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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길이 열린다!

이사야 정용섭 목사............... 조회 수 1978 추천 수 0 2010.03.03 12:23:50
.........
성경본문 : 사35:1-10 
설교자 : 정용섭 목사 
참고 : http://dabia.net/xe/39426 
emoticon  2007.12.16.

구약성서를 끌고 가는 두 사건은 기원전 15세기에 일어난 출애굽과 기원전 6세기 초에 일어난 바벨론 포로석방입니다. 개략적으로 본다면 이스라엘의 모든 정치와 종교에 관한 규정인 모세오경과 이스라엘의 역사를 담은 전기예언서는 출애굽 이후에 기록되었으며, 이스라엘의 정신적 토대를 세운 예언서와 여러 종류의 문학작품들은 바벨론 포로석방 전후로 기록되었습니다. 이사야는 물론 포로석방을 전후한 성서에 속합니다.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의 백성들이라고 자처하던 이스라엘 사람들이 바벨론 제국에 의해서 속절없이 무너졌습니다.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수많은 귀족들과 지도자들이 바벨론 포로가 되었습니다. 그들의 심정이 어땠을까요? 그들은 절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 절망 가운에서도 예언자들은 그 바벨론 유수를 신학적으로 해석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말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짓을 했습니다. 이사야가 그 상황을 어떻게 표현했는지 사 1:21-23절을 말씀을 보십시오. “어쩌다가 성실하던 마을이 창녀가 되었는가! 법이 살아 있고 정의가 깃들이던 곳이 살인자들의 천지가 되었는가! 너의 은은 찌꺼기가 되었고 너의 포도주는 물이 섞여 싱거워졌구나. 너의 지도자들은 반역자요, 도둑의 무리가 되었다. 모두들 뇌물에만 마음이 있고 선물에만 생각이 있어 고아의 인권을 짓밟고 과부의 송사를 외면한다.” 예언자들은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하는 역사를 하나님의 눈으로 해석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민중들과는 다른 영적인 눈을 갖고 있었습니다. 바벨론 유수의 암담한 현실에서도 그들은 새로운 희망을 노래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바벨론으로부터 해방시킨다고 말입니다. 그들은 이제 바벨론을 떠나 유대 땅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이사야도 오늘 우리가 읽은 35장에서 그 사실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광야에 난 길

8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곳에 크고 정결한 길이 훤하게 트여 ‘거룩한 길’이라 불리리라.” 그 길은 거룩하기 때문에 ‘부정한 사람’은 그리로 지나갈 수 없다고 합니다. ‘어리석은 자들’도 서성거리지 못합니다. 9절 말씀은 그 길이 얼마나 안전한지 이렇게 묘사합니다. “사자가 얼씬도 못하고 맹수가 돌아다니지 못하는 길, 건짐 받은 사람만이 거닐 수 있는 길”입니다. 위험하고 거친 길만 다니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이런 길은 아무 것도 거칠 것이 없는 고속도로와 같습니다. 이런 길만 난다면 그들은 한 달음에 예루살렘으로 달려갈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이사야는 바벨론에서 예루살렘까지 실제로 도로를 깔겠다는 뜻일까요? 하나님이 홍해를 갈라서 길을 냈듯이 광야에도 그런 길을 내신다는 말일까요? 이사야에게는 그럴 능력이 없습니다. 이사야만이 아니라 이스라엘 전체 백성들에게 그럴 능력이 없습니다. 이사야가 말하는 거룩한 길은 실제 길이 아니라 영적인 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구원 행위에 대한 묵시문학적 표현입니다. 이 길은 하나님의 구원 행위에 대한 메타포입니다. 이런 메타포를 통해서 이사야는 이스라엘 민족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을 선포합니다. 그들이 전혀 상상할 수도 없는 일들이 일어난다고 말입니다. 무슨 일이 일어날까요?
1,2절 말씀을 보십시오. “메마른 땅과 사막아, 기뻐하여라. 황무지야, 내 기쁨을 꽃피워라. 아네모네처럼 활짝 피워라. 기뻐 뛰며 환성을 올려라. 황무지도 레바논 영광으로 빛나고 가르멜과 샤론처럼 아름다워져 사람들이 야훼의 영광을 보리라. 우리 하느님의 영광을 보리라.” 여기에 등장하는 단어인 메마른 땅, 사막, 황무지는 사람들이 관심을 갖지 않는 곳입니다. 그곳에서는 생명이 살아가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곳에 꽃이 활짝 피게 됩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요? 사람들은 이런 현상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된다고 합니다. 여러분은 이미 사막과 황무지가 무엇을 뜻하는지 알았을 겁니다. 예루살렘이 함락되어 어쩔 수 없이 바벨론 포로로 잡혀간 이스라엘 사람들이 처한 형편입니다.
이들은 절망에 빠져 있었으며,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용기를 내고 무서워하지 않을 수 있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원수를 갚으러 오시기 때문입니다. 4b절을 이렇습니다. “하느님께서 오시어 보복하시고 너희를 구원하신다.” 보십시오. 이사야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대신해서 보복하신다고 말합니다. 참으로 놀라운 예언입니다. 아주 과격하고, 혁명적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보복하신다면 그걸 막을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사랑의 하나님이 보복하신다는 말은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할 분들이 있을 겁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비추어본다면 더더욱 이상하게 보일 겁니다. 우리는 성서말씀을 전체적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한 두 구절만 따로 떼어서 그것을 문자적으로 따르다 보면 모순이 생깁니다. 지금 하나님이 보복하신다는 이 표현을 단순히 원수를 갚는다는 차원으로만 보면 안 됩니다. 지금 이사야는 이스라엘 민중들이 당한 절망, 두려움이 얼마나 처절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대신 보복해주지 않는다면 도저히 견딜 수 없는 그들의 한과 상처를 말입니다. 그는 하나님이 대신 지켜주시니까 더 이상 두려워하지 말라고 위로합니다. 2차 세계대전 중에 유대인 집단 수용소에 갇혀 있던 그들의 심정이 바로 이와 같았겠지요. 그 어디에도 살아날 희망이 보이지 않을 때 그들은 하나님의 보복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그들이 생각할 수 있는 유일한 구원이었으니까요. 보복하시는 하나님으로 인해서 그들은 절망을 딛고 새로운 삶의 희망을 노래할 수 있었습니다.
이사야는 5,6절에서 이 하나님의 보복과 구원을 우리가 조금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설명합니다. 하나님이 보복하심으로 그들이 구원을 받을 때 이런 일이 일어납니다. 소경이 눈을 뜨고 귀머거리의 귀가 열립니다. 절름발이는 사슴처럼 뛰며, 벙어리의 혀가 풀려 노래합니다. 소경, 귀머거리, 절름발이, 벙어리는 바벨론 포로로 잡혀갔던 사람들의 처지를 그대로 가리킵니다. 전쟁에 패해서 볼모로 잡혀간 사람들의 신세가 어땠을는지는 더 긴 설명이 필요 없습니다. 공부하러 외국에 나가는 경우나 이민을 간 경우에도 간혹 완전히 외톨이라는 느낌을 지을 수 없는데, 그래서 향수병에 들기도 하는데 포로나 볼모 신세였으니 두 말하면 잔소리입니다.
오늘 우리는 포로도 아니고 볼모도 아니기 때문에 이사야의 예언이 별로 상관없는 것처럼 들릴지 모르겠군요. 그건 착각입니다. 큰 틀에서 보면 우리는 모두 지금 포로이며 볼모이기도 합니다. 4절에 표현되어 있듯이 우리는 ‘겁에 질린 자들’과 다를 게 하나도 없습니다. 3절의 표현을 빌리면 우리의 무릎도 휘청거립니다. 스스로 바로 서지 못합니다. 지금 우리가 자본의 포로가 되었다는 사실을 부정할 사람은 없겠지요. 고3 입시생들을 중심으로 한 모든 문제로 결국은 돈에 귀착되고 있습니다. 좋은 대학에 들어가야 좋은 직장을 얻을 수 있습니다. 좋은 직장은 연봉을 많이 주는 곳입니다. 지금 대통령 선거를 며칠 앞두고 있는데, 선거의 주도권도 역시 돈입니다. 국민들은 잘살게 해줄 것 같은 후보에게 온통 마음이 쏠려 있습니다. 이제 대한민국은 도덕성이 아무런 쓸모가 없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수단방법 가리지 말고 돈만 많이 벌면 모든 게 허락되는 세상으로 달려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사람이 돈이 없으면 실제로 살아가는 데 어려움이 많기 때문에 돈에 관심을 기울인다는 건 뭐라 할 게 없습니다. 그게 너무 지나치다는 데 문제가 있는 거겠지요. 연로한 부모가 돈이 있어야만 자식들이 자주 찾아간다는 통계도 나왔더군요. 이런 가족관계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유일하다고 합니다. 그 통계가 얼마나 옳은지 모르겠지만 가족관계 마저 돈이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기는 어렵습니다. 이런 점에서 돈의 포로가 된 우리가 바로 소경이며 귀머거리며 절름발이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길이 열린다.

자본의 포로와 볼모의 시대 앞에서 사람들은 대개 두 가지 태도를 보입니다. 하나는 그런 세태에 아주 쉽게 영합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방관하는 것입니다. 전자는 다른 사람보다 앞장서서 자본의 능력에 기울어지는 사람들이며, 후자는 그것이 잘못이라는 사실을 알지만 어쩔 수 없이 그 현실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기독교인들은 대개 후자에 속하겠지요. 세상의 악과 영합하지는 않지만 그것과 투쟁할 용기는 없습니다. 오늘 본문을 기록한 이사야 시대에도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런 후자에 속했을 겁니다. 바벨론 포로로부터 해방되어야 할 텐데, 그 길이 보이지 않으니 어쩝니까? 그들은 바벨론 포로 상황을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거기서 안주하려고 했겠지요.
그러나 예언자들은 달랐습니다. 이사야는 “사막에 샘이 터지고 황무지에 냇물이 흐르리라.”고 노래합니다.(6b) 메마른 곳은 샘터가 되고 승냥이가 살던 곳에 갈대와 왕골이 무성하게 되리라고 합니다.(7절) 바로 그 곳에 ‘거룩한 길’이 열린다고 합니다. 놀랍지요? 이런 게 바로 예언자적 상상력입니다. 사람들이 전혀 생각하지 못한 새로운 생명의 세계를 향한 비전이며, 희망이며, 꿈이고, 기다림입니다.
이사야의 예언에서 우리는 무엇을 전해 듣습니까? 사막에 샘이 터지며, 황무지에 냇물이 흐른다는 게 오늘 우리에게 무슨 뜻인가요? 사막 같은 우리 사회에 샘이 터진다니 얼마나 흥분됩니까? 더 이상 사람이 돈에 의해서 평가되지 않는 세상이 온다는 말입니다. 부의 양극화가 멈추는 세상이 와야 합니다. 외국인 노동자 문제도 역시 그렇습니다. 저는 지난주일 오후에 대구 만남의 교회에서 열린 ‘아시아 이주 노동자와 함께 하는 기도회’에 다녀왔습니다. 우리보다 얼굴색깔이 짙은 그들이 한국의 노동시장에 겪는 어려움이 어떤지는 제가 일일이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그들에게 대한민국은 바로 황무지입니다. 그 황무지에 냇물이 흐르는 날을 그들은 고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이런 날이 과연 우리에게 올까요? 모든 사람들이 돈의 노예가 되지 않고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귀한 존재들로 인정받을 때가 과연 올까요? 이사야가 노래했듯이 소경이 눈을 뜨고 절름발이가 사슴처럼 기뻐 뛰며, 벙어리의 혀가 풀려 노래할 날이 올까요? 2천5백 년 전에 노래한 이사야의 이 예언은 오늘까지 아직 실현되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이사야의 예언은 단지 이상적일 뿐이지 현실적이지 못한다는 말이 되는 걸까요?
그렇습니다. 우리가 현실만 본다면 이사야의 예언은 틀렸습니다. 이스라엘이 바벨론 포로에서 귀환하기는 했지만 계속해서 페르시아나 헬라, 로마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이사야가 내다본 궁극적인 해방은 성취되지 않았습니다. 이사야의 예언만이 아니라 성서의 가르침 중에서 훨씬 많은 부분이 현실에서 설득력이 없습니다. 예컨대 가난한 사람이 복이 있다는 말씀은 현실에서 인정받지 못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께 기도를 아뢰어도 다 이루어지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신앙적으로 산다고 해서 복을 받는 게 아닙니다. 신앙과 현실 사이에 이런 불일치가 일어나는 이유가 문제일까요?
우리는 두 가지 관점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첫째, 이사야의 이 예언은 묵시적이라는 사실입니다. 이사야는 지금 ‘새로운 세상’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 세상은 지금 우리가 경험하는 이런 방식의 삶이 완전히 극복되는 세상입니다. 사막과 황무지에서 샘이 터지고, 소경이 눈을 뜨는 세상은 구원이 완전히 실현된 세상입니다. 그 세상은 현재가 아니라 미래에, 즉 종말론적으로 실현됩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 세상은 우리에게 지금 오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런 사실을 실감하기 어려운 이유는 그 세상이 오기 전에는 그것의 실체를 우리가 알지 못한다는 데에 있습니다. 지난 11월25일 주일에 행한 설교 “전적으로 새로운 세상!”(사 65:17-25)에서도 이와 비슷한 내용을 말씀드렸습니다. 씨앗과 꽃은 비슷한 것 같지만 질적으로 다른 생명입니다. 꽃은 씨앗 안에 숨어 있는 현실입니다. 씨앗에서는 꽃의 현실을 확인할 수 없습니다. 꽃이 나온 뒤에야 그것이 현실이 됩니다. 이처럼 그 세상이 오면 우리는 지난날 꿈속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기억하듯이 이 세상에서의 삶을 이야기하게 될 것입니다.
둘째, 이사야가 예언하는 그 세상은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이 이루십니다. 메마른 사막과 황무지에 샘이 터지고 꽃을 피우는 일은 우리의 능력 밖입니다. 우리는 오히려 이 세상을 사막으로 만들 뿐입니다. 지난 12월 7일 유조선 충돌 사고로 서해안의 태안반도 일대가 기름 범벅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창조자가 결코 아닙니다. 창조자이신 하나님의 파트너가 될 수 없다면 조용하게 앉아 있는 게 차라리 낫습니다. 이런 사고들을 볼 때마다 우리는 인간적으로 좌절하게 됩니다만, 창조자이면 종말의 심판자이신 하나님을 믿는 우리 기독교인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절망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간단하고 분명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으며, 그분이 완성하실 것이라는 사실을, 하나님이 세상을 구원하실 것이라는 사실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사야는 하나님에 의해서 거룩한 길이 열린다고 묘사했습니다. 아주 놀라운 신학적 착상입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이사야를 비롯한 예언자들보다 더 구체적으로 이 거룩한 길을 알고 있습니다. 거룩한 길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요 14:6에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예수님은 진리와 생명에 이르는 거룩한 길입니다. 그에게 일어난 부활은 사막과 황무지에 샘이 터지는 궁극적인 사건입니다. 이 말이 현실적으로 들리지 않는다면, 이 세상의 무엇이 현실적인지 곰곰이 생각해보십시오. 이사야가 살던 바벨론 포로상태 같은 이 세상만이 현실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우리는 결코 참된 만족을 얻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부활의 주님을 통해서 우리에게 허락하실 ‘거룩한 길’에서만 “온몸은 기쁨과 즐거움에 젖어들어 아픔과 한숨은 간데없이 스러”(10b)집니다. 그렇습니다. 그 길이 여러분에게 열려 있습니다. 그 거룩한 길이 지금 우리에게 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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