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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딤후3:14-4: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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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정용섭 목사 |
참고 : | http://dabia.net/xe/39347 |
2007.10.28.
바울은 여러 종류의 편지를 남겼습니다. 첫째는 구체적인 교회에 보낸 편지인데, 고린도서나 빌립보 등이 그것입니다. 둘째는 어떤 지역의 교회들에게 보내는 편지인데, 갈라디아서가 그것입니다. 셋째는 개인에게 보낸 편지인데, 오늘 우리가 읽은 디모데서가 그것입니다. 편지는 일반적으로 사적인 내용을 많이 담고 있지만 디모데서는 오히려 신앙적인 내용을 많이 담고 있습니다. 길이로만 보더라도 그 당시의 일반적인 편지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요즘 식으로 말해 목회자의 길을 걷고 있던 디모데를 향해서 신앙의 아버지의 심정으로 목회의 중심이 무엇인지를 가르치고 있는 중입니다.
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이 디모데후서는 바울이 로마의 감옥에 갇혀 있을 때 쓴 편지라고 합니다. 4:6절을 보십시오. “나는 이미 피를 부어서 희생제물이 될 준비를 갖추었습니다. 내가 세상을 떠날 때가 왔습니다.” 그 당시의 감옥생활이라는 게 죽음을 생각하게 만들었고, 또한 재판 과정이 바울에게 불리하게 돌아간 것 같습니다. 만약 바울이 그렇게 순교하고 만다면 그동안 뿌려놓은 복음의 씨가 어떤 결실을 맺을지, 걱정이 없을 수 없습니다.
감옥에 갇혀 있다는 사실만이 문제는 아닙니다. 감옥 밖의 상황도 별로 좋지 않습니다. 그 당시는 아직 기독교의 토대가 자리를 잡지 못했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중심이 아주 혼란스러운 상태였습니다. 유대교 기독교인들이 막강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고, 율법 폐기론자들인 니골라 당도 일정한 세력을 형성했으며, 헬라철학의 한 유파인 영지주의도 기독교 안에 깊숙이 들어왔습니다. 교회의 중심을 세워줄 신학도 없고, 신학자도 없으며, 노회나 총회도 없었습니다. 그 당시 기독교인들은 여러 사상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었기 때문에 아주 쉽게 복음으로부터 벗어나곤 했습니다. 딤후 3:1-9절에서 보듯이 많은 이들이 이 복음공동체를 떠나기도 했습니다. 지금 바울이 처한 형편은 아주 어렵습니다. 이런 형편은 다른 편지인 갈라디아서와 고린도서에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가 복음 사역에서 기대할 사람은 디모데 같은 젊은 일꾼이었습니다.
성경의 사람 디모데
디모데가 바울의 제자가 된 사연은 행 16:1-5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울이 2차 선교여행을 떠나면서 바나바와 헤어진 다음에 리스트라에 들렸다가 그곳에서 디모데를 발견합니다. 디모데는 그 지역의 교우들 사이에서 평판이 좋았던 젊은이였습니다. 바울은 그를 데리고 떠나면서 할례를 베풀었습니다. 그 이유는 디모데의 아버지가 그리스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던 유대인들에게 공연하게 트집을 잡히지 않기 위해서였습니다. 그 뒤로 디모데는 바울의 제자이면서 동시에 동역자로 활동했고, 결국 오늘 본문이 말해주듯이 바울이 가장 신뢰하는 후계자로 성장했습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디모데가 성경의 사람이라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디모데는 어려서부터 그의 외할머니 로이스와 어머니 유니게로부터 유대교의 경건과 초기 기독교의 복음을 배웠습니다. 3:15절 말씀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대도 기억하다시피 그대는 어려부터 성경을 잘 익혀왔습니다. 성경은 그리스도 예수를 믿음으로써 구원을 얻는 지혜를 그대에게 줄 수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성경은 구약을 말합니다. 그 당시에는 신약성서가 없었습니다. 몇몇 복음서와 편지들을 비롯해서 교회 공동체에서 나온 문서들이 없지 않았지만 그 당시는 신약성서가 형성되던 시기였기 때문에 그런 것을 성경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본문이 말하는 그 성경이 지금처럼 우리 성경 안에 들어와 있는 구약 39권을 가리키는 것도 아닙니다. 유대교에서도 그 당시에는 아직 구약의 39권으로 경정화하지 못했습니다. 바울이 지금 말하고 있는 성경은 나름으로 권위를 인정받고 있던 구약성서 일부를 가리킵니다. 그것이 정확하게 무엇인지는 잘 모릅니다. 어쨌든지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바울이 디모데를 높이 평가하는 기준이 바로 성경과의 연관성에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을 어려서부터 잘 익혀왔다는 사실이 중요한 이유는 성경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지혜를 준다는 데에 있습니다. 바울이 본문에서 말하고 싶어 하는 가장 중요한 내용이 바로 이것입니다. 성경을 깊이 아는 사람들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됩니다. 그것이 참된 지혜입니다. 이 대목을 약간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을 겁니다. 모든 유대인들은 성경을 어렸을 때부터 익혀왔는데 왜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지, 이상할 겁니다. 유대인들 중에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보다는 믿지 않는 사람이 훨씬 많은 이유가 궁금할 겁니다. 성경을 읽는다고 해서 모든 사람들이 그 깊이에 무조건 도달하는 건 아닙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중에도 성경 박사인 서기관들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모든 사람에게 존경을 받을 정도로 유식한 사람들이었지만 성경의 중심을 알지 못했습니다.
본문이 말하는 성경은 단순히 종이로 된 성경만을 가리키는 게 아닙니다. 물론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한 문서이지만, 문서보다는 하나님 말씀이 궁극적으로 중요합니다. 제가 딸에게 편지를 썼다고 합시다. 이 편지는 딸이 아버지의 생각을 알 수 있는 자료이기는 하지만 아버지와 똑같지는 않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은 문서에만 한정될 수 없습니다. 문서가 하나님의 말씀을 모두 담아낼 수도 없습니다. 동양에도 불립문자(不立文字)라는 말이 있습니다. 말이 진리를 모두 세우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단지 성경만이 아니라 그것과 연관되어 있는 기독교 교리까지 포함합니다. 예컨대 삼위일체라는 신학용어는 성서에 등장하지 않지만 하나님의 말씀임에 틀림없습니다. 이런 삼위일체를 깊이 앎으로써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왜 하나님의 아들인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해하지는 마십시오. 문서로 된 성경이 의미가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신학이 이런 문서로 된 성경보다 훨씬 권위가 크다는 말도 아닙니다. 우리가 읽고 있는 이 성경책은 그 어떤 것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하나님의 말씀을 풍성하게, 온전하게 담고 있다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문제는 그것을 바르게 알아야 하며, 이를 위해서 해석할 줄 알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 해석의 힘은 곧 기독교 교리를 정확하게 아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그 교리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믿음으로써 우리는 성서를 바르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지금 디모데에게 바로 하나님의 말씀과 복음의 가르침을 굳게 지키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그것 밖에는 교회를 살릴 수 있는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 말고는 우리의 신앙을 유지할 수 있는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지키는 것이야말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잃어버리지 않는 최선의 길이며, 유일한 길이라는 뜻입니다.
이런 말을 너무나 당연한 것처럼 생각하는 분들이 있겠지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수호한다는 게 그렇게 당연한 게 아닙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자신의 인격이나 종교적 감정에 치우치기 쉽습니다. 교회에 나와서 단순히 심리적인 안정을 얻으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심지어는 취미나 스포츠 동호인들의 모임처럼 사람들끼리의 친선도모를 통해서 기독교 신앙을 유지하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자신들의 종교적 성취감이나 명예심의 수단으로 삼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그 이외의 것들을 신앙의 토대로 삼는 태도가 바로 사이비입니다. 그렇게 가르치는 이들이 거짓 선생입니다. 딤후 3:13절에서 바울은 이런 거짓 선생들을 조심하라고 경고합니다. 그들은 남을 속이기도 하고 남에게 속기도 합니다. 이런 거짓 교사들을 무조건 아주 부도덕한 사기꾼으로만 생각하면 곤란합니다. 그들은 아주 경건한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복음이 아니라 율법을 강조하는 사람들이 바로 거짓 선생입니다. 바울은 딤전 4:1절 이하에서 이미 거짓 선생들을 거론했는데, 이 거짓 선생들은 신자들에게 결혼을 금지하거나 어떤 음식을 못 먹게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어떤 종교적인 관습으로 얽매이게 하는 이들이 바로 거짓 선생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배우고 지키는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자유를 얻은 사람들입니다만 이 신앙의 자유를 방종의 기회로 삼지 않고 다시 말씀을 깊이 있게 공부하고 거기에 따라서 자신을 훈련시켜 나갑니다. 자유롭지만 스스로 말씀 안으로 자신을 굴복시킵니다. 이런 사람들은 당연히 성경을 읽고, 배우는 일에 게으르지 않습니다. 그런 경건한 삶이 자신의 종교적 성취감에서가 아니라 온전한 참된 순종에서 나온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말씀을 전하라!
그래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4:2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전파하시오.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 꾸준히 전하고 끝까지 참고 가르치면서 사람들을 책망하고 훈계하고 격려하시오.” 여기서 말씀을 전파하라는 것은 설교하라는 뜻입니다. 설교할만한 상황이 되는지 않든지 구애받지 말고 신자들에게 말씀을 바르게 설교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곧 설교의 시급성을 의미합니다.
바울이 설교의 시급성을 언급하는 이유는 앞으로 사람들이 이런 가르침을 듣기 싫어할 때가 오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기 귀를 만족시키기 위해서 마음에 맞는 교사들을 끌어들이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진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꾸며낸 이야기에 마음을 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바울은 사람들의 마음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습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자기 귀를 만족시키는 것에만 마음을 둡니다. 이런 것을 무조건 세상의 악한 일들이라고만 생각하면 곤란합니다. 노골적으로 악한 것은 쉽게 눈에 뜨이기 때문에 교회 안으로 들어올 수 없습니다. 오히려 경건한 모습으로 들어옵니다. 앞에서 짚었듯이 먹을 음식과 먹지 못할 음식을 가려먹으라거나, 특별한 날을 기념하라고 가르치는 것들이 바로 귀를 즐겁게 하는 것입니다. 지금도 그런 교회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일천번제를 드린다는 명분으로 천 번의 헌금을 작정하고 드리도록 가르치는 교회 선생들도 있습니다. 솔로몬을 흉내 내는 게 어리석은 일이지만, 그래도 청중들은 그런 가르침에 혹 하기 쉽습니다.
바울은 귀를 즐겁게 하는 일은 곧 진리가 아니라 꾸며낸 이야기입니다. 꾸며낸 이야기는 지금도 많습니다. 교회 안에 돌고 도는 이상한 이야기들은 많습니다. 누가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이야기를 간증 형식으로 하고 다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사업이 망하게 되었다가 헌금을 많이 드리고 모든 게 기적적으로 회복되었다는 말들도 있습니다. 일전에 가까운 친구 목사에게서 들은 이야기입니다. 사람들을 불러 모아 예언을 해주는 사람들도 있다고 합니다. 수능을 볼 학생이나 대학졸업을 앞둔 젊은이들을 데려다가 그 미래를 예언해 준다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으로 점을 치는 겁니다. 사람들은 이런 이야기에 마음을 팔게 됩니다.
이런 건 단지 종교적인 문제만이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도 모두 귀를 즐겁게 하는 이야기에 정신이 팔려 있습니다. 티브이, 신문 광고는 우리의 귀를 끌어당깁니다. 드라마는 어떤가요? 아무 것도 남는 게 없지만, 단지 우리의 마음을 들뜨게 만들지만 우리는 거기에 눈과 귀를 맡겨버립니다. 좋은 아파트와 고급 승용차를 타면 사람이 행복할 것처럼 선전해대는 소리에 민감하게 반응합니다. 아마 앞으로 이런 현상을 더 심해질 것입니다. 그런 것들은 진리가 아니라 바울이 말하듯이 꾸며낸 이야기입니다. 그게 꾸며낸 이야기라는 사실이 눈에 들어오시나요? 우리의 영혼이 차분하게 자리를 잡지 못하고 붕 떠 있으면 그 사실이 눈에 들어오지 않고, 오히려 그런 꾸며낸 이야기만 따라가게 될 겁니다.
이런 영적이고 정신적인 상황을 아는 사람은 분명히 다른 태도로 세상을 살아야 합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분명히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들이 진리가 아니라 꾸민 이야기만을 추종하게 되더라도 디모데 자네만은 “언제나 정신을 차리고 고난을 견디어내며 복음 전하는 일에 힘을 다하여 그대의 사명을 완수하시오.”(4:5) 이 명령은 교회 지도자인 디모데가 감당해야 할 특별한 사명입니다. 그는 좌고우면하지 말고 온전히 복음을 전하는 일에 힘을 쏟아야 합니다. 오늘의 교회 지도자들이 마음에 새겨야 할 대목들입니다. 그런데 복음을 전한다고해서 늘 전도, 교회개척, 해외선교 같은 것만을 생각하면 안 됩니다. 그런 것들은 상황에 따라서 우리가 수행해야 할 일거리입니다.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복음과 반대되는 일을 거절한다는 뜻입니다. 복음과 반대되는 일은 곧 위에서 말씀드린 대로 꾸며낸 이야기, 귀를 만족시키는 이야기를 따라다니는 것입니다. 이 일을 거절하는 게 곧 진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그것이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가능한 하나님의 구원에 온 영혼을 던지는 것입니다.
진리에 귀를 기울이면 살아가기는 쉽지 않을 겁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일상으로 경험하는 삶은 진리와 꾸며낸 이야기를 구별하지 못하도록 우리를 강요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정신을 차리고” 복음을 전하라고 했습니다. 고난도 당하겠지만 거기에 굴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을 수호하라는 뜻입니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준 이 명령은 곧 오늘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무엇이 진리이며 무엇이 꾸며낸 이야기인지 분간하지 못하는 이 세상 앞에서 우리는 정신을 차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며 전해야 합니다. 바울은 우리가 전해야 할 그 말씀의 핵심을 4:1절에서 요약해 주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죽은 자와 산 자를 심판하실 것이며, 재림하시고 심판하시며 생명으로 통치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준엄한 사실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믿으며, 기다리고 있는 사람은 결구 꾸며낸 이야기에 한눈을 팔지 않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사실을 놓치지 마십시오. 이 하나님의 말씀을 수호하십시오. 바울이 그렇게 살았고, 디모데가 그렇게 살았으며, 지난 2천년 역사에서 수많은 신앙의 선배들이 그렇게 살았습니다. 이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을 지킬 것이며, 여러분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말씀의 새로운 깊이로 들어올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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