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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매춘생활 청산하고 소록도 등에서
봉사하는 삶 사는
함신미

“제 이야기가 저처럼 사는 여자들에게 희망이 되기를 바랍니다”
고등학교 때 가출, 20년 동안 서울과 일본을 오가며 매춘생활을 했던 함신미씨. 자신의 몸을 진흙탕에 팽개친 채 황폐한 삶을 살던 그가 소록도와 꽃동네 등에서 무료봉사활동을 한데 이어 지금은 무료 간병활동을 하며 과거와는 다른 극과 극의 삶을 살고 있다. 창녀에서 ‘성녀’로 제2의 인생을 사는 그의 파란만장한 인생역정.


사람은 누구나 인생의 굴곡을 겪는다. 하지만 이 여자처럼 극적인 인생전환을 한 사람이 얼마나 될까. 현재 대전지역에서 무료 간병인 활동을 하고 있는 함신미씨(45). 그는 과거 20년 동안 서울과 일본을 오가며 몸을 파는 여자였다. ‘내일은 없다’며 하루하루를 섹스와 술로 보내며 방탕하게 살던 그가 지금은 소록도와 꽃동네, 기타 소외된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무료봉사를 하고, 돌보는 사람 없는 환자를 위해 무료 간병활동을 하는 헌신적인 삶을 살고 있다. 창녀에서‘성녀’로 거듭난 자신의 삶을 <몸의 생>이란 책을 통해 솔직하게 고백한 그를 만났다.

책에 실린 긴 생머리가 예쁜 얼굴과는 달리 약속장소에 나타난 함씨는 상고머리를 털모자로 감추고 있었고, 며칠 동안 몸살을 심하게 앓았다더니 얼굴도 핼쑥해 보였다. 하지만 40대 중반이란 나이가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젊어보였다.

“과거에 머리를 혹사시켰나 봐요. 하긴 ‘그 일’을 할 때 하루에 두 번씩 미용실에 가서 머리에 독한 스프레이를 뿌려댔으니 두피가 성했겠어요. 면역성이 없어졌는지 몇 년 전부터 두피에 알레르기가 생기더라고요. 쉽게 낫지 않아 확실한 치료를 위해 두달 전 머리를 바싹 잘랐어요.”

아픈 곳은 머리뿐이 아니었다. 몸 상태가 안 좋을 때는 물만 마셔도 설사를 하는 등 췌장 기능이 많이 상한 상태. 20년 동안 독한 술을 너무 많이 마신데다, 여러 차례 자살기도를 하며 수면제를 과다복용했기 때문이다. 또한 동네 병원에서 항상 ‘큰 병원에 가보라’고 할 정도로 난소도 안 좋다. 직업이 직업이었다 보니 생리현상을 줄이기 위해 피임약을 과다하게 복용한 데 따른 후유증이다.

“몸이 안 좋아 요즘은 무료간병만 하고 있어요. 그동안 수입이 없어서 생활이 안돼 요즘은 아르바이트로 홍삼판매를 하고 있어요. 틈틈이 식당에 나가 잡일도 하고요. 홍삼을 먹어서인지 전보다는 많이 건강이 회복된 상태예요.”

그가 어쩌면 부끄러워 감추고 싶었을 수도 있는 자신의 과거를 책에 솔직하게 털어놓게 된 것도 재작년 몸이 많이 아프면서부터였다고 한다. 아프니까 자꾸 과거의 자신이 떠오르더라는 것. 과거를 잊고 새 삶을 살기 위해 옛날에 가지고 있던 물건은 물론 입던 옷가지까지 다 없애버렸지만 그럴수록 과거의 기억은 더욱 또렷해지기만 했다. 그래서 ‘기억에서 지울 수 없다면 제대로 바라보기 위해’ 글을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읽어주기를 바란 것은 아니예요. 지금도 어디선가 저와 같은 삶을 살며 고통스러워할 여자, 그리고 저와 같은 아픔을 가진 여성들에게 ‘우리 같은 사람도 그렇게 살 수 있구나’ 하는 위안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썼어요.”

“몸 팔아 번 돈으로 마음에 드는 남자들과 즐겨”

함신미씨가 어둠의 세계에 빠져든 것은 고등학교 2학년 때. 아버지의 외도와 이로 인한 어머니의 자살기도, 이혼 등으로 가정이 풍비박산 나자 함씨는 그런 집안이 싫어 가출을 했다. 집을 나온 그는 음악다방에서 일하다 자연스럽게 룸살롱 호스티스 생활을 시작했다. 처음엔 술 따르는 일만 하겠다고 생각했지만 2차를 나가는 동료들이 돈을 많이 버는 것을 보고 스무살 때부터는 그도 2차를 나가기 시작했다.

“어차피 이렇게 사는 인생, 즐길 수 있을 때 신나게 즐기자는 생각뿐이었어요. 그래서 몸팔아 번 돈의 대부분을 나이트클럽에 가서 다른 남자를 꼬셔서 다 썼어요. 돈 떨어지면 다시 몸을 팔고, 그런 생활의 연속이었죠.”

더 많은 돈을 받기 위해 보도방 생활도 하고, 일본인 기생관광이 유행할 때에는 그들을 상대로 몸을 파는 ‘다찌’ 생활도 했다. 그는 책에서 “황홀한 섹스가 가장 큰 즐거움. 섹스를 할 때 온몸의 세포가 하나하나 톡톡 터지듯 일어설 때의 황홀경에 취해 살았다. 일순간이나마 속내의 갈등과 고뇌까지도 불태워버리는 오르가슴, 그 맛에 취해 내게 주어진 소중한 삶을 허비했다”며 당시의 생활을 고백했다.

그는 한때 좋은 사람을 만나 결혼하기도 했다. 부잣집 아들이었는데, 함씨의 과거를 알면서도 청혼한 남자였다. 하지만 문제는 함씨 자신에게 있었다. 결혼하면서 혼수를 마련하기 위해 빚을 졌는데, 집에 들어앉으니 돈을 벌 수 없어 빚을 갚을 길이 없었다. 이자는 금세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뒤늦게 그 사실을 안 남편은 대신 갚아주겠다고 했지만 그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결국 그는 자살소동까지 벌이며 남편과 이혼을 했다.

다시 다찌 생활을 하던 그는 일본인 현지처 생활을 하다 일본에 가면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다는 말을 듣고 아예 일본으로 건너가 신주쿠에서 6년 동안 요정생활을 하기도 했다.

“다찌 생활을 할 때는 하루 평균 최소 3만엔을 벌었어요. 한달에 보름 정도 일했으니까 45만엔을 번셈인데, 그때 돈으로 2백50만원 정도 되었어요. 당시 대졸초임이 60만원 정도였으니 엄청 번 셈이죠.”

일본에서는 한달 평균 1백만엔 정도로 더 많은 돈을 벌었다. 하지만 그 돈을 모으지는 못했다. 미래에 대한 희망이나 목표가 없었기 때문이다.

“다시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그 돈을 낭비하지 않고 모으고 싶어요. 지금 물질적으로 도와주고 싶은 사람이 많은데 돈이 없어 도울 수가 없으니까 그게 제일 가슴이 아파요. 그때 그 돈을 허투루 쓰지 않았다면 하는 후회도 되고….”

술과 담배, 섹스에 찌들어 사는 삶이 함씨 역시 마냥 즐거운 것은 아니었다. 의미 없는 삶이 싫어 숱하게 자살기도를 하기도 했다. 그의 방에는 언제고 자살할 수 있도록 수면제 1백알과 독한 양주가 항상 마련되어 있을 정도였다. 동맥도 수차례 끊었다.

“만약 지금의 삶에 들어서지 않고 그 생활을 계속했더라면 전 지금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 거예요. 계속 습관처럼 자살을 시도했을 테고, 그러다보면 언젠가는 성공을 했을 테니까요.”

그에게 인생의 변화가 온 것은 94년이었다. 어느날 갑자기 몸이 으슬으슬 춥고 미열이 나기 시작했다. 가출 후 20여년 동안 몸을 함부로 굴리고 떠돌다보니 드디어 몸에 이상이 온 것이었다. 병원에서는 장티푸스인 것 같다며 큰 병원으로 이송시켰지만 장티푸스는 아니었다. 병명을 알기 위해 모든 검사를 다 해보아도 정확한 진단이 나오지 않았고, 그렇다고 병세가 호전될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그냥 이렇게 병명도 모른 채 죽나보다 하는 생각이 들 때였다.

“입원한 지 1주일쯤 지났을까, 화장실에 가다가 혼절을 했어요. 그때 꿈속에서 환한 빚이 머리 위로 가득하더라고요. 난생 처음 기도를 했어요. 1년만 더 살게 해달라고 식은땀을 흘리며 간절히 매달렸죠.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요. 그런데 그 일이 있고 나서 며칠이 지나자 병이 씻은 듯 나았어요.”

그후 그는 우연히 청주에 있는 충북재활원에서 자원봉사활동을 할 기회가 있었다. 처음엔 원생들 몸에서 풍겨오는 똥 냄새와 침 냄새가 역겨워 참기 힘들었다. 그런데 그때 그의 귀에 들려오는 음성이 있었다. ‘그들의 똥이 너보다 깨끗하다.’

“그들에 비하면 저는 쓰레기였어요. 쓰레기 같은 삶을 살던 제가 남을 도울 수 있다는 게 너무 신기했어요. 단 한번도 남을 위해 살아본 적이 없으니까요. 이들의 재활을 도우며 난생 처음 삶의 보람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어요.”

“남에게 뭔가 해줄 수 있다는 게 기뻐”

그때부터 그는 충북재활원과 춘천 나눔의집, 화성 사랑의집을 돌며 봉사활동을 시작했다. 병원에서 쓰러졌을 때 ‘1년만 더 살게 해달라’던 기도와 달리 그는 1년이 지나도 살아있었다. 봉사의 삶을 사는 게 신의 뜻이라 생각한 함씨는 96년 여름부터는 소록도에 들어가 음성 꽃동네와 번갈아가며 봉사활동을 했다.

“저는 장기 자원봉사자라 주로 할머니 할아버지들 잔심부름을 했는데, 그런 것만으로도 하루가 훌쩍 가곤 했어요. 그래서 몸이 특별히 힘들지는 않았어요.”

환자들을 목욕시키는 것도 그의 몫이었다. 한센병 환자들은 특히 화상을 조심해야 한다. 그들은 피부에 감각이 없어 뜨거운 물이나 불에 데어도 통증을 느끼지 못해 상처가 커지기 때문이다. 또한 시각장애를 가지고 있으면서 팔다리도 성하지 않은 환자들이 많아 자잘하게 보살펴야할 일이 많았다.

함씨는 소록도에 들어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환자들이 며느리처럼 딸처럼 편하게 대할 정도로 그들에게 정성을 쏟았다. 명절에 외로워하는 환자들의 기분전환을 위해 1천장의 부침개를 부치기도 하고, 양성환자들의 대소변을 받아내기도 했다. 누가 시켜서 한 일이 아니었다. 평생 남자들에게 기생충처럼 붙어살던 그가 남에게 뭔가 해줄 수 있다는 게 행복했기 때문이다.

“신기한 것은 환자들이 앞이 보이지 않으면서도 고추가 파란 고추인지, 빨간 고추인지 알아맞히는 거예요. 지폐가 천원짜리인지 오천원짜리인지도 알고요.”

그에게 더 놀라운 것은 환자들의 태도였다.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고, 손이 문드러져 무엇을 집을 수도 없고, 눈이 멀어 앞을 보지 못하면서도 그들의 입엔 “감사하다”는 말이 배어 있었다. 그들을 보며 함씨는 “나는 무엇인가” 하는 반성을 많이 했다고 한다.

환자들에게 무엇 하나라도 더 해주려는 그의 마음이 오히려 실수로 나타날 때도 있었다. 하루는 어느 할머니의 방을 보니까 방에 휴지가 하나도 없었다. 그래서 휴지를 사서 넣어놓았는데 며칠 후 가보니 휴지가 포장도 뜯어지지 않은 채 그대로 있었다. 알고 보니 그 할머니는 몽당손이어서 휴지를 손으로 잡을 수가 없어, 신문지를 사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그의 짧은 생각들이 때로는 다른 자원봉사자와 직원들에게도 부담이 되었다. 예를 들어 환자가 사탕을 먹고 싶다고 하면 당장 가져다주고 싶은 게 그의 마음이었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정해진 규율이 깨지면 직원의 입장에서는 관리하기가 힘들어진다. 그래서 갈등을 빚기도 했다고 한다.

소록도 이야기를 하던 그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고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평생 그들과 함께 하겠다던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2년 만에 체력의 한계를 느껴 그곳을 떠났기 때문이다.

“다시 돌아가야죠. 그런데 지금 당장은 자신이 없어요. 몸이 완쾌되고 어떤 계기가 주어지면 다시 가야죠. 그곳에 있는 사람들은 도움의 손길을 필요로 하니까요.”

책에서 그는 “과거엔 섹스가 삶의 의미였을 정도”라고 했다. 또한 술에 중독되어 살았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이 두 가지를 끊고 산다는 게 힘들지 않을까 하는 궁금증이 들었다. 이에 대해 그는 “전혀 힘들지 않다”고 자신 있게 말했다. 그러면서 “이동할 때 편하게 택시를 타던 버릇은 고치지 못한다”며 웃었다.

“주위에서 결혼할 생각이 없냐고 묻는데 그럴 생각도 없어요. 남은 평생 주어진 인생을 저보다는 남을 위해 바치고 싶어요. 그뿐이에요.”

그는 지금 강아지 한 마리를 딸 삼아 함께 살고 있다고 한다. 쓰레기통에 버려져 있는 것이 자신의 처지와 비슷한 것 같아 외면할 수 없어 데리고 온 강아지라고 했다. 그렇게 같은 처지의 사람에게 위안이 되는 게 그의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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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의 창녀에서 소록도의 성녀가 된 함신미 성도의 인생이야기

“벌레처럼 살아온 인생이었지만, 하루를 살더라도 어둠 속 빛을 내는 개똥벌레가 되겠습니다”

고2때부터 룸살롱 접대부 생활 시작, 19년 동안 일본인 관광객을 위한 매춘부· 일본인 현지처 등을 전전해온 여성이 있다. 함신미, 숱한 남자에게 몸을 내맡겼던 그녀는 서른 여덟이 되던 해 다시 태어난다. 의미도 없는 쓰레기 같은 삶을 청산하고 사람답게 사는 길을 택한다. 이후 7년 동안 소록도와 꽃동네 등에서 봉사활동을 해오고 있는 그녀가 최근 자전 에세이 '몸의 생'(이야기 펴냄)을 펴냈다. 이제야 입을 열어 밝히는 44년 (현재 49세) 인생, 그 절절한 육성 고백.

나는 창녀였다. 젊고 잘생긴 남자와의 황홀한 섹스를 생의 가장 큰 즐거움이자 기쁨으로 알고 살았다. 출세와 돈을 위해 땀 흘리고 노력하는 인간의 모든 노고가 결국 그것을 위한 게 아니겠냐고 믿었다. 온몸을 휘감으며 타오르는 정욕의 불, 그 불길에 온몸의 세포 하나 하나가 툭툭 터지듯 눈을 뜨며 일어설 때의 그 황홀경, 일순간이나마 속내의 갈등과 고뇌까지도 불태워버리는 오르가슴의 불꽃, 그 맛에 취해 나는 내게 주어진 소중한 생을 방기하고 모독했다. 내 생은 모독이었다. 지난날의 내 생은 나 자신에 대한 완전한 모독이었다.

가출
안양에서 태어나, 가출 전까지 그곳에서 살았다. 오빠와 남동생 사이에서 태어난 외동딸이었지만, 귀여움을 받아본 기억이 없다. 안양에서 꽤 부자로 알려진 아버지였지만 처자식한테 쓰는 돈은 덜덜 떨며 아까워했다. 여섯 채의 집에서 매달 나오는 월세가 만만치 않았음에도 등록금조차 제때 주지 않았다. 심지어 병원에서 주사 맞는 비용이 아까워서 혼자 장롱 큰 거울 앞에서 바지를 벗고 주사를 놓을 정도였다. 그런 분이 도박은 좋아했고 바람도 자주 피웠다.


어린 시절은 아버지의 호통소리와 어머니의 비명과 앙칼진 울부짖음의 기억들로 얼룩져 있다. 중3 때 엄마의 음독과 이혼으로 집안은 쑥대밭이 되었다. 위자료 한 푼 못 받고 이혼한 엄마는 뇌졸중으로 쓰러져 중풍환자가 되었다. 고1 때였다. 그때부터 나는 아버지에게 대놓고 반항하기 시작했다. 학교도 가기 싫었고, 집안일 하는 것도 짜증이 났고, 학교 성적도 좋지 않아 점점 삐뚤어져만 갔다. 결국 고2에 올라가던 그 해 4월, 아버지 몰래 학교를 그만두고 가출했다.

호스티스 입문
겁도 없이 여관방을 얻어놓고 며칠을 빈둥거리며, 돈을 어떻게 벌지 고민했다. 그 여관 앞방에 나처럼 장기 투숙하는 여자가 있었는데, 그녀가 내 호스티스 인생을 열어준 민정이었다. 우리는 방을 함께 쓰면서 돈이 없을 때면 룸살롱에 나갔다.
술이 몇 번 돌자, 내 파트너가 나를 잡아당겼다.
“이리 좀 가까이 와라. 내가 너 잡아 먹냐? 왜 자꾸 도망가?”
술자리가 끝날 때까지 내 젖가슴을 주무르던 손님은 손에 팁을 쥐어주었다. 난생 처음 쉽게 돈을 번 날이었다.

몸을 팔다
2차를 나가는 것에 점점 익숙해져 갔다. 낯선 남자와 별 감흥도 없는 섹스를 할 때마다 나는 돈만 생각했다. 아버지가 평생 벌벌 떨던 그 돈, 그걸 신나게 써보고 싶었다. 돈을 받고 몸을 판다는 것에 대한 자의식 따위는 없었다. 양심에 걸리지 않느냐는 질문을 받을 때면 코웃음이 나왔다. 몸을 팔아서 번 돈으로 친구와 함께 나이트클럽으로 직행했다. 몇 분만 눈 질끈 감고 돈을 받으면, 젊고 멋진 사내들과 신나게 놀 수 있는 나이트가 기다리고 있었다. 어차피 이렇게 사는 인생, 신나게 즐기자. 즐길 수 있을 때 즐기자는 게 내 생각이었다.


스무살이 되던 해 거동이 불편했던 엄마는 혼자 요강에 앉아 소변을 보다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그날 밤 자정 무렵, 엄마는 검붉은 피를 토하고 이승에서의 마지막 숨을 놓았다. 함께 지내던 민정과 은희 모두 결혼을 한다며 나를 떠나갔다. 화류계 우정은 바람 같은 것이다. 그 세계를 떠난 사람들은 모든 걸 잊고 살아야 하기에 그 전에 알던 사람과 다시는 만나지 않는다. 외로웠지만, 호스티스 생활을 계속했다.

보도 요정에서 일본 관광객 매춘부로
화류계 인생으로는 환갑에 가깝다는 스물 여섯, 친구와 함께 보도 요정이 되었다. 좀더 어리고 예뻤더라면, 당시 강남에 우후죽순처럼 들어섰던 고급 룸살롱에 진출했을 텐데, 어느새 나도 별 볼일 없는 직업여성으로 전락하고 있었다. 보도방은 아가씨들을 유흥업소에 공급하는 곳이었다. 요정을 찾는 점잖은 신사들은 룸살롱보다 더 심했다. 신고식을 요구하면 가슴을 보여주는데, 진짜 신고식을 하라고 윽박지르면 하는 수없이 팬티를 벗어야 했다. 2차가 거의 없어 큰돈을 기대할 수 없는 보도 요정 일을 접고, 다찌 생활을 시작했다. 다찌는 일본인 관광객들을 상대로 매매춘을 하는 콜걸을 말한다. 화대 3만 엔을 받으면 포주와 가이드의 몫을 뺀 내 몫은 1만 엔이었다. 팁은 모두 내 몫이기에 화장실에 가서 콘돔 속에 엔화를 넣은 뒤, 그걸 질 속에 깊이 숨겼다. 호텔 측에 붙잡혀 경찰에 넘겨지면 인간순화 교육을 받으러 교도소에 갈 수도 있기에 엔화를 숨겨야 했던 것이다.

결혼과 이혼
동민은 나보다 한 살 아래였다. 친구 은선이가 나이트클럽에서 만난 남자의 소개로 만난 사이였다. 음악을 하는 이였는데, 웬만큼 사는 부모 밑에서 고생이라고는 해본 적이 없는 남자였다. 몇 차례 만나면서 포근함을 느꼈다. 그는 내가 다찌라는 걸 알고 있었음에도 내게 프로포즈를 해왔다. 가슴이 뛰고 땀이 솟았다. 동민 친구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결혼했다. 그의 부모는 내 과거를 전혀 알지 못했다. 한동안 행복했던 우리의 결혼생활은 몇 달 가지 못했다. 혼수를 장만하기 위해 호스티스들을 상대로 돈놀이하는 아줌마를 찾아가 돈을 빌렸는데 그게 화근이었다. 시댁에서 매달 받는 생활비로는 비싼 이자를 감당할 수 없었고, 하루하루 이자 독촉을 받자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나는 그에게 이혼을 요구했고 온갖 신경질과 악다구니를 퍼부어 댔다. 견디다 못한 그는 집을 나갔고 나는 모아둔 수면제를 들고 집을 나와 면도칼과 소주 한 병을 사서 물왕리 저수지로 향했다. 택시기사의 신고 때문에 자살기도는 실패했다. 그렇게 우리는 헤어졌다. 결혼한 지 10개월 만이었다.

일본인 현지처로
동민과 헤어져 다시 다찌 생활을 한 지 8개월쯤 지났을 무렵 요정의 마담 소개로 한 일본인을 만났다. 50세 된 사업가로 상당한 부자였다. 나흘을 함께 보낸 그는 교토에 가자마자 내게 전화했다. 뉴욕에서도 매일 전화를 하더니, 일을 그만두게 했다. 그가 시키는 대로 은행에 가서 계좌를 만들고 보내온 돈을 찾아 한남동의 고급아파트에 세를 들었다. 그는 다이아몬드 귀고리와 목걸이 세트를 선물했다. 그때가 잠시나마 마음의 안정을 찾고 느긋하게 지낸 시기였다.


하지만 조금씩 외로웠다. 미친 바람처럼 떠돌던 몸이 한 남자를 기다리며 혼자 텅 빈 아파트에 갇혔으니 그럴 만도 했다.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영준이라는 훤칠한 청년과 관계를 갖게 되면서 스즈키에게 전화가 올 때마다 몸이 아파 집에 다녀오겠다는 핑계를 늘어놓았다. 낌새를 눈치챈 스즈키는 결혼을 얘기했지만, 그와의 안정된 생활과 풍족한 여유를 포기하고 불꽃처럼 사르는 섹스를 선택했다. 1년 반 동안 지속된 생활비 송금이 끊어졌다. '그래, 떠나는 거다. 아무도 나를 모르는 땅에 가서 막 구르는 거야. 천지사방에 몸을 굴리며 살다가 죽자. 누가 슬퍼하고 누가 아쉬워하겠어.' 나는 영준과의 관계를 청산하고 일본행 비행기에 서른두 살의 피곤한 몸을 실었다.

입원
서른일곱의 2월, 첫 가출 이후 19년을 구르고 떠돌며 피폐해진 내 몸에 병이 찾아왔다. 미열에 시달리고 우울했다. 온갖 검사를 다 해봤지만 정확한 진단이 나오지 않았다. 입원한 지 일주일쯤 되었을 때였다. 화장실에 갔을 때, 갑자기 눈앞이 노랗고 극심한 어지럼증이 있었다. 화장실 바닥에 쓰러졌다. 사지를 떨며 몸부림을 쳤다. 나도 모르게 하나님을 찾았다. 용서해 달라고, 1년만 더 살게 해달라고 울며 빌었다. 의사는 신경성이라며 집에서 푹 쉬라는 진단을 내렸다. 하지만 나는 간헐적으로 열에 시달리면서 약봉지를 달고 살았다. 특히 생리가 끝날 때까지 진통제를 매일 10알 이상씩 삼켜야 겨우 견딜 수 있었다.

순례자를 만난 것도 그 무렵이었다. 당시 장위동에 살고 있었는데, 진통제를 사려고 약국에 가고 있을 때였다. 몹시 지저분하고 초라한 행색의 중년 남자가 만취해 길에 쓰러져 있었다.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한 남자가 부드러운 음성으로 중년남자를 부축했다. 이후 식당에서도 남루한 할아버지를 돕는 그를 만났다. 그와 대화를 하면서 내 인생은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다.

벌레처럼 산 인생, 이제 개똥벌레라도 되자
성녀 로사의 생애와 성 프란시스코의 전기를 읽었다. 프란시스코 앞에서, 아름다운 귀족 소녀 글라라가 긴 금발을 다 잘라버리고 화려하게 수놓인 값비싼 옷을 벗고 남루한 옷으로 갈아입는 대목, “앞으로는 가난한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며 살겠습니다”라며 신께 도움을 청하는 장면에서는 그만 목이 메어 더 이상 책을 읽을 수가 없었다. 엎드린 채 한동안 가슴을 치며 오열을 터뜨렸다. 나는 결심했다.


'그래, 삶의 의미와 이유도 모르는 채 쓰레기처럼 비참하게 사느니, 하루를 살더라도 사람답게 한번 살다가 죽자. 그래! 이제까지 기생충처럼 남자에 달라붙어 돈이나 긁어대며 온갖 추잡한 짓을 다 했지만, 하루를 살더라도 어둠 속에서 눈곱만한 빛이라도 내는 개똥벌레처럼 살자. 벌레처럼 살아온 인생, 개똥벌레라도 되자.'

소록도, 소록도
삶을 바꾸기로 결심하면서,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청주에 작은 지하 방을 얻어 이사했다. 무의탁 노인들의 간병봉사를 위해 호스피스 교육을 받았다. 그 후 청주의 충북 재활원, 춘천 '나눔의 동산', 화성군 '사랑의 집'을 찾았다. 모범택시만 타고 다니며 비싼 옷만 사 입던 생활태도도 바꾸었다. 버스와 지하철을 탔다. 쉽게 벌어 쉽게 쓰는 게 몸에 밴 나에게는 그것조차도 쉽지 않았다. 술과 담배를 끊었고 채식 위주로 식생활도 바꾸었다.
섬김의 삶을 살자고 마음먹고 1년 6개월 정도를 지내다 보니, 수중의 돈이 거의 떨어졌다.

 

시설에 들어가 본격적인 섬김의 삶을 살고 싶었다. 사진도 모두 태우고 살림살이를 모조리 정리했다. 가방 하나만을 들고 소록도로 향했다. 나환자들 중 중증 환자들만 입원 생활을 한다는 소록도 병원을 둘러보았다. 너무나 끔찍했다. 팔다리 없이 몸뚱이만 있는 사람, 귀와 코는 없고 그곳에 구멍만 있는 사람…. 어떤 병실은 문을 열자 지린내가 코를 찔렀다. 요강이 엎어져 바닥이 흥건했다. 대소변을 받아 버리고 엎질러진 요강을 치우고 바닥을 깨끗하게 닦았다.

점심시간에 식당에서 밥을 날라다 먹였다. 여름이었는데, 떼를 지은 파리들은 국그릇에 빠지기 일쑤였고, 시력을 잃은 환자들의 눈두덩에 몇 마리씩 달라붙어 진물을 빨고 있었다. 감각을 잃은 환자들은 파리가 달라붙어도 느끼지 못했고, 국그릇에 빠진 파리를 보지 못해 그냥 먹기도 했다. 그 날 밤, 아무도 없는 봉사자 숙소에 자리를 펴고 누워 밤새 울었다.


밥 수레를 끌고 다니면서 밥을 나르고, 먹여주고, 방을 청소해주고, 목욕도 시켜주었다. 나환자들은 피부가 약하고 자꾸 문드러져가기 때문에 몸을 세심하게 밀어야 했다. 행여 상처라도 나면 곧 덧나고 염증이 생기기 때문이었다. 나환자 할아버지, 할머니들과도 친해졌다. 젖먹이 아들과 남편을 두고 스물넷에 소록도에 들어와 돼지를 키우며 평생 모은 돈을 아들에게 모두 주며 행복해하는 할머니를 보고 가슴이 메었다. 소록도에 살면서부터 한번도 아프지 않았다.


한번은 숙소에서 아침을 먹고 남은 밥을 김에 돌돌 말아 주머니에 집어넣고 나간 적이 있었다. 점심 때 환자들의 밥을 날라주고 공원 노송 곁 벤치에 앉았다. 차게 식은 김밥을 꺼내 우적우적 입에 넣었다. 단무지라도 좀 싸올 걸, 하는 생각을 하다 언젠가 일본인 마루야마와 함께 갔던 정통 프랑스 레스토랑의 음식이 떠올랐다.
'창자에 달라붙은 기생충처럼, 남자에 달라붙어 살던 내가 누군가에게 조금이라도 필요한 사람이 되었구나.'
김밥이 얼마나 고맙고 기쁜지 울컥 눈물이 솟았다.

떡 장사로, 파출부로, 라면공장으로
아버지가 위암으로 세상을 떠난 후 나는 소록도를 떠났다. 잠시 쉬고 싶었고 또 재충전할 시간도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 후 꽃동네에도 잠시 있었지만, 건강이 급속히 안 좋아져서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매달 생활비를 보내주던 마루야마가 사정이 좋지 않다는 소식을 듣고 더 이상 돈을 받지 않았다. 막막했다. 극심한 빈곤에 시달렸다. 섬김의 삶을 오래 살기 위해서라도 육신을 움직여 생활을 꾸려야 했다.


떡장사를 시작했다. 바퀴 달린 떡판에 찹쌀떡을 싣고 떡집 주인이 정해준 장소에서 떡을 팔았다. 자리를 비운 사이 손님이 왔다 갈까봐 점심도 거르고 화장실에 가는 것도 참았다. 돈 벌기가 이렇게 어려울 줄 사십이 넘은 나이에 처음 알았다. 그 날 저녁, 내 앞에 놓인 따뜻한 밥 한 그릇이 그렇게 소담스럽고 고마울 수가 없었다.

이후 파출부, 식당 주방 보조 등을 전전했지만 몸이 아파 오래가지 못했다. 굳게 마음먹고 용역 회사를 찾아가 라면 공장에 취직했다. 작업반장은 나를 라인작업 중 가장 끝마무리 단계인 컵 라면을 박스에 담는 일을 시켰다. 라인이 돌면서 컵 라면이 우르르 밀려왔다. 정신 없이 두 손으로 집어서, 날짜를 확인해가며 박스에 담았다. 초보자인 내 앞에 컵 라면들이 밑바닥으로 뒹굴며 떨어졌다. 작업능률을 올리기 위해 장갑을 벗었다가 컵 라면의 뜨거운 열기에 양쪽 엄지손가락에 화상을 입었다. 화장실 변기에 쭈그리고 앉아 쓰라린 손가락에 침을 바르면서 바보같이 또 눈물을 흘렸다.


옆에서 같이 일하던 아기 엄마는 나의 손을 보더니 “아줌마! 몇 꺼풀 익었다 나았다 해야 굳은살이 생겨요. 나는 손톱도 두 번이나 빠졌었어요”라고 말했다. 하루 일당 2만 원, 한 달에 50여 만 원을 벌려고 그렇게 고생하는 아줌마들이 존경스러웠다. 몸 팔며 살 때 하룻밤 즐기며 벌었던 돈을, 죽어라 열흘을 일해도 손에 쥘 수 없었다. 하지만 이 돈은 얼마나 귀한가. 일해서 먹는 밥은 얼마나 정직한가. 얼마 전부터 건강이 허락할 때면 간병 일도 하고, 1년 전부터는 홍삼 정관장을 판매하는 영업사원으로 뛰기 시작했다. 틈틈이 식당 아르바이트도 한다. 건강이 좋아지고 경제사정이 허락한다면, 힘겨운 삶을 살아가는 지극히 작은 이들을 섬기며 살고 싶다.

글을 쓰면서…
글을 쓰면서 많이 울었다. '어떻게 이렇게 살았을까' 하는 생각에 나 자신도 믿어지지 않았다. 어렸을 때부터 나는 뭐든지 부정적이었다. 행복한 사람을 봐도 분명 그 이면에는 불행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수많은 남자들을 만났지만 그중 진정으로 사랑했던 사람은 한 명도 없다. 어느 누구에게도 마음을 줘본 적이 없다. 책이 나오기 전 많은 걱정을 했다. 나를 이끈 순례자, 소록도의 인연으로 맺어진 남원의 양어머니, 봉사하면서 만난 많은 사람들이 만약 나의 죄 많은 과거를 알게 된다면 정말 충격을 받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그럼에도 더 이상 가면을 쓰고 살고싶지 않아 용기를 낸다. 이 세상에서 나처럼 비참하고 고통 속에 빠져 있는 한 여성이라도 이 책을 읽고 느끼는 바가 있다면 더 이상 바랄 게 없다. 이미 나를 통해 기적은 일어났으니까.


댓글 '1'

peter

2010.03.21 06:21:55

자매님, 사랑합니다, 우리 주님께서 자매님과 늘 동행하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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