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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리는 영

로마서 정용섭 목사............... 조회 수 2555 추천 수 0 2010.03.13 22:32:26
.........
성경본문 : 롬8:6-11 
설교자 : 정용섭 목사 
참고 : http://dabia.net/xe/39564 
emoticon  2008.3.9.

우리가 오늘 읽은 로마서 본문에서 가장 많이 사용된 용어는 ‘영’입니다. 그것이 경우에 따라서 ‘성령’, 또는 ‘영적인 것’으로 번역되었는데, 그의 기본형인 헬라어는 ‘프뉴마’입니다. 겨우 여섯 절밖에 되지 않는 짧은 본문에 그 단어가 일곱 번이나 등장했다는 걸 보면 바울이 이것을 여기서 아주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는 게 분명합니다. 그 단어 못지않게 자주 사용된 것이 ‘육’, 혹은 ‘몸’입니다. 바울은 육과 몸을 조심스럽게 구별해서 사용합니다. 이것을 일일이 확인하려면 많은 시간이 필요합니다. 신약성서의 용례에 따라서 가장 간단히 설명한다면, 육은 생물학적인 몸(사르크스)인 반면에 몸은 가시적인 몸(소마)을 가리킵니다. 사르크스는 영에 비해서 수준이 낮은 물질적인 요소라고 한다면, 몸은 영과 대별될 뿐이지 수준이 낮지는 않은, 사람의 보이는 요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을 영과 육체(사르크스)로 본다면 이원론적인 것이지만, 영과 몸으로 본다면 이원론적인 게 아닙니다. 조금 복잡하지요? 오늘 본문에서 시도하는 바울의 설명을 직접 듣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6절 말씀을 먼저 보십시오. “육체적인 것에 마음을 쓰면 죽음이 오고, 영적인 것에 마음을 쓰면 생명과 평화가 옵니다.” 여기서 육체적인 것은 사르크스이고, 영적인 것은 프뉴마입니다. 이 두 가지 단어가 대립적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여러분들은 여기서 육체적인 것을 모든 세속적이고 이기적인 것으로 생각할 겁니다. 더 나아가서 폭력적이고, 쾌락적이고, 퇴패적인 모든 것, 부도덕하고 몰상식한 것들 말입니다. 물론 이런 것들은 육체적인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이런 생각과 행동은 우리의 삶을 썩게 만들고, 사회도 병들게 만듭니다. 그러나 성서는 단지 그런 것들만은 말하지 않습니다. 그런 것은 성서가 말하기 전에 이미 이 세상의 윤리와 도덕이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 정도라고 한다면 바울이 굳이 거론할 필요도 없었을 겁니다.
본문에서 우리는 조금 이상할 걸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런 육체적인 것에 마음을 쓰는 사람이 죽는다는 진술 말입니다. 과연 그럴까요? 아닙니다. 부패한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모두 죽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감옥에 들어가거나 삶에서 실패하는 걸까요? 그럴 수도 있지만 늘 그런 것은 아닙니다. 요즘 새정부의 장관으로 입각하려다가 낙마한 분들 중에서는 노골적으로 부동산 투기를 한 이들이 적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 대한민국 사람 치고 돈의 여유가 주어졌을 때 그런 방식으로 재테크를 하지 않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하는 생각이 들면서 그분들의 처지가 이해가 되기도 합니다. 어쨌든지 사회적으로 부도덕한 행위를 한다고 해서 모두 죽거나 불이익을 당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육체적인 것에 마음을 쓰면 죽는다는 본문의 말씀은 어딘가 틀린 것 같습니다.

육체적인 것
여기서 육체적인 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짚어야 합니다. 바울이 로마서 전체를 통해서 전하려는 메시지가 무엇인지 우선 생각해보세요. 그는 율법과 복음을 비교합니다. 율법은 유대인의 신앙이고, 복음은 기독교인의 신앙입니다. 요즘 제가 포항 와이엠씨에이에서 갈라디아서를 함께 공부하고 있는데, 갈라디아서의 배경을 놓고 보면 로마서의 내용이 훨씬 정확하게 들어옵니다. 율법과 복음의 싸움은 단순히 유대교와 기독교의 싸움이 아닙니다. 오히려 같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끼리의 싸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의 대적자들은 유대교인들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도 여전히 토라와 할례를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던 유대-기독교인들이었습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하나님에게 인정받는다는 복음을 철저하게, 일관되게 주장함으로 유대-기독교인들과 갈라서게 되었습니다. 오늘 말씀도 바울의 이런 전체적인 신학의 연장선에 있습니다.
바울이 볼 때 율법을 따르는 사람이, 더 정확하게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도 여전히 토라와 할례를 따르는 사람들이 바로 육체적인 것에 마음을 쓰는 사람들입니다. 토라와 할례는 유대의 역사에서 오랫동안 축적된 삶의 지혜입니다. 그것은 유대인들만이 아니라 이방인들이라 하더라도 본받을만한 삶의 자세이기도 합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수행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에게 의롭다고 인정받을 수 있는 최선의 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을 직업적으로 수행하는 바리새인들은 늘 존경을 한 몸에 받았습니다. 그들은 종교적 명예를 누렸고, 그것을 잃어버리지 않으려고 부단히 노력했습니다. 바울 자신도 바로 그런 전통 안에서 살던 사람입니다. 그는 바리새인 중에서 바리새인이라고 자처할 정도였습니다. 놀라지 마십시오. 바울은 바로 그 율법적인 삶을 가리켜 육체적인 것에 마음을 쓰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이것은 폭탄선언과 같습니다. 하늘과 땅이 뒤바뀌는 논리입니다. 거룩한 삶을 세속적인 것으로 바꿔버린 것처럼 보입니다. 바울의 이런 논리에 따르면 도덕적인 행위나 부도덕적인 행위나 다를 게 하나도 없습니다. 양쪽 모두 육체적인 것에 마음을 쓰는 것입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것만 본다면 도덕적인 행위와 부도적인 행위는 하늘과 땅처럼 다릅니다. 바울이 지금 도덕적인 것을 무시하는 것도 아닙니다. 바울은 사람을 표면적으로 보는 게 아니라 그 중심을 봅니다. 그가 평생 추구했던 율법은 결국 자기를 실현하려는 노력이었습니다. 그것이 아무리 높은 가치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통해서 자기를 실현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곧 육체적인 것에 마음을 쓰는 것에 불과합니다. 바울이 말하는 깊이에서 본다면 실제로 나쁜 생각을 하고 나쁜 행동을 하는 사람만이 아니라 좋은 생각을 하고 좋은 행동을 하는 사람도 역시 육체적 사람입니다.  
바울은 정확하게 보았습니다. 율법 수행으로 자기를 실현하려고 애를 쓰는 사람은 결국 죽습니다. 여기서 죽는다는 말은 두 가지 차원입니다. 하나는 실존적인 차원이고, 다른 하나는 종말론적 차원입니다. 여기서는 실존적인 차원만 보십시다. 아마 여러분도 모두 경험했으리라고 보는데, 사람들이 인정하는 고상한 것들을 통해서 자기를 실현하려고 할 때 우리는 기쁨과 평화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현재보다 더 나은 것을 성취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그를 힘들게 합니다. 사람들의 관심이 조금 떨어지면 섭섭한 것도 많아지고, 삶 자체가 불안해지기도 합니다. 그런 건 욕심이 많아서 그렇지, 자기를 잘 컨트롤하면 그런 문제가 일어나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그게 불가능합니다. 인정받지 못하고, 사랑받지 못할 때 어쩔 수 없다고 자기 신세를 합리화할 수는 있지만, 무의식에서 작동하는 불안을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성취한 게 산더미처럼 많은 현대인들이 심리적으로, 정서적으로, 인격적으로 큰 장애를 겪고 있다는 사실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 걸까요? 우리가 겉으로는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실제로는 죽은 것인지 모릅니다. 그런 사실을 숨기기 위해서 우리는 더 신나고 자극적인 일들을 찾아서 조급증을 내고 있는지 모릅니다. 이는 목마른 사람이 바닷물을 마시는 것과 같아서 죽음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바울은 그런 상태를 7,8절에서 설명합니다. 육체적인 것에 마음을 쓰는 사람은 하나님의 율법에 복종하지도 않으며, 복종할 수도 없어서, 결국 하나님의 원수가 된다고 합니다. 바울의 지적은 정확합니다. 율법으로 자기를 성취하려는 사람은 부지불식간에 “내가 어떤데, 이만 하면 괜찮지?” 하는 마음에 사로잡힙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에 대한 관심이 아니라 자신에게만 관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능력이 결국 자기 삶의 모든 것이 되고 맙니다. 그것만이 자기 삶을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 되고 맙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과 원수를 맺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원수가 되면 죽음밖에 남는 것이 없습니다.

영적인 것
바울은 죽음으로 내몰리는 것과 반대되는 삶을 제시했습니다. 그것은 곧 영적인 것에 마음을 쓰는 것입니다. 영적인 것은 생명과 평화를 가져온다고 합니다. 우리가 마음을 써야 할 그 영은 무엇일까요? 사실 성서에 나오는 용어 중에서 ‘영’보다 이해하기 어려운 것도 없을 겁니다. 우리도 신앙생활에서 이 단어를 수없이 들어서 아무런 생각 없이 툭툭 사용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잘 알지 못합니다. 막연하게 아는 것처럼 생각할 뿐입니다.
영적인 것에 마음을 쓰는 것이 무엇인지를 이해하려면 앞서 말씀드린 육체적인 것이 무엇인지를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육체적인 것은 바로 자기 성취인 율법이라고 했습니다. 율법과 대립하는 것은 복음입니다. 그 복음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처형은 율법의 무효선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율법과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동의하지 않을지 모릅니다. 2천 년 전에 살았던 예수라는 한 유대 사람을 믿는다고 해서 어떻게 궁극적인 생명을 얻을 수 있느냐고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사실을 믿습니다. 이런 사람이 곧 영적인 것에 마음을 쓰는 사람입니다.
이런 말을 듣고 조금 허전하게 생각하는 분들이 있을지 모르겠군요. 영적인 것이라면 뭔가 신비하고 고상한 것이어야지 기껏 한다는 소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라고 하니 말입니다. 여러분이 찾고 있는 영적인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요? 경건주의자들의 종교적 특심인가요, 각성운동가들의 뜨거운 회심 경험인가요, 청교도들의 높은 도덕성인가요? 그것도 아니라면 세속적인 축복을 받거나 죽을병이 낫는 신유은사 같은 건가요? 그런 현상들은 아주 부분적인 것들이랍니다. 경우에 따라서 일어날 수도 있고, 전혀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는, 상대적인 것들이랍니다. 영적인 것의 중심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사건에 대한 참된 신뢰입니다. 그것과 일치하는 것입니다. 그것에 완전히 지배받는 것입니다.
이런 믿음이 영적인 이유는 그것이 우리의 노력으로 성취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데에 놓여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노력으로 되는 게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신비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영적인 현상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과 부활을 온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구원행위였다는 사실을 아무나 믿을 수는 없습니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렸다는 것은 유대인들에게는 비위에 거슬리고 이방인들에게는 어리석게 보이는 일입니다.”(고전 1:23) 종교의 눈에도, 문화의 눈에도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은 구원의 길로 받아들여질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믿습니다. 똑같은 현상을 두고 한쪽을 거부하고, 다른 한쪽은 받아들인다면 이건 분명히 영적인 현상입니다.
바울의 진술에 대한 우리의 마지막 질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영적인 것에 마음을 쓰면 생명과 평화가 온다고 하는데, 과연 그런가요? 저는 앞에서 육체적인 것에 마음을 쓰면 죽음이 온다는 말을 설명했습니다. 그 죽음은 두 가지 차원으로 나눠보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실존적인 차원은 설명했습니다. 자기 성취가 결국은 우리의 현재 삶을 파괴한다고 말입니다. 두 번째 종말론적, 우주론적 차원을 남겨 둔 이유는 그것이 영적인 것에 마음을 쓰는 사람에게 임하는 생명 및 평화와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육체적인 삶이 하나님과 원수를 맺게 된다면, 거꾸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영적인 삶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습니다.(10절)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을 때 우리의 영은 살아납니다. 그분과의 관계에서만 우리는 생명을 얻고 유지할 수 있습니다. 바울의 이 진술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하나님만이 생명의 창조자이시며 종말론적으로 완성하실 분이라는 사실이 여기에 전제되어 있습니다. 생명은 우리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라는 뜻입니다. 주인이 따로 있는데 생명을 마치 자기 것처럼 다룬다면 생명의 세계로 들어갈 수 없겠지요. 그렇습니다.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만이 우리의 영을 살리십니다.
이제부터 조금 더 집중해서 들으십시오. 성서가 말하는 생명은 지금 여기서 건강하고 행복하게 사는 것만이 아니라, 죽음 너머의 삶을 가리킵니다. 우리는 지금 죽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이 무엇인지는 잘 모릅니다. 그러나 성서의 증언과 약속에 근거해서 그것을 믿습니다. 바울은 그 사실을 아주 명확하게 짚습니다. “그리고 예수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분의 성령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면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분께서 여러분 안에 살아 계신 당신의 성령을 시켜 여러분의 죽을 몸까지도 살려주실 것입니다.”(11절) 복잡한 문장입니다만, 여기서 키워드는 “죽은 자들 가운에서 다시 살리신”이라는 표현입니다. 우리는 일단 죽음을 통과해야만 다시 사는 게 무엇인지 알 수 있다는 뜻입니다.
지난 수요일 성경공부 시간에 잠시 이런 말씀을 드렸습니다. 지난 2천년동안 예수 믿고 죽은 사람들이 모두 어디 있는지 아느냐고 말입니다. 아무리 우주 공간을 찾아보아도 그들이 있는 곳이 확인되지 않는 걸 보니 죽은 자의 부활이라는 성서의 가르침은 좀 이상한 것처럼 보이겠지요.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 우리의 시야에서 확인되지 않는다고 해서 없다는 사실이 실증적으로 증명되는 건 아니랍니다. 지금 이 세상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보다 확인할 수 없는 것들이 훨씬 많습니다. 성서가 말하는 부활의 생명은 은폐된 생명을 가리킵니다. 생명이 은폐되었다는 건 우리가 현재의 생명방식으로는 따라잡을 수 없을 정도로 심층적이라는 뜻입니다.
여러분, 죽은 자로부터 예수 그리스도를 살리신 그 하나님의 성령이 지금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 영이 우리 안에 있고, 우리가 그 안에 있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실질적으로 믿는다는 것이 바로 그 증거입니다. 이제 그 성령이 죽을 여러분의 몸까지도 살리십니다. 이 몸은 바로 소마입니다. 물질적인 몸인 사르크스는 썩어서 사라지겠지만, 우리의 인격을 구성하는 몸인 소마는 참된 생명을 얻습니다. 그때 우리는 참되게 삽니다. 그것을 영생이라고 합니다. 그것을 이루실 분은 오직 부활의 능력자이신 하나님, 곧 하나님의 성령입니다. 그 성령은 곧 그리스도의 영이며, 우리를 ‘살리는’ 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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