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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제자로 산다는 것

마태복음 정용섭 목사............... 조회 수 2799 추천 수 0 2010.03.30 08:06:36
.........
성경본문 : 마16:21-28 
설교자 : 정용섭 목사 
참고 : http://dabia.net/xe/39826 

emoticon 2008.8.24.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마태복음 16:21절 말씀에 따르면 예수님은 앞으로 예루살렘에 올라가 원로, 대사제, 율법학자들에게 고난을 당하고 그들의 손에 죽었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라는 사실을 제자들에게 알렸다고 합니다. 저는 이 구절을 읽으면서 예수님이 이런 일들을 어떻게 알았는지, 그게 궁금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니까 자기에게 일어날 일을 당연히 알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문제가 그렇게 간단한 게 아닙니다. 만약 예수님이 미래에 일어날 일을 모두 알고 있었다면 십자가에 처형당하기 전날 밤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면서 그 죽음을 피하게 해달라고 기도했을 리가 없습니다. 여기에는 무엇인가 다른 속사연이 숨어 있는 게 틀림없습니다.

 

더구나 22절이 보도하는 베드로의 말에서도 이 상황이 그렇게 단순한 게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에게 그런 일이 일어나면 안 된다고 뜯어말렸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예수님이 인류 구원의 길을 가시는데 그걸 말리다니, 말이 될까요? 더구나 예수님이 고난과 죽음만이 아니라 부활까지 알려주셨는데 말입니다. 베드로는 십자가는 그렇다 치고, 부활까지 일어나면 안 된다고 주장하는 걸까요?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예수님도 자기에게 닥칠 운명을 두려워했고, 지금 베드로도 예수님에게 그런 일이 일어나면 안 된다고 말하는 걸 보면, 여기에는 분명히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았지만 위에서 지적한 것처럼 무언가 다른 진실이 숨어 있는 게 분명합니다. 그게 무엇일까요?

메시아의 고난

 

그 대답은 메시아 고난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지내던 제자들과 그 이외에 초기 기독교에 동참한 많은 사람들에게 풀기 힘든 문제가 하나 있었는데, 그게 바로 메시아의 고난입니다. 자신들이 메시아로 믿고 따르면 예수님이 실제로 유대교 지도자들에게 고난을 당하고, 급기야 십자가에 처형당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웠습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서 예수님의 십자가는 인류 구원의 길인데 뭐가 받아들이기 어렵냐, 하고 생각할 분들이 있을지 모르겠군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인류 구원의 길이라는 사실은 나중에 이해된 것이지 그 당시에는 전혀 그렇지 못했습니다. 예수님 당시도 그렇고, 바울이 복음을 전하던 당시에도 십자가는 수치와 부끄러움의 대상이었습니다. 십자가 처형이 정치범에게 내리는 로마 형법의 징벌이라는 사실을 감안하면 그 상황은 심각합니다. 그 당시에 십자가를 인류 구원의 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거나 이해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에게 그런 일이 일어나면 안 된다고 말린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이 메시아의 고난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는 건 당연합니다. 유대인들에게 메시아는 엘리야처럼 초능력적인 존재였습니다. 메시아는 주변의 모든 제국을 무너뜨리고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새로운 국제 질서를 세울 존재입니다. 그들은 비록 지금은 로마의 권세 앞에서 초라한 신세를 면하지 못하지만 메시아가 오면 그들의 신세가 완전히 바뀌게 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정치, 경제적으로 완전히 새로운 질서를 세울 수 있는 메시아에 대한 희망으로 그들은 어려운 세월을 버텼습니다.

 

이런 정치적 메시아니즘은 단지 유대인들만이 아니라 지난 인류 역사를 통해서 계속해서 반복되었습니다. 예컨대 히틀러는 1930년대 독일 사람들의 메시아였습니다. 히틀러가 1차 세계 대전 이후로 주눅 들어 있던 독일 사람의 기를 살려 줄 것으로 기대한 것입니다. 오늘 한국사회도 역시 이런 메시아니즘으로 가득합니다. 우리는 그런 위대한 정치가들을 기대합니다. 강력한 리더십이 있는 누군가 혜성처럼 나타나서 대한민국을 일등 국가로 끌어주기를 바랍니다. 성공한 CEO를 대통령으로 뽑으면 우리도 똑같이 잘 살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강력한 정치적 메시아를 꿈꾸고 있던 그들 앞에서 예수님은 고난 받고 십자가에 처형을 당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과 제자들이 이런 사태 앞에서 얼마나 당혹스러워했을는지는 충분히 상상이 갑니다. 예수 당신에게 그런 일이 일어나면 안 된다는 베드로의 만류는 그 자연인 베드로 한 사람이 아니라 초기 기독교 공동체 전체의 생각입니다. 고난을 당하고 십자가에 죽은 사람이 어떻게 메시아일 수 있느냐는 겁니다. 제자들과 초기 기독교에 포함된 많은 사람들이 이 문제를 놓고 많은 논란을 벌였을 겁니다. 옳다, 아니다 하고 말입니다. 그중에서 메시아의 고난을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들은 교회를 떠났겠지요. 고난과 죽음 앞에서 장사 없습니다.

 

이집트에서 홍해를 건너 광야로 탈출한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 광야의 시련 앞에서 어떤 태도로 나왔는지 여러분은 잘 아실 겁니다. 마실 물과 먹을 양식, 그리고 입맛을 당기를 가마솥의 쇠고기가 없을 때 많은 사람들이 그들을 이끌어준 모세를 원망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엑서더스 자체를 부정했습니다. 성서가 자세하게 설명하지는 않지만, 그 행간을 보면 아주 많은 사람들이 광야생활을 포기하고 애굽으로 돌아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광야의 고난 앞에서 가나안을 향한 하나님의 약속은 큰 힘이 되지 못했던 거지요. 메시아의 고난을 받아들이지 못한 초기 기독교인들과 비슷한 경우입니다.

 

메시아의 고난 문제가 얼마나 심각했는지를 우리는 베드로를 향한 예수님의 책망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장애물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을 생각하는구나!”(23절) 하고 꾸짖으셨다고 합니다. 이 책망도 단순히 베드로만을 향한 게 아니라 공동체 전체를 향한 것입니다. 메시아 고난을 거부하는 태도는 결국 예수님에게 걸림돌입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게 아니라 인간적인 생각이라는 겁니다. 초기 기독교는 이런 생각과 타협할 수는 없었습니다. 완전히 단절해야만 했습니다.

 

여기서 메시아의 고난을 부정한다는 게 무슨 뜻인가요? 이것을 단순히 교리의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현실적인 삶에서 생각해 보십시오. 초기 기독교인들 중에서 어떤 사람들이 고난당하는 메시아를 받아들이지 못했다는 것은 그들이 메시아 승리주의에 매몰되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들은 승리만을 모든 삶의 목표로 했습니다. 예수가 메시아라고 한다면 그는 실제적인 승리를 거둬야 하고, 자신들에게도 그것을 보장해야만 했습니다.

 

여러분, 이 세상을 잘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승리주의의 도도한 물결에 휩쓸려 있는지 아닌지를 두 눈 똑바로 뜨고 보아야 합니다. 비록 교회 공동체 안에 들어와 있다고 하더라도 이런 승리주의에 매몰된다면 우리는 메시아의 고난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교회가 얼마나 심각하게 승리주의에 물들어 있는지 제가 일일이 예를 들어가면서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한 가지만 지적하겠습니다. 요즘 기독교 티브이만이 아니라 일반 티브이 방송국에까지 활동 영역을 넓히고 있는 장 아무개 목사는 툭하면 “당신들 교회가 성장하지 못하는 것은 다 그것 때문이야.” 하고 큰 소리를 칩니다. 이런 진술이 전형적인 승리주의입니다. 이런 유형의 신앙에 물든 사람들은 메시아 고난을 받아들이지도 않으며,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도 알지 못합니다. 안타깝게도 한국교회는 이런 유형의 신앙에 완전히 포로가 되었습니다.

제 십자가를 지고...

 

옆에서 보기에 민망할 정도로 베드로를 책망하신 예수님은 이제 제자들에게 각자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당신을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24절) 여기서 ‘십자가’는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를 가리키는 게 아닙니다. 모두 예수님처럼 십자가에서 죽으라는 뜻도 아닙니다. 그것은 고난을 상징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고난이 있듯이 우리 예수를 따르는 제자들에게도 고난이 있습니다. 이 고난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다른 사람이 대신 말해줄 수 없습니다. 각각의 삶이 다르듯이 각각의 고난도 다릅니다. 예수 믿느라고 당하는 어려움이겠지, 하고 생각하는 분도 있을 겁니다. 믿지 않는 집으로 시집간 며느리가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서 당하는 어려움 같은 것들 말입니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믿지 않는 동료들과 술자리 하는 걸 고난으로 생각하고 하소연하는 분들도 있군요. 그런 어려움들은 오늘 본문이 말하는 십자가와는 거리가 있습니다. 그런 문제들은 각자 조금 지혜롭게 접근하면 해결될 수 있는 것들입니다. 본문이 말하는 십자가와 고난은 지혜로 해결될 문제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지혜가 없어서 십자가에 처형당하신 게 아닌 것처럼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가면서 감당하는 고난은 훨씬 본질적인 어떤 것을 말합니다. 그게 무엇일까요?

 

이를 알기 위해서 우리는 초기 기독교가 처한 상황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들은 두 가지 큰 세력의 틈바구니에 끼어 있었습니다. 하나는 유대의 종교권력이고, 다른 하나는 로마의 정치권력이었습니다. 유대교는 율법을 강요했으며, 로마는 황제숭배를 강요했습니다. 율법 없이 예수만을 믿는다는 사실은 분명히 십자가이며, 황제가 아니라 예수만이 ‘주’, 곧 퀴리오스라고 믿는다는 사실도 분명히 십자가입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그들이 예수의 제자로 살아가는 한 끊임없이 이런 종교적 선택과 정치적 선택을 강요받았습니다. 그것이 바로 그들이 감당해야 할 십자가였습니다. 경우에 따라서 그들은 순교자가 되기도 했고, 그것을 감당할 수 없는 사람들은 배교자가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참으로 험악한 세월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초기 기독교인들이 처한 상황을 실질적으로 받아들이기는 어렵습니다. 우리는 그런 강요를 전혀 받지 않는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기독교인이 감당해야 할 불이익은 거의 없으며, 있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심각하지 않습니다. 대한민국에서는 장로 대통령이 나온 뒤로는 오히려 기독교인이라는 사실이 기득권으로 작용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이명박 대통령이 장로로 있던 소망교회가 지난 몇 달 동안 수천 명의 신자들이 갑자기 늘었다고 합니다. 들리는 말로는 등록 신자들을 모두 받아들이지 않고 자격 심사 비슷한 걸 한답니다. 초기 기독교와 전혀 다른 한국의 상황에서는 예수를 믿는다고 해서 감수해야 할 고난은 전혀 없는 것 같습니다.

 

정말 그럴까요? 제가 보기에는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도 예수의 제자로 살아간다면 당연히 감당해야 할 십자가는 있습니다. 초기 기독교와 상황이 다르다고 해서 각자의 십자가가 없어질 수는 없습니다. 물론 초기 기독교 당시에는 종교의 자유도 없었고, 정치적으로도 민주화와는 거리가 멀었고, 인권이 완전히 무시되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지금 우리와 상황이 크게 다르기는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달라진 게 없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권력 중심으로 세상이 돌아갑니다. 로마 시대의 이데올로기는 ‘팍스 로마나’였습니다. 로마의 평화만 보장된다면 그 어떤 것도 희생될 수 있었습니다. 오늘도 역시 그런 절대적인 이데올로기가 작동됩니다. 학교 교육으로부터 기업과 문화, 심지어 법조계까지 돈이 완전한 권력으로 행세하고 있습니다. 2천 년 전과 다를 게 없는 오늘 이 시대에서 예수의 제자로 살면서 고난이 무엇인지 다가오지 않는다면, 우리는 아직 예수의 제자가 되지 못한 것이겠지요. 십자가와 고난이 사라진 게 아니라 우리의 제자도가 희미하다는 말씀입니다. 아닌가요?

 

여러분들이 이 문제를 조금 더 절실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보충 설명을 드려야겠습니다. 저는 앞에서 초기 기독교가 유대의 율법과 로마의 황제숭배를 강요받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런 상황이 오늘도 사실 다를 게 없습니다. 율법과 황제숭배의 핵심은 무엇인가요? 그리고 팍스 로마나와 황금만능 이데올로기의 핵심은 무엇인가요? 다른 건 접어두고 안식일 법을 향한 예수님의 투쟁만 생각해보십시오. 예수님은 안식일을 핑계로 인간을 수단으로 삼는 유대 종교권력과 싸운 것입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을 위해서 사람이 있는 게 아니라 사람을 위하여 안식일이 있다고, 정말 그 당시로는 혁명적인 발언을 하셨습니다. 그 결과가 바로 십자가 처형이었습니다. 만약 우리가 예수의 제자로 살아간다면 인간을 수단으로 만드는 악한 제도, 질서, 권력, 이데올로기와 투쟁해야 합니다. 그런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여러분이 잘 알 겁니다. 그것을 무조건 정치투쟁이라고 보시면 안 됩니다. 가정 안에서도, 교회에서도 인간이 수단으로 벌어지는 일은 많습니다. 어쨌든지 그런 투쟁에서 우리는 결국 크고 작은 고난을 당하겠지요. 어떻게 보면 요즘과 같은 극한의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양심적으로 사는 것 자체가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각자의 자리에서 그것을 감당하는 것이 바로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생명에 대한 약속

 

오늘 복음서 기자는 이렇게 “예수의 제자로 산다는 것”의 엄중함을 가르치는 것으로 모든 걸 끝내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좋은 약속을 주십니다.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지요. 우리처럼 평범한 사람들에게 무거운 짐만 주신다면 우리가 어떻게 예수의 제자로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제 목숨을 살리려고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며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얻을 것이다.”(25절) 이어서 “사람이 온 세상을 얻는다 해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능력으로 생명을 얻을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능력은 생명을 조금 연장하는 것뿐입니다. 특히 예수님의 부활 이후로 생명은 전혀 새로운 차원으로 변화되었습니다. 바로 그 부활의 생명은 예수의 제자들에게 주어진 참된 약속입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이 약속에 근거해서 꾸준히 예수의 제자로 용감하게 길을 갔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설교를 요점적으로 정리하겠습니다. 여러분, 예수의 제자로 산다는 것은 두 가지 사실에 자신의 운명을 건다는 뜻입니다. 하나는 제자가 감당해야 할 고난을 거절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부활의 생명에 대한 약속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전자는 여러분에게 두려움으로 다가올 것이며, 후자는 희망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부활 생명의 희망으로 이 세상에서 당해야 할 고난의 두려움을 넘어서 예수의 참된 제자로 살아가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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