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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고전13: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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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조용기 목사 |
참고 : | 2009. 7. 26. 주일 4부 설교 |
<서론>
오늘 제가 여러분과 함께 나눌 말씀은 “사랑만이 영원하다”라는 제목입니다.
성경에는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이 중에 사랑이 제일이라고 했습니다. 왜 사랑이 제일이냐면 천국에 올라가면 믿음도 완성된 것이고 소망도 다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은 천국에 들어가자 겨우 시작하는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천국 들어가야 진실로 사랑이 무엇인지를 깨달아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본론>
1. 인간 삶의 근본적인 요소인 사랑
우리 인간의 삶의 근본적인 요소가 사랑입니다. 사랑을 받지 못하면 마음이 허해져서 세상 죄악으로 채우려고 합니다. 여러 가지 변명을 하고 이유가 있지만 세상 죄악으로 몸부림치는 사람들의 과거를 살펴보면 사랑결핍증에 걸려서 그 병이 난 것을 우리가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삶의 가장 근본적인 요구가 사랑입니다. 사랑이 있어야 참 인간의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상담 전문가인 오제은 교수는 그의 책「자기 사랑 노트」에서 중독은 상처로부터 비롯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내면의 공허함이 있을 때 사람들은 그것을 잊기 위하여 술, 약물 중독, 혹은 일중독 등의 중독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을 받지 못하니까 그 대신 중독으로써 그것을 메우려고 하는 것입니다.
심리학자 로버트 파이어스톤(Robert Firestone)은 “모든 인간의 심리는 자신의 감정적인 필요가 충족되지 못하면 다른 사람이나 특별한 경험 혹은 특정 물건 등에 크게 애착을 느끼며 그러한 것들을 통해 스스로 위로하고 고통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한 방어기제로 삼는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착각일 뿐이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사랑 대신에 여러 가지 주위 환경을 가지고 메우려고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고양이를 늘 안고 다니고 어떠한 사람은 개와 더불어 살고 이런 모든 것은 자기가 필요한 감정적 사랑을 채우지 못하기 때문에 주위 환경의 사물을 통해서 메워 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사랑을 받지 못하면 마음이 허해져서 세상 유혹에 쉽게 물들거나 세상 죄악으로 채우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은 정말 필요한 것입니다.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라는 사람들은 언제나 세상을 적대시하고 경계하는 것입니다. 마음을 좀처럼 열어 놓지 않습니다. 자랄 때 쭉 핍박을 당하고 업신여김을 당한 사람은 세상에 성장하고 난 다음에도 늘 그러한 경험을 토대로 해서 사람들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학대당한 자기의 과거의 생활을 기초로 삼아서 사람들을 향해 마음을 열지 않습니다. 본심을 나타내지 않습니다. 마음에 따뜻함을 보여주지 않는 것입니다. 이해하고 동정하는 것이 굉장히 힘듭니다. 왜냐하면 이해하고 동정한 경험이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늘 학대당한 것과 멸시당한 체험만 있지 이해를 해주고 동정을 해주고 품어준 체험이 없기 때문에 그러므로 이해와 동정을 할 수 없습니다. 아주 냉철하고 냉혹하게 되게 되는 것입니다. 비판과 빈정대는 경우가 많고 칭찬과 찬양을 하기가 좀 힘든 것입니다. 나 이외 사람을 사랑할 줄 모릅니다. 남을 받아들이고 남과 하나가 되는 이러한 일을 좀처럼 하지 못합니다. 사랑을 받지 못하고 경험하지 못한 남편이나 아내는 가정을 이루지 못합니다. 항상 그 마음속에 열등의식과 좌절감으로 몸부림을 치고 고통을 당하기 때문에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 알지를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켄터키 루이빌 의과대학 병원에 22세 된 환자가 입원을 했는데, 위장이 심하게 망가져서 위 절제 수술을 했습니다. 그런데 10개월 후에 다시 재입원해서 또 위장을 잘라냈습니다. 그 다음에 또 다시 와서 세 번째로 위장을 잘라낼 수밖에 없는 그런 처지에 있자 외과 의사들은 “외과적으로 고칠 병이 아니다.” 그래서 정신과 병원을 이 사람을 돌렸습니다. 정신과 전문의의 진찰을 받게 했는데 정신과의 치료를 하면서 그의 위장이 이처럼 망가지게 된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의 부모님은 그가 6살 때 이혼하고 그를 다른 집에 양자로 보냈습니다. 그러나 양부모는 그를 심하게 학대하며 고통을 주었습니다. 그 양부모의 학대와 고통이 심해질수록 이 어린 아이는 자기 부모에 대해서 깊은 감정을 가졌습니다. 나이가 좀 자라자 가슴속에 칼을 품고 다니면서 부모를 만약 길거리에서 만나면 찔러 죽이겠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렇게 분노하며 복수의 원한을 품고 10여 년의 세월이 흐르자 그만 위장이 망가지고 만 것입니다. 오늘날 의사들은 질병의 80%가 마음에서 온다고 말한 것입니다. 병원에서는 수소문하여 그 부모를 찾았으나 아버지는 이미 세상을 뜨고 말았고 겨우 어머니만 찾을 수 있었습니다. 어머니를 아들의 병실로 안내하니 어머니가 아들에게 눈물로 용서를 구했습니다. 처음에는 어머니에게 눈길을 주지 않고 외면하던 이 청년은 사흘이 지났을 때 어머니 가슴에 얼굴을 묻고 하염없이 며칠간을 말도 못하고 울기만 했습니다. 그리고 이 어머니와 이야기를 나누고 사랑을 나누었습니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두 번이나 위를 절제하고 세 번째 절제하려던 위장이 감쪽같이 나아버리고 만 것입니다. 건강을 회복한 것입니다. 사람이 사랑 받지 못하고 자랄 때 그 마음에 미움과 원한이 쌓여 세상을 적대시하고 경계하게 되고 급기야 육신의 병까지 얻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과학자들이 원숭이로 사랑의 힘을 실험한 결과를 읽어본 적이 있습니다. 과학자들은 한 원숭이를 태어나자마자 어미 품에서 떼어 내어서 금속으로 만든 원숭이에게 털을 입혀 놓고 어머니처럼 새끼 원숭이 방에 넣어 놓았습니다. 새끼 원숭이가 아무리 매달려도 아무 반응이 없고 감정이 없고 차디찬 어미인 것입니다. 그 다음에 이 새끼가 자라서 어미가 되었습니다. 자기 새끼를 낳았는데 새끼에 대한 사랑을 할 줄 모릅니다. 새끼가 근처에 오면 발로 차버리고 젖가슴에 매달리면 물어 찢고 새끼를 기르지 못합니다.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라난 원숭이는 역시 자기 새끼를 낳았어도 어떻게 새끼를 사랑할 줄을 모르는 것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사랑은 사람뿐 아니라 짐승에게도 큰 영향을 줍니다. 사랑받지 못하고 자란 사람은 이해하고 동정하는 것이 힘들고 자신 이외의 사람을 사랑할 줄 모릅니다. 그러나 사랑을 받고 자라난 사람은 언제나 마음 문을 열고 마음에 여유가 있습니다. 내가 부모님께 사랑을 받고 주위의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적대감정이 없습니다. 마음이 넓고 환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유 있게 사람들과 대화를 하고 생활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긍정적인 삶의 자세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비평과 비난으로 보지 않고 긍정적이고 적극적으로 사물을 대할 수 있는 마음의 태도를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웃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 사랑 받고 사랑 주는 것이 그에게는 생활의 통상이 되어 있기 때문에 이웃을 쉽게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참된 행복이 무엇인지도 깨달아 알고 있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5장 1절로 2절에 “그러므로 사랑을 받는 자녀 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사랑가운데서 행하려고 하면 사랑을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사랑을 받지 못했으면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사랑을 마음속에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악한 사람, 깡패들, 중독자들이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고 난 다음 그 인격이 완전히 달라진 것을 우리는 많이 보고 간증도 듣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이 사람을 사람 되게 만들어주고 사람을 변화시켜 주는 것입니다.
몇 해 전에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책으로 많은 사람들이 칭찬의 중요성을 인식시킨 저자가 있었습니다. 캘리포니아의 오렌지 재배 농장에서 농사짓는 사람들에 의하면 오렌지를 심어 놓고 매일 아침 밭을 지나갈 때마다 “오렌지나무야~ 내가 너를 사랑한다. 너 참 예쁘다. 너 잘 자란다. 정말 정말 고맙다.”이렇게 칭찬을 해주면 오렌지가 벌레도 안 먹고 맛도 있고 잘 자란다는 것입니다. 나무도 사랑해주고 칭찬해 주면 잘 자라고 열매도 잘 맺는다는 것입니다. 칭찬은 짐승도 춤추게 하고 식물도 잘 자라게 하는데, 하물며 사람은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항상 내가 사랑받고 있는가를 생각해 보아야 되는 것입니다.
2. 당신은 지금 사랑받고 있는가?
오늘 여러분은 사랑을 받고 있습니까? 남편에게 아내에게 자식에게 형제나 이웃에게 사랑 받고 있습니까? 모든 사람은 사랑을 받고 인정을 받기를 원합니다. 사랑을 받지 못하고 인정을 받지 못하면 삶은 황무지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사랑은 조건이 붙으면 사랑이 아닙니다. 이렇게 이렇게 하기 때문에 사랑한다. 그러면 그것은 사랑이 아닌 것입니다. 우리는 부부의 사랑도 골로새서 3장 18절로 19절에 “아내들아 남편에게 복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마땅하니라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며 괴롭게 하지 말라”고 말한 것입니다.
사랑은 조건이 없습니다. 기네스북에 ‘세계 최 장수 부부’로 기록된 영국인 퍼시 애로스미스(105세)와 플로렌스(100세) 부부의 이야기가 화제가 된 적이 있습니다. 플로렌스는 교회학교 교사로 마을의 작은 교회에서 결혼을 했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80년 동안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사람들이 “어떻게 오랜 세월 행복하게 살 수 있었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남편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전 아내에게 늘 ‘사랑해요’라고 말했지요.” 그 아내는 말하기를 “전 남편에게 늘 ‘여보, 미안해요’라고 말했지요.” 사랑해요. 미안해요 그것을 매일같이 말했는데 그것이 그들로 하여금 장수하고 행복하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이 부부는 평생 서로에게 따뜻한 관심을 가지고 배려하며 살았습니다. 그리고 화가 났을 때는 아무리 다퉜더라도 사랑으로 용서하고 새로운 날을 맞이했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사랑과 인정받기를 원합니다. 특별히 부부는 상대로부터 인정받고 사랑받기를 원합니다. 이런 건강한 부부생활이 장수의 복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만히 보면 부부간에 여간해서 딱 맞는 부부가 별로 없습니다. 제가 50년 동안 목회하면서 우리 성도들을 살펴보면 천생연분인 사람 별로 없어요. 후생연분이 많아요. 그러므로 조건이 많습니다. 내가 가만히 보면 어떤 부인은 어머니 같은 부인이 있습니다. 남편을 자식처럼 돌보아 주는 그런 부인도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가정교사와 같은 부인도 있습니다. 남편에게 늘 꾸중하고 잔소리하고 간섭하는 가정교사와 같은 부인도 있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투정하는 아내가 있습니다. 투정하고 늘 불평하고 남편만 만나면 불평하고 원망하고 투정하는 부인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유부인이 있어요. 아예 책임 없이 집안 살림은 엉망으로 내버려 두고 밥만 먹으면 밖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자유부인입니다. 그 다음에는 목석같은 부인이 있어요. 남편이 나가면 나갔는가보다. 들어오면 들어 왔나보다. 있으면 있는가 보다. 없으면 없는가보다. 아무 반응이 없어요. 목석같은 그런 부인도 있는 것입니다. 그런가하면 남편도 아버지 같은 남편이 있어요. 참 부인을 아버지가 딸을 사랑하는 것처럼 돌보아주고 사랑하고 용서하고 관용하는 아버지 같은 그러한 남편이 있는가하면 초등학교 교장 선생님 같은 남편이 있어요. 늘 아내를 꾸짖고 교훈하고 가르치려고 하는 남편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불평 많은 남편, 들어오면 부인에게 한시도 쉬지 않고 불평하고 원망하는 그런 남편이 있습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책임 없는 남편입니다. 집안이 어떻게 되든 책임하지 않습니다. 자기만 잘 먹고 밖에 나가서 잘 입고 잘 살면 되지 집은 돼지소굴이 되어도 관심을 안 갖는 남편도 있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벙어리 남편이 있는 것입니다. 집에 들어와서 두 마디 밖에 말 안합니다. “밥 줘, 자자!” 부인이 무슨 말을 해도 대꾸하지 않습니다. 밥 줘! 자자!가 꼭 그분이 하루 하는 말입니다. 이 실제로 서대문에 있을 때 우리 권사님이 하루 제게 찾아와서 “이제 목사님 우리 남편하고 이혼해도 되겠지요? 자식들 다 길러서 마지막 시집, 장가보냈으니까 이제는 이혼하렵니다.” “아니 여태까지 자식 놓고 잘 살았는데 갑자기 이혼 하다니 무슨 그런 말을 하십니까?” 하니까 “우리 남편하고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이 시간 동안 하루에 두 마디 밖에 못 듣습니다. 밥 줘! 자자! 이런 남편하고 내가 자식 때문에 살았는데 자식들 다 내어 보냈으니 이제 나도 속시원하게 말하는 사람하고 만나서 살아봐야 되겠습니다.” 정말 안하면 답답하지요. 왜, 부부의 의사소통이 안 되느냐. 대게 부부간에 서로 대화를 할 때, 부인은 손짓 발짓하며 열심히 이야기를 하는데, 남편은 텔레비전 바라보고 멍하게 있고 신문 보거나 고개만 끄덕끄덕 합니다. 그러면 부인은 무시당하는 것 같은 감정이 생겨서 더 열을 내고 말하면 더 남편은 대답이 없는 것입니다. 왜 상대방의 신경을 곤두세우게 하고 무시하는 태도를 취하느냐 하면은 언어 연구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어른의 경우, 남성은 하루 평균 1만 2천 500 단어를 사용하는 반면, 여성은 그 두 배가 되는 2만 5천 단어를 사용한다는 것입니다. 남편은 1만 2천 500 단어 사용하면 할 말 다 했어요. 그런데 부인은 2만 5천단어가 사용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남자들은 직장에서 이미 1만 2천 500 단어를 다 사용하고 집에 오기 때문에 집에 와서는 거의 벙어리가 되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하지만 아내는 2만 5천여의 단어를 하루 종일 묵혀두었다가 남편이 오면 일시에 쏟아냅니다. 그러니 부부간의 대화에 문제가 생기는 것은 당연합니다. 남편은 신문을 보거나 텔레비전 앞에서 그저 조용히 쉬기를 원하는데, 아내는 끊임없이 2만 5천 단어를 다 말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남편이 자신과 같이 반응해 주기를 기대하지만 기대 한 대로 반응을 안 해주니까 결국에는 나를 무시한다. 멸시한다. 못살겠다. 충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벙어리 같은 남편 앞에 끊임없이 말하고 싶어 하는 부인은 딱딱 거리며 충돌만 할 뿐 서로 간에 애틋한 관심을 표현할 줄 모르는 것이 오늘날 우리의 삶인 것입니다. 우리는 부부간의 사랑도 조건을 붙이지 말아야 되는 것입니다. 무조건 사랑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변화 시켜서 이렇게 변화되면 사랑하겠다고 하면 절대로 변화 못시킵니다. 남편이 아내 변화 못시키고 아내가 남편 변화 못시키는 것입니다. 무조건 하고 사랑해줘야 되는 것입니다. 변화는 하나님이 하시지 사람이 변화 시키지 못하는 것입니다. 무조건 사랑하고 기도해주면 하나님이 변화시켜 주는 것입니다. 또 우리가 자식을 기르니까 자식과 같이 있으니 자식을 사랑해주지 않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자식을 사랑할 줄 모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식들이 부모의 사랑을 느끼지 못하고 외톨이가 되어서 삐뚤어진 마음을 가지고서 집을 떠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식을 사랑하는 사람은 많이 어릴 때 안아줘야 되는 것입니다. 이 스킨십이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안아주고 뺨을 비벼주는 것은 자녀들의 마음속에 정말 사랑하고 있다는 확신을 얻게 해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떠한 일이 있어도 될 수만 있으면 비평하지 말고 칭찬을 해 주는 게 좋습니다. 잘한다고 박수쳐 주고 칭찬을 해주면 좋습니다. 나는 책에 보니까 미국의 아주 유명한 인물이던 한 부인이 자기가 자랄 때 아버지의 사랑을 결코 잊을 수가 없어서 그 마음속에 사랑의 감동을 지금도 주고 있다고 글을 적었는데 거기에 보니까 자기가 고등학교 때 코에 여드름이 크게 나서 남학생들이 조롱을 하고 손가락질을 했습니다. 그가 울면서 아버지에게 오니까 아버지가 품에 안아 주시면서 “야~ 너 예쁘구나. 그렇지 않아도 예쁜 얼굴에 빨간 여드름까지 났으니까 더 예쁘구나! 아~ 너 정말 예쁘다. 우리 딸 제일이다.” 아버지야 지어서 한 말이라도 그것이 그 여자에게는 굉장한 마음의 위로를 주었어요. 우리 아버지가 나를 사랑하는구나! 그래서 나중에 시집을 가서 사회적으로 출세해서 훌륭한 자리에 올라가서도 어릴 때 그 아버지의 그 칭찬 한마디가 결코 잊어지지 않는다고 말한 것입니다. 우리는 자녀들을 칭찬해주고 인정해 주지 무시하지 말아야 되는 것입니다. 자녀들을 무시하면 평생에 그것이 마음에 잊어지지 않습니다. 나는 우리 아버지 어머니를 사랑하지만 아버지에 대해서 생각만 하면 언제나 한 가지 떠오르는 것이 있습니다. 여름에 학교 대항 야구시합을 했는데 동래중학교가 야구시합에서 이겼습니다. 너무 내가 기분이 좋아서 집에 오니까 아버님이 이웃 사람들과 앉아서 마루에서 이야기를 하고 계시는데 내가 “아버지 아버지, 오늘 야구 시합에 우리 동래중학교가 이겼습니다.” 하나니까 “시끄럽다. 어른들 이야기 하는데 잡소리 하지마!” 얼마나 마음에 섭섭하고 충격을 받았던지 그것이 70이 넘은 오늘날도 내 마음속에 생각이 나는 것입니다. 우리 아버지만 생각하면 그 일이 마음에 사라지지 않습니다. 절대로 어릴 때 어린 아이들을 무시하거나 인정해 주지 않는 비평의 말을 안 하는 것이 좋습니다.
에베소서 6장 4절에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린아이하고 친구가 되어줘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 시대에는 어른이 어린아이하고 친구가 되면 면구스럽다. 부끄럽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어른은 어른답게 있어야 되고 애들은 애들답게 있어야지 어른과 애들이 친구처럼 다정하게 지낼 수 없었습니다. 사회적인 유교적인 관습이 그렇게 된 것입니다. 오늘날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날은 어린아이는 부모와 친구처럼 형제처럼 지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친구가 되어주는 것이 어린 아이들을 잘 성장하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저는 이렇게 말하는 어느 아버지의 글을 본 적이 있습니다.
“나는 자녀들이 어릴 때부터 자주 안아주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나에게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를 늘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딸아이를 안고 재우면서 여러 가지 재미있는 동화를 들려주곤 했습니다. 그런데 딸아이가 사춘기가 되었을 때, 나는 걱정이 되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딸들이 사춘기가 되면 짜증을 많이 내고 부모를 싫어한다. 쾅 문을 닫고 자기 방에 들어가서 틀어박혀 있고 안 나온다. 그런 이야기를 듣고 우리 딸들이 그렇게 되면 어찌할꼬 굉장히 겁을 먹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행히도 저에게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키가 엄마보다 더 커진 딸아이는 여전히 나에게 안기는 것을 좋아하며, 학교가 끝나고 집에 오면 환호성을 지르며 나에게 달려왔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하루 종일 겪었던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럴 때면 나는 행복에 잠겨서 새삼 깨닫는 것이 있습니다. ‘사랑은 심고 거두는 것이구나. 어릴 때부터 내가 사랑해주고 스킨십을 해주고 품어준 그 딸이 장성해도 역시 아버지를 사랑하고 아버지 품에 안기기를 원하는 것이구나! 그것을 느꼈다는 것입니다. 어릴 때부터 자녀를 많이 안아주고 칭찬해 주며 많은 대화를 나눌 때 자식은 밝고 건강하게 잘 장성하는 것입니다.
아버지학교 운동본부의 국제운동본부장인 김성묵 장로는「좋은 아빠 되기 프로젝트」라는 책에서 좋은 아버지가 되는 방법 중의 하나로 ‘사랑을 표현해야 한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을 표현하는 방법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첫째, 사랑한다고 말하라. 어린 아이에게 아빠 엄마가 너를 사랑한다. 이 말을 거듭거듭 말을 해주라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자식에게 사랑을 표현하는 것을 낯간지럽게 생각하며 필요이상의 말을 하지 않는 것을 아버지의 권위를 상징한다는 것은 옛날 6.25시절의 전통인 것입니다. 한 조사에 의하면 청소년의 50%가 부모에게 “아직도 저를 사랑하세요?”라고 물어 보고 싶어 한다고 말했었습니다.
둘째, 축복기도를 해주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도를 하면서 평소에 자식에 대해 갖고 있던 생각이나 잘못된 점을 가르치려고 하지 말라고 합니다. 기도를 교훈적인 기도를 하지 말고 진실한 축복의 기도를 해주라는 것입니다.
셋째, 많이 안아주라는 것입니다. 미국에서 조사한 결과 가출 소녀의 90% 이상이 아버지와의 접촉 결핍증 환자이며, 미혼모의 70% 이상이 아버지의 부재 속에서 성장한 여성임이 밝혀졌습니다.
특별히 여자아이는 야단을 맞으면 마음의 상처를 쉽게 받아 부모를 향해 마음 문을 닫게 되는데, 이럴 때 남자아이의 유혹에 더욱 쉽게 무너진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넷째, 문자메시지 보내기 입니다. 대화는 서로 간에 얼굴을 맞대고 하는 것이 가장 좋지만 최근에는 문자 메시지도 대화 창구가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랑한다고 자주 말하며, 자녀를 위해 축복기도를 해주고, 많이 안아주어 스킨십을 자주하며, 문자 메시지를 통해서도 대화할 때, 자녀는 부모의 사랑을 듬뿍 받아 안정적인 신체적인 정신적 발달을 이룰 수가 있는 것입니다. 잘 먹여 준다고 자식 잘 기르는 것도 아니고 옷 잘 입혀 준다고 자식 잘 기르는 것이 아닙니다. 자식과의 사랑이 있어야 사랑이 근본적인 인격을 성장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영적인 정신적인 영양소가 사랑인 것입니다. 또 그뿐 아니라 우리는 같이 사니까 이웃을 사랑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웃이 항상 곁에 있는데 이웃을 무시하고 살수 없는 것입니다. 이웃을 어떻게 사랑해야 할까요?
마가복음 12장 31절에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요한복음 13장 34절로 35절에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고 말한 것입니다.
더구나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은 이웃을 사랑하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웃을 어떻게 사랑합니까? 이웃을 청해놓고 늘 대접을 해야 사랑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은 허물을 덮어 주라는 것입니다. 사람만 만나면 손가락질 하고 귀에 소근 대고 이웃의 허물을 말하면 이웃을 미워하고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웃에 허물이 있어도 눈감고 허물을 덮어주는 것이 사랑인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4장 8절에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허다한 죄를 밝히는 것이 아니라 덮어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랑인 것입니다. 사랑한다고 하면서 자꾸 이웃의 죄를 들춰내면 원수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잠언서 10장 12절에 “미움은 다툼을 일으켜도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느니라”
사랑은 허물을 가려주고 죄를 덮어주는 것이 사랑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웃이 어려울 때 도와줘야 되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3장 17절로 18절에 “누가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우리가 사랑과 행복나누기 운동을 하는데 이것이 바로 진실로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웃이 고통당할 때 함께 고통을 나누고 이웃이 어려움 당할 때 어려움을 나누어 주는 것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항상 긍정적인 교제를 하라는 것입니다. 이웃 사람하고 기쁘고 좋은 말을 하고 서로 비평하고 비난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로마서 15장 2절에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지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웃을 만날 때 반가워 해주라는 것입니다. 언제나 이웃을 만날 때 입술이 쳐져서...
그러면 이웃 사람이 보면 ‘저 사람이 나를 미워하는구나. 저 사람 만나면 인상이 나쁘다.’ 아주 마음이 고약합니다. 그러나 언제나 얼굴을 치켜 있으면 언제나 만나면 얼굴을 치켜 있으면 ‘아~ 저 사람은 나를 사랑하는구나.’ 당장 그렇게 느낍니다. 우리는 항상 이웃을 보면 인상을 쳐다보잖아요. 인상이 찌그러지고 입술이 밑으로 쳐져 있으면 무슨 말을 해도 진실로 들리지 않고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항상 웃으면 이웃 사람이 자기를 좋아하고 사랑하는 줄 알고 있는 것입니다. 만날 때마다 반가워해줘야 돼요. 뭐 벌써 한번 만났는데 또 무슨 반가워지느냐. 아침에 만났어도 점심에 만날 때도 또 반가워지고 저녁에 만날 때도 반가워 해주면 그것이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 12장 15절로 16절에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서로 마음을 같이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하지 말라”고 말한 것입니다.
잘한 일은 감사하고 높이 칭찬해 줘야 되는 것입니다. 이웃이 잘한 일이 있어서 혹시 신문에 나왔는지 방송에 나왔으면 찾아가서라도 칭찬하고 아주 높여줘야 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0장 24절에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고 한 것입니다.
잘한 것은 잘했다고 칭찬하고 박수를 해주는 것이 좋습니다. 못하는 것은 그냥 덮어주고 잘한 것은 칭찬해주고 그것이 우리가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현대 사회에서 사람들은 물질을 최고 가치로 추구하므로 진정한 친구를 얻기가 참으로 어렵습니다. 대부분 자기의 이익을 위해 잠시 좋은 관계를 맺어 보려고 하지만 이런 관계는 진정한 친구 혹은 진실한 이웃이라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런던 타임즈”가 “참 친구란 무엇인가?”라는 정의를 현상 모집한 적이 있다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참가했는데, 그 가운데 가장 우수한 것 세 가지를 뽑아서 상을 주었습니다.
첫 번째로는 “친구는 온 세상과 모든 사람이 다 나를 버릴 때 찾아와 주는 사람이다.” 참된 친구는 온 세상이 다 날 버리고 등을 돌릴 때 그때 날 찾아와 주는 것입니다. 다 날 좋아할 때 찾아오는 것은 누구든지 할 수 있지요. 내가 가장 외롭고 괴롭고 슬플 때 버림받았을 때 찾아와 주는 친구 정말 진짜 친구요, 귀한 친구인 것입니다.
두 번째 “친구는 너무 괴로워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침묵할 때에 그것까지 이해해 주는 사람이다.”너무나 고통스러워서 내가 말을 하지 못하고 앉아 있을 때 친구도 곁에 와서 아무 말도 안하고 같이 앉아 손만 잡아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도 이미 그 마음을 압니다.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욥의 친구같이 와서 온갖 험담을 다하면 그것은 친구가 아닌 것입니다.
세 번째 “내가 기쁜 마음을 가지고 만나면 기쁜 마음이 배가되고, 고통스러울 때 만나면 고통이 반으로 감해지는 사람이 진정한 친구이다.”는 것입니다. 친구를 만나도 아무 변화가 없으면 안돼요. 내가 그 친구만 만나면 내 기쁨이 배가 되고 내 슬픔이 반으로 줄어든다. 그러한 친구가 참 진실한 친구가 된다는 것입니다. 진실한 이웃 사랑은 이러한 친구여야 하는 것입니다. 늘 허물을 덮어주고 어려울 때 도와주며 위로해 주어야 진정한 친구가 되는 것입니다.
<결론>
모든 삶의 뿌리는 사랑에 있습니다. 무슨 말을 해도 사랑이 그 뿌리가 되는 것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돈이나 지위나 명예나 권세나 세상 것이 위로가 되지 않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갈릴리 해변에서 제자들과 조찬을 하시고 수제자인 베드로에게 근본적인 질문을 했습니다. 주님이 수제자 베드로에게 이 질문을 하고 세상을 떠났던 것입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이 사람들보다 더 사랑하느냐?” 그때 사용한 사랑이 아가페입니다. 무조건 사랑하는 사랑인 것입니다. 그럴 때 베드로가 말하기를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때 사랑은 필레오입니다. 친구의 사랑인 것입니다. 주님은 “네가 나를 아가페(무조건) 사랑하느냐?” 베드로는 “친구로 사랑합니다.” 왜냐하면 무조건 사랑한다고 큰소리 했다가 예수님을 세 번이나 배반했거든. 이제 자신이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내 어린 양을 먹이라” 그 다음 잠시 있다가 또 주님께서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아가페 사랑을 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니 베드로가 “내가 주님을 필레오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아가페 한다고 말 못합니다. 무조건 사랑은 못하고 그저 친구로 사랑합니다. 그러니 주님이 “내 양을 치라” 그 다음 잠시 있다가 예수님이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친구로 사랑하느냐?” 필레오로 사랑하느냐? 그만 가슴이 덜컹 내려앉습니다. 또 친구로 사랑한다고 했는데 이러다가 배반할 줄 어떻게 아느냐? 그래서 눈물어린 목소리로 “내가 주님을 친구로 사랑하는 줄 주님이 알지 않습니까? 나는 모르겠어요. 이 말 해놓고 난 다음 또 배반할지 내가 어떻게 압니까?” “내 양을 먹이라” 주님께서는 시몬 베드로에게 다른 질문 안했습니다. 내가 3년 동안 나를 따라 다니면서 잘 배웠느냐? 훌륭한 교훈을 배웠느냐? 훌륭한 제자가 되겠느냐? 그런 것을 묻지 않았습니다. 마지막 날 때 “네가 날 사랑하느냐?” 세 번 다짐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하면 “내 양을 먹이라”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사랑을 가지고 하면 사명감을 다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우리에게 사명감을 주고 무슨 일이든지 열심히 하게 하려면 사랑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사랑은 모든 수고를 감내하는 것입니다. 어떠한 고통도 견딜 수가 있는 것입니다. 사랑은 진실로 자기에 맡겨준 일을 다 할 수 있는 능력을 허락해 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믿음, 소망, 사랑 세 가지가 늘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사랑이 제일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사실 맞아요. 사랑이 제일입니다. 사랑만 있으면 살아 나갈 수가 있어요. 사랑이 없으면 모든 것은 살아 나갈 수 있는 원천이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사랑을 사람 속에서 발견하기가 힘듭니다. 너무나 각박한 세상 속에 서로를 이용하고 서로를 속이고 미워하고 하기 때문에 사랑을 발견할 수 없어요. 인류 역사 이후에 늘 사람들은 물고 찢고 싸우고 전쟁하며 살았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 참 사랑을 발견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얼마나 사랑했습니까?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으리라.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대신하여 죄와 불의, 추악과 저주, 절망과 죽음을 걸머지고 몸 찢고 피 흘려주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변할 수가 없고 우리에 대한 예수님의 사랑은 변할 수가 없는 것은 사랑의 대가를 너무나 크게 지불했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렇게 크게 투자를 하고 난 다음에 그 사랑을 버릴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오늘날 우리가 죄를 짓고 불의하고 추악하고 버림을 당해야 마땅하고 사람들에게 다 질시를 당해도 하나님은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사랑하고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은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를 쉬게 하겠다고 말씀한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자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항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찾고 그 사랑 가운데서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사랑으로써 아내를 사랑하고 하나님의 사랑으로써 남편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사랑으로써 자식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사랑으로써 이웃을 사랑하면 우리가 참 행복한 인생을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사랑의 기본이 하나님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사랑을 마음속에 받지 못한 사람의 사랑은 대게 다 거짓 사랑이요, 얼마 있지 않다가 식어져 버리고 없어질 사랑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기본한 사랑만이 영원한 것입니다. 그것은 이 땅에서 천국까지 또 영원히 계속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사랑은 예수 안에서 받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이 사랑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찾아와서 우리 마음 문을 두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주의 음성을 듣고 마음 문을 열기만 하면 예수님은 그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을 가지고 우리 마음속에 들어오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신앙생활을 하면 세월이 흘러 갈수록 그리스도의 사랑을 더 마음속 깊이 느낍니다. 처음에는 별로 깊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느끼지 못하다가도 세월이 흘러가면 정말 주님이 나를 사랑하시는구나. 그리스도의 사랑이 마음을 저리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그리스도의 사랑이 나로 하여금 살아갈 수 있는 용기와 힘을 주고 행복을 주는 것입니다. 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아버지의 사랑이 여러분에게 넘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사랑이 많으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사랑이 제일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아버지 하나님 안에 잇는 그리스도의 사랑, 그리스도 안에 있는 아버지의 사랑 이 사랑을 우리가 가슴속에 받아들이면 우리가 정말로 사랑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가슴속에 받아들이지 않고는 사랑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는 힘이 없습니다. 인간의 사랑은 다 말라 버리고 변화되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 아버지여 오늘 원하오니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속에 넘치게 하여 주시옵시고 이 사랑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을 사랑할 수 있는 힘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오늘 제가 여러분과 함께 나눌 말씀은 “사랑만이 영원하다”라는 제목입니다.
성경에는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이 중에 사랑이 제일이라고 했습니다. 왜 사랑이 제일이냐면 천국에 올라가면 믿음도 완성된 것이고 소망도 다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은 천국에 들어가자 겨우 시작하는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천국 들어가야 진실로 사랑이 무엇인지를 깨달아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본론>
1. 인간 삶의 근본적인 요소인 사랑
우리 인간의 삶의 근본적인 요소가 사랑입니다. 사랑을 받지 못하면 마음이 허해져서 세상 죄악으로 채우려고 합니다. 여러 가지 변명을 하고 이유가 있지만 세상 죄악으로 몸부림치는 사람들의 과거를 살펴보면 사랑결핍증에 걸려서 그 병이 난 것을 우리가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삶의 가장 근본적인 요구가 사랑입니다. 사랑이 있어야 참 인간의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상담 전문가인 오제은 교수는 그의 책「자기 사랑 노트」에서 중독은 상처로부터 비롯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내면의 공허함이 있을 때 사람들은 그것을 잊기 위하여 술, 약물 중독, 혹은 일중독 등의 중독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을 받지 못하니까 그 대신 중독으로써 그것을 메우려고 하는 것입니다.
심리학자 로버트 파이어스톤(Robert Firestone)은 “모든 인간의 심리는 자신의 감정적인 필요가 충족되지 못하면 다른 사람이나 특별한 경험 혹은 특정 물건 등에 크게 애착을 느끼며 그러한 것들을 통해 스스로 위로하고 고통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한 방어기제로 삼는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착각일 뿐이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사랑 대신에 여러 가지 주위 환경을 가지고 메우려고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고양이를 늘 안고 다니고 어떠한 사람은 개와 더불어 살고 이런 모든 것은 자기가 필요한 감정적 사랑을 채우지 못하기 때문에 주위 환경의 사물을 통해서 메워 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사랑을 받지 못하면 마음이 허해져서 세상 유혹에 쉽게 물들거나 세상 죄악으로 채우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은 정말 필요한 것입니다.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라는 사람들은 언제나 세상을 적대시하고 경계하는 것입니다. 마음을 좀처럼 열어 놓지 않습니다. 자랄 때 쭉 핍박을 당하고 업신여김을 당한 사람은 세상에 성장하고 난 다음에도 늘 그러한 경험을 토대로 해서 사람들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학대당한 자기의 과거의 생활을 기초로 삼아서 사람들을 향해 마음을 열지 않습니다. 본심을 나타내지 않습니다. 마음에 따뜻함을 보여주지 않는 것입니다. 이해하고 동정하는 것이 굉장히 힘듭니다. 왜냐하면 이해하고 동정한 경험이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늘 학대당한 것과 멸시당한 체험만 있지 이해를 해주고 동정을 해주고 품어준 체험이 없기 때문에 그러므로 이해와 동정을 할 수 없습니다. 아주 냉철하고 냉혹하게 되게 되는 것입니다. 비판과 빈정대는 경우가 많고 칭찬과 찬양을 하기가 좀 힘든 것입니다. 나 이외 사람을 사랑할 줄 모릅니다. 남을 받아들이고 남과 하나가 되는 이러한 일을 좀처럼 하지 못합니다. 사랑을 받지 못하고 경험하지 못한 남편이나 아내는 가정을 이루지 못합니다. 항상 그 마음속에 열등의식과 좌절감으로 몸부림을 치고 고통을 당하기 때문에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 알지를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켄터키 루이빌 의과대학 병원에 22세 된 환자가 입원을 했는데, 위장이 심하게 망가져서 위 절제 수술을 했습니다. 그런데 10개월 후에 다시 재입원해서 또 위장을 잘라냈습니다. 그 다음에 또 다시 와서 세 번째로 위장을 잘라낼 수밖에 없는 그런 처지에 있자 외과 의사들은 “외과적으로 고칠 병이 아니다.” 그래서 정신과 병원을 이 사람을 돌렸습니다. 정신과 전문의의 진찰을 받게 했는데 정신과의 치료를 하면서 그의 위장이 이처럼 망가지게 된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의 부모님은 그가 6살 때 이혼하고 그를 다른 집에 양자로 보냈습니다. 그러나 양부모는 그를 심하게 학대하며 고통을 주었습니다. 그 양부모의 학대와 고통이 심해질수록 이 어린 아이는 자기 부모에 대해서 깊은 감정을 가졌습니다. 나이가 좀 자라자 가슴속에 칼을 품고 다니면서 부모를 만약 길거리에서 만나면 찔러 죽이겠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렇게 분노하며 복수의 원한을 품고 10여 년의 세월이 흐르자 그만 위장이 망가지고 만 것입니다. 오늘날 의사들은 질병의 80%가 마음에서 온다고 말한 것입니다. 병원에서는 수소문하여 그 부모를 찾았으나 아버지는 이미 세상을 뜨고 말았고 겨우 어머니만 찾을 수 있었습니다. 어머니를 아들의 병실로 안내하니 어머니가 아들에게 눈물로 용서를 구했습니다. 처음에는 어머니에게 눈길을 주지 않고 외면하던 이 청년은 사흘이 지났을 때 어머니 가슴에 얼굴을 묻고 하염없이 며칠간을 말도 못하고 울기만 했습니다. 그리고 이 어머니와 이야기를 나누고 사랑을 나누었습니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두 번이나 위를 절제하고 세 번째 절제하려던 위장이 감쪽같이 나아버리고 만 것입니다. 건강을 회복한 것입니다. 사람이 사랑 받지 못하고 자랄 때 그 마음에 미움과 원한이 쌓여 세상을 적대시하고 경계하게 되고 급기야 육신의 병까지 얻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과학자들이 원숭이로 사랑의 힘을 실험한 결과를 읽어본 적이 있습니다. 과학자들은 한 원숭이를 태어나자마자 어미 품에서 떼어 내어서 금속으로 만든 원숭이에게 털을 입혀 놓고 어머니처럼 새끼 원숭이 방에 넣어 놓았습니다. 새끼 원숭이가 아무리 매달려도 아무 반응이 없고 감정이 없고 차디찬 어미인 것입니다. 그 다음에 이 새끼가 자라서 어미가 되었습니다. 자기 새끼를 낳았는데 새끼에 대한 사랑을 할 줄 모릅니다. 새끼가 근처에 오면 발로 차버리고 젖가슴에 매달리면 물어 찢고 새끼를 기르지 못합니다.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라난 원숭이는 역시 자기 새끼를 낳았어도 어떻게 새끼를 사랑할 줄을 모르는 것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사랑은 사람뿐 아니라 짐승에게도 큰 영향을 줍니다. 사랑받지 못하고 자란 사람은 이해하고 동정하는 것이 힘들고 자신 이외의 사람을 사랑할 줄 모릅니다. 그러나 사랑을 받고 자라난 사람은 언제나 마음 문을 열고 마음에 여유가 있습니다. 내가 부모님께 사랑을 받고 주위의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적대감정이 없습니다. 마음이 넓고 환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유 있게 사람들과 대화를 하고 생활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긍정적인 삶의 자세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비평과 비난으로 보지 않고 긍정적이고 적극적으로 사물을 대할 수 있는 마음의 태도를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웃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 사랑 받고 사랑 주는 것이 그에게는 생활의 통상이 되어 있기 때문에 이웃을 쉽게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참된 행복이 무엇인지도 깨달아 알고 있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5장 1절로 2절에 “그러므로 사랑을 받는 자녀 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사랑가운데서 행하려고 하면 사랑을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사랑을 받지 못했으면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사랑을 마음속에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악한 사람, 깡패들, 중독자들이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고 난 다음 그 인격이 완전히 달라진 것을 우리는 많이 보고 간증도 듣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이 사람을 사람 되게 만들어주고 사람을 변화시켜 주는 것입니다.
몇 해 전에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책으로 많은 사람들이 칭찬의 중요성을 인식시킨 저자가 있었습니다. 캘리포니아의 오렌지 재배 농장에서 농사짓는 사람들에 의하면 오렌지를 심어 놓고 매일 아침 밭을 지나갈 때마다 “오렌지나무야~ 내가 너를 사랑한다. 너 참 예쁘다. 너 잘 자란다. 정말 정말 고맙다.”이렇게 칭찬을 해주면 오렌지가 벌레도 안 먹고 맛도 있고 잘 자란다는 것입니다. 나무도 사랑해주고 칭찬해 주면 잘 자라고 열매도 잘 맺는다는 것입니다. 칭찬은 짐승도 춤추게 하고 식물도 잘 자라게 하는데, 하물며 사람은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항상 내가 사랑받고 있는가를 생각해 보아야 되는 것입니다.
2. 당신은 지금 사랑받고 있는가?
오늘 여러분은 사랑을 받고 있습니까? 남편에게 아내에게 자식에게 형제나 이웃에게 사랑 받고 있습니까? 모든 사람은 사랑을 받고 인정을 받기를 원합니다. 사랑을 받지 못하고 인정을 받지 못하면 삶은 황무지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사랑은 조건이 붙으면 사랑이 아닙니다. 이렇게 이렇게 하기 때문에 사랑한다. 그러면 그것은 사랑이 아닌 것입니다. 우리는 부부의 사랑도 골로새서 3장 18절로 19절에 “아내들아 남편에게 복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마땅하니라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며 괴롭게 하지 말라”고 말한 것입니다.
사랑은 조건이 없습니다. 기네스북에 ‘세계 최 장수 부부’로 기록된 영국인 퍼시 애로스미스(105세)와 플로렌스(100세) 부부의 이야기가 화제가 된 적이 있습니다. 플로렌스는 교회학교 교사로 마을의 작은 교회에서 결혼을 했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80년 동안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사람들이 “어떻게 오랜 세월 행복하게 살 수 있었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남편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전 아내에게 늘 ‘사랑해요’라고 말했지요.” 그 아내는 말하기를 “전 남편에게 늘 ‘여보, 미안해요’라고 말했지요.” 사랑해요. 미안해요 그것을 매일같이 말했는데 그것이 그들로 하여금 장수하고 행복하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이 부부는 평생 서로에게 따뜻한 관심을 가지고 배려하며 살았습니다. 그리고 화가 났을 때는 아무리 다퉜더라도 사랑으로 용서하고 새로운 날을 맞이했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사랑과 인정받기를 원합니다. 특별히 부부는 상대로부터 인정받고 사랑받기를 원합니다. 이런 건강한 부부생활이 장수의 복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만히 보면 부부간에 여간해서 딱 맞는 부부가 별로 없습니다. 제가 50년 동안 목회하면서 우리 성도들을 살펴보면 천생연분인 사람 별로 없어요. 후생연분이 많아요. 그러므로 조건이 많습니다. 내가 가만히 보면 어떤 부인은 어머니 같은 부인이 있습니다. 남편을 자식처럼 돌보아 주는 그런 부인도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가정교사와 같은 부인도 있습니다. 남편에게 늘 꾸중하고 잔소리하고 간섭하는 가정교사와 같은 부인도 있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투정하는 아내가 있습니다. 투정하고 늘 불평하고 남편만 만나면 불평하고 원망하고 투정하는 부인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유부인이 있어요. 아예 책임 없이 집안 살림은 엉망으로 내버려 두고 밥만 먹으면 밖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자유부인입니다. 그 다음에는 목석같은 부인이 있어요. 남편이 나가면 나갔는가보다. 들어오면 들어 왔나보다. 있으면 있는가 보다. 없으면 없는가보다. 아무 반응이 없어요. 목석같은 그런 부인도 있는 것입니다. 그런가하면 남편도 아버지 같은 남편이 있어요. 참 부인을 아버지가 딸을 사랑하는 것처럼 돌보아주고 사랑하고 용서하고 관용하는 아버지 같은 그러한 남편이 있는가하면 초등학교 교장 선생님 같은 남편이 있어요. 늘 아내를 꾸짖고 교훈하고 가르치려고 하는 남편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불평 많은 남편, 들어오면 부인에게 한시도 쉬지 않고 불평하고 원망하는 그런 남편이 있습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책임 없는 남편입니다. 집안이 어떻게 되든 책임하지 않습니다. 자기만 잘 먹고 밖에 나가서 잘 입고 잘 살면 되지 집은 돼지소굴이 되어도 관심을 안 갖는 남편도 있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벙어리 남편이 있는 것입니다. 집에 들어와서 두 마디 밖에 말 안합니다. “밥 줘, 자자!” 부인이 무슨 말을 해도 대꾸하지 않습니다. 밥 줘! 자자!가 꼭 그분이 하루 하는 말입니다. 이 실제로 서대문에 있을 때 우리 권사님이 하루 제게 찾아와서 “이제 목사님 우리 남편하고 이혼해도 되겠지요? 자식들 다 길러서 마지막 시집, 장가보냈으니까 이제는 이혼하렵니다.” “아니 여태까지 자식 놓고 잘 살았는데 갑자기 이혼 하다니 무슨 그런 말을 하십니까?” 하니까 “우리 남편하고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이 시간 동안 하루에 두 마디 밖에 못 듣습니다. 밥 줘! 자자! 이런 남편하고 내가 자식 때문에 살았는데 자식들 다 내어 보냈으니 이제 나도 속시원하게 말하는 사람하고 만나서 살아봐야 되겠습니다.” 정말 안하면 답답하지요. 왜, 부부의 의사소통이 안 되느냐. 대게 부부간에 서로 대화를 할 때, 부인은 손짓 발짓하며 열심히 이야기를 하는데, 남편은 텔레비전 바라보고 멍하게 있고 신문 보거나 고개만 끄덕끄덕 합니다. 그러면 부인은 무시당하는 것 같은 감정이 생겨서 더 열을 내고 말하면 더 남편은 대답이 없는 것입니다. 왜 상대방의 신경을 곤두세우게 하고 무시하는 태도를 취하느냐 하면은 언어 연구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어른의 경우, 남성은 하루 평균 1만 2천 500 단어를 사용하는 반면, 여성은 그 두 배가 되는 2만 5천 단어를 사용한다는 것입니다. 남편은 1만 2천 500 단어 사용하면 할 말 다 했어요. 그런데 부인은 2만 5천단어가 사용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남자들은 직장에서 이미 1만 2천 500 단어를 다 사용하고 집에 오기 때문에 집에 와서는 거의 벙어리가 되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하지만 아내는 2만 5천여의 단어를 하루 종일 묵혀두었다가 남편이 오면 일시에 쏟아냅니다. 그러니 부부간의 대화에 문제가 생기는 것은 당연합니다. 남편은 신문을 보거나 텔레비전 앞에서 그저 조용히 쉬기를 원하는데, 아내는 끊임없이 2만 5천 단어를 다 말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남편이 자신과 같이 반응해 주기를 기대하지만 기대 한 대로 반응을 안 해주니까 결국에는 나를 무시한다. 멸시한다. 못살겠다. 충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벙어리 같은 남편 앞에 끊임없이 말하고 싶어 하는 부인은 딱딱 거리며 충돌만 할 뿐 서로 간에 애틋한 관심을 표현할 줄 모르는 것이 오늘날 우리의 삶인 것입니다. 우리는 부부간의 사랑도 조건을 붙이지 말아야 되는 것입니다. 무조건 사랑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변화 시켜서 이렇게 변화되면 사랑하겠다고 하면 절대로 변화 못시킵니다. 남편이 아내 변화 못시키고 아내가 남편 변화 못시키는 것입니다. 무조건 하고 사랑해줘야 되는 것입니다. 변화는 하나님이 하시지 사람이 변화 시키지 못하는 것입니다. 무조건 사랑하고 기도해주면 하나님이 변화시켜 주는 것입니다. 또 우리가 자식을 기르니까 자식과 같이 있으니 자식을 사랑해주지 않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자식을 사랑할 줄 모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식들이 부모의 사랑을 느끼지 못하고 외톨이가 되어서 삐뚤어진 마음을 가지고서 집을 떠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식을 사랑하는 사람은 많이 어릴 때 안아줘야 되는 것입니다. 이 스킨십이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안아주고 뺨을 비벼주는 것은 자녀들의 마음속에 정말 사랑하고 있다는 확신을 얻게 해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떠한 일이 있어도 될 수만 있으면 비평하지 말고 칭찬을 해 주는 게 좋습니다. 잘한다고 박수쳐 주고 칭찬을 해주면 좋습니다. 나는 책에 보니까 미국의 아주 유명한 인물이던 한 부인이 자기가 자랄 때 아버지의 사랑을 결코 잊을 수가 없어서 그 마음속에 사랑의 감동을 지금도 주고 있다고 글을 적었는데 거기에 보니까 자기가 고등학교 때 코에 여드름이 크게 나서 남학생들이 조롱을 하고 손가락질을 했습니다. 그가 울면서 아버지에게 오니까 아버지가 품에 안아 주시면서 “야~ 너 예쁘구나. 그렇지 않아도 예쁜 얼굴에 빨간 여드름까지 났으니까 더 예쁘구나! 아~ 너 정말 예쁘다. 우리 딸 제일이다.” 아버지야 지어서 한 말이라도 그것이 그 여자에게는 굉장한 마음의 위로를 주었어요. 우리 아버지가 나를 사랑하는구나! 그래서 나중에 시집을 가서 사회적으로 출세해서 훌륭한 자리에 올라가서도 어릴 때 그 아버지의 그 칭찬 한마디가 결코 잊어지지 않는다고 말한 것입니다. 우리는 자녀들을 칭찬해주고 인정해 주지 무시하지 말아야 되는 것입니다. 자녀들을 무시하면 평생에 그것이 마음에 잊어지지 않습니다. 나는 우리 아버지 어머니를 사랑하지만 아버지에 대해서 생각만 하면 언제나 한 가지 떠오르는 것이 있습니다. 여름에 학교 대항 야구시합을 했는데 동래중학교가 야구시합에서 이겼습니다. 너무 내가 기분이 좋아서 집에 오니까 아버님이 이웃 사람들과 앉아서 마루에서 이야기를 하고 계시는데 내가 “아버지 아버지, 오늘 야구 시합에 우리 동래중학교가 이겼습니다.” 하나니까 “시끄럽다. 어른들 이야기 하는데 잡소리 하지마!” 얼마나 마음에 섭섭하고 충격을 받았던지 그것이 70이 넘은 오늘날도 내 마음속에 생각이 나는 것입니다. 우리 아버지만 생각하면 그 일이 마음에 사라지지 않습니다. 절대로 어릴 때 어린 아이들을 무시하거나 인정해 주지 않는 비평의 말을 안 하는 것이 좋습니다.
에베소서 6장 4절에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린아이하고 친구가 되어줘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 시대에는 어른이 어린아이하고 친구가 되면 면구스럽다. 부끄럽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어른은 어른답게 있어야 되고 애들은 애들답게 있어야지 어른과 애들이 친구처럼 다정하게 지낼 수 없었습니다. 사회적인 유교적인 관습이 그렇게 된 것입니다. 오늘날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날은 어린아이는 부모와 친구처럼 형제처럼 지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친구가 되어주는 것이 어린 아이들을 잘 성장하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저는 이렇게 말하는 어느 아버지의 글을 본 적이 있습니다.
“나는 자녀들이 어릴 때부터 자주 안아주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나에게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를 늘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딸아이를 안고 재우면서 여러 가지 재미있는 동화를 들려주곤 했습니다. 그런데 딸아이가 사춘기가 되었을 때, 나는 걱정이 되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딸들이 사춘기가 되면 짜증을 많이 내고 부모를 싫어한다. 쾅 문을 닫고 자기 방에 들어가서 틀어박혀 있고 안 나온다. 그런 이야기를 듣고 우리 딸들이 그렇게 되면 어찌할꼬 굉장히 겁을 먹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행히도 저에게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키가 엄마보다 더 커진 딸아이는 여전히 나에게 안기는 것을 좋아하며, 학교가 끝나고 집에 오면 환호성을 지르며 나에게 달려왔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하루 종일 겪었던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럴 때면 나는 행복에 잠겨서 새삼 깨닫는 것이 있습니다. ‘사랑은 심고 거두는 것이구나. 어릴 때부터 내가 사랑해주고 스킨십을 해주고 품어준 그 딸이 장성해도 역시 아버지를 사랑하고 아버지 품에 안기기를 원하는 것이구나! 그것을 느꼈다는 것입니다. 어릴 때부터 자녀를 많이 안아주고 칭찬해 주며 많은 대화를 나눌 때 자식은 밝고 건강하게 잘 장성하는 것입니다.
아버지학교 운동본부의 국제운동본부장인 김성묵 장로는「좋은 아빠 되기 프로젝트」라는 책에서 좋은 아버지가 되는 방법 중의 하나로 ‘사랑을 표현해야 한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을 표현하는 방법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첫째, 사랑한다고 말하라. 어린 아이에게 아빠 엄마가 너를 사랑한다. 이 말을 거듭거듭 말을 해주라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자식에게 사랑을 표현하는 것을 낯간지럽게 생각하며 필요이상의 말을 하지 않는 것을 아버지의 권위를 상징한다는 것은 옛날 6.25시절의 전통인 것입니다. 한 조사에 의하면 청소년의 50%가 부모에게 “아직도 저를 사랑하세요?”라고 물어 보고 싶어 한다고 말했었습니다.
둘째, 축복기도를 해주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도를 하면서 평소에 자식에 대해 갖고 있던 생각이나 잘못된 점을 가르치려고 하지 말라고 합니다. 기도를 교훈적인 기도를 하지 말고 진실한 축복의 기도를 해주라는 것입니다.
셋째, 많이 안아주라는 것입니다. 미국에서 조사한 결과 가출 소녀의 90% 이상이 아버지와의 접촉 결핍증 환자이며, 미혼모의 70% 이상이 아버지의 부재 속에서 성장한 여성임이 밝혀졌습니다.
특별히 여자아이는 야단을 맞으면 마음의 상처를 쉽게 받아 부모를 향해 마음 문을 닫게 되는데, 이럴 때 남자아이의 유혹에 더욱 쉽게 무너진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넷째, 문자메시지 보내기 입니다. 대화는 서로 간에 얼굴을 맞대고 하는 것이 가장 좋지만 최근에는 문자 메시지도 대화 창구가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랑한다고 자주 말하며, 자녀를 위해 축복기도를 해주고, 많이 안아주어 스킨십을 자주하며, 문자 메시지를 통해서도 대화할 때, 자녀는 부모의 사랑을 듬뿍 받아 안정적인 신체적인 정신적 발달을 이룰 수가 있는 것입니다. 잘 먹여 준다고 자식 잘 기르는 것도 아니고 옷 잘 입혀 준다고 자식 잘 기르는 것이 아닙니다. 자식과의 사랑이 있어야 사랑이 근본적인 인격을 성장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영적인 정신적인 영양소가 사랑인 것입니다. 또 그뿐 아니라 우리는 같이 사니까 이웃을 사랑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웃이 항상 곁에 있는데 이웃을 무시하고 살수 없는 것입니다. 이웃을 어떻게 사랑해야 할까요?
마가복음 12장 31절에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요한복음 13장 34절로 35절에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고 말한 것입니다.
더구나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은 이웃을 사랑하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웃을 어떻게 사랑합니까? 이웃을 청해놓고 늘 대접을 해야 사랑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은 허물을 덮어 주라는 것입니다. 사람만 만나면 손가락질 하고 귀에 소근 대고 이웃의 허물을 말하면 이웃을 미워하고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웃에 허물이 있어도 눈감고 허물을 덮어주는 것이 사랑인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4장 8절에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허다한 죄를 밝히는 것이 아니라 덮어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랑인 것입니다. 사랑한다고 하면서 자꾸 이웃의 죄를 들춰내면 원수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잠언서 10장 12절에 “미움은 다툼을 일으켜도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느니라”
사랑은 허물을 가려주고 죄를 덮어주는 것이 사랑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웃이 어려울 때 도와줘야 되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3장 17절로 18절에 “누가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우리가 사랑과 행복나누기 운동을 하는데 이것이 바로 진실로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웃이 고통당할 때 함께 고통을 나누고 이웃이 어려움 당할 때 어려움을 나누어 주는 것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항상 긍정적인 교제를 하라는 것입니다. 이웃 사람하고 기쁘고 좋은 말을 하고 서로 비평하고 비난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로마서 15장 2절에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지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웃을 만날 때 반가워 해주라는 것입니다. 언제나 이웃을 만날 때 입술이 쳐져서...
그러면 이웃 사람이 보면 ‘저 사람이 나를 미워하는구나. 저 사람 만나면 인상이 나쁘다.’ 아주 마음이 고약합니다. 그러나 언제나 얼굴을 치켜 있으면 언제나 만나면 얼굴을 치켜 있으면 ‘아~ 저 사람은 나를 사랑하는구나.’ 당장 그렇게 느낍니다. 우리는 항상 이웃을 보면 인상을 쳐다보잖아요. 인상이 찌그러지고 입술이 밑으로 쳐져 있으면 무슨 말을 해도 진실로 들리지 않고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항상 웃으면 이웃 사람이 자기를 좋아하고 사랑하는 줄 알고 있는 것입니다. 만날 때마다 반가워해줘야 돼요. 뭐 벌써 한번 만났는데 또 무슨 반가워지느냐. 아침에 만났어도 점심에 만날 때도 또 반가워지고 저녁에 만날 때도 반가워 해주면 그것이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 12장 15절로 16절에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서로 마음을 같이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하지 말라”고 말한 것입니다.
잘한 일은 감사하고 높이 칭찬해 줘야 되는 것입니다. 이웃이 잘한 일이 있어서 혹시 신문에 나왔는지 방송에 나왔으면 찾아가서라도 칭찬하고 아주 높여줘야 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0장 24절에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고 한 것입니다.
잘한 것은 잘했다고 칭찬하고 박수를 해주는 것이 좋습니다. 못하는 것은 그냥 덮어주고 잘한 것은 칭찬해주고 그것이 우리가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현대 사회에서 사람들은 물질을 최고 가치로 추구하므로 진정한 친구를 얻기가 참으로 어렵습니다. 대부분 자기의 이익을 위해 잠시 좋은 관계를 맺어 보려고 하지만 이런 관계는 진정한 친구 혹은 진실한 이웃이라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런던 타임즈”가 “참 친구란 무엇인가?”라는 정의를 현상 모집한 적이 있다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참가했는데, 그 가운데 가장 우수한 것 세 가지를 뽑아서 상을 주었습니다.
첫 번째로는 “친구는 온 세상과 모든 사람이 다 나를 버릴 때 찾아와 주는 사람이다.” 참된 친구는 온 세상이 다 날 버리고 등을 돌릴 때 그때 날 찾아와 주는 것입니다. 다 날 좋아할 때 찾아오는 것은 누구든지 할 수 있지요. 내가 가장 외롭고 괴롭고 슬플 때 버림받았을 때 찾아와 주는 친구 정말 진짜 친구요, 귀한 친구인 것입니다.
두 번째 “친구는 너무 괴로워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침묵할 때에 그것까지 이해해 주는 사람이다.”너무나 고통스러워서 내가 말을 하지 못하고 앉아 있을 때 친구도 곁에 와서 아무 말도 안하고 같이 앉아 손만 잡아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도 이미 그 마음을 압니다.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욥의 친구같이 와서 온갖 험담을 다하면 그것은 친구가 아닌 것입니다.
세 번째 “내가 기쁜 마음을 가지고 만나면 기쁜 마음이 배가되고, 고통스러울 때 만나면 고통이 반으로 감해지는 사람이 진정한 친구이다.”는 것입니다. 친구를 만나도 아무 변화가 없으면 안돼요. 내가 그 친구만 만나면 내 기쁨이 배가 되고 내 슬픔이 반으로 줄어든다. 그러한 친구가 참 진실한 친구가 된다는 것입니다. 진실한 이웃 사랑은 이러한 친구여야 하는 것입니다. 늘 허물을 덮어주고 어려울 때 도와주며 위로해 주어야 진정한 친구가 되는 것입니다.
<결론>
모든 삶의 뿌리는 사랑에 있습니다. 무슨 말을 해도 사랑이 그 뿌리가 되는 것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돈이나 지위나 명예나 권세나 세상 것이 위로가 되지 않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갈릴리 해변에서 제자들과 조찬을 하시고 수제자인 베드로에게 근본적인 질문을 했습니다. 주님이 수제자 베드로에게 이 질문을 하고 세상을 떠났던 것입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이 사람들보다 더 사랑하느냐?” 그때 사용한 사랑이 아가페입니다. 무조건 사랑하는 사랑인 것입니다. 그럴 때 베드로가 말하기를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때 사랑은 필레오입니다. 친구의 사랑인 것입니다. 주님은 “네가 나를 아가페(무조건) 사랑하느냐?” 베드로는 “친구로 사랑합니다.” 왜냐하면 무조건 사랑한다고 큰소리 했다가 예수님을 세 번이나 배반했거든. 이제 자신이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내 어린 양을 먹이라” 그 다음 잠시 있다가 또 주님께서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아가페 사랑을 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니 베드로가 “내가 주님을 필레오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아가페 한다고 말 못합니다. 무조건 사랑은 못하고 그저 친구로 사랑합니다. 그러니 주님이 “내 양을 치라” 그 다음 잠시 있다가 예수님이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친구로 사랑하느냐?” 필레오로 사랑하느냐? 그만 가슴이 덜컹 내려앉습니다. 또 친구로 사랑한다고 했는데 이러다가 배반할 줄 어떻게 아느냐? 그래서 눈물어린 목소리로 “내가 주님을 친구로 사랑하는 줄 주님이 알지 않습니까? 나는 모르겠어요. 이 말 해놓고 난 다음 또 배반할지 내가 어떻게 압니까?” “내 양을 먹이라” 주님께서는 시몬 베드로에게 다른 질문 안했습니다. 내가 3년 동안 나를 따라 다니면서 잘 배웠느냐? 훌륭한 교훈을 배웠느냐? 훌륭한 제자가 되겠느냐? 그런 것을 묻지 않았습니다. 마지막 날 때 “네가 날 사랑하느냐?” 세 번 다짐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하면 “내 양을 먹이라”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사랑을 가지고 하면 사명감을 다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우리에게 사명감을 주고 무슨 일이든지 열심히 하게 하려면 사랑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사랑은 모든 수고를 감내하는 것입니다. 어떠한 고통도 견딜 수가 있는 것입니다. 사랑은 진실로 자기에 맡겨준 일을 다 할 수 있는 능력을 허락해 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믿음, 소망, 사랑 세 가지가 늘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사랑이 제일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사실 맞아요. 사랑이 제일입니다. 사랑만 있으면 살아 나갈 수가 있어요. 사랑이 없으면 모든 것은 살아 나갈 수 있는 원천이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사랑을 사람 속에서 발견하기가 힘듭니다. 너무나 각박한 세상 속에 서로를 이용하고 서로를 속이고 미워하고 하기 때문에 사랑을 발견할 수 없어요. 인류 역사 이후에 늘 사람들은 물고 찢고 싸우고 전쟁하며 살았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 참 사랑을 발견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얼마나 사랑했습니까?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으리라.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대신하여 죄와 불의, 추악과 저주, 절망과 죽음을 걸머지고 몸 찢고 피 흘려주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변할 수가 없고 우리에 대한 예수님의 사랑은 변할 수가 없는 것은 사랑의 대가를 너무나 크게 지불했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렇게 크게 투자를 하고 난 다음에 그 사랑을 버릴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오늘날 우리가 죄를 짓고 불의하고 추악하고 버림을 당해야 마땅하고 사람들에게 다 질시를 당해도 하나님은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사랑하고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은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를 쉬게 하겠다고 말씀한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자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항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찾고 그 사랑 가운데서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사랑으로써 아내를 사랑하고 하나님의 사랑으로써 남편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사랑으로써 자식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사랑으로써 이웃을 사랑하면 우리가 참 행복한 인생을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사랑의 기본이 하나님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사랑을 마음속에 받지 못한 사람의 사랑은 대게 다 거짓 사랑이요, 얼마 있지 않다가 식어져 버리고 없어질 사랑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기본한 사랑만이 영원한 것입니다. 그것은 이 땅에서 천국까지 또 영원히 계속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사랑은 예수 안에서 받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이 사랑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찾아와서 우리 마음 문을 두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주의 음성을 듣고 마음 문을 열기만 하면 예수님은 그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을 가지고 우리 마음속에 들어오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신앙생활을 하면 세월이 흘러 갈수록 그리스도의 사랑을 더 마음속 깊이 느낍니다. 처음에는 별로 깊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느끼지 못하다가도 세월이 흘러가면 정말 주님이 나를 사랑하시는구나. 그리스도의 사랑이 마음을 저리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그리스도의 사랑이 나로 하여금 살아갈 수 있는 용기와 힘을 주고 행복을 주는 것입니다. 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아버지의 사랑이 여러분에게 넘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사랑이 많으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사랑이 제일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아버지 하나님 안에 잇는 그리스도의 사랑, 그리스도 안에 있는 아버지의 사랑 이 사랑을 우리가 가슴속에 받아들이면 우리가 정말로 사랑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가슴속에 받아들이지 않고는 사랑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는 힘이 없습니다. 인간의 사랑은 다 말라 버리고 변화되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 아버지여 오늘 원하오니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속에 넘치게 하여 주시옵시고 이 사랑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을 사랑할 수 있는 힘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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