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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를 통한 만물의 화해

골로새서 정용섭 목사............... 조회 수 2606 추천 수 0 2010.02.23 23:5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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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골1:15-20 
설교자 : 정용섭 목사 
참고 : http://dabia.net/xe/39185 
emoticon  2007.08.5.

아프가니스탄 사태
요즘 한국교회는 지난 130년 역사 이후로 가장 큰 시련기에 놓여 있습니다. 아프가니스탄으로 단기선교에 나섰던 샘물교회 젊은이들이 탈레반에게 인질로 잡혀 있습니다. 현지 가이드를 포함해서 23명이 피랍되었는데, 그중에 이미 2명이 살해당했습니다. 우리는 피랍된 젊은이들이 겪어야 할 공포와 두려움, 그리고 가족들이 견뎌내야 할 창자를 끊어내는 듯한 고통이 어느 정도인지 말로 설명할 수 없습니다. 피를 말린다고 밖에는 어떻게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그 젊은이들은 직접적인 기독교 선교가 아니라 봉사를 위해서 위험한 그 지역에 갔습니다. 개인적으로 경제적인, 시간적인 부담이 있었겠지요. 좋은 뜻으로 일정한 자기희생을 담당한 채 아프가니스탄에 건너간 이들의 목숨이 지금 경각에 달렸습니다. 왜 이런 일들이 벌어질까요?
탈레반이 나쁜 놈들이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겠지요. 자신들과 직접적으로 상관이 없는 민간인을 인질로 삼는 그들의 행위는 그 무엇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물론 그들은 나름으로 할 말은 있을 겁니다. 이건 아주 복잡한 국제 정세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가 쉽사리 재단할 수는 없습니다. 거칠게 한 마디만 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탈레반은 미국 9.11 테러가 일어난 후 그 배후로 지목되어 미국으로부터 공격을 받기 전까지 아프가니스탄의 합법적인 정권이었습니다. 그들은 현재 미국의 비호를 받는 아프가니스탄 정권과 내전을 벌이고 있는 중입니다. 그들은 테러와 인질 납치의 방식이 아니면 자신들의 목표를 관철시킬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미국도 아프가니스탄에서 수많은 민간인을 죽이고 현재도 수감하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아무리 그렇다 하지만 미국 민간인도 아니고 한국 민간인을 납치해서 살해하고 정치적 흥정의 수단으로 사용한다는 것은 용납될 수 없습니다.
또 어떤 분들은 미국을 원망합니다.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공격과 이라크 전쟁을 지적하면서 탈레반보다 미국의 책임이 더 크다고 주장합니다. 미국의 제국주의적 행태에 대해서는 변호할 말이 하나도 없습니다. 세계의 평화를 수호한다는 명분으로 훨씬 많은 분쟁을 일으키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아프가니스탄에 인질로 잡혀 있는 분들의 목숨을 구하는 일에 모든 신경을 집중해야 할 이 순간에 미국을 탓한들 여기에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저는 문제를 일으킨 탈레반이 나쁜 놈들이야, 또는 원인을 제공한 미국이 문제야 하는 것에 대해서는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건 정치학자들이 전문적으로 접근해야 할 문제입니다. 이번 사태로 인해서 한국사회가 한국교회를 향해서 쏟아내고 있는 분노를 어떻게 감당해야 하는가 하는 점이 저에게 중요합니다. 이런 사태의 뉴스 꼭지마다 저주에 가까운 악풀이 쉬지 않습니다. “당해 싸다.”는 식의 논조가 강한 악플들입니다. 도대체 한국교회에 무슨 문제가 있기에 한국사회가 한국교회를 이렇게 냉소적으로, 적대적으로 바라보는 걸까요?
기독교를 향한 그들의 분노는 일단 기독교의 배타적 선교태도에 놓여 있습니다. 이들이 보이는 분노는 전혀 터무니없는 건 아닙니다. 일전에는 길거리에 앉아서 탁발수행하고 있는 스님의 머리에 한손을 올려놓은 어떤 축호전도인의 사진이 신문에 실린 적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다른 손에 대형 십자가를 잡고 있었습니다. 기독교의 배타성과 자기 우월적 사고방식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진이었습니다. 그런 몰상식한 행동을 한 사람은 물론 정상적인 기독교인이 아니지만 교회 밖의 일반 사람들은 그를 기독교과 일치해서 봅니다. 지난 몇 년 동안 영락교회에서는 사학법 재개정을 위한 특별집회와 심지어 삭발도 행해졌습니다. 한국을 대표하는 몇몇 대형교회 목사님들은 노무현 정권이 기독교를 핍박한다는 말을 설교 시간에 노골적으로 쏟아냅니다. 한국의 모든 교회가 그런 건 아닙니다만 한국사회를 향해서 매우 공격적이고 배타적인 모습을 보인 교회와 교회 대표자들이 한국교회 안에서 일정한 세력을 얻고 있다는 건 분명합니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는 경제 논리처럼 정상적으로 복음을 전하는 교회는 세상 사람들에게 드러나지 않고 이처럼 기독교 패권주의에 사로잡힌 교회들은 밖으로 많이 나타납니다. 결국 세상 사람들은 한국교회가 욕구불만에 가득하거나 자기 힘을 자랑하고 싶어서 안달이 난 람보처럼 생각하겠지요. 그것이 이번 사태로 드러난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이 도대체 무엇이게 이런 비통한 현상들이 일어나는 것일까요?

그리스도의 십자가
오늘 본문인 골 1:15-20절은 그리스도 찬양입니다. 바울은 골로새 교회에 보내는 편지를 쓰면서 그 당시 초기 기독교 공동체에서 불리던 이 찬송을 인용했습니다. 이런 점에서 이 그리스도 찬양은 단지 골로새 교회만이 아니라 그 당시 전체 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신앙의 내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앞부분은 일단 접어놓고 20절 말씀을 보십시오. 이 찬양에 의하면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만물의 화해자이십니다. 이 만물은 땅과 하늘을 모두 포함합니다. 하늘에는 태양과 별이 있습니다. 땅에는 인간을 비롯해서 모든 생명과 강, 산, 숲 등, 이 세상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이 세상의 만물을 화해시키셨습니다.
이 말은 곧 그 이전에는 하나님과 만물이 불화했다는 것을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그렇지요? 불화가 없었다면 화해니 뭐니 하는 말을 할 필요도 없습니다. 친구 사이, 또는 부부 사이에도 화해가 필요할 때는 그들이 반복, 불화할 때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만물과 불화한다는 말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일단 다음과 같이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은 여전히 고통 가운데 있습니다. 앞서 말한 아프가니스탄 사태도 역시 그렇지요. 단순히 탈레반이 나쁜 놈들이라거나 미국이 뻔뻔스런 나라라고 본다고 해서 이런 문제가 해결되는 게 아닙니다. 탈레반처럼 독한 사람들이나 미국처럼 뻔뻔한 나라가 없다고 해서 이 세상에 이런 험악한 일들이 벌어지지 않는 게 아닙니다. ‘밀양’이라는 영화의 배경이 남편의 죽음과 아들의 유괴였다고 합니다. 우리가 도저히 감당하기 어려운 사건들은 계속해서 일어납니다. 이런 문제들은 작게는 동네 꼬마들의 관계에서도 일어나고 크게는 국제관계에서도 일어납니다. 개인의 영혼에서도 일어납니다. 지나친 욕망과 불안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이런 일들은 심지어 우주의 차원에서도 일어납니다. 공룡이 멸망한 이유 중의 하나가 소행성의 지구충돌이라는 설이 있습니다. 앞으로 언젠가는 지구의 모든 생명을 멸종시킬 수 있는 소행성이 날아올 겁니다. 제가 일부러 기분 나쁜 예만 들었는지 모르겠군요. 하늘과 땅에는 물론 좋은 일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이 그렇게 안전하지 않다는 것만은 분명하지 않을까요?  초기 기독교인들은 이런 세상과 삶의 중심에 하나님과의 불화가 놓여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불화를 말하려는 게 아닙니다. 그들은 그렇게 부정적인 사고방식에 찌든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의 주요 관심은 훨씬 적극적인 화해입니다. 그리스도가 바로 하나님과 만물의 화해자라는 사실을 노래했습니다. 그리스도가 화해자라는 말은 곧 그에게서 모든 것들이 통일되었다는 뜻입니다. 그에게서 생명이 완성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가 바로 세계 창조의 완성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하나님과 만물이 화해했으며, 그래서 그리스도가 바로 창조의 완성자라고 한다면 그는 만물의 근원자라는 말도 됩니다.
오늘 본문의 그리스도 찬양은 바로 이 사실을 15-17절에서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시며, 만물보다 먼저 태어나셨습니다. 하늘과 땅의 만물은 바로 그리스도를 통해서 창조되었습니다. “만물은 그분을 통해서 그리고 그분을 위해서 창조되었습니다. 그분은 만물보다 앞서 계시고 만물은 그분으로 말미암아 존속합니다.”(16b,17) 2천 년 전에 마리아의 몸에서 태어났다가 33년 동안 살다가 빌라도에게 사형선고를 받아 십자가에 처형당한 예수님이 만물보다 먼저 태어났다는 말이 여러분에게 이상하게 들리시겠지요. 이런 찬양은 수학공식과는 다릅니다. 실험실에서 실험해서 증명할 수 있는 말씀이 아닙니다. 어떤 남자가 한 여자와 사랑에 빠졌다고 합시다. 이 남자는 그날부터 이 세상이 무지개색깔로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자신이 태어난 목적은 바로 이 여자를 만나기 위한 것으로 믿어졌습니다. 이 여자로 인해서 이 남자의 모든 삶이 전혀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되었습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바로 예수님에게서 전혀 새로운 세계를 만났습니다. 그를 통해서 만물이 하나님과 화해를 이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 믿음으로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만물보다 먼저 태어나신 분이라는 찬양을 부를 수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그런 찬양을 부릅니다.
이기서 우리의 질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 신앙의 모태라 할 수 있는 초기 기독교인들은 무슨 근거로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과 만물의 화해자라고 했을까요? 그 답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20b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곧 십자가에서 흘리신 예수의 피로써 평화를 이룩하셨습니다.” 여러분이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예수의 십자가가 곧 궁극적인 평화입니다. 하나님과 만물의 화해는 곧 진정한 평화를 가리킵니다. 이런 말이 조금 이상하게 들리는 분들이 있을 겁니다. 십자가에 처형당한 사람이 예수 이외에 많은데 왜 예수의 십자가만이 궁극적인 평화의 토대가 되는가 하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십자가의 죽음은 유다인들에게 비위에 거슬리고 이방인들에게는 어리석어 보였습니다.(고전 1:23,24) 그러나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는 메시아이며, 하느님의 힘이며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기독교의 복음의 자리는 바로 이 사실에 놓여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그것을 이해하든지 못하든지, 또는 동의하든지 못하든지 우리는 바로 이 사실에 우리의 신앙과 우리 삶을 걸어야 합니다. 이것을 선포하는 것이 바로 우리가 세상을 섬기는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그것 이외에 우리가 세상을 위해서 할 일은 별로 없습니다. 조금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모두 부스러기일 뿐입니다.
여러분은 십자가에서 흘린 예수의 피가 평화를 이루었다는 말씀을 좀더 진지하게 생각해야합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십자가에서 피를 흘린 사람은 수없이 많습니다. 남을 위한 희생의 피는 많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청계천 피복노동자들의 인권을 위해서 분신한 전태일 씨의 피를 그리스도의 피처럼 생각할 겁니다. 그러나 전태일의 피와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다릅니다. 생물학적으로는 똑같겠지요. 남을 위해서 자기를 희생한다는 점에서는 전태일의 피도 역시 예수의 피 못지않게 숭고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바로 이 대목에서 길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단지 남을 위해서 자신을 버리는 박애주의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게 아닙니다. 예수만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었으며, 만물 보다 먼저 태어나셨고, 그를 통해서, 그를 위해서 만물이 창조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그를, 그가 흘린 피를 믿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라는 말씀입니다. 그 증거를 대라, 하실 분이 있겠지요. 그 증거는 예수님에게 일어난 부활입니다. 부활의 증거를 대라고 다그치시겠어요? 여기서 우리는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신앙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 길밖에 없습니다. 교회의 본질 중의 하나인 사도성이 바로 여기에도 해당됩니다. 우리는 사도들의 신앙이 옳다는 사실을 전제하고 기독교인이 되었습니다. 공산당원들이 칼 마르크스의 프로레타리아 혁명사관이 옳다고 믿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초기 기독교의 증언들을 믿는 데만 머물지 않습니다. 그것이 왜 옳은지를 종말 때까지 증명해나가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신앙생활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의 평화
일단 여기까지는 우리가 어느 정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여전히 우리에게 남아 있는 궁금증은 실제로 이 세상에 평화가 일어나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생명의 충만함이 이미 예수의 부활에서 일어났는데, 실제로는 생명의 파괴되고 있으니 말입니다. 지금 초미의 관심사인 아프가니스탄 사태도 역시 생명파괴의 가장 적나라한 모습입니다. 앞길이 구만리 같은 청년들의 목숨이 국제정치공학의 도구가 되어버렸습니다. 탈레반은 이런 책임을 어떻게 지려고 하는 걸까요? 그리스도의 평화는 요원해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평화는 거짓말인가요? 실제가 아닌가요?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다. 이미 하나님의 궁극적인 역사에서는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과 만물의 화해가 일어났습니다.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은 바로 화해와 평화로 가득한 궁극적인 생명사건입니다. 이 사실을 우리는 우리가 지금 살아가는 역사에서 증명해나가야 합니다. 구체적으로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까요?
우리가 만물과 화해하며 살아가도록 최선을 다 하면 됩니다. 이미 그것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믿고 그렇게 살아가는 거지요. 그리스도의 평화가 이 땅에 이미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믿고 그렇게 살아가는 겁니다. 그 뒤의 모든 책임은 하나님이 지십니다. 그런데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만물’이 하나님과의 화해를 이루었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이 만물에는 타종교도 역시 포함됩니다. 우리와 다른 방식으로 종교생활을 하는 사람들도 역시 우리가 화해와 평화를 나눌 분들입니다. 우상숭배자들과 무슨 화해이며, 무슨 평화냐 하고 생각하는 분들은 골로새서의 그리스도 찬양을 부를 자격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종교다원주의를 받아들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예수님만이 그리스도이며, 메시야이십니다. 바로 그 예수 그리스도는 만물을 하나님과 화해시키셨습니다. 우리는 바로 그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이슬람교도들마저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과 화해되었습니다. 우리도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과 하나입니다. 이 사실을 믿는 우리는 지금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이것은 여러분이 풀어야 할 신앙적 숙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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