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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가지 큰 죄악 -교만

누가복음 장경동 목사............... 조회 수 4486 추천 수 0 2010.03.22 12:0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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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눅18:9-14 
설교자 : 장경동 목사 
참고 : 중문교회 http://www.jch.or.kr 
본문: 누가복음 18장 9 - 14절

할렐루야! 오늘도 참 좋은날, 거룩한 주일 아침에, 우리 주님 전에 찾아 나오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신령한 은혜와 능력과 축복이 함께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옆 사람과 같이 포웅하며 인사하실 때, '같이 예배 드리게 되어서 정말 반갑습니다.' 하고 인사하시겠습니다. '할렐루야! 잘 나오셨습니다. 반갑습니다. 감사합니다.' 우리 두 손을 가슴을 얹고 이렇게 다짐합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 나는, 두고 보기에도 아까운 사람이다.' 시작 '하나님 보실 때 나는, 두고 보기에도 아까운 사람이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두고 보기에도 아까운 사람의 표준을, 의롭게 살아온 삶에 기준을 두지만, 하나님께서는 기준을, 삶에 두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기준을 두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내가 의롭게 살아온 의인이기에 하나님께서 나를 두고 보기에도 아까운 존재로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우리를 두고 보기에도 아까운 존재로 보신다고 하는 말입니다.

나의 공로, 나의 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공로, 하나님의 의로 말미암는다고 하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두고 보기에도 아까운 생각을 하시고, 하나님께서 두고 보기에도 아까운 마음을 먹고사시고, 하나님께서 두고 보기에도 아까운 말을 하고 사시며, 하나님께서 두고 보기에도 아까운 행동을 하시며 사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우리 시대에 평신도로써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사람이었던 C.S 루이스 교수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를 가리켜 ‘구도 정신을 상실한 시대다’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구도 정신을 상실한 시대’ 구도 정신을 상실한 그 증거 중의 하나로, 더 이상 진리를 향한 진진한 접근이 없다는 것입니다. 죄 때문에 아파하고 울면서, 그 죄를 극복할려고 하는 노력을 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로부터 구원의 감격을 얻고, 또 죄를 이기는 성숙의 환희가 있으려면,

먼저 자기 죄에 대해서 아파하고, 또 괴로워하는, 그런 진지한 죄에 대한 대면이 있어야 하는데, 현대인들 가운데는 그런 사람들이 많지 않다는 거예요. 사실 오늘날 우리 시대에서 ‘죄악’이라는 단어는, 실종의 위기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죄’라는 단어를 싫어한 나머지, ‘환경에 대한 부적응, 정서 장애, 습관적인 어떤 집착증등’ 이런 심리학적인 용어들의 안개속에서 우리는 ‘죄’라는 단어를 의도적으로 도피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오래전에 칼 메닝거라는 정신의학자는, ‘이런 경향이야 말로, 인간의 정신 건강에 전혀 도움이 될 수가 없는 것이다.’ 라고 한바가 있습니다. 죄에 대한 해결은, 죄를 죄로 인정할 때에만, 비로소 가능할 수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 집에 독약병이 하나 있다고 하십시다. 이것은 아주 특별한 경우에만 쓰여지는 아주 중요하고도 값비싼, 그런 독약이 하나 있는데, 그 병에다가 ‘독약’ 그렇게 쓰면 기분이 나쁠 것 같아서, 병에다가 ‘꿀’이라는 이름을 써 붙인다고 하십시다.
여러분, 이것이 도움이 될까요? 오히려 더 위험할 수 있죠. 독약은 독약이라고 써야 하고, 그 아래 아주 명확하게 ‘위험’ 이라고 표지를 붙여야 합니다. 그래서 우스운 이야기가 있죠. 어떤 사람이 독약을 잘 보관하고 있었다고 그래요. 그래서 병에다가 ‘danger! 위험!’ 이렇게 써 붙였어요. 그런데 이 위험 표지를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느 날, 그 집에 중학생 아들이 그 독약을 먹고 죽을 뻔 했다고 그래요.

그래서 그 아버지가 ‘야 이놈아! 너는 그래 중학생이 되어 가지고 이 ‘danger' 영어 단어 하나 못 읽냐?’ 그러니까 그 아들이 그러드래요. ‘그게 어디 데인져야! 단거지 단거.' 독약은 독약이라고 말해야 되고, 죄는 죄라고 말해야 합니다. 저는 우리 시대의 영적인 각성, 영적 부흥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우리 한 사람 한사람이 죄에 대해서 정직하고 진지한 대면을 할 때, 그때 부흥은 시작된다고 믿습니다.

저는 오늘부터 시작해서, 성경이 지적하고 있는 ‘일곱가지의 커다란 죄악’에 대해서 말씀을 나눌려고 합니다. ‘일곱가지 중요한 죄악!’ 본래 ‘일곱 가지 죄악’이라는 단어를 처음으로 썼던 사람은 그레고리 대제라는 사람이 처음으로 썼던 것으로 전해집니다. 왜 하필이면 일곱가지 죄악일까요? 두 가지의 이유가 있다고 생각이 되어져요. 첫째는, 일곱이라는 숫자가, 완전숫자이기 때문에, 우리가 범하는 모든 죄를 대표할 수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일곱가지로 요약한 것이 아니겠느냐?

그런 생각이 들고요. 두 번째는, 한 주간이 일주일인데, 중세기에 기록을 보면, 그 당시 경건을 추구하던 사람들이, 매일 한 가지의 죄를 붙들고 생각을 하면서, 그 죄를 이기려는 노력을 해 왔다고 합니다. 자, 그렇다면 이 일곱가지의 죄가 뭐냐? 첫째는 교만이에요. 교만. 두번째는 질투입니다. 세 번째는 분노입니다. 네 번째는 탐심입니다. 저는 이 일곱가지 죄악을 보다가, 이것도 죄악에 들어가는 구나! 하고 깨달았어요. 그 다섯 번째가 뭐냐면, 탐식이예요. 탐식.

그러고 여섯번째, 게으름입니다. 게으름. 그 다음에 일곱 번째는, 정욕입니다. 정욕. 이러한 일곱 가지를 가리켜서 기독교의 역사에서는 ‘일곱가지 가장 커다란 죄악이다.’ 이렇게 불렀습니다. 오늘은 그 첫번째 죄악인 교만에 대해서 생각해 볼려고 합니다. 교만은, 모든 죄악의 뿌리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라고 하는 사람은, 교만을 가리켜서 ‘모든 죄악의 어머니다’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모든 죄악의 어머니가 된다.’ 왜냐하면 이 교만에서부터 모든 죄악들이 생겨난다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른 모든 죄악들은 바로 교만의 자녀다 이런 말을 쓰기도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교만이 분노를 낳고, 교만이 질투를 낳고, 교만이 탐심을 낳고, 그래서 교만은 모든 죄악의 뿌리가 되고, 죄악의 어머니가 된다고 지적했어요. 오늘 본문에는, 소위 바리새인과 세리 두 사람이 성전에 기도하러 올라간 비유의 이야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 비유를 통해서, 바리새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교만의 죄악을 폭로하고 계십니다. 자 오늘 우리는 본문을 통해서 교만의 죄, 이 죄의 특성은 무엇일까? 이 죄의 결과는 무엇인가를 볼 수가 있습니다. 첫째로, 이 교만의 특성을 무엇일까요? 다시 말하면, 교만은, 어떤 죄일까요? 교만이라는 것은 어떤 죄일까요?

1. 첫째로, 교만은, 극단적으로 자기 중심적인 죄악입니다.
‘극단적으로 자기 중심적인 죄악입니다.’ ‘극단적 자기 중심적인 죄악이 교만이다.’ 시작 ‘극단적 자기 중심적인 죄악이 교만이다.’ 그래요. 교만은 아주 극단적인 자기 중심의 죄악이라고 할 수 있어요.
자, 오늘 본문에 예수님께서 이 비유의 교훈을 베풀어 주신 이 대상이 누구였는가를 먼저 주목하십시오. 자, 오늘 본문이 시작되는 9절 말씀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9절 다같이 시작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예. 이 비유가 베풀어진 대상이 누구예요?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 그들이 바로 바리새인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또 자기를 멸시했습니다.

저는 여기서 ‘자기를 의롭다고 믿었다. 자기를 존중한다.’ 또 ‘자기를 소중히 여긴다’ 그 자체만으로는 그것을 나쁘나고 말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에게서 자존감이라는 것은 매우 필요한 것입니다. 오늘날 심리학에서도 ‘한 사람이 건강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자신을 귀히 여기고, 자신의 가치를 인정할 줄 아는, 소위 이 자존감이라는 것은 우리 정신 건강에 매우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자존감은 그런 의미에서 죄가 아닙니다. 그래서 건강한 자존감, 프라이드는, 병적 프라이드와 구별될 필요가 있어요. 자기를 사랑하고, 자기를 귀히 여기는 것은, 결코 죄가 아니예요.

그러나, 제 얘기를 잘 들으세요. 자신만 사랑하는 것은 죄예요. 자기만 사랑하는 것! 자신을 사랑하는 것은 죄가 아니지만, 자신만 사랑하는 것. 자신만 사랑하는 것. 여기서 그 문제가 생겨요. 오늘 본문에 나타난 이 바리새인들은,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그 다음에 ‘다른 사람은 멸시했어요.’ 자기를 소중히 여긴 나머지, 자기의 프라이드나, 자기의 자존심, 자기의 이기심을 정당화 시키기 위해서, 다른 사람을 파괴할려고 노력하고, 다른 사람을 중상하고, 모략하고, 비난하기 시작할 때, 그것은 이 자존감의 영역을 넘어선 죄악의 모습을 갖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교만의 바로 여기서 부터 시작된다고 할 수 있어요.

그런 의미에서 교만은, 일종의 자기 숭배의 죄악이라고 할 수 있어요. 누군가는 교만을 정의하기를, ‘교만은, 자기 자신만이 즐길 수 있는 병이다.’ 그랬어요. 아주 재미있는 말을 했어요. ‘교만은 자기 자신만이 즐길 수가 있는 병이다.’ 자기는 그 죄를 즐겨요.

15세기에 ‘사보나 롤라’라는 유명한 설교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종교개혁의 문을 열었던 사람이기도 합니다만, 그가 이제 카톨릭이 지배하던 시대에, 그가 어느날 아침 성당에 나와서 산책을 하다보니까, 그 성당의 뜰에 있는 마리아 상 앞에 어떤, 꽤 나이가 들어 보이는 부인이 열심히 경건한 모습으로 참배하고, 아주 진지하게 기도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그 다음날 같은 시간에 산책을 하러 나왔더니, 똑같은 시간에 그 부인이 그 마리아 상앞에 참배하고 기도를 하고 있는 거예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폭풍우가 몰아치나, 그 여인은 한결같이 그렇게 찾아왔습니다. 봄이 가고, 여름이 오고, 또 가을이 가고, 또 겨울이 와도 이 부인은 계속해서 찾아왔습니다. 아주 깊은 감명을 받았어요. ‘참 신앙심이 좋은 분이로구나!’ 어느 날 이 사보나 롤라가, 산책을 하다가 자기 동료 사제를 만났어요. 마침 그때 그 부인이 또 와서 기도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어요. 그러자 그 가리키면서 ‘여보게, 내가 저 부인을 가만히 관찰해 보니까, 봄, 여름, 가을, 겨울, 변함이 없소.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폭풍우가 몰아치나, 꼭같은 시간에 와서 저렇게 기도를 한단 말이야. 참 신앙심이 투철한 분이지!’ 그랬더니 옆에 있던 이 동료 사제가, 껄껄껄껄 웃는 거예요. ‘자네 모르고 있었나!’ 그러는 거예요. 그래서 ‘뭘 말인가?’ 그랬더니, ‘자네 그 이야기 모르나?’ ‘무슨 이야기?’
‘옛날에 말이야. 저 마리아상을 처음 조각할 때, 조각가에게 부탁을 했는데, 그 조각가가 마리아 상의 모델을 찾왔는데, 바로 저 여인이 처녀 시절에 뽑혔다네. 그래서 저 여인을 모델로 해서 마리아상을 만들어 놓은 그 다음날부터 출근하기 시작해서 지금까지 결석한 일이 없다네.’ 여러분, 이 여인은, 종교의 이름으로 누구를 숭배하고 있었느냐면은, 자기를 숭배하고 있었던 거예요. 자기 얼굴을 보고, 자기를 즐기고, 자기를 숭배하고 있었던 거예요. 이것이 바로 원죄의 뿌리입니다.

사단은, 에덴동산의 처음 사람 아담에게 찾아와서, 맨 처음 어떤 유혹을 던졌습니까? ‘네가 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따 먹으면, 네가, 뭐예요? 하나님과 같이 되리라.’ ‘네가 하나님이 된다. 네가 절대가 된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절대화시킬 때, 혹은 우리 자신의 주장을 절대화시킬 때, 바로 여기에 교만이라는 질병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연약한 인간은 언제나 잘못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 인간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교만은, 극단적 자기 중심적인 죄악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 다음에 두 번째로, 교만이란 무엇이냐?

2.둘째로 교만은, 이웃과 나 사이에, 이웃과 나 사이에 벽을 쌓는, 혹은 담을 쌓은 죄악이라고 할 수가 있어요. 이웃과 나 사이에 벽을 쌓는 것이 바로, 교만입니다. 자, 오늘 본문의 11절에, 바리새인이 기도하는 모습을, 성경은 어떻게 말하고 있습니까? 자, 우리 11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11절 다같이 시작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자 우선 바리새인이 기도하던 자리, 어떤 자리였어요? 세리와 구별해서 어떻게 해요? ‘따로 기도했다.’ ‘저 사람과 내가 같이 하기도 싫다.’ 그래서 아예 자리를 따로 해서 기도하고 있었다. 그리고 바리새인의 기도가 시작되면서, 이 11절에 보면, 두 번씩 반복되는 단어가 있습니다. 어떤 단어가 반복되고 있습니까? ‘같지 아니하다.’ ‘하나님 나는 다른 사람들, 토색, 불의 간음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또 ‘저 세리와도 같지 아니합을 감사합니다.’

그러니까 이 바리새인 족속들은 이 세리족속들을 생각할 때, ‘저 로마에 아부하는 저 사람’ 그래서 백성들의 고혈을 빨아먹고 있는 세리들, 저 인간같지 않는 인간들, 같이 할 수 없는 인간들이다. 아예 상대도 하지 말자! 자 이렇게 해서 세리족속들을 멸시하고 있었던 바리새인들의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주님은 우월감, 우월의식, 아니 교만이라는 뿌리를 보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바리새인들이 세리를 바라보면서 이렇게 생각했었더라면, ‘저 사람이 비록, 못된 일을 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고, 로마에 아부하고 민중들의 피를 빨아먹고 있는 것도 사실이고, 우리 민족에게 상처를 주고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이지! 저들에게도 하나님의 숨결이 있고, 하나님의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인격이 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나와 똑같이 지음을 받은 하나님의 작품이다.’라고 바라볼 수 있었더라면, 어떻게 했을까요?

또 우리 인간이 범죄하고 타락했을 때, 우리 모두가 다 타락했고, 나도 그 타락한 성품을 가진, 나도 저 바리새인도, 저 세리도 꼭 마찬가지로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었더라면, 사랑하시는 여러분, 이 바리새인들이 세리에게 어떻게 접근할 수가 있었을까요?
사랑하시는 여러분, 우리는 이웃들과 교제할 때, 지나치게 선택적으로만 교제의 폭을 좁히는 것을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나는 저런 사람들과는 교제하지 않겠다.’ 그래서 특수한 사람들과의 파벌을 만들기 시작할 때, 그 배후에는 우리속에 숨어있는 무서운 우월감, 교만의 뿌리가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혹은 이웃들에게 지나치게 공격적이고, 비판적인 태도를 갖는 것을 우리는 또한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남의 눈의 티는 보면서, 자기 눈의 들보를 보지 못하는’ 이것도 일종의 교만이라는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 일수록, 자기가 남을 비판할 때는, 그것은 건설적인 비판이라고 말하고, 그리고 남들에 의해서 자기가 비판을 받을때는, 부정적이고 파괴적인 비판이라고 자신을 합리화 시키는 모습들을 종종 볼 수가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공통적인 질병은 바로 교만이라는 이름의 병입니다. 이런 사람이 가정에 있으면, 가정 전체가 고통을 받습니다. 이런 사람이 공동체 안에 있으면, 공동체 전체가 큰 고통을 받게됩니다. 이런 사람들, 교만한 사람들의 특성은 이것입니다. 벽을 만드는 것입니다.

담을 쌓고, 사람들을 나누는 것입니다. 이웃들과 나 사이에 벽을 싸요.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들 끼리만 모임을 만들면서, 계속 벽을, 단절의 벽을 쌓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겸손한 사람들은, 다리를 놓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우리 사회에, 우리 시대에 필요한 사람들이 있다면, 다리를 놓는 사람입니다. 예수께서는 다리를 놓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하나님과 인간사이에 다리를 놓기 위해서 오셨어요.

그렇다면, 우리가 마땅히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주님의 제자들이라면, 마땅히 다리를 놓는 사람이 될 수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나 때문에 이웃들이 화목하고, 나 때문에 공동체가 밝아질 수가 있는지, 아니면 나 때문에 공동체가 몸살을 앓고 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공동체가 필요로 하는 사람, 다리를 놓은 사람, 겸손한 사람입니다. 공동체는 교만한 사람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교만은, 이웃과 나 사이에, 단절을 벽을 쌓고 있는 죄악인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왜 교만은 경계해야 할 죄악일까요? 교만은 이웃과 나 사이에 담을 쌓는, 벽을 쌓는 죄악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교만은 어떤 죄악일까요?

3. 세 번째로, 교만은 하나님 앞에서도 자기를 속이는 죄악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교만을 하나님 앞에서도 자기를 속이는 죄악이다.’ 시작 ‘교만을 하나님 앞에서도 자기를 속이는 죄악이다.’ 그래요. 교만은 하나님 앞에서도 자기를 속이는 죄악이예요. 하나님 앞에서도 자기를 속일려고 하는 죄악. 자 오늘 본문은 기도의 비유입니다. 자, 이 기도의 내용을 다시 한번 보십시오. 11절에, 바리새인의 기도가 시작됩니다. 11절 다시 한번 읽어보세요. 11절 다같이 시작

“바리새인은 서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12절까지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자, 이게 바리새인들의 기도인데, 이 기도에 보시면 강조된 단어 하나가 있어요. 무슨 단어같애요? ‘나는’ 나라는 단어입니다. 나. 우리말 성경에는
한 두 번 밖에 나오지 않는데, 원문에는 훨씬 더 많이 나옵니다.

문장마다 ‘나’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나는, 다른 사람들, 토색, 불의, 간음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나는,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나는,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번 씩 금식하고, 나는,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기도 같애요? 기도 같지 않아요? 자기 자랑 같지 않아요?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랑하고 있는 거에요. 하나님 앞에서도 내가 얼마나 잘난 인간인가를, 내 업적이 얼마나 화려한가를, 하나님 앞에서 자기 선전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기도의 주어는 누구이어야 합니까? 기도의 주어, 누구예요? 하나님. ‘하나님, 저를 불쌍히 여기시고요, 하나님! 이 죄인이 주 앞에 왔습니다. 하나님! 아시지 않습니까? 하나님! 저를 불쌍히 여겨 주세요.’ 당연히 기도의 주어는 하나님이셔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 사람의 기도의 주어는 여전히 자기 자신인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는 자기 위로를 위해서 기도하고 있는 거예요. 자기 자랑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있었던 이 바리새인, 자기의 아픔을, 자기의 어두움을, 숨김없이 노출하여 주의 도우심을 구하기 보다, 자기 선전에 분주했던 이 바리새인의 모습을 보십시오.

하나님도 자기 선전에 감동을 받을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었던 이 바리새인의 모습을 보십시오. 우리가 참 존경할 만하고, 아주 거룩한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 한가지 특성이 있어요. 깊이 기도하는 사람이예요. 우리가 기도하면 변화됩니다. 기도하면 사람이 변해요. 진지하게 기도하면서 인생이 변화되는 것을 볼 수 있어요.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기도해도 안 변하는 사람이 있어요.

그것은 기도가 잘못 되어서 그래요. 진지한 기도, 자기 속에 있는 자기 모순과, 그리고 자기의 모습을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내어 놓을 수 있는 사람들, 살아계신 주님 앞에 있는 그대로 드러내 놓고, 하나님의 도우심과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구하는 사람들, 반드시 변화될 것입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교만이라는 것은, 이 변화를 거부하는 것이예요. 하나님 앞에서도 자기를 꼭 붙들고 있는 것이예요. 그리고 차라리 자기를 방어하고, 숨기고 사람, 자기를 하나님 앞에서도 자기를 숨길 수가 있다고 착각하는 사람들, 이것이 교만의 모습인 것입니다.

이런 재미있는 이야기 있죠. 어떤 자매가 결혼할 때 자기 남편될 사람하고 약속을 했대요.
‘우리는 결혼하면, 잠자기 전에 꼭 둘이서 함께 기도하고 자자.’ 그래서 약속을 하고 결혼을 했대요.
그래서 남편은, 억지로 끌려가다 싶이 했지만, 어쨌든 결혼 전에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잠자리에 들기 전에, 둘이 꼭잡고 기도를 했대요. 대부분 아내가 기도하는 것이 보통이고, 이따금씩 남편도 몇 마디 기도하고, 둘이 손잡고 기도하고, 항상 잠자리에 들었답니다.

그런데 하루는 남편이, 아주 술에 만취해서 들어왔어요. 그래도, ‘여보, 약속대로 오늘도 기도해야지요!’ ‘아니, 오늘은 자기 혼자 기도해!’ ‘아니 당신 약속했잖아! 같이 기도해야지!’ 그래서 억지로 남편의 손을 붙들고 부인이 기도를 시작합니다. ‘하나님, 오늘 밤은 우리 남편이 술에 만취가 되어가지고 돌아왔습니다. 술 취한 우리 남편을, 하나님 용서해 주시옵소오.’ 그랬더니 갑자기 남편이 그러드래요. ‘여보, 하나님 한테 술 취했다고 그러지 말어! 아프다고 그래! 아프다고’

그래도 자존심은 살아 있어 가지고 말이죠. 교만은 자기의 범죄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예요. 자기의 실수와 과오를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도 자기의 범죄를 인정할 수 없다면, 이 사람이 치료될 수 있는 가능성이 어디에서 있을 수 있을까요? 교만이란 무엇입니까? 교만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감추는 것입니다. 자기를 속이는 죄악입니다. 자 이런 교만은 어떤 결과를 가져올까요?
본문에 의하면, 이런 교만은, 기도를 응답받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기도가 응답될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교만한 사람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본문 14절의 결론이죠? 자 14절,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14절 시작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예. 자, ‘내가 너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세리가, 바리새인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갔다.’

이것은 비교가 아니예요. 이것은 비교가 아니라, ‘바리새인이 아닌 세리가, 오히려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 이렇게 말합니다. 자, 세리는 어떻게 기도했기에 그렇습니까? 13절에 보시면,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저는 죄인입니다.” 이렇게 기도한 세리가 오히려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함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결론은, 뜻밖에도 ‘이 세리가 의롭다함을 받았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 저는 죄인입니다.’ 자기의 죄인됨을 깨닫고, 그 죄를 털어놓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면서, ‘주님! 제가 주님만 의뢰합니다. 저를 불쌍히 여겨주시고, 저를 새롭게 해주세요.’ 자기의 죄인됨을 깨닫고 십자가 앞에 나와서, 나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그분의 도우심과 용서를 구하고,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순간, 성경은 선언하기를 ‘하나님께서 그를 의롭다’ 라고 말씀해 주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우리 기독교 교리의 가장 중요한 핵심이예요.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 죄인됨을 인정하고, 내 죄를 고백하고, 주님의 십자가 앞에 나아와 예수님을 나의 구주와 주님으로 받아 들이는 순간, 우리는 오히려 의롭다 하심을 받습니다. 믿습니까? 여기에 복음의 진리가 있어요. 그러나 반대로, ‘나는 의롭다고’ 하나님 앞에서조차 자기를 선전하기에 바빴던 이 사람, 하나님은 그를 외면해 버리고 말았어요.

자, 교만한 사람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자 그런데,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을 수가 없다는 것을, 두가지의 측면에서 접근해서 생각해 볼 수 있는데, 하나는, 불신자의 입장에서 생각해 볼 수가 있습니다. 만약 불신자가 교만하면, 그 불신자에게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사태가 뭐냐? 구원을 받을 수가 없어요. 구원을. 교만한 사람은 구원받지 못합니다. 교만한 사람은 자기 의를 붙들고 있어요. 자기의 자존심을 붙들고 있어요. 자기가 자기의 주인이예요.

예수가 자기의 구주와 주님이 될 여지가 없는 사람. 하나님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는 자기가 자기의 구세주예요. 자기 당당한 자기 의를 자랑하고 있는 이 사람, ‘하나님, 나를 이만큼 잘하고 있습니다.’ 그럼 혼자 잘하면 돼지, 예수 믿을 필요가 없는 거예요. 교만한 사람은 구원 받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구원받기 위해서는, 자기의 죄를 봐야 되고, 하나님 앞에서의 자기의 비참한 자기의 모습을 발견할 수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마태복음에 나타난 유명한 산상수훈의 팔복에 보면, 첫번째 축복이 어떤 축복이라고 말합니까?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하나님 나라, 천국이 내 것이 될려면, 제일 먼저 필요한 것이 뭡니까? 네? 마음이 가난해야 돼요. 마음이 부요해서는 안돼요. ‘마음이 가난한 사람.’ 내 가난한 상태, 하나님이 아니고는 살 수가 없어요.
‘하나님, 내 부족함과, 내 연약함과, 내 죄스러움과, 그리고 내 병든 모습을 하나님이 아십니다. 하나님, 제가 주님을 의지합니다.’ 내안에 있는 부족함을 알고, 자기의 부족과 연약을 주 앞에 드러내는 사람. 그가 오히려 하나님의 통치를 받고,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하는 사람이 될 수 있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그러나, 자기의 부요를 자랑하는 사람, 하나님이 도와줄 필요가 없는 사람이에요. 구원의 희망이 없는 사람입니다.

자, 어떤 사람이 복음을 깨달아서, 예수 믿고 구원받았다고 하십니다. 신자가 된 것이죠. 그러나 신자에게도 교만의 죄의 유혹은 여전히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 성도들이 교만할 때, 우리 믿는 사람들이 교만할 때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상태는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더 깊은 은혜를 경험할 수 없어요. 하나님의 축복과 은혜에서 그는 끊어질 수 밖에 없어요. 왜냐하면, 여전히 교만한 이 사람은, 하나님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는 사람이에요.

하나님이 도와줄 여지가 없는 사람이기 때문이예요. 요한계시록 2장과 3장에 보면,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가 나오는데, 그중에 라오디게아 교회의 교인들이 대부분 그랬던 것 같애요. 자 그들은 이렇게 말하고 있어요. ‘나는 부자입니다. 나는 부요합니다. 나는 부족한 것이 없습니다.’ 실제적으로 부자였고, 외적으로도 부자였고, 마음도 부자였습니다. 그래서 마음이 가난하지 못했고, 하나님을 의지함이 없었고, 기도가 없었던 것이야 말로 라오디게아 성도들의 모습이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런데 주님은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나는 부자라. 나는 부요하여 부족함이 없다고 하지만, 내가 너희들을 볼 때, 네 눈먼 것과, 네 벌거벗은 것과, 그리고 네 가련한 것을 네 스스로는 알지 못한다.’ 우리가 스스로의 아픔과, 스스로의 병듬과, 스스로의 부끄러움과, 스스로의 누추함을 깨달을 때, 비로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필요로 할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오늘 하나님 앞에 비춰진 내 모습은 어떤 모습일까요? 내 버림받은 모습, 내 모순과 갈등속에 주저 앉아있는 모습, 내 포장된 모습이 아니라, 내 속에 감춰진 신음하고 고통하고 있는 내 존재의 모습을 바라보십시오.

어찌 주의 도우심을 구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하나님, 저를 불쌍히 여겨 주세요. 저를 긍휼히 여겨주세요.’ 이런 사람이라야, 주님의 더 깊은 은혜, 더 깊은 사랑, 더 깊은 자비 속에 들어갈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교만은 이런 모든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거부하게 만드는 죄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사람을 싫어하십니다.

자 14절에 보시면, 14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어떻게 된다고요? ‘낮아질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가장 양호한 표현이에요. 낮아 진다는 것은.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싫어하신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아니 ‘교만한 자를 미워하신다’고 말합니다. 아니, 심지어, 이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하나님은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시고, 교만한 자를 어떻게 하신다고요? 대적하신다.’고 말합니다. ‘대적한다.’ 아니, 교만하다고 그래서, 하나님이 대적까지 하실 필요까지 있을까요? 왜 그럴까요?

여러분 ‘교만은, 마귀의 본질이예요. 하나님을 대적하고 있는 마귀, 그 마귀의 존재의 본질이 바로 교만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마귀가, 어떻게 마귀가 되었습니까? 성경에 의하면 마귀는 본래, 천사장이었습니다. 루시퍼였어요. 그런데 그가 범죄했습니다. 어떤 범죄를? 그는 하나님과 비기기를 원했습니다.
‘내가 저 높은 곳에 올라가, 하나님과 비기겠다. 하나님과 맞먹겠다.’ 이게 마귀의 출발이었어요. 교만이, 마귀를 마귀되게 한 거예요. 그래서 마귀에게 영원한 심판이 결정됩니다. 그리고도 마귀는, 끝까지 회개하기를 거절합니다. 자기의 자존심 때문에, 끝까지 회개를 거절하고 있는 것, 이것이 바로 사탄의 본질이예요. 뿐만아니라, 마귀는 그 파멸의 길을 걸어가면서도, 자기와 함께 파멸할 동료들을 찾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안에 교만을 충돌질하고 있어요.

내 안에서도 사탄은 아직도 이 교만을 충동질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여러분과 저는 어떻게, 내안에 역사하는 이런 교만 죄를 극복할 수가 있을까요? 대답은 하나 밖에 없어요. 우리는 세리의 자리에 서야 합니다. 우리는 세리의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세리의 기도를 배워야 합니다. 자, 세리는 어떻게 기도했습니까? ‘하나님이여, 저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이것이 세리의 기도예요. ‘하나님, 저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그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필요로 하고 있는 것이예요. 겸손한 사람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 들입니다. 겸손한 사람은 이웃의 도움도 받아 들일 수 있는 사람이예요. 어떤 책에 보니까, 겸손한 사람을 이렇게 아름다운 그림으로 표현했어요. ‘겸손한 사람은 누구냐?’ 한 손으로, 하나님을 붙들고 있는 사람, 또 한 손으로는 이웃의 손을 붙들고 있는 사람. 그리고, 인생의 길을 따뜻하게 걸어가고 있는 사람. 한 손으로 하나님을 붙들고, 또 한 손으로 이웃의 손을 붙들고, 따뜻하게 인생의 길을 걷고 있는 사람.

이 아름다운 모든, ‘이것이 겸손한 사람이다.’ 반대로, 교만한 사람은 뭐예요? 하나님의 손을 뿌리치고, 그리고 이웃들의 손도 뿌리치고, 홀로 고독한 파멸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 사람, 이것이 바로 교만한 사람의 모습니다. 내 인생이 교만한 종말을 마지하지 않기 위해서, 주 앞에 겸손한 자로 서기 위해서 어떻게해야 할까요? 세리의 기도를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 저를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그런데 불쌍히 여긴다. 이건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하나님, 저는 하나님 앞에 설 수도 없는 죄인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있는 모습 그대로 다루신다면, 내 속에 있는 죄악, 내가 걸어왔던 죄악을 인해서 나는 하나님 앞에 설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저주를,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 나는 감히 하나님 앞에 기도도 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보시기에 저는 입술을 열어 기도하기에도 부끄러운 추악한 죄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를 용서해 주시고, 용납해 주시고, 제 기도를 들어 주세요.’

자 이것은 오늘을 살아 가는 저와 여러분에게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우리는 기도할 때, 우리가 뭔데 하나님이 내 기도를 응답해요? 우리를 있는 모습 그대로, 전능자이신 하나님,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선다면, 지금 당장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과 진노를 피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의 피를 붙들고 섭니다. 내가 주 앞에 설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그리고 내가 주 앞에 드려지고, 내 기도가 받아 드려지기 위해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는 십자가에서 보배로운 피를 흘리셨습니다.

그 피를 붙들고 주앞에 와서, ‘하나님, 저를 용서해 주세요. 나는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죄인입니다. 나 때문에 주님은 피를 흘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보배로운 피로 저를 씻어주시고, 교만한 저를, 하나님 용서해 주시옵소서.’
그 십자가의 피 앞에 내 전 존재를 적시는 그 순간, 나는 비로서 하나님의 용서를 믿고 일어섭니다. 이것이 바로 구원의 삶이고, 은혜의 삶인 것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그때 내 앞에 새로운 삶이 열려옵니다. 은총의 삶이, 안식의 삶이, 그리고 주께서 예비하신 아름답고 겸손한 축복의 삶이 펼쳐질 것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은 바로 이런 세리의 자리에 서서, 이런 기도를 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그때 저와 여러분의 생애속에, 이 교만을 넘어서는 그리스도인들의 복된 삶의 행진을 볼 수 가 있다고 믿습니다. 주께서 저와 여러분을 이 교만의 악에서 구해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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