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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창38:12-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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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이정원 목사 |
참고 : | 참사랑교회 http://charmjoun.net |
2005·04·02
지난 고난주간을 보내면서 주님의 고난에 대해서 깊이 묵상해보셨습니까? 왜 주님께서 그토록 참혹한 고난을 당하셔야만 했습니까? 올바른 대답은 오직 하나입니다. 그것은 나의 죄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내 안에 있는 죄성이 얼마나 뿌리 깊고 강하며, 그곳으로부터 온갖 죄가 얼마나 끊임없이 올라오고 있습니까? 우리에게는 또 부정하고 추하고 모난 것들, 나태하고 불충한 것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런 것들을 통감해보지 못한 사람은 주님의 고난의 의미도 제대로 깨닫기 어렵습니다. 우리는 죄로 인하여 도저히 소망이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지금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십시오. 이 모든 죄악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저주와 진노와 영원한 형벌을 절대로 면할 수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마땅히 우리가 당해야 할 그 모든 고난을 대신 당하심으로 이러한 우리를 구원해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우리의 죄와 수치와 멸망을 해결하고 의와 영광과 영원한 축복을 가져다 준 것입니다.
본문에는 유다의 실패와 수치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유다는 이스라엘 12지파 중에서 가장 주도적인 지파입니다. 유다 지파에서 왕이 나왔고, 하나님의 메시아께서 유다 지파를 통해 오셨습니다. 그런데 본문은 이러한 유다 지파의 수치를 파헤치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은혜가 죄악 가운데서도 강하게 역사하여 택하신 백성을 구원하시고 붙드신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 진리는 변함없이 적용됩니다. 우리는 죄인입니다. 우리는 죄 때문에 아무 소망이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죄악된 우리 가운데서 여전히 역사하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얼마나 귀하고 감사한 일입니까? 우리는 범죄하고 실패하며 넘어지지만 주님의 십자가 때문에 결국 승리하게 될 것입니다.
언약 공동체를 떠난 유다의 비극
요셉이 팔려간 후 사랑하는 아들이 죽은 줄로 알았던 야곱은 말할 수 없는 슬픔과 실의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그러한 아버지의 모습을 보면서 요셉을 팔아버리자고 맨 먼저 제의했던 유다는 너무나도 괴롭고 죄책감에 시달렸습니다. 유다는 또 형제들에게도 회의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세겜 족속들을 학살한 일과 맏형 르우벤이 아버지의 첩과 통간한 일, 그밖에 수많은 죄악들 때문이었습니다. 죄책감에 시달리며 형제들에게 회의를 느낀 유다는 형제들을 떠나기로 했습니다. 유다는 아버지의 집을 떠나 가나안 사람들에게로 가서 살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집을 떠난 유다는 큰 불행과 비극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유다의 장자 엘이 악함을 보시고 죽이셨습니다. 유다는 차자 오난에게 형수에게로 들어가 형을 위해 아들을 낳게 했습니다. 그러나 오난은 형수에게 아들을 낳게 하지 않으려고 비겁한 행동을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오난도 죽이셨습니다. 이 모든 불행은 유다가 아버지의 집을 떠난 결과였습니다. 당시 야곱의 집은 교회, 즉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언약을 주시고 축복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비록 여전히 죄인이며 잘못된 일들이 많이 있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여전히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러나 유다가 언약 공동체를 떠나갔을 때 그는 더 이상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와 보호를 받을 수 없게 되고 말았습니다. 언약 공동체를 떠나가자 유다의 가정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죄에 빠져갔으며, 더구나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와 보호도 받을 수 없게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 교회에는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와 보호가 있습니다. 물론 교회에도 문제가 많습니다. 남모르는 죄와 시기와 상처 받는 일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에는 십자가의 보혈이 흐르고 있으며 성령께서 역사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있고 약속하신 축복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 안에서 이 모든 은혜와 축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일단 교회를 떠나가면 이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게 됩니다. 이것을 모르는 사람들은 함부로 교회를 떠나갑니다. 그러나 그것이 얼마나 무섭고 불행한 일입니까? 무슨 일이 있어도 주님께서 피로 값 주시고 사신 교회,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와 보호가 있는 교회를 떠나지 마십시오. 그리고 교회를 더욱 사랑하며, 이 교회를 통하여 하나님의 일에 충성을 다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계속되는 유다의 실패
두 아들을 잃은 후 유다는 아내마저 잃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유다는 그의 친구 아둘람 사람 히라와 함께 양털을 깎으러 딤나로 가게 되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다말은 과부의 옷 대신 창녀의 옷을 입고 면박으로 얼굴을 가리고 길목에 앉아 시아버지 유다가 지나가기를 기다렸습니다. 다말이 이렇게 한 것은 시아버지를 사랑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유다는 셋째 아들 셀라가 장성하면 그를 다말에게 주기로 했는데 셀라마저 죽을까 두려워서 주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다말은 시아버지를 통해서라도 하나님 백성의 씨를 얻기로 작정했던 것입니다.
다말의 예상대로 유다는 그 길을 지나가다가 창녀를 보고 동침하기를 청했습니다. 창녀로 변장한 다말은 대가를 요구했습니다. 그런데 유다에게는 당장 가진 것이 없었습니다. 고맙게도 이 창녀는 외상도 가능하다고 했습니다. 그 대신 약조물을 요구했는데, 유다는 나중에 염소 새끼 한 마리를 주기로 하고 우선 약조물로 자기의 도장과 끈과 지팡이를 주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다말은 시아버지의 아이를 잉태하게 되었습니다. 목적을 달성한 다말은 창녀의 옷을 벗고 다시 과부의 옷을 입었습니다.
얼마 후 유다는 자기 친구 히라에게 부탁하여 그 창녀를 찾아가 염소 새끼를 주고 약조물을 찾아오게 했습니다. 그런데 전에 그 곳에서 보았던 창녀를 도무지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동네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그곳에는 본래 창녀가 없다고 했습니다. 유다는 친구에게 혹시 이 말이 퍼지면 수치스러우니 더 이상 그 창녀를 찾지 말자고 했습니다.
그런 일이 있은 지 한 석 달쯤 지났을 때 유다에게 자기의 며느리 다말이 행음하여 잉태했다는 소식이 들렸습니다. 유다는 당장에 다말을 끌어내어 불살라 죽이라고 명령했습니다. 사람들이 다말을 불태워 죽이려고 끌고 나갈 때 다말은 유다가 주었던 끈과 도장과 지팡이를 내보이면서 그 물건의 임자로 말미암아 잉태했노라고 말했습니다. 그 때서야 유다는 자기가 딤나 길에서 만났던 창녀가 바로 다말이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사실을 시인하고 다말을 죽이지 못하게 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다말은 시아버지 유다를 통하여 쌍둥이 아들을 낳게 되었습니다.
아버지의 집을 떠난 후 유다는 더욱 죄에 빠져갔으며, 그의 가정에는 계속해서 큰 비극과 수치가 닥쳐왔습니다. 이 일을 당하고 나서 유다는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언약의 공동체를 떠나 죄에 빠져가는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더 이상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아버지 야곱의 집으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그가 언약의 공동체로 복귀하자 하나님께서는 그를 다시 받아 주셨습니다. 그리고 변함없는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다말이 원했던 것
우리는 다말이 창녀로 변장하고 시아버지와 관계를 맺어 아이를 낳으려 한 일을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도대체 다말은 왜 이런 일을 저질렀을까요? 다말이 그렇게 한 것은 시아버지를 사랑했기 때문도 아니었으며, 시아버지에게 복수하기 위해서도 아니었습니다. 다말에게는 오직 한 가지 목적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백성의 씨를 갖는 것이었습니다. 14절이 이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가 그 과부의 의복을 벗고 면박으로 얼굴을 가리고 몸을 휩싸고 딤나 길 곁 에나임 문에 앉으니 이는 셀라가 장성함을 보았어도 자기를 그의 아내로 주지 않음을 인함이라”
다말은 그의 남편 엘이 죽었을 때 얼마든지 재혼하여 행복하게 살 길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당시 가나안 사회에서는 모두 그렇게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말은 유다의 집안에 들어온 후 하나님의 축복의 비밀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집안의 씨를 낳아 하나님 백성에 편입되기를 원했습니다. 남편이 죽었을 때 시아버지 유다가 차자 오난을 통하여 아들을 낳게 해주려고 하자 다말은 너무나도 고맙고 기뻤습니다. 그러나 시동생 오난도 죽고 말았습니다. 이제 수절하면서 어린 시동생 셀라가 장성하기를 기다렸는데 시아버지 유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다말은 중대한 결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한 여자가 이렇게까지 자식을 구걸하다시피 하는 것은 그야말로 대단히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습니다. 더구나 시아버지와 관계를 맺어서까지 자식을 갖는다는 것은 얼마나 수치스럽고 저주받을 일입니까? 그러나 자식을 낳지 못한 채 과부가 된 이방 여인은 이스라엘 백성이 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말은 그 어떤 수치와 굴욕을 당한다 하더라도 반드시 이스라엘의 씨를 갖고야 말겠다고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런 일을 저지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다말은 결국 약속의 씨를 얻게 되었습니다. 놀라운 것은 이렇게 해서 다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 오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유다의 회개
유다는 며느리 다말이 행음하여 잉태했다는 소식을 듣고 노하여 그녀를 불살라 죽이라고 명령했습니다. “석달 쯤 후에 혹이 유다에게 고하여 가로되 네 며느리 다말이 행음하였고 그 행음함을 인하여 잉태하였느니라 유다가 가로되 그를 끌어내어 불사르라”(24절) 물론 유다는 전에 딤나에서 동침했던 창녀가 다말이었다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비록 자신이 셋째 아들 셀라를 다말에게 주기 싫어했지만, 어쨌든 셀라를 다말에게 주기로 한 상태였습니다. 그것은 다말과 셀라가 정혼관계에 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유다는 노하여 다말을 불살라 죽이라고 명령했던 것입니다. 당시 족장에게는 그렇게 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습니다.
다말은 끌려 나가면서 유다의 지팡이와 도장과 끈을 내보였습니다. 그리고 이 물건들의 임자로 인하여 잉태했다고 증언했습니다. “여인이 끌려 나갈 때에 보내어 시부에게 이르되 이 물건 임자로 인하여 잉태하였나이다 청컨대 보소서 이 도장과 그 끈과 지팡이가 뉘 것이니이까 한지라”(25절) 유다는 그 증거물들을 보고서 자기가 다말보다 훨씬 더 큰 죄를 지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죄를 인정했습니다. “유다가 그것들을 알아보고 가로되 그는 나보다 옳도다 내가 그를 내 아들 셀라에게 주지 아니하였음이로다 하고 다시는 그를 가까이 하지 아니하였더라”(26절) 다말이 창녀로 변장하고 시아버지를 유혹하여 아이를 잉태한 것은 죽어 마땅한 죄였습니다. 그러나 유다는 자기는 더 큰 죄를 범했다는 것을 깨닫고 인정했던 것입니다.
이 부분이 유다가 회개하고 돌이키는 장면입니다. 그리고 그 회개로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받게 되었습니다. 만일 유다가 양심을 속이고 다말이 제시하는 증거들을 무시했더라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사람들은 다말의 말보다 유다의 말을 더 믿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다말은 태중에 있는 아이와 함께 죽임을 당했을 것입니다. 만일 그렇게 했더라면 하나님께서 유다를 가만히 놔두셨겠습니까? 유다도 죽임을 당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유다가 자기의 죄를 고백하고 회개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를 용서해주시고 구원해주셨습니다. 그래서 다말과 아이와 유다 자신이 모두 살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연약하여 범죄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회개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시고 용서하시며 은혜를 회복시켜주십니다.
다말과 마리아
다말은 쌍둥이 아들을 낳았습니다. “임산하여 보니 쌍태라 해산할 때에 손이 나오는지라 산파가 가로되 이는 먼저 나온 자라 하고 홍사를 가져 그 손에 메었더니 그 손을 도로 들이며 그 형제가 나오는지라 산파가 가로되 어찌하여 터치고 나오느냐 한고로 그 이름을 베레스라 불렀고 그 형제 곧 손에 홍사 있는 자가 뒤에 나오니 그 이름을 세라라 불렀더라”(27-30절) 이 쌍둥이 아들은 하나님께서 유다의 죽은 두 아들을 대신해서 주신 것이었습니다.
다말은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도저히 이스라엘의 씨를 가질 수 없었습니다. 남편이 죽었을 뿐만 아니라 시동생까지 죽었으며, 셋째 아들은 시아버지가 주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다말은 이렇게 시아버지를 통해서 아이를 낳았습니다. 다말은 이 일 때문에 평생 손가락질을 당하며 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낳은 아들들을 축복해주셨습니다. 그래서 다말이 유다를 통하여 베레스와 세라는 낳은 것은 축복의 모델이 되었습니다. 룻이 보아스와 결혼했을 때 사람들은 이렇게 축복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 소년 여자로 네게 후사를 주사 네 집으로 다말이 유다에게 낳아준 베레스의 집과 같게 하시기를 원하노라”(룻4:12) 더욱 놀라운 것은 이 베레스를 통하여 유다의 왕이 나왔으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낳은 마리아의 경우와도 비슷합니다. 마리아는 아직 결혼하지 않은 처녀였습니다. 그녀는 요셉과 정혼하고 결혼을 앞두고 있었습니다. 가난하지만 행복한 가정을 이룰 소박한 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천사가 나타나 그녀가 하나님의 아들을 잉태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 때 마리아는 그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기쁨으로 순종했습니다. 인간적으로 볼 때 마리아가 낳을 아이는 사생자였습니다. 아마도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당했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렇게 낳은 아들이 세상을 구원하실 구주셨습니다. 얼마나 복되고 놀라운 일입니까?
죄악 가운데서도 역사하시는 하나님
다말이 이렇게 해서 유다에게 낳은 베레스는 그리스도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이렇게 수치스러운 사람들을 통해 메시아가 오시게 하셨을까요? 이 일은 그리스도의 존귀하심과 거룩하심을 손상시키는 것처럼 보이지 않습니까? 그러나 사실은 그리스도의 영광을 더욱 드러냅니다. 하나님의 풍성하신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비천한 육체를 입으신 일에서 더욱 빛납니다. 주님께서는 육신의 선조들에게서 아무런 영광도 취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예수님의 성결하심으로 이 추한 조상들이 성결해졌습니다. 물론 오늘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의 성결하심으로 거룩함을 얻었습니다.
예수님의 족보에는 부정한 여인들이 세 명이나 나옵니다. 본문에 나오는 다말과 기생 라합, 그리고 밧세바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일들을 통하여 성도들의 중대한 실패를 보여주시는 동시에 그들이 받은 용서를 보여주고 계십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에게 큰 위로와 용기를 줍니다. 우리 중 그 누구도 육체로 인하여는 자랑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택하여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얼마나 크십니까?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모든 죄와 실패를 덮고도 남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 같은 죄인들에게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아름답고 점잖고 고상한 모습으로 앉아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어떤 성도가 우아하게 신앙생활을 하고 싶다고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본래 아름답지도 못하고 점잖지도 못하며, 고상하고 우아한 것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본성에는 죄가 뿌리 깊이 박혀 있습니다. 그 안에서 날마다 순간마다 추하고 악한 죄가 얼마나 뿜어져 나오고 있습니까? 이런 우리에게 무슨 소망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모하는 믿음을 가지고 은혜의 보좌 앞에 나오는 자들에게 얼마든지 은혜를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말처럼 사생결단을 하고 주님 앞으로 나가야 합니다. 점잖고 우아하게 신앙생활 하겠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죽기 아니면 살기로 힘써야만 합니다. 그래야 은혜를 풍성하게 받게 될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다말은 우리에게 큰 도전을 주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힘을 다해 간절히 사모함으로 은혜의 보좌 앞에 나가서 하나님의 은혜를 풍성하게 힘입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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