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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완성

히브리서 정용섭 목사............... 조회 수 2675 추천 수 0 2010.02.23 23:5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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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히11:32-12:2 
설교자 : 정용섭 목사 
참고 : http://dabia.net/xe/39241 
emoticon 2007.08.26.

기독교의 여러 가르침 중에서 믿음만큼 중요한 것은 별로 없다고 봐야합니다. 마틴 루터의 ‘솔라 피데’(sola fide) 개념 이후로 프로테스탄트는 이 믿음에 더욱 집중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고 인정받을 수 있는 길은 오직 믿음뿐이라는 루터의 주장은 이미 바울이 로마서에서 가르친 내용입니다. 이에 반해 로마 가톨릭교회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는 야고보의 가르침에 따랐습니다. 믿음과 행위의 문제는 한 두 마디로 끝낼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합니다. 예컨대 사랑을 어떻게 확인할 수 있을까요? 겉으로 아무런 실천이 없다면 사랑하는지 아닌지 확인할 길이 없습니다. 거꾸로 선물 공세를 펼친다고 해서 그것이 곧 사랑의 증거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는 상대방을 전혀 사랑하지 않으면서도 얼마든지 흉내를 낼 수 있습니다. 모차르트의 <돈 조바니>의 주인공은 바람둥이입니다. 그는 여자를 유혹하는데 달인입니다. 사랑이 아니라 단지 감미로운 말로, 좋은 선물로 여자들을 유혹했습니다.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많은 여성들이 이 바람둥이가 던진 미끼에 걸려들었습니다. 이는 곧 겉으로 드러난 말과 행위만으로 사랑이나 믿음을 확인할 수는 없다는 뜻입니다. 오직 믿음뿐이라는 프로테스탄트의 입장이나 행위도 중요하다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입장이나 결국 믿음의 존재론적 토대가 가장 중요하다는 사실만은 분명합니다.

승리하는 믿음
히브리서 11장은 소위 ‘믿음의 장’이라고 불릴 정도로 믿음을 강조합니다. 특히 히 11:1절은 신약성서에서 믿음을 정의한 유일한 구절입니다.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을 보증해주고 볼 수 없는 것들을 확증해줍니다.” 그는 믿음을 두 가지로 정의합니다. 첫째,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을 보증해 줍니다. 둘째, 믿음은 볼 수 없는 것들을 확증해줍니다. 바라는 것과 볼 수 없는 것은 표현만 다르지 실제 내용은 똑같습니다. 둘 다 하나님, 또는 하늘나라를 가리킵니다. 믿음은 바로 하나님, 또는 하늘나라를 담보한다는 뜻입니다. 이런 점에서도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고 인정받을 수 있는 길이 오직 믿음뿐이라는 루터의 주장은 히브리서 기자의 이 진술과 연결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중요한 믿음을 11장에서 구약의 예를 들어서 설명합니다. 그는 4절에서 아벨을 예로 듭니다. 아벨은 믿음으로 카인보다 더 나은 제물을 하나님께 바쳤다고 합니다. 5절에서는 죽지 않고 승천했다고 알려진 에녹이 등장합니다. 7절은 노아를 언급하고, 8절은 아브라함을 언급합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고향을 떠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했다고 합니다. 믿음의 조상으로 일컬어지는 아브라함은 여기 히브리서 11장에서도 아주 중요한 인물로 다루어집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인 이삭, 야곱, 요셉도 역시 믿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23절에는 모세가 등장합니다. 모세의 주도로 이집트를 탈출하고 홍해를 건넌 이스라엘 백성들도 믿음이 있었습니다. 심지어 여리고 성에서 살던 창녀 라합도 역시 믿음으로 이스라엘의 정탐꾼들을 도와서 멸망을 면했다고 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아벨로부터 라합에 이르기까지, 즉 아담의 아들들 시대로부터 가나안 정복 시대에 이르기까지 구약성서의 전체 역사를 일별하면서 그 안에서 면면히 흐르는 믿음의 역사를 독자들에게 설명했습니다. 더 나아가서 오늘 본문에서 판관들과 예언자들까지 끌어들였습니다. 결국 히브리서 기자는 이스라엘의 전체 역사를 이 믿음의 구도로 본 것입니다.
이런 믿음의 사람들은 모두 승리했습니다. 33,34절은 이 사실을 이렇게 보도합니다. “그들은 믿음을 가지고 여러 나라를 정복하였고 정의를 실천하였고 약속해 주신 것을 받았고 사자의 입을 막았으며, 맹렬한 불을 껐고 칼날을 피하였고, 약했지만 강해졌고 전쟁에서 용맹을 떨쳤고 외국 군대를 물리쳤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믿음을 통한 승리의 역사라 할 수 있습니다. 갈대아 우르를 떠난 아브라함은 팔레스틴에서 재산가가 되었고, 그의 아들과 손자들도 모두 크게 성공했습니다. 이집트에서 소수민족으로 살다가 출애굽한 이후로 그들은 다시 팔레스틴에서 다윗과 솔로몬 왕조를 건설할 수 있었습니다. 개인적으로도 그렇고, 국가적으로도 이스라엘은 믿음으로 승리의 길을 걸어왔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그들은 하나님이 약속해 주신 것을 받았다고 합니다.

실패하는 믿음
그러나 이스라엘이 승리했다는 것은 역사의 한쪽입니다. 다른 쪽에는 실패가 있습니다. 그들이 걸어온 고난의 과정을 본다면 그들의 역사는 승리보다는 실패에 더 가깝습니다. 믿음이 바라는 것들의 보증이고, 볼 수 없는 것들의 확증이라고 말한 히브리서 기자도 이 사실을 외면할 수 없었을 겁니다. 36-38절에서 그는 이런 실패, 또는 고난의 역사를 사실적으로 묘사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조롱당하고, 채찍으로 얻어맞고 결박당하고 감옥에 갇혔습니다. 37절 말씀을 보십시오. “또 돌에 맞아 죽고 톱질을 당하고 칼에 맞아 죽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양과 염소에 가죽을 몸에 두르고 돌아다녔으며, 가난과 고난과 학대를 겪기도 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에서는 이런 끔찍한 일들이 자주 일어났습니다. 예컨대 역대하 36:16절에 따르면 사람들은 하나님이 보낸 특사를 조롱하고 예언자들을 놀림감으로 삼았습니다. 예레미야 같은 위대한 예언자도 족쇄에 묶여 감옥에 갇힐 때가 있었습니다.(렘 20:2, 37:15, 38:6) 한 전설에 의하면 예레미야는 돌에 맞아 죽었다고 합니다. 스가랴도 역시 돌에 맞아 죽었으며(대하 24:20-22), 이사야가 톱질을 당했다는 전승도 있습니다. 아합왕과 이세벨 왕비 시대에는 수백 명의 예언자들이 동굴에 숨어 있을 수밖에 없었으며, 세례 요한은 헤롯왕과 헤로디아 왕비에 의해서 참수형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일들을 열거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을 정도입니다. 하나님의 사자들과 예언자들이 험악한 꼴을 당했다는 히브리서 기자의 지적은 역사에 대한 바른 판단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도 이 세상에서 늘 승리만 하는 게 아니라 실패도 합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려고 애를 쓰면 쓸수록 세상 사람들이 실패라고 말하는 그런 고난과 시련을 많이 당할지도 모릅니다.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려고 노력한다면 당연히 하나님의 뜻과 배치되는 힘들과 충돌하지 않을 수 없겠지요. 예를 들어, 히틀러 시대에 디트리히 본회퍼는 히틀러 정권과 투쟁하다가 사형을 당했습니다. 만약 그가 다른 목사들처럼 히틀러 정권이 반(反)기독교적이라 하더라도 조용하게 지냈으면 죽임을 당하지는 않았겠지요. 그는 히틀러라는 악과 투쟁하다가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이와 비슷한 일들은 우리나라에서도 일어났습니다. 특히 군사독재에 항거하거나 무분별한 생태계 파괴에 항거하다가 험한 일을 당한 이들이 많습니다.
오늘 한국의 기독교 신앙은 이런 역사적 현실을 외면하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말해서, 요즘 우리의 신앙형태가 지나치게 친자본주의적인 방향으로 흘러갑니다. 특히 미국에서 잘 나가는 목사님들의 영향을 받을 때 이런 현상이 더 두드러집니다. 릭 워렌 목사님의 <목적이 이끄는 삶>이나 오스틴 목사님의 <긍정의 힘> 같은 신앙서적들이 오랫동안 베스트셀러 자리를 놓치지 않고 있다는 이 현실에서 우리는 이런 신앙을 적나라하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들의 주장은 간단합니다. 하나님의 목적대로 살기만 하면 모든 것이 잘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신앙은 어제 오늘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미 1970년대부터 로버트 슐러 목사의 <불가능은 없다>에서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이런 신앙은 현실에서도 그렇고, 지난 2천년 기독교 역사에서도 그렇고, 성서에서도 아무런 근거가 없습니다. 성서는 오히려 믿음으로 인해서 시련을 받는다고 말합니다. 가장 결정적인 사건은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했던 예수님의 운명은 십자가 처형이었습니다. 십자가 처형은 실패입니다. 예수님은 믿음으로 살다가 인생을 실패한 가장 대표적인 분입니다. 그런데도 믿음으로 불가능이 없다거나 만사가 형통하는 것처럼 주장한다면, 그것은 가장 반(反)기독교적인 가르침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믿음만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우리는 믿음이 있어도 이 세상에서 실패할 수 있습니다. 오해는 마십시오. 믿음 생활하는 사람은 무조건 실패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가 지금 지나치게 믿음을 성공의 전제 조건처럼 생각하는 것이 잘못이라는 말씀입니다. 믿음이 이 세상에서의 성공을 무조건 담보해주지는 않는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믿음으로 살면서도 실패할 가능성을 열어두어야 합니다. 우리의 삶에서 일어나는 그런 실패를 받아들일 준비를 해야 합니다. 무조건 성공에만 집착하면 그건 진리가 아니기 때문에 우리의 영성은 파괴되고 말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여기서 고난과 시련을 서술하는 이유는 그가 살던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상황을 염두에 두었다는 사실에 놓여 있습니다. 38a절 말씀을 보십시오. 거기서 그는 가난, 고난, 학대를 받은 사람들에게 이 세상은 살만한 곳이 못된다고 말합니다. 아주 정확한 지적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험악한 꼴을 당하던 예언자들과 마찬가지로 로마 황제의 끔찍한 박해를 피해 카타콤에서 모임을 가질 수밖에 없었던 초기 기독교인들에게 이 세상은 분명히 살만한 곳이 아니었습니다.

믿음의 완성
오늘 성서말씀을 따라가는 우리는 지금 조금 곤란한 형편에 빠졌습니다. 믿음이 기독교 신앙에서 가장 중요하다는 사실을 이스라엘의 전체 역사를 통해서 전해 들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믿음으로 이 세상에서 승리했습니다. 믿음으로 자식을 얻었고, 전쟁에서 이겼고, 정의를 실천했습니다. 그런데 다른 한쪽에는 이 세상에서 철저하게 실패한 믿음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믿음을 좋았지만 오히려 믿음 때문에 심각한 삶의 위협에 노출되고 말았습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실패한 사람들 쪽에 속합니다. 이런 게 바로 세상의 삶입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되는 일이 있고 되지 않는 일도 있습니다. 그런 것은 우리가 그저 받아들여야 할 삶의 몫입니다. 우리의 믿음으로 이런 삶이 달라지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믿음이 아무런 필요가 없으니까 포기해야 한다는 말인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39절을 보십시오. “이 사람들은 모두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하느님의 인정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약속된 것을 받지는 못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에게서 인정받는 유일한 길입니다. 마틴 루터의 칭의론도 바로 여기에 근거해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을 보증해주고, 볼 수 없는 것들을 확증해줍니다. 우리도 지금 그런 믿음으로 삽니다. 그런 믿음으로 이런 험악한 세월을 견뎌낼 수 있으며, 흔들리지 않고 굳세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믿음과 확신으로 ‘약속된 것’을 받지는 못합니다. 이 약속된 것은 믿음 너머의 사건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성공하는가, 실패하는가 하는 차원을 근본적으로 뛰어넘는 사건입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히브리서 기자는 40절에서 이를 부연해서 설명합니다. 그것은 ‘더 좋은 것’입니다. 이런 암시만으로도 여러분은 아브라함을 비롯한 믿음의 영웅들도 받지 못한 이것이 무엇인지 눈치 채실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에게 일어난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그의 운명입니다. 그를 통한 하나님과 만물의 화해이며, 참된 생명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그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고통을 견뎌내시고 현재 “하느님의 옥좌 오른 편에 앉아 계십니다.”(히 12:2b) 하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은 생명의 근원이십니다. 그의 옥좌는 그 생명의 자리이며, 오른편은 하나님과 동일한 권위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주어졌다는 뜻입니다.
여러분은 위의 내용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시겠지요. 그것을 믿는다고 생각하겠지요. 예수님을 분명하게 믿는다고 말하고 싶으실 겁니다. 그게 틀렸다고 볼 수는 없지만 옳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지금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을 강조하는 게 아닙니다. 약속된 것, 더 좋은 것은 우리의 믿음에 의해서 주어지기도 하고 주어지지 않기도 하는 게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의 ‘믿음 너머’에서 일어난 하나님의 배타적인 사건입니다. 믿음으로 무언가를 성취할 것 같은 생각은 잘못입니다. 믿음은 우리 인간의 상대적인 삶의 태도입니다. 그것은 절대적인 게 아닙니다. 바울에 의하면 산을 옮길만한 완전한 믿음도 여전히 상대적입니다.(고전 13:2) 우리의 믿음보다 더 중요한 사건, 더 앞서는 사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새로운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일어난 생명사건입니다. 생명의 완성입니다.
여러분, 오늘 설교의 마지막 대목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이게 바로 히브리서 기자가 말하려고 했던 핵심입니다. 40절 말씀을 다시 그대로 읽겠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더 좋은 것을 마련해 두셨기 때문에 그들은 우리를 제쳐놓고는 결코 완성에 이르지는 못하게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우리를 위해”라고 말합니다. 그 우리가 누군가요? 지금 시련을 당하고 있는 초기 기독교인들입니다. 앞의 위대한 믿음의 영웅들은 초기 기독교인들을 제쳐놓고 생명의 완성에, 또한 믿음의 완성에 이를 수 없습니다. 이들 초기 기독교인들에게는 바로 믿음의 근원이며, 완성자인 예수 그리스도가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놀라운 신앙고백입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이스라엘의 위대한 믿음의 영웅들도 받지 못한 것을 하나님에게서 받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과대망상이 결코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 세상이 완성된다는 인식이며, 신뢰이며, 확신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그런 전통에서 살아갑니다. 이 세상은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완성될 것이며, 구원받을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의 말을 빌려 여러분에게 다시 권합니다. “우리의 믿음의 근원이시며 완성자이신 예수만을 바라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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