짖을 때 하나님이 응답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제가 50년 동안 목회했으니까 기도 많이 했겠지 않습니까? 나 자신을 위해서도 기도하고 성도들과 더불어도 기도하고 많은 사람들과도 기도하고 몇 사람과도 모여서도 기도했는데 지금 돌이켜 보면 우리가 있는 힘을 다해서 기도한 기도마다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잠잠하게 기도하거나 조용하게 묵상하고 기도하는 것은 거의 응답받지 못했습니다. 마음에 평안은 가져왔어도 응답을 받지 못했어요. 눈물을 흘리고 고함치며 밤새도록 외치고 몸부림치는 기도는 반드시 그 결과를 가져오는 것을 저는 체험했습니다. 막무가내의 부르짖음에 하나님도 어찌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예레미야서 29장 13절에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만나리라고 한 것입니다. 반 쯤 마음도 안돼요. 온 마음을 다해서 부르짖으면 하나님을 찾습니다. 이 우주 가운데 어디에서 하나님을 찾겠습니까? 그러나 그런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날 찾으라고 나타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7장 7절로 8절에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구하고 또 찾고 문을 두드리고 얼마나 전력을 다한 기도인 것입니까? 그러면 주님이 우리에게 응답해 주시는 것입니다.
저는 서대문에 있을 때 최자실 목사님하고 아현동, 현저동 가난한 곳에 심방을 다녔는데 한 번은 폐병에 걸려서 피를 많이 토하는 한 30대 중반의 자매님인데 만삭이 되어 있어요. 지금도 내 눈에 훤합니다. 판잣집에 삶의 형편이 비참한데 남편은 노동자고 그 부인은 만삭이 되어서 있는데 폐병에 걸려서 피를 토하고 죽어가고 있는 그런 형편이었습니다. 그런데 아기를 해산하게 되니까 아무도 도와줄 자가 없어서 저하고 최자실 목사님하고 그 집에 뛰어 갔습니다. 산모는 너무 못 먹어서 몸이 약하고 폐병까지 걸렸으니 혼자 숨 쉬기도 어려웠는데 아기를 낳아야 했던 것입니다. 저는 옆에서 산모를 위하여 무릎을 꿇어 “하나님 살려 주십시오. 이 산모에게 힘을 주십시오.” 그리고 우리 최자실 목사님은 그 산모를 도와서 아기를 받습니다. 우리 최자실 목사님은 원래 산파 국제면허를 가지고 계신 분입니다. 그래서 간호사였습니다. 수간호사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린 아기 낳는 것 한두번 받은 것이 아니에요. 그런데 보니까 우리 산모가 “더 이상 힘을 못 쓰겠어요. 나는 이제 죽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최자실 목사님이 “예수 이름으로 힘을 써! 전신전력을 다해 힘을 써! 더 힘을 써! 힘을 줘!” 그 산모는 오히려 얼굴이 창백한데 우리 최자실 목사님은 얼굴이 빨개져 가지고서 두 주먹을 쥐고 고함을 치시면서 힘을 주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부인이 “이제는 죽겠습니다.”하고 절대절명의 고통 속에 있을 때 어린 아기가 응아~하고 나오더라구요. 나는 그 부인이 죽을 줄 알았는데 살아났어요. 나중에 그 아기를 안고 교회 예배에 출석한 것을 보니 너무나 기뻤습니다. 어린 아기를 낳는 그러한 열심과 힘을 다해서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기도하면 안통할 리가 없는 것입니다. 엘리야가 기도할 때 비가 와달라고 기도할 때 갈멜산에서 얼마나 간절히 기도했던지 머리가 다리 사이로 들어갔다는 것입니다. 고함을 치니까 뱃가죽이 등에 붙지 않습니까? 점점점점 머리가 내려가서 머리가 두 다리 사이에 들어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종 게하시를 보고 산위에 올라가서 무슨 변화가 있는지 바라보라. 없다고 하니까 세 번이나 그렇게 기도하고 올라가 보라고 하니까 손바닥만한 구름짝이 떴습니다. 큰 비올 징조가 보인 것입니다. 절대 절명의 부르짖음으로 기도한다는 것은 이렇게 어린 아기를 낳는 심정으로 머리가 다리 사이로 들어가도록 배가 우그러지도록 고함을 치고 간절한 기도를 한 엘리야처럼 그렇게 끈질기게 기도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 순복음교회는 너무 시끄럽고 너무 고함을 치고 부르짖는다고 비난을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물에 빠진 사람이 점잖은 소리로 “나 물에 빠졌소. 살려 주소. 누구 날 살릴 사람 없소?” 그러면 그 사람 틀림없이 죽습니다. 고함을 치면서 “사람 살려라. 누구 없소? 사람 살려라” 혹은 벼랑에 매달린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와서 날 좀 건져 주십시오” 하면은 벼랑에 달려서 죽습니다. “나 벼랑에 달려서 죽습니다. 사람 살려주소!” 있는 힘을 다해야 되는 것입니다. 속담에도 우는 애기에게 젖 준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잠잠한 아기에게 젖 안주거든. 그러므로 우리는 울부짖고 외치고 부르짖어야 되는 것입니다. 답답한 사람이 기도 응답을 받습니다. 평안하면 기도응답을 안 받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하나님께 부르짖는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 부르짖는 것은 소경 바디매오가 마음에 뜨거운 소원을 가지고 주님께 나아가 “주여, 나를 도우소서.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몸부림치며 고함치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게 하니까 주님이 가시다가 발걸음을 멈추고 돌아보시면서 저를 내게로 오게 하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고함을 쳐도 상당한 시간 후에 예수님이 돌아보시고 저를 내게로 오라고 한 것입니다.
예레미야서 33장 3절에는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고 말한 것입니다.
네가 내게 그냥 조용히 묵상하라. 조용히 말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부르짖으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래서 부르짖기 위해서 철야기도가 있고 새벽기도가 있고 산에 가서 기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우리는 바디매오처럼 부르짖는 기도를 해야 되는 것입니다. 바디매오가 그냥 부르짖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내게로 오라고 하실 때까지 부르짖었는데 그가 예수님이 오란 말을 듣자 놀라운 행동을 했습니다.
3. 예수님이 바라보신 믿음
예수님은 바디매오의 그 행위를 가만히 서서 바라보셨습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자 마가복음 10장 49절에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그를 부르라 하시니 그들이 그 맹인을 부르며 이르되 안심하고 일어나라 그가 너를 부르신다 하매”
바디매오가 그 자리에서 자기가 동냥하던 그릇을 내던져 버렸습니다. 그리고 그냥가지 않습니다. 일어서더니만 겉옷을 벗어서 둘둘 말아서 내던져 버린 것입니다. 맹인이 겉옷을 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께로 갔습니다. 그것은 뭐냐면 예수님께 가면 운명이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예수님께 나가면 예수님이 변화를 갖다 주시기 때문에 더 이상 이 거지 옷을 입고 면허 얻은 특권의 옷을 입고 동냥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가나의 혼인 잔치에도 그렇지 않습니까? 포도주가 떨어져서 잔치하는데 굉장한 어려움이 생겼습니다. 잔치하는데 포도주가 없으니까 큰일 났지 않습니까? 그때에 예수님의 어머니에게 부탁하매 어머니가 예수님께 말했습니다. “이 집에 포도주가 떨어졌다.” 잠시 후에 예수님이 종들을 불러가지고서 “항아리에 물로 채워라! 결례 통에 물이 6통 가득하니까 떠다 주어라!” 거기 잔치하던 사람이 먹었는데 이것은 더 좋은 포도주라. 그 포도주 마시는 사람보다 처음보다 더 좋은 포도주를 내니 이 왠일인가. 그렇게 말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 오기만 하면 변화가 다가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냥 예수님과 함께 앉았다가 일어났는데 아무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면 예수님과 안 만난 것입니다. 지금도 우리가 기도하다가 예수님을 만나면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풍성히 얻는 변화가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바디매오는 자기가 변화될 것을 알았습니다. 하도 많이 들었기 때문에 예수님 앞에 나가면 내 신세는 바꿔진다. 내 눈은 뜨게 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특권층 거지의 입은 옷을 벗어 던졌습니다. 다시는 거지 옷을 입지 않겠다는 그의 믿음의 단호한 표시인 것입니다. 그 거지 옷은 그가 가진 최고의 재산이요, 추울 때는 외투가 되고 비올 때는 망토가 되고 잘 때는 이불이 되고 그에게는 그것이 최고의 재산이었는데 그것을 내어 던져 버리고 한평생 애착하던 옷을 벗어 버리고 주님께 뛰어 나간 것입니다. 주님께 뛰어나갈 때 우리도 벗어 버리고 나갈 것이 있습니다.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그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그를 위하여 기도할지니라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그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받으리라 그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며 병이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약 5:14~16)
우리도 주님께 뛰어나갈 때는 우리가 벗어 버려야 될 것이 있습니다. 죄악의 사람을 벗어 버려야 되는 것입니다. 죄악의 사람 그대로 나가면 안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라 하시거든 예수님 앞에 통회 자복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죄악의 옷을 벗어 버려야 되는 것입니다. 탐욕의 사람의 옷을 벗어야 되는 것입니다. 탐욕을 벗어 버려야 되는 것입니다. 병든 인격적인 더러움을 벗어야 되는 것입니다. 인격적으로 더러운 것을 다 회개해야 되는 것입니다. 원망, 불평, 탄식, 부정적인 삶을 벗어 버리고 세상과 마귀를 좇는 삶을 벗어 버리고 새로운 사람이 되겠다는 각오를 가지고 나가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에덴 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범죄 했을 때 예수님이 아담을 찾았지 않습니까? “아담아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그럴 때 아담이 예수님께 뛰어 나와서 무릎을 꿇고 “내가 먹지 말라는 선악과를 따먹었으니 나를 용서해 주십시오.” 했으면 용서 받았을 것입니다. 그랬다면 이 세상은 달라졌습니다. 그런데 변명을 했습니다. 하나님이 제일 미워하는 것이 변명입니다. “너 왜 이 일을 했느냐?” “무엇 무엇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담은 “하나님이 지어주신 저 여자 하와가 나를 꾐으로 먹었습니다.” 자기가 먹어놓고 난 다음에 책임은 하나님이 먼저 책임자입니다. 저 여자를 만들어 주었으니까. 둘째 책임은 하와에게 있습니다. 하와가 저것을 내게 주었기 때문에... 책임을 남에게 전가시켰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버림받은 것입니다. 오늘날도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갈 때 솔직한 죄를 다 고백하는 것이 제일 하나님을 만나는 빠른 길입니다. 내 죄를 우리 아버지 때문에 우리 어머니 때문에 우리 누나 때문에 동생 때문에 이웃 때문에 죄를 지었습니다. 거짓말입니다. 물론 스스로 자원해서 짓는 죄도 있지만 모두 다 죄라는 것은 공통적으로 마음이 맞아야 죄를 짓는 것입니다. 마음이 안 맞고 죄를 짓습니까? 서로 손발이 맞아야 죄를 짓지. 그래놓고 난 다음 문제가 생기면 저 사람이 꾐으로 죄를 지었다고 변명을 하는 것입니다. 제가 지금까지 늘 기억하는 것은 제가 초등학교 1학년 때인가 2학년 때인가 학교 갔다가 오다가 외밭을 지나는데 외와 수박이 익어 있었어요. 그런대 내가 같이 오던 이마무라라는 사람 불렀습니다. “야야 오너라, 우리 수박 따먹자!” 주인이 있는 밭인지도 몰랐습니다. 그때는 어린아이니까. 그래서 그 애와 함께 수박을 따서 먹으니까 어떤 사람이 한 사람 뒷 짐지고 모른체 하고 우리 곁에 와요. 지나가는 사람도 아닌데 우리를 보더니 콱 하더니 우리를 잡아 버려요. 목덜미가 잡혔습니다. 그런데 내가 그때 “내가 따먹었습니다.” 그러면 좋았을 것인데 “얘가 따먹자고 해서 따먹었습니다. 이마무라가 따먹자고 했어요. 나는 먹으려고 안했는데...” 그러니까 “이 놈의 자식아. 네가 따먹었다고 고백을 했으면 내가 너를 놓아줄 것인데 내가 저 원두막에서 보니까 네가 꾀더구나. 네가 저 이마무라를 꾀어서 네가 먹더구나!” 이마무라를 보더니만 “너는 가라! 너는 가라!” “너는 교장선생님한테 가자!” 그래서 내가 살려달라고 얼마나 빌었는지 몰라요. 거의 초등학교 2,3학년 때의 일인데 지금까지 잊어지지 않는 것은 얼마나 간절히 살려달라고 부르짖었던지 나중에 용서해 줍디다.
에베소서 4장 22절로 24절에 보면“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그러므로 거지 바디매오가 거지 옷을 벗어서 던져 버리고 예수님을 찾아나간 것처럼 우리도 옛사람을 벗어 던져 버리고 회개하고 주님께 나가야 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날 도와주시면 회개하겠다.” 그것은 잘못된 생각인 것입니다. 내가 전심전력으로 회개하고 나가면 주님께서 우리를 받아 주시는 것입니다.
4.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고 예수님께 나가서 횡설수설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분명히 자기가 바라는 것을 주님께 아뢰야 되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10장 51절에 “예수께서 말씀하여 이르시되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맹인이 이르되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맹인이 주님 찾아 왔는데 물어볼 필요 없잖습니까?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 눈 나으려고 하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닙니까? 그런데도 예수님은 바디매오로 하여금 입술로 고백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분명한 목표를 말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내가 네게 무엇 해주기를 원하느냐?” “선생님 보기를 원하나이다.” 주님 앞에 나오면 여러분이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기도해야 되는 것입니다. 횡설수설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분명한 목표와 꿈을 말해야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 10:10)고 분명한 자기 믿음으로 입으로 시인해야 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기도를 분명하게 하지 않고 막연하게 하는 기도가 많습니다. 그러면 기도 응답이 안 됩니다.
인도의 마하트마 간디는 막대한 돈과 무기와 군대력을 가진 영국정부와 대결하여 싸워서 이겼습니다. 그런데 마하트마 간디는 총 한자루 없었고 군인 한 사람 없었습니다. 그런데 막대한 무기와 조직과 군대를 가진 영국하고 싸우는데 그것은 우리가 보면 계란 들고 바위를 던지는 것과 한가지인 것입니다. 바위가 깨지겠습니까? 계란이 깨지지. 그러나 간디는 국가를 구원하기 위해서 반드시 영국을 이겨야 한다는 분명한 목표가 있었습니다. 살든지 죽든지 영국을 이겨야 우리나라가 산다는 분명한 목표가 있었습니다. 그 때문에 간디는 승리를 거둔 후에 목표의 힘은 “목표의 힘은 군사력 보다 강합니다. 조직적인 정신력은 조직적인 군사력보다 위대합니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간디의 그 간절한 목표가 분명한 애국심이 영국의 그 방대한 군사력을 이기고 인도를 독립시킨 것입니다.
황제 나폴레옹도 전투를 앞두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전쟁의 승리는 이미 우리가 장악했다. 치밀한 목표 달성을 계획 했으니 이미 우리 이긴 것과 한가지다. 목표를 분명히 알고 나아가면 일은 이미 반 이상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희미한 목표를 가지고 살면 승리를 맛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적극적인 사고방식」으로 잘 알려진 노만 빈센트 필 박사는 “당신이 만일 어떤 것을 오랫동안 열심히 상상하고 마음속에 그리면 그것을 얻게 될 것이다.” 바라봄의 법칙입니다. 어떤 것을 목표를 중심으로 마음에 바라보고 이루어진 모습을 마음에 분명히 가지면 때가 오면 그것이 이루어진다고 말한 것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인가 성취하기 위해서는 먼저 “바라는 것”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목표가 분명해야 돼요. 지금은 눈에 안보일지라도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분명히 바라보아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바라보고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믿고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말하고 기도하면 하나님의 기적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우리가 무엇이 필요한지를 알고 계십니다만 우리 입으로 그것을 말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11장 24절에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주님께 부르짖어 기도하고 난 다음에는 받은 줄로 믿으라.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믿으라는 것입니다. 안 받은 것을 받은 것처럼 믿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내가 이미 목표를 가지고 기도하고 믿고 있는 그대로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믿는다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인생의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그것을 글로 써서 늘 이루어질 것을 믿으며 바라보면 놀라운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제가 여러분께 부탁하고 싶은 것은 여러분이 꼭 응답받아야 될 것이 있으면 흰 종이에 다가 분명하게 기록하십시오. 그리고 벽에 붙이십시오. 천정에도 붙이십시오. 화장대에도 붙이십시오. 일어서도 앉아서 그 목표를 바라보고 없는 것이 있는 이루어진 것처럼 바라보며 없는 것이 있는 것처럼 믿으며 없는 것이 있는 것처럼 말하며 없는 것이 이루어진 것처럼 기도하면 반드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국민요정’이라고 불리는 김연아는 어린 시절에 일기장에 보면 “나도 스케이트를 열심히 타서 국가대표 선수가 되어야 되겠다”라고 늘 적었습니다. 그가 일기장마다 스케이트 선수가 되겠다고 했으므로 그 꿈이 세계적인 피겨 스케이팅인으로 만들어 준 것입니다. 축구선수인 박지성도 일기장에 “늘 축구를 더욱 잘 할 수 있도록 노력하여 중학교는 물론 고등학교, 대학교, 국가대표까지 갈 것이다.”라고 기록해 놓았습니다. 그는 국가대표가 된 것입니다.
미국 제44대 대통령인 오바마는 1970년 어느 날 “나의 꿈”이라는 주제로 글을 쓰면서, “나의 꿈은 미국 대통령이 되는 것이다.”라고 말했었습니다. 흑인으로써 미국 대통령이 된 역사가 없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바마는 미국 대통령이 되겠다는 꿈을 분명히 말하고 적었습니다. 미국 대통령이 되고 만 것입니다. “비전의 사람”인 이원설은 1958년 미국에서 유학생활을 하면서 자신의 미래 이력서를 작성했습니다. 거기에는 교수, 학장, 총장이 될 것이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실제로 그가 학장이 된 것은 그의 계획보다 11년이나 앞당겨졌고, 한남대학교 총장이 된 것은 미래 이력서보다 7년 앞당겨서 총장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2003년에 숭실대학교의 재단이사장으로 취임을 한 것입니다. 우리가 인생의 분명한 꿈과 목표를 가지고 그것을 종이 위에 기록해 놓고 이루어질 것을 믿고 늘 바라보면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수첩을 가진 사람은 수첩에다가 적어 놓고 바라보고 믿고 기도하십시오. 마음을 목표를 가지고 집중적으로 바라보면서 기도하면 하나님이 그것을 이루어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묻는 질문이 그것입니다. “내가 너 뭐해 줄꼬?” “몰라요. 알아서 해주십시오.” 그러면 주님이 그냥 지나가 버리는 것입니다. “내가 너 뭐해 줄꼬?” “예, 첫째 이것 둘째 이것, 셋째 이것. 이것을 해주십시오.” 하면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그렇게 하나님이 응답해 주시는 것입니다.
5. 변화된 삶
특별히 바디메오에게 배울 것은 그가 예수님을 만나서 눈을 떴지 않습니까? 눈을 떴으면 다시 옛날 자기 여리고에 있는 자기 집으로 돌아가야 될 것 아닙니까? 예수님께서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가라!”하니까 눈이 번쩍 뜨자 그는 돌아가지 않고 예수님을 따라서 여리고에서 떠나간 것입니다.
마가복음 10장 52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그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따르니라”
예수를 따라 여리고 밖으로 나간 것입니다. 굉장히 상징적인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여리고는 저주받은 도시 아닙니까? 저주받은 도시에서 장님이 되었으니 앞뒤를 가리지 못하고 살고 있지 않습니까? 하루하루 거지생활은 상징적으로 예수를 모르는 세상 사람들은 이 저주 받은 땅에서 눈이 어두워서 어디에서 와서 왜 살며 어디로 가는지 모르고 매일같이 하루하루 일용할 양식을 얻기 위해서 피땀을 흘려 노력하며 살다가 늙어서 죽지 않습니까? 그런데 바디매오는 눈만 뜬 것이 아닙니다. 눈을 뜨고 난 다음에는 주님을 따라가기 시작해서 여리고를 나갔던 것입니다. 저주의 도시에서 떠나간 것입니다. 우리도 예수를 믿고 눈이 밝아지면 말씀을 믿고 저주의 생활에서 떠나가야 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새로운 삶을 살아가야 되는 것입니다.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풍성히 얻는 삶을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여리고속에 들어앉아서 예수를 믿겠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삶이 여리고에서 나와야 되는 것입니다. 여리고 안에서 나는 살겠다. 그것 잘못된 신앙인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눈이 밝아지면 저주는 떠나가는 것입니다. 세상의 죄악을 떠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라서 밖으로 나갔다는 것입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새것이 되는 것입니다. 나사로가 무덤에 나흘 동안 있다가 예수님이 나사로야 나오라고 할 때 나올 때 온 몸에 수의를 메고서 입고 나왔습니다. 주님께서 뭐라고 했습니까?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예수님을 믿으면 묶인 데서 풀어놓아 다녀야 되는 것입니다. 죄에서 해방되고 마귀와 세상에서 해방되고 질병에서 해방되고 저주와 고통에서 해방되고 죽음과 절망에서 해방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풀어놓아 다니게 하라. 죄의 도시를 떠나고 마귀와 세상을 떠나고 저주와 고통을 떠나고 죽음을 떠나서 그리스도 안에서 희망차고 기쁘고 소망이 있고 능력이 있는 삶으로 들어가야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변화된 삶을 우리가 얻어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로만 빈센트 필 박사는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어느 작은 도시 이발사협회가 회의를 해서 그 도시의 가난한 지역을 찾아가서 가장 더러운 누더기 옷을 입은 술 취한 사람을 깨끗하게 해주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가장 더러운 사람을 찾아가서 이발을 해주고 몸을 씻어주고 좋은 옷을 사주고 넥타이를 메주고 새사람을 만들었습니다. 이것이 신문기사로 나오자 한 사람이 자원해서 이 사람을 고용 했습니다. 내일 아침 8시에 직장에 출근하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8시가 되어도 직장에 출근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을 찾아가 옛날에 그 사람이 살던 동네에 가보니까 곤드레만드레 술을 먹고 좋은 옷을 입고 좋은 넥타이를 메고 좋은 지팡이를 옆에 두고서 진흙탕 속에 뒹굴어서 자고 있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깨달은 것은 아무리 좋은 옷을 입혀주고 이발을 시켜주고 좋은 지팡이를 손에 들려주고 안경을 끼워주고 해도 옛사람이 그대로 있으면 옛 그대로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달라져야지. 속이 달라져야 달라지지 겉이 달라져서는 달라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속이 달라져야 돼요. 아무리 외모를 변화시킨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내면의 세계가 변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 옛사람을 철저히 청산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으로 새 마음을 입으면 겉은 자연적으로 달라지는 것입니다. 겉사람은 그냥 따라와요. 속사람이 변화되어야 겉사람도 변화되는 것입니다.
<결론>
오직 진실한 믿음만이 예수님을 만나고 변화의 기적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러시아의 위대한 작가 톨스토이는 자신이 악에서 선으로 어떻게 돌아섰는지를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은 제게 믿음을 주었습니다. 저는 그 말씀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로부터 저의 모든 삶이 변화되어 이전에 제가 바라던 것을 바라지 않게 되었습니다. 반면에 제가 전에는 결코 바라지 않았던 것을 바라게 되었습니다. 이전에 저의 눈에 악으로 보였던 것이 선으로 보였으며 선으로 보였던 것이 악으로 보였습니다.” 믿음이 생기면 삶에 이러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우리 인생이 변하고 우리가 저주의 땅 여리고를 떠나 축복의 땅으로 걸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보다 더 좋은 친구가 없고 예수보다 더 귀한 보배가 없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차별 없이 그리스도에게 나와서 그리스도를 모실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히 동일하십니다. 어제 바디매오의 눈을 떠서 인생을 변화시킨 예수님은 오늘도 우리 눈을 뜨게 하고 우리 인생을 변화시켜 주기 위해서 이 자리에 와 계신 것입니다. 너희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너희 가운데 있겠노라 볼지어다 세상 끝날까지 항상 내가 너와 함께 있으리라고 말씀하신 주님이 이 자리에 계십니다. 한번 따라 말씀하세요. 주님이 이 자리에 나와 함께 계십니다. 그러면 그것으로 말미암아 오늘 우리가 예배당에서 나갈 때 변화된 사람이 되어서 나가게 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우리 기도드리겠습니다.
사랑이 많으신 우리 하나님 아버지, 우리 주 예수님을 보내 주셔서 이 저주받은 땅 여리고와 같은 이 세상에서 우리를 건져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내 아버지 하나님이시여 우리 모든 사람 마음속에 그리스도가 들어와서 오늘 큰 기적이 일어나게 도와주시옵시고 우리의 삶이 여리고를 떠나 그리스도의 은총 속에 들어가게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서론>
“변화와 기적을 가져오는 믿음”이라는 제목으로 오늘 은혜를 나누고자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데리고 여리고에 오셨습니다. 여리고는 저주받은 도시입니다. 여호수아가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들어올 때 제일 먼저 이스라엘 백성을 저항한 성이 여리고성인데 그 여리고를 무너뜨리고 여호수아가 저주해 버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리고는 저주받은 곳입니다. 저주받은 땅에 예수님이 제자들을 데리고 들어오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사는 이 지구도 저주받은 곳 아닙니까? 하나님이 저주하여 가라사대 가시와 엉겅퀴가 나고 이마에 땀을 흘려야 먹고 살 것이라고 말했지 않습니까? 이 저주받은 땅에 누가 우리를 도와주러 오겠느냐? 저주받은 여리고에 찾아간 주님은 이 저주받은 지구에 있는 우리들을 살리려고 오신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여리고 성문 좋은 길목에 디매오 아들 거지 바디매오가 동냥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도 좋은 자리에 동냥을 하려면 상당히 빽이 있어야 되고 지연줄이 있어야 됩니다. 이러므로 디메오는 자기 아들을 위해서 힘을 많이 쓴 것 같습니다. 바디매오가 좋은 자리에 동냥을 할 수 있게 되었고 또 특별한 정부에서 내려준 옷을 입었습니다. 그 옷을 입어야 그 자리에 앉아서 동냥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디매오가 그곳에 앉아 있으면서 많은 사람이 여리고성에 들어오고 나가고 하는데 그 가운데서 늘 듣는 이야기가 제일 토픽이 예수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나사렛 예수란 분이 나타나셔서 온 유대 땅에 다니면서 기사와 이적과 표적을 행하고 문둥이도 장님도 절름발이도 다 고치신다. 그 말을 들을 때 귀를 아주 귀울였습니다. 한 두 사람이 하는 말이 아니라 지나가는 사람들마다 그 이야기 꽃을 피웠습니다. 그래서 바디매오의 가슴속에 소원이 일어났습니다. “나도 예수님을 만나서 이 장님의 신세를 면하고 싶다.” 그 간절한 마음의 생각이 있었습니다.
<본론>
1. 믿음은 들음에서 남
성경에는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로마서 10장 17절)고 바디매오가 예수님이 모든 병을 고친다는 이야기를 자꾸 들었으므로 치료하는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마음에 꽉 들어왔습니다.
마태복음 11장 5절에 보면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고 말씀했는데 이와 같은 말을 듣고 바디매오의 마음속에 믿음이 무럭무럭 자라기 시작한 것입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하나님 말씀을 읽고 듣고 묵상해야 생기는 것이지 우연히 생기지 않습니다.
기도의 사람, 고아의 아버지라고 불리던 죠지 뮬러의 전기를 읽어보면, 그는 3개월에 한 번씩 성경을 통독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일생 동안에 성경을 200번이나 읽었습니다. 사람들이 “오늘날 왜 그리스도인은 신앙이 약하고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없습니까?”라고 묻자 죠지 뮬러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항상 성경을 읽지 않기 때문입니다.” 5만 번 기도의 응답을 받은 죠지 뮬러의 믿음은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접하므로 얻은 능력인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서는 매일 성경을 읽을 수 있도록 우리가 일독성경을 나눠 드리지 않습니까? 그것도 매일 못 읽는 사람이 굉장히 많아요. 내일로 미루고 모레로 미루다가 그 다음 읽는 것을 집어 치워 버리는 것입니다. 그 말씀을 읽지 아니하면 하나님과의 교통이 없어집니다. 교통이 없어지면 멀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이 말씀을 반드시 매일같이 읽고 하나님과의 대화가 있어야 우리 마음속에 믿음이 살아나는 것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로마서 10장 17절)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우리의 천명인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날마다 말씀을 듣고 읽고 묵상하며 그 말씀이 우리 마음속에 간직될 때 비로소 굳건한 믿음을 가진 사람이 되고 풍파가 불어와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정체성을 확실히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어야 기회가 다가오는 것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있으면 언제고 그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여리고성에 올 줄은 아무도 몰랐지요. 그러나 바디매오는 예수님을 주야로 만나기를 원하고 예수님을 만나면 운명이 달라질 것을 기대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기회가 온 것입니다. 하루는 동냥을 하는데 사람들이 무수히 지나갑니다. 보통 때보다 더 많은 사람이 지나가요. 그래서 한 사람 붙잡고 물었습니다. “여보, 무슨 행사가 있습니까? 왜 사람들이 이렇게 많이 지나갑니까?” “이 사람아 바로 지금 앞에 나사렛 예수가 지나갔단다. 예수님을 따르는 군중들이 지나갔다.” 그 말을 듣자 바디매오의 귀가 번쩍했습니다.
마가복음 10장 46절에 보면 “그들이 여리고에 이르렀더니 예수께서 제자들과 허다한 무리와 함께 여리고에서 나가실 때에 디매오의 아들인 맹인 거지 바디매오가 길 가에 앉았다가”라는 것입니다.
그가 벌떡 일어나서 온 힘을 다하여 고함을 쳤습니다.
2. 부르짖는 기도
절대절명의 부르짖음인 것입니다.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마가복음 10장 47절)
보통으로 그냥 부른 것이 아닙니다. 있는 힘을 다해서 일생일대의 기회를 놓치면 안 되기 때문에 배가 오그라 들어갈 때까지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겨달라고 고함 고함을 쳤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찾을 때 간절한 마음으로 부르짖으면 많은 사람이 우리 부르짖음을 방해합니다. 사람들이 바디매오에게 와서 “시끄럽다. 고함치지 말라. 너 같은 맹인은 예수님이 돌보지 않는다. 이미 지나가셨다.” 그렇게 훼방을 합니다. 우리도 오늘날 기도를 하면 꼭 마귀가 훼방하는 것입니다. 크게 고함쳐서 소리쳐 기도하면 욕을 하고 “하나님이 귀가 먹었는가 고함쳐야 듣게..” 그런 소리를 저는 얼마나 많이 들었는지 모릅니다. 우리 한국에서 통성기도를 하기 시작한 것이 아마 우리 교회에서부터 먼저 시작한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모일 때마다 통성기도를 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미쳤다. 하나님이 귀가 먹었느냐? 조용히 기도하고 묵상해도 하나님이 다 알아들을 것인데 왜 부르짖느냐? 무식하게..”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나 부르짖는다는 것은 우리가 얼마나 간절히 주님을 찾느냐 그 뜻인 것입니다. 우리 성경에 보면 사람들의 방해와 마귀의 방해가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크게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마 10:48)
사람들이 잠잠하라고 하면 할수록 더 크게 고함을 쳤습니다. 사람들의 그 목소리보다 더 큰 소리로 예수님에게 들리도록 바디매오는 고함을 쳤습니다.
“부르짖으라”는 말은 히브리어에 ‘카라’에서 나온 말입니다. 카라라는 말은 “큰 소리로 외치다” “절규한다” 그 말인 것입니다. 달리기 경기장에서 달리는 선수들은 골인점이 눈앞에 보이면 속도를 더 이상 늦출 수가 없습니다. 오직 골인 점을 향해서 있는 힘을 다해서 죽도록 뜁니다. 저는 중?고등학교 때 800미터 선수였습니다. 800미터는 100미터 경주 하듯이 전력을 기울여 뛰어야 되는 것입니다. 결승점에 도달하게 되면 숨이 턱에 닺고 아예 넘어져 죽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결승점에 달할 때 그렇게 목숨을 걸고 뛰지 아니하면 꼴지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도 한가지인 것입니다. 하나님께 응답받을 때가 올 때에는 있는 힘을 다해서 몸부림치며 기도해야 되는 것입니다. 부르짖는다는 말은 바로 이와같이 간절히 몸부림치며 외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몸속에 조금도 힘을 남겨놓지 않고 전력을 기울여 부르짖는 것이 “부르짖는 기도”입니다. 우리가 있는 힘을 다해 기도하여 막다른 골목에 처하여 더 이상 물러갈 수 없는 절대절명의 처지에서 하나님께 부르짖을 때 하나님이 응답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제가 50년 동안 목회했으니까 기도 많이 했겠지 않습니까? 나 자신을 위해서도 기도하고 성도들과 더불어도 기도하고 많은 사람들과도 기도하고 몇 사람과도 모여서도 기도했는데 지금 돌이켜 보면 우리가 있는 힘을 다해서 기도한 기도마다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잠잠하게 기도하거나 조용하게 묵상하고 기도하는 것은 거의 응답받지 못했습니다. 마음에 평안은 가져왔어도 응답을 받지 못했어요. 눈물을 흘리고 고함치며 밤새도록 외치고 몸부림치는 기도는 반드시 그 결과를 가져오는 것을 저는 체험했습니다. 막무가내의 부르짖음에 하나님도 어찌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예레미야서 29장 13절에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만나리라고 한 것입니다. 반 쯤 마음도 안돼요. 온 마음을 다해서 부르짖으면 하나님을 찾습니다. 이 우주 가운데 어디에서 하나님을 찾겠습니까? 그러나 그런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날 찾으라고 나타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7장 7절로 8절에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구하고 또 찾고 문을 두드리고 얼마나 전력을 다한 기도인 것입니까? 그러면 주님이 우리에게 응답해 주시는 것입니다.
저는 서대문에 있을 때 최자실 목사님하고 아현동, 현저동 가난한 곳에 심방을 다녔는데 한 번은 폐병에 걸려서 피를 많이 토하는 한 30대 중반의 자매님인데 만삭이 되어 있어요. 지금도 내 눈에 훤합니다. 판잣집에 삶의 형편이 비참한데 남편은 노동자고 그 부인은 만삭이 되어서 있는데 폐병에 걸려서 피를 토하고 죽어가고 있는 그런 형편이었습니다. 그런데 아기를 해산하게 되니까 아무도 도와줄 자가 없어서 저하고 최자실 목사님하고 그 집에 뛰어 갔습니다. 산모는 너무 못 먹어서 몸이 약하고 폐병까지 걸렸으니 혼자 숨 쉬기도 어려웠는데 아기를 낳아야 했던 것입니다. 저는 옆에서 산모를 위하여 무릎을 꿇어 “하나님 살려 주십시오. 이 산모에게 힘을 주십시오.” 그리고 우리 최자실 목사님은 그 산모를 도와서 아기를 받습니다. 우리 최자실 목사님은 원래 산파 국제면허를 가지고 계신 분입니다. 그래서 간호사였습니다. 수간호사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린 아기 낳는 것 한두번 받은 것이 아니에요. 그런데 보니까 우리 산모가 “더 이상 힘을 못 쓰겠어요. 나는 이제 죽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최자실 목사님이 “예수 이름으로 힘을 써! 전신전력을 다해 힘을 써! 더 힘을 써! 힘을 줘!” 그 산모는 오히려 얼굴이 창백한데 우리 최자실 목사님은 얼굴이 빨개져 가지고서 두 주먹을 쥐고 고함을 치시면서 힘을 주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부인이 “이제는 죽겠습니다.”하고 절대절명의 고통 속에 있을 때 어린 아기가 응아~하고 나오더라구요. 나는 그 부인이 죽을 줄 알았는데 살아났어요. 나중에 그 아기를 안고 교회 예배에 출석한 것을 보니 너무나 기뻤습니다. 어린 아기를 낳는 그러한 열심과 힘을 다해서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기도하면 안통할 리가 없는 것입니다. 엘리야가 기도할 때 비가 와달라고 기도할 때 갈멜산에서 얼마나 간절히 기도했던지 머리가 다리 사이로 들어갔다는 것입니다. 고함을 치니까 뱃가죽이 등에 붙지 않습니까? 점점점점 머리가 내려가서 머리가 두 다리 사이에 들어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종 게하시를 보고 산위에 올라가서 무슨 변화가 있는지 바라보라. 없다고 하니까 세 번이나 그렇게 기도하고 올라가 보라고 하니까 손바닥만한 구름짝이 떴습니다. 큰 비올 징조가 보인 것입니다. 절대 절명의 부르짖음으로 기도한다는 것은 이렇게 어린 아기를 낳는 심정으로 머리가 다리 사이로 들어가도록 배가 우그러지도록 고함을 치고 간절한 기도를 한 엘리야처럼 그렇게 끈질기게 기도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 순복음교회는 너무 시끄럽고 너무 고함을 치고 부르짖는다고 비난을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물에 빠진 사람이 점잖은 소리로 “나 물에 빠졌소. 살려 주소. 누구 날 살릴 사람 없소?” 그러면 그 사람 틀림없이 죽습니다. 고함을 치면서 “사람 살려라. 누구 없소? 사람 살려라” 혹은 벼랑에 매달린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와서 날 좀 건져 주십시오” 하면은 벼랑에 달려서 죽습니다. “나 벼랑에 달려서 죽습니다. 사람 살려주소!” 있는 힘을 다해야 되는 것입니다. 속담에도 우는 애기에게 젖 준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잠잠한 아기에게 젖 안주거든. 그러므로 우리는 울부짖고 외치고 부르짖어야 되는 것입니다. 답답한 사람이 기도 응답을 받습니다. 평안하면 기도응답을 안 받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하나님께 부르짖는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 부르짖는 것은 소경 바디매오가 마음에 뜨거운 소원을 가지고 주님께 나아가 “주여, 나를 도우소서.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몸부림치며 고함치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게 하니까 주님이 가시다가 발걸음을 멈추고 돌아보시면서 저를 내게로 오게 하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고함을 쳐도 상당한 시간 후에 예수님이 돌아보시고 저를 내게로 오라고 한 것입니다.
예레미야서 33장 3절에는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고 말한 것입니다.
네가 내게 그냥 조용히 묵상하라. 조용히 말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부르짖으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래서 부르짖기 위해서 철야기도가 있고 새벽기도가 있고 산에 가서 기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우리는 바디매오처럼 부르짖는 기도를 해야 되는 것입니다. 바디매오가 그냥 부르짖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내게로 오라고 하실 때까지 부르짖었는데 그가 예수님이 오란 말을 듣자 놀라운 행동을 했습니다.
3. 예수님이 바라보신 믿음
예수님은 바디매오의 그 행위를 가만히 서서 바라보셨습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자 마가복음 10장 49절에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그를 부르라 하시니 그들이 그 맹인을 부르며 이르되 안심하고 일어나라 그가 너를 부르신다 하매”
바디매오가 그 자리에서 자기가 동냥하던 그릇을 내던져 버렸습니다. 그리고 그냥가지 않습니다. 일어서더니만 겉옷을 벗어서 둘둘 말아서 내던져 버린 것입니다. 맹인이 겉옷을 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께로 갔습니다. 그것은 뭐냐면 예수님께 가면 운명이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예수님께 나가면 예수님이 변화를 갖다 주시기 때문에 더 이상 이 거지 옷을 입고 면허 얻은 특권의 옷을 입고 동냥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가나의 혼인 잔치에도 그렇지 않습니까? 포도주가 떨어져서 잔치하는데 굉장한 어려움이 생겼습니다. 잔치하는데 포도주가 없으니까 큰일 났지 않습니까? 그때에 예수님의 어머니에게 부탁하매 어머니가 예수님께 말했습니다. “이 집에 포도주가 떨어졌다.” 잠시 후에 예수님이 종들을 불러가지고서 “항아리에 물로 채워라! 결례 통에 물이 6통 가득하니까 떠다 주어라!” 거기 잔치하던 사람이 먹었는데 이것은 더 좋은 포도주라. 그 포도주 마시는 사람보다 처음보다 더 좋은 포도주를 내니 이 왠일인가. 그렇게 말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 오기만 하면 변화가 다가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냥 예수님과 함께 앉았다가 일어났는데 아무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면 예수님과 안 만난 것입니다. 지금도 우리가 기도하다가 예수님을 만나면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풍성히 얻는 변화가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바디매오는 자기가 변화될 것을 알았습니다. 하도 많이 들었기 때문에 예수님 앞에 나가면 내 신세는 바꿔진다. 내 눈은 뜨게 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특권층 거지의 입은 옷을 벗어 던졌습니다. 다시는 거지 옷을 입지 않겠다는 그의 믿음의 단호한 표시인 것입니다. 그 거지 옷은 그가 가진 최고의 재산이요, 추울 때는 외투가 되고 비올 때는 망토가 되고 잘 때는 이불이 되고 그에게는 그것이 최고의 재산이었는데 그것을 내어 던져 버리고 한평생 애착하던 옷을 벗어 버리고 주님께 뛰어 나간 것입니다. 주님께 뛰어나갈 때 우리도 벗어 버리고 나갈 것이 있습니다.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그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그를 위하여 기도할지니라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그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받으리라 그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며 병이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약 5:14~16)
우리도 주님께 뛰어나갈 때는 우리가 벗어 버려야 될 것이 있습니다. 죄악의 사람을 벗어 버려야 되는 것입니다. 죄악의 사람 그대로 나가면 안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라 하시거든 예수님 앞에 통회 자복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죄악의 옷을 벗어 버려야 되는 것입니다. 탐욕의 사람의 옷을 벗어야 되는 것입니다. 탐욕을 벗어 버려야 되는 것입니다. 병든 인격적인 더러움을 벗어야 되는 것입니다. 인격적으로 더러운 것을 다 회개해야 되는 것입니다. 원망, 불평, 탄식, 부정적인 삶을 벗어 버리고 세상과 마귀를 좇는 삶을 벗어 버리고 새로운 사람이 되겠다는 각오를 가지고 나가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에덴 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범죄 했을 때 예수님이 아담을 찾았지 않습니까? “아담아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그럴 때 아담이 예수님께 뛰어 나와서 무릎을 꿇고 “내가 먹지 말라는 선악과를 따먹었으니 나를 용서해 주십시오.” 했으면 용서 받았을 것입니다. 그랬다면 이 세상은 달라졌습니다. 그런데 변명을 했습니다. 하나님이 제일 미워하는 것이 변명입니다. “너 왜 이 일을 했느냐?” “무엇 무엇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담은 “하나님이 지어주신 저 여자 하와가 나를 꾐으로 먹었습니다.” 자기가 먹어놓고 난 다음에 책임은 하나님이 먼저 책임자입니다. 저 여자를 만들어 주었으니까. 둘째 책임은 하와에게 있습니다. 하와가 저것을 내게 주었기 때문에... 책임을 남에게 전가시켰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버림받은 것입니다. 오늘날도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갈 때 솔직한 죄를 다 고백하는 것이 제일 하나님을 만나는 빠른 길입니다. 내 죄를 우리 아버지 때문에 우리 어머니 때문에 우리 누나 때문에 동생 때문에 이웃 때문에 죄를 지었습니다. 거짓말입니다. 물론 스스로 자원해서 짓는 죄도 있지만 모두 다 죄라는 것은 공통적으로 마음이 맞아야 죄를 짓는 것입니다. 마음이 안 맞고 죄를 짓습니까? 서로 손발이 맞아야 죄를 짓지. 그래놓고 난 다음 문제가 생기면 저 사람이 꾐으로 죄를 지었다고 변명을 하는 것입니다. 제가 지금까지 늘 기억하는 것은 제가 초등학교 1학년 때인가 2학년 때인가 학교 갔다가 오다가 외밭을 지나는데 외와 수박이 익어 있었어요. 그런대 내가 같이 오던 이마무라라는 사람 불렀습니다. “야야 오너라, 우리 수박 따먹자!” 주인이 있는 밭인지도 몰랐습니다. 그때는 어린아이니까. 그래서 그 애와 함께 수박을 따서 먹으니까 어떤 사람이 한 사람 뒷 짐지고 모른체 하고 우리 곁에 와요. 지나가는 사람도 아닌데 우리를 보더니 콱 하더니 우리를 잡아 버려요. 목덜미가 잡혔습니다. 그런데 내가 그때 “내가 따먹었습니다.” 그러면 좋았을 것인데 “얘가 따먹자고 해서 따먹었습니다. 이마무라가 따먹자고 했어요. 나는 먹으려고 안했는데...” 그러니까 “이 놈의 자식아. 네가 따먹었다고 고백을 했으면 내가 너를 놓아줄 것인데 내가 저 원두막에서 보니까 네가 꾀더구나. 네가 저 이마무라를 꾀어서 네가 먹더구나!” 이마무라를 보더니만 “너는 가라! 너는 가라!” “너는 교장선생님한테 가자!” 그래서 내가 살려달라고 얼마나 빌었는지 몰라요. 거의 초등학교 2,3학년 때의 일인데 지금까지 잊어지지 않는 것은 얼마나 간절히 살려달라고 부르짖었던지 나중에 용서해 줍디다.
에베소서 4장 22절로 24절에 보면“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그러므로 거지 바디매오가 거지 옷을 벗어서 던져 버리고 예수님을 찾아나간 것처럼 우리도 옛사람을 벗어 던져 버리고 회개하고 주님께 나가야 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날 도와주시면 회개하겠다.” 그것은 잘못된 생각인 것입니다. 내가 전심전력으로 회개하고 나가면 주님께서 우리를 받아 주시는 것입니다.
4.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고 예수님께 나가서 횡설수설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분명히 자기가 바라는 것을 주님께 아뢰야 되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10장 51절에 “예수께서 말씀하여 이르시되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맹인이 이르되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맹인이 주님 찾아 왔는데 물어볼 필요 없잖습니까?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 눈 나으려고 하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닙니까? 그런데도 예수님은 바디매오로 하여금 입술로 고백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분명한 목표를 말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내가 네게 무엇 해주기를 원하느냐?” “선생님 보기를 원하나이다.” 주님 앞에 나오면 여러분이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기도해야 되는 것입니다. 횡설수설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분명한 목표와 꿈을 말해야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 10:10)고 분명한 자기 믿음으로 입으로 시인해야 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기도를 분명하게 하지 않고 막연하게 하는 기도가 많습니다. 그러면 기도 응답이 안 됩니다.
인도의 마하트마 간디는 막대한 돈과 무기와 군대력을 가진 영국정부와 대결하여 싸워서 이겼습니다. 그런데 마하트마 간디는 총 한자루 없었고 군인 한 사람 없었습니다. 그런데 막대한 무기와 조직과 군대를 가진 영국하고 싸우는데 그것은 우리가 보면 계란 들고 바위를 던지는 것과 한가지인 것입니다. 바위가 깨지겠습니까? 계란이 깨지지. 그러나 간디는 국가를 구원하기 위해서 반드시 영국을 이겨야 한다는 분명한 목표가 있었습니다. 살든지 죽든지 영국을 이겨야 우리나라가 산다는 분명한 목표가 있었습니다. 그 때문에 간디는 승리를 거둔 후에 목표의 힘은 “목표의 힘은 군사력 보다 강합니다. 조직적인 정신력은 조직적인 군사력보다 위대합니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간디의 그 간절한 목표가 분명한 애국심이 영국의 그 방대한 군사력을 이기고 인도를 독립시킨 것입니다.
황제 나폴레옹도 전투를 앞두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전쟁의 승리는 이미 우리가 장악했다. 치밀한 목표 달성을 계획 했으니 이미 우리 이긴 것과 한가지다. 목표를 분명히 알고 나아가면 일은 이미 반 이상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희미한 목표를 가지고 살면 승리를 맛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적극적인 사고방식」으로 잘 알려진 노만 빈센트 필 박사는 “당신이 만일 어떤 것을 오랫동안 열심히 상상하고 마음속에 그리면 그것을 얻게 될 것이다.” 바라봄의 법칙입니다. 어떤 것을 목표를 중심으로 마음에 바라보고 이루어진 모습을 마음에 분명히 가지면 때가 오면 그것이 이루어진다고 말한 것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인가 성취하기 위해서는 먼저 “바라는 것”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목표가 분명해야 돼요. 지금은 눈에 안보일지라도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분명히 바라보아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바라보고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믿고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말하고 기도하면 하나님의 기적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우리가 무엇이 필요한지를 알고 계십니다만 우리 입으로 그것을 말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11장 24절에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주님께 부르짖어 기도하고 난 다음에는 받은 줄로 믿으라.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믿으라는 것입니다. 안 받은 것을 받은 것처럼 믿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내가 이미 목표를 가지고 기도하고 믿고 있는 그대로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믿는다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인생의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그것을 글로 써서 늘 이루어질 것을 믿으며 바라보면 놀라운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제가 여러분께 부탁하고 싶은 것은 여러분이 꼭 응답받아야 될 것이 있으면 흰 종이에 다가 분명하게 기록하십시오. 그리고 벽에 붙이십시오. 천정에도 붙이십시오. 화장대에도 붙이십시오. 일어서도 앉아서 그 목표를 바라보고 없는 것이 있는 이루어진 것처럼 바라보며 없는 것이 있는 것처럼 믿으며 없는 것이 있는 것처럼 말하며 없는 것이 이루어진 것처럼 기도하면 반드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국민요정’이라고 불리는 김연아는 어린 시절에 일기장에 보면 “나도 스케이트를 열심히 타서 국가대표 선수가 되어야 되겠다”라고 늘 적었습니다. 그가 일기장마다 스케이트 선수가 되겠다고 했으므로 그 꿈이 세계적인 피겨 스케이팅인으로 만들어 준 것입니다. 축구선수인 박지성도 일기장에 “늘 축구를 더욱 잘 할 수 있도록 노력하여 중학교는 물론 고등학교, 대학교, 국가대표까지 갈 것이다.”라고 기록해 놓았습니다. 그는 국가대표가 된 것입니다.
미국 제44대 대통령인 오바마는 1970년 어느 날 “나의 꿈”이라는 주제로 글을 쓰면서, “나의 꿈은 미국 대통령이 되는 것이다.”라고 말했었습니다. 흑인으로써 미국 대통령이 된 역사가 없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바마는 미국 대통령이 되겠다는 꿈을 분명히 말하고 적었습니다. 미국 대통령이 되고 만 것입니다. “비전의 사람”인 이원설은 1958년 미국에서 유학생활을 하면서 자신의 미래 이력서를 작성했습니다. 거기에는 교수, 학장, 총장이 될 것이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실제로 그가 학장이 된 것은 그의 계획보다 11년이나 앞당겨졌고, 한남대학교 총장이 된 것은 미래 이력서보다 7년 앞당겨서 총장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2003년에 숭실대학교의 재단이사장으로 취임을 한 것입니다. 우리가 인생의 분명한 꿈과 목표를 가지고 그것을 종이 위에 기록해 놓고 이루어질 것을 믿고 늘 바라보면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수첩을 가진 사람은 수첩에다가 적어 놓고 바라보고 믿고 기도하십시오. 마음을 목표를 가지고 집중적으로 바라보면서 기도하면 하나님이 그것을 이루어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묻는 질문이 그것입니다. “내가 너 뭐해 줄꼬?” “몰라요. 알아서 해주십시오.” 그러면 주님이 그냥 지나가 버리는 것입니다. “내가 너 뭐해 줄꼬?” “예, 첫째 이것 둘째 이것, 셋째 이것. 이것을 해주십시오.” 하면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그렇게 하나님이 응답해 주시는 것입니다.
5. 변화된 삶
특별히 바디메오에게 배울 것은 그가 예수님을 만나서 눈을 떴지 않습니까? 눈을 떴으면 다시 옛날 자기 여리고에 있는 자기 집으로 돌아가야 될 것 아닙니까? 예수님께서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가라!”하니까 눈이 번쩍 뜨자 그는 돌아가지 않고 예수님을 따라서 여리고에서 떠나간 것입니다.
마가복음 10장 52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그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따르니라”
예수를 따라 여리고 밖으로 나간 것입니다. 굉장히 상징적인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여리고는 저주받은 도시 아닙니까? 저주받은 도시에서 장님이 되었으니 앞뒤를 가리지 못하고 살고 있지 않습니까? 하루하루 거지생활은 상징적으로 예수를 모르는 세상 사람들은 이 저주 받은 땅에서 눈이 어두워서 어디에서 와서 왜 살며 어디로 가는지 모르고 매일같이 하루하루 일용할 양식을 얻기 위해서 피땀을 흘려 노력하며 살다가 늙어서 죽지 않습니까? 그런데 바디매오는 눈만 뜬 것이 아닙니다. 눈을 뜨고 난 다음에는 주님을 따라가기 시작해서 여리고를 나갔던 것입니다. 저주의 도시에서 떠나간 것입니다. 우리도 예수를 믿고 눈이 밝아지면 말씀을 믿고 저주의 생활에서 떠나가야 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새로운 삶을 살아가야 되는 것입니다.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풍성히 얻는 삶을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여리고속에 들어앉아서 예수를 믿겠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삶이 여리고에서 나와야 되는 것입니다. 여리고 안에서 나는 살겠다. 그것 잘못된 신앙인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눈이 밝아지면 저주는 떠나가는 것입니다. 세상의 죄악을 떠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라서 밖으로 나갔다는 것입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새것이 되는 것입니다. 나사로가 무덤에 나흘 동안 있다가 예수님이 나사로야 나오라고 할 때 나올 때 온 몸에 수의를 메고서 입고 나왔습니다. 주님께서 뭐라고 했습니까?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예수님을 믿으면 묶인 데서 풀어놓아 다녀야 되는 것입니다. 죄에서 해방되고 마귀와 세상에서 해방되고 질병에서 해방되고 저주와 고통에서 해방되고 죽음과 절망에서 해방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풀어놓아 다니게 하라. 죄의 도시를 떠나고 마귀와 세상을 떠나고 저주와 고통을 떠나고 죽음을 떠나서 그리스도 안에서 희망차고 기쁘고 소망이 있고 능력이 있는 삶으로 들어가야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변화된 삶을 우리가 얻어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로만 빈센트 필 박사는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어느 작은 도시 이발사협회가 회의를 해서 그 도시의 가난한 지역을 찾아가서 가장 더러운 누더기 옷을 입은 술 취한 사람을 깨끗하게 해주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가장 더러운 사람을 찾아가서 이발을 해주고 몸을 씻어주고 좋은 옷을 사주고 넥타이를 메주고 새사람을 만들었습니다. 이것이 신문기사로 나오자 한 사람이 자원해서 이 사람을 고용 했습니다. 내일 아침 8시에 직장에 출근하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8시가 되어도 직장에 출근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을 찾아가 옛날에 그 사람이 살던 동네에 가보니까 곤드레만드레 술을 먹고 좋은 옷을 입고 좋은 넥타이를 메고 좋은 지팡이를 옆에 두고서 진흙탕 속에 뒹굴어서 자고 있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깨달은 것은 아무리 좋은 옷을 입혀주고 이발을 시켜주고 좋은 지팡이를 손에 들려주고 안경을 끼워주고 해도 옛사람이 그대로 있으면 옛 그대로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달라져야지. 속이 달라져야 달라지지 겉이 달라져서는 달라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속이 달라져야 돼요. 아무리 외모를 변화시킨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내면의 세계가 변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 옛사람을 철저히 청산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으로 새 마음을 입으면 겉은 자연적으로 달라지는 것입니다. 겉사람은 그냥 따라와요. 속사람이 변화되어야 겉사람도 변화되는 것입니다.
<결론>
오직 진실한 믿음만이 예수님을 만나고 변화의 기적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러시아의 위대한 작가 톨스토이는 자신이 악에서 선으로 어떻게 돌아섰는지를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은 제게 믿음을 주었습니다. 저는 그 말씀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로부터 저의 모든 삶이 변화되어 이전에 제가 바라던 것을 바라지 않게 되었습니다. 반면에 제가 전에는 결코 바라지 않았던 것을 바라게 되었습니다. 이전에 저의 눈에 악으로 보였던 것이 선으로 보였으며 선으로 보였던 것이 악으로 보였습니다.” 믿음이 생기면 삶에 이러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우리 인생이 변하고 우리가 저주의 땅 여리고를 떠나 축복의 땅으로 걸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보다 더 좋은 친구가 없고 예수보다 더 귀한 보배가 없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차별 없이 그리스도에게 나와서 그리스도를 모실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히 동일하십니다. 어제 바디매오의 눈을 떠서 인생을 변화시킨 예수님은 오늘도 우리 눈을 뜨게 하고 우리 인생을 변화시켜 주기 위해서 이 자리에 와 계신 것입니다. 너희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너희 가운데 있겠노라 볼지어다 세상 끝날까지 항상 내가 너와 함께 있으리라고 말씀하신 주님이 이 자리에 계십니다. 한번 따라 말씀하세요. 주님이 이 자리에 나와 함께 계십니다. 그러면 그것으로 말미암아 오늘 우리가 예배당에서 나갈 때 변화된 사람이 되어서 나가게 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우리 기도드리겠습니다.
사랑이 많으신 우리 하나님 아버지, 우리 주 예수님을 보내 주셔서 이 저주받은 땅 여리고와 같은 이 세상에서 우리를 건져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내 아버지 하나님이시여 우리 모든 사람 마음속에 그리스도가 들어와서 오늘 큰 기적이 일어나게 도와주시옵시고 우리의 삶이 여리고를 떠나 그리스도의 은총 속에 들어가게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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