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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눅15:1-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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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우제돈 목사 |
참고 : | 상원교회 |
1992. 10. 11
누가복음에 세 가지 읽어버린 것을 찾는 비유가 나와 있습니다.
첫째는 잃어버린 양의 비유, 둘째는 잃었던 금화를 찾는 비유, 셋째는 집을 나갔다가 다시 돌아온 탕자의 비유가 있습니다.
첫 번째 잃어버린 야의 비우는 선한 목자 되신 예수님의 사역을 말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 금화의 비유는 등불을 들고 찾는다 하는 성령의 사역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세 번째 탕자의 비유는 아들이 돌아오기까지 그 아버지의 기다리는 모습을 성부 하나님의 모습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이 세 가지 비유의 공통점은 모두 잃어버렸다는 점입니다. 잃어버린 것도 많고 큰 것이 아니라 1/100이나 1/10정도인 적은 것을 잃어버렸다는 데 공통점이 있습니다. 두 번째 공통점은 그 잃어버린 것을 내팽개치고 그냥 잊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비로 쓸고 등불을 켜서 열심히 찾는 가족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모두 찾았다는 것입니다.
찾은 후에 잔치를 했다고 했습니다. 여기에 기독교 축제의 뜻이 있습니다. '나같이 미미한 존재는 교회에서 별 볼 일 없을걸'이라고 할수록 하나님께서는 더욱 귀하게 여기고 눈여겨보시고, 찾으시고, 찾으면 그렇게 기뻐하실 수 없다는 내용입니다.
안식일에 병을 고쳤습니다. 안식일에 우물에 빠진 양을 건져냈습니다. 주님께서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라 하시면서 인간이 중하냐 율법이 중하냐, 인간이 먼저냐 제도가 먼저냐 하고 물으셨습니다.
기독교는 선인간 후율법, 늘 인간을 우위에 두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사람이 중요합니다. 해서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하셨습니다. 사람을 통해서 역사하시고, 마귀의 일을 방해하십니다. 이 교회라는 제도도 사람을 세워서 항존 직분자, 구역장, 성가 대원, 교사로 사역하십니다. 사람이 중요합니다.
사람은 복수로 취급하지 않습니다. 한 묶음의 인간으로 상대하지 않습니다. 개인 개인의 인격이 하나님 앞에 설 때, 전체 집단이 바로 된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많은 남자가 있습니다. 또한 많은 여자가 있습니다. 그러나 한 남자가 많은 여자에게 장가가지 않습니다. 한 여자가 많은 남자에게 시집가지 않습니다. 많은 남자 가운데 한 남자, 많은 여자 가운데 한 여자가 만나 결혼을 합니다.
책을 읽을 때도 여러 권을 같이 놓고 읽을 수 없습니다. 한 권 읽고 그 다음에 또 한 권을 읽습니다. 성경은 나 하나의 중요성을 여러 군데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엘리야는 바알 선지 450명과 아세라 선지 400명을 합한 850명을 상대로 어느 신이 참된 신인가 시험하기로 했습니다. 실로 엄청난 대결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이 그를 도와 850명을 다 없앴습니다. 오직 나 혼자 만이라 할 때 하나님께서는 "아니다. 너 혼자가 아니다. 내가 이스라엘 7,000명을 남겨 두었다. 이는 그 무릎을 바알에게 꿇지 않고 그 입을 바알에게 맞추지 아니한 자들이라" 고 했습니다. 하나의 중요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나 하나가 중요한 존재라면 남도 또한 그러합니다.
"네 몸과 같이 네 이웃을 사랑하라."
애국이나 애족을 막연하게 생각하지 맙시다. 애국 애족하는 삶은 하나뿐인 아내를 사랑합니다. 하나뿐인 남편도 사랑합니다.
하나가 중요합니다. 막연한 다수보다 뚜렷한 소수가 더 중요합니다. 주님의 관심은 소수에 있습니다. 다수 속의 소수에 주님의 관심이 있습니다. 그 사람 교회 안 나와도 다른 사람을 많이 전도했으니 상관없다, 또는 그 사람 안 나와도 우리 구역은 계속 부흥하고 있다는 생각은 주님의 책망을 피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맡겨 주신 그 사람이 중요합니다. 이것은 도저히 값으로 환산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무엇으로 바꿀 수 없는 귀한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한 생명이 온 천하보다 소중합니다.
양이라고 하는 짐승은 순하디 순한 짐승입니다. 다른 짐승과 싸워 이길 수 있는 뿔이 없습니다. 자신을 방어할 수 있는 무기도 없습니다. 시력이 나빠서 먼 곳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방향 감각도 없습니다. 다리가 짧아서 도망치는 기능도 없습니다. 겁이 많은 짐승이 양입니다.
그 잃어버린 양 하나를 위해 아흔 아홉 마리의 양을 두고 찾아 나섭니다. 찾아서 어깨에 매고 와서 그 아흔 아홉 마리보다 더 기뻐하는 목자의 모습을 생각해 봅시다. 주님은 한 마리 잃어버린 양에게 관심을 더 가지고 있다는 이 사실을 명심하십시오.
벳세다 광야에서 오병이어로 많은 사람들이 배불리 먹었습니다. 먹고 남은 부스러기는 누구도 관심을 갖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것을 거두라 해서 일곱 광주리에 채웠습니다. 주님은 부스러기에도 관심이 있습니다. 부스러기 같은 낙오자에게도 주님은 비상한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지극히 적은 일에 신경을 써야 합니다. 안동 교회 원로로 계시는 목사님은 전도사님으로 계시다가 70세에 원로로 은퇴하시기까지 한 강단에서 수고하여 목회하셨습니다. 언젠가 어느 모임에서 어떻게 한 교회에서 그렇게 오래 계실 수 있었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적은 일에 신경을 쌌다는 것입니다.
"교회 큰 행사에는 바빠서 혹 기도를 못 하더라도 다른 교인들이 기도하고 신경 쓰기 때문에 당회장 목사는 조금 덜 신경 써도 괜찮아요. 그러나 지난주일 등록했던 어느 교인이 오늘 안 나왔을 때, 또 어느 가난한 교인이 수심에 가득 찬 모습으로 예배를 드리고 나가려고 할 때는 꼭 붙들고 그 얘기를 듣고 기도해 주고, 못 나온 집에 전화해서 기도하는 등의
적은 일이에요"
그런 적은 일에 신경을 썼다는 얘기였습니다.
저도 될 수 있는 대로 적은 일에 신경을 쓸 수 있도록 애를 씁니다. 우리 목사님은 굉장히 바쁜 분이니 이런 일은 신경 쓰지 않도록 얘기하지 말자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이 교회 담임 목사가 이 교회목양을 위하는 것보다 더 귀하고 긴요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대학을 나온 부인에게 국민 학교를 나온 남편이 있었습니다. 어울리지 않지만 어떻게어떻게 연애를 했는데, 대학 나온 부인이 국민학교 나온 남편을 홀대합니다. 남편을 보고 병신, 반편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웃 사람들 듣는 데서 병신, 반편이라고 핀잔을 줍니다. 따라서 동네 사람들은 그 여자가 지나가면 저 병신 부인, 저 반편 부인이라고 부릅니다. 이 얘기를 듣고 부인이 크게 깨달았습니다.
그 동네에서 다른 동네로 이사를 갔습니다. 그리고 거기서는 자기 남편을 추켜세웠습니다. 우리 면장님이라고 불렸습니다. 우리 면장님이라고 이웃 사람들에게 말했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부인이 면장님이라고 하니까 같이 면장님이라고 부르며 면장님 대우를 하는 것입니다. 사실 그 남편은 얼굴이 길어 얼굴 면(面) 자, 길 장(長) 자 하여 면장님이라 부른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자연히 그 부인도 면장님 사모님이 되었습니다.
한 달 머슴 살고 평생 머슴 소리 듣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우리는 머슴과 같이 모자란 사람들입니다. 한 드라크마와 같이, 누가 알아주지도 않고 찾아 주지도 않는 적은 존재입니다. 한 양, 한 드라크마에 쏟는 목회자요, 구역장이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관심은 하나에 있습니다. 육체보다 영혼이요, 물질보다 정신이요, 이생보다 영생이요, 떡보다 말씀이라. 이 관심에 똑같이 참여하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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