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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마12: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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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정용섭 목사 |
참고 : | http://dabia.net/xe/39681 |
유대인이 세계인류를 위해 물려준 가장 의미 있는 유산은 <안식일> 전통입니다. 안식일은 형식적으로 볼 때 육일 동안 노동하고 칠일 째 쉬라는 제도인데, 내용적으로 보면 인간이 이 땅 위에서 생존하기 위해서 끊임 없이 노동을 해야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정기적으로 휴식을 취해야 한다는 생명원리이기도 합니다. 이는 곧 유대인들의 생존양식입니다. 모세에 의해 율법화 된 이 안식일 제도는 예수님 당시에도 여전히 유대인들의 모든 종교와 생활을 지배하는 절대적 원칙이었습니다. 복음서에서 볼 수 있는 것 처럼 예수님과 바리새인과의 갈등이 거의 이 안식일 논쟁에 집중되고 있다는 사실이 이를 말해줍니다.
오늘 본문말씀도 역시 그렇습니다. 안식일에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밀밭 사이로 지나가고 있던 중 제자들이 시장하여 밀이삭을 잘라먹었습니다. 이를 본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에게 말하기를 “당신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다.”(마12:2)라고 시비를 걸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두 군데의 구약을 인용하여 대답했습니다. 삼상21:6 이하에 보면 다윗이 제사장만 먹을 수 있는 진설병을 자기 부하들과 함께 먹었다는 이야기가 있으며, 민28:9 이하에 보면 제사장들이 성전 안에서 안식일임에도 불구하고 나름대로 노동행위를 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와 비슷한 예는 복음서에 여러번 등장합니다만, 예수님은 안식일에 대한 굳어진 마음을 갖고 있던 바리새인들에게 다른 각도에서 안식일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해 주고 있는게 확실합니다. 예수님은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는 구약의 말씀(호6:6)을 인용하여 안식일의 근본의미를 좀더 구체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바로 이해하였더라면 안식일에 밀이삭을 자른 제자들의 행위를 정죄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을 오히려 나무라시면서, 결론적으로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다.”라고 끊어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서는 예수님과 바리새인들 사이의 안식일 논쟁을 통해 예수님이 어떻게 안식일을 새롭게 해석하고 있는지 설명하면서, 결국 안식일 문제를 기독론적으로 풀어주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의 절대적 이데올로기였던 안식일의 궁극적 의미는 그것의 독단론적 형식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에게 있다는 사실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예수님은 유대인들의 성전보다 크신 분이기 때문에(6절) 오랜 세월에 걸쳐 율법의 백미로 자리잡은 안식일의 의미가 기독론적-구원론적 방향에서 그 형식의 껍질을 벗고 참되 내용을 회복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원래 유대인들의 전통에 의하면 안식일은 두 개의 전승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창조사건이며 다른 하나는 출애굽 사건입니다. 출20:11절의 말씀은 이렇습니다.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 칠일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였느니라.” 또한 신5:15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편 팔로 너를 거기서 인도하여 내었나니 그러므로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를 명하여 안식일을 지키라 하였느니라.” 창조와 관련되었던지 아니면 출애굽과 관련되었던지 안식일의 핵심적 개념은 <쉼>을 그 내용으로 합니다. 여기에 바로 안식일의 참된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데, 이는 순전히 종교적인 의미에서만이 아니라 인간의 모든 삶을 규정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쉼>이라는 현실은 이 땅위에서 인간이 겪는 시련을 생각할 때 구원론적 사실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고대로 부터, 사실은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쉼>은 특수한 계층에게 편중되어 있었지 보편적인 것이 되지는 못하였습니다. 누가 일하기 좋아하겠습니까? 다른 사람은 시원한 그늘 밑에 앉아서 책을 보거나 바둑을 두는데 자기만 뙤약볕에 엎드려 땅을 파고 싶은 사람이 있을리 만무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가능한대로 놀면서 편안하게 살려다보니 <쉼>을 공평하게 나누어 갖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한쪽에서는 놀고 먹는 사람이 생기게 마련이고, 다른 한쪽에선 피땀 흘리듯 노력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경우에도 옛날에는 양반집 자녀로 태어나면, 물론 양반으로서 체통을 지키며 살아가는 것이 고역이긴 하지만, 그저 놀고 먹게 마련이고, 상민의 자녀로 태어나면 어려서 부터 뼈빠지게 일을 해야만 했습니다. 더구나 종으로 태어난 사람들은 자기 소유가 하나도 없이 평생 동안 주인을 위해 노동력을 제공해야만 했으며, 주인은 그들의 노동력으로 평생 동안 편안히 먹고 살았습니다. 종들은 일년 열 두달 단 하루도 쉴 날 없이 일을 했으며, 주인의 눈치를 보며 밥을 먹었고, 아내를 빼앗겨도 불평하지 못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이라는 제도를 통해 이런 최악의 사태만은 막아보고자 노력했습니다. 인간이 사는 세상에 어쩔 수 없이 계층의 구별이 생길 수 밖에 없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피조물인 인간이 최소한 일 주일에 하루 쯤은 무조건 쉬어야 한다는 그들의 생각이 세월이 지나면서 확고하게 율법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습니다. 모세는 출20:10에서 이렇게 명령하고 있습니다. “제 칠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육축이나 네 문 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이러한 법조문을 통해 유대백성들은 사회의 현실적인 구조 악 가운데서라도 인간이 누려야 할 최소한의 존엄성을 회복하려고 하였는데, 그게 바로 안식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유대인들이 이 안식일을 모든 인간의, 더 정확히 말하자면 평소에 쉴 수 없는 사람들의 <참된 쉼>이라는 본질적인 의미는 제쳐두고 그저 문자적으로 매어 달리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안식일은 비록 예수님과 바리새인 사이에 화해될 수 없는 논란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또한 오늘 우리가 구약의 안식일이 아니라 주님이 부활하신 주일을 안식일로 지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에게 유효한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과연 참된 안식이란 어디에 있으며 무엇을 의미하는가, 라는 질문을 통해서 그것에 대한 합당한 설득력을 찾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우리는 우선 교회 안에 참된 쉼이 있어야 한다는 점을 분명하게 인식해야 합니다. 안식일 공동체가 교회라고 한다면 이 안에서 모두가 참되게 쉴 수 있어야 하는데, 역설적인 말이지만 교회 안에 참된 쉼이 부족하다고 보는 것이 솔직한 고백입니다. 그 이유는 두 가지인데, 하나는 실제적으로 교회에 일이 너무 많아서 목사와 평신도 지도자들이 계속 쫓긴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신자들 사이에 참된 코이노니아가 부족해서 정신적으로 긴장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일반적으로 교회는 일을 많이 해야만 한다고 말들을 합니다. 매우 다양한 기도회, 성경공부, 구역예배, 여러 기관들의 모임, 절기 마다 다가오는 프로그람, 교회건축, 수양관 건립, 주일학교 교육, 성가대, 예배위원들 교육, 노방전도, 뿐만 아니라 해외선교, 사회를 향한 봉사 등 많은 일들이 교회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교회에서도 사회단체 처럼 산뜻한 이벤트 사업을 잘 추진해야만 교회가 부흥할 수 있다고 합니다. 예컨대 성경통독 새벽기도회, 성경전서 쓰기 대회 같은 것들입니다. 여러 교회 행사 중에 필요한 것도 있지만, 때로는 지나친 것들이 적지 않습니다. 너무 다양하고 복잡한, 그래서 그것을 따라가려면 만사를 제쳐놓아야 할 그런 프로그람들은 신자들에게 진정한 안식을 주기 보다는 시달리게 만들뿐입니다. 많은 신자들이 신앙의 진정한 기쁨에 참여하기 보다는 자기가 할 일을 다 하지 못했다고 하는 아쉬움의 연속 가운데 빠지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예배에 빠졌고, 기도를 적게 하였고, 맡은 일을 완수하지 못했다는 불안감이 신자들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런 현상은 그 신자들이 믿음이 없어서라거나 게으르기 때문 만이 아니라 교회의 일들이 너무 많고 또한 그것이 강요되기 때문입니다. 만약 교회에서 요구하는 일들을 모두 따라가려면 사실 사회생활을 아예 포기해야만 할 정도가 아닐까요? 그러다 보니 가능한대로 교회에 성실하게 살아가려고 하는 신자들은 끊임 없이 사회에서 갈등을 겪게 마련입니다.
오해하지 말기를 바라는데, 교회의 행사에 이리 저리 다 빠지고 적당하게 신앙생활을 해도 좋다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무언가 부담을 느끼는 신앙생활로 부터 우리가 벗어나야만 신앙이 가져다 주는 참된 안식을 경험할 수 있다는 뜻으로 말씀드리는 겁니다. 주변에서 우리 교회가 별로 활동을 많이 하지 않는다는 말들을 합니다. 교회의 활동이 적다는 게 무슨 문제가 될까요? 담임 목사로서 저의 최대 관심은 어떻게 하면 우리 교회신자들이 예수님을 참되게 알아 예수님 말씀대로 살아가게 하는가에 있지, 교회 공동체의 확장에 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다른 교회에 비해 행사를 적게 하고 있습니다. 꼭 필요한 것들만 챙겨보자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이 부담스러운 사람들에게 억지로 교회생활을 강요한다는 것은 피차간 피곤할 뿐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에 스스로 참여할 때 까지 기다리려고 합니다. 결국 신앙생활은 많은 일에 쫓기는 게 아니라 <참된 안식>에 있는 것 아닐까요? 이런 점에서 한국교회의 구조는 새롭게 바뀌어야만 합니다. 예수님이 찾아왔을 때 부엌에서 일에 분주하던 마르다에게 조용히 예수님 발 앞에 앉아 말씀을 듣던 마리아의 선택이 바른 것이라고 말씀하신 <마리아와 마르다 이야기>를 빌릴 필요도 없이, 교회는 일에 지친 교회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안식하는 교회로서 자리매김을 해야합니다.
안식일은 교회 안의 질서만이 아니라 교회 밖의 질서가 그것에 의해 바뀌어야 할 준거입니다. 이 사회는 두 가지 의미에서 참된 안식이 실종되었습니다. 하나는 이 세상의 구조가 안식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점이며, 다른 하나는 사람들이 쉼을 또 하나의 소유와 소비로 생각한다는 점입니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사회는 한 시도 눈을 옆으로 돌리지 못하게 만듭니다. 학생들의 공부에서 부터 직장생활에 이르기 까지 순전히 배타적인 경쟁의 연속이기 때문에 긴장을 풀고 쉴 틈이 없는 세상입니다. 우리 교인들 중에도 어쩔 수 없는 직장생활 때문에 주일에도 교회에 나오지 못할 뿐만 아니라, 스스로의 삶 가운데 쉬는 시간이 태부족한 가운데서 살아가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런 문제는 개인이 투쟁해서 해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제도 자체가 달라져야만 됩니다. 만약 우리가 서구의 선진국 처럼 일주일에 5일 만 노동을 해도 살아가는데 어려움이 없을 수 있다면 많은 부분에서 문제가 해결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의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이 세상에 참된 안식이 없다는 이유가 위에서 말한대로 지나치게 많은 노동을 한다는 것만이 아니라, 오늘날 더욱 절실하게 문제가 되는 요인인데, 그건 안식의 본질, 바로 그 의미에 대한 오해에 놓여 있습니다. 안식을 그저 놀러다니는 것으로 생각한다는 말씀입니다. 요즘 우리 나라의 경제적 수준이 무조건 생존 자체에 매어달릴 정도는 아니기 때문에 누구나 적당한 휴가나 오락을 즐기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 놓여 있는 그런 여가가 정말 우리에게 참된 쉼을 허락하고 있는가 하는 질문 앞에서 별로 자신있게 대답을 할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십년 전만 하더라도 승용차가 귀한 편이었는데 이제는 웬만한 가정은 거의 다 갖고 있습니다. 대학생들도 자기 차를 운전하고 다니며, 고급 아파트 지역에는 한 가정에 여러 대 씩의 승용차가 있어서 주차문제가 정말 심각합니다. 우리가 매일 경험하는 바이지만 현풍과 달성공단 지역에도 승용차들이 넘쳐 나고 있으며, 따라서 차량사고가 기하급수적으로 늘고 있습니다. 우리 나라는 이미 교통사고율이 세계에서 가장 높지만, 앞으로 모르긴 몰라도 교통 사정이 점점 더 열악한 나라가 될 것입니다. 승용차 문제는 우리 나라의 소비문화, 나아가 우리의 의식구조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현상입니다. 언젠가 어느 신자한테 들은 이야기인데, 왜 승용차를 샀오, 라는 질문에, 처가집에 갈 때 타고 가려고 샀다는 것입니다. 그분은 직업상 출퇴근할 입장도 아니지만 남이 승용차를 사니까, 그리고 처가집에 갈 때 아이들과 뻐스를 타고 가기가 불편하니까 승용차를 샀다는 겁니다. 이렇듯 우리는 쉼과 여흥 까지도 경쟁하듯 합니다. 그 한 사람 개인에 대한 문제점을 제기하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그렇게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려는 것 뿐입니다.
인간은 일할 만큼 일하고 쉴만큼 쉬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만드셨고, 그게 바로 인간 생명의 리듬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쉬는 것도 돈벌이 하듯이 경쟁하고 있습니다. 새파랗게 젊은 사람들이 부모로 부터 고급 승용차를 받아 타고 다니면서 하루 저녁에도 몇 십만원, 아니 몇 백만원 식 유흥비로 날려보낸다는 소문이 있고, 지난 여름에 소위 바캉스를 다녀오신 분들이 있겠지만 어디를 가든지 사람들이 넘쳐 나고 현지 물가는 갑절이나 되고 곳곳에 쓰레기가 썩어 지천으로 깔려 있습니다. 한 바탕 신나게 놀다보면 그것이 도대체 쉬는 건지 고역인지 알 수 없을 때가 정말 많습니다. 이렇게 살다보면 노동할 때나 쉴 때나 인생이 힘들 뿐이지 참된 안식을 찾지 못하게 됩니다. 건전한 휴식과 오락과 여행이나 취미생활을 부정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경험하는 이 사회 속에서는 그런 것들 마저 경쟁적으로 이루어지니까 진정한 <쉼>이 사라졌다는 점을 강조하려는 것입니다.
마태는 안식일 논쟁의 결말을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다.>라고 맺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의 안식일이 창조와 출애굽사건에 연결된다고 앞서 지적했는데, 이에 반해 초기 공동체는 안식일을 예수 그리스도와 연관시키고 있습니다. 즉 참된 안식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구약의 안식일 개념과 초기 교회의 개념 사이에 비록 접근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근본적인 의미에서는 같은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창조나 출애굽은 바로 예수 안에서 그 참된 의미가 획득되는 사건이기 때문에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참되게 알 때만 우리가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는 사실이, 우리가 하나님으로 부터 자유와 해방과 평화를 선물로 받은 사람들, 즉 구원받은 사람들이라는 사실이 명확해 진다는 말씀입니다. 결국 우리는 참된 안식이 예수에게서 오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믿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 처럼 여가를 즐기기 위해서 경쟁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건전한 직장에서 노동을 하고 그것을 통해 얻어지는 여유를 즐긴다는 것은 결코 거부해야할 아무런 이유가 있을 수 없습니다만, 그 어떤 오락이나 취미나 여가생활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 속에서 참된 안식으로 다가 올 수 있는 것임을 우리는 믿습니다. 신자들이 세상 사람들 보다 더 많이 갖고, 더 많이 놀기 위해 경쟁한다면 결국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그 뒤에 아무 것도 남지 않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참된 안식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 속에서 영적인 것으로 부터 출발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알기 위해서 매진해야만 합니다. 그분이 바로 안식일의 주인이십니다. (1990년대 중반, 현풍제일교회에서 행한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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