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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요14:15-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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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정용섭 목사 |
참고 : | http://dabia.net/xe/39673 |
2008.4.27.
사랑의 종교?
여러분들은 오늘 본문 요한복음 14:15-21절을 읽으면서 정확한 내용을 따라가기가 쉽지 않았을 겁니다. 사랑, 계명, 협조자(파라클레토스), 진리의 영, 고아들이라는 단어도 그렇고, “너희는 나를 보게 될 것이다.”(19b)라거나, “그에게 나를 나타내 보이겠다.”(21b) 같은 말씀도 그렇습니다. 이런 표현이 공관복음서에는 없습니다. 여러분이 잘 알다시피 이 말씀은 예수님이 체포당하시던 날 밤에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으로 유월절 만찬을 나누면서 주신 말씀입니다. 이에 관해서 공관복음서는 아주 간단하게 보도하지만 요한복음은 자그마치 14-16장까지 세 장 정도의 분량으로 보도합니다. 유월절 만찬과 체포와 죽음이라는 사건을 앞에 분의 말씀으로는 분량도 많고 내용도 아주 사변적입니다. 그래서 많은 신자들이 요한복음의 내용을 오늘 우리의 삶과 너무 동떨어진, 매우 추상적인 것으로 여기기도 합니다.
이와는 전혀 다르게 생각하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오늘 본문 말씀의 내용을 분명하게 알 수 있고, 은혜가 넘친다고 말입니다. 그런 분들은 요한복음을 자주 읽기도 하고, 그것을 따로 공부하기도 했겠지요. 그들은 오늘 본문이 바로 사랑을 말한다고 주장합니다. 15절에서 이미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키게 될 것이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내 계명’은 “서로 사랑하는 것”(요 13:34)입니다. 더구나 마지막 구절인 21절에는 사랑이라는 단어가 네 번이나 반복해서 나옵니다. 부활 후의 주님과 베드로와의 대화를 보도하는 장면에서도 요한복음(21:15 이하)은 ‘사랑’을 키워드로 삼고 있습니다. 그것만이 아니라 신약성서가 전체가 사랑에 대해서 얼마나 강조하고 있는가 하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오늘 본문을 사랑에 대한 가르침으로 받아들이는 건 틀린 게 아닙니다.
저는 오늘 본문을 이해하기 어려워서 여러 번 반복해서 읽었습니다. 성서주석도 참고했습니다. 이 말씀을 저의 삶에 그대로 대입해보았습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주님의 계명을 내가 지키고 있을까, 하고 말입니다. 솔직하게 말씀드린다면, 성서가 그렇게 사랑을 강조하지만 실제로 저는 사랑할 능력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새 계명’을 주시겠다는 그 구절 앞에서 저의 무능력은 더 심각해집니다.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너희에게 새 계명을 주겠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 13:34) 주님은 자기 몸을 버리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으며, 제자들에게 그런 계명을 주신 것입니다. 이게 과연 우리에게 가능한 계명인가요? 자기 몸을 버리는 차원은 고사하고 서로 양보할 줄도 모르는 게 바로 우리의 모습인데 말입니다. 사랑하라는 계명과 그 계명을 따를 능력이 없다는 사실이 우리 기독교인의 삶에서 충돌하고 있습니다. 이런 충돌을 예민하게 느끼는 사람도 있지만, 대개는 그냥 묻어두고 살아가겠지요.
이에 관한 해결책을 우리는 다음과 같이 제시할 수도 있긴 합니다. 비록 우리에게 사랑의 능력이 없다 하더라도, 아니 없기 때문에라도 우리가 최선으로 사랑의 삶을 노력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기독교인들이 그런 노력을 기울이지 않기 때문에 세상으로부터 손가락질을 받는 게 아니냐, 하는 반성도 따라옵니다. 저는 그렇게 노력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으면 합니다. 어려운 사람을 물심양면으로 도와주고, 외로운 사람에게 친구가 되어주고, 이왕이면 말 한 마디라도 따뜻하게 해주는 기독교인들이 많아진다면 우리가 예수님의 계명을 그만큼 착실하게 지키는 것이겠지요. 이렇게 살아야 기독교인에 대한 사회의 이미지로 좋아지고, 간접적으로 선교도 이루어지겠지요.
이것으로 문제가 해결된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 노력은 결코 우리를 참된 영적 만족으로 끌어주지 못합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문제가 놓여 있습니다. 첫째, 우리가 남에게 친절과 호의를 베푸는 게 사랑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런 것은 우리만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도 중요하게 생각하는 윤리와 도덕과 교양입니다. 그런데 여러분도 경험했겠지만, 우리가 아무리 교양이 있는 사람이 된다고 하더라도 그것으로 영혼의 만족을 얻을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전 13:3절에서 “내가 비록 모든 재산을 남에게 나누어준다 하더라도, 또 내가 남을 위하여 불 속에 뛰어든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고 했습니다. 즉 그런 행위와 사랑은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의미입니다.
둘째,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우리가 남에게 베푸는 선행들은 오히려 우리를 좌절하게 만들 때가 많습니다. 저는 그런 걸 자주 경험합니다. 신문이나 티브이 같은 매스컴을 통해서 정말 어려운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지금 내 소유가 너무 많다는 것을 인정하게 됩니다. 제가 갖고 있는 모든 것을 그들에게 나눠줘야 마땅한 거라는 생각으로 불편할 때가 많습니다. 저보다 용기가 많은 사람은 정말 자기의 소유를 포기하고 그런 선행을 행하겠지요. 만약 자기의 소유를 모두 포기하면서 불우 이웃을 돕는 것이 바로 사랑이라고 한다면 사랑은 바로 우리에게 무거운 짐이 되고 말 겁니다. 오늘 본문은 왜 이렇게 어려운 짐을 우리에게 맡기는 걸까요?
파라클레토스
본문의 15절 말씀은 다음과 같습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키게 될 것이다.” 이 말씀에 의하면 사랑과 계명이 하나입니다. 여기서 “나”는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 바로 예수님의 새 계명인 “서로 사랑하는 것”의 토대입니다.
이 말씀을 새 계명에 관한 말씀의 전체 문맥에서 살펴보십시오. 서로 사랑하라는 이 계명은 독립적인 말씀이 아닙니다. 그것에 앞서 요 13:31절 이하에서 예수님의 영광에 대한 진술이 나옵니다. 예수님이 영광을 받게 되었고, 이를 통해서 하나님도 영광을 받게 되었다고 합니다. 여기서 영광은 하나님의 존재방식입니다. 참된 생명이 드러나는 자리입니다. 성서는 그걸 매우 독특한 문학적 수사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컨대 이사야(6장)는 성전에서 스랍들이 노래하는 걸 경험했습니다. 요한계시록 기자는 새 하늘과 새 땅을 환상으로 보았습니다. 그 영광은 은폐된 궁극적 생명을 가리킵니다. 그 영광은 하나님에게만 해당되는 용어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내가 가는 곳에 너희는 올 수 없다.”(요 13:33b)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님이 영광의 자리로 떠나버린 상황이, 그래서 그들이 더 이상 예수님과 함께 할 수 없는 그 상황이 바로 요한복음 공동체가 놓여 있는 ‘삶의 자리’였습니다. 그런 상황은 요한공동체만이 아니라 초기 기독교 전체에 해당되었습니다.
우리는 신약성서를 2천 년 전의 상황으로 돌아가서 읽어야 합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예수님의 제자들과 추종자들은 예수님이 없는 상황에 봉착했습니다. 자신들이야 부활의 주님을 경험했으니까 믿음을 유지할 수 있었지만, 주변 사람들을 설득시킬 수 있는 방법이 별로 없었습니다. 더구나 부활의 주님에 대한 경험은 제 1세대로 끝났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직접 경험한 사람들이 대부분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교회 안의 사람들과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사실을 어떻게 전해야합니까? 그냥 믿으면 된다고 윽박지를 수도 없습니다. 부활의 주님이 그들과 함께 한다는 사실을 설득시켜야만 합니다.
오늘 본문을 전승하고 있는 요한복음 공동체가 찾은 대답은 바로 성령이었습니다. 부활하셨지만 이제는 영광으로 올림을 받은 예수님이 그들과 함께 하신다는 증거는 성령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 사실을 예수님이 살아계실 때 주신 말씀에서 기억해 냈습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그것을 말합니다. 16절 말씀을 다시 보십시오. “내가 아버지께 구하면 다른 협조자를 보내 주셔서 너희와 영원히 함께 계시도록 하실 것이다.” 그 협조자는 ‘파라클레토스’라는 헬라어입니다. 그는 곧 성령입니다. 그가 영원히 제자들과 함께 하신다면 이제 예수님의 부활을 직접 경험한 제자들이 죽은 뒤 세대의 사람들도 예수님과 함께 하는 것과 다를 게 없습니다.
예수님이 약속하신 파라클레토스가 누구일까요? 그가 어떻게 예수님을 대신한다는 것입니까? 이 물음에 대한 답변에 기독교의 운명이 달려 있습니다. 그것이 허술하다면 기독교는 거짓말하는 집단으로 치부될 수도 있습니다. 세상으로부터 그렇게 매도당하는 게 두려워서가 아니라 우리 자신의 신앙을 위해서도 이런 질문에 대한 진지한 대답을 찾아야만 합니다. 도대체 부활 승천하신 예수님이 구하시어 하나님이 보내신, 그래서 제자들과 영원히 함께 할 파라클레토스는 누구인가요? 예수님의 말씀대로 여러분은 그분과 지금 함께 하고 있나요?
본문 17절은 파라클레토스를 가리켜 ‘진리의 영’(토 프뉴마 테스 알레테이아스)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대신해서 지금 우리와 함께 하시는 성령은 바로 진리의 영입니다. 요한복음 기자는 파라클레토스, 알레테이아, 프뉴마를 통해서 초기 기독교 신앙의 어떤 영적 깊이를 해명하고 있습니다. 성령은 곧 진리를 알게 아는 영이라고 말입니다. 성서는 우리게 자꾸 어려운 질문을 하게 만드는군요. 진리의 영이 누군지 알려면 진리가 무엇인지, 또한 영이 누구인지 알아야 합니다.
이 세상의 지식, 곧 철학도 진리를 말합니다. 신약성서 시대의 철학은 헬라철학이었는데, 그들이 말하는 진리는 아주 보편적인 것을 가리킵니다. 예컨대 탈레스는 만물의 본질을 물이라고 주장했고, 플라톤은 이데아라고, 아리스토텔레스는 그것을 형상과 질료의 관계로 설명했습니다. 이런 보편적인 진리 인식은 우리가 이 세상을 상식적으로 이해하는데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요소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진리 인식은 예수님에게 집중됩니다. 예수님을 알고 믿는 것이 바로 진리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요 14:6) 세상은 이걸 진리라고 인정하기 싫어합니다. 요한복음 시대에도 그랬습니다. 17절 말씀에 따르면 파라클레토스인 진리의 영을 세상은 받아들이지 않지만 제자들은 알고 받아들일 것이라고 합니다. 기독교의 진리는 모두에게 알려진 것이 아니라 제자들에게만 알려진 것입니다. 부활의 주님이 제자들에게만 나타났다는 사실이 바로 이것을 가리킵니다.
이런 기독교의 진리 인식에 대해서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 겁니다. 자기들의 종교만 진리라고 말하는 것은 진리가 아니라 오히려 독단에 불과하다고 말입니다. 오해는 마십시오. 지금 이 세상의 보편적인 진리 이해가 무조건 잘못이라는 말씀을 드리는 게 아닙니다. 다른 종교는 모두 거짓말이라는 뜻도 아닙니다. 그것은 또 다른 차원의 문제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그의 운명, 그리고 그에게 자신들의 운명을 걸었던 초기 기독교 신앙입니다. 우리는 지금 요한복음 공동체의 신앙을 통해서 예수님이 누구인가 하는 것을 배우는 중입니다. 요한복음이 지금 진리의 영을 통해서 말하려는 핵심이 무엇인가요? 세상은 알지 못하지만 제자들과 그 일행은 알게 되는 진리는 무엇일까요?
부활 승천 이후의 예수 경험
20절 말씀을 보십시오. 진리의 영인 파라클레토스가 요한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을 깨닫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설명합니다. “그 날이 오면 너희는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과 너희가 내 안에 있고, 내가 너희 안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여기서 ‘그 날’은 예수님이 영광의 세계로 들림을 받을 때입니다. 부활, 승천을 가리킵니다. 이는 곧 예수님이 하나님 안에 거한다는 뜻입니다. 거룩한 생명의 세계로 들어가셨다는 말씀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고백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우주론적인 차원에서 새롭게 고백하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 다음의 말씀이 더 중요합니다. 제자들은 그들이 예수님 안에 있고, 예수님이 제자들 안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고 합니다. 이 일을 하시는 분이 바로 진리의 영이신 파라클레토스입니다.
여기서 제자들이 예수님 안에 있다거나 예수님이 제자들 안에 있다는 말은 무슨 뜻인지 잘 생각해보십시오. 실제로 우리가 예수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아닙니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우리는 요한복음 3장에 니고데모 이야기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거듭나야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니고데모는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거듭난다는 말을 실제로 어머니의 배속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말인가, 하고 이상하게 생각했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니고데모에게 준 대답은 성령이었습니다. 영에 사로잡힌 삶이 바로 거듭난다는 뜻이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우리가 예수님 안에 있고, 예수님이 우리 안에 있다는 이 말도 역시 성령에 사로잡히는 삶을 가리킵니다. 오늘 말씀에 따르면 파라클레토스인 진리의 영이 바로 그 사실을 깨닫게 합니다.
성령에 사로잡힌 삶은 겉으로 쉽게 드러나는 게 아닙니다. 그걸 증명할 길도 없습니다. 그것은 성령과 그 사람과의 비밀입니다. 요한복음은 그걸 무조건 비밀이라고 고집하지 않습니다. 그게 드러나는 길을 제시합니다. 사랑과 계명은 바로 그것입니다. 사랑은 예수님 안에 들어가 있는 사람의 드러나는 모습입니다. 왜냐하면 사랑이야말로 하나님의 존재론적 능력이며, 여기서만 사랑이 현실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보내시는 영에 사로잡힌 사람은 자신이 예수님 안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 거기서 사랑의 삶을 살게 됩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게 이런 파라클레토스를 경험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부활의 주님 안에 거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깨달을 수 있은 어디에 있을까요? 진리의 영이 우리를 다스리도록 마음을 열어야겠지요. 마치 시인이 어느 날 시의 세계로 깊숙이 발을 들여놓듯이 우리도 이런 영적인 깨우침의 세계로 깊숙이 발을 들여놓을 수 있을 겁니다. 그 첫 걸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분에게서 일어난 하나님의 구원 통치를 바르게 이해하고 믿는 것입니다. 이런 길을 갈 때 여러분은 오늘 요한복음 기자가 말하고 있듯이 진리의 영인 파라클레토스를 통해서 부활의 주님 안에 거하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믿을 수 있으며, 당연한 결과로 예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게 될 것입니다.
사랑의 종교?
여러분들은 오늘 본문 요한복음 14:15-21절을 읽으면서 정확한 내용을 따라가기가 쉽지 않았을 겁니다. 사랑, 계명, 협조자(파라클레토스), 진리의 영, 고아들이라는 단어도 그렇고, “너희는 나를 보게 될 것이다.”(19b)라거나, “그에게 나를 나타내 보이겠다.”(21b) 같은 말씀도 그렇습니다. 이런 표현이 공관복음서에는 없습니다. 여러분이 잘 알다시피 이 말씀은 예수님이 체포당하시던 날 밤에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으로 유월절 만찬을 나누면서 주신 말씀입니다. 이에 관해서 공관복음서는 아주 간단하게 보도하지만 요한복음은 자그마치 14-16장까지 세 장 정도의 분량으로 보도합니다. 유월절 만찬과 체포와 죽음이라는 사건을 앞에 분의 말씀으로는 분량도 많고 내용도 아주 사변적입니다. 그래서 많은 신자들이 요한복음의 내용을 오늘 우리의 삶과 너무 동떨어진, 매우 추상적인 것으로 여기기도 합니다.
이와는 전혀 다르게 생각하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오늘 본문 말씀의 내용을 분명하게 알 수 있고, 은혜가 넘친다고 말입니다. 그런 분들은 요한복음을 자주 읽기도 하고, 그것을 따로 공부하기도 했겠지요. 그들은 오늘 본문이 바로 사랑을 말한다고 주장합니다. 15절에서 이미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키게 될 것이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내 계명’은 “서로 사랑하는 것”(요 13:34)입니다. 더구나 마지막 구절인 21절에는 사랑이라는 단어가 네 번이나 반복해서 나옵니다. 부활 후의 주님과 베드로와의 대화를 보도하는 장면에서도 요한복음(21:15 이하)은 ‘사랑’을 키워드로 삼고 있습니다. 그것만이 아니라 신약성서가 전체가 사랑에 대해서 얼마나 강조하고 있는가 하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오늘 본문을 사랑에 대한 가르침으로 받아들이는 건 틀린 게 아닙니다.
저는 오늘 본문을 이해하기 어려워서 여러 번 반복해서 읽었습니다. 성서주석도 참고했습니다. 이 말씀을 저의 삶에 그대로 대입해보았습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주님의 계명을 내가 지키고 있을까, 하고 말입니다. 솔직하게 말씀드린다면, 성서가 그렇게 사랑을 강조하지만 실제로 저는 사랑할 능력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새 계명’을 주시겠다는 그 구절 앞에서 저의 무능력은 더 심각해집니다.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너희에게 새 계명을 주겠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 13:34) 주님은 자기 몸을 버리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으며, 제자들에게 그런 계명을 주신 것입니다. 이게 과연 우리에게 가능한 계명인가요? 자기 몸을 버리는 차원은 고사하고 서로 양보할 줄도 모르는 게 바로 우리의 모습인데 말입니다. 사랑하라는 계명과 그 계명을 따를 능력이 없다는 사실이 우리 기독교인의 삶에서 충돌하고 있습니다. 이런 충돌을 예민하게 느끼는 사람도 있지만, 대개는 그냥 묻어두고 살아가겠지요.
이에 관한 해결책을 우리는 다음과 같이 제시할 수도 있긴 합니다. 비록 우리에게 사랑의 능력이 없다 하더라도, 아니 없기 때문에라도 우리가 최선으로 사랑의 삶을 노력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기독교인들이 그런 노력을 기울이지 않기 때문에 세상으로부터 손가락질을 받는 게 아니냐, 하는 반성도 따라옵니다. 저는 그렇게 노력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으면 합니다. 어려운 사람을 물심양면으로 도와주고, 외로운 사람에게 친구가 되어주고, 이왕이면 말 한 마디라도 따뜻하게 해주는 기독교인들이 많아진다면 우리가 예수님의 계명을 그만큼 착실하게 지키는 것이겠지요. 이렇게 살아야 기독교인에 대한 사회의 이미지로 좋아지고, 간접적으로 선교도 이루어지겠지요.
이것으로 문제가 해결된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 노력은 결코 우리를 참된 영적 만족으로 끌어주지 못합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문제가 놓여 있습니다. 첫째, 우리가 남에게 친절과 호의를 베푸는 게 사랑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런 것은 우리만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도 중요하게 생각하는 윤리와 도덕과 교양입니다. 그런데 여러분도 경험했겠지만, 우리가 아무리 교양이 있는 사람이 된다고 하더라도 그것으로 영혼의 만족을 얻을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전 13:3절에서 “내가 비록 모든 재산을 남에게 나누어준다 하더라도, 또 내가 남을 위하여 불 속에 뛰어든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고 했습니다. 즉 그런 행위와 사랑은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의미입니다.
둘째,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우리가 남에게 베푸는 선행들은 오히려 우리를 좌절하게 만들 때가 많습니다. 저는 그런 걸 자주 경험합니다. 신문이나 티브이 같은 매스컴을 통해서 정말 어려운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지금 내 소유가 너무 많다는 것을 인정하게 됩니다. 제가 갖고 있는 모든 것을 그들에게 나눠줘야 마땅한 거라는 생각으로 불편할 때가 많습니다. 저보다 용기가 많은 사람은 정말 자기의 소유를 포기하고 그런 선행을 행하겠지요. 만약 자기의 소유를 모두 포기하면서 불우 이웃을 돕는 것이 바로 사랑이라고 한다면 사랑은 바로 우리에게 무거운 짐이 되고 말 겁니다. 오늘 본문은 왜 이렇게 어려운 짐을 우리에게 맡기는 걸까요?
파라클레토스
본문의 15절 말씀은 다음과 같습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키게 될 것이다.” 이 말씀에 의하면 사랑과 계명이 하나입니다. 여기서 “나”는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 바로 예수님의 새 계명인 “서로 사랑하는 것”의 토대입니다.
이 말씀을 새 계명에 관한 말씀의 전체 문맥에서 살펴보십시오. 서로 사랑하라는 이 계명은 독립적인 말씀이 아닙니다. 그것에 앞서 요 13:31절 이하에서 예수님의 영광에 대한 진술이 나옵니다. 예수님이 영광을 받게 되었고, 이를 통해서 하나님도 영광을 받게 되었다고 합니다. 여기서 영광은 하나님의 존재방식입니다. 참된 생명이 드러나는 자리입니다. 성서는 그걸 매우 독특한 문학적 수사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컨대 이사야(6장)는 성전에서 스랍들이 노래하는 걸 경험했습니다. 요한계시록 기자는 새 하늘과 새 땅을 환상으로 보았습니다. 그 영광은 은폐된 궁극적 생명을 가리킵니다. 그 영광은 하나님에게만 해당되는 용어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내가 가는 곳에 너희는 올 수 없다.”(요 13:33b)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님이 영광의 자리로 떠나버린 상황이, 그래서 그들이 더 이상 예수님과 함께 할 수 없는 그 상황이 바로 요한복음 공동체가 놓여 있는 ‘삶의 자리’였습니다. 그런 상황은 요한공동체만이 아니라 초기 기독교 전체에 해당되었습니다.
우리는 신약성서를 2천 년 전의 상황으로 돌아가서 읽어야 합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예수님의 제자들과 추종자들은 예수님이 없는 상황에 봉착했습니다. 자신들이야 부활의 주님을 경험했으니까 믿음을 유지할 수 있었지만, 주변 사람들을 설득시킬 수 있는 방법이 별로 없었습니다. 더구나 부활의 주님에 대한 경험은 제 1세대로 끝났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직접 경험한 사람들이 대부분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교회 안의 사람들과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사실을 어떻게 전해야합니까? 그냥 믿으면 된다고 윽박지를 수도 없습니다. 부활의 주님이 그들과 함께 한다는 사실을 설득시켜야만 합니다.
오늘 본문을 전승하고 있는 요한복음 공동체가 찾은 대답은 바로 성령이었습니다. 부활하셨지만 이제는 영광으로 올림을 받은 예수님이 그들과 함께 하신다는 증거는 성령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 사실을 예수님이 살아계실 때 주신 말씀에서 기억해 냈습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그것을 말합니다. 16절 말씀을 다시 보십시오. “내가 아버지께 구하면 다른 협조자를 보내 주셔서 너희와 영원히 함께 계시도록 하실 것이다.” 그 협조자는 ‘파라클레토스’라는 헬라어입니다. 그는 곧 성령입니다. 그가 영원히 제자들과 함께 하신다면 이제 예수님의 부활을 직접 경험한 제자들이 죽은 뒤 세대의 사람들도 예수님과 함께 하는 것과 다를 게 없습니다.
예수님이 약속하신 파라클레토스가 누구일까요? 그가 어떻게 예수님을 대신한다는 것입니까? 이 물음에 대한 답변에 기독교의 운명이 달려 있습니다. 그것이 허술하다면 기독교는 거짓말하는 집단으로 치부될 수도 있습니다. 세상으로부터 그렇게 매도당하는 게 두려워서가 아니라 우리 자신의 신앙을 위해서도 이런 질문에 대한 진지한 대답을 찾아야만 합니다. 도대체 부활 승천하신 예수님이 구하시어 하나님이 보내신, 그래서 제자들과 영원히 함께 할 파라클레토스는 누구인가요? 예수님의 말씀대로 여러분은 그분과 지금 함께 하고 있나요?
본문 17절은 파라클레토스를 가리켜 ‘진리의 영’(토 프뉴마 테스 알레테이아스)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대신해서 지금 우리와 함께 하시는 성령은 바로 진리의 영입니다. 요한복음 기자는 파라클레토스, 알레테이아, 프뉴마를 통해서 초기 기독교 신앙의 어떤 영적 깊이를 해명하고 있습니다. 성령은 곧 진리를 알게 아는 영이라고 말입니다. 성서는 우리게 자꾸 어려운 질문을 하게 만드는군요. 진리의 영이 누군지 알려면 진리가 무엇인지, 또한 영이 누구인지 알아야 합니다.
이 세상의 지식, 곧 철학도 진리를 말합니다. 신약성서 시대의 철학은 헬라철학이었는데, 그들이 말하는 진리는 아주 보편적인 것을 가리킵니다. 예컨대 탈레스는 만물의 본질을 물이라고 주장했고, 플라톤은 이데아라고, 아리스토텔레스는 그것을 형상과 질료의 관계로 설명했습니다. 이런 보편적인 진리 인식은 우리가 이 세상을 상식적으로 이해하는데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요소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진리 인식은 예수님에게 집중됩니다. 예수님을 알고 믿는 것이 바로 진리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요 14:6) 세상은 이걸 진리라고 인정하기 싫어합니다. 요한복음 시대에도 그랬습니다. 17절 말씀에 따르면 파라클레토스인 진리의 영을 세상은 받아들이지 않지만 제자들은 알고 받아들일 것이라고 합니다. 기독교의 진리는 모두에게 알려진 것이 아니라 제자들에게만 알려진 것입니다. 부활의 주님이 제자들에게만 나타났다는 사실이 바로 이것을 가리킵니다.
이런 기독교의 진리 인식에 대해서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 겁니다. 자기들의 종교만 진리라고 말하는 것은 진리가 아니라 오히려 독단에 불과하다고 말입니다. 오해는 마십시오. 지금 이 세상의 보편적인 진리 이해가 무조건 잘못이라는 말씀을 드리는 게 아닙니다. 다른 종교는 모두 거짓말이라는 뜻도 아닙니다. 그것은 또 다른 차원의 문제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그의 운명, 그리고 그에게 자신들의 운명을 걸었던 초기 기독교 신앙입니다. 우리는 지금 요한복음 공동체의 신앙을 통해서 예수님이 누구인가 하는 것을 배우는 중입니다. 요한복음이 지금 진리의 영을 통해서 말하려는 핵심이 무엇인가요? 세상은 알지 못하지만 제자들과 그 일행은 알게 되는 진리는 무엇일까요?
부활 승천 이후의 예수 경험
20절 말씀을 보십시오. 진리의 영인 파라클레토스가 요한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을 깨닫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설명합니다. “그 날이 오면 너희는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과 너희가 내 안에 있고, 내가 너희 안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여기서 ‘그 날’은 예수님이 영광의 세계로 들림을 받을 때입니다. 부활, 승천을 가리킵니다. 이는 곧 예수님이 하나님 안에 거한다는 뜻입니다. 거룩한 생명의 세계로 들어가셨다는 말씀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고백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우주론적인 차원에서 새롭게 고백하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 다음의 말씀이 더 중요합니다. 제자들은 그들이 예수님 안에 있고, 예수님이 제자들 안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고 합니다. 이 일을 하시는 분이 바로 진리의 영이신 파라클레토스입니다.
여기서 제자들이 예수님 안에 있다거나 예수님이 제자들 안에 있다는 말은 무슨 뜻인지 잘 생각해보십시오. 실제로 우리가 예수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아닙니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우리는 요한복음 3장에 니고데모 이야기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거듭나야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니고데모는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거듭난다는 말을 실제로 어머니의 배속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말인가, 하고 이상하게 생각했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니고데모에게 준 대답은 성령이었습니다. 영에 사로잡힌 삶이 바로 거듭난다는 뜻이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우리가 예수님 안에 있고, 예수님이 우리 안에 있다는 이 말도 역시 성령에 사로잡히는 삶을 가리킵니다. 오늘 말씀에 따르면 파라클레토스인 진리의 영이 바로 그 사실을 깨닫게 합니다.
성령에 사로잡힌 삶은 겉으로 쉽게 드러나는 게 아닙니다. 그걸 증명할 길도 없습니다. 그것은 성령과 그 사람과의 비밀입니다. 요한복음은 그걸 무조건 비밀이라고 고집하지 않습니다. 그게 드러나는 길을 제시합니다. 사랑과 계명은 바로 그것입니다. 사랑은 예수님 안에 들어가 있는 사람의 드러나는 모습입니다. 왜냐하면 사랑이야말로 하나님의 존재론적 능력이며, 여기서만 사랑이 현실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보내시는 영에 사로잡힌 사람은 자신이 예수님 안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 거기서 사랑의 삶을 살게 됩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게 이런 파라클레토스를 경험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부활의 주님 안에 거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깨달을 수 있은 어디에 있을까요? 진리의 영이 우리를 다스리도록 마음을 열어야겠지요. 마치 시인이 어느 날 시의 세계로 깊숙이 발을 들여놓듯이 우리도 이런 영적인 깨우침의 세계로 깊숙이 발을 들여놓을 수 있을 겁니다. 그 첫 걸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분에게서 일어난 하나님의 구원 통치를 바르게 이해하고 믿는 것입니다. 이런 길을 갈 때 여러분은 오늘 요한복음 기자가 말하고 있듯이 진리의 영인 파라클레토스를 통해서 부활의 주님 안에 거하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믿을 수 있으며, 당연한 결과로 예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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