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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마4:1-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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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정용섭 목사 |
참고 : | http://dabia.net/xe/39513 |
2008.2.10
악마가 사람을 유혹한다는 이야기는 드물지 않습니다. 구약의 욥기에도 그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동방의 의인이라고 일컬어지는 욥을 악마가 파멸로 몰아갑니다. 욥은 자식, 재산, 아내, 건강을 모두 잃습니다. 괴테의 <파우스트>에는 악마인 메피스토펠레스가 등장합니다. 그는 파우스트 박사에게 젊음을 제공하는 대신 그의 영혼을 농락할 수 있는 권리를 신에게 허락받습니다. 성서와 문학이 악마를 언급하는 이유는 그 방식이 아니면 인간의 타락과 인간에게 임하는 저주를 설명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한 아름다운 이 세상에 일어나는 타락과 저주의 이유는 모두 죄이며, 그 죄를 일으키는 장본인이 바로 악마라는 것입니다. 오늘의 구약성서 본문인 창 3:1-7절이 묘사하고 있는 것처럼 아담과 이브로 하여금 선악과를 선택하도록 유혹하는 뱀은 바로 그런 악마를 상징합니다.
오늘 신약성서 본문인 마태복음 4:1-11절이 진술하고 있는 예수님의 유혹 이야기에도 이런 악마가 등장합니다. 이 이야기가 다른 공관복음서인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도 들어 있는 걸 보면, 초기 기독교 공동체에 잘 알려진 이야기인 것 같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생활했던 공생애와 달리 그 이전에 일어난 오늘 본문 이야기가 이렇게 초기 기독교 안에 잘 알려진 이유가 무엇인지 우리는 정확하게 알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이 이야기를 직접 전해주었을 수도 있겠지만, 그랬다 하더라도 오늘 본문에서 보듯이 아주 자세한 이야기를 전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성서신학자들의 의견에 따르면 이 이야기는 초기 기독교가 처한 어떤 특별한 상황에서 형성된 것이라고 합니다. 그 상황은 곧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과 기독교 신앙의 정체성에 대한 질문이 급박해졌다는 것입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인가?
오늘 본문에는 예수님이 악마에게 받은 유혹이 세 가지입니다. 첫 번째 유혹은 다음과 같습니다. 사십 일 동안 금식을 하신 예수님 앞에 악마가 나타나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거든 이 돌더러 빵이 되라고 해보시오.”(3절) 두 번째 유혹에 관한 이야기는 다음과 같습니다. 악마는 예수님을 예루살렘의 성전 꼭대기로 데리고 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거든 뛰어내려 보시오.”(6절) 악마는 시편 9:11,12절을 인용하면서 하나님이 천사들을 시켜서 다치지 않게 할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세 번째로 악마는 예수님에게 세상의 화려한 모습을 보여주면서 “당신이 내 앞에서 절하면 이 모든 것을 당신에게 주겠소.” 하고 유혹했습니다.
이 세 번에 걸친 유혹은 바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냐, 하는 질문과 연관됩니다. 첫 번과 두 번째의 질문은 노골적으로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거든”이라는 단서를 달았습니다. 세 번째 질문에는 그런 단서가 없지만 그 안에 담고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다면 세상을 지배해야 하는데, 그 세상은 바로 악마가 지배하고 있으니 악마에게 굴복하라는 것입니다.
초기 기독교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었습니다. 바로 그 사실이 기독교의 정체성입니다. 그들은 믿음으로 그렇게 받아들일 수 있지만 주변에서는 그걸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증거를 대라고 압박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인 증거가 무어냐고 말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이 행하신 많은 기적이 바로 그런 증거라고 생각하겠지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 기적들은 다른 종교에서도 일어나는 것들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바로 그런 증거라고 말하시겠어요? 십자가로 죽은 사람은 예수님만이 아니랍니다. 예수님 이전에도, 이후에도 십자가에 처형당한 사람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았습니다. 오해는 마세요. 예수님에게 일어났던 모든 사건들이 바로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에 대한 증거가 아니라고 말씀드리는 게 아닙니다. 우리의 눈에는 명명백백한 증거이지만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증거가 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그런 사실은 우리가 부정할 수 없습니다. 부활이야말로 아무도 부인할 수 없는 증거라고 말하시겠어요? 물론 그것은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사실을 결정적으로 확인해주는 증거입니다. 그러나 그것도 역시 교회 밖의 사람들의 눈에는 증거가 되지 못합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을 자신들이 보았어도 그것을 증거로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이 자신들이 경험해보지도 못한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로 받아들일 리가 없습니다.
초기 기독교가 처한 이런 영적인 위기는 예수님 스스로에게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확신할 수 있었을까요? 아예 처음부터 예수님이 그것을 확신하고 있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는 중에 자신이 감당해야 할 십자가 처형을 가능한대로 벗어나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드렸습니다. 십자가에 처형당하는 순간에도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나의 하나님, 왜 나를 버리십니까!) 하고 외치셨습니다.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이 사실을 확신하지 못했을지 모릅니다. 이런 표현이 어떤 분들에게는 불경하게 들릴지 모르겠군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처한 영적인 불안이 무엇인지 이해해야만 우리는 예수님을 통한 하나님의 구원을 실질적으로 이해할 수 있고, 그 능력 안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에게 일어난 사건은 단지 하나님이 만들어놓은 프로그램의 기계적인 작동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을 향한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적이고 역동적인 순종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돌을 빵으로 만들어보라는 첫째 유혹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이렇게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내가 만약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다면 세상의 굶주림을 일시에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하는 거 아니냐, 하고 말입니다. 사람들을 배부르게 하지 못하면서 무슨 하나님의 아들이 될 자격이 있나, 하고 말입니다. 예수님이 돌을 빵으로 만들 수 있다면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을 수 있었을까요? 그게 바로 메시아의 가장 중요한 증거일까요? 이런 질문은 지금도 우리에게도 아주 강력하게 일어납니다. 오늘 이 세상의 힘이 어디서 나오는지 생각해보십시오. 돌로 빵을 만든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메시아처럼 받아들여집니다. 정치와 경제는 물론이고, 예술과 교육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돌을 빵으로 만드는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는 두 번째 유혹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그렇게 생각했겠지요. 내가 만약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손오공처럼 하늘을 날아다니는 초능력이 있어야 하는 거 아니냐, 하고 말입니다. 세상은 바로 그런 사람을 메시아로 인정합니다. 그런 능력을 가진 사람을 환호합니다. 악마에게 절하라는 세 번째 유혹도 이와 비슷합니다. 명실상부하게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다면 이 세상의 문제를 완전하게 해결해야 하는데, 그것은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악마와 손을 잡아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유혹을 받을 수도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런 유혹은 오늘도 여전합니다. 오늘 우리는 옳은 것인지 아닌지 전혀 생각하지 않고 오직 세상에서 힘을 얻는 데만 마음을 쏟고 삽니다. 악마의 힘을 이용해서라도 화려한 세상을 얻고 싶어 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에 대한 증거를 대라는 요구는 초기 기독교 안팎에서 아주 절실했으며, 앞에서 지적한 것처럼 예수님 스스로도 피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아무도 이런 요구를 피해갈 수 없습니다. 우리의 대답은 무엇인가요? 성서가 뭐라고 대답하는지 보십시오.
하나님이 대답이다.
세 번의 유혹에 대해서 예수님이 어떤 대답을 하셨는지 여러분은 이미 잘 알고 있을 겁니다. 첫째 유혹에 대해서 예수님은 사람이 빵으로만 사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고 대답했습니다. 둘째 유혹에 대해서는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고 대답했습니다. 세 번째의 유혹 앞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성서에 주님이신 너희 하느님을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 하시지 않았느냐?”(10절) 이 세 가지 대답의 특징을 살펴보십시오. 첫 대답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둘째 대답은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는 것이고, 세 번째 대답은 하나님만을 섬기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바로 그 대답입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은 자신들도 예수님의 이런 대답에서 보듯이 하나님만을 섬기면서 살아간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믿으면서 기쁨으로 신앙생활을 하겠지요.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여러분도 그런 신앙적 자세로 세상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이런 삶의 태도가 그렇게 간단한 게 아닙니다. 성서에 이런 주제가 언급되었다는 것은 바로 그렇게 사는 게 힘들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으면서 하나님만을 섬긴다고 말만 하는지 모르지요.
‘빵으로만 사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좀더 깊이 생각해보십시오. 이 말을 빵도 중요하고, 하나님의 말씀도 중요하다는 뜻으로, 그래서 세상에서도 출세하고 하나님도 잘 믿으면 된다는 뜻으로 받아들이면 곤란합니다. 이런 생각에서 사람들은 하나님을 잘 믿으면 빵이 주어진다고 믿습니다. 하나님이 우리가 세상을 요령껏 살아가기 위한 도구가 되고 말았습니다. 얼마 전에 ‘사랑의교회’ 원로이신 옥한흠 목사님이 조엘 오스틴의 <긍정의 힘>에 속지 말라는 설교를 했다고 합니다. 릭 워렌의 <목적이 이끄는 삶>도 마찬가지이지만, 이런 유의 책들은 기독교 신앙을 도구화하는 전형입니다. 하나님을 도구로 삼아서 자기의 삶을 실현해보려는 것입니다. 이와 반대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는 말은 하나님을 도구적으로 이용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는 두 번째 대답도 따르기가 쉽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시험하고 싶어 합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신지, 하나님이 창조자인지, 하나님이 역사의 주인인지 증거를 보여 달라고 합니다. 우리가 원하는 증거는 사람들이 혹하는 기적들입니다. 하나님만을 경배하라는 세 번째 말씀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만을 경배하는 걸 못 견딥니다. 악마가 예수님에게 보여주었던 화려한 세상의 많은 것들에 관해서 관심을 끊고 하나님만을 경배한다는 것이 말처럼 쉬운 게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경배하더라도 여전히 세상의 즐거움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저의 이런 설교가 어떤 분들에게는 너무 추상적으로 들릴지 모르겠군요. 또는 세상과 완전히 단절하고 수도원에 들어간 사람처럼 살아야 한다는 말이냐, 하고 반론을 제기할 분들도 있을 겁니다. 물론 우리는 이 땅에 두 발을 딛고 살아야 합니다. 인간이 겪어야 할 모든 삶의 과정을 그대로 겪어야만 합니다. 오늘 본문이 기록되던 2천 년 전 초기 기독교인들도 역시 우리와 똑같이 이 세상에 부대끼면서 살았습니다. 악마의 유혹 앞에서 예수님이 주신 말씀은 이 세상과 아무런 상관없이 천사처럼 살아야 한다는 가르침이 아닙니다.
신약성서학자들의 분석에 따르면 이 악마의 유혹 이야기는 기원후 60년대에 일어난 유대교의 열혈당원들이 반로마 무력투쟁을 벌이던 맥락에서 형성되었다고 합니다. 이스라엘은 무력으로 로마 황제를 제거하고, 예루살렘 성전을 세계의 중심으로 삼으려고 했습니다. 이런 계획이 성공하려면 성전 꼭대기에서 밑으로 뛰어내려도 다치지 않는 하나님의 기적이 따라와야만 했겠지요. 이스라엘의 이런 주장은 바로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는 기독교인들에게도 매우 심각한 도전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메시아라고 한다면 당연히 그 당시 악의 본산이었던 로마 제국을 힘으로 압도하고 이스라엘을 세계의 중심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말입니다. 이것은 바로 설교 앞 대목에서 짚은 대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증거가 이 세상의 정치, 경제 영역에서 명백하게 드러나야 한다는 주장과 똑같은 것입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그런 도전과 주장을 모두 일축했습니다. 그들이 메시아로, 하나님의 아들로 믿은 예수님은 이 세상의 승리자가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독립 운동가가 아니었습니다. 경제 문제를 해결시키는 기업가도 아니고 정치가도 아니었습니다. 이런 먹고 사는 문제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계획하는 그런 수준의 세상에 한정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사람들이 꿈꾸는 지상낙원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궁극적인 목표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사람들의 계획은 늘 승리주의로 나타납니다. 정의와 평화를 세우는 것도 여전히 권력으로 나타납니다. 예수님은 그런 다툼 가운데서 십자가에 처형당했습니다. 메시아이신 예수님은 아주 무기력하게 돌아가셨습니다. 모두가 돌을 빵으로 만들겠다고, 기적을 일으키겠다고, 화려한 세상을 만들어주겠다고 외치는 사람들의 투쟁 가운데서 참으로 무기력하게 죽었습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십자가에 달린 이유는 오직 한 가지입니다. 하나님에게 자신의 운명을 온전히 맡긴 것입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인지 아닌지를 증명하려고 하지 않고 모든 걸 하나님에게 맡겼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삼일 만에 참된 생명으로 불러내셨습니다. 이런 생명은 우리가 투쟁해서 성취해내는 게 아니라 창조자 하나님만이 행하실 수 있는 참된 구원사건입니다.
우리는 지금 계속해서 우리 자신이 무언가를 성취하도록 이 세상으로부터, 즉 악마로부터 강요받습니다. 여러분은 평생 그렇게 시달리고 있을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의 운명을 자기의 계획으로 끌고까지 않고 하나님의 은총에 온전히 맡겼고, 초기 기독교도 그것만이 참된 대답이라고 했습니다. 오늘 기독교 신앙으로 살아가는 우리도 하나님에게만 우리의 운명과 미래를 맡깁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그것의 훈련과정입니다. 악마는 그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우리를 달콤하게 자극할 겁니다. 우리의 자만심과 성취감을 교묘하게 자극할 겁니다. 속지 마십시오. 악마는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도 책임을 지지 않는 무책임한 존재들입니다. 그럴 능력도 없는 존재들입니다. 우리의 운명을 책임지는 분은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뿐이십니다. 악마의 유혹에 겁을 먹지 마십시오. 십자가에 처형당한 예수님을 새로운 생명으로 살리신 하나님만이 여러분을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십니다. *
악마가 사람을 유혹한다는 이야기는 드물지 않습니다. 구약의 욥기에도 그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동방의 의인이라고 일컬어지는 욥을 악마가 파멸로 몰아갑니다. 욥은 자식, 재산, 아내, 건강을 모두 잃습니다. 괴테의 <파우스트>에는 악마인 메피스토펠레스가 등장합니다. 그는 파우스트 박사에게 젊음을 제공하는 대신 그의 영혼을 농락할 수 있는 권리를 신에게 허락받습니다. 성서와 문학이 악마를 언급하는 이유는 그 방식이 아니면 인간의 타락과 인간에게 임하는 저주를 설명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한 아름다운 이 세상에 일어나는 타락과 저주의 이유는 모두 죄이며, 그 죄를 일으키는 장본인이 바로 악마라는 것입니다. 오늘의 구약성서 본문인 창 3:1-7절이 묘사하고 있는 것처럼 아담과 이브로 하여금 선악과를 선택하도록 유혹하는 뱀은 바로 그런 악마를 상징합니다.
오늘 신약성서 본문인 마태복음 4:1-11절이 진술하고 있는 예수님의 유혹 이야기에도 이런 악마가 등장합니다. 이 이야기가 다른 공관복음서인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도 들어 있는 걸 보면, 초기 기독교 공동체에 잘 알려진 이야기인 것 같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생활했던 공생애와 달리 그 이전에 일어난 오늘 본문 이야기가 이렇게 초기 기독교 안에 잘 알려진 이유가 무엇인지 우리는 정확하게 알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이 이야기를 직접 전해주었을 수도 있겠지만, 그랬다 하더라도 오늘 본문에서 보듯이 아주 자세한 이야기를 전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성서신학자들의 의견에 따르면 이 이야기는 초기 기독교가 처한 어떤 특별한 상황에서 형성된 것이라고 합니다. 그 상황은 곧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과 기독교 신앙의 정체성에 대한 질문이 급박해졌다는 것입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인가?
오늘 본문에는 예수님이 악마에게 받은 유혹이 세 가지입니다. 첫 번째 유혹은 다음과 같습니다. 사십 일 동안 금식을 하신 예수님 앞에 악마가 나타나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거든 이 돌더러 빵이 되라고 해보시오.”(3절) 두 번째 유혹에 관한 이야기는 다음과 같습니다. 악마는 예수님을 예루살렘의 성전 꼭대기로 데리고 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거든 뛰어내려 보시오.”(6절) 악마는 시편 9:11,12절을 인용하면서 하나님이 천사들을 시켜서 다치지 않게 할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세 번째로 악마는 예수님에게 세상의 화려한 모습을 보여주면서 “당신이 내 앞에서 절하면 이 모든 것을 당신에게 주겠소.” 하고 유혹했습니다.
이 세 번에 걸친 유혹은 바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냐, 하는 질문과 연관됩니다. 첫 번과 두 번째의 질문은 노골적으로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거든”이라는 단서를 달았습니다. 세 번째 질문에는 그런 단서가 없지만 그 안에 담고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다면 세상을 지배해야 하는데, 그 세상은 바로 악마가 지배하고 있으니 악마에게 굴복하라는 것입니다.
초기 기독교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었습니다. 바로 그 사실이 기독교의 정체성입니다. 그들은 믿음으로 그렇게 받아들일 수 있지만 주변에서는 그걸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증거를 대라고 압박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인 증거가 무어냐고 말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이 행하신 많은 기적이 바로 그런 증거라고 생각하겠지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 기적들은 다른 종교에서도 일어나는 것들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바로 그런 증거라고 말하시겠어요? 십자가로 죽은 사람은 예수님만이 아니랍니다. 예수님 이전에도, 이후에도 십자가에 처형당한 사람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았습니다. 오해는 마세요. 예수님에게 일어났던 모든 사건들이 바로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에 대한 증거가 아니라고 말씀드리는 게 아닙니다. 우리의 눈에는 명명백백한 증거이지만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증거가 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그런 사실은 우리가 부정할 수 없습니다. 부활이야말로 아무도 부인할 수 없는 증거라고 말하시겠어요? 물론 그것은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사실을 결정적으로 확인해주는 증거입니다. 그러나 그것도 역시 교회 밖의 사람들의 눈에는 증거가 되지 못합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을 자신들이 보았어도 그것을 증거로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이 자신들이 경험해보지도 못한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로 받아들일 리가 없습니다.
초기 기독교가 처한 이런 영적인 위기는 예수님 스스로에게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확신할 수 있었을까요? 아예 처음부터 예수님이 그것을 확신하고 있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는 중에 자신이 감당해야 할 십자가 처형을 가능한대로 벗어나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드렸습니다. 십자가에 처형당하는 순간에도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나의 하나님, 왜 나를 버리십니까!) 하고 외치셨습니다.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이 사실을 확신하지 못했을지 모릅니다. 이런 표현이 어떤 분들에게는 불경하게 들릴지 모르겠군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처한 영적인 불안이 무엇인지 이해해야만 우리는 예수님을 통한 하나님의 구원을 실질적으로 이해할 수 있고, 그 능력 안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에게 일어난 사건은 단지 하나님이 만들어놓은 프로그램의 기계적인 작동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을 향한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적이고 역동적인 순종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돌을 빵으로 만들어보라는 첫째 유혹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이렇게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내가 만약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다면 세상의 굶주림을 일시에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하는 거 아니냐, 하고 말입니다. 사람들을 배부르게 하지 못하면서 무슨 하나님의 아들이 될 자격이 있나, 하고 말입니다. 예수님이 돌을 빵으로 만들 수 있다면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을 수 있었을까요? 그게 바로 메시아의 가장 중요한 증거일까요? 이런 질문은 지금도 우리에게도 아주 강력하게 일어납니다. 오늘 이 세상의 힘이 어디서 나오는지 생각해보십시오. 돌로 빵을 만든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메시아처럼 받아들여집니다. 정치와 경제는 물론이고, 예술과 교육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돌을 빵으로 만드는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는 두 번째 유혹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그렇게 생각했겠지요. 내가 만약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손오공처럼 하늘을 날아다니는 초능력이 있어야 하는 거 아니냐, 하고 말입니다. 세상은 바로 그런 사람을 메시아로 인정합니다. 그런 능력을 가진 사람을 환호합니다. 악마에게 절하라는 세 번째 유혹도 이와 비슷합니다. 명실상부하게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다면 이 세상의 문제를 완전하게 해결해야 하는데, 그것은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악마와 손을 잡아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유혹을 받을 수도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런 유혹은 오늘도 여전합니다. 오늘 우리는 옳은 것인지 아닌지 전혀 생각하지 않고 오직 세상에서 힘을 얻는 데만 마음을 쏟고 삽니다. 악마의 힘을 이용해서라도 화려한 세상을 얻고 싶어 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에 대한 증거를 대라는 요구는 초기 기독교 안팎에서 아주 절실했으며, 앞에서 지적한 것처럼 예수님 스스로도 피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아무도 이런 요구를 피해갈 수 없습니다. 우리의 대답은 무엇인가요? 성서가 뭐라고 대답하는지 보십시오.
하나님이 대답이다.
세 번의 유혹에 대해서 예수님이 어떤 대답을 하셨는지 여러분은 이미 잘 알고 있을 겁니다. 첫째 유혹에 대해서 예수님은 사람이 빵으로만 사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고 대답했습니다. 둘째 유혹에 대해서는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고 대답했습니다. 세 번째의 유혹 앞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성서에 주님이신 너희 하느님을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 하시지 않았느냐?”(10절) 이 세 가지 대답의 특징을 살펴보십시오. 첫 대답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둘째 대답은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는 것이고, 세 번째 대답은 하나님만을 섬기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바로 그 대답입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은 자신들도 예수님의 이런 대답에서 보듯이 하나님만을 섬기면서 살아간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믿으면서 기쁨으로 신앙생활을 하겠지요.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여러분도 그런 신앙적 자세로 세상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이런 삶의 태도가 그렇게 간단한 게 아닙니다. 성서에 이런 주제가 언급되었다는 것은 바로 그렇게 사는 게 힘들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으면서 하나님만을 섬긴다고 말만 하는지 모르지요.
‘빵으로만 사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좀더 깊이 생각해보십시오. 이 말을 빵도 중요하고, 하나님의 말씀도 중요하다는 뜻으로, 그래서 세상에서도 출세하고 하나님도 잘 믿으면 된다는 뜻으로 받아들이면 곤란합니다. 이런 생각에서 사람들은 하나님을 잘 믿으면 빵이 주어진다고 믿습니다. 하나님이 우리가 세상을 요령껏 살아가기 위한 도구가 되고 말았습니다. 얼마 전에 ‘사랑의교회’ 원로이신 옥한흠 목사님이 조엘 오스틴의 <긍정의 힘>에 속지 말라는 설교를 했다고 합니다. 릭 워렌의 <목적이 이끄는 삶>도 마찬가지이지만, 이런 유의 책들은 기독교 신앙을 도구화하는 전형입니다. 하나님을 도구로 삼아서 자기의 삶을 실현해보려는 것입니다. 이와 반대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는 말은 하나님을 도구적으로 이용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는 두 번째 대답도 따르기가 쉽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시험하고 싶어 합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신지, 하나님이 창조자인지, 하나님이 역사의 주인인지 증거를 보여 달라고 합니다. 우리가 원하는 증거는 사람들이 혹하는 기적들입니다. 하나님만을 경배하라는 세 번째 말씀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만을 경배하는 걸 못 견딥니다. 악마가 예수님에게 보여주었던 화려한 세상의 많은 것들에 관해서 관심을 끊고 하나님만을 경배한다는 것이 말처럼 쉬운 게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경배하더라도 여전히 세상의 즐거움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저의 이런 설교가 어떤 분들에게는 너무 추상적으로 들릴지 모르겠군요. 또는 세상과 완전히 단절하고 수도원에 들어간 사람처럼 살아야 한다는 말이냐, 하고 반론을 제기할 분들도 있을 겁니다. 물론 우리는 이 땅에 두 발을 딛고 살아야 합니다. 인간이 겪어야 할 모든 삶의 과정을 그대로 겪어야만 합니다. 오늘 본문이 기록되던 2천 년 전 초기 기독교인들도 역시 우리와 똑같이 이 세상에 부대끼면서 살았습니다. 악마의 유혹 앞에서 예수님이 주신 말씀은 이 세상과 아무런 상관없이 천사처럼 살아야 한다는 가르침이 아닙니다.
신약성서학자들의 분석에 따르면 이 악마의 유혹 이야기는 기원후 60년대에 일어난 유대교의 열혈당원들이 반로마 무력투쟁을 벌이던 맥락에서 형성되었다고 합니다. 이스라엘은 무력으로 로마 황제를 제거하고, 예루살렘 성전을 세계의 중심으로 삼으려고 했습니다. 이런 계획이 성공하려면 성전 꼭대기에서 밑으로 뛰어내려도 다치지 않는 하나님의 기적이 따라와야만 했겠지요. 이스라엘의 이런 주장은 바로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는 기독교인들에게도 매우 심각한 도전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메시아라고 한다면 당연히 그 당시 악의 본산이었던 로마 제국을 힘으로 압도하고 이스라엘을 세계의 중심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말입니다. 이것은 바로 설교 앞 대목에서 짚은 대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증거가 이 세상의 정치, 경제 영역에서 명백하게 드러나야 한다는 주장과 똑같은 것입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그런 도전과 주장을 모두 일축했습니다. 그들이 메시아로, 하나님의 아들로 믿은 예수님은 이 세상의 승리자가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독립 운동가가 아니었습니다. 경제 문제를 해결시키는 기업가도 아니고 정치가도 아니었습니다. 이런 먹고 사는 문제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계획하는 그런 수준의 세상에 한정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사람들이 꿈꾸는 지상낙원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궁극적인 목표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사람들의 계획은 늘 승리주의로 나타납니다. 정의와 평화를 세우는 것도 여전히 권력으로 나타납니다. 예수님은 그런 다툼 가운데서 십자가에 처형당했습니다. 메시아이신 예수님은 아주 무기력하게 돌아가셨습니다. 모두가 돌을 빵으로 만들겠다고, 기적을 일으키겠다고, 화려한 세상을 만들어주겠다고 외치는 사람들의 투쟁 가운데서 참으로 무기력하게 죽었습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십자가에 달린 이유는 오직 한 가지입니다. 하나님에게 자신의 운명을 온전히 맡긴 것입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인지 아닌지를 증명하려고 하지 않고 모든 걸 하나님에게 맡겼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삼일 만에 참된 생명으로 불러내셨습니다. 이런 생명은 우리가 투쟁해서 성취해내는 게 아니라 창조자 하나님만이 행하실 수 있는 참된 구원사건입니다.
우리는 지금 계속해서 우리 자신이 무언가를 성취하도록 이 세상으로부터, 즉 악마로부터 강요받습니다. 여러분은 평생 그렇게 시달리고 있을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의 운명을 자기의 계획으로 끌고까지 않고 하나님의 은총에 온전히 맡겼고, 초기 기독교도 그것만이 참된 대답이라고 했습니다. 오늘 기독교 신앙으로 살아가는 우리도 하나님에게만 우리의 운명과 미래를 맡깁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그것의 훈련과정입니다. 악마는 그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우리를 달콤하게 자극할 겁니다. 우리의 자만심과 성취감을 교묘하게 자극할 겁니다. 속지 마십시오. 악마는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도 책임을 지지 않는 무책임한 존재들입니다. 그럴 능력도 없는 존재들입니다. 우리의 운명을 책임지는 분은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뿐이십니다. 악마의 유혹에 겁을 먹지 마십시오. 십자가에 처형당한 예수님을 새로운 생명으로 살리신 하나님만이 여러분을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십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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