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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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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요20:19-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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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정용섭 목사 |
참고 : | http://dabia.net/xe/39626 |
2008.3.30.
지난 주일은 전 세계 기독교가 가장 중요한 절기로 지키는 부활절이었습니다. 성탄절도 중요한 절기이기는 하지만 역사성이라는 점에서는 부활절이 훨씬 명백하고 본질적인 절기입니다. 부활절은 기독교의 출발과 더불어 시작한 절기인 반면에 성탄절은 훗날 천천히 등장한 절기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경우를 봐도 이것이 분명합니다. 그는 예수님의 탄생에 관해서는 거의 별로 말이 없는 반면에 십자가와 부활에 관해서는 빼놓을 때가 거의 없습니다. 복음서도 비슷한 입장을 보입니다. 예수님의 출생 이야기는 마태와 누가복음만 전하는 반면에 부활 이야기는 모든 복음서가 하나도 빠짐없이 다 전합니다.
요한복음도 예수님의 부활 이야기를 정확하게 보도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 나오는 도마 이야기는 요한복음만의 고유한 전승입니다. 전체적으로 보면 오늘 본문이 두 단락으로 나뉩니다. 앞부분인 19-23절은 도마가 빠진 나머지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나타나셨다는 이야기이고, 뒷부분인 24-29절은 직접 예수님을 뵙지 못해서 믿지 못하겠다고 하는 도마에게 예수님이 나타나셨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두 이야기가 구분되기는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하나입니다.
보고 믿음
본문에 따르면 제자들은 유대인들이 무서웠기 때문에 안식일 다음날 저녁에 어떤 집에 모여 문을 닫아걸고 숨어 있었다고 합니다. 그 안식일 다음날은 바로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입니다. 그때까지도 그들은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알고 있었던 사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처형당했으며, 며칠 후에 예수님의 시체가 사라졌다는 것뿐이었습니다. 그 시체 건도 안식일 다음날 이른 새벽에 예수님의 무덤에 갔던 막달라 마리아를 통해서 전해들은 것입니다. 부활의 예수님을 가장 먼저 목격한 사람은 놀랍게도 사도들이 아니라 죄 많은 여인 막달라 마리아였습니다. 그 내용이 11-18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자기의 경험을 제자들에게 알렸지만 제자들은 그 사실을 믿지 못한 것 같습니다. 만약 그들이 그 사실을 믿었다면 19절에 보도하고 있듯이 유대인들이 무서워 문을 닫아걸고 숨어 있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제자들이 숨어 있는 방으로 주님이 들어오셨습니다. 믿기 힘들 정도로 신기한 일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평화를 빌었습니다. 제자들은 아마 귀신이 나타났나 하고 놀랬겠지요. 예수님은 당신의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셨습니다. 십자가 처형을 당할 때 받은 상처였습니다. 그제야 제자들은 기뻐서 어쩔 줄 몰랐다고 합니다. 부활의 주님은 그들에게 세상에서 감당해야 할 사명을 알리셨습니다. 그것은 곧 주님이 살아계실 때 이 세상에서 행하신 하나님 나라의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이게 이런 명령을 내리시고 다시 방에서 나가셨는지 아니면 제자들과 조금 더 시간을 가지셨는지에 관해서 요한복음은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런 것은 요한의 관심이 아니었습니다. 그 대신 그는 그 자리에 도마가 없었다는 사실을 보도합니다. 도마는 부활의 주님을 만났다는 다른 제자들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보지 않고서는 믿을 수 없다고 노골적으로 주장했습니다. 전형적인 실증주의자입니다.
여드레 후에 예수님은 앞서와 마찬가지로 제자들에게 다시 나타나셨습니다. 마침 그 자리에는 도마도 함께 했습니다. 물론 문은 모두 잠겨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지난번과 똑같이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하고 인사하셨습니다. 그리고 도마를 가리키면 손가락으로 손과 옆구리를 만져보고 믿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도마는 말문이 막혔겠지요.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 하고 외쳤습니다. 퀴리오스와 테오스가 병렬로 등장합니다. 이 단어는 로마 황제에게도 붙여지곤 했던 것인데, 이제 도마의 입을 통해서 예수님에게 붙여졌습니다. 초기 기독교 공동체는 로마 황제를 더 이상 주와 신으로 섬기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바로 주이며, 신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도마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나를 보고야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29절) 아주 유명한 말씀입니다. 이런 말씀은 도마를 책망하는 것처럼 들리겠지만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닙니다. 도마만이 아니라 다른 제자들도 부활의 주님을 보지 않았을 때는 믿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의 몸을 직접 보아야겠다는 도마의 주장은 그렇게 틀린 말이 아닙니다. 부활의 주님에 대한 본문의 설명을 자세하게 보십시오. 못 자국이 난 손과 창 자국이 난 옆구리가 핵심입니다. 20절, 25절, 27절에서 반복되었습니다. 성서기자는 지금 부활체가 되신 예수님이 바로 얼마 전에 십자가에 처형당하신 바로 그분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분은 몸이 없는 혼령이 아니라 구체적인 몸을 가지신 바로 예수님이라고 말입니다. 바로 그분이 부활하셨다고 말입니다. 사도들은 바로 그분을 직접 본 사람들이었습니다. 2천 년 전 고대인들은, 특히 유대인들은 이런 증인들이 있다는 사실이야말로 부활이 확실한 증거라고 믿었습니다. 그들이 본 예수님은 상처 난 몸을 가지신 바로 그분이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들이 예수님의 상처를 손으로 직접 만졌다는 말은 아닙니다. 아마 만지지 않았을 가능성이 큽니다. 손과 옆구리를 만져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지만 도마는 만지지 않고 본 것으로 모든 걸 알아차렸습니다. 모든 사실을 알았다면 굳이 만질 필요는 없습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부활의 주님을 처음으로 만나는 그 장면을 다시 돌아보십시오. 예수님은 마리아에게 당신 자신을 붙잡지 말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아직 아버지께 올라가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몸은 볼 수는 있지만 만질 수는 없는 상태였을 겁니다. 그게 무엇인지는 우리가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궁극적인 생명으로 들어가기 직전의 생명상태라고 말할 수 있겠지요.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바로 그 부활의 주님을 제자들이 보았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보았다는 것은 확실하게 경험했다는 뜻입니다. 그들은 부활의 주님을 보고, 그리고 믿었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사도들이 부활의 주님을 직접 보고 믿었다는 사실에서 시작합니다. 그것이 바로 기독교 신앙의 뿌리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예수님이 부활했는지 아닌지를 어떤 객관적인 기준에 놓고 서로 따지지 않습니다. 기독교 신앙에서는 사도들의 경험이 중요합니다. 그들의 부활경험이 지난 2천 년 역사를 통해서 성장한 기독교 신앙의 초석입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조금 세밀하고 민감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누구에게나 이해될 수 있는 현상이 아니라 예수님을 주님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만, 또는 그렇게 받아들일 사람들만 경험할 수 있는 현상이었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우주론적으로 유일회적인 사건이기 때문에 이 세상의 그 어떤 과학적 검증을 통한다고 하더라도 완전하게 증명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초기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선포했을 뿐이지 그걸 놓고 논쟁하지 않았습니다. 논쟁한다는 것은 이미 교회 공동체를 벗어났다는 의미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기독교 신앙에서는 예수님의 부활을 직접 경험한 사도들의 그 신앙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그런 방식으로 예수님의 부활을 선포하는 건 어딘가 불확실하고, 그래서 불안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지 모릅니다. 오늘처럼 과학적인 증거만을 진리라고 주장하는 이 시대에 객관적인 증명이 불가능하다는 말은 아무래도 설득력이 떨어진다고 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 저는 기독교의 가르침이 이 세상의 과학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엉뚱한 것을 말해도 좋다는 말씀을 드리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입니다. 기독교 교리는 진리의 보편성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진리의 보편성은 단지 자연과학의 방식으로만 보장되는 게 아닙니다. 문학적인 진리, 예술적인 진리가 다른 방식으로 나타나듯이 기독교 신앙의 진리도 그것만의 독특성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삼일 만에 살리신 것입니다. 그것을 보고 믿은 사도들이 그 사실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바로 이런 사도들의 신앙을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사도들의 부활 경험이 바로 진리라고 믿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도들은 부활의 주님을 직접 보고 믿은 사람들입니다. “너는 나를 보고야 믿느냐?” 하는 주님의 말씀은 사도들의 신앙을 정확하게 설명한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사도들은 부활의 주님을 보았습니다. 창조사건과 똑같이 모든 생명의 원초적 사건이라 할 예수님의 부활은 헛소문이 아니라 사도들이 본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본 바로 그것을 믿었습니다.
보지 않고 믿음
예수님은 도마에게 더 중요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이 말씀을 형식적으로만 본다면 보지 않고 믿는 사람이 보고 믿는 사람보다 상대적으로 우월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바로 앞에서 말씀드렸다시피 예수님의 부활을 보고 믿은 사도들의 신앙은 지난 2천년 기독교 신앙의 뿌리라는 점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이들의 신앙은 결코 상대화될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양쪽을 비교하는 게 아니라 초기 기독교가 처한 신앙적 상황을 정확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은 복음서 중에서 가장 늦게 기록된 말씀입니다. 기원후 100년 어간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과 부활 이후 두 세대(60년)가 지난 시기였습니다. 그때는 사도들이 이미 모두 죽었습니다. 속(續)사도들도 죽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경험한 이들이 모두 세상을 떠난 때입니다. 이런 상황은 일종의 위기일 수도 있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예수님의 부활을 직접 경험한 사도들이 살아 있을 때와 모두 죽은 뒤가 어떻게 다른지 말입니다. 요한 공동체 안에서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신앙이, 더 나아가 예수님에 대한 신앙 자체가 흔들릴 수 있었다는 뜻입니다.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바로 이런 상황을 전제합니다. 오늘 성경일과의 서신서인 베드로전서 1:8절 말씀도 바로 그것을 가리킵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본 일이 없으면서도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을 보지 못하면서도 믿고 있으며 또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기쁨으로 넘쳐 있습니다.” 이런 상황은 오늘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을 보지 못했지만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분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믿습니다. 반면에 그런 신앙을 견지하기 힘든 분들도 없지 않을 겁니다. 이런 분들을 무조건 신앙이 없다고 매도하거나 배척해서는 안 됩니다. 2천 년 전의 예수님을 직접 보지 못하면서도 그분을 믿는다는 건 그렇게 간단한 게 아닙니다. 이런 믿음에는 자칫 광신의 위험성이 없지 않습니다. 광신은 아무 것도 고민할 필요가 없으니까 일단 마음이 편합니다. 사이비 이단에게 몰입되어 있는 사람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아무 것도 의심하지 않고 교주를 추종합니다. 기독교 신앙은 광신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의심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광신으로 떨어지지도 않습니다. 도대체 참된 믿음과 광신은 어떻게 다를까요? 오늘 본문의 행간이 그걸 간접적으로 암시하고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사실의 긴장 가운데 놓여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의 부활은 보이지 않습니다. 둘째,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은 확실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예수님의 부활이 하나님의 확실한 생명 사건이라는 사실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바로 기독교 신앙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지금 우리에게 보이지 않지만 확실하다는 것이 핵심입니다. 그것이 오늘 설교의 제목인 “보이지 않는 현실성”(invisible reality)입니다.
오늘 현대인들은 보이는 것만 현실성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이런 생각에 고정되어 있는 한 우리는 하나님도, 예수님의 부활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보이지 않는 현실성, 확실성이 무엇인지 더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그 깊이로 들어가는 게 바로 기독교 영성이기도 합니다. 성령도 바로 보이지 않는 현실성입니다. 하나님도 역시 그렇습니다. 여러분, 그렇다고 해서 기독교 신앙이 막연하게 보이지 않는 것만을 따라간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성서가 말하는 예수님의 부활보다 더 확실한 것, 더 현실적인 것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그것만이 잠정적이고 유한한, 그래서 허무한 생명을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 우리가 참된 생명을 경험할 수 있는 유일한 사건입니다. 다만 우리가 그것을 실질로 느끼지도 못하고 이해하지도 못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이런 보이지 않는 현실성을 이해하고 그 안으로 들어갈 수 있을까요? 그것을 억지로 배울 수는 없습니다. 구구단을 외우는 거라면 억지로 노력하면 되지만 보이지 않는 부활의 생명은 그런 방식으로 얻을 수 없습니다. 그 어떤 공부방법도 소용이 없습니다. 이것은 바로 생명을 창조하신 하나님에 의해서만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창조의 영이신 성령만이 우리에게 그것을 깨달아 알 수 있도록 하십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궁극적인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을 말씀드린다면 우리보다 먼저 보이지 않는 현실성을 경험한 신앙의 선배들이 걸어간 길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 선배들의 길을 우리는 성서에서 배울 수 있습니다. 아직 그게 확연하게 다가오지 않더라도 실망하지 말고 기다리십시오.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열정>을 아무리 들어도 소리와 자기가 따로 놀다가 어느 날 소리가 자기에게 말을 거는 놀라운 경험을 하듯이 여러분도 부활의 현실성을 우주와 같은 무게로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요한복음 공동체와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부활을 직접 보지 못했습니다. 여러분들에게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렇습니다. 여러분과 저는 하나님에게서 복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보이지 않지만 부활의 주님이야말로, 또한 주님을 삼일 만에 다시 살리신 하나님이야말로 우리의 생명이라는 사실을 이해하고 확실하게 믿으니까요. 아멘!
지난 주일은 전 세계 기독교가 가장 중요한 절기로 지키는 부활절이었습니다. 성탄절도 중요한 절기이기는 하지만 역사성이라는 점에서는 부활절이 훨씬 명백하고 본질적인 절기입니다. 부활절은 기독교의 출발과 더불어 시작한 절기인 반면에 성탄절은 훗날 천천히 등장한 절기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경우를 봐도 이것이 분명합니다. 그는 예수님의 탄생에 관해서는 거의 별로 말이 없는 반면에 십자가와 부활에 관해서는 빼놓을 때가 거의 없습니다. 복음서도 비슷한 입장을 보입니다. 예수님의 출생 이야기는 마태와 누가복음만 전하는 반면에 부활 이야기는 모든 복음서가 하나도 빠짐없이 다 전합니다.
요한복음도 예수님의 부활 이야기를 정확하게 보도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 나오는 도마 이야기는 요한복음만의 고유한 전승입니다. 전체적으로 보면 오늘 본문이 두 단락으로 나뉩니다. 앞부분인 19-23절은 도마가 빠진 나머지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나타나셨다는 이야기이고, 뒷부분인 24-29절은 직접 예수님을 뵙지 못해서 믿지 못하겠다고 하는 도마에게 예수님이 나타나셨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두 이야기가 구분되기는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하나입니다.
보고 믿음
본문에 따르면 제자들은 유대인들이 무서웠기 때문에 안식일 다음날 저녁에 어떤 집에 모여 문을 닫아걸고 숨어 있었다고 합니다. 그 안식일 다음날은 바로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입니다. 그때까지도 그들은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알고 있었던 사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처형당했으며, 며칠 후에 예수님의 시체가 사라졌다는 것뿐이었습니다. 그 시체 건도 안식일 다음날 이른 새벽에 예수님의 무덤에 갔던 막달라 마리아를 통해서 전해들은 것입니다. 부활의 예수님을 가장 먼저 목격한 사람은 놀랍게도 사도들이 아니라 죄 많은 여인 막달라 마리아였습니다. 그 내용이 11-18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자기의 경험을 제자들에게 알렸지만 제자들은 그 사실을 믿지 못한 것 같습니다. 만약 그들이 그 사실을 믿었다면 19절에 보도하고 있듯이 유대인들이 무서워 문을 닫아걸고 숨어 있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제자들이 숨어 있는 방으로 주님이 들어오셨습니다. 믿기 힘들 정도로 신기한 일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평화를 빌었습니다. 제자들은 아마 귀신이 나타났나 하고 놀랬겠지요. 예수님은 당신의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셨습니다. 십자가 처형을 당할 때 받은 상처였습니다. 그제야 제자들은 기뻐서 어쩔 줄 몰랐다고 합니다. 부활의 주님은 그들에게 세상에서 감당해야 할 사명을 알리셨습니다. 그것은 곧 주님이 살아계실 때 이 세상에서 행하신 하나님 나라의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이게 이런 명령을 내리시고 다시 방에서 나가셨는지 아니면 제자들과 조금 더 시간을 가지셨는지에 관해서 요한복음은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런 것은 요한의 관심이 아니었습니다. 그 대신 그는 그 자리에 도마가 없었다는 사실을 보도합니다. 도마는 부활의 주님을 만났다는 다른 제자들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보지 않고서는 믿을 수 없다고 노골적으로 주장했습니다. 전형적인 실증주의자입니다.
여드레 후에 예수님은 앞서와 마찬가지로 제자들에게 다시 나타나셨습니다. 마침 그 자리에는 도마도 함께 했습니다. 물론 문은 모두 잠겨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지난번과 똑같이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하고 인사하셨습니다. 그리고 도마를 가리키면 손가락으로 손과 옆구리를 만져보고 믿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도마는 말문이 막혔겠지요.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 하고 외쳤습니다. 퀴리오스와 테오스가 병렬로 등장합니다. 이 단어는 로마 황제에게도 붙여지곤 했던 것인데, 이제 도마의 입을 통해서 예수님에게 붙여졌습니다. 초기 기독교 공동체는 로마 황제를 더 이상 주와 신으로 섬기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바로 주이며, 신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도마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나를 보고야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29절) 아주 유명한 말씀입니다. 이런 말씀은 도마를 책망하는 것처럼 들리겠지만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닙니다. 도마만이 아니라 다른 제자들도 부활의 주님을 보지 않았을 때는 믿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의 몸을 직접 보아야겠다는 도마의 주장은 그렇게 틀린 말이 아닙니다. 부활의 주님에 대한 본문의 설명을 자세하게 보십시오. 못 자국이 난 손과 창 자국이 난 옆구리가 핵심입니다. 20절, 25절, 27절에서 반복되었습니다. 성서기자는 지금 부활체가 되신 예수님이 바로 얼마 전에 십자가에 처형당하신 바로 그분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분은 몸이 없는 혼령이 아니라 구체적인 몸을 가지신 바로 예수님이라고 말입니다. 바로 그분이 부활하셨다고 말입니다. 사도들은 바로 그분을 직접 본 사람들이었습니다. 2천 년 전 고대인들은, 특히 유대인들은 이런 증인들이 있다는 사실이야말로 부활이 확실한 증거라고 믿었습니다. 그들이 본 예수님은 상처 난 몸을 가지신 바로 그분이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들이 예수님의 상처를 손으로 직접 만졌다는 말은 아닙니다. 아마 만지지 않았을 가능성이 큽니다. 손과 옆구리를 만져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지만 도마는 만지지 않고 본 것으로 모든 걸 알아차렸습니다. 모든 사실을 알았다면 굳이 만질 필요는 없습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부활의 주님을 처음으로 만나는 그 장면을 다시 돌아보십시오. 예수님은 마리아에게 당신 자신을 붙잡지 말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아직 아버지께 올라가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몸은 볼 수는 있지만 만질 수는 없는 상태였을 겁니다. 그게 무엇인지는 우리가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궁극적인 생명으로 들어가기 직전의 생명상태라고 말할 수 있겠지요.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바로 그 부활의 주님을 제자들이 보았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보았다는 것은 확실하게 경험했다는 뜻입니다. 그들은 부활의 주님을 보고, 그리고 믿었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사도들이 부활의 주님을 직접 보고 믿었다는 사실에서 시작합니다. 그것이 바로 기독교 신앙의 뿌리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예수님이 부활했는지 아닌지를 어떤 객관적인 기준에 놓고 서로 따지지 않습니다. 기독교 신앙에서는 사도들의 경험이 중요합니다. 그들의 부활경험이 지난 2천 년 역사를 통해서 성장한 기독교 신앙의 초석입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조금 세밀하고 민감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누구에게나 이해될 수 있는 현상이 아니라 예수님을 주님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만, 또는 그렇게 받아들일 사람들만 경험할 수 있는 현상이었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우주론적으로 유일회적인 사건이기 때문에 이 세상의 그 어떤 과학적 검증을 통한다고 하더라도 완전하게 증명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초기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선포했을 뿐이지 그걸 놓고 논쟁하지 않았습니다. 논쟁한다는 것은 이미 교회 공동체를 벗어났다는 의미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기독교 신앙에서는 예수님의 부활을 직접 경험한 사도들의 그 신앙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그런 방식으로 예수님의 부활을 선포하는 건 어딘가 불확실하고, 그래서 불안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지 모릅니다. 오늘처럼 과학적인 증거만을 진리라고 주장하는 이 시대에 객관적인 증명이 불가능하다는 말은 아무래도 설득력이 떨어진다고 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 저는 기독교의 가르침이 이 세상의 과학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엉뚱한 것을 말해도 좋다는 말씀을 드리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입니다. 기독교 교리는 진리의 보편성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진리의 보편성은 단지 자연과학의 방식으로만 보장되는 게 아닙니다. 문학적인 진리, 예술적인 진리가 다른 방식으로 나타나듯이 기독교 신앙의 진리도 그것만의 독특성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삼일 만에 살리신 것입니다. 그것을 보고 믿은 사도들이 그 사실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바로 이런 사도들의 신앙을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사도들의 부활 경험이 바로 진리라고 믿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도들은 부활의 주님을 직접 보고 믿은 사람들입니다. “너는 나를 보고야 믿느냐?” 하는 주님의 말씀은 사도들의 신앙을 정확하게 설명한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사도들은 부활의 주님을 보았습니다. 창조사건과 똑같이 모든 생명의 원초적 사건이라 할 예수님의 부활은 헛소문이 아니라 사도들이 본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본 바로 그것을 믿었습니다.
보지 않고 믿음
예수님은 도마에게 더 중요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이 말씀을 형식적으로만 본다면 보지 않고 믿는 사람이 보고 믿는 사람보다 상대적으로 우월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바로 앞에서 말씀드렸다시피 예수님의 부활을 보고 믿은 사도들의 신앙은 지난 2천년 기독교 신앙의 뿌리라는 점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이들의 신앙은 결코 상대화될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양쪽을 비교하는 게 아니라 초기 기독교가 처한 신앙적 상황을 정확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은 복음서 중에서 가장 늦게 기록된 말씀입니다. 기원후 100년 어간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과 부활 이후 두 세대(60년)가 지난 시기였습니다. 그때는 사도들이 이미 모두 죽었습니다. 속(續)사도들도 죽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경험한 이들이 모두 세상을 떠난 때입니다. 이런 상황은 일종의 위기일 수도 있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예수님의 부활을 직접 경험한 사도들이 살아 있을 때와 모두 죽은 뒤가 어떻게 다른지 말입니다. 요한 공동체 안에서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신앙이, 더 나아가 예수님에 대한 신앙 자체가 흔들릴 수 있었다는 뜻입니다.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바로 이런 상황을 전제합니다. 오늘 성경일과의 서신서인 베드로전서 1:8절 말씀도 바로 그것을 가리킵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본 일이 없으면서도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을 보지 못하면서도 믿고 있으며 또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기쁨으로 넘쳐 있습니다.” 이런 상황은 오늘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을 보지 못했지만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분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믿습니다. 반면에 그런 신앙을 견지하기 힘든 분들도 없지 않을 겁니다. 이런 분들을 무조건 신앙이 없다고 매도하거나 배척해서는 안 됩니다. 2천 년 전의 예수님을 직접 보지 못하면서도 그분을 믿는다는 건 그렇게 간단한 게 아닙니다. 이런 믿음에는 자칫 광신의 위험성이 없지 않습니다. 광신은 아무 것도 고민할 필요가 없으니까 일단 마음이 편합니다. 사이비 이단에게 몰입되어 있는 사람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아무 것도 의심하지 않고 교주를 추종합니다. 기독교 신앙은 광신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의심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광신으로 떨어지지도 않습니다. 도대체 참된 믿음과 광신은 어떻게 다를까요? 오늘 본문의 행간이 그걸 간접적으로 암시하고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사실의 긴장 가운데 놓여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의 부활은 보이지 않습니다. 둘째,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은 확실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예수님의 부활이 하나님의 확실한 생명 사건이라는 사실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바로 기독교 신앙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지금 우리에게 보이지 않지만 확실하다는 것이 핵심입니다. 그것이 오늘 설교의 제목인 “보이지 않는 현실성”(invisible reality)입니다.
오늘 현대인들은 보이는 것만 현실성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이런 생각에 고정되어 있는 한 우리는 하나님도, 예수님의 부활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보이지 않는 현실성, 확실성이 무엇인지 더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그 깊이로 들어가는 게 바로 기독교 영성이기도 합니다. 성령도 바로 보이지 않는 현실성입니다. 하나님도 역시 그렇습니다. 여러분, 그렇다고 해서 기독교 신앙이 막연하게 보이지 않는 것만을 따라간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성서가 말하는 예수님의 부활보다 더 확실한 것, 더 현실적인 것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그것만이 잠정적이고 유한한, 그래서 허무한 생명을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 우리가 참된 생명을 경험할 수 있는 유일한 사건입니다. 다만 우리가 그것을 실질로 느끼지도 못하고 이해하지도 못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이런 보이지 않는 현실성을 이해하고 그 안으로 들어갈 수 있을까요? 그것을 억지로 배울 수는 없습니다. 구구단을 외우는 거라면 억지로 노력하면 되지만 보이지 않는 부활의 생명은 그런 방식으로 얻을 수 없습니다. 그 어떤 공부방법도 소용이 없습니다. 이것은 바로 생명을 창조하신 하나님에 의해서만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창조의 영이신 성령만이 우리에게 그것을 깨달아 알 수 있도록 하십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궁극적인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을 말씀드린다면 우리보다 먼저 보이지 않는 현실성을 경험한 신앙의 선배들이 걸어간 길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 선배들의 길을 우리는 성서에서 배울 수 있습니다. 아직 그게 확연하게 다가오지 않더라도 실망하지 말고 기다리십시오.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열정>을 아무리 들어도 소리와 자기가 따로 놀다가 어느 날 소리가 자기에게 말을 거는 놀라운 경험을 하듯이 여러분도 부활의 현실성을 우주와 같은 무게로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요한복음 공동체와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부활을 직접 보지 못했습니다. 여러분들에게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렇습니다. 여러분과 저는 하나님에게서 복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보이지 않지만 부활의 주님이야말로, 또한 주님을 삼일 만에 다시 살리신 하나님이야말로 우리의 생명이라는 사실을 이해하고 확실하게 믿으니까요.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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