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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얼굴

창세기 정용섭 목사............... 조회 수 2528 추천 수 0 2010.03.30 08:06:36
.........
성경본문 : 창32:23-33 
설교자 : 정용섭 목사 
참고 : http://dabia.net/xe/39793 

emoticon 2008.7.27.

창세기에는 드라마틱하게 인생을 산 인물들의 이야기가 많습니다. 이스라엘의 족장으로 일컬어지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이 그들인데, 여기서 이삭만 빼고는 나머지 인물들이 모두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중에 야곱은 두 가지 점에서 특별합니다. 하나는 그의 열두 아들이 바로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의 태두가 되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에게서 이스라엘 민족의 이름이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그 이름에 얽힌 전승입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이 전승은 야곱이 밤에 두 아내와 두 여종과 열한 아들을 데리고 얍복 개울가로 가서 나루를 건넜다는 사실을 간단히 지적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하필이면 군사작전을 펼치듯이 깊은 밤에 개울을 건널 생각을 했는지 조금 이상합니다. 그 속사정을 알려면 지금 야곱이 처한 형편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따가야 합니다.
야곱은 20년 전에 아버지 이삭과 형 에서를 속이고 외삼촌 라반이 있는 하란으로 피신을 떠났습니다. 그는 라반의 집에서 양을 키우면서 큰 재산을 모았습니다. 그가 원래 부지런하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 라반의 눈을 속이는 방식으로 큰 부자가 되었습니다. 여러 우여곡절 끝에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게 된 그에게는 심각한 걱정거리가 있었습니다. 형 문제였습니다. 그가 20년 전 혈혈단신으로 집을 떠난 이유는 형이 그를 죽여 버리겠다고 펄펄 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형이 여전히 그를 죽일 생각을 그대로 품고 있는지 아닌지 걱정이 태산 같았습니다. 야곱은 고향에 안전하게 돌아갈 작전을 세웠습니다. 우선 종들을 형에게 보내서 자기가 돌아온다는 사실을 전했습니다. 형의 반응이 어떤지를 알아보려는 계산이었습니다. 에서의 반응을 정확하게 읽지 못한 종들은 에서가 야곱을 만나기 위해서 부하 4백 명을 데리고 온다는 사실만 전했습니다. 종들에게서 아무런 도움을 받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에서가 400명을 데리고 온다 하니, 걱정이 거 심각해졌습니다. 야곱은 사람, 양떼, 소떼, 낙타 떼를 모두 두 패로 나누었습니다. 형이 한쪽을 치면 다른 쪽이라도 건져야겠다는 복안이었습니다. 그리고 형에게 큰 선물을 보냈습니다. 그 선물을 보아서라도 형이 20년 전의 노여움을 풀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래도 걱정을 완전히 떨칠 수 없었던지 야곱은 아내와 자식들을 밤중에 얍복 개울을 건너게 했습니다. 가능한대로 형의 눈을 피해보겠다는 생각이었겠지요. 이 순간에 야곱 자신은 개울을 건너지 않았습니다. 그가 왜 그랬는지는 성서 기자가 설명하지 않습니다. 어떤 이들은 야곱이 하나님께 기도하기 위해서 그랬다고 주석을 달기도 하지만, 그렇게 볼 단서는 본문에 없습니다. 여차하면 자기라도 목숨을 지켜야겠다는 계략으로 ‘고향방문단’의 가장 후미에 처진 것인지도 모릅니다. 야곱이 지난날 취한 행동에 비추어보면 충분히 그렇게 하고도 남을 위인입니다.
그런데 전혀 예상하지 못한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가족들까지 건너보내고 이제 한숨 돌리면서 상황 변화를 예의 주시하고 있던 야곱은 어떤 사람과 아침이 새기까지 씨름을 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씨름을 하다니, 이게 무슨 해괴한 일입니까? 야곱은 이제 아침이 되면 형 에서를 만나야만 했습니다. 20년 만의 형제 상봉인데, 그 자리에서 뜨거운 형제애를 확인할 수 있을지, 칼부림이 날지 전혀 예측할 수 없던 순간이었습니다. 가족까지 모두 개울을 건너게 한 마당이니 이제는 피하려고 해도 피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닙니다. 이렇게 숨 막히는 순간에 알지도 못하는 어떤 사람과 씨름을 하다니, 정말 이해하기 힘듭니다.
물론 이 이야기의 전말을 이미 알고 있는 독자라고 한다면 야곱이 씨름했다는 사실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 겁니다. 왜냐하면 이 낯선 사람은 바로 천사였기 때문입니다. 천사와의 씨름을 통해서 야곱은 인류 역사에서 일약 유명 인사되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접하는 수많은 독자들은 여기서 큰 감동을 받을 겁니다. 그렇지만 이 낯선 사람이 천사라고 해도 이상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천사는 어떤 소식을 알려주는 역할을 하는 이들입니다. 제우스의 심부름꾼이 헤르메스라고 한다면 성서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심부름꾼은 천사들입니다. 이 천사들은 어떤 소식을 전할 뿐만 아니라 경우에 따라서는 하나님의 일을 대신 수행하기도 합니다. 창 18,19장에는 야훼 하나님이 세 명의 나그네로 나타나십니다. 그들은 아브라함과 사라가 아들을 낳게 될 것이라는 사실과 소돔을 징벌한다는 소식을 알립니다. 세례 요한의 출생과 예수님의 출생을 예고한 이들은 가브리엘 천사였다고 합니다. 사도행전 12장에 따르면 베드로를 감옥에서 탈출시킨 이는 천사였습니다. 이런 천사들의 일반적인 이야기와 달리 오늘 본문은 천사가 인간과 씨름을 했다고 전합니다.
어떤 이들은 천사와의 씨름을 야곱의 기도라고 주석하기도 합니다. 엉덩이뼈가 부러질 정도로 기도한 야곱처럼 우리도 그렇게 기도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우리의 삶에 기도 아닌 것이 없으니 넓은 의미에서 본다는 천사와의 씨름을 기도라고 주장해도 완전히 잘못된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런 방식으로 해석하기 시작하면 모든 성서본문을 아전인수로 해석할 위험성이 있습니다. 그것보다는 본문의 실체에 가능한 정확하게 접근하는 게 좋습니다. 이야기의 진행을 조금 더 따라가겠습니다.
야곱과 씨름하던 이 사람은 야곱을 이길 자신이 없었다고 합니다. 천사는 신적인 능력을 가진 존재들인데, 야곱을 이기지 못한다는 건 야곱의 끈기와 인내심을 강조하는 것이겠지요. 천사는 야곱의 엉덩이뼈를 쳤습니다. 씨름 규칙을 어긴 것입니다. 천사가 그렇게 비상수단을 쓴 이유는 새벽이 가까이 오기 때문입니다. 천사가 야곱에게 동이 터오니 그만 놓으라고 했지만 야곱은 엉덩이뼈가 탈골된 상태에서도 복을 빌어주지 않으면 놓아주지 않겠다고 끝까지 물고 늘어졌습니다. 그런데 이 장면에서 동이 터온다는 표현이 특이합니다. 성서 시대의 사람들은 천사를 밤에만 활동하는 유령과는 분명히 다른 존재로 생각했는데도, 오늘 본문에서 그런 묘사가 그대로 남았다는 것은 이 전승이 아주 오래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성서를 읽으면서 그런 것들을 구별해야만 합니다. 무엇이 이야기의 형식이고, 무엇이 본질인지를 구별해야 합니다. 천사와 씨름한다거나 동이 터오니 씨름을 끝내야 한다는 내용은 여기서 핵심이 아닙니다. 성서기자가 말하려는 중심이 과연 무엇일까요?
복을 빌어주지 않으면 놓아줄 수 없다고 고집을 피우는 야곱에게 천사는 이렇게 묻습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야곱이 대답합니다. “제 이름은 야곱입니다.” 야곱이라는 이름은 그의 출생 비밀과 연관됩니다. 그는 형 에서와 쌍둥이로 태어났는데, 그가 세상에 나올 때 형의 발꿈치를 잡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야곱이라는 이름을 얻었습니다. 천사는 야곱에게 이렇게 대답합니다. “너는 하느님과 겨루어냈고 사람과도 겨루어 이긴 사람이다. 그러니 다시는 너를 야곱이라 하지 말고 이스라엘이라 하여라.” 여기서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은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는 뜻입니다. 야곱은 형과 겨루어 이겼고, 삼촌 라반과 겨루어 이겼습니다. 심지어 아버지 이삭과도 겨루어 이겼습니다. 더 나아가 오늘 본문에 따르면 그는 하나님과도 겨루어 이긴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사람은 없겠지요. 사람이 하나님과 겨루어 이길 수는 없습니다. 창조자인 하나님과 피조물인 사람은 서로 겨룰만한 대상이 아닙니다. 이종격투기 K1 세계 챔피언과 초등학생이 싸운다는 걸 상상해보십시오. 아예 싸움 자체가 성립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는 이것보다 더 심합니다. 그래서 성서 전통은 사람이 하나님을 보면 죽는다고 했습니다.(출 33:20, 삿 6:22, 13:22 참조) 본문 31절에서도 야곱은 “내가 여기서 하느님을 대면하고도 목숨을 건졌구나.” 하고 한숨을 돌리기도 했습니다. 그렇다면 야곱이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는 말은 도대체 무슨 뜻일까요?

왜 내 이름을 묻는가?
이 대답은 아무래도 바로 위에서 예로 든 이종격투기 세계 챔피언의 이야기를 통해서 푸는 게 좋겠습니다. 이 사람이 길거리에 나와서 근육을 자랑하면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붙들고 자기와 한판 붙자고 한다면 모두 도망가고 말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자기 집에서 초등학생 아들에게 한판 붙자고 말했다 합시다. 아들은 도망가지 않고 아버지와 싸우는 시늉을 할 겁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한 대 얻어맞고 케이오 당한 것처럼 벌렁 눕겠지요. 아들은 이겼다고 환호성을 올립니다. 이 아이가 아버지와 한판 붙을 수 있었던 이유는 자기를 완전히 아버지에게 맡겨도 아버지가 자기를 보호해준다는 사실을 믿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는 그런 아들을 그대로 인정했습니다.
야곱이 천사와 씨름해서 이겼다는 본문의 진술은 실제로 승부가 아니라 야곱의 고유한 하나님 체험을 가리킵니다. 야곱은 지금 아주 절박한 순간에 하나님을 경험했습니다. 이런 순간은 그가 20년 전 집을 떠날 때와 똑같습니다. 그는 브엘세바에서 하란으로 가던 중 한 밤중에 땅에서 하늘에 닿은 사닥다리와 그곳을 오르내리던 천사들, 그리고 야훼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는 “이 얼마나 두려운 곳인가. 여기가 바로 하느님의 집이요, 하늘 문이로구나.”(창 28:17) 하고 고백한 후 그곳 이름을 벧엘이라고 지었습니다. 그는 다시 20년 후에 형 에서를 만나기 전의 두려움에 사로잡힌 채 하나님을 경험한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렇게 질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야곱의 하나님 경험이 도대체 무엇인가요? 지금도 땅에서 하늘에 닿는 사닥다리와 천사들, 그리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천사와 씨름을 해야만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일까요? 야곱 전승에 대한 창세기의 이런 묘사는 모두 고대인들의 문학적 장치이기 때문에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그걸 흉내 낼 필요는 없습니다. 더 근본적으로 우리 모두의 생김새가 다르고 성품이 다른 것처럼 하나님 경험도 다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경험의 공통점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곧 큰 충격입니다. 두려움이고 놀람입니다. 그것은 자기의 절대부정이며, 존재와 생명의 절대긍정입니다. 그것은 말을 잃어버림이며, 영의 사로잡힘입니다. 루돌프 오토의 표현을 빌리면 이것은 거룩한 두려움이라는 의미의 ‘누미노제’ 경험이며, 칼 바르트의 표현을 빌리면 우리와 질적으로 다른 존재라는 뜻의 ‘절대타자’의 경험입니다. 초등학생 아들이 이종격투기 챔피언인 아버지의 화려하고 강력한 능력 앞에 완전히 무방비로 노출되는 경험입니다.
사람들은 이런 경험을 회피합니다. 그 이유는 절대적인 생명의 능력 앞에서 자기의 존재 근거가 상실되는 걸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만든 부채에 사로잡힌 사람이 그 부채가 만드는 바람을 무용지물로 만드는 태풍이 몰려오는 걸 외면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자신은 전혀 그렇지 않다고, 하나님에게 내 운명을 완전히 맡긴 채 사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을지 모르겠으나, 조금 더 진지하고 솔직하게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곧 자기의 인생 계획과 포부, 자기의 업적을 송두리째 포기한다는 의미입니다.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 적합하지 않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공연한 것이 아닙니다. 이런 일은 쉽지 않습니다. 자신의 업적이 많은 사람일수록 하나님 나라를 직면하기 싫어할 수도 있겠지요. 이종격투기 챔피언인 아버지 앞에서 골목대장 노릇을 하던 초등학생 아들이 자기의 싸움 능력을 포기하지 않는 것과 비슷합니다.
이런 문제는 신앙생활에서도 비슷하게 나타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외면하고 우리의 신앙적 업적에 매달릴 때가 많습니다. 표면적으로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 같은 포즈를 취하지만 자신의 종교적 욕망에 도취될 때가 많다는 뜻입니다. 신앙생활의 주체가 결국 자기 자신이라는 말씀입니다. ‘당신을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같이 자기연민을 자극하는 복음송이 단적인 예입니다. 교회가 사람들의 종교적 욕망을 자극시키기도 합니다. 교인 배가운동과 대구 성시화 운동으로부터 시작해서 세계 선교에 이르기까지 상당히 많은 경우가 하나님의 절대적인 생명 통치보다는 사람들의 종교적 욕구에 기울어집니다. 신앙생활에서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이 주체로 등장한다는 뜻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야곱은 정말 낯선 경험을 했습니다. 천사와의 씨름을 통한 하나님 경험이었습니다. 하나님과의 겨루기였습니다. 그 겨루기가 얼마나 치열했는지, 성서기자는 야곱의 환도 뼈가 탈골되었다고 기록했습니다. 야곱은 자기의 환도 뼈를 친, 자기의 이름을 바꿔 준 낯선 사람을 향해서 당신 이름이 무엇인지 가르쳐달라고 했습니다. 출애굽기에도 이와 비슷한 장면이 나옵니다. 이집트에서 고난당하는 이스라엘 민족을 가나안으로 인도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은 모세가 하나님에게 이름을 묻습니다. 모세의 호렙 산 전승이나 오늘 야곱의 브니엘 전승에서나 똑같이 하나님은 이름을 말하지 않습니다. 무슨 뜻인가요? 이름은 그 대상을 규정합니다. 하나님에게 이름이 없다는 것은 하나님이 개념화와 범주화를 넘어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대로만 말씀하시고 행위 하실 뿐입니다. 오늘 본문에 따르면 그 하나님은 그런 방식으로 야곱에게 복을 주실 뿐입니다. 이런 하나님을 경험하면서 놀라지 않을 사람은 없습니다.
야곱은 “내가 여기서 하느님을 대면하고도 목숨을 건졌구나.” 하면서 그곳 이름을 브니엘로 지었습니다. 브니엘은 ‘하나님의 얼굴’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하나님의 얼굴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야곱의 이런 하나님 경험을 마음 깊이 새겼겠지요. 자신들이 그 땅에서 생존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이러한 하나님의 은총으로 믿었겠지요. 그래서 그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오직 하나님에게만 매달렸습니다. 이에 대한 역사적 보도가 바로 구약성서입니다.
오늘 우리 기독교인들은 구약성서의 하나님 경험에 머물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얼굴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이 바로 하나님의 임재이며, 계시이며, 성육신 하신 하나님 자신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생명의 심층에서 우리를 찾아오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보았으면 곧 아버지를 본 것이다.”(요 14:9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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