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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 그것은 내가 원치 않는다

창세기 조용기 목사............... 조회 수 3455 추천 수 0 2010.03.12 23:4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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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창1:26~31 
설교자 : 조용기 목사 
참고 : 2009. 11. 22. 주일 4부 설교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시리아어 역본에는 온 땅의 짐승과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의 먹을 거리가 되리라 또 땅의 모든 짐승과 하늘의 모든 새와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 것에게는 내가 모든 푸른 풀을 먹을 거리로 주노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창 1:26~31)

할렐루야~ 옆에 계신 분들에게 ‘주님이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인사하십시오.

<서론>
오늘 저는 “고독, 그것은 내가 원치 않는다”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제가 초등학교 5학년 때의 일입니다. 1946년 대구에서 발생한 “10월 폭동” 이후 빨치산들이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서 게릴라 활동을 시작하여 마을 사람들을 밤에 내려와서 살해하고 납치하고 소나 돼지나 닭, 양곡 등을 약탈해 갔습니다. 그들의 공격 목표 중에 하나가 우리집이었습니다. 한번은 빨치산이 아버지를 잡으려고 밤중에 왔는데 놀란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아버지를 방바닥에 눕혀 놓으시고 그 위에 이불을 깔았어요. 그래서 그 이불 위에 할아버지, 할머니 둘이가 누웠습니다. 그 빨치산이 와가지고서 분명히 우리 아버님이 그날 읍내에 들어가지 않고 집에 있다는 것을 알고 왔는데 할아버지, 할머니 두분밖에 없거든.. 그런데 할아버지, 할머니 두분이 주무시는 그 이브자리를 들출 수가 없잖아요. 그냥 라이터로 불켜 보고 살펴보고 이 자식 도망치고 없구나. 눈치도 빠르다. 그리고 갔어요. 그게 저희 아버님에게는 굉장한 충격이 되었습니다. 그것을 당하고 난 다음에는 우리 집에 더 이상 살고 싶은 생각이 없어졌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가족들을 이끌고 부산으로 이주하기로 결심을 하고 온 가족들 다 데리고 어느날 출발했었습니다. 그런데 남겨 놓은 것은 할아버지, 할머니, 저만 남겨 놓았었습니다. 우리 집은 그 당시에 상당히 깊은 산속이었습니다. 경상남도 울주군 삼남면 교동리 산31번지에 있는 아주 산 시골인데 아무 이웃도 없어요. 아주 너무 적막한 곳이었습니다. 학교 갔다가 하루 오니까 차가 지나간 바퀴가 뚜렷이 있는데 그 바퀴를 따라 오니 집에 왔습니다. 집에 와보니까 그렇게 요란스럽던 집이 조용해요. 옛날에는 오면은 동생들이 마당에서 놀고 고함치고 하는 소리가 들리는데 너무나 적막강산이에요. 그래서 집에 와서 방안에 들어가 보았습니다. 이쪽 방에 들어가봐도 동생들이 있을 것 같은데 아무도 없고 저쪽 방에 가도 흔적도 없습니다. 아래채에 우리 할아버지, 할머님 두분만 계시고 온 집안이 다 죽은 듯이 고요하고 그 다음에 마음에 다가오는 고독감, 우리 형제들 중에 나혼자 버림받았다는 심정, 그것이 말로다 할 수 없이 고통스러웠었습니다. 나는 그 빈집에 혼자 앉아서 울고 또 울고 또 울고 또 울었습니다. 그때 내 마음속에 시골이 싫다는 생각이 들어오고 그것이 지금까지도 조용한데 가서 쉬라고 하면은 좋아하지 않습니다. 나는 사람들이 많은 데가 좋습니다. 조용한 곳 싫습니다. 그 시골에서 할아버지, 할머님 모시고 2년을 내가 있었는데 2년 동안에 정말 환멸을 느꼈습니다. 조용하고 아무하고도 이야기할 사람이 없습니다. 학교 갔다 오면은 아무하고도 이야기할 사람이 없습니다. 할아버지, 할머니와는 대화의 대상이 안됩니다. 혼자서 중얼중얼 하다가 자고 혼자서 깨고 혼자서 지냈었습니다. 그것이 마음에 너무 고독이 괴로웠었습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 학교를 졸업하고 동래중학교에 입학을 해서 동래로 내려올 때 그때 또 충격을 느꼈습니다. 할아버지, 할머니하고 2년 동안 있다가 그 노인 두 분을 두고 내 혼자 떠나온다는 것이 마음에 또 굉장한 충격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린 시절에 이러한 경험은 저에게 고독이 얼마나 몸서리 치고 어려우고 뼈저린 경험인 것을 체험하게 해 준 것입니다. 지금도 결코 그 고독스럽고 외롭고 쓸쓸한 체험을 잊지를 않습니다. 오늘날 우리 장로님들 중에 저를 생각해 주는 장로님이 이 서울 시내에 답답한데 있지 말고 여기서 저 관악산이나 그렇지 않으면 다른데 조용한데 집을 옮겨가서 그래서 공기도 좋은데 사십시오. 참 고마운 말씀입니다만 내 과거를 아는 분은 그런말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나는 절대로 그런데가 싫습니다. 우리 교회 교인들이 이렇게 많고 사람들 우글우글 하고 서로 대화하고 이야기하는 것이 좋잖아요. 혼자 사는 것 좋지 않습니다.

<본론>
1. 우리는 고독하도록 지음 받지 않았다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을 때 고독하게 살라고 지어놓지 않았습니다. 우리 하나님 자체가 고독할래야 고독할 수 없는 영원한 삼위일체 하나님이십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 삼위가 하나가 되어야 우리 하나님인 것입니다. 다른 하나님은 다 한 하나님이지 고독한 하나님입니다. 고독한 하나님은 사랑이 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사랑이란 주고 받는 것이 사랑인데 우리 하나님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 삼위가 한 하나님이 되어 계시기 때문에 사랑을 주고 받고 서로 대화했었으므로 하나님은 고독하지 않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3장 13절에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
우리 신앙생활에도 예수님의 은혜가 있는가하면 하나님의 사랑이 있고 성령의 교통이 있고 꼭 삼위일체 하나님의 역사가 느껴지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8장 19절에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베풀라고 한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 삼위 하나님을 모시고 행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삼위 하나님은 일체로써 역사하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아담을 지으시고 난 다음 아담이 독처하는 것이 좋지 않다 하시고 그를 깊이 잠재워서 갈비뼈로 하와를 만들었는데 왜 그러느냐. 아담을 하나님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음 받았다고 했기 때문에 반드시 하나님처럼 삼위일체의 존재로써 살 수 있도록 만들어 놓으신 것입니다. 아담은 하나님이 아담과 그 아내 하와와 또 그 사이에 태어날 자녀 이 세분이 모여서 가정이 이루어지지 않습니까?
창세기 2장 18절에서 22절에 “야훼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 야훼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야훼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아담과 하와와 그들 사이에 태어날 자녀 이렇게 삼위가 한몸이 되어서 같이 사랑하고 같이 위로하고 격려하고 사는 것이 가정인 것입니다.
요즘 많은 젊은이들은 과거와 달리 결혼 시기를 늦추는 경향이 있습니다. 일부에서는 혼자 살거나 계약 결혼이나 동거를 선호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결혼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정해주신 신성한 제도입니다. 내가 마음대로 해도 좋고 안 해도 좋고 그냥 동거생활을 맘대로 해도 좋고 그렇지 않습니다. 결혼제도가 필요한 첫 번째 이유는, 사람은 서로 도움을 주고받을 배필이 필요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창세기 2장 18절에 하나님은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라고 말씀하시며 돕는 배필을 지으셨습니다. 둘째로, 결혼을 통해 가정에서 자녀를 생산함으로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기 위한 것입니다. 셋째, 결혼은 사람들이 성적으로 타락하는 것을 보호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특별히 아담의 범죄 이후 타락한 세상에서 성적인 유혹에 빠지지 않고 살아가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을 지으시고 사람이 독처 하는 것이 좋지 않다고 하시고 돕는 배필을 주셨습니다. 이처럼 우리 인간은 처음부터 고독하지 않도록 지음 받았습니다. 우리는 서로 돕고 아끼며 살아가도록 받은 존재요, 지음을 받은 존재요, 고독하게 살기를 원치 않습니다. 우리 개인 인간도 보십시오. 우리 영이 있는가 하면 혼이 있고 육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혼자서 감옥에 가둬 놓아도 혼자서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자기 영하고 자기 혼하고 자기 육체하고 삼위일체 아닙니까? 모두다 삼위일체로써 인간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 다음 가정은 남자와 여자와 자녀로 되어있고 미움이란 단어가 일체가 되어 사는 데는 있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 속에도 미움은 없고 하나님이 지은 오리지날 가정에 남자와 여자와 자녀에게도 미움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사회에 미움이 있다는 것은 죄가 들어와서 타락했다는 것입니다. 마귀의 유혹에 넘어간 하와가 하나님을 반역하고 아담을 꾀해서 하나님을 반역하도록 만들었기 때문에 가정에 죄가 들어오고 죄가 들어오니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원수가 되고 아담과 하와 서로 간에 오해가 있고 미움이 있고 그리고 자녀들 간에도 미움이 있어 가인과 아벨 사이에 경쟁이 있어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비극이 생겨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갈라지고 아담과 미워함의 관계가 되고 가인과 아벨이 미움으로 살상을 하는 이 무서운 일이 죄악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고 그때부터 고독과 미움이 가져온 피의 인류의 역사가 시작된 것입니다. 인간이 죄를 짓지 않았었으면 하나님과 함께 살았었으면 사랑하고 살았었으면 고독과 미움이 들어올 리가 없고 살상과 전쟁이 일어날 리가 없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4장 7절로 9절에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곳곳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 이 모든 것은 재난의 시작이니라 그 때에 사람들이 너희를 환난에 넘겨 주겠으며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가 내 이름 때문에 모든 민족에게 미움을 받으리라”고 말한 것입니다.
최근 수 십 년 동안 인류의 과학기술 문명의 발달은 지구촌 곳곳을 풍요롭게 만들면서도 한편으로는 지구를 파괴하고 자원을 낭비하는 여러 가지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 것입니다. 하루에 2만 4천 명이나 되는 사람이 굶어죽고 그로인한 질병으로 죽어가는 것을 보면 인류는 더 많은 것을 소유하기 위해 어떤 시대보다 더 많은 살육을 벌이고 있는 것입니다. 1차 세계대전 때 오스만 제국은 150만 명의 아르메니아 인들을 학살했습니다. 1990년 르완다와 수단에서는 300만 명이 몰살당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우크라이나에서는 끔찍한 기근으로 수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 독일의 아우슈비츠에서는 수 백만의 유대인이 사라졌고, 난징의 대학살이나 미얀마 철도공사장에서 죽어간 전쟁포로들, 캄보디아의 킬링 필드, 유고슬라비아와 방글라데시의 대살육 사건 등 지난 100여 년 동안에 지구상에서 전쟁과 집단 학살 등으로 약 2억 명이나 되는 사람이 죽었습니다. 여러분 마귀의 유혹과 타락에 넘어간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과 멀어지고, 하나님의 사랑과 멀어지고 미워하게 되고 서로 멀어지게 되자 그것이 우리에게 다가온 해가 얼마나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계시지 않고 죄가 우리 마음을 점령하고 마귀가 우리를 점령했으면 그것은 언제고 미움과 오해로 변화되고 그것이 악화되면은 살상으로 변화되고 마는 것입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인 이후로 그 악은 우리 인류 속에 팽배해 있는 것입니다. 이렇기 때문에 우리의 삶이 어느 곳에 가도 외로움과 고독함이 있습니다. 부부가 결혼을 해도 그 무엇이 모르게 마음에 통하지 않는 외로움과 고독이 있고, 부모와 자식 간에도 대화가 안되는 괴로움과 고독이 있습니다. 형제간에는 좀 더 더하지요. 그리고 이웃 간에는 서로 웃지만 속으로 진실로 서로 이해하고 통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다 고독합니다. 고독하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나만 고독하고 너는 고독하지 않다. 그렇지 않습니다. 고독함을 나는 더 많이 느끼고 너는 덜 느끼는지 모르겠습니다. 더 많은 고독을 당하고 덜 고독을 당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모두 다 고독한 것입니다.

2. 우리는 모두 고독하다
죄와 미움이 있는 세상에 고독은 항상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 세상에서 나는 저 사람을 좋아한다. 나는 저 사람을 좋아하기 때문에 고독하지 않다.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이 있는데 고양이는 쥐를 굉장히 좋아합니다. 그러나 고양이가 쥐를 사랑한 적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쥐는 잡아 먹으니까 좋지 사랑은 절대로 안합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 사람들의 현실인 것입니다. 우리가 서로 좋아해서 결혼했다고 해도 좋아하는 것은 사랑하는 것은 아닙니다. 좋아하는 것은 내게 필요하고 내게 도움이 되니까 그 사람을 좋아하는 것입니다. 사랑이란 내가 손해가 나고 내게 좋지 않고 괴로워도 나를 희생하며 그를 도와주고 나가는 것이 사랑인 것입니다. 그 부모님이 자식을 사랑하는 것은 좋아하는 것이 아니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자식을 위해서 부모는 모든 것을 희생하고 모든 것을 다주고 그리고도 만족하지 않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러나 남편이 아내를 좋아한다고 해도 사랑하지 않는 남편이 많고 남편을 좋아해도 사랑하지 않는 아내가 많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와 미움이 있는 세상에 고독은 항상 있고 우리가 사랑하려고 애를 많이 쓰지만은 사랑하지 않고 좋아하기는 해도 사랑이 되기가 힘이 드는 것입니다. 채울 수 없는 마음의 공간이 마음속에 언제든지 있어요. 좋은 집에 살고 좋은 옷을 입고 호의호식해도 마음에 공허가 언제나 있습니다.
전도서 1장 8절에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가득 차지 않는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이 없을 때 우리 마음속에 절망하는 것입니다. 살아가는 동안에 아무런 사랑도 우리 마음속에 없으면 우리가 무명한 인간들로부터 사랑을 빼앗기고 단지 좋아함을 들어 앉혀 고독을 주어 몸부림치게 만드는 현실 세계 속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고독은 현대 사회에서 가장 무서운 병중의 하나입니다. 미국 캔사스 지방 신문에 이런 광고가 실린 적이 있습니다. “그냥 듣기만 할 테니까 전화 걸어주시는 분에게 30분간 얘기하여 주시면 5불 드리겠습니다.” 얼마나 고독하기 때문에 나에게 30분만 전화해서 일방적으로 이야기만 해주면 돈 5불 드리겠다는 것입니다. 죄와 미움이 있는 이 세상에 고독은 항상 있습니다. 외로움과 고독이 얼마나 힘들고 괴로웠던지 이런 광고까지 나오게 되었을까요. 우리는 대부분 사람들은 삶 가운데 이러한 고독을 느끼며 쓸쓸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삶이 매우 의미있다는 사실을 증명해 보이려고 더욱 과도하게 움직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마음의 공허를 바쁨으로 덮어 보려고 위장하는 행동일 뿐인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그 무엇으로 채울 수 없는 마음의 공간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에 목적이 뚜렷이 없을 때는 채울 수 없는 마음의 공간은 그만큼 더 커집니다. 사람들은 이러한 마음의 공간을 채워 보려고 동분서주 하지만 인간의 힘으로는 결코 채울 수가 없습니다.
헤르만 헤세(Herman Hesse)는 “인생은 고독, 그것이다. 왜냐하면 인생은 남을 잘 모르기 때문이다.” 테레사(Agnes Gonxha Bojaxhiu)는 “자기를 좋아하는 사람도, 필요로 하는 사람도 없다고 느낄 때 오는 고독감은 가난 중의 가난이다.”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은 “최악의 고독이란, 한 사람의 친우도 없는 것이다.”고 말한 것입니다. 이 세상에 우리만 고독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도 굉장히 고독했습니다. 왜냐하면 완전한 하나님이 완전한 사람이 되어 오셨으니까 하나님과 사람이 차별이 얼마나 있습니까? 여러분 어른과 어린아이가 차별이 있는데 하물며 하나님과 인간이 얼마나 차별이 있으며 완전한 하나님과 죄투성이인 인간과의 차별이 얼마나 있습니까? 그러므로 주님은 결코 이 세상에 오셔서 죄인들과 전적인 대화가 되지 않았었습니다. 언제나 그곳에는 하나님과 사람이라는 차별이 있었으며 완전히 죄없는 분과 죄인 인간과의 차별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되신 하나님과 인간과의 건널 수 없는 다리가 있고 멸시와 천대를 받는 삶을 살았습니다. 사람들에게 이해와 동정을 받지 못했습니다.
이사야 53장 3절에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사람들과 제자들의 버림 속에 나중에 십자가 못박혀 혼자 몸부림쳤습니다. 얼마나 그 마음에 외로움이 심했기 때문에 십자가에서 고통당할 때 “아! 목마르다” 그렇게 외쳤습니다. 물이 없어 목마른 것이 아니라 외로움에 목말랐던 것입니다.
요한복음 19장 28절로 29절에 그 후에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루어진 줄 아시고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하사 이르시되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 거기 신 포도주가 가득히 담긴 그릇이 있는지라 사람들이 신 포도주를 적신 해면을 우슬초에 매어 예수의 입에 대었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다 고독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 고독을 극복하고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고독함이 있을 동안에는 행복이 없습니다. 우리는 위장하고 사는 것입니다. 바쁜 일을 통해서 고독이 없는 것처럼 일이 너무 바뻐서 고독할 시간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마음속에 고독이 견딜 수 없기 때문에 술을 마시게 되고 도박도 하게 되고 죄도 짓게 되고 잘못된 길로 걸어가기도 하는 것입니다.

3. 고독을 극복하는 길
어떻게 하면 고독을 극복하고 살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가 이 세상에서 고독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개선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알지 못하고는 절대로 고독에서 이길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탕자가 집으로 돌아오는 것처럼 돌아와야 되는 것입니다. 탕자가 아버지를 떠나 있을 동안에는 돼지우리에서 살고 돼지 쥐엄열매를 먹으려고 하고 아무도 돌보아 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는 절대절망에서 고독을 명하기 위해서 아버지께로 돌아가자고 아버지께로 돌아올 때 비로소 그의 탕자의 생활과 고독의 문제는 해결된 것입니다.
에베소서 2장 14절로 16절에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주님이 모든 우리를 대적하는 법조문을 몸에 짊어지시고 대신 죽어 주시므로 그 보혈을 통해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막힌 담을 헐어버리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그 보혈을 의지하면 아무 저항없이 아버지의 품으로 들어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그 보혈을 가지고 가면 하나님이 우리를 자녀로 삼아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를 통해서 하나님 아버지께 나가야 우리 고독을 이길 수가 있는 것입니다.
대만의 수도 ‘타이베이’에서 연예인 우울증 전담 전문의사로 유명했던 한 의사가 자기가 우울증으로 인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일이 있습니다. 이 의사는 평소 “우울증은 치료 된다.”는 신념으로 우울증 환자들을 진료해 왔습니다. 그의 자살 소식을 접하고 많은 사람들이 경악을 금치 못했습니다. 많은 이들이 “우울증에는 의사도 어찌할 수 없구나”며 입을 모아 탄식을 했습니다.
젤러(Zeller)는 “고독이란, 사실 하나님께 대한 본향의 향수라.”고 말한 것입니다. 고독이란 하나님이 없기 때문에 느끼는 허무한 감정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외로움, 허무감, 우울증 등 인간 영혼의 문제를 해결할 가장 탁월한 전문의는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프랑스 작가인 앙드레 지드(Andre Paul Guillaume Gide)도 “고독은 오직 하나님과 더불어 있을 때만 견딜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고독을 극복하고 살기 위해서는 먼저 예수님의 중보를 통한 은혜 가운데 하나님과의 관계를 개선해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올바르게 될 때 무엇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고독의 문제가 해결된다는 것입니다. 고독하지만은 우리는 하나님과 기도할 수 있고 대화할 수 있고 하나님이 임재하는 것을 느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외롭지만 누가 나와 같이 계신다. 하나님의 임재를 늘 느낄 수가 있고 전적 버림받은 심정은 없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나는 이래뵈도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고 계시고 내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확신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고독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자기를 겸손하게 낮춰야 되는 것입니다. 자기를 높이면 고독하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들이 기피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마태복음 23장 12절에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고 말한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5장 5절로 6절에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아래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스스로 낮추고 섬기는 자리에 있으면 사람들이 존경하고 대화를 하고 따라옵니다. 그러나 나를 섬기라고 목을 쳐들고 어깨에 힘을 주면은 사람들이 그를 두려워하고 싫어하고 기피하고 어찌할 수 없이 고독한 삶을 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D.L. 무디(Dwight Lyman Moody)는 이런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한 사람의 인생을 평가할 때 그가 얼마나 많은 것을 거느리고 살았느냐 하는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가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종노릇을 했느냐이다.” 참다운 삶은 이렇게 겸손한 마음으로 남을 섬기고 남을 받아들이는 삶을 살 때 참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고독을 극복하고 더욱 기쁨과 행복이 넘치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먼저 겸손히 자기를 낮추고 이웃을 높여주고 존경해 주고 섬겨 주는 것입니다. 용서와 사랑으로 우리가 가진 것을 나누고 베풀며 섬기는 삶을 살 때 고독은 자동적으로 물러가고 마는 것입니다.
그 다음 용서와 사랑으로 이웃과 함께 해야 되는 것입니다. 저는 은퇴하기 전에 목회할 때 심방을 많이 했습니다. 병원 심방, 수용소 같은데 심방을 많이 했는데 제가 굉장히 마음에 고통을 느낀 것은 병이 깊어서 의사들이 치료하지 못하게 될 때, 절망적이 되었을 때, 절대적인 고독에 처한 사람들이 많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을 도와줘야 되겠다. 죽는 것은 의사도 알고 가족들도 알고 자기도 알지만 이제 죽는다고 내버려뒀기 때문에 그 혼자서 고독은 말로 다할 수 없습니다. 누가 와서 대화를 해주고 용기와 힘이 되주면 얼마나 큰 위로와 도움이 되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에 제가 호스피스를 만들었습니다. 호스피스 자원봉사자들을 모으고 호스피스를 만들어서 말기암 환자들 죽음에 이르는 병에 걸린 사람들, 좌절과 절대 절망이 있는 사람들을 가서 대화를 해주는 것입니다. 못고쳐줘도 좋습니다. 죽는 것 알아요. 그러나 대화를 해주므로 말미암아 절대고독에서 면할 수 있도록 도와주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리고 사랑과 행복나누기 운동도 그와 꼭 한가지인 것입니다. 이 세상에 가난하고 괴롭고 고통스러운 사람 조금 전에 우리가 여기 여러분 비디오에서도 봤지만 우리가 도와주므로 큰 운명이나 팔자가 바뀌어지는 것 아닙니다. 집을 고쳐주고 쌀을 갖다주고 학비를 좀 대주고 병원비를 좀 대주는 정도 밖에 안되고 팔자를 고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누가 나를 사랑해주고 있다 우리를 버리지 않았다. 우리도 이 세상에 사랑을 받고 있다는 그 상념이 얼마나 큰 삶의 용기와 힘을 주는지 모릅니다. 나는 버림받았다. 아무도 나를 돌보지 않는다. 나는 이 세상에 살아갈 의미와 가치가 없다. 그러면 절망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과 행복나누기 운동은 우리가 크게 물질적인 도움은 안되지만 그 도우는 행위를 통해서 사람들을 사랑하고 있다. 자기들이 사랑받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는 것입니다. 굿피플을 통해서 제3세계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고 있는 것도 제가 해외여행을 다니면서 부흥회를 할 때 3세계에 많이 갔습니다. 아프리카, 동남아일대, 남아메리카에 가보면 3세계에 사는 사람들이 너무나 못사는 사람들이 많아요. 옛날에 6.25 이후에 우리가 못산다는 것은 그와 꼭같이 못살고 고통을 당하는데 우리는 그때 옛날에 6.25때 미국 사람이 갖다 주는 강냉이가루, 밀가루, 입던 옷들, 입던 신발들 그것을 받아 누렸습니다. 저도 그것을 많이 받았습니다. 신발도 받고 꿀꿀이 죽도 먹었는데 꿀꿀이 죽을 먹을 때도 그때 얼마나 고맙던지 몰라요. 다 떨어진 군화를 받았는데 내 발 하나 들어가고 반개 더 들어가는 군화를 신고 끌고 다녀도 고맙고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입다가 내버린 의복, 추울 때 그것이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 몰라요. 그것이 마음에 잊지 못했습니다. 요사이 보면은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지요. 그러나 우리를 사랑해 주고 있다. 우리는 버림받지 않았다. 이래도 사람들은 우리를 도와주려고 한다. 그러한 생각에 용기가 굉장히 났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굿피플이라는 단체를 만들어서 가난하고 헐벗고 굶주리고 버림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우리 한국 사람들의 따뜻한 사랑을 나누어 주면 좋겠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굿피플입니다. 벌써 굿피플은 동남아일대에 굉장히 많은 일을 하고 수많은 사람에게 용기와 힘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3장 13절로 14절에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용서와 사랑, 이것은 우리가 고독에서 내 자신도 면하고 다른 사람도 이끌어내는 위대한 수단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홀로 가는 인생을 만들지 말고 함께하는 인생을 만들어야 되는 것입니다. 내 홀로 잘살고 홀로 잘먹고 내 홀로 평안하다. 그러지 말고 함께 잘 먹고 함께 잘 입고 함께 잘살자. 제가 나이를 먹고 보니까 홀로라는 말은 참 무서운 말인 것을 느꼈습니다. 함께 같이 잘살자. 함께 울고 함께 웃고 함께 먹고 함께 입고 사는 것이 참 인생에 행복이라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8장 20절에 하나님 뭐라고 했습니까?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나님 같은 위대하신 분이 우리같이 못난 이하고 함께 있겠다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있겠다는데 우리가 우리 이웃하고 함께 있겠다는 것 왜 그 말을 담대하게 못합니까? 우리가 누구하고 함께 있어 우리가 도움을 줄 수 있다면 그것이 우리에게 큰 기쁨이 되고 자랑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사야 41장 10절에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이와 같은 하나님이 계시므로 우리가 안심하고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도 하나님이 함께 계시기 때문에 나는 평안하게 하나님 교회에서 예배를 드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근심도 하지 말고 놀라지 말고 주님이 굳세게 해주고 도와주고 붙들어 주겠다고 약속하신 것이니 우리가 얼마나 담대할 수 있는 것입니까? 화려한 삶 뒤에는 무지무지한 고독이 있는 것입니다.
독일의 카우센(Kaushen)은 1만 5천 개의 콘도와 수십 개의 빌딩으로 그 재산이 4억 4천만 달러(약 5천억 원)에 달하는 대부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많은 재산을 관리하고 운영하는 것에 오히려 스트레스를 받아 결국 낙심하여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많은 돈을 모아놓고 그 호화스러움 뒤에 그는 자살하고 만 것입니다. 함께 했으면 그렇게 자살할 필요 없지요. 그 재산을 이웃하고 나누어서 함께 살았다면 자살할 필요가 없지요. 다른 사람하고 나누지 아니하고 자기 혼자 쥐고서 욕심 부리다가 스트레스 걸려서 자살하고 만 것입니다.
1970년 미국 청소년들의 우상이었던 가수 엔디 깁슨(Andy Gibson)은 처음 음반을 냈을 때 수백만 달러의 수입을 얻었고, 22살이란 어린 나이에 그레미 상을 2번이나 탔습니다. 그러나 그는 무대 위의 화려함 뒤에 찾아오는 고독과 불안을 이기지 못해 마약에 손을 대기 시작했고 타락한 생활을 하다가 10년 후인 불과 32살의 나이에 빚을 태산같이 진 채 쓸쓸하게 죽고 만 것입니다. 누구든지 자기 혼자 명예를 즐기고 자기혼자 사람들의 칭찬받기를 원하면 결국에는 죽는 것입니다. 우리는 함께 기뻐하고 함께 즐기도록 하나님이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긍정적인 사고로 잘 알려진 노만 빈센트 필 박사는 항상 무엇인가 종이에 적어서 일어설 때나 앉을 때나 시간만 있으면 그것을 읽었어요. 그래서 사람들이 궁금증이 나서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그것을 보여주는데 거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빛이 나를 둘러싼다. 하나님의 사랑이 나를 감싼다. 하나님의 힘이 나를 둘러싼다. 하나님이 나를 지켜보신다. 내가 어디를 가든지 하나님은 함께 계신다.” 하나님이 이렇게 같이 계시니까 마음에 두려움도 없고 떨림도 없습니다. 그가 다른 사람을 섬길 수 있는 힘이 있었던 것입니다.
삶의 겉으로 드러나는 풍요롭고 화려한 모습은 진정한 행복을 주지 못합니다. 오히려 불쑥불쑥 찾아오는 고독과 두려움으로 늘 불안해합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과의 관계를 개선하고 하나님과 함께 살 때 고독과 두려움을 극복하고 참 평안과 기쁨과 행복을 가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도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통하여 하나님은 성령을 여러분께 주시므로 여러분은 하나님과 함께 있습니다. 따라 말씀 하세요. 나는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과 함께 있습니다. 그러므로 외롭지 않습니다. 버림받지 않았습니다. 행복합니다. 기뻐합니다. 그와 같은 우리가 말을 담대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결론>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고독의 병을 갖고 태어났습니다. 우리는 이를 항상 치료하고 극복하며 살아야 만 하는 것입니다.
릭 워렌(Rick Warren)은 그의 책「하나님의 인생레슨」에서 우울과 고독을 치료하기 위한 하나님의 치료 방법을 네 가지로 설명했습니다. 첫째, 육체적인 필요를 채워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첫 번째 치료 방법은 먹고 마시고 휴식을 취함으로써 육신의 원기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몸의 건강은 마음 의 상태에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을 말만하지 말고 먹고 입고 마시는 것부터 도와주기 시작하라는 것입니다. 가장 근본적인 요구부터 채워줘야 우리가 사랑하는 것이 되고 함께 해주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둘째는, 좌절감을 하나님께 털어 놓으라는 것입니다. 근심, 고독감으로 상처 받았을 때, 기도하며 모든 것을 하나님께 털어놓으면 큰 위안이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내 마음속에 혼자 품고 있으면 안됩니다. 마음에 고통과 괴로움을 소리를 내고 크게 외쳐서 하나님께 다 고백하고 자백하고 하나님 앞에 마음을 털어 놓으면 마음에 큰 위로가 다가오고 고독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셋째, 하나님을 새롭게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슬럼프를 이기는 데는 하나님과 대화하고 교제를 나누는 것보다 좋은 일이 없습니다. 모든 일이 안될 때라도 하나님과 대화하고 하나님 찾고 하나님과 같이 있으므로 하나님의 아이디어를 얻을 때 우리가 외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넷째는, 인생의 새로운 방향을 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생을 새로운 방향으로 인도하시게 하되 사랑으로 이웃과 함께 하는 인생의 계획을 세우는 것입니다. 더 많은 시간을 봉사하고 헌신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살면은 고독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우리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는 고독의 병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이 고독 속에 끝나기를 결코 원치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항상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와 충성과 온유와 같은 성령의 은혜 가운데서 살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어느 곳에 가든지 여러분 마음에 평안하고 기쁘고 환영받고 살아있을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면서 살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풍성히 얻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힘으로 안되니까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여러분의 죄, 나의 죄, 여러분의 저주, 나의 저주, 여러분의 죽음, 나의 저주를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몸 찢고 피 흘려 한없는 고통을 당하고 참고 그를 통해서 피로써 청산하고 오늘날 우리에게 손을 활짝 내밀고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은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편히 쉬게 하리라 볼지어다 세상 끝날까지 항상 너와 함께 하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집이 화려하다고 주님이 와서 같이 계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 집이 판자집이라고 주님이 안오시는 것도 아닌 것입니다. 화려하든 판자집이든 그것은 큰 문제가 아닙니다. 주님이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여러분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심령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심령을 구원하시고 여러분의 심령에 같이 계시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힘이 되어주고 기쁨이 되어주고 능력이 되어 주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기 때문에 여러분 우리는 항상 고독할 때마다 고독을 극복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었다가 부활하셔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시고 하나님과 함께 살게 하시고 이웃에게 사랑과 은혜를 나누어 줄 수 있는 사람이 되게 만들어 주신 우리 자신을 생각하고 늘 감사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기도드리겠습니다.

<기도>
사랑이 많으시고 거룩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리는 누구든지 이땅에 태어났으면 다 고독하고 외로움을 느낍니다.
이 고독과 외로움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을 찾아 하나님 품에 안기고 하나님의 사랑이 가슴에 부음바 될 때 참 사랑과 행복을 느낄 수 있습니다. 나 혼자만 외롭고 고독하지 않습니다. 모두 다 차이는 있어도 다 고독하고 외로운데 우리가 그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게 도와주시옵소서. 하나님 아버지여, 우리가 예수 안에서 우리가 위로를 받고 평안을 얻고 그 위로와 평안을 가지고 이웃을 위해서 기도해 드리고 도와드리고 격려해 드리고 사랑을 해드리고 화평을 갖다 줄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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