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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의 ‘파루시아’

베드로후 정용섭 목사............... 조회 수 2634 추천 수 0 2010.03.03 12:2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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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벧후1:16-21 
설교자 : 정용섭 목사 
참고 : http://dabia.net/xe/39504 
emoticon  2008.2.3

짧은 동화 한편을 전해드리겠습니다. 남편과 아내, 그리고 남매가 한 가정을 꾸리고 재미있게 살고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어느 날 회사에서 특별한 임무를 받아서 먼 곳으로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곳은 페루의 안데스 산맥에서도 가장 험한 마을이었습니다. 전화도 안 되고 편지도 안 되는 곳입니다. 아버지가 떠날 때 이미 어머니는 늦둥이로 세 번째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습니다. 세월이 많이 지났습니다. 어머니와 언니와 오빠는 아버지가 곧 돌아온다는 사실을 막내에게 말해주었지만 막내는 그걸 확인할 길이 없었습니다. 한 번도 보지 못한 마당에 그걸 쉽게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세월이 더 흘러서 어머니와 언니와 오빠마저 모두 세상을 떠났습니다. 상황이 더 나빠진 것입니다. 과연 막내는 아버지가 돌아오신다는 사실을 끝까지 믿고 기다릴 수 있었을까요?  
저는 초기 기독교 공동체가 처한 상황이 바로 위의 우화에 등장하는 막내가 처한 상황과 비슷한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예수님을 직접 경험한 사도들과 초기 신자들은 모두 죽었습니다. 이제 예수님을 한 번도 보지 못한 신자들만 남았습니다. 그들이 얼마나 불안했을는지는 긴 말이 필요 없습니다. 이미 죽은 신자들 중에서는 자신들이 살아 있을 때 예수님이 다시 오실 거라는 말씀을 철석같이 믿었던 이들도 많았습니다. 아니 모두가 그렇게 믿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걸 확인하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직접 뵌 사람들이기 때문에 자신들이 죽은 뒤에라도 언젠가는 예수님이 재림하실 것으로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문제는 뒤에 남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재림이라는 가르침 앞에서 크게 흔들렸습니다.

신화론의 실체
오늘 본문인 베드로후서 1:16절에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의 권능과 강림에 관한 이야기가 꾸며진 신화라는 주장이 초기 기독교인들을 크게 흔든 가장 핵심적인 내용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은 사람들이 꾸며낸 신화라는 것입니다. 헬라신화에서 보듯이 신화는 이 세상을 설명하기 위한 고대인들의 세계관이었습니다. 그것은 어떤 궁극적인 현실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좀 허황한 이야기였습니다. 사람들의 지적 호기심을 만족시켜주는 문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초기 기독교 안에서도 이렇듯 예수님의 재림이 헬라신화와 비슷한 어떤 것이라는 주장이 강하게 나왔습니다.
여러분은 그런 주장은 말도 되지 않는다거나 그들이 믿음이 없어서 그런 말을 듣고 흔들린다고 생각하겠지요. 신화라는 건 물론 말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2천 년 전 베드로후서가 기록되던 그 당시의 상황이 어떤지를 알면 베드로후서 기자가 왜 이런 위험성을 경계하고 있는지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 당시에는 지금처럼 기독교의 체계가 잘 잡혀있지 않았습니다. 지금과 같은 27권의 신약성서도 경전으로 결정되지 않았습니다. 물론 부분적으로 신약성서가 교회 공동체에서 읽혀지고 회람되긴 했지만, 아직 하나님의 말씀으로 공식 채택되지는 않았습니다. 지역에 따라서 서로 다른 신약성서를 사용했습니다. 유대교의 경전인 39권의 구약성서도 아직 공식적으로 채택되지는 않았습니다. 기독교 교리도 역시 뼈대를 갖추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의 재림과 심판과 종말에 관한 가르침도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의 재림이 신화라는 주장은 나름으로 큰 세력을 형성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재림이 신화라는 주장은 기독교 신앙을 무조건 허물려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에는 초기 기독교가 처한 상황이 전제됩니다. 그것은 곧 재림의 지연입니다. 베드로후서가 기록된 2세기 초에도 예수님의 재림은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는 약속과 재림의 지연 사이에서 많은 사람들이 곤혹스러워했습니다. 이런 상황을 벗어나는 길은 예수님의 재림을 개인의 실존 안으로 끌어들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주의 대변혁인 세상의 종말이 아니라 현재 살아가는 삶에서 일어나는 것이라는 가르침이 그것입니다. 지금 여기서 예수님을 영접하고, 구원의 확신을 얻는 것이야말로 예수님의 재림이 말하려는 본질적인 의미라는 것입니다. 이런 신앙을 현대신학의 용어로 바꾸면 탈신화화입니다. 신화의 유치한 세계관을 벗어버리고 실존적인 신앙의 세계로 나가자는 것입니다.
이런 신앙에서 강조되는 것은 윤리적인 삶입니다. 우리가 재림의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또는 예수님이 선포한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이는 것은 지금 여기서 이 세상의 정의와 평화를 위해서 사는 것이라는 주장입니다. 이런 주장은 교회 안팎에서, 보수와 진보를 막론하고 모두에게 설득력이 있습니다. 요즘도 그렇습니다. 예수 믿는 건 세상에서 착하게 살자는 거 아니냐, 그런데 왜 저렇게 부도덕하게 사는가, 하는 생각과 질문이 많습니다. 기독교인들이 이 세상에서 삶의 모범을 보여야 한다고 말입니다. 기독교인들이 변해야 세상이 변한다는 주장도 나옵니다. 심지어 어떤 데서는 “도덕적 주도권”을 회복하자는 목소리도 높입니다. 옳습니다. 기독교 신앙에서 높은 윤리적 삶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신앙의 중심은 아닙니다. 그것은 신앙의 중심에서 나오는 귀결입니다.
저는 위에서 예수님의 재림을 신화로 치부하는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신앙을 두 가지로 말씀드렸습니다. 다시 정리하겠습니다. 하나는 실존적인 신앙의 강조이며, 다른 하나는 도덕적인 삶의 강조입니다. 전자는 기독교 신앙의 내면적인 차원이라면, 후자는 외면적인 차원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을 바로 지금 여기서 예수님을 영접하는 데서 확인하고, 동시에 고도의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책임감을 감당하는 데서 확인하는 것입니다. 이런 신앙은 고금을 막론하고 교양적인 지성인들에게 호소력이 있습니다. 합리적인 세계관을 포기하지 않아도 되며, 나아가 세상 사람들의 인정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저는 이게 왜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 아닌지에 대해서는 더 이상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다만 그것이 바로 오늘 베드로후서 기자가 경계하는 초기 기독교 신앙의 한 형태였다는 사실을 지적한 것으로 충분하다고 봅니다. 여러분의 눈에 고상해 보이겠지만, 실존적인 결단과 도덕적 책임감으로 포장된 기독교 신앙이 초기 기독교에서는 이단적인 요소가 강했다는 뜻입니다.

권능과 강림
초기 기독교는 그런 상식적인 인생관과 세계관에서 출발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인간의 세계 경험과 인식에서 시작하지 않았습니다. 비록 세상과 충돌하는 한이 있다 하더라도 그들은 하나님의 구원 행위에서 시작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권능과 강림의 이야기”에서 시작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이야기는 우리의 상식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우리의 처세술도 아니고 교양도 아닙니다. 우리의 삶을 조금씩 교정해나가는 게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일어난 하나님의 구원 통치에 집중하는 게 핵심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에게서 바로 우리의 상식을 뛰어넘는 하나님 나라가 시작했다는 사실에 모든 신앙의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베드로후서 기자는 그것을 권능과 강림이라는 단어로 설명합니다. 권능은 헬라어 ‘뒤나미스’의 번역인데 어떤 강력하고 기적인 능력을 가리키고, 강림은 ‘파루시아’의 번역으로 오심이나 도착, 또는 임재를 가리킵니다. 베드로후서 기자가 이 두 단어를 연결한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임재)과 권능이 별개의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이 권능은 우리가 생산해낼 수 있는 어떤 것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능력입니다. 세계 경제를 마음대로 주무르는 월가(街)의 큰 손들이나 유전공학에서 놀라운 업적으로 보이는 학자들의 능력을 뒤나미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신약성서가 사용하는 뒤나미스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것은 창조의 능력입니다. 무로부터 유를 가능하게 하는 힘입니다. 그것은 부활의 능력입니다. 죽음으로부터 생명으로 변화시키는 힘입니다. 예수님이 재림한다는 사실은 이처럼 창조와 부활의 능력에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이런 능력을 우리는 별로 실감하지 못한 채 삽니다. 하나님의 이런 능력이 이 세상과 우리에게 나타나지 않아서가 아니라 우리의 영적인 눈이 어둡기 때문입니다. 그냥 세상을 들어다보세요. 지구에는 원소가 몇 개나 될까요? 우리는 그걸 헤아릴 수 없습니다. 쌀 한 알에도 수천만 개의 원소가 들어 있을 텐데, 지구 전체의 원소를 다 센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이런 걸 가능하게 힘이 바로 뒤나미스이며, 하나님의 창조능력입니다. 지금도 석유 문제로 많은 나라가 경쟁하고 있지만, 앞으로 석유가 고갈되면 훨씬 심각하게 싸울 것입니다. 태양 에너지를 사용할 수 있다면 이런 에너지 문제는 해결되겠지요. 지금 지구에 와 닿는 태양빛 에너지는 전체 태양 에너지의 수천 만분의 일도 안 될 겁니다. 그것도 우리가 온전히 사용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제가 잘 알지도 못하는 우주 물리에 관해서 말씀드리는 이유는 하나님의 능력을 조금 더 실감 있게 이해하라는 데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뒤나미스, 즉 예수 그리스도의 뒤나미스는 그런 것을 가능하게 하는 원초적인 힘입다. 아니 아직 세상에 나타나지 않은 미래의 세계까지 가능하게 하는 능력을 가리킵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이런 권능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이와는 전혀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겁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은 예수님이 무력하다는 증거 아니냐고 말입니다. 그는 유대교 제사장들과 로마 총독 빌라도에게 재판을 받고 십자가에 처형당했습니다. 이런 현상만 놓고 본다면 예수님은 뒤나미스는 물론이고 자기 목숨 하나 보존할 능력이 없었습니다. 실제로 그 당시에 사람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을 가장 부끄럽고 무능력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시각으로만 세상을 보는 사람은 하나님의 참된 능력을, 예수 그리스도의 그런 뒤나미스를 발견할 수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는 늘 지금 당장에 어떤 일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는지 아닌지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표면적으로 드러난 일에만 마음을 둡니다. 그런 생각은 잘못입니다. 영적이지 못한 생각입니다. 이 세상이 얼마나 신비로운 방식으로 하나님의 큰 능력을 나타내고 있는지를 전혀 모르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이 어떻게 인류를 구원한 참된 능력인지를 전혀 모르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은 표면적으로만 본다면 무능력의 표본이지만 궁극적인 생명의 차원에서 본다면 그것은 분명히 뒤나미스입니다. 하나님은 십자가에 처형당한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습니다. 그 부활은 참된 생명으로의 질적인 변화입니다. 이 부활은 인간이 무엇으로도 생산해낼 수 없는 하나님의 창조 사건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우리의 능력과 차원이 다릅니다. 우리는 기껏해야 모양을 바꿀 뿐이지만 하나님은 없는 것을 있게 하십니다. 우리의 교육은 사람들에게 기껏해야 정보를 주고말지만 하나님은 사람들을 존재의 차원에서 새롭게 합니다. 우리는 사람의 무늬만 바꾸지만 하나님은 본질을 바꿉니다. 이것이야말로 참된 능력입니다. 그것이 여러분에게 보이나요? 초기 기독교인들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그것을 경험했습니다.  

영예와 영광
베드로후서 기자는 이 사실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분은 분명히 하느님 아버지로부터 영예와 영광을 받으셨습니다.”(17a절) 영예는 헬라어 ‘티메’의 번역이고, 영광은 ‘독사’의 번역입니다. 영예는 정치적인 용어에 가깝다면 영광은 신학적 용어입니다. 베드로후서 기자가 이런 단어를 통해서 말하려는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하나님이 온전히 나타났다는 사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나타난 영광이 무엇인지 설명하기 위해서 베드로후서 기자는 마태복음 17장에 나오는 ‘예수의 영광스러운 변모’ 사건을 전합니다. 제자들과 함께 산에 오르신 예수님의 모습이 변했다고 합니다. 얼굴은 해와 같이 빛나고 옷은 빛과 같이 눈부셨습니다. 그 자리에 난데없이 모세와 엘리야가 현현했습니다. 하늘에서 이런 소리가 들렸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마 17:5b) 예수님의 형상변모 사건은 세 공관복음이 모두 보도할 정도로 초기 기독교 신자들에게 매우 중요한 내용이었습니다. 예수님에게 하나님의 영광이 그대로 드러났다는 사실에 대한 증언입니다. 모세와 엘리아는 예수님보다 훨씬 옛날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예수님과 같은 자리에 나타났다는 말은 어떤 사람에게 만화 같은 이야기로 들릴지 모르겠습니다. 아닙니다. 언젠가 우리가 영광을 얻게 되면 전혀 다른 시대에 살던 사람들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 영광의 순간에는 우리가 생각하는 시간이 전혀 새로운 시간이 되기 때문입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에게 하나님의 영광이 온전히 임했다고 믿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광에 들어가신 것이라고 말입니다. 이제 예수님은 이 세상의 마지막 때 그 영광을 온전히 드러낼 것입니다. 그때 이 세상의 모든 실체가 드러날 것이며, 생명이 완성될 것입니다. 지난 2천년 동안 기독교가 그 마지막을 기다렸지만 오지 않은 걸 보니 예수님의 재림은 사실이 아닐지 모른다고 생각하시나요? 그래서 재림은 사람이 꾸민 신화라고 보시나요? 그래서 그런 신화는 그만 이야기하고 예수님을 개인적으로 영접하고 윤리적으로 사는 데 몰입해야 한다고 생각하나요? 그게 더 논리적이고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나요?
아닙니다. 그런 주장은 바로 베드로후서 기자가 직면했던 초기 기독교인들의 영적 위기였습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는 이 사실을 빼 놓으면 기독교 신앙은 아예 성립하지 않습니다. 2천 년 전 유대 땅에서 살았던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는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파루시아를 기다려야 합니다. 비록 사람들이 그걸 신화라고 매도한다 하더라도 불안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것이야말로 모든 진리의 토대입니다. 그들이 실증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오히려 불확실합니다. 여러분의 운명을 걸 대상은 이 한 가지 진리입니다. 예수님은 다시 오십니다. 그 순간에 세상은 변화되며 완성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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