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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을 선택하라

열왕기하 조용기 목사............... 조회 수 2621 추천 수 0 2010.02.22 09:1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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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왕하 7:1~2 
설교자 : 조용기 목사 
참고 : 2009. 7. 19. 주일 4부 설교 
“엘리사가 이르되 야훼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야훼께서 이르시되 내일 이맘때에 사마리아 성문에서 고운 밀가루 한 스아를 한 세겔로 매매하고 보리 두 스아를 한 세겔로 매매하리라 하셨느니라 그 때에 왕이 그의 손에 의지하는 자 곧 한 장관이 하나님의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야훼께서 하늘에 창을 내신들 어찌 이런 일이 있으리요 하더라 엘리사가 이르되 네가 네 눈으로 보리라 그러나 그것을 먹지는 못하리라 하니라”(왕하 7:1~2)

<서론>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희망을 선택하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우리는 매일 우리에게 다가오는 일들 중에 우리가 원하는 것을 선택합니다. 많은 일이 다가올 때 내가 무엇을 원하는가. 내 원하는 것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들도 그렇습니다. 여러 가지 장난감을 내주고서 그 중에 하나를 가지라면 다 가지지는 못하니까 한 가지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부정적인 선택을 할 수도 있고, 긍정적인 선택을 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지혜 있는 선택을 할 수도 있고, 어리석은 선택을 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 우리의 선택이 잘되면 승리적인 생활을 살고 선택을 못하면 크게 낭패할 때가 많습니다.
심리학자들에 의하면 두려움에는 무려 75가지의 종류가 있다고 합니다. 에딘버러 대학 심리학자 칼스테오는 인간의 올바른 마음을 빼앗고 정신건강에 해를 끼치는 가장 큰 원인이 바로 마음속에 있는 두려움이라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우리에게 다가오는 여러 환경 가운데 선택을 할 때 마음에 두려움을 가지고 잘못 선택을 하면 낭패를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미국의 대설교자 헨리 비쳐는 "우리는 날마다 두 개의 손잡이를 잡고 하루를 살아간다. 하나는 두려움의 손잡이요 다른 하나는 믿음의 손잡이다."라고 한 것입니다. 두려워서 벌벌 떨면서 선택을 잘못할 수 있고 담대한 믿음으로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해보자는 심정으로 선택을 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매일 우리에게 다가오는 일들 중 우리가 원하는 것을 선택합니다. 두려움을 선택하고 뒤로 물러갈 것이냐, 믿음을 선택하고 백척간두에서 한 발자국 내 딛을 것이냐 이러한 선택을 우리가 늘 내려야만 하는 것입니다.

<본론>
1. 희망을 선택한 사람들
우리가 성경에 보면 구약성경 열왕기하 7장 3절로 4절에 나병환자들의 선택을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아람의 침공을 받아서 첩첩이 포위를 당한 것입니다. 사마리아성이 포위를 당해서 하루이틀 아닌 긴날 동안 계속되매 물이 다 끊어지고 양식이 다 끊어졌습니다. 사람들은 배가 고파서 자기 자식을 잡아먹는 비참한 지경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때에 이스라엘 왕이 신하들을 불러놓고 하는 말이 “지금도 하나님의 선지자 엘리사가 살아 있느냐. 하나님이 우리를 안도와주시니 선지자 엘리사를 살려 놓을 수가 있냐? 가서 그 목을 베자!” 그래서 장관들하고 엘리사가 있는 집으로 찾아올 때 엘리사가 그 사람들에게 말했습니다. “내일 이맘때면 밀가루와 보리가 산더미처럼 사마리아성 입구에 쌓일 것이니 두려워하지 말라.” 그러니까 국무총리 되는 사람이 허허허 웃으면서 “하늘에서 하나님이 창문을 낸들 그런 일이 있을 수가 없다.” 그러니까 엘리사가 하는 말이 “네가 내일 눈으로 보기는 보지만 먹지는 못하리라.” 그랬는데 그 에피소드가 어떻게 이루어지냐면 성문을 닫고 이제 사람들이 다 잠자러 들어갔는데 성문가에 나병환자 네 사람이 앉아 있었습니다. 그들이 “자 우리가 성곽 안으로 들어가자 해도 굶주림이 있으니 안에서 굶어죽을 것이고 여기 가만히 앉아 있어도 그대로 굶어죽을 것이니 희망을 향하여 용감하게 나가자. 아람군대에게 나아가서 항복하자. 살길은 그것밖에 없다. 희망이 있는 곳으로 우리가 전진해야 되겠다.” 그래서 그들은 절망하기를 거부하고 일어나서 희망을 향하여 전진하기 위해서 네 사람이 스크럼을 짜고 아람군대를 향해서 걸어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몸이 성하지 못하니까 한 사람이 넘어지면 다 함께 넘어지고 서로 격려하고 위로하면서 손을 잡고 일으켜 앞서거니 뒤서거니 아람군대를 향해서 나가는데 하나님이 그들과 같이 했습니다. 희망을 가지고 나가는 나병환자 네 사람을 더불어 하나님이 행진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 중에 나병환자들보다 훨씬 나은 사람이 많이 있었지만 절망하고 있는 사람을 주님은 사용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이 다 손가락질하고 외면당하는 나병환자 네 사람은 희망을 가지고 절망에 주저앉아 있지 않고 희망을 향해서 나가기로 결심하고 죽기 아니면 살기로 나갈 때 하나님이 그들과 같이 하셔서 그들이 넘어지는 소리는 큰 전차바퀴 소리, 그들이 격려하는 소리는 대군대의 외치는 소리로 들리도록 확산 시켜서 아람군대의 귀에 들리게 했습니다. 아람 군인들이 저녁식사를 다 준비하고 먹으려고 할 그때쯤 이들이 그 진을 향해서 행진해 들어가니 하나님께서 그들의 행진을 대군대의 행진 소리로 들리게 했습니다. 아람군인들이 말하기를 “야, 이스라엘왕이 애굽왕과 주변에 있는 국가의 왕들에게 돈을 주고 군대를 사서 우리를 포위 공격한다. 빨리 달아나자!” 모두 다 내버려 놓고 달아났습니다. 네 사람의 나병환자가 아람진에 도착하니까 한 사람도 없어요. 음식은 김이 모락모락 나고 잘 만들어져 있는데 사람들은 없습니다. 그들은 먹고 마시고 금은을 감추고 하다가 “우리 이러다가 하나님께 벌 받을 것이다. 빨리 가서 사마리아성에 있는 사람들에게 알리자.” 그래서 그들이 빨리 사마리아성에 가서 알렸습니다. 사마리아성 굶주린 사람들이 벌떼처럼 나와서 아람진을 탈취했습니다. 얼마나 많은 양식들을 걸머지고 왔던지 성 밖에 밀가루와 보리가 산처럼 쌓였습니다. 사람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서로 먹으려고 야단법석을 하는데 질서를 지키기 위해서 국무총리 되는 왕에 의지하는 장관이 와서 사람들을 정리하다가 사람들에게 밀려서 밟혀 죽어버리고 만 것입니다. 눈으로 보았으나 먹지는 못했습니다. 이 단순한 이야기지만 사마리아가 굶주림에 의해서 죽게 되었을 때 그를 건진 사람들은 군대도 아니고 장정들도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이 다 우습게보고 손가락질하는 네 사람의 나병환자들인 것입니다. “나 같은 사람을 누가 사용 하겠노. 나는 교육도 받지 못하고, 훌륭한 사람도 되지 못하고, 배경도 없는 사람인데 누가 나를 사용하겠느냐.”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습니다만 하나님은 성경에 보면 대게 버림받은 사람, 낮은 사람, 비천한 사람 이런 사람들을 사용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차별대우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열왕기하 7장 3절로 4절에 자세히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문 어귀에 나병환자 네 사람이 있더니 그 친구에게 서로 말하되 우리가 어찌하여 여기 앉아서 죽기를 기다리랴 만일 우리가 성읍으로 가자고 말한다면 성읍에는 굶주림이 있으니 우리가 거기서 죽을 것이요 만일 우리가 여기서 머무르면 역시 우리가 죽을 것이라 그런즉 우리가 가서 아람 군대에게 항복하자 그들이 우리를 살려 두면 살 것이요 우리를 죽이면 죽을 것이라 하고”
절대적으로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 곳은 들어갈 필요가 없습니다. 눈곱만치라도 살 희망이 있는 곳을 향해서 전진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죽음을 앞두고서 포기하는 사람은 하나님도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눈곱만한 희망의 불빛이라도 보고서 희망을 향해서 나가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같이 행진하여 희망을 이루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오스트리아의 정신의학자였던 빅터 프랭클 박사는 2차 대전 당시 그가 유대인이라고 독일사람에게 잡혀서 나치수용소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났습니다. 그는 600만 유대인이 참사를 당한 나치수용소의 그 체험담을 책으로 기록했습니다. 이 책에서 그는 인간이 위기의 상황에서도 소망을 가질 때 놀라운 힘이 나타난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빅터 프랭클 박사는 "희망을 포기한 사람은 나치 수용소에서 다 죽어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끝까지 소망을 잃지 않고 다른 사람들에게 소망을 주던 사람은 모진 매를 맞고 고문을 당하고 혹사를 당해도 살아났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나치수용소에서 사람들이 영양실조를 당해서 죽은 사람도 많고 고통과 괴로움을 당해서 죽는 사람도 많았으나 그 똑같은 환경 속에서 소망을 가지고 다른 사람에게 소망을 주던 사람은 살아났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희망'을 선택하기로 결단할 때, 우리 삶은 현재의 고통과 상관없이 희망찬 내일의 소망으로 가득할 수가 있습니다. 사마리아 성문에 있던 네 사람의 나병환자 역시 희망을 선택했을 때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셔서 놀라운 축복의 역사가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희망을 저버리면 우리에게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절망이 끊임없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또 희망도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 가운데 우리가 절망을 선택해서는 안 됩니다. 희망을 선택해야 되는 것입니다. 희망만이 우리가 나갈 수 있는 길인 것입니다.
열왕기하 7장 6절로 7절에 보면 “이는 주께서 아람 군대로 병거 소리와 말 소리와 큰 군대의 소리를 듣게 하셨으므로 아람 사람이 서로 말하기를 이스라엘 왕이 우리를 치려 하여 헷 사람의 왕들과 애굽 왕들에게 값을 주고 그들을 우리에게 오게 하였다 하고 해질 무렵에 일어나서 도망하되 그 장막과 말과 나귀를 버리고 진영을 그대로 두고 목숨을 위하여 도망하였음이라”
보십시오. 희망을 가지고 전진하는 사람들과 하나님이 같이 하니까 원수가 한길로 갔다가 일곱길로 도망치게 되는 것입니다. 나는 못한다. 안 된다. 할 수 없다. 죽는다. 절망이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하고는 하나님이 대화를 하지 않습니다. 이미 버림받은바 된 사람이 되고 만 것입니다.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해보자. 전력을 다하자. 노력하자. 이런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같이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희망이 없는데 어디 희망을 얻을 수 있습니까?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2. 십자가는 희망 플러스이다
그러나 십자가는 희망이 플러스인 것입니다. 십자가를 플러스표 아닙니까? 우리에게 희망을 언제나 보태주는 것이 십자가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들로써 사람으로 오셔서 33년간 세상에서 사시고 나중에 우리의 죄와 불의 추악과 저주, 절망과 죽음을 대신 짊어지고 십자가에 올라가서 몸 찢고 피 흘려서 이를 청산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없을 때는 절망하지만 예수님을 만나게 되면 희망을 가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아무리 큰 죄인이라도 용서와 의의 희망을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내 죄를 대신 짊어지고 청산하고 나에게 하나님 의를 주셨으므로 용서받고 의롭게 될 희망을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 3장 24절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죄인들이 십자가를 바라보면 죄 사함 받고 영생을 얻을 희망을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거룩함과 성령충만의 희망도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 마귀와 악한 습관에 묶여서 꿈쩍 못하는 사람도 십자가를 바라보면 그곳에서 예수님이 마귀와 세상을 멸하고 거룩함과 성결함을 우리에게 주신 것을 바라보고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6장 11절에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았느니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병들어서 죽게 되고 절망 되었을 때 십자가를 쳐다보면 희망을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2장 24절에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라.
여러분 제가 17살 때 폐병 걸렸다고 했지 않습니까? 그 때 살기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입에 풀칠하기도 힘든데 병원에 입원해서 치료받는 것은 꿈도 꿀 수 없었습니다. 나는 매일같이 기침을 하고 피를 토해 냈었습니다. 숨쉬기가 얼마나 괴롭던지 벽에 기대어 있는데 숨을 쉬려면 애를 써야 되고 조금 잠이 들면 숨을 쉬려고 애를 쓰지 않기 때문에 숨이 막혀서 화들짝 놀래서 일어나고 정말정말 죽음이 눈앞에 다가오고 희망은 없었습니다. 돈이 없지 병원에 갈 수 없지요. 치료받을 수 없지요. 또 온 집안 식구들은 다 밥벌이 하러 나가버리고 없지요. 이러한 절망 가운데 제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접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접했을 때 마음속에 무엇이 생겼느냐. 그 절망 가운데서 나도 살 수 있다는 희망이 생긴 것입니다. 나에게 복음을 전도해 준 사람이 나에게 돈 한 푼 안주었습니다. 내 가래 한번 뱉으라고 휴지쪽지 하나 주지 않았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책을 내어 주고 갔는데 성경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 성경을 읽으면서 그 속에 제가 얻은 것은 희망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면 오늘날도 이런 기적을 행하여서 나를 살려 줄 것이라는 희망이 들어와서 그 희망을 붙잡고 살기로 결심을 내렸었습니다. 죽기로 결심을 내리지 않고 살기로 결심을 내린 것입니다. 선택을 희망을 했습니다. 그 결과로 저는 폐병에서 살아 일어나고 오늘 여러분 앞에 서 있는 것입니다. 그때 만일 절망을 선택했으면 오늘날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저의 몸으로 체험해서 압니다. 절망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줄 수 없지만 희망은 우리에게 삶의 길을 열어주는 하나님의 역사를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저주에서 고통당하고 직장도 없고 먹고 살기가 힘들고 괴로울 때 우리는 어디에 가서 희망을 얻습니까? 십자가를 쳐다보면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위를 속량하였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아브라함의 복을 받게 하려 함이라고 했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저주를 대신 짊어졌으므로 우리는 예수를 통해서 아브라함의 복을 받을 수 있다는 희망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 믿고 나온다고 갑자기 직장이 생기는 것도 아니고 돈이 생기는 것도 아니고 부자가 되는 것도 아닌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나도 잘 살고 잘 먹고 살 수 있다는 희망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 희망이 우리에게 빛을 주고 우리를 승리로 이끌어 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 살면서 죄를 짓고 불의하고 추악하고 버림받을 생활을 살았습니다. 죄를 짓지 않는 의인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나 천국의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십자가를 바라보면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대신해서 죽어 무덤에 들어갔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시므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의 소망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희망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4장 1절로 3절에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희망을 가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어떤 절망에 처한 사람도 예수 그리스도에게 나와서 십자가 밑에서 그리스도를 쳐다보면 희망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그곳에서 예수님이 나의 죄를 청산하고 나의 추악을 청산하고 나의 질병을 청산하고 나의 저주와 가난을 청산하고 나의 죽음을 청산하고 매달려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희망을 얻고 그 희망을 저버리지 아니하면 하나님이 그 희망을 통해서 우리와 같이 행진해 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비록 나병환자와 같이 힘이 없고 무력하고 무능하더라도 희망을 품으면 희망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와 같이 행진해 주시므로 내일은 오늘보다 다음 달은 금번 달 보다 명년은 금년보다 나아지고 마는 것입니다. 세월이 지나고 나면 어떻게 내가 이렇게 변화 되었는가 깜짝 놀라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서로 늘 같이 얼굴을 쳐다보면 5년 내지 10년 지나도 늙어가는 것을 모릅니다. 익숙해져서.. 그런데 모처럼 5년이나 10년 만에 만나게 되면 깜짝 놀랍니다. “왜 이렇게 늙었느냐? 아이구 몰라보겠구나.” 늘 같이 살던 사람은 모르는데 오래간만에 만난 사람은 깜짝 놀라는 것입니다. 예수께 희망을 두고 사는 사람은 같이 있을 때는 모르지만 세월이 흘러가서 1년, 5년, 10년 후에 만나보면 완전히 생활이 달라졌습니다. 빈손 든 사람이 잘살고 집 없던 사람이 집을 가지고 있고 낭패 당한 사람이 승리를 하고 있고 어떻게 이렇게 변할 수 있느냐. 누가 도와주었느냐? 어떻게 이렇게 축복을 받았느냐? 예수님이 희망을 가진 사람과 같이 해서 역사해 주셨기 때문인 것입니다.

3. 나는 왜 희망의 복음을 전했나?
저는 한평생 희망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희망목회 50년을 한 것입니다. 왜, 희망을 전했느냐? 이 세상에 사람이 살아가면서 두 가지 관점으로 십자가를 바라볼 수 있는 것입니다. 행복하고 평안한 환경에서 자라고 산 사람은 십자가를 볼 때 희망을 찾을 필요가 없습니다. 잘 먹고 잘 입고 잘 살고 행복하니까 십자가를 바라볼 때 희망을 찾을 필요가 없습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죄 용서함 받고 윤리와 도덕적으로 엄하게 살아야 된다. 그것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계명을 지키고 율법에 따른 윤리와 도덕적인 삶을 강조하고 사회 참여, 인권, 빈부격차 해소, 개혁, 세계 평화 등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자연보호, 환경보호를 말하고 지상 낙원을 말하지 희망에 대한 말을 하지 않습니다. 많은 교회들이 우리 여의도순복음교회를 비난하고 저의 목회를 비난했습니다. 교회 나오면 복을 받는다고 기복신앙을 설교한다고 “어떻게 교회에 기복신앙을 설교하느냐? 교회 나와서 예수 믿고 윤리와 도덕적인 엄한 생활을 하고 예수 믿는 사람이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사회에 참여해서 사회를 공평하게 살게 하고 인권을 회복시키고 빈부격차를 해소하고 개혁과 세계평화 등을 말해야 되고 자연보고나 환경보호를 말해야 되고 지상낙원을 말해야 되지 뭐 기복 신앙을 말하느냐?”그렇게 말합니다. 그들은 환경이 잘 먹고 잘 입고 잘 살고 편안하니까 십자가를 그렇게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병들고 가난하고 소외되고 못 배우고 오늘의 삶의 불안과 내일의 삶의 두려움에 떠는 사람들은 십자가를 볼 때 희망을 찾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제가 신학교를 졸업 하고 대조동 산비탈에 천막을 치고 교회를 시작할 때 그들에게 “너희들 율법을 지켜라” 그 설교가 소망이 없습니다. “정의롭게 살아라” 소망이 없습니다. 매일같이 술 먹고 도박하고 치고 때리고 죽이고 살리고 하는 그 마당에 정의롭게 살아라고 해도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아무 희망이 없었습니다. 직장도 없고 돈도 없고 의지할 곳도 없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들에게 오직 살아갈 길은 희망을 주는 복음밖에 없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이런 생활에서 일탈할 수가 있다. 내일은 오늘보다, 다음 달은 금번 달보다, 명년은 금년보다 잘 살 수 있다. 그 길이 예수님 믿고 예수님을 따라가는 길이라고 기복신앙을 말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희망을 주는 복음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대속의 은혜의 복음인 것입니다.
누가복음 4장 18절로 19절에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주님은 우리에게 희망을 주러 오셨습니다. 죽는 자에게 삶을, 아픈 자에게 치료를, 배고픈 자에게 배불리 먹게 함을, 없는 자에게 있게 만들어 주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똑같은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를 바라보더라도 환경이 부유하고 평안한 사람들이 바라보는 십자가와 가난하고 헐벗고 병들고 소외된 사람들이 바라보는 십자가가 다른 것입니다. 저는 살아계셔서 현재 도우시는 하나님에 대한 설교를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히 13:8)고 말씀하셨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 28:20)고 말한 것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죄 사함을 받는다. 거룩하게 된다. 병 고침 받고 아브라함의 축복을 받고 영생복락을 은혜로 받는다. 강하게 오중복음을 전파할 수 있었던 것은 현실적인 삶의 절망에서 건져준다는 복음을 전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병고에서 해방시켜 주시고 삶의 고통에서 건져주시는 지금 자비와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내일 잘될 것이다. 모레 잘 될 것이다. 그렇게 할 시간 여유가 없습니다. 지금 배고프고 지금 죽어가는 것입니다. 지금 희망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마 7:11)
하나님이 지금 좋은 것 주신다. 지금 용서해 주신다. 지금 의롭게 만들어 주신다. 지금 축복해 주신다. 지금 치료해 주신다. 지금 소망을 주신다. 지금 영원히 살게 해 주신다. 희망의 복음을 전할 수밖에 없는 그런 처지에 제가 들어갔기 때문에 희망을 전하고 하나님 복 주시는 하나님을 전하게 된 것입니다. 잘 먹고 잘 입고 잘 살고 편안한 사람에게는 그런 복음이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가 날로 가난하고 헐벗고 굶주린 사람들이 떼를 지고 찾아온 이유도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경상도, 전라도에서 서울에 올라왔다가 못살게 되고 변두리에 쫓겨 나간 사람들이 올데갈데 없는데 희망을 주는 복음을 천막교회에서 증거하니까 다 찢어지고 가마니에 앉아 있는 교회지만 구름떼같이 사람들이 모여와서 구원을 받고 변화를 받고 기적을 체험하고 새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게 주신 하나님의 사명은 희망의 전도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오중복음, 삼중축복, 4차원의 영성을 개발해서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라. 중생, 성령충만, 신유, 축복, 천국과 재림의 복음을 증거하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영원히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풍성히 얻는 기적을 받을 수 있다는 희망을 주라. 생각의 희망을 주라. 희망찬 꿈을 꾸게 만들어 줘라. 희망찬 믿음을 갖게 해줘라. 희망찬 말을 하게 만들어줘라. 모든 것을 희망으로 시작해서 희망으로 끝나도록 하나님은 제게 명령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희망의 메시지를 가지고 제가 한국에서 전도하고 온 천하만국에 나가서 복음을 증거했었습니다. 희망을 바라는 수많은 사람들이 구름떼같이 몰려왔고 희망을 얻고 구원을 받고 변화를 받은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고 변화될 수 있는 것은 희망인 것입니다.
저는 에반스 박사가 전쟁 중 군의관이 한 말을 글로 적어 놓은 것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한 사병이 일선에서 총에 맞아서 중태에 이르렀습니다. 살아갈 수가 없어요. 그래서 다른 군의관들이 다 모여가지고서 이 사람 못 살리겠다고 하는데 그중 한사람의 군의관이 무슨 말을 했냐면 "내일 새벽까지 만 견디면 산다." 이 환자는 몽롱한 가운데 기억이 사라지려고 하는 그 시점에 다 죽는다고 하니까 자기는 죽을 줄 알았는데 군의관 한 사람이 내일 새벽까지만 살아 있으면 산다. 그 말을 듣자 그 마음속에 결심을 했습니다. 내일 새벽까지 안 죽기로 결심을 했습니다. 온 몸에 죽음이 다가오는데 사람들이 낙심하고 죽음을 받아들이면 그대로 죽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는 죽음을 반대했습니다. “나는 안 죽는다. 나는 내일 새벽까지 살아야 된다. 결코 살아야 된다.” 몸부림치고 저항을 했습니다. 밤 12시가 지나고 새벽이 다가오자 갑자기 생명의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그 온몸에 생기가 돌고 새로운 생기가 넘쳐나서 그는 살아난 것입니다. 그가 나중에 간증한 것이 그 군의관이 무의식중에 새벽까지만 있으면 산다는 희망의 말을 해주었기 때문에 그는 살아났다는 것입니다. 말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희망의 말 한마디를 한 것이 군의관은 우연히 말했지만 이 사람에게는 새벽까지 안 죽고 살 수 있는 투쟁을 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신 것입니다. 어린 아이보고도 “이 바보 천치야, 너 같은 놈은 바보고 세상에서 살아갈 자격도 없다.”면 그는 절망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주 바보천치라도 “너는 잘될 수 있다. 너는 하나님이 특별히 네게 은사를 준 것이 있다. 너는 잘된다.” 용기를 주면 그 말이 그 마음속에 큰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그 말을 의지하고 나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에디슨이 학교에 갔다가 쫓겨났습니다. 왜냐하면 선생님이 수학을 가르치는데 “하나 보태기 하나는 둘이다.”라고 하니까 이 소년이 손을 들고 “선생님, 하나 보태기 하나가 둘이 반드시 되지 않습니다.” “왜 그러느냐?” “고양이 플러스 쥐는 하나밖에 안 남습니다. 고양이가 잡아먹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하니까 선생이 도저히 애들을 가르칠 수가 없어요. 그래서 이 애는 바보니까 더 가르칠 수 없다고 학교에서 쫓아냈습니다. 그때 그 어머니가 에디슨을 데리고서 “너는 특별한 머리를 가진 사람이다. 보통 애들보다 다른 상상을 하는 특별한 머리를 가진 사람으로 반드시 세계를 변화 시키는 위대한 인물이 될 수 있다.”고 격려했습니다. 그 어머니의 격려의 말 그것을 잡고 “그렇지, 나는 다른 사람과 다르다. 나는 위대한 사람이 될 수 있다.” 그 믿음으로 나아가서 세계를 변화시키는 발명왕이 된 것인 것입니다. 한마디의 격려의 말이 한평생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 부정적인 말이나 절망적인 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 이 세상에는 부정적인 세상인 것입니다. 절망적인 세상인 것입니다. 그 말 안 해도 부정은 다가오고 절망은 다가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부정과 절망이 안개처럼 쌓여서 사는 것입니다. 이미 부정이 있고 절망이 있는 곳에 또 부정을 말하고 절망을 말해봤자 도움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곳에 우리가 긍정적이고 적극적이고 창조적이고 생산적인 말을 하면 그것이 우리에게 승리를 갖다 주는 것입니다. 희망이 주는 놀라운 능력을 우리는 늘 알고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저는 병들고 가난한 소외된 삶의 두려움에 떠는 사람들에게 십자가를 통한 희망을 언제나 주려고 하는 것입니다. 다른데 희망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돈이 있어야 희망을 줄 수 있지요. 내게 무슨 가진 게 있어야 나눌 수 있지요. 아무것도 없었는데 성경에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대속해 주신 그 은총은 나눌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희망의 소식이기 때문에 나눌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희망을 받아들이면 살아나기 때문인 것입니다. 나는 늘 사람들 만날 때마다 “나는 폐병으로 죽다가 예수 믿고 살아났습니다. 예수님이 살린다는 소식을 듣고 그것을 믿고 살아났습니다.” 그 말을 하고 끝까지 견디십시오. 버티십시오. 살아납니다. 그 희망을 가졌기 때문에 나도 살고 남도 살릴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십자가를 통한 오중복음과 삼중축복과 4차원의 영성으로 자기를 개발해서 희망을 넘치게 하면 정말 내일은 오늘보다 다음 달은 금번 달보다 명년은 금년보다 나아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환경이 좋아도 희망을 저버리면 파멸되고 마는 것입니다.

4. 좌절과 절망과 싸우라
우리는 좌절과 절망과 끊임없이 싸워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바라보고 희망적 생각을 늘 선택해야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여러분 플러스 아닙니까? 십자가는 마이너스표 아닌 것입니다. 언제나 십자가를 바라보면 십자가는 나의 생애 생명을 얻되 풍성하게 얻는 플러스다. 십자가를 바라보고 희망을 얻어야 되는 것입니다. 매일같이 한두번이 아니게 십자가를 바라보고 묵상해야 되는 것입니다. 저는 매일같이 시간만 나면 십자가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내가 절망이었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자 희망을 얻게 되었다. 왜냐, 예수님 안에서 죄가 용서받는 것을 보고 나도 용서받을 수 있는 희망을 얻었다. 예수님 안에서 거룩하게 되는 것을 보고 희망을 얻었다. 예수님이 수많은 병든 자를 살리고 고치는 것을 보고 나는 희망을 얻었다. 예수님이 굶주리고 헐벗은 사람의 저주를 대신 짊어지고 가는 것을 보니 내가 희망을 얻었다. 예수님이 죽은 자를 살리시고 영생을 주시니 희망을 얻었다. 저는 십자가를 바라보았기 때문에 내 자신이 희망을 얻었고 십자가를 바라보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희망을 말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십자가 이외에는 희망을 말할 곳이 없습니다. 그러다가 십자가를 통해서 희망을 갖고 희망을 나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쳐다보면 구체적인 꿈을 꿀 수가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바라봐야 꿈을 꿀 수가 있지 십자가를 바라보지 아니하면 꿈을 꿀 수가 없어요. 희망이 있어야 꿈을 꾸지요. 희망이 없는데 꿈을 꿀 수가 있습니까? 무슨 꿈을 꿉니까? 내가 잘 살 수 있는 꿈도 꿀 수 있고 건강해 질 수 있는 꿈도 꿀 수 있고 시집 장가갈 수 있는 꿈도 꿀 수 있고 직장을 얻을 수 있는 꿈도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꿈이 없는 백성은 망한다고 말한 것입니다. 마음속에 크고 적은 꿈을 꾸는데 꿈을 꿀 수 있는 재료가 바로 십자가인 것입니다. 왜냐, 나는 못나고 버림받은 사람이라도 하나님은 나병환자도 사랑해서 동행을 했습니다. 그런데 나도 나병환자 같은 사람이라도 주님은 나와 같이 할 수 있다는 확신을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주님 십자가는 사람을 차별대우 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바라보고 구체적인 꿈을 꾸어야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저는 이제 나이가 많지만 저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매일같이 그 십자가를 바라보고 그 꿈을 꾸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더 의와 진리와 거룩함으로 지음을 받은 새사람을 입은 삶을 살게 해달라고 꿈을 꿉니다. 항상 건강하고 치료 받아서 아픈데 없이 주님의 말씀을 증거하고 살다가 하늘나라 가게 될 꿈을 꾸고 있는 것입니다. 꿈을 꾸어야 돼요. 그것을 바라보고 꿈을 꿀 수가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밤이 어두워도 새벽은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둡다고 해서 새벽이 오는 것을 포기를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새벽을 꿈꾸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고 했으므로 어떤 어려운 일에도 주님을 바라보면 선을 이루게 된다는 것을 꿈꾸어야 되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희망을 말하십시오. 절망을 말하지 마십시오. 말 안 해도 절망이 와 있는 것입니다. 희망을 말하십시오. 그래야 절망이 물러가는 것입니다.
잠언서 18장 21절에 “죽고 사는 것이 혀의 힘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혀의 열매를 먹으리라”고 말한 것입니다.
혀를 사용하기 좋아하는 자는 그 혀의 열매를 먹습니다. 부정을 말하는 사람은 부정하게 되고 긍정을 말하는 사람은 긍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죽음을 말하는 사람은 죽음이 다가오고 삶을 말하는 사람은 삶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우리의 입술의 말은 살아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검보다 예리하다고 말했는데 우리도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에 우리 말에 힘이 있는 것입니다. 말은 살아 있습니다. 말을 하면 그 살아나가서 여러분의 환경과 운명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내가 못산다고 하면은 말이 나가서 못살도록 여러분 환경을 만듭니다. 말은 살아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하는 것을 조심해야 됩니다.
열왕기하 7장 19절로 20절에 “그 때에 이 장관이 하나님의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야훼께서 하늘에 창을 내신들 어찌 이 일이 있으랴 하매 대답하기를 네가 네 눈으로 보리라 그러나 그것을 먹지는 못하리라 하였더니 그의 장관에게 그대로 이루어졌으니 곧 백성이 성문에서 그를 밟으매 죽었더라”
이 스토리에도 보면 이 장관이 말 한마디 잘못해서 그는 먹지도 못하고 밟혀 죽었던 것입니다. 말 한마디 잘못했어요. 엘리사가 내일 이맘 때 성문밖에 밀가루와 보리가 산더미처럼 쌓이고 값싸게 팔릴 것이라고 말할 때 하늘의 하나님이 창문을 낸들 그런 일이 있을 것이냐. 그럴 수 없다고 말을 잘못했습니다. 그러니까 당장 네 눈으로 보기는 보아도 먹지는 못하리라 했는데 과연 보기는 보아도 먹지는 못한 것입니다. 말을 잘못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말을 잘한 엘리사와 그 말을 믿은 사람들은 다 살아났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끈임 없이 말을 해야 돼요. 우리는 계속해서 절망적인 환경에서도 희망을 향하여 질주해 나가야 되는 것입니다.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찾아 대해를 항해하고 있을 때, 배를 타고 망망대해를 가도 가도 눈앞에 대륙은커녕 섬 하나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일등 항해사가 콜럼버스에게 와서 "대륙은커녕 별 하나 보이지 않습니다. 선장님,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우리는 잘못하면 죽지 않겠습니까?" 그때 콜럼버스는 이렇게 소리쳤습니다. "계속 앞으로! 전 속력 전진!" 이것밖에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계속 앞으로! 계속 전진!" 이 말 한마디가 서양사의 새로운 지평을 연 중대한 분수령이 된 것입니다. 콜럼버스가 새로운 대륙을 발견한 것입니다.
아무리 좌절과 절망의 상황일지라도 우리는 절망을 버리고 희망을 생각하고 꿈꾸며, 희망의 날이 다가올 것을 믿고 말하며 끊임없이 희망을 향해 전진해 나가야 되는 것입니다.
눈에는 아무 증거 안보이고 귀에는 아무 소리 안 들리고 손에는 잡히는 것 없고 내 앞길 칠흑 같이 어두워도 희망을 향해서 나아가야 되는 것입니다. 내일은 오늘보다 다음 달은 금번 달보다 명년은 금년보다 나는 더 나아진다. 승리한다. 희망을 향하면 우리 마음속에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절망을 생각하고 절망을 말하면 마귀가 와서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같이 계시는 동안에 희망을 말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결론>
고난의 노예가 되지 말고 희망의 성공자가 되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네 사람의 한센 병자와 같이 스크럼을 짜고 희망을 향하여 걸어 나가야 되는 것입니다. 희망이 없다고 할지라도 희망을 향해서 걸어나가면 희망이 만들어 지는 것입니다. 없는 희망이 희망을 향해서 나가는 사람에게는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더구나 십자가가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는 것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은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를 쉬게 하겠다고 초청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통해서 우리에게 영혼이 잘되고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풍성히 얻게 해주려고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다른 곳에서는 하나님을 만날 수가 없습니다.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하는 자는 전능자의 그늘 아래 거한다. 전능하자는 하나님이고 은밀한 곳은 예수님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비밀인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가 모시면 하나님의 날개 속에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은 우리는 “나는 야훼를 향하여 말하기를 그는 나의 피난처요 나의 요새요 내가 의뢰하는 하나님이라 하리니 이는 그가 너를 새 사냥꾼의 올무에서와 심한 전염병에서 건지실 것임이로다 그가 너를 그의 깃으로 덮으시리니 네가 그의 날개 아래에 피하리로다 그의 진실함은 방패와 손 방패가 되시나니 너는 밤에 찾아오는 공포와 낮에 날아드는 화살과 어두울 때 퍼지는 전염병과 밝을 때 닥쳐오는 재앙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로다 천 명이 네 왼쪽에서, 만 명이 네 오른쪽에서 엎드러지나 이 재앙이 네게 가까이 하지 못하리로다”(시 91:3~7)
왜, 예수님을 바라보고 희망을 향해서 걸어가기 때문에 하나님이 같이 계시므로 이런 승리적인 삶을 살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환경을 바라보지 마십시오.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마십시오. 고개를 들어 십자가를 바라보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바라보십시오. 하나님은 죄를 짓고 불의하고 추악하여 버림을 받아야 마땅한 사람도 죄 있는 그대로 못난 그대로 빈 손든 그대로 받아 들여서 희망을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끌어안으십시오. 예수님이 여러분을 안아 주실 것입니다. 예수님을 몸에 걸머지십시오. 예수님이 여러분을 업어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여러분이 붙잡으십시오. 그러면 예수님이 여러분을 붙잡아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좌절할 수가 없습니다. 절망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을 의지하고 할 수 없는 것에서 할 수 있다고 일어나야 되는 것입니다. 죽는 자리에서 살수 있다고 일어나야 되는 것입니다. 실패에서 성공할 수 있다고 다시 재기해야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서 십자가에 못 박아 우리의 모든 죽음을 청산시켜 주셨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 세상에 가장 위대한 보배는 예수님인 것입니다. 내가 가질 수 있는 가장 큰 보물은 예수님인 것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살 수 있고, 예수님 때문에 노래할 수 있고, 예수님 때문에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같이 살면서 큰 꿈을 꾸고 큰 믿음으로 인내로 나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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