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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마17:14-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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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정용섭 목사 |
참고 : | http://dabia.net/xe/39683 |
2008.5.4.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마태 17:14-20절에는 간질병에 걸린 아들을 둔 사람이 나옵니다. 그의 아들은 간질이 발작하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뛰어 들어갔습니다. 아버지의 심정이 어땠을지는 불문가지입니다. 그는 아들의 치료를 위해서 예수님을 찾아왔는데, 공교롭게도 그 시간에 예수님은 다른 곳에 출타 중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앞 대목이 보도하듯이 예수님은 베드로, 야고보, 요한을 데리고 산에 올라가셨습니다. 예수님이 안 계시자 어쩔 수 없이 이 사람은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아이를 보였지만 제자들은 속수무책이었습니다. 그는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예수님을 기다렸습니다. 예수님이 산에서 내려와 그들 앞에 나타나자 대뜸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고 그간의 형편을 말씀드리면서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라고 간청했습니다.
예수님은 거기 모인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 이 세대가 왜 이다지도 믿으려 하지 않고 비뚤어졌을까? 내가 언제까지나 너희와 함께 살며 이 성화를 받아야 한단 말이냐? 그 아이를 나에게 데려 오너라.”(17절) 이 말씀 후에 예수님은 마귀에게 호령하셨습니다. 그러나 아이는 나았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믿음이 없는 세대, 둘째는 예수님이 성화를 받아야 한다는 사실, 셋째는 아이를 데려오라는 것입니다. 셋째는 별 큰 의미가 없습니다. 간질병을 고치려면 아이를 앞에 세워야 하니까, 데려오라는 것입니다. 둘째도 크게 어렵지는 않습니다. 이런 병을 치료하는 건 제자들이 알아서 해야 할 텐데, 일일이 예수님이 나서야 하는 상황이 마뜩치 않다는 뜻이겠지요.
첫째 말씀이 조금 까다롭습니다. 책망의 뜻이 강합니다. 예수님은 그 세대를 믿음이 없으며 비뚤어졌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누구를, 무엇을 책망하고 있으신가요? 제자들인가요, 아니면 간질병 아이를 데리고 온 아버지인가요, 아니면 거기 모였던 사람들인가요, 또는 그 당시의 모든 유대인들인가요? 우리는 그런 것을 정확하게 분석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본문을 통해서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것은 제자들이 간질병 아이를 고치지 못했다는 사실과 예수님이 이 문제를 믿음의 차원에서 설명했다는 사실입니다. 이 두 가지 사실을 연결해서 본다면, 결국 믿음이 없어서 간질병을 고치지 못했다는 의미입니다. 사람들이 모두 돌아간 뒤 “저희는 왜 마귀를 쫓아내지 못하였습니까?” 하는 제자들의 물음에 “너희의 믿음이 약한 탓이다.” 하는 예수님의 답변을 보더라도 간질병 치료와 믿음 사이에 깊은 연관성이 있다는 게 분명해집니다. 이 믿음의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를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보충해서 설명했습니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다면 이 산더러 ‘여기서 저기로 옮겨져라.’ 해도 그대로 될 것이다. 너희가 못할 일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20b)
믿음의 능력?
기독교 신앙에서 믿음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길게 설명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분명합니다. 아브라함의 믿음, 다니엘의 믿음, 스데반의 믿음은 오늘 우리 모든 기독교인이 흠모하는 대상입니다. 성서에서만이 아니라 실제의 신앙생활에서 많은 신자들이 믿음의 능력을 경험합니다. 불치병에 걸렸던 사람이 믿음으로 감쪽같이 치료되었다는 간증을 심심히 않게 들을 수 있습니다. 의사가 4개월 시한부 진단을 내렸는데, 10년 이상 멀쩡하게 살아있다는 것입니다. 사업이 부도에 몰렸다가 믿음으로 재기에 성공했다는 말들도 흔하게 듣습니다. 심지어 <긍정의 힘>의 저자 오스틴 목사 같은 사람은 믿음으로 기도하니 꿈에 그리던 전원주택을 구입할 수 있었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어떤 편견 없이 이 세상을 바라본다면 우리의 삶에서 일어나는 문제들이 믿음으로 간단히 해결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불치병에 걸린 사람은 아무리 믿음으로 기도한다고 하더라도 죽을 확률이 훨씬 높습니다. 믿음으로 치료받는 사람의 숫자나 자연적으로 치료되는 사람의 숫자나 제가 보기에는 별로 큰 차이가 없습니다. 믿음으로 사는 신자들이나 다른 종교인들이나, 또는 아무런 종교를 갖지 않는 사람이나 이 세상에서는 똑같은 크기로 시련을 당하기도 하고, 행운을 얻는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통치하는 방식은 편애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을 주시면서 이런 말씀을 덧붙이신 적이 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햇빛을 주시고, 옳은 사람에게나 옳지 못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주신다.”(마 5:45) 하나님이 세상을 다스리는 자연법칙에 변함없다는 내용을 다루는 C.S. 루이스의 글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떤 사람이 야구방망이로 사람을 치려고 할 때 하나님이 그것을 갑자기 꽃으로 바꿔버리면 세상은 큰 혼돈에 빠질 수밖에 없다고 말입니다. 비록 선한 사람이 그 방망이에 맞아서 죽는 일이 벌어진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은 창조질서를 훼손시키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사고 당할 일이 생기면 사고를 당하고, 죽을 일이 생기면 죽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믿음이 좋아도 이 세상살이에서는 아무런 특권이 없습니다.
오늘 많은 기독교인들이 믿음을 오해하고 있습니다. 일종의 믿음 만능론에 빠져 있습니다. 믿기만 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처럼 가르치고, 그렇게 따르고 있습니다.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은 현실 앞에서 “믿습니다!”를 외치고 있습니다. 아주 공허한 외침입니다. 그게 지나치면 광신으로, 더 나아가서는 광기로 나타날 때도 있습니다. 약간 온건한 경우에는 세상의 일을 아전인수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여우와 포도”라는 이솝우화와 비슷합니다. 포도를 먹고 싶은 여유는 키가 작아서 포도를 딸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자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 포도는 시어서 맛이 없을 거야.” 이런 자기 합리화는 믿음이 무엇인지 잘 모르기 때문에 벌어지는 어리석음입니다.
믿음을 그렇게 강조했던 바울이 이 믿음을 어떻게 말했는지 보십시다. “내가 ... 산을 옮길 만한 완전한 믿음을 가졌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고전 13:2) 여기서 그가 말하는 사랑은 “모든 재산을 남에게 나누어” 준다거나 “남을 위하여 불 속에 뛰어”드는 것이 아닙니다.(고전 13:3) 그 사랑은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바울은 여기서 믿음을 절대적인 것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믿음이 중요하지 않다는 뜻인가요? 아닙니다. 믿음은 기본적으로 인간의 능력에 속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잘 키워나가야 할 ‘카리스마’, 즉 은사입니다. 어떤 사람이 피아노 연주를 잘하는 것처럼 믿음도 역시 각자에게 소중한 믿음입니다. 그러나 피아노 연주 실력이 아무리 뛰어나다고 하더라도 그가 음악의 세계에 들어가지 못했다면 그 모든 것은 의미가 없는 것처럼 우리의 믿음이 아무리 강렬하다 하더라도 그 믿음의 대상이신 하나님의 세계에 들어가지 못했다면 의미가 없습니다.
이런 설명이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을 겁니다. 믿음 생활 잘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세계에 들어가는 거 아니냐, 하고 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위에서 인용한 고전 13장에서 확인했듯이, 바울이 믿음과 하나님을 구별했다는 사실을 놓치지 마십시오. 믿음은 우리의 인식이며, 우리의 노력이며, 우리의 업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에 묶이지 않습니다. 모차르트의 음악이 어떤 피아니스트의 연주기술 너머에 존재하듯이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조차 넘어서십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서 믿음에 관해서 주신 주님의 말씀은 무슨 뜻일까요? 주님은 분명히 믿음이 없는 그 시대와 믿음이 약한 제자들을 질책하셨습니다. 간질병을 고치지 못한 근본 원인이 믿음의 부족에 있다고 말입니다. 그 말씀을 정확하게 읽어보십시오. “이 세대가 왜 이다지도 믿으려 하지 않고, 비뚤어졌을까?”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세대가 무엇을 믿지 않으려 한 것일까요? 아이의 간질병이 치료되리라는 것을 믿지 못한 것일까요? 그건 아닙니다. 간질병 아이의 아버지나 제자들이 그것을 믿지 못했을 까닭이 없습니다. 믿지 않았다면 예수님에게 오지도 않았겠지요. 더구나 그건 믿음의 문제가 아닙니다. 아니 우리가 그걸 믿을 수는 있지만 믿는다고 해서 간질병이 고쳐지는 것은 아닙니다. 앞에서 짚었듯이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생로병사 같은 문제들은 믿음으로 해결되는 게 아닙니다.
여기서 믿음은 간질병 자체가 아니라 예수님을 향한 것입니다. 그들의 믿음이 약하다는 말은 그들이 예수님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해서 예수님이 선포한 하나님의 나라를 확신하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제자들과 거기에 모였던 사람들은 예수님이 가까이 임했으니 회개하라고 선포한 바로 그 하나님의 나라, 그의 통치를 믿지 못했습니다. 그 대신 그들은 간질병의 증상에만 호기심을 보였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믿지 못하면, 즉 그 나라가 온다는 사실을 불안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간질병을 일으키는 마귀를 쫓아낼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오늘 본문을 읽으면서 겉으로 드러난 간질병에만 관심을 둡니다. 간질병이 치료되는가, 아닌가에만 신경을 씁니다. 그래서 오늘도 많은 사람들이 이런 간질병을 직접 고치려고 애를 씁니다. 그런 방식으로 기독교의 우월성을 나타내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간질병 자체는 핵심이 아닙니다. 그런 간질병을 제어하는 예수님의 능력이 핵심이었습니다. 그 능력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 그 통치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 당시에 예수님의 그 능력을 사람들에게 설명하려면 간질병이 언급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은 간질병이 실제로 하나님 나라와 대립하는 마귀의 소행이라고 생각했었으니까요.
간질병 든 아이
간질병을 마귀의 소행이라고 생각한 고대인의 생각을 무조건 무시하면 곤란합니다. 그들의 세계관이나 의학지식이 비록 오늘 우리에게 비해서 턱없이 미숙하긴 했지만 근원에 대한 인식은 우리보다 못할 게 하나도 없습니다. 그들은 개인과 역사에 임하는 악의 현상을 존재론적으로 생각했습니다. 한 인간이 당하는 불치병이나 대재앙에는 훨씬 근원적인 힘이 작용한다고 말입니다. 의로운 자의 고난이라는 주제를 다루고 있는 욥기서에는 사탄이 등장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허락을 받아 욥을 심하게 괴롭힙니다. 한 순간에 정신을 읽고 입에 거품을 물며 자기 몸을 헤치는 간질병 환자를 보았을 때 고대인들이 마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겁니다. 사람은 이 마귀를 제압할 수 없습니다. 사람은 마귀나 사탄의 장난감에 불과합니다. 그를 제어할 수 있는 분은 하나님뿐입니다. 그 하나님, 그 하나님의 나라, 그 하나님의 통치만이 개인과 역사를 파괴하는 마귀를 제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신구약성서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핵심적인 세계관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언급되는 간질병은 인간의 삶을 파괴하는 마성적 힘의 표본입니다. 우리가 그 어떤 방식으로도 제어하기 어려운 그런 마성들은 오늘 우리의 삶에도 그대로 나타납니다. 우리나라에서 매년 5월은 청소년의 달, 또는 가정의 달로 지킵니다. 오늘은 어린이 주일이기도 합니다. 저는 이른 아침부터 밤 12시가 넘을 때까지 수능 공부에 열을 올리고 요즘 청소년들을 보면서 간질병에 걸린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때가 많습니다. 삶의 경이로움과 신비, 그리고 사랑과 평화를 마음과 몸으로 배워서 생명을 풍요롭게 경험해야 할 그 나이에 닭이나 소처럼 사육당하고 있으니, 무슨 말을 더 보탤 필요가 있겠습니까? 교육마저 기업처럼 경쟁력만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이명박 정권이 들어선 이후 이런 현상이 훨씬 강화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피폐해진 공교육은 이제 형식만 남고 사교육이 완전히 점령할 태세라고 합니다. 전인교육은 완전히 포기된 상태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 아이들은 물불 가리지 않고 뛰어들어 자기 생명을 훼손시킬 수밖에 없습니다. 간질병 현상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한국사회는 지금 믿음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바로 그 믿음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바로 임박했다는 사실을 외면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생명의 근본이라는 사실을 알지도 못하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짧은 소견과 방식에만 매달려 있습니다. 청소년들에게 정의와 평화와 인간적 연대성을 가르치는 게 생명 경험이라는 사실을 그들은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수능점수가 조금 낮아도 이 세상에서 얼마든지 행복하게, 더 나아가서 남을 위해서 살 수 있다는 사실을 외면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포함해서 오늘 이 시대는 오직 경제 성장만이 생명을 담보해줄 것처럼 확신하고 있습니다. 적자생존의 원칙이 우리의 모든 삶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결과가 어떨는지는 불을 보듯 분명합니다.
사실 사회를 향해서 교회가 하나님 나라를 선포할 처지도 못됩니다. 교회도 세상 못지않게 이런 경제 논리에만 푹 빠져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성장 지상주의가 바로 한국교회를 견인해가는 절대이념이 되었습니다. 더 심각한 문제는 그것이 바로 믿음의 척도처럼 받아들여진다는 사실입니다. 성장하는 교회가 되어야만 믿음이 좋은 교회라는 이름을 얻을 수 있는 실정입니다. 한국 사회의 경제지상주의와 한국 교회의 성장지상주의는 일란성 쌍둥이입니다. 양쪽 모두 꿩 잡는 게 매라는 논리를 신앙고백으로 삼고 있는 셈입니다.
오늘 주님이 주신 말씀을 다시 돌아보십시오. 이 세대가 왜 믿으려고 하지 않는가, 하고 한탄하셨습니다. 제자들의 믿음이 약한 탓이라고 질책하셨습니다. 그 세대와 제자들이 모두 믿음이 없었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통치에 마음을 열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에 의해서만 생명이 완성된다는 사실을 실제로 받아들이지 않고 자기 신념에 묶여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런 상태에서 간질병은 치료될 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 사회와 교회에서 벌어지는 반생명적 현상들은 해결될 수 없습니다.
오늘 참된 믿음이 요청됩니다. 이건 바로 여러분과 세상을 살리는 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통치에서만 우리의 생명이 보존되고 완성된다는 사실을 믿으십시오. 그런 믿음에서만 여러분은 간질병을 대항해서 투쟁할 수 있으며, 그런 투쟁의 역사에서 하나님은 간질병의 원인자인 마귀를 내어 쫓으실 것입니다. 18절 말씀을 잊지 마십시오. “마귀에게 호령하시자 마귀는 나가고 아이는 곧 나았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마태 17:14-20절에는 간질병에 걸린 아들을 둔 사람이 나옵니다. 그의 아들은 간질이 발작하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뛰어 들어갔습니다. 아버지의 심정이 어땠을지는 불문가지입니다. 그는 아들의 치료를 위해서 예수님을 찾아왔는데, 공교롭게도 그 시간에 예수님은 다른 곳에 출타 중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앞 대목이 보도하듯이 예수님은 베드로, 야고보, 요한을 데리고 산에 올라가셨습니다. 예수님이 안 계시자 어쩔 수 없이 이 사람은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아이를 보였지만 제자들은 속수무책이었습니다. 그는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예수님을 기다렸습니다. 예수님이 산에서 내려와 그들 앞에 나타나자 대뜸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고 그간의 형편을 말씀드리면서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라고 간청했습니다.
예수님은 거기 모인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 이 세대가 왜 이다지도 믿으려 하지 않고 비뚤어졌을까? 내가 언제까지나 너희와 함께 살며 이 성화를 받아야 한단 말이냐? 그 아이를 나에게 데려 오너라.”(17절) 이 말씀 후에 예수님은 마귀에게 호령하셨습니다. 그러나 아이는 나았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믿음이 없는 세대, 둘째는 예수님이 성화를 받아야 한다는 사실, 셋째는 아이를 데려오라는 것입니다. 셋째는 별 큰 의미가 없습니다. 간질병을 고치려면 아이를 앞에 세워야 하니까, 데려오라는 것입니다. 둘째도 크게 어렵지는 않습니다. 이런 병을 치료하는 건 제자들이 알아서 해야 할 텐데, 일일이 예수님이 나서야 하는 상황이 마뜩치 않다는 뜻이겠지요.
첫째 말씀이 조금 까다롭습니다. 책망의 뜻이 강합니다. 예수님은 그 세대를 믿음이 없으며 비뚤어졌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누구를, 무엇을 책망하고 있으신가요? 제자들인가요, 아니면 간질병 아이를 데리고 온 아버지인가요, 아니면 거기 모였던 사람들인가요, 또는 그 당시의 모든 유대인들인가요? 우리는 그런 것을 정확하게 분석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본문을 통해서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것은 제자들이 간질병 아이를 고치지 못했다는 사실과 예수님이 이 문제를 믿음의 차원에서 설명했다는 사실입니다. 이 두 가지 사실을 연결해서 본다면, 결국 믿음이 없어서 간질병을 고치지 못했다는 의미입니다. 사람들이 모두 돌아간 뒤 “저희는 왜 마귀를 쫓아내지 못하였습니까?” 하는 제자들의 물음에 “너희의 믿음이 약한 탓이다.” 하는 예수님의 답변을 보더라도 간질병 치료와 믿음 사이에 깊은 연관성이 있다는 게 분명해집니다. 이 믿음의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를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보충해서 설명했습니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다면 이 산더러 ‘여기서 저기로 옮겨져라.’ 해도 그대로 될 것이다. 너희가 못할 일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20b)
믿음의 능력?
기독교 신앙에서 믿음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길게 설명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분명합니다. 아브라함의 믿음, 다니엘의 믿음, 스데반의 믿음은 오늘 우리 모든 기독교인이 흠모하는 대상입니다. 성서에서만이 아니라 실제의 신앙생활에서 많은 신자들이 믿음의 능력을 경험합니다. 불치병에 걸렸던 사람이 믿음으로 감쪽같이 치료되었다는 간증을 심심히 않게 들을 수 있습니다. 의사가 4개월 시한부 진단을 내렸는데, 10년 이상 멀쩡하게 살아있다는 것입니다. 사업이 부도에 몰렸다가 믿음으로 재기에 성공했다는 말들도 흔하게 듣습니다. 심지어 <긍정의 힘>의 저자 오스틴 목사 같은 사람은 믿음으로 기도하니 꿈에 그리던 전원주택을 구입할 수 있었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어떤 편견 없이 이 세상을 바라본다면 우리의 삶에서 일어나는 문제들이 믿음으로 간단히 해결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불치병에 걸린 사람은 아무리 믿음으로 기도한다고 하더라도 죽을 확률이 훨씬 높습니다. 믿음으로 치료받는 사람의 숫자나 자연적으로 치료되는 사람의 숫자나 제가 보기에는 별로 큰 차이가 없습니다. 믿음으로 사는 신자들이나 다른 종교인들이나, 또는 아무런 종교를 갖지 않는 사람이나 이 세상에서는 똑같은 크기로 시련을 당하기도 하고, 행운을 얻는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통치하는 방식은 편애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을 주시면서 이런 말씀을 덧붙이신 적이 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햇빛을 주시고, 옳은 사람에게나 옳지 못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주신다.”(마 5:45) 하나님이 세상을 다스리는 자연법칙에 변함없다는 내용을 다루는 C.S. 루이스의 글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떤 사람이 야구방망이로 사람을 치려고 할 때 하나님이 그것을 갑자기 꽃으로 바꿔버리면 세상은 큰 혼돈에 빠질 수밖에 없다고 말입니다. 비록 선한 사람이 그 방망이에 맞아서 죽는 일이 벌어진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은 창조질서를 훼손시키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사고 당할 일이 생기면 사고를 당하고, 죽을 일이 생기면 죽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믿음이 좋아도 이 세상살이에서는 아무런 특권이 없습니다.
오늘 많은 기독교인들이 믿음을 오해하고 있습니다. 일종의 믿음 만능론에 빠져 있습니다. 믿기만 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처럼 가르치고, 그렇게 따르고 있습니다.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은 현실 앞에서 “믿습니다!”를 외치고 있습니다. 아주 공허한 외침입니다. 그게 지나치면 광신으로, 더 나아가서는 광기로 나타날 때도 있습니다. 약간 온건한 경우에는 세상의 일을 아전인수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여우와 포도”라는 이솝우화와 비슷합니다. 포도를 먹고 싶은 여유는 키가 작아서 포도를 딸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자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 포도는 시어서 맛이 없을 거야.” 이런 자기 합리화는 믿음이 무엇인지 잘 모르기 때문에 벌어지는 어리석음입니다.
믿음을 그렇게 강조했던 바울이 이 믿음을 어떻게 말했는지 보십시다. “내가 ... 산을 옮길 만한 완전한 믿음을 가졌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고전 13:2) 여기서 그가 말하는 사랑은 “모든 재산을 남에게 나누어” 준다거나 “남을 위하여 불 속에 뛰어”드는 것이 아닙니다.(고전 13:3) 그 사랑은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바울은 여기서 믿음을 절대적인 것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믿음이 중요하지 않다는 뜻인가요? 아닙니다. 믿음은 기본적으로 인간의 능력에 속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잘 키워나가야 할 ‘카리스마’, 즉 은사입니다. 어떤 사람이 피아노 연주를 잘하는 것처럼 믿음도 역시 각자에게 소중한 믿음입니다. 그러나 피아노 연주 실력이 아무리 뛰어나다고 하더라도 그가 음악의 세계에 들어가지 못했다면 그 모든 것은 의미가 없는 것처럼 우리의 믿음이 아무리 강렬하다 하더라도 그 믿음의 대상이신 하나님의 세계에 들어가지 못했다면 의미가 없습니다.
이런 설명이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을 겁니다. 믿음 생활 잘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세계에 들어가는 거 아니냐, 하고 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위에서 인용한 고전 13장에서 확인했듯이, 바울이 믿음과 하나님을 구별했다는 사실을 놓치지 마십시오. 믿음은 우리의 인식이며, 우리의 노력이며, 우리의 업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에 묶이지 않습니다. 모차르트의 음악이 어떤 피아니스트의 연주기술 너머에 존재하듯이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조차 넘어서십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서 믿음에 관해서 주신 주님의 말씀은 무슨 뜻일까요? 주님은 분명히 믿음이 없는 그 시대와 믿음이 약한 제자들을 질책하셨습니다. 간질병을 고치지 못한 근본 원인이 믿음의 부족에 있다고 말입니다. 그 말씀을 정확하게 읽어보십시오. “이 세대가 왜 이다지도 믿으려 하지 않고, 비뚤어졌을까?”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세대가 무엇을 믿지 않으려 한 것일까요? 아이의 간질병이 치료되리라는 것을 믿지 못한 것일까요? 그건 아닙니다. 간질병 아이의 아버지나 제자들이 그것을 믿지 못했을 까닭이 없습니다. 믿지 않았다면 예수님에게 오지도 않았겠지요. 더구나 그건 믿음의 문제가 아닙니다. 아니 우리가 그걸 믿을 수는 있지만 믿는다고 해서 간질병이 고쳐지는 것은 아닙니다. 앞에서 짚었듯이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생로병사 같은 문제들은 믿음으로 해결되는 게 아닙니다.
여기서 믿음은 간질병 자체가 아니라 예수님을 향한 것입니다. 그들의 믿음이 약하다는 말은 그들이 예수님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해서 예수님이 선포한 하나님의 나라를 확신하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제자들과 거기에 모였던 사람들은 예수님이 가까이 임했으니 회개하라고 선포한 바로 그 하나님의 나라, 그의 통치를 믿지 못했습니다. 그 대신 그들은 간질병의 증상에만 호기심을 보였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믿지 못하면, 즉 그 나라가 온다는 사실을 불안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간질병을 일으키는 마귀를 쫓아낼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오늘 본문을 읽으면서 겉으로 드러난 간질병에만 관심을 둡니다. 간질병이 치료되는가, 아닌가에만 신경을 씁니다. 그래서 오늘도 많은 사람들이 이런 간질병을 직접 고치려고 애를 씁니다. 그런 방식으로 기독교의 우월성을 나타내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간질병 자체는 핵심이 아닙니다. 그런 간질병을 제어하는 예수님의 능력이 핵심이었습니다. 그 능력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 그 통치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 당시에 예수님의 그 능력을 사람들에게 설명하려면 간질병이 언급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은 간질병이 실제로 하나님 나라와 대립하는 마귀의 소행이라고 생각했었으니까요.
간질병 든 아이
간질병을 마귀의 소행이라고 생각한 고대인의 생각을 무조건 무시하면 곤란합니다. 그들의 세계관이나 의학지식이 비록 오늘 우리에게 비해서 턱없이 미숙하긴 했지만 근원에 대한 인식은 우리보다 못할 게 하나도 없습니다. 그들은 개인과 역사에 임하는 악의 현상을 존재론적으로 생각했습니다. 한 인간이 당하는 불치병이나 대재앙에는 훨씬 근원적인 힘이 작용한다고 말입니다. 의로운 자의 고난이라는 주제를 다루고 있는 욥기서에는 사탄이 등장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허락을 받아 욥을 심하게 괴롭힙니다. 한 순간에 정신을 읽고 입에 거품을 물며 자기 몸을 헤치는 간질병 환자를 보았을 때 고대인들이 마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겁니다. 사람은 이 마귀를 제압할 수 없습니다. 사람은 마귀나 사탄의 장난감에 불과합니다. 그를 제어할 수 있는 분은 하나님뿐입니다. 그 하나님, 그 하나님의 나라, 그 하나님의 통치만이 개인과 역사를 파괴하는 마귀를 제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신구약성서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핵심적인 세계관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언급되는 간질병은 인간의 삶을 파괴하는 마성적 힘의 표본입니다. 우리가 그 어떤 방식으로도 제어하기 어려운 그런 마성들은 오늘 우리의 삶에도 그대로 나타납니다. 우리나라에서 매년 5월은 청소년의 달, 또는 가정의 달로 지킵니다. 오늘은 어린이 주일이기도 합니다. 저는 이른 아침부터 밤 12시가 넘을 때까지 수능 공부에 열을 올리고 요즘 청소년들을 보면서 간질병에 걸린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때가 많습니다. 삶의 경이로움과 신비, 그리고 사랑과 평화를 마음과 몸으로 배워서 생명을 풍요롭게 경험해야 할 그 나이에 닭이나 소처럼 사육당하고 있으니, 무슨 말을 더 보탤 필요가 있겠습니까? 교육마저 기업처럼 경쟁력만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이명박 정권이 들어선 이후 이런 현상이 훨씬 강화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피폐해진 공교육은 이제 형식만 남고 사교육이 완전히 점령할 태세라고 합니다. 전인교육은 완전히 포기된 상태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 아이들은 물불 가리지 않고 뛰어들어 자기 생명을 훼손시킬 수밖에 없습니다. 간질병 현상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한국사회는 지금 믿음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바로 그 믿음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바로 임박했다는 사실을 외면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생명의 근본이라는 사실을 알지도 못하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짧은 소견과 방식에만 매달려 있습니다. 청소년들에게 정의와 평화와 인간적 연대성을 가르치는 게 생명 경험이라는 사실을 그들은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수능점수가 조금 낮아도 이 세상에서 얼마든지 행복하게, 더 나아가서 남을 위해서 살 수 있다는 사실을 외면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포함해서 오늘 이 시대는 오직 경제 성장만이 생명을 담보해줄 것처럼 확신하고 있습니다. 적자생존의 원칙이 우리의 모든 삶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결과가 어떨는지는 불을 보듯 분명합니다.
사실 사회를 향해서 교회가 하나님 나라를 선포할 처지도 못됩니다. 교회도 세상 못지않게 이런 경제 논리에만 푹 빠져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성장 지상주의가 바로 한국교회를 견인해가는 절대이념이 되었습니다. 더 심각한 문제는 그것이 바로 믿음의 척도처럼 받아들여진다는 사실입니다. 성장하는 교회가 되어야만 믿음이 좋은 교회라는 이름을 얻을 수 있는 실정입니다. 한국 사회의 경제지상주의와 한국 교회의 성장지상주의는 일란성 쌍둥이입니다. 양쪽 모두 꿩 잡는 게 매라는 논리를 신앙고백으로 삼고 있는 셈입니다.
오늘 주님이 주신 말씀을 다시 돌아보십시오. 이 세대가 왜 믿으려고 하지 않는가, 하고 한탄하셨습니다. 제자들의 믿음이 약한 탓이라고 질책하셨습니다. 그 세대와 제자들이 모두 믿음이 없었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통치에 마음을 열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에 의해서만 생명이 완성된다는 사실을 실제로 받아들이지 않고 자기 신념에 묶여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런 상태에서 간질병은 치료될 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 사회와 교회에서 벌어지는 반생명적 현상들은 해결될 수 없습니다.
오늘 참된 믿음이 요청됩니다. 이건 바로 여러분과 세상을 살리는 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통치에서만 우리의 생명이 보존되고 완성된다는 사실을 믿으십시오. 그런 믿음에서만 여러분은 간질병을 대항해서 투쟁할 수 있으며, 그런 투쟁의 역사에서 하나님은 간질병의 원인자인 마귀를 내어 쫓으실 것입니다. 18절 말씀을 잊지 마십시오. “마귀에게 호령하시자 마귀는 나가고 아이는 곧 나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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