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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출14:1~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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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조용기 목사 |
참고 : | 2009. 11. 1. 성찬주일 4부 설교 |
“야훼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돌이켜 바다와 믹돌 사이의 비하히롯 앞 곧 바알스본 맞은편 바닷가에 장막을 치게 하라 바로가 이스라엘 자손에 대하여 말하기를 그들이 그 땅에서 멀리 떠나 광야에 갇힌 바 되었다 하리라 내가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한즉 바로가 그들의 뒤를 따르리니 내가 그와 그의 온 군대로 말미암아 영광을 얻어 애굽 사람들이 나를 야훼인 줄 알게 하리라 하시매 무리가 그대로 행하니라 그 백성이 도망한 사실이 애굽 왕에게 알려지매 바로와 그의 신하들이 그 백성에 대하여 마음이 변하여 이르되 우리가 어찌 이같이 하여 이스라엘을 우리를 섬김에서 놓아 보내었는가 하고 바로가 곧 그의 병거를 갖추고 그의 백성을 데리고 갈새 선발된 병거 육백 대와 애굽의 모든 병거를 동원하니 지휘관들이 다 거느렸더라 야훼께서 애굽 왕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셨으므로 그가 이스라엘 자손의 뒤를 따르니 이스라엘 자손이 담대히 나갔음이라 애굽 사람들과 바로의 말들, 병거들과 그 마병과 그 군대가 그들의 뒤를 따라 바알스본 맞은편 비하히롯 곁 해변 그들이 장막 친 데에 미치니라 바로가 가까이 올 때에 이스라엘 자손이 눈을 들어 본즉 애굽 사람들이 자기들 뒤에 이른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심히 두려워하여 야훼께 부르짖고 그들이 또 모세에게 이르되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 우리에게 이같이 하느냐 우리가 애굽에서 당신에게 이른 말이 이것이 아니냐 이르기를 우리를 내버려 두라 우리가 애굽 사람을 섬길 것이라 하지 아니하더냐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야훼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 야훼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출 14:1~14)
할렐루야~ 옆에 계신 분들에게“예수님이 여기에 계십니다.” 인사해 주십시오.
<서론>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오! 주여 나는 어찌하오리까?” 이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인생을 살면서 우리는 여러 가지 진퇴유곡에 빠질 때가 많습니다. 뒤로 물러갈 데도 없고 앞으로는 더욱 나갈 자리가 없습니다. 가만히 있으면 필연적으로 파멸에 이릅니다. 이럴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만 될까요? 우리는 “주여 나는 어찌하오리까?”땅을 치며 탄식할 때가 많습니다.
역사가 아놀드 토인비(Arnold Toynbee)는 그의 책「역사의 연구」에서 세계 문명사를 움직이는 가장 중요한 법칙을 설명했습니다. 즉 “역사는 도전과 응전”이라는 것입니다. 인류 문명의 흥망성쇠는 다가온 위기에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따라서 달라지는 것입니다. 위기를 잘 극복하면 흥왕하고, 왕성하게 될 것이고 위기를 잘 극복하지 못하면 쇠하고 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개인의 생활도 한가지입니다. 낭패와 실망을 당해서 큰 상처를 입고 주님 앞에 뒹굴며 “주여 나는 어찌하오리까?” 그 고난을 잘 이겨나가면 전에 보다 더 나은 생활을 하게 될 것이요, 지면 더 비참하고 패배적인 삶을 살 수밖에 없게 되는 것입니다.
정신의학자 칼 메닝거(Karl Augustus Menninger)는 위기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실보다 중요한 것은 태도이다.” 즉 위기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위기에 대처하는 우리의 태도가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어려운 일이 다가올 때 어려운 일 그 자체도 힘들지만은 그것을 대하는 우리 태도가 굉장히 문제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여러 가지 진퇴유곡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뒤로 물러갈 수도 없고 앞으로 나갈 수도 없습니다. 이럴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만 합니까? 무엇보다 이러한 위기에 대처하는 우리의 태도가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의 태도란 이 위기에 대해서 내가 인간의 수단과 방법과 노력과 힘으로 버텨나갈 것이냐 그렇지 않으면 천지와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 의지할 것이냐. 이 두 가지 태도 밖에 문제에 대한 태도가 없습니다. 어떠한 태도를 취해야 우리가 인생을 살아갈 수 있을는지 알아야 될 것입니다.
<본론>
1. 하나님은 어디 계십니까?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은 어디에 계십니까? 여러분 답답할 때 그렇게 기도 안해봤어요? “하나님 어디 계세요? 하나님이 계시면 이런 일이 일어날 수가 있습니까?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나이까?” 그렇게 탄식할 때가 많이 있었을 것입니다. 저도 그런 탄식을 할 때가 한두번이 아닙니다. 그러면 그 질문과 함께 마음에 다가오는 것은 “하나님은 정말로 나를 사랑 하는가? 나를 정말 사랑한다면 왜 이렇게 내버려 놓고 부르짖어도 대답이 없으신가? 진짜로 사랑하시는가? 가짜로 사랑한다고 말한 것이 아닌가?”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는다고 했었으니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할 수가 없습니다.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고 성경은 말씀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음을 앞두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더라고 말한 것입니다. 저는 이런 이야기를 읽어 보았습니다.
노벨평화상 수상자 엘리 비젤(Eliezer Wiesel) 박사는 유대인으로서 이런 증언을 했습니다.
그가 나치의 강제 수용소에 감금되었을 때, 마침 강제수용소 발전소가 폭파하는 사건이 일어나 세 사람의 용의자가 체포되었습니다. 그 중 두 사람은 어른이었지만 한 사람은 어린 소년이었습니다. 성인 두 사람은 교수대에 올라가서 목을 매달으니까 몸이 무거우니까 즉시로 버둥대다가 숨이 끊어지고 만 것입니다. 그러나 소년은 몸이 어찌나 야위고 못먹어서 가벼웠더니 교수대 줄에 매달린 채 30분 이상을 발버둥쳐도 죽지 않았었습니다. 더 큰 고통을 당하고 숨이 끊어졌습니다. 그때 그 광경을 보던 유대인들은 누구든 외쳤습니다. “하나님 지금 어디 계십니까? 이러한 처참한 불행한 사건이 일어났는데도 하나님은 어디에 계십니까?”이때 비젤 박사도 그곳에 있었는데 자기의 내면 깊은 곳에서 저절로 터져 나오는 소리가 있었다고 합니다.“하나님이 어디 계시냐고? 바로 여기 있지 않느냐. 하나님은 지금 저 교수대에 매달려 버둥거리며 고통 받고 있다.” 죽어가는 인생, 죄 많은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서 끝까지 참고 내가 버둥거리고 있다. 때가 오면 반드시 심판할 것이다. 때가 오니까 독일은 망해 버리고 만 것입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택하신 백성이 고통당하는 것을 외면하실 수가 없습니다.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이 고통당하고 있는 현장에 항상 함께 계십니다. 어떤 고통을 당하던지 그 현장에 하나님은 함께 고통을 당하며 구원의 손길을 뻗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병이 괴로울 때 골리앗 같은 문제를 만나 낙심할 때, 삶의 그 어떤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은 우리와 같이 계시는 사랑의 하나님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또 이런 질문을 합니다. “하나님은 정말 죄 많은 나를 용서 하실까요? 나는 죄를 너무 많이 지었습니다. 지금 하나님께 나와서 도와달라고 할 체면이 서지 않습니다. 정말 나를 버리지 않을까요?”
성경 이사야 55장 7절에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야훼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
문제는 회개에 있습니다. 회개하고 죄를 저버리고 돌아오면 하나님께서 긍휼히 보시고 용서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느헤미야서 9장 17절에 “주께서는 용서하시는 하나님이시라 은혜로우시며 긍휼히 여기시며 더디 노하시며 인자가 풍부하시므로 그들을 버리지 아니하셨나이다”
어찌하든지 하나님은 용서하셔서 안 버리려고 애를 쓰는 것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다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음 받았습니다. 개나 돼지나 짐승은 말 못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형상을 안닮았기 때문에 말 못합니다. 앵무새도 흉내는 내지 자기가 직접 말을 못합니다. 말을 하는 사람은 다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말씀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저 아프리카 정글 속에 깊은 곳에 세상 문명과 떨어져 사는 흑인이라도 말을 하고 있으면 하나님이 지으신 하나님의 형상인 것입니다. 에스키모족이 눈속에 살면서도 서로 대화하고 말하면 하나님이 지으신 하나님의 형상대로 모양지은 하나님의 자녀인 것입니다. 하나님 이중에 한 사람도 버림받기를 원치 아니하시고 모두다 복음을 듣고 구원받기를 원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회개하고 죄를 버릴 때 하나님은 나를 어떠한 형편에 있어도 용서해 주시는 것입니다.
C.S. 루이스는 하나님의 용서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여러 번 넘어진다고 하더라도 그때마다 툴툴 털고 일어난다면 넘어지는 것 때문에 파멸될 수는 없습니다. 물론 넘어진 탓에 우리는 더러워진 옷을 입고 집으로 돌아올 것입니다. 그러나 집에는 훌륭한 목욕탕이 준비되어 있고, 수건이 걸려 있으며 깨끗한 옷들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스스로가 더럽다는 것을 느낄 때 뚜렷하게 우리 가운데 임재하시는 것입니다.”
스스로 회개하고 겸비할 때 하나님은 우리 가운데 와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어떤 죄도 용서해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진심으로 회개하고 죄를 버리기만 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시고 다시 기억도 하지 아니하시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1장 9절에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회개하는 우리들을 하나님은 버리지 않습니다. 그러면 또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합니다. “이 어려운 환경 속에 하나님은 기적을 베풀어 주실까요? 과연 하나님이 기적을 베풀어서 문제를 해결해 주실까요?”
마태복음 22장 32절에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니라”
죽은 옛날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구약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것 옛날의 하나님 아닙니까? 시방 우리와 같이 살아 계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다고 말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권세와 능력이 줄어지거나 짧아진 것은 아닌 것입니다.
시편 40편 5절에 “야훼 나의 하나님이여 주께서 행하신 기적이 많고 우리를 향하신 주의 생각도 많아 누구도 주와 견줄 수가 없나이다 내가 널리 알려 말하고자 하나 너무 많아 그 수를 셀 수도 없나이다”
하나님께서 행하신 기적이 너무 많아서 헤아릴 수 없다. 그 수많은 기적을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서 행하려고 준비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염려하지 말아야 됩니다.
일본의 유명한 신학자 우찌무라 간조(內村鑑三)는 일본에서 유명한 신학자입니다. 그런데 한 학생이 우찌무라 간조 선생을 찾아와서 “선생님, 나는 성경을 도저히 읽을 수가 없습니다. 성경에 있는 모든 기적들을 믿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께서 물 위를 걸었다는 것이라든지, 죽었다가 부활 하셨다든지. 이런 것은 이성으로 도무지 해석할 수 없습니다. 성경에 기적을 다 빼버리고 진리만 공부하면 어떻습니까?” 그러니까 우찌무라 간조 선생이 가만히 보고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더니 “이 사람아, 성경에 사람의 이성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기적들을 다 제한다면 꼭 두 가지만 남는데 성경 앞의 덮개와 뒤의 표지밖에 남지 않는다.” 성경에 있는 기적 다 뽑아버리면 이 두장 밖에 안 남아요. 성경은 펼치면 모두 기적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기적적인 하나님이기 때문에 앉아도 기적이요, 서셔도 기적이요, 지나가도 기적이요, 그림자만 밟아도 기적인 것입니다. 그러니 기적이 없는 기독교라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사랑의 이야기이자 하나님 기적의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은 죽은 하나님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신 하나님은 아브라함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뿐 아니라 우리들의 하나님도 되신다는 것입니다.
한국에서 12년 동안 우리 여의도교회에서 서대문에 있을 때 함께 일한 헨리 스웨인 목사님의 간증을 들어보면 가슴이 뭉클합니다. 그는 6.25때 한국 전쟁에 참여해서 1개 대대가 중공군 1개 연대와 싸워서 다 죽고 한소대만 남았습니다. 한 일곱사람만 살았습니다. 구사일생을 후퇴해서 본부에 오니까 본부에서 크게 화를 내서 전부 체포하여 총살시키든지 안그러면 돌아가서 진지를 회복하라는 것입니다. 모두다 울면서 밖으로 나왔을 때 그 가운데 스웨인 목사 한분만이 예수를 믿었습니다. “얘들아 울지 마라. 구약성경에 보면 기드온이 3백명의 용사로써 수만명의 적군을 물리친 적도 있다. 기적이 있다. 오늘 이 시간에 이만저판이다. 홰개하고 예수를 믿어들이고 주의 이름으로 나가자. 우리 이름으로 나가서는 안된다.” 전부 회개를 시키고 예수를 믿고 주님 이름으로 살려달라고 기도하고 그리고 산고지 밑으로 가야 되는데 거기에 평야가 있어요. 그들이 뛰어나가니까 중공군 기관총이 비같이 쏟아지는 것입니다. 주의 이름으로 부르고 죽을 힘을 다해서 산 밑바닥에 탈싹 붙어서 한사람 한사람 이름을 부르니까 일곱명이 다 살아 있어요. 그런데 보니까 중공군이 미군을 죽이려고 던진 수류탄이 철조망을 다 파헤쳐서 구멍이 뚫어졌어요. 그래서 일시에 그 철조망을 뚫고 들어가서 중공군하고 마주쳐서 발로 차고 칼로 찌르고 주먹으로 때리고 밟고 육탄전이 벌어졌습니다. 그런데 미군 한명이 보니까 중공군 한 사람이 총을 가지고 죽어 있거든요. 그래서 그 짧은 총을 가지고서 쏴버리니까 오색찬란한 무지개가 쫙서거든.. 그러니 중공군들이 그 무지개를 보고 손을 가리키니 일제히 돌아서서 달아나기 시작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공군들이 사용하던 기관총을 돌이켜서 그들보고 갈기니까 시체가 산더미같이 쌓였더랍니다. 그래서 1개 분대가 연대 이상의 군대들이 지키고 있는 고지를 완전히 점령했어요. 도저히 상상할 수 없어. 그들이 모여서 전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통곡을 하고 울면서 그 다음에 본부에 내려오니까 본부에서 “너 죽을 사람들이 어떻게 해서 그런 기적으로 그 고지를 점령할 수 있었느냐?”고 자꾸 묻기에 오직 대답하는 말은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주님께 부르짖어 기도하니 주님이 기적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야, 이놈들아, 그런 엉터리 같은 소리하지 말고 바른말해라.” “바른말이 그것입니다. 1개 분대로써 나가서 연대이상의 군인들을 어떻게 물리칩니까? 하나님이 기적을 베풀었습니다.” 그래서 그때 스웨인 목사가 하나님께 무릎을 꿇고 기도를 했습니다. “주님, 주님께서 나를 죽음에서 한국에서 살려주셨으니 남은 삶은 한국에 속한 것입니다.” 미국 가서 신학교에 공부를 하고 한국으로 선교사로 나와서 우리 서대문에서 저와 함께 12년을 같이 일을 했습니다. 그는 정말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주의 종이었습니다.
오늘도 우리 하나님이 진심으로 부르짖으며 기도할 때 이러한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우리를 위해서 싸워 주십니다. 이는 힘으로도 되지 아니하고 능으로도 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영으로 말미암아 되는 것입니다. 어려움을 당할 때 “하나님이여 나는 어찌할까요?” 몸부림을 치고 탄식하지 말고 기적을 베푸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나가야 될 것인 것입니다.
2.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이 있습니다.
성경에는 “너희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보여 주리라”고 말한 것입니다. 부르짖지 아니하면 역사를 안하셔요. 하나님은 우리와 다 같이 계시지만 오직 찬양하고 감사하고 부르짖고 기도하는 사람에게만 역사하는 것입니다. 그 영적 법칙입니다. 왜 하나님이 예수 잘 믿는 사람이 저런 고난을 당하게 하십니까? 그분은 하나님을 예배하고 찬미하고 부르짖지 않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부르짖어야 하나님은 와서 대답을 하시는 것입니다. 구하라 주실 것이요, 찾으라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열릴 것이라. 너희가 없는 것은 구하지 아니함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누가복음 18장에 보면 과부와 재판관의 이야기가 있지 않습니까?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비유로 말씀하여 이르시되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장이 있는데 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어 자주 그에게 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하되 그가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 후에 속으로 생각하되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나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눅 18:1~7)
여기에 한번 따라 말씀하십시오.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 우리는 택하신 자들인데 우리가 어려움을 당할 때 조금 기도하지 밤낮 부르짖습니까? 밤에도 부르짖고 낮에도 부르짖고 하나님 앞에 몸부림치고 하나님의 옷자락을 잡고 놓지 않을 때 하나님은 응답해 주시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너무 편안해져서 결사적인 기도를 하지 않습니다.
누가복음 11장 5절로 8절에는 예수님이 밤중에 찾아온 친구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계십니다.
“너희 중에 누가 벗이 있는데 밤중에 그에게 가서 말하기를 벗이여 떡 세 덩이를 내게 꾸어 달라 내 벗이 여행 중에 내게 왔으나 내가 먹일 것이 없노라 하면 그가 안에서 대답하여 이르되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문이 이미 닫혔고 아이들이 나와 함께 침실에 누웠으니 일어나 네게 줄 수가 없노라 하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비록 벗 됨으로 인하여서는 일어나서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간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요구대로 주리라”
친구기 때문에 밤에 일어나서 줄지경도 못되는데 그래도 일어나서 떡을 준 것은 간청한다. 구하고 또 구하고 매달리고 또 매달리고 외치고 또 외치고 이러한 꾸준하고 인내력을 가지고 간절한 기도가 오늘날 있으면 하나님이 오늘날 대답해 주시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1장 9절로 10절에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모든 것을 내어 맡겨야 되는 것입니다. 깨어지고 복종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의지할 때 천부여 의지없어서 손들고 옵니다. 손들어버려야 되는 것입니다.
시편 34편 18절에 “야훼는 마음이 상한 자를 가까이 하시고 충심으로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
시편 37편 5절로 6절에 “네 길을 야훼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 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 같이 하시리로다”고 말씀한 것입니다.
여름 바닷가에 가면 수영장에 가면 반드시 구조대원들이 높은 곳에 의자를 마련하고 쌍안경 가지고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조난을 당해서 물에 빠져 허우적 거리면 신속히 헤엄쳐 가서 구조하려고 하는데 가장 어려운 것은 살겠다고 발버둥을 치면서 구조대원의 발을 끌어안고 놓아주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같이 빠져 죽게 되는 것입니다. 몸을 맡기세요. 몸을 맡기세요 해도 맡기기는 뭘맡겨. 더 매달리니까 그때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은 턱을 들어서 주먹으로 때리라는 것입니다. 때려 버리면 기절을 합니다. 기절을 하고 늘어지면 몸을 맡겨버리기 때문에 물속에서 건져내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맡겨야 돼요. 물에 빠진 사람 건지는데도 맡기지 아니하면 같이 빠져죽는 것처럼 이 세상에 문제를 당해서 하나님께 나와 부르짖을 때 주님께 온전히 맡겨야지 내가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발버둥을 치다가는 낭패와 실망을 당하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모든 것을 내어 맡기고 주님이 도와주실 것을 기다려야 되는 것입니다.
유명한 설교자 찰스 스펄전Charles H. Spurgeon) 목사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인간의 마지막은 하나님의 시작이다!” 인간의 마지막이 와야 하나님은 출발하신다. 인간이 아직까지 살아서 무엇을 하겠다고 발버둥을 치고 있으면 하나님은 기다린다. 하나님이 이제 끝났습니다. 이제는 죽었습니다. 이제는 살든지 죽든지 흥하든지 망하든지 성하던지 쇠하든지 천부에게 의지합니다. 손들고 오니 도와주십시오. 그러면 오냐 이제부터 내 시작이다. 내가 하는 것을 보라. 그러게 말씀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은 이처럼 내 생각, 내 고집을 다 버리고 온전히 주님께 나를 맡기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때부터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직접 일하시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믿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부르짖고 맡겨놓고 난 다음에 못 믿어서 마음이 늘 달랑 달랑하면 하나님이 어떻게 생각하시겠습니까?
히브리서 13장 8절에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다고 말씀하셨는데
마가복음 11장 24절에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옛날에 제가 어릴 때 우리집은 과수원을 하고 농사를 지었는데 고구마를 심을 때 제가 간청을 해서 고구마줄 한줄을 내가 내것으로 얻었습니다. 나중에 뿌리가 나와서 고구마가 열립니다. 그런데 저는 물을 주고 난 다음 학교 갔다와서는 그것을 파고서 고구마를 들어보고 또 심어놓고, 또 그 다음날 학교갔다 와서는 또 얼마나 자랐는가 떠들떠 보고.. 몇 주만에 다 말라죽어버리고 말았어요. 그런데 우리 아버님이 심은 고구마는 아버님이 한번 심어놓고 그냥 돌보지도 않아요. 내버려 놓아요. 물줄 때 물만 주고... 때가 이르니까 굵직굵직한 고구마가 주렁주렁 달렸습니다. 맡기니까 땅이 고구마를 열게 하는 것입니다. 내가 땅을 못믿어가지고서 자꾸 뽑아 보니까 땅이 일을 안해서 고구마가 죽은 것입니다.
세계적인 피아니스트인 바이런 자니스(Byron Janis)는 어렸을 때 교통사고를 당하여 손에 심한 신경통과 신경마비 증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한때는 열 손가락 중에 왼손 중지 하나만 제대로 움직이고 새끼손가락은 완전히 마비된 적도 있었습니다. 게다가 오른쪽 손목은 40퍼센트만 움직일 수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그는 위대한 피아니스트가 되었습니다. 기자가 그 어려움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었는지 물었을 때,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여러 의사들도 수고했고, 침도 많이 맞았습니다. 그러나 기적은 기도로 가능했습니다. 제가 간절히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나에게 싸울 용기를 주셨습니다. 나에게 문제가 있지만 그 문제가 나를 정복하지는 못하고 내가 그 문제를 극복할 수 있는 믿음을 하나님이 주셨습니다.” 맞습니다. 고통 가운데에서도 싸우고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용기와 힘과 지혜와 능력을 주시는 분이 하나님인 것입니다. 그래서 능히 이길 수 있게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믿고 부르짖어 기도하고 하나님께 반드시 응답할 것을 알고 내어 맡기고 기다리는 것이 굉장히 필요한 것입니다. 마음이 조급하면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가 없습니다. 기다려야 돼요.
3. 참고 기다려라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 앞에 모여서 있을 때 애굽 군대가 쳐들어왔지 않습니까? 그때 백성들이 발버둥을 치고 하나님께 부르짖고 모세를 원망해서 애굽에 장지가 없어 우리를 이곳에 끌어내어 죽게 만드는가. 애굽에 우리를 그냥 내버려 두라. 애굽 사람을 섬기고 살겠다. 그렇게 하지 않더냐. 아주 조급해서 발버둥을 쳤습니다. 그때 모세가 하는 말이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야훼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 야훼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출 14:13~14)
하나님을 믿었으면 하나님께 맡기고 가만히 기다려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은 참 기다리지 못합니다. 기도하고 얼마있지 않다가 낙심하고 발버둥을 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기다려서 하나님과 함께 일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시편 91편 14절로 16절에 “하나님이 이르시되 그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그를 건지리라 그가 내 이름을 안즉 내가 그를 높이리라 그가 내게 간구하리니 내가 그에게 응답하리라 그들이 환난 당할 때에 내가 그와 함께 하여 그를 건지고 영화롭게 하리라 내가 그를 장수하게 함으로 그를 만족하게 하며 나의 구원을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도다”고 약속을 해주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갈 때 절망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절망자에게는 모든 은혜와 축복이 떠나가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끝이 좋아야 모든 것이 좋다.”는 말이 있습니다. 오스왈드 샌더스(J. Oswald Sanders)는 위대한 업적을 이룬 400명을 대상으로 그들이 업적을 이룬 연령을 분석해 보았습니다.
그 중에 35%가 60대, 23%가 70대, 6%는 80대가 넘어서 업적을 이루었습니다. 즉 위대한 일을 이룬 사람의 64%가 60대 이후에 그 일을 이룬 것입니다. 여기 보니까 70대 먹은 사람이 23%나 위대한 일을 이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나에게도 희망이 있어요. 70대도 이룰 수 있으니까. 나는 하도 이 기사가 좋아서 여러 번 오늘 아침에 읽었습니다. 35%가 60대, 23%가 70대, 6%가 80대가 넘어서 업적을 이루었다. 64%가 60대 이후에 그 일을 이룬 것입니다.
경영학의 아버지 피터 드러커(Peter Ferdinand Drucker) 도 많은 역작을 썼는데, 대부분 88세 이후에 쓰여진 것이 대부분이었다고 말합니다. 88세 이후에 적은 그 위대한 경영학 책이 위대한 책이었다는 것입니다. 나이가 많고 힘이 없다고 해서 미래에 대한 희망도 품지 않고 바람 부는 대로 물결 치는 대로 살아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합동하여 선을 이룬다고 늙어지는 것도 선을 이루는 것입니다. 나의 형편과 상황이 아무리 힘들고 어렵더라도 불평하고 원망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진심으로 기도하며 모든 것을 맡기면 하나님 역사하심이 나타나 놀라운 역사를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젊을 때도 맡기고 늙을 때도 맡기고 하나님 바라보면 하나님은 우리를 사용하셔서 그 뜻을 이루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려움을 당해서 몸부림 칠 때 가장 경계해야 될 것은 두려움입니다. 마음에 두려움은 우리를 파멸시킵니다. 욥이 고통을 당할 때 내 무서워하던 것이 내게 임했고 내 두려워 하는 것이 내 몸에 미쳤다고 탄식을 했습니다.
「크리스찬 비즈니스맨의 리더십 개발」이라는 책을 보면 두려움이 우리에게 미치는 악영향을 네 가지로 정리해 놓았습니다.
첫째, 두려움은 우리의 잠재력을 마비시킵니다. 두려움이 우리의 재능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묶어버려서 주저앉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둘째, 두려움은 우리의 관계를 파괴시킵니다. 두려움은 인간관계에 문제를 일으키는 것입니다.
셋째, 두려움은 우리가 누리는 행복을 방해합니다. 두려움이 있을 때 우리는 결코 행복을 느낄 수 없습니다.
넷째, 두려움은 우리의 성공을 방해합니다. 두려움은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두려워하는 일에 쏠리게 함으로 성공보다 실패를 준비하게 합니다.
두려움은 우리 신앙생활을 방해하는 가장 큰 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홍해 앞에 선 이스라엘 백성이 뒤를 따르는 바로의 군대들과 앞에 가로막힌 홍해를 보고 심히 두려워하여 모세를 원망하고 탄식했습니다. 그들이 두려워하고만 있었으면 파멸됐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야훼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고 했습니다. 예수 믿는 우리에게는 구원이 옵니다. 뒤에서 오든지 앞에서 오든지 옆에서 오든지 우리 눈에는 안보여도 구원은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숨어서 일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자리에 와 있어도 눈에 안보이고 숨어 계십니다. 우리 뒤에서 일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드시 우리를 버리거나 떠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상황에서도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만 마음속으로 바라 보십시오. 그럴 때 사랑이 무한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싸워주시고 우리에게 승리를 반드시 갖다 주시는 것입니다.
<결론>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신지라 식언치 아니하시고 인자가 아니신지라 후회가 없으십니다. 우리가 절망적 고난에 처하게 될 때 하나님을 찾고 찾으면 반드시 만나게 됩니다. 신앙이란 이와 같은 고난을 통하여 장성하게 됩니다. 오! 주여 나는 어찌하오리까? 그렇게 말하면 너는 진심으로 하나님을 찾으라 그러면 살리라고 말씀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라이놀드 G. 그린 목사는 “인생의 가장 좋은 일들은 슬픔이나 고난의 보자기에 싸여서 온다.”고 말했습니다. 좋은 일만 오면 좋겠는데 좋은 일이 반드시 슬픔과 고난의 보자기에 싸여서 온다. 미국에 최근에 저명한 목사 한분이 대통령 취임식에서 연설한 목사님이십니다. 그 명망이 대단하고 미국신문이 떠들어 제키고 교회가 왕성한데 사람들이 얼마나 행복하냐고 했더니 그는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그 아내가 유방암으로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생에게 좋은 일만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좋은 일이 있을 때는 반드시 나쁜 일도 함께 온다는 것을 알아야 된다.”
바로 라이놀드 G. 그린 목사의 말처럼 슬픔이나 고난의 보자기에 싸여서 좋은 일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슬픔이 고난이 다가올 때라도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을 믿고 기다리면, 슬픔과 고난의 보따리 속에 하나님이 더 좋은 것을 담아 주신다는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헨리 워드 비쳐(Henry Ward Beecher)는 이렇게 말했습니다.“우리는 날마다 두 개의 손잡이를 잡고 살아간다. 하나는 두려움의 손잡이며 다른 하나는 믿음의 손잡이다.” 한쪽으로는 믿고 한쪽으로는 무서워하며 산다는 것입니다. 신앙이란 고난을 통해 장성하게 됩니다. 그런데 절망적 고난에 처하게 될 때, 두려움의 손잡이를 잡고 물러설지, 아니면 믿음의 손잡이를 잡고 앞으로 나아갈지 우리가 결정을 내려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거짓이 없으신 분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전심으로 찾으면 반드시 살게 되는 기적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붙들어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절망적인 일을 당하여 “오 하나님이여 나는 어찌할까요? 어찌할까요?” 그러나 하나님은 “나를 찾으라. 대답은 내 안에 있다.” 하나님은 오늘도 여러분의 문제를 대답을 주시기 위해서 여러분 곁에 계시다는 것을 잊지 말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고개 숙여 기도드리겠습니다.
<기도>
사랑이 많으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
하나님이 우리를 불러 주셔서 은혜와 사랑을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우리가 살면서 수많은 고난을 당합니다. 수많은 어려움을 당합니다. 그러나 고난이 있으면 축복도 따라옵니다. 시련이 있으면 평안도 따라오는 것입니다. 아버지 하나님이여 전적으로 고난만 당하지 아니하고 전적으로 행복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고난과 행복은 번갈아가며 오며 믿음과 의심도 번갈아가며 오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을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중심으로 서면 이 모든 일을 처리할 수가 있는 것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 하나님이여 나는 어찌해야 합니까? 하나님은 이러한 사람에게 나에게 오라 내가 너를 쉬게 하리라고 말씀하시옵니다. 주여 주님을 찾아가오니 한 사람도 외면하지 마시고 붙들어 주시고 문제를 해결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할렐루야~ 옆에 계신 분들에게“예수님이 여기에 계십니다.” 인사해 주십시오.
<서론>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오! 주여 나는 어찌하오리까?” 이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인생을 살면서 우리는 여러 가지 진퇴유곡에 빠질 때가 많습니다. 뒤로 물러갈 데도 없고 앞으로는 더욱 나갈 자리가 없습니다. 가만히 있으면 필연적으로 파멸에 이릅니다. 이럴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만 될까요? 우리는 “주여 나는 어찌하오리까?”땅을 치며 탄식할 때가 많습니다.
역사가 아놀드 토인비(Arnold Toynbee)는 그의 책「역사의 연구」에서 세계 문명사를 움직이는 가장 중요한 법칙을 설명했습니다. 즉 “역사는 도전과 응전”이라는 것입니다. 인류 문명의 흥망성쇠는 다가온 위기에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따라서 달라지는 것입니다. 위기를 잘 극복하면 흥왕하고, 왕성하게 될 것이고 위기를 잘 극복하지 못하면 쇠하고 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개인의 생활도 한가지입니다. 낭패와 실망을 당해서 큰 상처를 입고 주님 앞에 뒹굴며 “주여 나는 어찌하오리까?” 그 고난을 잘 이겨나가면 전에 보다 더 나은 생활을 하게 될 것이요, 지면 더 비참하고 패배적인 삶을 살 수밖에 없게 되는 것입니다.
정신의학자 칼 메닝거(Karl Augustus Menninger)는 위기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실보다 중요한 것은 태도이다.” 즉 위기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위기에 대처하는 우리의 태도가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어려운 일이 다가올 때 어려운 일 그 자체도 힘들지만은 그것을 대하는 우리 태도가 굉장히 문제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여러 가지 진퇴유곡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뒤로 물러갈 수도 없고 앞으로 나갈 수도 없습니다. 이럴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만 합니까? 무엇보다 이러한 위기에 대처하는 우리의 태도가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의 태도란 이 위기에 대해서 내가 인간의 수단과 방법과 노력과 힘으로 버텨나갈 것이냐 그렇지 않으면 천지와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 의지할 것이냐. 이 두 가지 태도 밖에 문제에 대한 태도가 없습니다. 어떠한 태도를 취해야 우리가 인생을 살아갈 수 있을는지 알아야 될 것입니다.
<본론>
1. 하나님은 어디 계십니까?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은 어디에 계십니까? 여러분 답답할 때 그렇게 기도 안해봤어요? “하나님 어디 계세요? 하나님이 계시면 이런 일이 일어날 수가 있습니까?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나이까?” 그렇게 탄식할 때가 많이 있었을 것입니다. 저도 그런 탄식을 할 때가 한두번이 아닙니다. 그러면 그 질문과 함께 마음에 다가오는 것은 “하나님은 정말로 나를 사랑 하는가? 나를 정말 사랑한다면 왜 이렇게 내버려 놓고 부르짖어도 대답이 없으신가? 진짜로 사랑하시는가? 가짜로 사랑한다고 말한 것이 아닌가?”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는다고 했었으니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할 수가 없습니다.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고 성경은 말씀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음을 앞두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더라고 말한 것입니다. 저는 이런 이야기를 읽어 보았습니다.
노벨평화상 수상자 엘리 비젤(Eliezer Wiesel) 박사는 유대인으로서 이런 증언을 했습니다.
그가 나치의 강제 수용소에 감금되었을 때, 마침 강제수용소 발전소가 폭파하는 사건이 일어나 세 사람의 용의자가 체포되었습니다. 그 중 두 사람은 어른이었지만 한 사람은 어린 소년이었습니다. 성인 두 사람은 교수대에 올라가서 목을 매달으니까 몸이 무거우니까 즉시로 버둥대다가 숨이 끊어지고 만 것입니다. 그러나 소년은 몸이 어찌나 야위고 못먹어서 가벼웠더니 교수대 줄에 매달린 채 30분 이상을 발버둥쳐도 죽지 않았었습니다. 더 큰 고통을 당하고 숨이 끊어졌습니다. 그때 그 광경을 보던 유대인들은 누구든 외쳤습니다. “하나님 지금 어디 계십니까? 이러한 처참한 불행한 사건이 일어났는데도 하나님은 어디에 계십니까?”이때 비젤 박사도 그곳에 있었는데 자기의 내면 깊은 곳에서 저절로 터져 나오는 소리가 있었다고 합니다.“하나님이 어디 계시냐고? 바로 여기 있지 않느냐. 하나님은 지금 저 교수대에 매달려 버둥거리며 고통 받고 있다.” 죽어가는 인생, 죄 많은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서 끝까지 참고 내가 버둥거리고 있다. 때가 오면 반드시 심판할 것이다. 때가 오니까 독일은 망해 버리고 만 것입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택하신 백성이 고통당하는 것을 외면하실 수가 없습니다.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이 고통당하고 있는 현장에 항상 함께 계십니다. 어떤 고통을 당하던지 그 현장에 하나님은 함께 고통을 당하며 구원의 손길을 뻗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병이 괴로울 때 골리앗 같은 문제를 만나 낙심할 때, 삶의 그 어떤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은 우리와 같이 계시는 사랑의 하나님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또 이런 질문을 합니다. “하나님은 정말 죄 많은 나를 용서 하실까요? 나는 죄를 너무 많이 지었습니다. 지금 하나님께 나와서 도와달라고 할 체면이 서지 않습니다. 정말 나를 버리지 않을까요?”
성경 이사야 55장 7절에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야훼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
문제는 회개에 있습니다. 회개하고 죄를 저버리고 돌아오면 하나님께서 긍휼히 보시고 용서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느헤미야서 9장 17절에 “주께서는 용서하시는 하나님이시라 은혜로우시며 긍휼히 여기시며 더디 노하시며 인자가 풍부하시므로 그들을 버리지 아니하셨나이다”
어찌하든지 하나님은 용서하셔서 안 버리려고 애를 쓰는 것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다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음 받았습니다. 개나 돼지나 짐승은 말 못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형상을 안닮았기 때문에 말 못합니다. 앵무새도 흉내는 내지 자기가 직접 말을 못합니다. 말을 하는 사람은 다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말씀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저 아프리카 정글 속에 깊은 곳에 세상 문명과 떨어져 사는 흑인이라도 말을 하고 있으면 하나님이 지으신 하나님의 형상인 것입니다. 에스키모족이 눈속에 살면서도 서로 대화하고 말하면 하나님이 지으신 하나님의 형상대로 모양지은 하나님의 자녀인 것입니다. 하나님 이중에 한 사람도 버림받기를 원치 아니하시고 모두다 복음을 듣고 구원받기를 원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회개하고 죄를 버릴 때 하나님은 나를 어떠한 형편에 있어도 용서해 주시는 것입니다.
C.S. 루이스는 하나님의 용서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여러 번 넘어진다고 하더라도 그때마다 툴툴 털고 일어난다면 넘어지는 것 때문에 파멸될 수는 없습니다. 물론 넘어진 탓에 우리는 더러워진 옷을 입고 집으로 돌아올 것입니다. 그러나 집에는 훌륭한 목욕탕이 준비되어 있고, 수건이 걸려 있으며 깨끗한 옷들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스스로가 더럽다는 것을 느낄 때 뚜렷하게 우리 가운데 임재하시는 것입니다.”
스스로 회개하고 겸비할 때 하나님은 우리 가운데 와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어떤 죄도 용서해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진심으로 회개하고 죄를 버리기만 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시고 다시 기억도 하지 아니하시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1장 9절에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회개하는 우리들을 하나님은 버리지 않습니다. 그러면 또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합니다. “이 어려운 환경 속에 하나님은 기적을 베풀어 주실까요? 과연 하나님이 기적을 베풀어서 문제를 해결해 주실까요?”
마태복음 22장 32절에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니라”
죽은 옛날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구약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것 옛날의 하나님 아닙니까? 시방 우리와 같이 살아 계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다고 말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권세와 능력이 줄어지거나 짧아진 것은 아닌 것입니다.
시편 40편 5절에 “야훼 나의 하나님이여 주께서 행하신 기적이 많고 우리를 향하신 주의 생각도 많아 누구도 주와 견줄 수가 없나이다 내가 널리 알려 말하고자 하나 너무 많아 그 수를 셀 수도 없나이다”
하나님께서 행하신 기적이 너무 많아서 헤아릴 수 없다. 그 수많은 기적을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서 행하려고 준비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염려하지 말아야 됩니다.
일본의 유명한 신학자 우찌무라 간조(內村鑑三)는 일본에서 유명한 신학자입니다. 그런데 한 학생이 우찌무라 간조 선생을 찾아와서 “선생님, 나는 성경을 도저히 읽을 수가 없습니다. 성경에 있는 모든 기적들을 믿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께서 물 위를 걸었다는 것이라든지, 죽었다가 부활 하셨다든지. 이런 것은 이성으로 도무지 해석할 수 없습니다. 성경에 기적을 다 빼버리고 진리만 공부하면 어떻습니까?” 그러니까 우찌무라 간조 선생이 가만히 보고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더니 “이 사람아, 성경에 사람의 이성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기적들을 다 제한다면 꼭 두 가지만 남는데 성경 앞의 덮개와 뒤의 표지밖에 남지 않는다.” 성경에 있는 기적 다 뽑아버리면 이 두장 밖에 안 남아요. 성경은 펼치면 모두 기적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기적적인 하나님이기 때문에 앉아도 기적이요, 서셔도 기적이요, 지나가도 기적이요, 그림자만 밟아도 기적인 것입니다. 그러니 기적이 없는 기독교라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사랑의 이야기이자 하나님 기적의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은 죽은 하나님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신 하나님은 아브라함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뿐 아니라 우리들의 하나님도 되신다는 것입니다.
한국에서 12년 동안 우리 여의도교회에서 서대문에 있을 때 함께 일한 헨리 스웨인 목사님의 간증을 들어보면 가슴이 뭉클합니다. 그는 6.25때 한국 전쟁에 참여해서 1개 대대가 중공군 1개 연대와 싸워서 다 죽고 한소대만 남았습니다. 한 일곱사람만 살았습니다. 구사일생을 후퇴해서 본부에 오니까 본부에서 크게 화를 내서 전부 체포하여 총살시키든지 안그러면 돌아가서 진지를 회복하라는 것입니다. 모두다 울면서 밖으로 나왔을 때 그 가운데 스웨인 목사 한분만이 예수를 믿었습니다. “얘들아 울지 마라. 구약성경에 보면 기드온이 3백명의 용사로써 수만명의 적군을 물리친 적도 있다. 기적이 있다. 오늘 이 시간에 이만저판이다. 홰개하고 예수를 믿어들이고 주의 이름으로 나가자. 우리 이름으로 나가서는 안된다.” 전부 회개를 시키고 예수를 믿고 주님 이름으로 살려달라고 기도하고 그리고 산고지 밑으로 가야 되는데 거기에 평야가 있어요. 그들이 뛰어나가니까 중공군 기관총이 비같이 쏟아지는 것입니다. 주의 이름으로 부르고 죽을 힘을 다해서 산 밑바닥에 탈싹 붙어서 한사람 한사람 이름을 부르니까 일곱명이 다 살아 있어요. 그런데 보니까 중공군이 미군을 죽이려고 던진 수류탄이 철조망을 다 파헤쳐서 구멍이 뚫어졌어요. 그래서 일시에 그 철조망을 뚫고 들어가서 중공군하고 마주쳐서 발로 차고 칼로 찌르고 주먹으로 때리고 밟고 육탄전이 벌어졌습니다. 그런데 미군 한명이 보니까 중공군 한 사람이 총을 가지고 죽어 있거든요. 그래서 그 짧은 총을 가지고서 쏴버리니까 오색찬란한 무지개가 쫙서거든.. 그러니 중공군들이 그 무지개를 보고 손을 가리키니 일제히 돌아서서 달아나기 시작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공군들이 사용하던 기관총을 돌이켜서 그들보고 갈기니까 시체가 산더미같이 쌓였더랍니다. 그래서 1개 분대가 연대 이상의 군대들이 지키고 있는 고지를 완전히 점령했어요. 도저히 상상할 수 없어. 그들이 모여서 전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통곡을 하고 울면서 그 다음에 본부에 내려오니까 본부에서 “너 죽을 사람들이 어떻게 해서 그런 기적으로 그 고지를 점령할 수 있었느냐?”고 자꾸 묻기에 오직 대답하는 말은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주님께 부르짖어 기도하니 주님이 기적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야, 이놈들아, 그런 엉터리 같은 소리하지 말고 바른말해라.” “바른말이 그것입니다. 1개 분대로써 나가서 연대이상의 군인들을 어떻게 물리칩니까? 하나님이 기적을 베풀었습니다.” 그래서 그때 스웨인 목사가 하나님께 무릎을 꿇고 기도를 했습니다. “주님, 주님께서 나를 죽음에서 한국에서 살려주셨으니 남은 삶은 한국에 속한 것입니다.” 미국 가서 신학교에 공부를 하고 한국으로 선교사로 나와서 우리 서대문에서 저와 함께 12년을 같이 일을 했습니다. 그는 정말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주의 종이었습니다.
오늘도 우리 하나님이 진심으로 부르짖으며 기도할 때 이러한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우리를 위해서 싸워 주십니다. 이는 힘으로도 되지 아니하고 능으로도 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영으로 말미암아 되는 것입니다. 어려움을 당할 때 “하나님이여 나는 어찌할까요?” 몸부림을 치고 탄식하지 말고 기적을 베푸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나가야 될 것인 것입니다.
2.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이 있습니다.
성경에는 “너희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보여 주리라”고 말한 것입니다. 부르짖지 아니하면 역사를 안하셔요. 하나님은 우리와 다 같이 계시지만 오직 찬양하고 감사하고 부르짖고 기도하는 사람에게만 역사하는 것입니다. 그 영적 법칙입니다. 왜 하나님이 예수 잘 믿는 사람이 저런 고난을 당하게 하십니까? 그분은 하나님을 예배하고 찬미하고 부르짖지 않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부르짖어야 하나님은 와서 대답을 하시는 것입니다. 구하라 주실 것이요, 찾으라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열릴 것이라. 너희가 없는 것은 구하지 아니함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누가복음 18장에 보면 과부와 재판관의 이야기가 있지 않습니까?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비유로 말씀하여 이르시되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장이 있는데 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어 자주 그에게 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하되 그가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 후에 속으로 생각하되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나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눅 18:1~7)
여기에 한번 따라 말씀하십시오.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 우리는 택하신 자들인데 우리가 어려움을 당할 때 조금 기도하지 밤낮 부르짖습니까? 밤에도 부르짖고 낮에도 부르짖고 하나님 앞에 몸부림치고 하나님의 옷자락을 잡고 놓지 않을 때 하나님은 응답해 주시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너무 편안해져서 결사적인 기도를 하지 않습니다.
누가복음 11장 5절로 8절에는 예수님이 밤중에 찾아온 친구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계십니다.
“너희 중에 누가 벗이 있는데 밤중에 그에게 가서 말하기를 벗이여 떡 세 덩이를 내게 꾸어 달라 내 벗이 여행 중에 내게 왔으나 내가 먹일 것이 없노라 하면 그가 안에서 대답하여 이르되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문이 이미 닫혔고 아이들이 나와 함께 침실에 누웠으니 일어나 네게 줄 수가 없노라 하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비록 벗 됨으로 인하여서는 일어나서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간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요구대로 주리라”
친구기 때문에 밤에 일어나서 줄지경도 못되는데 그래도 일어나서 떡을 준 것은 간청한다. 구하고 또 구하고 매달리고 또 매달리고 외치고 또 외치고 이러한 꾸준하고 인내력을 가지고 간절한 기도가 오늘날 있으면 하나님이 오늘날 대답해 주시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1장 9절로 10절에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모든 것을 내어 맡겨야 되는 것입니다. 깨어지고 복종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의지할 때 천부여 의지없어서 손들고 옵니다. 손들어버려야 되는 것입니다.
시편 34편 18절에 “야훼는 마음이 상한 자를 가까이 하시고 충심으로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
시편 37편 5절로 6절에 “네 길을 야훼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 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 같이 하시리로다”고 말씀한 것입니다.
여름 바닷가에 가면 수영장에 가면 반드시 구조대원들이 높은 곳에 의자를 마련하고 쌍안경 가지고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조난을 당해서 물에 빠져 허우적 거리면 신속히 헤엄쳐 가서 구조하려고 하는데 가장 어려운 것은 살겠다고 발버둥을 치면서 구조대원의 발을 끌어안고 놓아주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같이 빠져 죽게 되는 것입니다. 몸을 맡기세요. 몸을 맡기세요 해도 맡기기는 뭘맡겨. 더 매달리니까 그때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은 턱을 들어서 주먹으로 때리라는 것입니다. 때려 버리면 기절을 합니다. 기절을 하고 늘어지면 몸을 맡겨버리기 때문에 물속에서 건져내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맡겨야 돼요. 물에 빠진 사람 건지는데도 맡기지 아니하면 같이 빠져죽는 것처럼 이 세상에 문제를 당해서 하나님께 나와 부르짖을 때 주님께 온전히 맡겨야지 내가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발버둥을 치다가는 낭패와 실망을 당하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모든 것을 내어 맡기고 주님이 도와주실 것을 기다려야 되는 것입니다.
유명한 설교자 찰스 스펄전Charles H. Spurgeon) 목사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인간의 마지막은 하나님의 시작이다!” 인간의 마지막이 와야 하나님은 출발하신다. 인간이 아직까지 살아서 무엇을 하겠다고 발버둥을 치고 있으면 하나님은 기다린다. 하나님이 이제 끝났습니다. 이제는 죽었습니다. 이제는 살든지 죽든지 흥하든지 망하든지 성하던지 쇠하든지 천부에게 의지합니다. 손들고 오니 도와주십시오. 그러면 오냐 이제부터 내 시작이다. 내가 하는 것을 보라. 그러게 말씀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은 이처럼 내 생각, 내 고집을 다 버리고 온전히 주님께 나를 맡기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때부터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직접 일하시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믿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부르짖고 맡겨놓고 난 다음에 못 믿어서 마음이 늘 달랑 달랑하면 하나님이 어떻게 생각하시겠습니까?
히브리서 13장 8절에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다고 말씀하셨는데
마가복음 11장 24절에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옛날에 제가 어릴 때 우리집은 과수원을 하고 농사를 지었는데 고구마를 심을 때 제가 간청을 해서 고구마줄 한줄을 내가 내것으로 얻었습니다. 나중에 뿌리가 나와서 고구마가 열립니다. 그런데 저는 물을 주고 난 다음 학교 갔다와서는 그것을 파고서 고구마를 들어보고 또 심어놓고, 또 그 다음날 학교갔다 와서는 또 얼마나 자랐는가 떠들떠 보고.. 몇 주만에 다 말라죽어버리고 말았어요. 그런데 우리 아버님이 심은 고구마는 아버님이 한번 심어놓고 그냥 돌보지도 않아요. 내버려 놓아요. 물줄 때 물만 주고... 때가 이르니까 굵직굵직한 고구마가 주렁주렁 달렸습니다. 맡기니까 땅이 고구마를 열게 하는 것입니다. 내가 땅을 못믿어가지고서 자꾸 뽑아 보니까 땅이 일을 안해서 고구마가 죽은 것입니다.
세계적인 피아니스트인 바이런 자니스(Byron Janis)는 어렸을 때 교통사고를 당하여 손에 심한 신경통과 신경마비 증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한때는 열 손가락 중에 왼손 중지 하나만 제대로 움직이고 새끼손가락은 완전히 마비된 적도 있었습니다. 게다가 오른쪽 손목은 40퍼센트만 움직일 수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그는 위대한 피아니스트가 되었습니다. 기자가 그 어려움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었는지 물었을 때,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여러 의사들도 수고했고, 침도 많이 맞았습니다. 그러나 기적은 기도로 가능했습니다. 제가 간절히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나에게 싸울 용기를 주셨습니다. 나에게 문제가 있지만 그 문제가 나를 정복하지는 못하고 내가 그 문제를 극복할 수 있는 믿음을 하나님이 주셨습니다.” 맞습니다. 고통 가운데에서도 싸우고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용기와 힘과 지혜와 능력을 주시는 분이 하나님인 것입니다. 그래서 능히 이길 수 있게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믿고 부르짖어 기도하고 하나님께 반드시 응답할 것을 알고 내어 맡기고 기다리는 것이 굉장히 필요한 것입니다. 마음이 조급하면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가 없습니다. 기다려야 돼요.
3. 참고 기다려라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 앞에 모여서 있을 때 애굽 군대가 쳐들어왔지 않습니까? 그때 백성들이 발버둥을 치고 하나님께 부르짖고 모세를 원망해서 애굽에 장지가 없어 우리를 이곳에 끌어내어 죽게 만드는가. 애굽에 우리를 그냥 내버려 두라. 애굽 사람을 섬기고 살겠다. 그렇게 하지 않더냐. 아주 조급해서 발버둥을 쳤습니다. 그때 모세가 하는 말이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야훼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 야훼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출 14:13~14)
하나님을 믿었으면 하나님께 맡기고 가만히 기다려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은 참 기다리지 못합니다. 기도하고 얼마있지 않다가 낙심하고 발버둥을 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기다려서 하나님과 함께 일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시편 91편 14절로 16절에 “하나님이 이르시되 그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그를 건지리라 그가 내 이름을 안즉 내가 그를 높이리라 그가 내게 간구하리니 내가 그에게 응답하리라 그들이 환난 당할 때에 내가 그와 함께 하여 그를 건지고 영화롭게 하리라 내가 그를 장수하게 함으로 그를 만족하게 하며 나의 구원을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도다”고 약속을 해주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갈 때 절망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절망자에게는 모든 은혜와 축복이 떠나가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끝이 좋아야 모든 것이 좋다.”는 말이 있습니다. 오스왈드 샌더스(J. Oswald Sanders)는 위대한 업적을 이룬 400명을 대상으로 그들이 업적을 이룬 연령을 분석해 보았습니다.
그 중에 35%가 60대, 23%가 70대, 6%는 80대가 넘어서 업적을 이루었습니다. 즉 위대한 일을 이룬 사람의 64%가 60대 이후에 그 일을 이룬 것입니다. 여기 보니까 70대 먹은 사람이 23%나 위대한 일을 이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나에게도 희망이 있어요. 70대도 이룰 수 있으니까. 나는 하도 이 기사가 좋아서 여러 번 오늘 아침에 읽었습니다. 35%가 60대, 23%가 70대, 6%가 80대가 넘어서 업적을 이루었다. 64%가 60대 이후에 그 일을 이룬 것입니다.
경영학의 아버지 피터 드러커(Peter Ferdinand Drucker) 도 많은 역작을 썼는데, 대부분 88세 이후에 쓰여진 것이 대부분이었다고 말합니다. 88세 이후에 적은 그 위대한 경영학 책이 위대한 책이었다는 것입니다. 나이가 많고 힘이 없다고 해서 미래에 대한 희망도 품지 않고 바람 부는 대로 물결 치는 대로 살아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합동하여 선을 이룬다고 늙어지는 것도 선을 이루는 것입니다. 나의 형편과 상황이 아무리 힘들고 어렵더라도 불평하고 원망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진심으로 기도하며 모든 것을 맡기면 하나님 역사하심이 나타나 놀라운 역사를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젊을 때도 맡기고 늙을 때도 맡기고 하나님 바라보면 하나님은 우리를 사용하셔서 그 뜻을 이루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려움을 당해서 몸부림 칠 때 가장 경계해야 될 것은 두려움입니다. 마음에 두려움은 우리를 파멸시킵니다. 욥이 고통을 당할 때 내 무서워하던 것이 내게 임했고 내 두려워 하는 것이 내 몸에 미쳤다고 탄식을 했습니다.
「크리스찬 비즈니스맨의 리더십 개발」이라는 책을 보면 두려움이 우리에게 미치는 악영향을 네 가지로 정리해 놓았습니다.
첫째, 두려움은 우리의 잠재력을 마비시킵니다. 두려움이 우리의 재능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묶어버려서 주저앉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둘째, 두려움은 우리의 관계를 파괴시킵니다. 두려움은 인간관계에 문제를 일으키는 것입니다.
셋째, 두려움은 우리가 누리는 행복을 방해합니다. 두려움이 있을 때 우리는 결코 행복을 느낄 수 없습니다.
넷째, 두려움은 우리의 성공을 방해합니다. 두려움은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두려워하는 일에 쏠리게 함으로 성공보다 실패를 준비하게 합니다.
두려움은 우리 신앙생활을 방해하는 가장 큰 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홍해 앞에 선 이스라엘 백성이 뒤를 따르는 바로의 군대들과 앞에 가로막힌 홍해를 보고 심히 두려워하여 모세를 원망하고 탄식했습니다. 그들이 두려워하고만 있었으면 파멸됐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야훼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고 했습니다. 예수 믿는 우리에게는 구원이 옵니다. 뒤에서 오든지 앞에서 오든지 옆에서 오든지 우리 눈에는 안보여도 구원은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숨어서 일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자리에 와 있어도 눈에 안보이고 숨어 계십니다. 우리 뒤에서 일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드시 우리를 버리거나 떠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상황에서도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만 마음속으로 바라 보십시오. 그럴 때 사랑이 무한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싸워주시고 우리에게 승리를 반드시 갖다 주시는 것입니다.
<결론>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신지라 식언치 아니하시고 인자가 아니신지라 후회가 없으십니다. 우리가 절망적 고난에 처하게 될 때 하나님을 찾고 찾으면 반드시 만나게 됩니다. 신앙이란 이와 같은 고난을 통하여 장성하게 됩니다. 오! 주여 나는 어찌하오리까? 그렇게 말하면 너는 진심으로 하나님을 찾으라 그러면 살리라고 말씀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라이놀드 G. 그린 목사는 “인생의 가장 좋은 일들은 슬픔이나 고난의 보자기에 싸여서 온다.”고 말했습니다. 좋은 일만 오면 좋겠는데 좋은 일이 반드시 슬픔과 고난의 보자기에 싸여서 온다. 미국에 최근에 저명한 목사 한분이 대통령 취임식에서 연설한 목사님이십니다. 그 명망이 대단하고 미국신문이 떠들어 제키고 교회가 왕성한데 사람들이 얼마나 행복하냐고 했더니 그는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그 아내가 유방암으로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생에게 좋은 일만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좋은 일이 있을 때는 반드시 나쁜 일도 함께 온다는 것을 알아야 된다.”
바로 라이놀드 G. 그린 목사의 말처럼 슬픔이나 고난의 보자기에 싸여서 좋은 일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슬픔이 고난이 다가올 때라도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을 믿고 기다리면, 슬픔과 고난의 보따리 속에 하나님이 더 좋은 것을 담아 주신다는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헨리 워드 비쳐(Henry Ward Beecher)는 이렇게 말했습니다.“우리는 날마다 두 개의 손잡이를 잡고 살아간다. 하나는 두려움의 손잡이며 다른 하나는 믿음의 손잡이다.” 한쪽으로는 믿고 한쪽으로는 무서워하며 산다는 것입니다. 신앙이란 고난을 통해 장성하게 됩니다. 그런데 절망적 고난에 처하게 될 때, 두려움의 손잡이를 잡고 물러설지, 아니면 믿음의 손잡이를 잡고 앞으로 나아갈지 우리가 결정을 내려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거짓이 없으신 분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전심으로 찾으면 반드시 살게 되는 기적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붙들어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절망적인 일을 당하여 “오 하나님이여 나는 어찌할까요? 어찌할까요?” 그러나 하나님은 “나를 찾으라. 대답은 내 안에 있다.” 하나님은 오늘도 여러분의 문제를 대답을 주시기 위해서 여러분 곁에 계시다는 것을 잊지 말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고개 숙여 기도드리겠습니다.
<기도>
사랑이 많으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
하나님이 우리를 불러 주셔서 은혜와 사랑을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우리가 살면서 수많은 고난을 당합니다. 수많은 어려움을 당합니다. 그러나 고난이 있으면 축복도 따라옵니다. 시련이 있으면 평안도 따라오는 것입니다. 아버지 하나님이여 전적으로 고난만 당하지 아니하고 전적으로 행복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고난과 행복은 번갈아가며 오며 믿음과 의심도 번갈아가며 오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을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중심으로 서면 이 모든 일을 처리할 수가 있는 것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 하나님이여 나는 어찌해야 합니까? 하나님은 이러한 사람에게 나에게 오라 내가 너를 쉬게 하리라고 말씀하시옵니다. 주여 주님을 찾아가오니 한 사람도 외면하지 마시고 붙들어 주시고 문제를 해결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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