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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정체성

고린도후 조용기 목사............... 조회 수 2651 추천 수 0 2010.02.22 09:2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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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고후5:16-21 
설교자 : 조용기 목사 
참고 : 2009. 8. 30. 주일 4부 설교 
하나님이 공평하셔서 남이 갖지 못한 것 내게 갖게 하시고 남이 누리지 못한 것 내게 누리게 해주셔서
휠체어에 앉아 있는 사랑하는 자매님이 지은 시인 것입니다. 우리가 다 똑같이 영광을 누리지 못할지라도 하나님은 못한 자를 택하여 잘난 자를 부끄럽게 만드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사랑하시므로 여러분을 절대로 내버려 놓지 않습니다. 따라 말씀하세요.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서론>
오늘 저는 여러분에게 “나의 정체성”이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제가 젊을 때 지금도 젊지만 이것보다 더 젊을 때 블란서 파리 근교에서 큰 집회를 인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영국에서 한국계 영국인 여성이 연락을 해왔어요. 꼭 좀 만나달라고. 그래서 아침 식사에 초청을 하니까 영국에서 비행기를 타고 블란서 파리까지 와서 아침식사를 같이 하게 되었는데 한국의 젊은 여성이에요. 그때 나이로 내가 볼 때 한 35세쯤 되 보이는데 굉장히 현명하고 교육을 많이 받은 그런 여성이었습니다. 그녀 눈에 눈물이 글썽하면서 “목사님, 나를 좀 찾아 주십시오. 내가 누굽니까? 나는 한국에서 버림받은 사람으로 블란서 양부모에게 입양 되어서 블란서에서 자랐습니다. 한국말을 모르고 블란서를 우리 모국으로 알고 블란서 문화 속에서 자라서 시집은 영국 사람에게 갔습니다. 그래서 지금 살기는 영국에서 살고 있습니다. 나는 내 거울을 들여다 볼 때마다 묻습니다. 너 누구냐? 얼굴은 한국 사람의 얼굴이고 문화는 블란서 문화를 가지고 있고 살기는 영국 남자하고 살고 도대체 내가 누구냐? 마음에 굉장한 고민이 있습니다. 내 정체성이 누군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구태여 우리 어머니, 아버지를 사랑하지 않습니다. 나를 싫어서 버린 어머니, 아버지가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만 그러나 우리 어머니, 아버지를 알아야 내 뿌리를 찾겠습니다. 내가 진짜 한국 사람으로서 블란서에서 공부를 해서 영국 남자하고 산다는 확실성을 가지고 싶습니다. 지금같이 공중에 뜬 생활을 하고 싶지 않습니다. 날 좀 찾아 주십시오.” 그러니 찾아보려고 하니까 어디서 났는지 알 수가 없어요. 나처럼 경상남도 울주군 삼남면 교동리 산 31번지에 났다는 번지수라도 있으면 찾겠는데 태어난 번지수도, 도시도, 연대도, 아무것도 모릅니다. 부모님 성함도 모릅니다. 막연하게 그 상황을 가지고서 부모를 찾을 수 있나요? 우리 국민일보에 가지고 와서 좀 찾아보라고 하니까 전부 기자들이 입을 딱 벌리고 “하나님이나 찾을까 우리 사람은 못찾는다.”고 했습니다. 사람이 자기를 찾는다는 것 굉장히 어려운 일입니다.

<본론>
1. 불신자의 정체성
실존주의 철학자들은 “내가 누구인가”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하여 많은 연구를 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인간의 정체성에 대해 세 가지 결론을 내렸습니다. 첫째, 인간은 죄책의 절망의 존재이며, 둘째, 허무와 무의미의 존재로서 인간은 어디에서 와서 왜 살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고 우연히 태어나서 허망하게 살다가 허무하게 사라지는 존재이고, 셋째, 인간이란 죽음과 무의 절망을 품은 자이므로 절망적인 존재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소위 말하는 실존주의 철학자들이 머리를 짜내어서 내가 누구인가를 연구해서 발표한 것입니다. 나는 누구인가. 죄를 짓고 죄책으로 고민하는 내가 나는 누구인가. 허무하게 태어나서 허무하게 살다가 허무하게 죽는 무와 허무의 존재이다. 나는 누구인가. 죽음과 영원한 무의 존재이다. 죽고 나면 아무것도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실존주의 철학자였던 키에르 케고르(Søren Aabye Kierkegaard) 는 인간에게 가장 무서운 병은 육신의 질병이 아니라 “자아의 상실, 즉 자기를 잃어버린 절망”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지금은 아주 분방하게 사니까 누가 누군지 모르지요. 아침에 일어나고 집안 소재하고 밥먹고 직장에 나가고 부귀 영화 공명을 찾고 명예와 지위와 세상 쾌락을 추구하면서 살다가 죽을 병에 걸려 이제 나이가 들게 되면 이 안개구름이 사라집니다. 다 허망한 곳으로 사라집니다. 나중에는 발가벗은 나 혼자만 남았을 때 다 질문하게 됩니다. 나는 누구인가. 부귀와 영화와 공명도 다 떠나가 버리고 내가 그렇게 취해서 있던 현실이 사라지고 나는 이제 고독한 한 존재로써 내가 누구인가. 이것이 실존주의 철학자들이 찾는 질문인 것입니다. 그때는 “나는 죄인이다. 나는 허무하고 무의미하다. 죽고 없어지는 존재다. 이것이 나다.” 얼마나 절망적인 고백인 것입니까?
실존주의에서 인간은 죄와 죄책의 절망, 허무와 무의미, 죽음과 무의 절망 앞에 선 존재이므로 이러한 것을 깨달아 아는 것이 인생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인간의 정체성에 대한 이런 실존주의 철학의 대답은 불신자의 정체성이 어떤 모습인지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이 자기가 누군지 찾아서 결론에 도착한 것은 이것밖에 없는 것입니다. 불신자의 정체성이라는 것은 이 허무의 정체성인 것입니다. 아무리 지금 높은 지위를 가지고 명예와 부귀와 영화를 가지고 있다하더라도 그것이 얼마나 갑니까? 솔로몬은 말하기를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되다.”고 말한 것입니다. 사람이 항상 젊어 있지도 못하고 항상 높은 자리에 앉아 있지도 못하고 항상 부를 누리지도 못합니다. 인간은 지나가는 나그네와 같은 것입니다. 결국 이 세상에 남는 것은 뭐냐. 마음의 죄와 정죄감인 것입니다. 10년 동안 누워서 주무시지 않고 앉아서 도를 닦은 한국의 한 스님은 세상을 뜨실 때 말하기를 “나는 죄 덩어리다. 내가 갈 곳은 영원한 지옥에 가는 것밖에 없다.” 그렇게 말했습니다. 10년을 누워서 자지 않고 앉아서 잤습니다. 10년을 도를 닦았습니다. 결국에 내가 누구냐고 발견한 것은 나는 죄덩어리 라는 것입니다. 세월이 흘러가고 나는 지은 죄밖에 기억이 안 난다. 그리고 너무나 허무해요. 이번에 저는 한 이틀 시간을 내어서 자연을 데리고 고향에 갔다 왔습니다. 옛날에 살던 고향입니다. 내가 태어나고 내가 자랐던 고향인데 어디에 있는지 찾지를 못하겠어요. 너무나 변하고 개발이 되어서 이제 옛날 모습을 찾을 수 없어 겨우 찾아가서 옛날에 살던 집을 발견했는데 마음에 굉장히 슬픔이 다가왔습니다. 내가 어릴 때 뛰놀던 그곳은 황성옛터입니다. 너무나 황량하고 모든 것이 다 사라지고 오직 하나 뚜렷이 남아있는 것은 제가 폐결핵에 걸려서 죽다가 살아난 그 기념으로 아버님께서 백일홍 나무를 심었는데 그 나무는 60년 지난 오늘날에도 서 있어요.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허무와 무의미입니다. 할아버지, 할머니의 무덤에 가니까 자손들이 다 멀리서 안 돌봐 주니까 풀만 무성하게 나있고 아무 음성도 없습니다. 살아 계시면 “아이구, 용기야 오랜만이다. 잘 왔냐?” 그렇게 말씀하실 것인데 아무 말도 없어요. 모든 것이 적막에 둘러 있습니다. 즉시로 저는 나를 거기에 비교해 보았습니다. 나도 세월이 흘러가서 한 5,60년 후가 되면 나의 후손이 내가 어디 있는지도 찾아보지도 않을 것 아니겠느냐. 모든 것이 허무와 무의미 아닌가. 살아있는 지금도 꿈 같은 인생이고 결국 세월이 지나가면 남는 것은 잊어버려지고 허무하고 무의미한 것밖에 없지 않는가. 모든 사람은 죽음의 슬픔을 눈앞에 두고 있는 것입니다. 안 죽을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이것이 믿지 않는 사람들의 생활의 전부입니다. 아무리 부귀, 영화, 공명을 자랑하고 청춘을 노래하고 자랑한다고 해도 결국 이것 밖에 없는 것입니다. 마릴린 먼로가 죽을 때 마지막 남겨 놓은 유서는 “나는 한없는 사랑받기를 원했다. 그러나 나를 한없이 사랑해 줄 사람이 없어서 나는 죽는다.”고 말한 것입니다. 서로 사랑한다고 하지만 한없이 사랑해 주는 누가 있습니까? 모든 것은 변하고 마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9장 27절에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모든 사람은 죽는 것이 정해져 있는 것입니다.
“신은 죽었다”라고 주장한 무신론자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는 이런 말했습니다. “현대인은 두 가지 병(病)을 갖고 있다. 하나는 자기 자신을 잃어버린 것이요, 다른 하나는 자신을 잃어버리고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정말입니다. 자신을 잃어버리고 내가 누군지도 모르면서도 내가 누군지 모르는 그것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냥 밥 먹고 그냥 일어나고 일하고 먹고 자고 깨다가 어느날 보니 죽어 버렸다. 자기가 누군지도 모르고 살다가 자기가 누군지도 모르고 죽는 것입니다. 인간은 아담 이후 영이 죽어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기고 그 자신이 어디에서 와서 왜 살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고 늘 마음속에 죄와 죄책과 허무와 삶의 무의미와 죽음과 무의 슬픔 속에서 고뇌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을 고뇌하는 정도가 되었어도 상당히 깨달은 사람인 것입니다. 고뇌도 안해요. 그저 현실에 잡혀서 자고 깨고 먹고 자고 깨고 먹고 하다 그냥 죽는 거에요.

2. 그리스도인의 정체성
그러나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의 정체성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가슴에 품을 때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확실한 나를 찾게 된 것입니다. 나를 잃어버린 사람이 갈보리 십자가 밑에 와서 그리스도를 쳐다보면 그리스도를 통해서 나를 찾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나를 찾느냐. 용서받아 하나님의 자녀로 환원한 나를 찾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버림받아 나를 잃어버린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로 죄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은혜로 화목되어 하나님의 자녀로 돌아가는 나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1장 7절에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2천년 전에 이 땅에 오셔서 나의 죄악을 다 짊어지고 하나님 앞에 버림받은 모든 정죄를 청산하시고 성령으로 우리 마음 문을 열어 주셔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발견하고 내가 아버지의 자녀가 된 내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너는 누구냐? 예수 믿고 하나님 자녀가 되었다. 우리는 분명하게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성령이 함께 계신 나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전에는 하나님의 성령이 와서 우리를 도와주시고 깨닫게 해주시고 은혜를 베푸는 것을 몰랐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가슴에 받아들이고 예수님을 믿고 난 다음에 하나님의 영이 나의 속에 들어와서 나를 위로하시고 도와주시고 이끌어 주신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디도서 3장 6절로 7절에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그 성령을 풍성히 부어 주사 우리로 그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상속자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성령께서 우리 마음 속에 오셔서 “너는 하늘나라의 상속자다. 하나님 아버지가 지은 이 천지만물의 상속자가 바로 너다.” 너는 세상에 버림받은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3장 16절에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성령이 이제와 계시는 것입니다. 외로운 존재가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 성령이 내속에 와 있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누구냐. 하나님의 치료의 은혜를 받은 사람이다. 내 영도 마음도 몸도 생활도 하나님이 손길로써 어루만져 주시고 치료해 주는 사람이다.
이사야 53장 5절에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그리스도, 그가 못에 찔려 있는 것은 내 허물 때문에 그가 상한 것은 내 죄악 때문에 그가 하나님께 버림받아 십자가에 못박힌 것은 나의 징계를 받아 나에게 평화를 주기 위해서 등허리가 갈갈이 찢어지고 매를 맞은 것은 내 병을 대신 알아주기 위해서 그렇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라는 존재가 굉장히 귀한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이처럼 사랑하사 대속해 주신 것을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십자가 밑에서 발견하는 것은 나는 누구냐. 주님께서 모든 저주에서 해방시켜 준 나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께로부터 쫓겨날 때 땅은 저주를 받아 가시와 엉겅퀴를 내고 너는 이마에 땀을 흘려야 먹다가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 저주에서 인간의 힘으로 자유와 해방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볼 때 저주에서 해방된 나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 13절로 14절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
우리는 저주에서 해방을 받고 아브라함의 복을 받은 사람이 된 자기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놀랍게도 나는 저주받은 사람이 아니라 이제 아브라함의 복을 받은 형통한 사람이 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십자가 밑에서 또 발견하는 것은 나는 부활, 천국, 영생을 얻는 내가 되었다. 나는 부활할 것이요, 천국이 내 영원히 살 고향집이 될 것이요. 하나님과 함께 영생을 누릴 내가 된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요한복음 11장 25절로 26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요한복음 14장 2절로 3절에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예수님 계신 곳에 하나님 계신 천국에 영원히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심리학자 칼 융(Carl Gustav Jung)은 그의 학문을 통해 “당신은 자신이 누구인지 아는가”라는 질문에 답을 구하려고 했습니다. 그러한 연구를 하는 중에 그는 인생의 중반을 넘긴 대다수의 환자들은 자신의 삶을 지탱시키기 위하여 최후 수단으로 “종교적 인생관”을 받아들였다는 사실을 알아냈습니다. 인간이 자신의 삶에 대한 존재 이유를 알지 못할 때에는 방황하고 타락하다가 결국 신앙을 통해 그 해답을 찾게 된다는 것입니다. 병들어서 병원에 입원을 하고 고통을 당하고 언제 세상을 떠날지 모를 때 그때 사람들은 자기를 찾아 발버둥을 치다가 자기가 부자도 아니고, 권력자도 아니고, 지위와 명예를 가진 자도 아니고 이것은 다 떠나가 버리고 의지할 곳이 없으니까 결국에 어찌할 수 없이 종교적인 진리를 찾고 예수 그리스도를 찾게 된다는 것입니다. 칼 융이 말한 “종교적 인생관”이란 바로 십자가 예수님 안에서 갖게 된 “새로운 피조물”이 된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17세기의 사상가 파스칼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인간의 마음속에는 커다란 구멍이 뚫어져 있다. 그 구멍은 세상적인 쾌락이나 물질이나 명예나 권세로 채울 수가 없다. 왜냐하면 세상 쾌락과 물질은 오히려 실망과 불만족과 허무만을 안겨주기 때문이다. 그 구멍을 채울 수 있는 것은 오직 끝없이 부어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뿐이다. 인간은 그리스도를 마음에 모실 때에야 비로소 진실한 만족을 얻게 된다.” 고 말한 것입니다.
여러분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모셔서 예수님 안에 있게 될 때 비로소 죄와 죄책, 절망, 허무와 무의미의 고통, 죽음과 무의 슬픔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 안에서 새로운 정체성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나는 누구냐. 나는 이제는 용서받은 나다. 나는 누구냐. 나는 하나님과 화목한 내가 되었다. 나는 누구냐. 하나님의 손길에 의해서 치료받은 내가 되었다. 나는 누구냐. 나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축복을 받고 아브라함의 복을 받은 사람이다. 나는 누구냐. 부활, 영생, 천국을 가진 사람이 되었다. 그것이 나의 정체성이다. 이것이 얼마나 놀라운 고백이 아닙니까? 이 세상에 사는 사람의 정체성은 죄와 죄책, 허무와 무의미, 죽음과 무가 자기의 정체성인데 그곳에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완전히 새로운 나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나는 누구냐. 나는 영생복락을 얻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나는 누구냐. 성령이 같이 계셔서 사람이 되었다. 나는 치료받은 사람이다. 나는 축복받은 사람이다. 나는 부활, 영생, 천국을 가진 사람이다. 긍정적이고 적극적이고 놀라운 고백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거기에다가 베드로전서 2장 9절에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택함받은 나로 부르신 것입니다. 나는 누구냐. 하나님의 택함을 받았다. 내가 스스로 하나님을 안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택해서 불러 주셨다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1장 4절로 5절에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창세전에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여러분, 하나님의 예정을 입어 예수를 믿어 구원을 받았으니 얼마나 놀라운 일인 것입니까? 보통 사람들이 아니잖아요.
요한복음 15장 16절 우리 다 같이 한번 읽어 보십시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
여러분이 주님을 택했으면 놓쳐 버릴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여러분을 택해서 여러분을 잡고 있으니 놓칠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도망을 치려도 예수님이 잡고 계시므로 끈을 좀 놓쳐주면 좀 세상으로 나갔다가 도로 낚아채면 또 예수님에게로 돌아오고 도망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여러분을 택한 것입니다. 여러분이 먼저 하나님을 좋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여러분을 좋아하셨습니다. 그러니 우리 얼마나 복 받은 사람입니까?
그리고 왕 같은 제사장이 되었다고 말한 것입니다. 옛날에는 마귀가 나의 왕으로써 나를 다스렸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받고 예수님과 같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니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 왕이요,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이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과 똑같이 왕 같은 제사장이 된 것입니다.
로마서 5장 17절에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이제 우리 사망 안에서 종노릇 하지 않고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게 된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2장 5절에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라고 말한 것입니다.
여러분과 나는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이요, 우리의 운명과 환경을 다스리는 왕인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거룩한 하나님의 나라라고 말한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하지 말라 하나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인 것입니다. 따라 말씀하세요. “내가 바로 하나님의 나라이다.”
골로새서 1장 13절에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겼다고 말했고 로마서 12장 1절에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고 말한 것처럼 여러분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 나라로 옮겨져서 여러분 자신이 하나님 나라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으로 만든 것입니다.
말라기 3장 17절에 “만군의 야훼가 이르노라 나는 내가 정한 날에 그들을 나의 특별한 소유로 삼을 것이요 또 사람이 자기를 섬기는 아들을 아낌 같이 내가 그들을 아끼리니”
하나님이 특별한 소유물, 해와 달과 별과 산과 들도 다 하나님 것이지만 보통 소유물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특별한 소유물인 것입니다. 특별히 하나님이 사랑으로 돌보는 소유물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매일매일 혼돈된 생활 속에 우리의 정체성을 밝히 알고 굳게 그 정체성 위에 서야 되는 것입니다.

3. 정체성 안에 굳게 서는 길
늘 새로운 피조물이 된 것을 생각하고 잊어버려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보통으로 “나는 그저 죄인이다. 허무한 인생을 산다. 나는 죽으면 그뿐이다.” 이렇게 생각하지 말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나를 생각해야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옛날 죄인의 생활은 지나갔습니다. 어머니, 아버지 뱃속에서 태어난 후 우리는 지나갔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새로운 피조물이 된 것을 생각하고 새사람이 된 것을 상상하십시오.
에베소서 4장 23절로 24절에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용서와 의를 가진 새사람을 입었습니다. 거룩하고 성령충만한 새사람을 입었습니다. 치료받고 건강한 새사람을 입었습니다. 아브라함의 복을 받고 형통한 새사람을 입었습니다. 부활,영생, 천국의 새사람을 입었습니다. 옛사람은 벗어 버렸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 옛사람을 못 박아 버렸습니다. 부활할 때 우리에게 새사람이 되게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새사람이 된 자기를 늘 생각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실을 굳게 믿으십시오.
갈라디아서 3장 26절로 27절에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침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이제 여러분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습니다. 이 사실을 믿으십시오. 한번 따라 말씀하세요. 나는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딸이 되었다는 말은 없습니다. 하늘나라에 올라가서는 아들, 딸 구별이 없이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서 변화되는 것이니까 새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늘 믿고 입술로 고백해야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 10장 10절에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저는 태어날 때부터 육신이 약하게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6.25사변 때 많은 어려운 생활 가운데 몸이 약해서 폐병3기로 죽다가 살아났습니다. 그 이후로 일생에 늘 몸이 허약했어요. 머리가 어지럽고 다리가 아프고 기침이 나오고 소화가 잘 안되고 온갖 병이라는 병은 다 가진 병주머니였습니다. 그러다가 예수를 믿고 신학교 공부를 하고 주의 종이 되고 난 다음에도 항상 몸이 아팠습니다. 서대문에서 하루는 설교하다가 쓰러졌습니다. 그때 이후로 늘 쓰러질 것 같이 다리가 떨리고 괴로웠습니다. 그 가운데 제가 하나 배운 것은 나의 정체성인 것입니다. 내가 누구냐. 나는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가 나음을 입었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나는 나은 사람이다. 마귀가 아무리 와서 나를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고 해도 나는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서 나은 사람이다.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가 나았다고 했으니 그 다음에는 마귀가 무슨 말을 해도 안 나았다고 말하지 말아야 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나았다고 했으니 나은 것입니다. 주님이 한 말만 믿어야지 안한 말을 믿으면 안됩니다. 주님이 나았기도 하고 안나았기도 하다. 그렇게 말했으면 안나았다고 믿을 수 있는데 주님이 나았다고 말하니까 나도 나았다고 말해야지. 50년의 목회생활에 한국에서 온 세계까지 복음을 전하러 다니면서 수없이 죽을 고비를 당했습니다. 수없이 심장이 멈출 것 같고 숨이 끊어질 것 같고 어지럽고 일어날 기운이 없고 그럴 때도 항상 저는 내 정체성을 생각했어요. 나는 이런 사람이 아니다. 예수 안 믿고 세상에 살 때는 죄책과 정죄, 허무와 무의미, 죽음과 무의 노예가 되어서 끌려 다녔지만 지금 나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이것은 거짓되고 헛된 것이다. 나의 새로운 피조물은 용서받고 의롭게 된 사람이고 거룩하고 성령 충만한 사람이고 치료받고 건강한 사람이고 아브라함의 복을 받은 사람이고 영생 복락을 받은 사람이다. 그러므로 이것이 나의 진실한 정체성이니 절대로 양보하지 않는다. 그런 믿음으로 굳세게 입으로 시인하고 섰기 때문에 50년의 목회생활을 무사히 마치고 지금도 여러분 앞에 서서 설교를 할 수가 있습니다.
며칠 전 저는 참 감사한 메일을 한 통 받았습니다. 은평구에 사시는 임채윤 성도님의 간증 편지였습니다. 임채윤 성도님은 건강 검진을 통해서 운동부족과 신장기능 저하라는 진단 결과를 받고 약국에서 신장을 위한 약을 사서 먹으려고 했습니다. 약사 선생님은 신장기능은 한번 약해지면 회복이 안된다고 약도 없다고 말했습니다. 이 이야기를 듣는 순간 주변에서 신장병으로 입원하여 투석하며 힘들어하시던 모습이 떠오르고 겁이 덜컥 났습니다. 신장투석을 하면 일주일에 한 3번을 해야 됩니다. 우리 김대중 대통령이 신장투석을 6년 동안 하다가 세상을 뜨셨지 않습니까? 일주일에 세 번씩 피를 걸러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렇게 된다는 두려움이 마음에 꽉 들어차게 된 것입니다. 두려움과 불안이 엄습하자 식욕도 없어졌습니다. 그러나 기도해야 되겠다고 생각하여 평소에 설교하면 “질병을 갖다 주는 귀신이 우리 몸에 불법주차 하려고 하면 쫓아내어야 한다.”고 강조하던 목사님의 말이 기억났습니다. 그 후 성도님은 하루에 40분씩 운동을 하며 “예수님이 채찍에 맞으시므로 내가 나음을 받았다”라고 말씀을 선포하기 시작 했습니다. 운동을 할 때 주변에 하나, 둘, 하나, 둘 하며 구령에 맞추어 달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임채윤 성도님은 “예수님이 채찍에 맞으시므로 내 신장이 튼튼해 졌다.” 그렇게 자꾸 말하면서 뛰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전에 병원에서 소변검사를 했는데 신장의 기능이 정상으로 돌아왔다는 것입니다. 의사 선생님께 몇 달 전에 ‘신장기능저하’검진 결과를 받았다고 이야기 하니까 의사는 고개를 갸웃갸웃 하면서 “아니요. 정상입니다.” 비정상인 신장이 갑자기 정상으로 돌아오게 된다는 것은 기적이 아니면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어떤 어려운 일을 당한다 할지라도 예수님 만나게 되면 나의 새로운 정체성을 잊지 말아야 되는 것입니다. 경제가 나쁘고 아무리 고통스럽고 괴로워도 여러분의 정체성인 무엇입니까? 아브라함의 복을 받은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침에 일어나도 나는 복 받은 사람이다. 시장에 가서 일해도 나는 복 받은 사람이다. 잠자리에 들어갈 때도 나는 복 받은 사람이다. 한 푼 돈이 없어도 나는 복 받은 사람이다. 자기의 정체성을 주장해야 되는 것입니다. 내가 나를 못 찾으면 누가 나를 찾아주는 것입니까? 여러분은 십자가 밑에서 여러분 자신을 찾은 사람인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잃어버린 사람이었는데 그리스도 안에서 내가 누군지를 알고 찾은 사람인 것입니다. 여러분이 나는 용서받은 의인이 되었다고 꽉 붙잡아야 되는 것입니다. 아이유 나는 죄인입니다. 나는 버림받은 사람입니다. 자기를 못 붙잡으면 지옥가고 마는 것입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용서받은 의인이 되었습니다. 나는 천국갑니다. 이것이 나입니다. 마귀가 자꾸 여러분을 유혹하고 죄를 짓고 불의하고 추악한 일을 하게 할지라도 나는 거룩하고 성령 충만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나는 거룩하고 성령충만한 사람입니다. 몸에 병이 들고 약하고 고통이 다가와서 치료받으면서도 아이구 나는 이제 죽는가보다. 이제는 끝장이 났는가보다. 이제는 일어나지 못하겠구나. 그렇게 생각하면 안돼요.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나는 나은 사람이다. 그것이 나의 정체성이요, 진실한 나다. 지금 병든 것 거짓되고 헛된 것이다. 거짓되고 헛된 마귀가 속이는 것이다. 사탄아 물러가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내가 나음을 입었다. 자기를 붙잡아야 되는 것입니다. 자기를 찾아내어서 꽉 붙잡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입으로 시인하고 생각하고 그것을 꿈꾸고 믿고 말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생활이 어려워지고 형편이 괴로울 때 나는 이제 실패자요, 인생 패배자요, 절망자요, 빈손든 자라고 고백을 하면 안됩니다. 그것은 자기를 잃어버린 사람이요, 십자가 밑에서 발견하는 나는 저주에서 해방된 사람이요, 아브라함의 복을 받은 사람인 것입니다. 그런 자기를 발견해야지요. 십자가에서 분명 그를 위해서 예수님이 몸찢고 피를 흘리셔서 나에게 저주를 제하고 아브라함의 복을 받은 사람이 되게 만들었는데 그런 자기를 찾았으면 붙잡아야지요. 무슨 말을 해도 이 헐벗고 굶주리고 낭패하고 실패한 것은 거짓되고 헛된 마귀의 수작이다. 나는 예수 안에서 축복받은 사람이다. 그러면 주님께서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주님이 여러분을 복 내려 주시는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자기 정체성을 찾지를 못하고 정체성 속에 서지 못합니다.
프란시스 쉐퍼(Francis A. Schaeffer) 박사가 생전에 스위스에서 세계의 지성인들이 모인 가운데 이 시대의 방향과 마음의 갈 길을 제시하면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19세기에 일어났던 가장 커다란 비극은 사람들이 절대 가치를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현대인은 절망의 선 밑으로 떨어졌습니다.”
19세기 이전의 사람들은 절대로 옳은 것은 절대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삶의 기준점으로 삼았습니다. 그런데 이후 진화론, 상대성 이론, 문화 상대주의 등 과학과 사상의 발전은 절대적인 가치관을 버렸습니다. 그리고 상대주의 가치관을 추구하며 ‘절대 가치’에 대하여 의심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자 오늘날 사람들은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서 받는다’는 절대 진리를 버리고 예수를 안 믿고 다른 종교를 믿어도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상대적인 진리를 말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의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것은 절대적인 것입니다. 이런 신앙의 정체성이 불확실하면 오늘날 큰일 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여러 면에서 고통을 당하는 이유는 자기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마귀에 의해 지금도 속아 넘어가서 마귀의 손에 끌려 다니기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것을 생각하고 이것은 절대적인 진리이기 때문에 이것을 입술로 고백하고 이것을 믿고 이것을 꿈꿔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것은 거짓말이 아닙니다. 절대적인 진리입니다. 죽어도 살아도 절대적인 진리입니다. 누가 무엇이라고 말해도 그 절대적인 진리를 놓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것을 굳세게 붙잡으십시오.

<결론>
정체성이 불확실하여 정체성이 불명한 사람이면 마귀가 마음대로 끌고 다니는 것입니다. 마귀는 속이는 거짓말하니까 거기에 귀를 듣고 불안, 초조, 절망, 고통으로 끌려 다니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체성이 분명한 사람은 항상 희망 차고 승리합니다. 내가 누군지를 알기 때문에 내가 나를 힘차게 붙잡고 내 자신을 주장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내가 누구냐. 항상 이 질문을 하고 내가 그리스도 십자가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것을 생각해야 되고 꿈꾸어야 되고 믿어야 되고 이런 사람이 되었다고 입술로 고백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저 멀렐레하게 나가면서 마귀가 “너는 그래도 죄인이다.” “맞아요. 죄인이에요.” “너는 병들어서 얼마 안있으면 죽는다.” “맞아요. 얼마 안있으면 죽을 거에요.” “너는 실패자다.” “맞아요. 실패자입니다.” “천당 갈지 안 갈지 모른다.” “가봐야 알겠지요.” 이렇게 되면 자기 정체성을 잃어버린 사람인 것입니다. 마귀는 어떻게 하든지 여러분의 정체성을 빼앗아 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영국에서 파리로 와서 나를 찾아달라는 그 부인의 하소연 들어 보십시오. 자기를 찾지 못하니까 마음에 불안과 고통, 괴로움이 말할 수 없었습니다. 자기를 찾아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우리를 찾아 달라하니까 그리스도 십자가 밑에서 우리를 찾아 주셨습니다.
내 영혼이 잘 됨같이 내가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한다. 이게 너 자신은 이런 것이다.
내 영혼아 야훼를 송축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 성호를 송축하라. 내 영혼아 야훼를 송축하며 그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 저가 내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내 모든 병을 사하시며 내 생명을 파멸에서 구속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좋은 것으로 내 소원을 만족케 하사 내 청춘으로 독수리같이 새롭게 하는도다. 이게 내 정체성인 것입니다. 성경이 십자가를 통해서 근본적인 정체성을 가르치고 그 성경 전체가 여러분을 어떠한 사람이라는 확실한 정체성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누구입니까? 야훼가 여러분 하나님 아니십니까? 야훼는 여러분의 피난처요, 요새요, 의지하는 하나님이 되지 않습니까? 밤에 놀램과 낮에 흐르는 살과 흑암 중에 흥하는 염병과 백주에 황폐케 하는 파멸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천인이 내 곁에서 만인이 내 우편에서 엎드러지나 그 재앙이 내게 가까이 오지 못합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나의 피난처로 생각하고 그를 여러분의 의지하는 곳으로 삼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서 여러분을 지켜 주시고 그 손으로 여러분을 붙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자기의 정체성을 알기 위해서 늘 성경을 읽으십시오. 성경을 묵상하십시오. 성경은 여러분이 누가 된 것을 알게 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오중복음과 삼중축복은 가장 근본적인 내 자체의 모습이고 거기에 서서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하나님이 주신 모든 약속은 여러분이 어떠한 사람이 된 것을 가르켜 주므로 알면 알수록 내 정체성이 확대되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가 어른이 된 것처럼 신앙의 어린 아이가 신앙의 어른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 누굽니까? 어떠한 사람입니까? 죄짓고 불의하고 추악한 사람입니까? 허무하게 태어나서 살다가 허무하게 죽는 사람입니까? 죽고 한줌 흙으로 돌아가면 사라져 버리는 존재입니까? 안 그러면 십자가 예수의 보혈을 통해서 새사람이 되었습니까? 하나님이 말씀하는 여러분은 십자가를 통해서 구속받은 여러분 자신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 보고 말씀하십니다. 너는 예수님의 보혈로 용서받은 의로운 사람이다. 이것을 알아라. 너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된 사람이다. 너는 내 아들이 채찍에 맞음으로 병에서 고침 받은 사람이다. 너는 내 아들이 저주를 받음으로 아브라함의 복을 받고 저주에서 해방된 사람이다. 너는 죽더라도 부활하고 승천해서 나와 더불어 영원히 살 사람이다. 이것을 믿느냐. 이것을 아느냐? 이것을 하나님이 물으시는 것입니다. 그 정체성을 내가 알고 그것을 주장해야 되는 것입니다. 절대적인 진리입니다. 그럴 수도 있고 안 그럴 수도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렇다면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이 안 그렇다면 안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렇지 않다는 말 안했는데도 불구하고 자기가 자꾸 그렇지 않다고 말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채찍에 맞음으로 나았다고 했으면 나았다고 말해야지 그 다음에 안 나았다는 말은 하지 말아야 돼요. 하나님이 안한 말을 왜 합니까? 여러분이 하나님보다 큽니까? 하나님이 안한 말은 하지 마세요. 하나님이 하신 말은 예수님이 하신 것처럼 성경에 기록되었으되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머리가 두 쪽이 나더라도 그 말을 하십시오.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나는 죽더라도 하나님 말씀 믿고 죽지 하나님 이외의 말은 안 듣는다. 이 절대 진리를 확실히 믿고 나갈 때 여러분은 하나님과 같이 가고 하나님은 기뻐하시고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고 하나님이 박수쳐 주시고 밀어주시고 기뻐해 주시는 것입니다.

<기도>
우리 다 같이 고개 숙여 기도드리겠습니다.
살아계신 아버지 하나님, 수많은 사람들이 오늘날 자기 정체성이 불확실하고 자기 정체성이 불명하여 불명한 사람이 되어서 마귀의 지배를 받고 있는 것입니다. 아버지여 도와주셔서 정체성이 분명한 사람이 되어서 늘 마귀와 운명과 환경을 지배하고 이기는 승리자가 되게 도와주시옵시고 운명의 노예가 되지 않게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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