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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눅10:38-4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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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정용섭 목사 |
참고 : | http://dabia.net/xe/39176 |
2007.07.29
두 이야기 함께 읽기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마리아와 마르다 자매에 관한 이야기는 너무나 유명해서 제가 굳이 자세하게 설명할 필요도 없을 것 같습니다. 여러분들도 이 본문으로 된 설교를 여러 번 들었을 겁니다. 본문을 직접 설명하기 전에 마리아와 마르다 자매에 관한 다른 본문을 소개하는 게 여러분들에게 더 도움이 될지 모르겠군요. 요한복음에도 이들 자매 이야기가 나옵니다. 큰 병이 들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고 하는 나사로 이야기의 배경으로 이들 자매가 나옵니다. 요한복음 11장입니다. 그 이야기에는 나사로가 마리아와 마르다의 오빠로 등장합니다. 요한복음 11장에 이어 12장에 이들 세 남매 이야기가 다시 나옵니다. 바로 이 이야기가 오늘 본문인 누가복음 이야기와 간접적으로 연결됩니다. 그 이야기는 다음과 같습니다.
베다니라는 마을에서 예수님을 위한 잔치가 베풀어졌습니다. 아마 나사로를 살리신 것에 대한 답례이겠지요. 마르타는 그 자리에서 손님들의 시중을 들고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과 비슷한 상황입니다. 그런데 마리아에 관한 이야기는 약간 달라집니다. 마리아는 값이 많이 나가는 나르드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 발을 닦아드렸다고 합니다. 그러자 가리옷 사람 유다가 불평을 터뜨렸습니다. 이걸 팔아서 가난한 사람을 도와야지 왜 허비하느냐고 말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내 장례일을 위하여 하는 일이니 이 여자 일에 참견하지 마라. 가난한 사람들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지만 나는 언제나 함께 있지는 않을 것이다.”(요 12:7,8) 누가복음에서 마리아의 행동에 불만을 터뜨린 사람은 마르타였는데 반해서 여기 요한복음에서는 가리옷 유다였습니다. 요한복음과 누가복음에서 발견되는 차이들은 복음서 기자마다 그 당시 예수님에 관한 전승을 조금씩 다르게 받아들였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나 그 중심 메시지는 양쪽 모두 다를 게 하나도 없습니다. 이제 여러분은 마리아와 마리아 자매에 관한 요한복음의 이 이야기를 염두에 두시고, 다시 누가복음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보십시오.
마르타의 동생 마리아
마르다는 여행 중에 계시는 예수님을 자기 집에 모셔 들였습니다. 성서기자는 그 일이 어떻게 일어난 것인지 자세하게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요한복음서를 근거로 본다면 예수님은 이들 자매와 일찍이 잘 알고 지냈을 겁니다. 지금 예수님은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중입니다. 그 여행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는 여러분이 짐작하실 겁니다. 갈릴리에서 시작된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이 많은 곳에 알려졌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이르렀다고 선포하셨습니다. 그 하나님의 나라에 참여하는 길은 회개였습니다. 이게 바리새인들과 유대교 지도자들의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율법과 예루살렘 성전에 모든 걸 걸어두었던 그들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오직 회개(메타노이아)로만 가능하다는 예수님의 말씀이 들어올 리가 없습니다. 더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에서 일어날 일들을 행하셨습니다. 귀신을 쫓아내고, 병자를 고치셨습니다. 인간이 총체적으로 구원받는 일들이 예수님에게 일어난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유대교 지도자들과 예수님 사이에 충돌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깊이 생각하셨겠지요. 이스라엘의 변방인 갈릴리 호수 근처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는 것에 만족해야 하는지, 아니면 유대교의 총본산이라 할 수 있는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야 하는지를 말입니다. 예루살렘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생사를 담보하는 일입니다. 운이 좋으면 목숨을 부지하겠지만, 그렇지 못하면 죽을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자신이 당할 수난에 대해서 여러 번 예고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결국 예루살렘으로 들어가기로 결정하셨습니다. 배수진을 치는 심정으로 예루살렘을 향해서 가시는 예수님은 지금 몸과 마음이 지쳐 있습니다. 이런 여행길에 나선 예수님을 마르타가 자기 집에 모신 것입니다.
마르타는 예수님을 시중드는 일에 정신이 없었습니다. 아마 여러분도 그런 경험이 있었을 겁니다. 귀한 손님이 집을 찾아오면 공연히 마음이 바빠집니다. 사돈댁이나 아이들의 선생님, 목사님이 찾아오셨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아니 오늘 본문처럼 예수님이 오셨다고 생각해보십시오. 특히나 지금 예수님은 예루살렘 입성을 준비하는 중이래서 어딘가 비장감이 엿보입니다. 마르타는 예수님의 긴 여행을 위해서 온갖 보양식을 준비했을지 모르지요. 자기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 하는 중입니다.
마르타에게는 마리아라는 동생이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따르면 마리아는 주님의 발치에 앉아서 말씀을 듣고 있었다고 합니다. 마르타는 부엌일로 분주한 반면에 마리아는 지금 별로 할 일이 없는 여자처럼 주님의 발 앞에 앉아 있습니다. 서로 대비되지만 둘 다 아름다운 모습니다. 만약 제가 그림을 그릴 줄 안다면 이 장면을 화폭에 담고 싶군요. 여러분이 화가라고 한다면 어느 쪽에 무게를 두고 그리시겠어요? 부엌의 마르타입니까, 거실의 마리아입니까?
마르타는 이런 상황이 어딘가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어떤 일을 당할지 모르는 아주 위험한 여행에 나선 예수님을 위해서 무언가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싶어서 마음이 쫓기는 마르타의 눈에 마리아의 행동은 철딱서니 없어 보였습니다. 부엌일이 오죽 많습니까? 그런데 저렇게 앉아 있다니 말입니다. 어쩌면 마리아는 평소에도 부엌일을 언니에게 맡겨두는 스타일이었을지 모릅니다. 누가복음이나 요한복음이 이들 자매의 부모에 관해서 아무 말이 없고, 지금 마르타가 부엌일을 도맡아 하는 걸 보면 이들 자매는 일찍 부모를 여의였는지 모릅니다. 마르타는 마리아의 언니이면서 동시에 어머니 역할까지 했겠지요. 마리아는 버릇없는 아이로 자랐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 습관이 몸에 배어 지금 언니가 정신없이 바쁜데도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습니다. 정말 얄미운 마르아입니다. 그래서 그네는 예수님에게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주님, 제 동생이 저에게만 일을 떠맡기는데 이것을 보시고도 가만 두십니까? 마리아더러 저를 좀 거들어주라고 일러주십시오.”(40절)
마르타의 이 주장은 누가 보더라도 옳습니다. 언니에게 모든 부엌일을 맡겨두는 마리아는 분명히 문제가 있습니다. 교회에서도 일을 나누어야지 어떤 사람에게만 맡겨두면 문제가 생기기 마련입니다. 집에서도 그렇지요. 저희 집에 딸이 둘입니다. 저는 아이들에게 부엌일을 나누어서 하라고 말합니다. 물론 저도 나누어서 합니다. 저는 주로 거실과 부엌 청소, 그리고 쓰레기 버리는 일을 합니다. 쓰레기 처리가 만만한 게 아닙니다. 분리수거에 따라야 하구요, 특히 요즘처럼 무더운 여름철에는 음식물 처리가 까다롭습니다. 만약 저희 집에 귀한 손님이 왔는데 큰 딸 혼자서 일하고 작은 딸이 손님 앞에 앉아만 있다면 제가 따끔하게 타일렀을 겁니다. 마르다는 오래 참았을 겁니다. 동생이 곧 나오겠지 하고 이제나 저제나 기다렸겠지요. 전혀 나올 기색이 없으니까 마르다는 더 참지 못하고 예수님에게 말씀드린 겁니다. 그녀의 행동은 전혀 이상한 게 아닙니다.
마르타의 이런 행동에는 또 하나의 다른 차원이 있는 게 아닐는지요. 마르타는 지금 동생이 자기를 도와주지 않는다는 사실만을 단순히 불평하는 게 아닐지 모릅니다. 마리아가 자기를 도와주지 않는 거야 늘 그랬으니까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겠지만, 마리아 때문에 예수님이 쉬지 못한다는 게 마음에 걸렸을지 모릅니다. 그렇다면 지금 마르타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넓고 깊은 차원에서 마리아를 충고하는 것입니다. 마르타의 속마음을 우리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마리아더러 저를 좀 거들어 주라고 일러 주십시오.” 하는 마르타의 발언이 그렇게 잘못된 게 아니라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걱정이 많은 마르타
만약 제가 예수님의 입장이라고 한다면 마르타의 말을 듣고 마리아에게 이렇게 말했을 겁니다. “마리아야, 내 이야기는 나중에 듣고 가서 언니를 돕거라.”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가 예상하지 못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마르타, 마르타, 너는 많은 일에 다 마음을 쓰며 걱정하지만 실상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예상외의 말씀이긴 하지만 이 말씀을 이해하는 건 그렇게 어려운 게 아닙니다. 여러분 스스로 생각해보십시오.
마르타는 실제로 많은 일로 걱정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머리가 복잡한 거지요. 물론 그런 많은 걱정들은 아주 순수하고 좋을 것들입니다. 어떻게 하면 예수님을 편하게 해드릴까 하는 거였으니까 말입니다. 헬라어 성경은 마르타의 이런 봉사의 일을 ‘디아콘’이라는 단어로 설명합니다. 그 단어에서 오늘 ‘집사’(디컨)라는 직분이 나왔고, 기독교 봉사단체를 디아코니아라고 부릅니다. 마르다의 이 봉사는 귀한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것이라고 해도 그것으로 인해서 걱정이 많아지면 결코 좋은 결과를 맺을 수 없겠지요.
오늘 본문 이야기는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상황을 간접적으로 일러줍니다. 아주 오래 전부터 교회의 기능은 네 가지로 구분됩니다. 케리그마, 디다케, 코이노니아, 디아코니아가 그것입니다. 봉사는 이렇게 교회가 교회로 기능하는데 없어서는 안 될 본질적인 요소입니다. 봉사가 중요하기는 하지만 그것이 지나칠 때는 걱정거리가 되고 맙니다. 교회도 이런 걱정에 휩싸일 때가 많습니다. 예컨대, 결식노인들에게 밥을 주는 일은 아주 소중합니다. 그런데 어느 틈엔가 그런 일들도 경쟁적으로 펼치게 되었습니다. 교회의 봉사가 교회를 선전하기 위한 수단이 될 때도 많습니다. 이렇게 되면 여기에 연관된 사람들은 걱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런 점에서 교회가 일을 너무 많이 널려놓기보다는 한 가지 일에 집중하는 게 훨씬 바람직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게 무엇인지는 각각의 교회가 결정해야겠지요.
실상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라는 우리 주님의 말씀은 교회생활만이 아니라 우리의 모든 삶에 그대로 적용됩니다. 우리는 밥을 먹을 때 밥만 생각해야 합니다. 변소에 가서는 배설만 생각해야합니다. 공부할 때는 그것만 생각해야겠지요. 예배를 드릴 때는 하나님의 영광만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게 잘 안 됩니다. 밥을 먹으면서도 사업 걱정을 많이 합니다. 예배를 드리면서도 집중하지 못합니다. 그게 왜 잘 되지 않을까요? 우리의 잘못된 삶의 습관이 그렇게 만듭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우리의 영성이 건조하기 때문에 그렇게 됩니다. 밥을 생각해보세요. 밥 한 알은 우주의 모든 힘이 결집된 것입니다. 그걸 우리가 먹는다고 생각해보세요. 엄청난 사건입니다. 예배가 삼위일체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는 것이라고 실제로 생각해보십시오. 창조의 하나님,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신 예수님, 영으로 우리와 함께 하시는 성령에게 우리의 영혼을 드린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심포니 연주회장에서 오직 음악에만 집중하는 연주자들처럼 예배에 참여한 사람들도 그 하나님에게만 집중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영성이 건조하면 아무리 한 가지에 집중하려고해도 되지 않습니다. 온갖 망상이, 온갖 자기연민이 자기를 사로잡습니다.
마리아의 선택
예수님은 마르타에게 한 마디 더 하셨습니다. “마리아는 참 좋은 몫을 택했다. 그것을 빼앗아서는 안 된다.” 마리아라고 해서 예수님에게 맛있는 거를 대접하고 싶은 마음이 왜 없었겠습니까만 그네는 그것보다 더 좋은 몫을 선택했습니다. 예수님 발 앞에서 그 말씀에만 집중했습니다. 그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마리아의 말씀 든는 것보다 마르다의 디아코니아가 더 쉬울지 모릅니다. 비록 오늘 이야기에서 마리아가 말 한 마디도 하지 않지만 그네는 겉으로 보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숨어 있는 영적인 세계에 집중할 줄 아는 사람임에 틀림없습니다. 이게 곧 영성입니다. 이런 영성에 근거해서 그네는 자연스럽게 좋은 것을 택할 수 있었습니다.
오해는 마십시오. 지금 부엌에서 일하는 마르다는 무조건 잘못되었고, 주님의 말씀을 듣는 마리아는 무조건 잘했다는 게 아닙니다. 마리아도 경우에 따라서 부엌에서 일할 것입니다. 핵심은 마리아가 지금 자기의 일에 집중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구체적으로 예수님과의 관계에 집중한다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에게 집중할 때만 우리의 영성이 깊어지고, 그때만 우리의 일상에도 집중력이 생깁니다. 마리아는 아무에게도 빼앗기지 않을 그 일을 선택한 것입니다.
설교 앞머리에서 설명한 요한복음 12장으로 돌아가 봅시다. 베다니 마을에서 예수님을 위한 만찬회가 벌어졌습니다. 마르타는 손님들을 시중들고 있었습니다. 그때 마리아는 값진 나르드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 발을 닦아드렸습니다. 예수님은 불평하는 가리옷 유다에게 “이 여자 일에 참견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마리아의 몫은 빼앗길 수 없다는 오늘 본문말씀과 같은 의미입니다. 이 여자에게 참견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향유가 곧 예수님의 장례를 준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을 포함해서 거기에 모였던 많은 사람들 중에서 예수님의 장례를 준비한 사람은 마리아밖에 없었습니다. 그네만이 예수님에게 집중했습니다. 자신도 지금 예수님에게 집중하고 있다고 말씀하실 분들이 있을 겁니다.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십시오. 표면적으로는 예수님에게 집중한다고 하지만 그게 다 자기에 대한 관심에 불과할지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의 영혼이 혼란스러워지는지 모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마리아처럼 예수님에게 집중하는 것이 바로 기독교 신앙의 핵심입니다. 그 신앙의 세계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곧 기독교 영성입니다. 아무도 이것을 우리에게 빼앗지 못합니다. 거꾸로, 그 이외의 것은 모두 빼앗길 수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마리아의 이런 영성이 풍부해지기를 바랍니다.
두 이야기 함께 읽기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마리아와 마르다 자매에 관한 이야기는 너무나 유명해서 제가 굳이 자세하게 설명할 필요도 없을 것 같습니다. 여러분들도 이 본문으로 된 설교를 여러 번 들었을 겁니다. 본문을 직접 설명하기 전에 마리아와 마르다 자매에 관한 다른 본문을 소개하는 게 여러분들에게 더 도움이 될지 모르겠군요. 요한복음에도 이들 자매 이야기가 나옵니다. 큰 병이 들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고 하는 나사로 이야기의 배경으로 이들 자매가 나옵니다. 요한복음 11장입니다. 그 이야기에는 나사로가 마리아와 마르다의 오빠로 등장합니다. 요한복음 11장에 이어 12장에 이들 세 남매 이야기가 다시 나옵니다. 바로 이 이야기가 오늘 본문인 누가복음 이야기와 간접적으로 연결됩니다. 그 이야기는 다음과 같습니다.
베다니라는 마을에서 예수님을 위한 잔치가 베풀어졌습니다. 아마 나사로를 살리신 것에 대한 답례이겠지요. 마르타는 그 자리에서 손님들의 시중을 들고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과 비슷한 상황입니다. 그런데 마리아에 관한 이야기는 약간 달라집니다. 마리아는 값이 많이 나가는 나르드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 발을 닦아드렸다고 합니다. 그러자 가리옷 사람 유다가 불평을 터뜨렸습니다. 이걸 팔아서 가난한 사람을 도와야지 왜 허비하느냐고 말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내 장례일을 위하여 하는 일이니 이 여자 일에 참견하지 마라. 가난한 사람들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지만 나는 언제나 함께 있지는 않을 것이다.”(요 12:7,8) 누가복음에서 마리아의 행동에 불만을 터뜨린 사람은 마르타였는데 반해서 여기 요한복음에서는 가리옷 유다였습니다. 요한복음과 누가복음에서 발견되는 차이들은 복음서 기자마다 그 당시 예수님에 관한 전승을 조금씩 다르게 받아들였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나 그 중심 메시지는 양쪽 모두 다를 게 하나도 없습니다. 이제 여러분은 마리아와 마리아 자매에 관한 요한복음의 이 이야기를 염두에 두시고, 다시 누가복음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보십시오.
마르타의 동생 마리아
마르다는 여행 중에 계시는 예수님을 자기 집에 모셔 들였습니다. 성서기자는 그 일이 어떻게 일어난 것인지 자세하게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요한복음서를 근거로 본다면 예수님은 이들 자매와 일찍이 잘 알고 지냈을 겁니다. 지금 예수님은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중입니다. 그 여행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는 여러분이 짐작하실 겁니다. 갈릴리에서 시작된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이 많은 곳에 알려졌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이르렀다고 선포하셨습니다. 그 하나님의 나라에 참여하는 길은 회개였습니다. 이게 바리새인들과 유대교 지도자들의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율법과 예루살렘 성전에 모든 걸 걸어두었던 그들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오직 회개(메타노이아)로만 가능하다는 예수님의 말씀이 들어올 리가 없습니다. 더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에서 일어날 일들을 행하셨습니다. 귀신을 쫓아내고, 병자를 고치셨습니다. 인간이 총체적으로 구원받는 일들이 예수님에게 일어난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유대교 지도자들과 예수님 사이에 충돌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깊이 생각하셨겠지요. 이스라엘의 변방인 갈릴리 호수 근처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는 것에 만족해야 하는지, 아니면 유대교의 총본산이라 할 수 있는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야 하는지를 말입니다. 예루살렘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생사를 담보하는 일입니다. 운이 좋으면 목숨을 부지하겠지만, 그렇지 못하면 죽을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자신이 당할 수난에 대해서 여러 번 예고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결국 예루살렘으로 들어가기로 결정하셨습니다. 배수진을 치는 심정으로 예루살렘을 향해서 가시는 예수님은 지금 몸과 마음이 지쳐 있습니다. 이런 여행길에 나선 예수님을 마르타가 자기 집에 모신 것입니다.
마르타는 예수님을 시중드는 일에 정신이 없었습니다. 아마 여러분도 그런 경험이 있었을 겁니다. 귀한 손님이 집을 찾아오면 공연히 마음이 바빠집니다. 사돈댁이나 아이들의 선생님, 목사님이 찾아오셨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아니 오늘 본문처럼 예수님이 오셨다고 생각해보십시오. 특히나 지금 예수님은 예루살렘 입성을 준비하는 중이래서 어딘가 비장감이 엿보입니다. 마르타는 예수님의 긴 여행을 위해서 온갖 보양식을 준비했을지 모르지요. 자기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 하는 중입니다.
마르타에게는 마리아라는 동생이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따르면 마리아는 주님의 발치에 앉아서 말씀을 듣고 있었다고 합니다. 마르타는 부엌일로 분주한 반면에 마리아는 지금 별로 할 일이 없는 여자처럼 주님의 발 앞에 앉아 있습니다. 서로 대비되지만 둘 다 아름다운 모습니다. 만약 제가 그림을 그릴 줄 안다면 이 장면을 화폭에 담고 싶군요. 여러분이 화가라고 한다면 어느 쪽에 무게를 두고 그리시겠어요? 부엌의 마르타입니까, 거실의 마리아입니까?
마르타는 이런 상황이 어딘가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어떤 일을 당할지 모르는 아주 위험한 여행에 나선 예수님을 위해서 무언가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싶어서 마음이 쫓기는 마르타의 눈에 마리아의 행동은 철딱서니 없어 보였습니다. 부엌일이 오죽 많습니까? 그런데 저렇게 앉아 있다니 말입니다. 어쩌면 마리아는 평소에도 부엌일을 언니에게 맡겨두는 스타일이었을지 모릅니다. 누가복음이나 요한복음이 이들 자매의 부모에 관해서 아무 말이 없고, 지금 마르타가 부엌일을 도맡아 하는 걸 보면 이들 자매는 일찍 부모를 여의였는지 모릅니다. 마르타는 마리아의 언니이면서 동시에 어머니 역할까지 했겠지요. 마리아는 버릇없는 아이로 자랐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 습관이 몸에 배어 지금 언니가 정신없이 바쁜데도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습니다. 정말 얄미운 마르아입니다. 그래서 그네는 예수님에게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주님, 제 동생이 저에게만 일을 떠맡기는데 이것을 보시고도 가만 두십니까? 마리아더러 저를 좀 거들어주라고 일러주십시오.”(40절)
마르타의 이 주장은 누가 보더라도 옳습니다. 언니에게 모든 부엌일을 맡겨두는 마리아는 분명히 문제가 있습니다. 교회에서도 일을 나누어야지 어떤 사람에게만 맡겨두면 문제가 생기기 마련입니다. 집에서도 그렇지요. 저희 집에 딸이 둘입니다. 저는 아이들에게 부엌일을 나누어서 하라고 말합니다. 물론 저도 나누어서 합니다. 저는 주로 거실과 부엌 청소, 그리고 쓰레기 버리는 일을 합니다. 쓰레기 처리가 만만한 게 아닙니다. 분리수거에 따라야 하구요, 특히 요즘처럼 무더운 여름철에는 음식물 처리가 까다롭습니다. 만약 저희 집에 귀한 손님이 왔는데 큰 딸 혼자서 일하고 작은 딸이 손님 앞에 앉아만 있다면 제가 따끔하게 타일렀을 겁니다. 마르다는 오래 참았을 겁니다. 동생이 곧 나오겠지 하고 이제나 저제나 기다렸겠지요. 전혀 나올 기색이 없으니까 마르다는 더 참지 못하고 예수님에게 말씀드린 겁니다. 그녀의 행동은 전혀 이상한 게 아닙니다.
마르타의 이런 행동에는 또 하나의 다른 차원이 있는 게 아닐는지요. 마르타는 지금 동생이 자기를 도와주지 않는다는 사실만을 단순히 불평하는 게 아닐지 모릅니다. 마리아가 자기를 도와주지 않는 거야 늘 그랬으니까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겠지만, 마리아 때문에 예수님이 쉬지 못한다는 게 마음에 걸렸을지 모릅니다. 그렇다면 지금 마르타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넓고 깊은 차원에서 마리아를 충고하는 것입니다. 마르타의 속마음을 우리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마리아더러 저를 좀 거들어 주라고 일러 주십시오.” 하는 마르타의 발언이 그렇게 잘못된 게 아니라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걱정이 많은 마르타
만약 제가 예수님의 입장이라고 한다면 마르타의 말을 듣고 마리아에게 이렇게 말했을 겁니다. “마리아야, 내 이야기는 나중에 듣고 가서 언니를 돕거라.”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가 예상하지 못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마르타, 마르타, 너는 많은 일에 다 마음을 쓰며 걱정하지만 실상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예상외의 말씀이긴 하지만 이 말씀을 이해하는 건 그렇게 어려운 게 아닙니다. 여러분 스스로 생각해보십시오.
마르타는 실제로 많은 일로 걱정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머리가 복잡한 거지요. 물론 그런 많은 걱정들은 아주 순수하고 좋을 것들입니다. 어떻게 하면 예수님을 편하게 해드릴까 하는 거였으니까 말입니다. 헬라어 성경은 마르타의 이런 봉사의 일을 ‘디아콘’이라는 단어로 설명합니다. 그 단어에서 오늘 ‘집사’(디컨)라는 직분이 나왔고, 기독교 봉사단체를 디아코니아라고 부릅니다. 마르다의 이 봉사는 귀한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것이라고 해도 그것으로 인해서 걱정이 많아지면 결코 좋은 결과를 맺을 수 없겠지요.
오늘 본문 이야기는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상황을 간접적으로 일러줍니다. 아주 오래 전부터 교회의 기능은 네 가지로 구분됩니다. 케리그마, 디다케, 코이노니아, 디아코니아가 그것입니다. 봉사는 이렇게 교회가 교회로 기능하는데 없어서는 안 될 본질적인 요소입니다. 봉사가 중요하기는 하지만 그것이 지나칠 때는 걱정거리가 되고 맙니다. 교회도 이런 걱정에 휩싸일 때가 많습니다. 예컨대, 결식노인들에게 밥을 주는 일은 아주 소중합니다. 그런데 어느 틈엔가 그런 일들도 경쟁적으로 펼치게 되었습니다. 교회의 봉사가 교회를 선전하기 위한 수단이 될 때도 많습니다. 이렇게 되면 여기에 연관된 사람들은 걱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런 점에서 교회가 일을 너무 많이 널려놓기보다는 한 가지 일에 집중하는 게 훨씬 바람직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게 무엇인지는 각각의 교회가 결정해야겠지요.
실상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라는 우리 주님의 말씀은 교회생활만이 아니라 우리의 모든 삶에 그대로 적용됩니다. 우리는 밥을 먹을 때 밥만 생각해야 합니다. 변소에 가서는 배설만 생각해야합니다. 공부할 때는 그것만 생각해야겠지요. 예배를 드릴 때는 하나님의 영광만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게 잘 안 됩니다. 밥을 먹으면서도 사업 걱정을 많이 합니다. 예배를 드리면서도 집중하지 못합니다. 그게 왜 잘 되지 않을까요? 우리의 잘못된 삶의 습관이 그렇게 만듭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우리의 영성이 건조하기 때문에 그렇게 됩니다. 밥을 생각해보세요. 밥 한 알은 우주의 모든 힘이 결집된 것입니다. 그걸 우리가 먹는다고 생각해보세요. 엄청난 사건입니다. 예배가 삼위일체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는 것이라고 실제로 생각해보십시오. 창조의 하나님,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신 예수님, 영으로 우리와 함께 하시는 성령에게 우리의 영혼을 드린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심포니 연주회장에서 오직 음악에만 집중하는 연주자들처럼 예배에 참여한 사람들도 그 하나님에게만 집중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영성이 건조하면 아무리 한 가지에 집중하려고해도 되지 않습니다. 온갖 망상이, 온갖 자기연민이 자기를 사로잡습니다.
마리아의 선택
예수님은 마르타에게 한 마디 더 하셨습니다. “마리아는 참 좋은 몫을 택했다. 그것을 빼앗아서는 안 된다.” 마리아라고 해서 예수님에게 맛있는 거를 대접하고 싶은 마음이 왜 없었겠습니까만 그네는 그것보다 더 좋은 몫을 선택했습니다. 예수님 발 앞에서 그 말씀에만 집중했습니다. 그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마리아의 말씀 든는 것보다 마르다의 디아코니아가 더 쉬울지 모릅니다. 비록 오늘 이야기에서 마리아가 말 한 마디도 하지 않지만 그네는 겉으로 보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숨어 있는 영적인 세계에 집중할 줄 아는 사람임에 틀림없습니다. 이게 곧 영성입니다. 이런 영성에 근거해서 그네는 자연스럽게 좋은 것을 택할 수 있었습니다.
오해는 마십시오. 지금 부엌에서 일하는 마르다는 무조건 잘못되었고, 주님의 말씀을 듣는 마리아는 무조건 잘했다는 게 아닙니다. 마리아도 경우에 따라서 부엌에서 일할 것입니다. 핵심은 마리아가 지금 자기의 일에 집중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구체적으로 예수님과의 관계에 집중한다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에게 집중할 때만 우리의 영성이 깊어지고, 그때만 우리의 일상에도 집중력이 생깁니다. 마리아는 아무에게도 빼앗기지 않을 그 일을 선택한 것입니다.
설교 앞머리에서 설명한 요한복음 12장으로 돌아가 봅시다. 베다니 마을에서 예수님을 위한 만찬회가 벌어졌습니다. 마르타는 손님들을 시중들고 있었습니다. 그때 마리아는 값진 나르드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 발을 닦아드렸습니다. 예수님은 불평하는 가리옷 유다에게 “이 여자 일에 참견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마리아의 몫은 빼앗길 수 없다는 오늘 본문말씀과 같은 의미입니다. 이 여자에게 참견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향유가 곧 예수님의 장례를 준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을 포함해서 거기에 모였던 많은 사람들 중에서 예수님의 장례를 준비한 사람은 마리아밖에 없었습니다. 그네만이 예수님에게 집중했습니다. 자신도 지금 예수님에게 집중하고 있다고 말씀하실 분들이 있을 겁니다.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십시오. 표면적으로는 예수님에게 집중한다고 하지만 그게 다 자기에 대한 관심에 불과할지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의 영혼이 혼란스러워지는지 모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마리아처럼 예수님에게 집중하는 것이 바로 기독교 신앙의 핵심입니다. 그 신앙의 세계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곧 기독교 영성입니다. 아무도 이것을 우리에게 빼앗지 못합니다. 거꾸로, 그 이외의 것은 모두 빼앗길 수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마리아의 이런 영성이 풍부해지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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