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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항해하면서 발견한 다시 읽고 싶은 글을 스크랩했습니다. 인터넷 공간이 워낙 넓다보니 전에 봐 두었던 글을 다시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래서 스크랩할만한 글을 갈무리합니다. (출처 표시를 하지 않으면 글이 게시가 안됩니다.)

[빛을따라간사람들] 이성봉 목사

영성묵상훈련 한기호 전도사............... 조회 수 3000 추천 수 0 2010.04.18 08:1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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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이성봉.jpg   [빛을따라간사람들]  이성봉 목사

어린 시절

 

이성봉 목사님은 1900년 7월 4일 평남 강동군 간리에서 부유하지도 이렇다 자랑할 가문도 못되는 평범한 가정인 아버지 이인실과 어머니 김진실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일찍이 외조모의 강권에 못이겨 마음에도 없는 결혼을 하여 부부간에 사랑 없이 살았으며, 너무 빈곤하여 고통스럽고 가난한 생활을 해야만 했다. 이러한 현실의 고난을 감당하지 못하던 어머니는 급기야 자살을 결심하고 비상을 물에 타서 마시기를 두 번했으나 이상하게도 번번히 죽지 않고 살아났다. 두 차례의 자살시도가 실패로 끝나자 죽는 것도 마음대로 죽지 못하는 가운데 더욱 삶에 의욕을 잃고 암담한 심정으로 근근히 살던 어느 날 한줄기 밝은 빛이 비추었다.

 

어린 성봉이 여섯 살이 되던 해 드디어 이 가정에 복음이 들어 온 것이다. 그 후 식구들은 평양에서 40리 떨어진 중화 한다리라는 곳으로 이사를 한 후, 평양 선교리 감리교회까지 40리 길을 걸어다니며 주일 예배를 드렸다. 주일이면 성봉의 어머니는 닭 울기 전에 일어나서 새벽 조반을 지어 식구들을 먹이고, 40리 길을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빠짐없이 교회에 출석하였다.

 

어린 성봉은 천성이 착하고 순하지만은 않았다. 성봉이 7살 때 동생이 태어나고 부모님은 동생을 더 귀여워했다. 동생이 없을 때에는 부모님의 사랑을 독차지하였는데 모두 동생만 귀여워하고 자신은 찬밥신세가 되자 성봉은 동생을 질투하고 미워했다. 그러다 동생이 세 살되던 해에 병으로 죽자 앓던 이가 빠진 것 같이 몹시 시원해 했다. 아무리 좋은 옥돌도 다듬어 쪼개지 않으면 결코 아름다운 옥이 될 수 없다는 옛말이 있다. 하나님은 성봉의 이러한 육에 속한 성질을 제거하기 위하여 일찍이 그의 어머니를 통하여 매우 엄한 가정 교육을 받게 하셨다. 한번이라도 부모님의 명령을 거역하면 종아리를 맞든지 쥐가 우글우글 하는 광속에 갇히곤 했다. 어린 성봉은 이러한 체벌이 무서워서 부모님의 명령에 순종해야만 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나마 순종하는 훈련을 하게 하신 것이 훗날 훌륭한 영적 지도자로서 자질을 갖추는 밑거름이 된 것이다.

 

아홉 살이나 열 살 때였다. 부모님은 주일이라 다 예배당에 가시고 혼자 집을 보게 된 어느 날, 몰래 아버지의 돈을 훔치려고 계획한 후 전대에 묶인 돈을 풀고 있는데 갑자기 건넌방에 계시던 외조모님이 건너오셨다. 너무도 놀란 성봉은 어쩔줄 몰라 떨고 있었다. 만약 들키는 날이면 어머니로부터 호되게 벌을 받을게 뻔하기 때문에 너무 무서웠던 것이다. 그런데 막 두려워 떨던 바로 그 순간에 번개같이 무엇이든지 기도하면 다 이루어 주신다는 성경 말씀이 떠올랐다. 순간 반사적으로 얼른 돈과 전대를 가슴에 부여안고 이불을 뒤집어쓰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하나님 한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다시는 도적질하지 않겠습니다 …” 간절히 빌었다. 할머니는 문을 여시고 어린 것이 기도하는 게 기특해 보인 모양이었다. 성봉은 할머니가 다시 건넌방으로 건너가실 때까지 쉬지 않고 중얼중얼 기도했다. 그러자 할머니는 저렇게 믿음이 좋으니 나중에 큰 사람 될 거라며 칭찬하시고 건넌방으로 가셨다. 할머니가 건넌방으로 가시자 마자 성봉은 하나님의 말씀이 참이라며 감사하는 것도 잠시 곧 다시 욕심에 이끌려 전대에서 돈을 몇 푼 꺼내어 군것질을 했다.

 

그 후로 커가면서 성봉은 자신의 정욕에 따라 사는 생활을 하며 주님을 멀리하고 죄악을 누렸다. 예배를 무시하고 설교 시간에 졸다가 뒤로 넘어지는가 하면 여학생들을 구경하기 위해 교회에 나오기도 했다. 부흥회할 때 목사님께 잘 보이려고 은혜받은 척 침을 발라 눈물로 위장하고, 연보돈도 없으면서 괜히 손을 넣고 낸 것처럼 행세하는 가증스러운 사람이 되어갔다.

 

청년시절

 

처음부터 복음으로 변화를 받아 새사람이 될 것이라는 기대를 할만큼 양호한 사람은 사실상 거의 없다. 천로역정을 써서 천성을 향해 가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신앙의 길잡이가 되어준 존 번연 역시 주님을 알기 전에는 너무 욕을 잘하고 천박한 행동을 많이 했다. 하루는 번연의 욕하는 소리를 지나가다 우연히 듣게 된 소문난 욕쟁이 여자조차도 그의 욕하는 소리를 듣고는 듣기조차 두려워할 정도였으니 가히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이렇듯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기 전에 모습은 얼마나 추악한지 이성봉 목사님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나이가 들어 청년이 되어서는 더욱 악해져만 가는데 사는 게 마음대로 안되고 형편이 어렵다보니 하나님도 부인하고, 천당·지옥·내세도 없다고 하면서 세상을 저주했다. 18세가 되어서는 말할 수 없이 극도로 타락해서 술과 담배는 기본이고 화투·투전에 완전히 빠져버렸다. 나중에는 성격까지 나빠져서 어머니가 회개하고 예수님 잘 믿으라고 권고하면 조롱하고 비웃었다. 그럴 때마다 늙은 모친은 눈물로 하나님께 호소하곤 했다. 그러나 이성봉은 날이 갈수록 더욱 악해져만 갔고 하나님과 점점 멀어져가고 있었다.

 

회심하던 날

 

누군가 기도의 자식은 망하지 않는다고 했다. 자식을 향한 어머니의 간절한 기도는 반드시 응답하시는 하나님이 아닌가. 탕자 어거스틴을 성인의 반열에 오르게 한 그의 어머니 모니카, 무디의 어머니 벳시 홀튼, 18세기 영국의 성자라 불리우는 존 웨슬리의 어머니 수산나 웨슬리를 보면 이 말이 진리임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청년 이성봉이 21세가 되던 해 6월 24일이었다. 전날에 과일을 팔아 번 돈으로 술집에서 진탕 마시고 밤늦게 돌아오던 길에 갑자기 오른쪽 넓적다리가 뜨끔하고 쿡쿡 쑤시기 시작했다. 온몸에는 열이 오르고 이제 한 발자국도 걸을 수가 없게 된 것이다. 함께 놀던 친구들이 큰일났다며 마차에 싣고 거의 죽게 된 그를 집으로 데리고 왔다. 치료를 위해서 모든 약을 써봤으나 백약이 무효였고 병원에서는 골막염이라는 진단을 내렸는데 의사가 다리를 자르라고 했다. 앞으로 한창 나이에 살아도 병신으로 살게 될 인생을 생각하니 기가 막혔다. 돈벌어 놓고 늙어서 예수님을 믿겠다더니 여섯달 동안 평양 기홀병원에 입원하면서 논밭 모두를 병원비로 날렸다. 참으로 인생이 허무했다. 병상에 누워있는 동안 고통 속에서 잘라야 하는 다리를 보며 지난날 자신이 걸어온 길을 돌아보며 눈물을 흘렸다. 말로만 듣던 죽음이 닥치고 보니 겁이 나기 시작했고 무서웠다.

 

그때 머릿속으로 “너는 이제 죽어서 어디로 가려느냐 천국이냐? 지옥이냐?”를 묻기 시작했다. 천국은 없으면 안 가도 상관없지만 만약에 지옥이 있다면 큰일이었다. 어떻게 영원한 형벌을 받을 것인가 생각만 해도 두려웠다. 죽음이 가까이 오자 지난날의 죄와 잘못으로 인해 지옥의 자식을 자처하던 자신의 삶이 그렇게도 후회스러웠다. 그는 공포와 불안으로 떨다가 마침내 양심에 호소했다. “요만큼 살다가 죽는 것을 이렇게 죄를 많이 지었던고, 아! 나는 이 죄로 인해서 영원한 멸망의 구렁텅이로 빠지고 마는구나, 오 하나님이여, 나를 이 죄악에서 건지소서!”하고 대성통곡을 하였다. 그때 마침 어머니가 들어오셔서 성봉은 모친 무릎에 엎드려 눈물로 잘못을 사죄하고 자신을 위한 중보기도를 요청했다. 어머니는 기도를 해주시면서 “회개하라. 죄지은 자가 지옥에 가는 것이 아니고 회개하지 않는 사람이 지옥에 가는 것이란다… 하나님은 지금 네 기도와 나의 간구를 다 들어주실 것이다. 이제는 네 생사를 다 주께 맡겨라.” 하셨다. 이 말씀은 곧 그의 마음을 감화시키는 성령의 음성이 되어 그를 완전히 사로잡았다.

 

그날부터 이성봉은 새사람이 되었다. 하나님은 그의 눈물의 기도를 들어주시사 마음에 모든 공포와 두려움을 물리쳐 주시고 참평안을 주셨다. 세상에 태어나서 난생 처음 느껴보는 평안이었다. 당장에 성경부터 읽기 시작했다. 전에는 성경을 보아도 도무지 믿을 수가 없고 재미도 없는 얘기 뿐이라 맹물에 자갈 삶은 것 같아 읽어도 소용없었다. 연애소설보다 못한 책으로 여겨 보지 않던 성경인데, 이제는 좋아하던 모든 잡지 소설을 걷어치우고 성경을 보기 시작하니 성경 말씀이 금보다 더 귀하고 꿀보다 더 달게 느껴졌다. 또한 그때부터 불의한 습관인 술과 담배를 다 끊었다. 회개하여 성령이 임하니 심령에 기쁨과 감사가 충만했다. 과거에 지은 죄악의 공포는 사라지고 지금 그의 눈앞에는 주 예수님과 천국의 영광만이 함께하고 있었다. 할렐루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5:17).

 

애국청년

 

이성봉 청년은 타락한 생활을 하던 때에도 타고난 정의감 때문에 나라를 위해 1919년 독립운동단체인 ‘대동회’에 가입했다. 상해임시 정부를 후원하는 군자금을 모금하며 비밀 결사를 하고 좁은 산중에 혹은 골방에서 비밀회의를 가지며, 일본에 대한 증오심에 불타올라 피끓는 열정으로 조선의 독립을 위해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그러나 나중에 이것이 탄로나 모든 동지들이 검거되었다. 일부는 사형을 당하고 십수년씩 심한 옥고를 치르게 되었는데, 이성봉 역시 일본 순사가 그를 체포하기 위해 집안까지 들이닥쳤다. 하지만 갑자기 생긴 병으로 인하여 꼼짝도 못하고 누워만 있던 이성봉은 숨만 쉬고 죽어가는 송장같은 상태였다. 그래서 더 이상 어떻게 할 수 없게 되자 도로 집으로 보내고 감시만 하고 있어야 했다.

 

이성봉의 병이 3년씩이나 진행되는 동안 사건은 낙착되고 동시에 기적같이 병도 깨끗이 나았다. 그리고 잠시 경찰서에 불려가서 5일간의 유치장 신세를 져야 했으나 나이 어린 사람 징역까지 보낼 것 없다고 서류만 작성하여 넘기고 다시 석방되었다. 그는 사형선고와 오랜 옥고를 치루기도 전에 병상에서 지내는 동안 사건이 종결되면서 병도 낫고 자유의 몸이 되자, 자신의 삶 가운데 은밀하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깨달았다.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8:28) 하신 그대로였다. 가장 적당한 때에 주님께서 부르셔서 아직은 연약한 자신을 보호하시고 전적으로 헌신할 수 있도록 환경을 도우신 것을 결코 부인할 수 없었다. 이성봉은 이러한 주님의 깊은 사랑과 은혜를 체험한 후 병중에 약속한 대로 사명의 길을 걷기 위해 강의록을 사다 열심히 독학을 하며 앞날을 준비했다.

 

불타오르는 사명감

 

이윽고 1925년 그의 나이 26세 되던 해에 불타는 사명감으로 신학교에 들어가기를 무척이나 원했다. 그러나 중학교도 나오지 못한 무학자를 어느 신학교에서든 받아 줄리 만무했다. 사명감에는 불탔어도 참으로 답답한 일이었다. 그러다 때마침 성결교 계통의 동양선교회에서 운영하는 성서학원을 알게 되었다. 그곳에서는 밥도 먹여주며 공부를 시킨다고 하기에 한줄기 희망을 기대하며 당장에 서울로 올라갔다. 성서학원에서 그를 받아주니 사명에 불타오르던 이성봉은 그렇게도 소원하던 신학공부를 할 수 있게 되었다. 3년 동안 신학교에서 주님은 불가마에서 빚어내듯이 그를 하나님의 일꾼으로 만들어 가셨다. 지적으로는 별것 없었지만, 영적으로는 말씀과 신앙을 통하여 깊이 지도해 주시는 선생님들이 계셨기에 항상 충만한 은혜가 넘쳤다. 무엇보다도 회개의 역사가 강물같이 일어났다. 주님께서 밝은 빛으로 강하게 조명하심에 따라 그는 심장을 도려내듯 애통하며 회개했다.

 

이성봉은 이렇듯 성령의 강한 역사로 회개할 때 비로소 까마득히 잊고 있던 작은 일 하나까지도 모두 자복하게 되었다. 한번은 그가 14세 때 기차를 타면서 외소한 몸을 보여가며 키를 약간 줄이고 12세라고 속여 반표를 끊었던 일이 생각났다. 그래서 이것까지 회개하라는 성령의 민감한 음성에 순종하여 결국 중화역장에게 편지와 함께 기차 요금을 4배나 해서 갚았다. 이미 많은 세월이 흘러 아무도 이 일을 기억하지 않고 자신만이 토설치 않으면 아무 일도 없으련만, 주님은 그의 심령을 이렇듯 세밀하게 작은 죄 하나까지라도 깨끗이 씻어가며 온전한 그릇으로 빚어내셨던 것이다.

 

편지를 보낸 얼마 후에 총독부 철도국장한테서 사죄장과 동봉했던 돈이 도로 돌아왔다. 그 사죄장에, “세상 사람들은 남을 속이지 못해서 애쓰는데 너는 어쩌면 그렇게 10여년 전에 지은 죄까지 다 회개하느냐? 네가 믿는 종교는 참으로 귀한 종교로구나. 너 같은 사람만 있으면 경찰서는 무슨 소용이 있으며 재판소는 무슨 상관이 있겠느냐?

 

이 사실은 시일이 이미 지나고 문부를 상고할 데도 없는 까닭에 우리가 받은 줄 알고 도로 보내니 학비에나 보충하라.”고 했다. 사죄장과 돈이 도로 온 그날의 기쁨은 어디에다 비길 데 없었고, 그 후 주인에게 줄 수 없는 돈들은 모두 교회에 바치니 마음이 한없이 기쁘고 즐거웠다.

 

이성봉의 나이 28세 되던 해 3월에 신학교를 졸업하게 되었다. 짧은 시간이었으나 그는 이곳에서 비춰진 밝은 빛으로 인해 배운 철저한 회개와 합당한 열매 맺는 삶을 통하여 점점 사명이 뜨거워졌다. 이제는 이 빛된 복음을 증거하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어 전도에 대한 소원이 간절하였다.

 

곳곳마다 일어나는 회개의 역사

 

신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경기도 수원에서 개척하라고 파송을 받아 첫 임지로 발을 옮겼다. 셋집을 얻어 예배를 드리면서 전도하기 시작하여 매일같이 개인전도와 가정 집회, 노방 전도로 쉬지 않고 열심히 뛰어 다녔다. 주님은 깨끗한 심령으로 준비된 그릇에 귀한 영혼을 담아 내듯이 구원받을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는 축복을 허락해 주셨다. 가는 곳곳마다 기사와 표적이 많이 일어났다. 병자가 일어나고 귀신들린 자가 놓임 받는 등 살아 계신 하나님의 권능의 역사로 많은 사람들이 주께로 돌아왔다. 농촌에 나가서 나팔을 불고 외치면 사람들이 모여들고 불같은 말씀을 선포하면, 그 즉시 영혼들이 회개하고 돌아와서 불일 듯 교회가 일어났다. 곳곳마다 회개의 역사가 강하게 일어났다. 지금까지 오랫동안 사람들의 삶속에 깊이 파고든 온갖 귀신들과 우상들이 성령의 불칼에 살라져 훼파되었다. 또한 술로 인해 육신과 가정이 파괴되었던 사람들과 도박 등 불의한 습관을 행했던 자들이 과거에 지은 죄를 버리고 회개하며 하나 둘씩 돌아오게 되었다.

 

사람들마다 마치 주님 앞에서 자신의 모습에 절규하던 세리와 같이 부르짖었다. 그 중에 어떤 이는 자기의 죄를 7가지의 내용으로 적어서 주님 앞에 보이며 통곡을 하였다. 그는 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한다는 설교를 듣고, 실천하기 위해 과거에 황해도 국무농장에 사무원으로 있을 때, 공문서를 위조하고 공금 벼나락 열가마를 횡령한 죄를 회개하면서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하다가 이성봉 전도사에게 문의하였다. 그러자 그 농장에 이 같은 사실을 편지로 알려 사죄하라는 말을 듣고 안절부절 하게 된 일이 있었다. 그는 이 일이 오래되었고 이것이 알려지면 차후의 입장이 난처해 질 것을 생각해서 대신 모든 사기친 돈을 속죄하는 마음으로 집을 팔아서라도 교회에 바치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성봉 전도사는, “교회가 도둑의 돈을 받는 곳이 아니오. 물론 주인을 찾을 수 없을 경우에 그렇게 할 수도 있지만 이 경우에는 그 주인에게 상환하는 것이 도리입니다.” 하고 자신의 체험담을 통해 주님의 위로와 은혜를 간증하며 설득하자, 그는 할수없이 그렇게 하기로 약속하고 돌아갔다. 하지만 편지를 쓰기란 또 그것을 써서 부친다는 것이 그리 쉽지 않은 문제였다. 몇 번을 고민과 번민 속에서 고통하다가 마침내 자복서를 써서 보내고 주님의 뜻을 기다렸다.

 

며칠 후에 답장이 왔다. 가슴을 졸이며 편지를 뜯어보는데 편지의 내용은 사실에 대한 솔직한 고백에 감사하고 모두 용서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는 뛸 듯이 기뻐하며 농장 주임의 편지를 가지고 교회로 돌아왔다. 모든 교인들 앞에서 회개하기 전의 고통과 회개 후에 얻은 사죄의 기쁨을 체험한 대로 성령이 충만하여 간증했다. 이 간증을 들은 온 교회는 기쁨과 은혜가 충만했다.

 

교회는 더욱 뜨겁게 부흥하고 매일 밤 돌아가면서 성도들 집에서 가정 집회를 열었다. 그때 어떤 신자의 집 건넌방에 관운장 사당을 차려 놓고 점치는 무당이 살고 있었다. 그런데 이 무당은 7개월 째 전신 불수가 되어 피골이 상접한 채로 고통가운데 신음하고 있었다. 그러던중 마당 밖에서 들리는 이성봉 전도사의 설교를 듣고 누워있던 방에서 눈물을 흘리며 예수님을 영접하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섬기던 귀신 단지와 우상 사당의 모든 물건들을 불태우기로 결단했다. 동네 사람들이 다 모인 가운데 찬송을 부르며 그 모든 우상을 불사를 때 주님의 영광이 크게 나타났다. 그 무당 할머니를 위해 기도하니 그 이튿날 말끔히 나았고, 주일에는 교회지 나와 예배를 드리고 완전히 새사람이 되었다. 이 일이 있고 난 후에 교회는 더욱 주의 은혜로 든든히 서가며 얼마동안 첫 사역지에 대한 성공적인 목회가 이루어가고 있었다.

 

시험의 돌풍에서도

 

무당할머니 집에서 신유의 기적이 일어나 주의 영광이 나타나자 교회는 더욱 크게 부흥했다. 그러나 은혜가 많은 곳에 사단의 역사도 많다고 했던가. 한 달 정도 지난 후 그 집에서 예배를 드리고 집에 돌아와 잠을 자는데 갑자기 밖에서 누가 문을 두드렸다. 나가보니 수원교회에서 함께 시무하던 00 여전도사가 피를 토하면서 운명하니 속히 오라는 것이었다. 청천벽력같은 소리라 급히 가보니 사람은 인사불성인데 의사는 음독 자살이라고 했다. 이 일로 인해 이성봉 전도사와 수원교회는 큰 타격을 입게 되었다. 사람들은 저 마다 여전도사와 이성봉 전도사의 관계를 의심하고 교회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다. 견딜 수 없는 시험가운데 억울한 누명을 받는 동안 신자들은 시험에 들고 교회를 떠나갔다.

 

그러나 이성봉 전도사는 모든 것을 주께 맡기고 기도하며 묵묵히 자리를 지켜 나갔다. 그 후에 잠깐 정신착란으로 그렇게 되었음이 밝혀지고 주의 은혜가 더하여 일년 동안 예배당을 위하여 기도한 문제가 해결되었다. 미국에 있는 어느 성도가 보낸 헌금으로 예배당을 건축하였던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로 다른 모든 문제가 해결되고나니 떠나갔던 무리들은 다시 하나 둘씩 돌아와 4백명 정도가 되었다.

 

이성봉 전도사는 수원교회 목회시절에 늘 몸이 쇠약하여 오후마다 열이 오르는 등 원인 모를 병에 시달렸는데, 어느 날은 너무 열이 올라 정신이 혼미하였다. 그 때 공중에서 갑자기 소리가 나기를, “이성봉 전도사는 이제 살기 어렵다. 아마 세상을 떠날 것이다.” 하는 것이었다. 그 소리를 듣는 순간, “내가 죽으면 어디로 가지? 천국 갈 준비는 다 되었는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신학교를 마치고 주님을 위해 일한다고 하면서도 아직 철저한 회개를 하지 못한 것이 생각나 두려웠다. 그래서 속히 회개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아내를 불러 증인으로 세워가면서 과거의 다 말못한 죄를 종이에 써가며 자복했다.

 

예전 총각시절에 어떤 처녀를 사모하여 혼자 연애하던 사실을 아내에게 고백할 때 갑자기 어디서 “저 자식이 회개하려면 저나 회개하지 남은 왜 끌고 들어가는 거냐?” 하고 큰 소리로 외치는 여자의 음성이 들렸다. 이전도사는 깜짝 놀라며 아내에게 말했다. “저 소리, 저 큰소리가 들리지 않소?” 그러자 아내는 “안 들리는데요” 했다. 그는 곧 이것이 빛의 열매를 맺는 회개를 못하게 하기 위한 사단의 방해인줄 알고 더욱 열심히 회개했다. 그러나 사단은 그 때마다 강도를 높여서 참소하는데 회개해봐야 아무 소용없다는 것이었다. 그래도 말씀을 의지하고 주님의 십자가 보혈의 은총만을 믿고 실오라기 같은 죄 하나라도 생각나면 회개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사단은 계속해서 주님 없는 빈 십자가를 보여주며 속이고 그의 회개를 방해했다. 그래도 회개를 중단하지 않았다.
이렇게 사단의 방해를 물리쳐가며 한참을 회개하는 동안 하늘로부터 십자가가 나타났다. 거기에는 분명 피 흘리시는 주님이 달려있었다. 그 광경을 보고 너무 감격한 이전도사는 주님 달리신 십자가 앞에 애통하며 더욱 통회자복했다. 나 위해 피 흘리신 주님의 십자가를 붙드는 것 외에는 소망이 없었다. 주님은 회개하는 그를 하늘나라로 이끌어 수정같이 맑은 요단강물과 화려하고 찬란한 천성을 보여주시면서 그 영혼을 위로하셨다. 그리고 갑자기 어디선가 찬송소리가 들리는데 정신이 들어 깨어보니 아프던 몸이 거짓말같이 싹 나았다. 이전도사는 이때의 체험을 통해 더욱 주님을 의지하게 되었다. 환난과 고통 가운데서도 소망을 잃지 아니하며 잠시 사는 세상살이보다는 주님 계신 영원한 천국을 심히 사모하고 그리워하게 되었다.

 

목포교회로

 

수원교회가 어느 정도 안정이 되자 총회에서는 목사를 모실 자격이 있는 교회이니 새로운 목사를 부임토록 하고 이성봉 전도사는 멀리 전라도 목포로 파송받게 되었다. 그러나 막상 수원교회를 떠나자니 수년간 어려움 가운데서 개척한 교회라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육정으로 생각하면 기가막힌 일이지만 하나님의 뜻에 모든 것을 맡기고 순종했다. 목포교회는 장석초 목사가 개척한 후 후임으로 온 목사가 대전에 감리사로 가게되어 임지가 비어있는 곳이었다. 말이 교회지 조그만 셋방에 불과 사오십 명 정도 모이는 작은 교회였다. 하지만 아직 복음을 듣지 못하고 구원받지 않은 영혼이 가득 넘치는 지역이었기에 일할만한 곳임을 확신한 이전도사는 결사적으로 전도와 심방을 해가며 목회에 달려들었다. 성도들도 신임 전도사의 열정에 감동하였는지 함께 기도하며 온 몸을 다바쳐 합력했다. 그랬더니 하나님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도록 하시었다. 이번에도 미국의 어떤 성도를 통하여 풍성한 물질을 보내어 주셔서 50여평의 훌륭한 교회를 건축하도록 축복해 주셨다.

 

그러나 사단은 목포교회에서도 여러 가지 시험으로 이전도사를 괴롭혔다. 한번은 모 신문사 사장의 소실이 교회에 나와서 은혜받고 새사람이 되자 더 이상 죄악의 자리에 있을 수가 없어서 결국 그 집을 나오게 되었다. 화가난 신문사 사장이 언론을 이용하여 “목사는 연애 박사인가?”라는 제목으로 뒤집어 씌웠다. 그런데 문제는 목포교회 한 청년이 그 기사를 낸 신문 기자에게 항의하며 구타해서 신문기자가 경찰에 목사가 신자들을 충동하여 자신을 구타한 것처럼 고소한 것이다. 그 후 경찰에서 호출이 왔는데 당장에 출두하라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성봉 전도사를 향해 온갖 욕설과 비방을 하며 경찰서 안에서 기도하는 그를 비웃고 조롱했다. 하지만 주님의 모욕당하심을 기억하고 끝까지 참고 인내하며 대항하지 않았다.

 

또 한번은 청년 몇몇이 짜고 이전도사를 교회밖으로 몰아내기 위해서 중상모략하는 서류를 작성하여 총회에 보고하였다. 상부에서 내려와 조사해보니 아무일도 없는지라 사건은 잘 해결되었지만 그 후로 몇 명의 청년들이 교회를 나오지 않는 것이었다. 그중에서 교회에서 제일 말썽을 부리고 괴롭히던 청년은 무서운 병마에 시달려 거의 죽게되었다. 하지만 이전도사는 그를 찾아가 진심으로 용서하고 위로하며 기도해 주었다. 어디 이뿐인가! 그토록 아끼고 사랑하였던 가정이요, 주님이 맡겨주신 양이던 어떤 부인이 점점 신비주의로 빠져 탈선하기에 몇 번 충고한 적이 있었다. 그래도 말을 듣지 않아 교회에서 책벌하였다. 그러자 그의 아들이 분을 품고 이전도사를 찾아와 멱살을 잡고 끌어내어 수없이 주먹과 발로 때리고 치며 폭행을 가하고 욕을 해가며 모욕을 했다. 어떻게 성도라면 존경하여 믿고 따르던 목회자에게 하루 아침에 이렇게 행할 수가 있단 말인가. 그러나 이전도사는 매를 맞고 욕을 먹어가면서도 저항하거나 싸우지 않았고, 이번에도 역시 끝까지 참고 기도하며 인내했다. 진정 원수까지도 사랑하라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사랑을 실천한 것이다. 주님은 이것을 인정하여 주셔서 많은 축복을 허락해 주셨는데, 32세에 목사안수를 받고 교회는 다시 부흥하여 6년간의 목회 가운데 많은 지교회를 세우는 성과를 이루게 하셨다.

 

신의주교회 목회시절

 

35세 되는 봄에 신의주로 부임하게 되었다. 이성봉 목사는 이곳에서 지금까지 맛보지 못했던 교회의 부흥과 목회의 즐거움을 느끼며 일하였다. 그 동안의 목회 경험 때문인지 교회조직을 새로이 편성하고 기도와 성경연구에 힘쓰며 전도와 봉사를 균형있게 해나가는 동안 성도가 일천명이나 되는 큰 교회로 성장했다. 하지만 하나님은 때때로 여러 가지 모양으로 이목사를 다루셨다. 특별히 그의 사생활까지도 정화시켜주셨다.

 

한번은 성탄절이라고 어느 신자가 닭을 한 마리 가져왔다. 아내는 닭을 잡아 달라며 졸라댔으나 이목사는 닭고기는 먹고 싶어도 닭은 잡기가 싫었다. 목사에게 아낙네가 하는 일을 다 시킨다면서 아내를 나무랐다. 그 당시 아내는 임신 중이어서 짐승을 죽이는 잔인한 노릇은 하기 싫어했다. 그때 마침 교회 청년이 찾아왔길래 닭을 죽이는 것을 그 청년에게 대신 부탁하였다. 그래서 그날 닭고기국은 잘 먹었다. 그 이튿날 12월 마지막 주일은 시베리아 찬바람이 무섭게 휘몰아 치던 몹시 추운날이었다. 이 목사는 기도실에서 기도하며 설교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아내가 부엌에서 다급하게 부르며 수탉이 도망가게 생겼으니 잡아 달라는 것이었다. 주일 오전에 그것도 설교를 준비하는 목사에게 이런 일을 시킨다며 불평하던 이 목사는 하는 수없이 수탉을 잡으러 나갔다. 그런데 수탉을 잡으려는 순간 닭이 홰를 치면서 두 발톱으로 엄지손가락을 찢고 달아나 버렸다. 손에서는 피가 흐르고 꽁꽁 언 손가락은 얼마나 아프던지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너무 고통스러운 나머지 화가난 이목사는 참다못해 아내를 실컷 원망하며 야단치고 말았다.

 

신의주 교회 목회시절

 

주일 날 아침에 수탉으로 인해 손가락이 찢기고 나니 이성봉 목사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 분을 참지 못하고 아내에게 호통을 쳤다. 그리고 난 후 스치는 예감이 아무래도 이상했다. ‘하필이면 주일 날 설교 전에 이런 일이 일어났나? 무슨 까닭이라도 있는 것인가’라는 생각이 스치자 즉시 방안에 들어가 주님께 기도했다. 그때 주님께서 마태복음 23장의 말씀을 주셨는데 “화있을진저 바리새인과 서기관 같은 자여”하시며 무거운 짐은 남에게 지우고 손가락하나 움직이기 싫어하는 게으름과 수고를 번거롭게 여기고 아내를 부려 먹으려한 못된 심사와 행동을 책망하셨다. 이성봉 목사는 무릎을 꿇고 “주여, 감사합니다. 만 번 죽어 마땅한 자식을 이만큼 징계하여 깨닫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다시는 나 하기 싫은 일을 남에게 미루지 않겠습니다”하며 회개하였다.

 

당시 목사님은 은혜와 은사가 충만하였다. 그러자 성도들도 구름떼 같이 몰려들었고 성령의 기적이 강하게 나타났다. 질병이 치유되고 회심하는 역사가 많이 일어났다. 자연히 교회는 부흥되었고 이만하면 제법 능력 있고 영적으로 장성한 목사가 되었다고 은근히 마귀는 부추기고 있었다. 그러나 이날 이후로 자신이 얼마나 연약한 죄인임을 깊이 깨닫게 된 것이다. 이 일로 목사님은 사소한 일도 놓치지 않고 자신을 성찰하며 회개하는, 성숙한 사역자가 되기 위해 기도하고 결단했다.

 

전국 부흥사로 임명을 받고

 

1937년 38살의 나이에 이성봉 목사는 단체부흥사의 사명을 받게되었다. 그런데 부흥 목사로 임명받기 전에 이상한 꿈을 꾸었다. 꿈에 김익두 목사님이 오시더니 옆구리에 손을 대시며 기도하자, 뜨거운 불이 폭발하면서 전신을 휘감았다. 너무 뜨거워 아우성을 치며 잠에서 깨어났다. 꿈속에서 어찌나 뜨겁고 혼이 났던지 온 몸에 땀이 흥건했으나 이상하게도 심령이 매우 상쾌해짐을 느꼈다. 성령의 뜨거운 체험을 한 것이다.

 

이날의 체험 후 가슴은 더욱 주님께 향하고 사명대로 일생을 바치며 일하다 죽으리라고 다짐을 하였다. 회갑까지 일천 교회를 세우리라는 결단도 내렸다. 부흥목사로 임명받고 전국 방방 곳곳을 다니는 동안 교회마다 성령의 강한 역사가 불같이 일어났다. 죄인이 회개하여 새 사람이 되었고, 질병이 고침 받고, 귀신이 쫓겨나가고, 교회가 생명력을 얻어 부흥하는 놀라운 역사들이 계속 일어났다.

 

만주 해림교회에서 집회할 때 나정순이란 여집사가 있었다. 마음이 착하고 어진 여인이었는데 남편은 이런 부인을 두고 어린 소실하나를 데려왔다. 그리고 밤마다 이부자리를 깔아놓으라며 눈앞에서 추한 행실을 드러내 부인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그러나 나집사는 그들을 원망하지 않았다. 도리어 남편과 소실이 윗방에서 색욕에 빠져 재미있게 지내는 동안 아랫방에서 밤을 새워가며 남편과 소실을 위해 기도했다. 그러는 동안 나집사는 소실을 꼭 자기 동생같이 사랑하여, 글도 가르쳐 성경도 읽게 해주고, 예배당에도 함께 데리고 다녔다. 그리고 밤이 되면 또 다시 소실은 남편과 함께 윗방에 들어가 지내고 나집사는 아랫방에서 기도하는 생활이 반복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기도의 응답으로 남편의 마음이 바뀌기 시작했다. 결국 남편과 소실은 헤어지게 되었다. 떠나는 날 소실은 나집사에게 “형님 집에 와서 이렇게 큰 구원을 받고 가게 되어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영감 떨어지는 것은 시원해도 형님 떠나는 것은 섭섭합니다.”하며 울었다.

 

이후에 소실과 작별한 남편은 나집사와 함께 집회에 참석하였다. 그 집회에서 말씀에 큰 은혜를 받은 남편은 지난날의 허물을 돌아보며 철저하게 통회 자복을 하였다. “나는 돼지 같은 놈입니다. 좋은 부인 두고도 더러운 행동을 한 것 천벌 받아 마땅합니다.” 그날 교회는 더욱 성령이 충만했고 회개의 바람이 강하게 불었다.

 

멈출 수 없는 사역

 

이성봉 목사는 교단문제로 인하여 39세에 휴직청원을 내고 40세에 신학을 연구하러 일본으로 건너갔다. 거기서도 교회와 일본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며 부흥회를 인도하고 다녔다. 그리고 이듬해인 1941년에 만주 봉천 중앙교회에 목사로 임명받아 사역하게 되었다. 교통이 불편하였지만 집회 때마다 사력을 다하여 인도했다. 혹한의 강추위를 온몸으로 견뎌가며 집회장소를 찾아가기도 하였다. 먼 곳에 갈 때는 가까스로 차편을 얻어 타면 콩나물 시루처럼 실려 열 시간 이상을 서서 가기도 했다. 제대로 먹지도 못한 채, 집회장소에 도착해서 기진맥진한 상태로 골방에 들어가 쓰러진 채로 기도하다 잠들기도 여러 번 했다. 만주에서의 사역은 이처럼 고되고 힘들었지만 주님의 지상명령인지라 뒤돌아 설 수도 없었다.

 

동만 목단강을 지나 목사라는 곳에서 집회를 할 때 어머니가 위급하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집회중인지라 고향에 갈 수도 그렇다고 안갈 수도 없는 난감한 처지였다. 어머니가 돌아가시면 더는 이 땅에서 효를 다하지 못한 게 한으로 남을 것 같아 어떻게 해서든지 가고싶었다. 하지만 “전쟁에 나간 사람이 부모가 병들었다고 돌아갈 수 있느냐?” 이것은 할 수 없다는 판단에 어머니를 주님께 맡기고 기도하며 그냥 집회를 계속 인도했다. 마침내 별세 소식이 들려왔다. 예정된 모든 집회를 마치고 밤차로 달려가서 수고한 분들을 찾아 뵙고 무덤에 가서 기도하고 다시 집회를 위해 길을 떠났다. 이성봉 목사의 어머니는 별세하실 때 천사가 와서 가잔다고 하시면서 고요히 운명하셨다고 한다. “아들을 부를까요?”하니 “그럴 필요 없습니다. 천국 가서 만날텐데…”라고 하시면서 돌아가셨다. 주님은 당신의 종을 위해 사명을 마치도록 격려하셨다. 어머니에 대한 임종의 아름다운 소식을 듣게 하심으로써 소망과 위로를 주셨다.

 

인간의 애정 가운데 혈육의 정만큼 강한 것도 없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 노년에 얻은 아들 이삭을 모리아산에 제물로 바치라 하실 때 아브라함의 마음이 어떠했겠는가. 마찬가지로 그리운 어머니가 죽어가고 있음을 알면서도 생사를 완전히 주님께 맡기고, 아브라함처럼 혈육의 정을 끊고 묵묵히 사명의 길을 걸어가야 했던 이성봉 목사. 그분의 가슴 역시 갈기갈기 찢어지는 고통을 어찌 겪지 않았으리요. 그러나 주님의 종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라면 이 모든 것까지 주님께 맡기고 고난의 십자가를 지고 험난한 길을 가야한다. 이것이 주님의 뜻을 이룰 수 있음을 그는 잘 알았기에 인내하며 승리할 수 있었다.

 

평양노회 집회

 

평양 집회에서 어느 목사가 이성봉 목사에게 자기 교회 집회를 인도해 달라고 하면서 그 지역 형사부장을 함께 초대했다. 그래서 세 사람은 우연찮게 점심을 같이 먹게 되었는데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식사를 마치고 나가면서 그 목사는 담배 한 갑을 형사의 양복주머니에 넣어 주었다. 그리고는 “잘 부탁드립니다.”라면서 눈을 깜빡거렸다. 순간 그 장면을 목격한 이성봉 목사는 무언가 잘못되어가고 있음을 느꼈다. 꾹 참고 있다가 그 목사의 집에서 둘이 있게 되었을 때 이 일을 책망했다. “불의한 수단을 사용하여 목적을 정당화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담배를 수단으로 집회를 허가 받는 일은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아닙니다.”라고 말했다. 이런 인간적인 방법으로 성령이 이끄시는 집회를 단순히 사람들의 모임으로 바꾸어서는 안되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그 목사 역시 말하기를 “목사인 낸들 왜 그것을 모르겠습니까? 그러나 나는 지옥으로 가더라도 저 목마르고 굶주린 양떼들, 잠깐이라도 집회를 통하여 말씀으로 영적 기갈을 면케하려는 뜻에서 수단을 부린 것뿐입니다.”라고 변명하기 시작했다. 인간적인 측면에서 보면 동정이 가고 이해할 만 하다. 기근에 양식이 없어 죽어 가는 자식 앞에 부모가 자기 살이라도 베어주는 식으로 영적인 부모로서 젖이 나오지 않아 눈물로 애통하는 심정으로 어린 양들에게 생명의 양식을 먹이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교회와 성도는 하나님의 것이니 인간적인 수단과 방법으로 기르면 전부 음행의 자식을 낳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게 이성봉 목사의 생각이었다. 그래서 “차라리 교회를 헤쳐 버리고 목사 노릇을 그만두더라도 그럴 수는 없습니다”하고 피차 울면서 기도하고 작별했다. 이성봉 목사는 언제나 성령의 세미한 음성에 항상 양심의 귀를 기울였다. 주님의 말씀 따라 빛과 어둠을 철저하게 구별하였다. 어두운 시대에 밝은 빛을 비추는 진정한 하나님의 종이었다.

 

주님의 발자취를 따라

 

사리원 경찰서에 있는 형사 부장 호시는 기독교를 박해하고 특히 목사들을 많이 괴롭혔다. 이성봉 목사의 부흥회 설교를 들은 사람들을 취조한 후 강제로 이성봉 목사를 잡아들였다. 그리고 의도적으로 모욕적인 언행을 퍼부어 가며 괴롭혔다. “너는 어찌하여 이 시대에 이런 설교를 했느냐?”고 호시 형사가 묻자 이성봉 목사는 그것이 자기 사명이라고 떳떳이 대답했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호시 형사는 “이 자식아, 만주에서나 그런 소리하지. 우리 나라에 와서 왜 하느냐? 어디 콩밥 좀 먹어봐라. 나는 여태껏 너를 만나려고 하던 차였다”며 소리를 질렀다. 팬티까지 발가벗기고 추운 맨바닥에서 잠을 재우고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온갖 욕을 해가며 조롱을 했다. 적신을 드러낸 초라한 자신의 모습 앞에서 흩어진 자존심을 추스를 겨를도 없이 비통한 심정으로 눈물을 삭혀야만 했다.

 

그렇지만 어느 누구하나 감옥에 와서 면회를 해주거나 옷 한벌 갖다주는 사람이 없었다. 지난날 사람들에게 베풀었던 온정과 수고로운 손길을 기억하는 사람을 찾아 볼 수 없었다. 홀로 감옥에서 지내는 동안에 사람의 정이 그리웠다. 하지만 사람을 의지했던 자신을 곧 반성했다. 사람을 사랑하되 믿지는 말라고 하지 않았던가. 차가운 마룻바닥에 내던져진 육신처럼 그의 영혼은 버림받은 것처럼 느껴져 한없이 서글펐다.

 

호시 형사는 모든 사정을 안다는 듯이 더욱 수치스럽게 놀려댔다. 마귀는 계속해서 인내의 한계를 드러내고, 혈기와 분을 내어 주님의 영광을 가리고 사역을 망쳐놓으려고 계속 자극하고 있었다. 인간은 수치와 모욕을 당하거나 갑자기 생각지도 않은 손해와 상처를 입게 될 때 본능적으로 공격하거나 방어하는 자세를 취하게 된다. 극심한 환난이나 은밀하고 달콤한 유혹을 받으면 자신의 인격이 드러나고 속에 있는 온갖 악심이 자제할 수없이 나타나기 마련이다. 이때 자신을 제어하지 못하고, 혈기를 나타낸다면 그는 더 이상 의의병기가 되지 못한다. 마귀는 이성봉 목사가 이러한 거칠고 사나운 환경 가운데 수치와 모욕을 참지 못하고 죄를 짓도록 유혹했다.

 

이성봉 목사는 그때마다 십자가에서 고난 당하신 주님을 생각했다. 온갖 조롱과 침 뱉음, 매를 맞으면서도 침묵하셨던 주님, 우리 주님은 마지막 운명하실 때도 거적때기 하나 대충 걸치고 인간으로서 받을 수 있는 모든 창피함을 다 당하셨건만… 그것을 생각하니 자신도 벗은 몸으로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 같아 오히려 감사가 흘러나왔다. 아무 것도 아닌 자신이 주님의 영광스런 발자취를 따를 수 있는 게 영광이라고 여겨졌다.

 

그리하여 목사님은 자신을 괴롭히는 자에게 혈기내거나 대항하지 않고 원수까지 사랑하라는 참된 계명을 실천할 수 있었다. 그러는 가운데 13일만에 검사국으로 넘겨졌다. 그러나 이성봉 목사를 검사국에 넘긴 호시 부장은 발진티푸스란 병에 걸려 발광하다가 한 달만에 죽었다. 또한 다른 부장이 대리로 와서 근무하다가 역시 죽었고, 다시 5일만에 경찰서 서장이 죽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의 손길이 임하자 검사국 담당 검사는 지레 겁을 먹고 6개월만에 기소유예를 하고 놓아주었다.

 

전국을 뒤흔든 부흥의 불길

 

1945년 8월15일 드디어 해방이 되었다. 억눌렸던 환경 속에서 복음은 봇물 터지듯이 퍼져나갔다. 주님께로 돌아오는 자가 점점 많아졌다. 복음에 굶주리고 목말라하던 뭇 심령들마다 기쁨과 환희에 넘치는 예배와 성령의 강한 불길이 치솟았다. 이처럼 처음에는 한국교회에 새로운 부흥의 물결이 넘실대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일제의 압제 하에서 온갖 고초를 겪으면서도 믿음을 지키기 위해 순교의 피를 흘리기를 주저하지 않았던 한국교회는 기쁨도 잠시, 다시 큰 혼란과 혼돈 속에 빠졌다. 순교와 배교의 엇갈리는 시비 속에 예수님을 팔고 예배당을 팔아먹고 성도를 농락하던 자들과 비신자들이 이제는 교회의 중심에 들어와서는 선한 목자와 같이 행세하고 정치를 운운하며 교계를 어지럽혔다. 이성봉 목사는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다시 한번 하나님의 징계의 손길이 임할 것을 예감했다. 그런 후 얼마안가서 38선이 막히고 정권을 잡은 공산주의자들의 탄압이 마수와 같이 뻗쳐왔다.

 

1946년 3월 추운 겨울 밤, 목사님은 38선을 넘어서 남한에 내려왔다. 그즈음 공산당들은 이성봉 목사를 찾기 위해 혈안이 되어 다녔지만, 하나님은 적절한 시기에 구원의 손길을 베푸시어 복음에 굶주린 심령들에게 은혜의 손길을 뻗치도록 역사 하신 것이다.
이성봉 목사는 엘리야가 무너진 제단을 수축하기 위하여 하나님 앞에서 특심한 마음을 가지고 행한 것처럼, 남한에 흩어지고 무너진 제단을 다시 세우고 교역자를 일으켰다. 가는 곳마다 부흥집회를 열어 복음의 불길을 당겼다. 그는 계속하여 초교파적으로 지방 방방곡곡을 순회하며 부흥사명에 충성을 다했다. 주님은 그에게 많은 영혼들을 보내주셨고 어떤 때는 수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에게 설교하기도 했다. 거듭되는 집회에 강한 신유의 역사를 더하심으로 믿는 자가 더욱 많아지고 교회는 우후죽순처럼 세워졌다.

 

6·25 사변

 

해방의 기쁨도 잠시 서울 충정장로교회의 집회를 인도하던 중에 6.25사변을 만났다. 인민군들이 계속해서 진격해 오는 가운데 인민군 선발대가 먼저 들어왔다. 목사님은 피난가지 않고 집회를 인도하다가 치안서원들에게 붙들리고 말았다. 치안서원 청년들은 이성봉 목사를 심문하더니 뒷산으로 끌고 가서 몽둥이로 마구 패는 것이었다. 얼마나 많이 맞았는지 몸은 까맣게 먹장이 되었고 맞다가 기절도 했다. 이제 곧 죽는구나 생각했다. 그런데 뒤늦게 도착한 빨치산들 가운데 전에 예수님을 믿은 적이 있는 대장 청년이 있었다. 기적적으로 그 청년이 도와줘서 무사히 석방되어 계속해서 주의 일을 할 수 있게 되었다. 하나님의 크신 은혜였다. 하나님께서는 위험에 닥칠 때마다 도움의 손길을 펼치셨다. 목숨을 보전한 이성봉 목사는 더욱 분명한 주님의 사명을 깨닫고 주의 인도하심에 힘입어 전국을 다니며 복음에 빚진 자로서 새벽부터 저녁까지 혼신의 힘을 다해 복음을 전했다. 폐허가 된 국토를 다니며 산간오지를 마다 않고 한반도를 복음으로 변화시키기 위해 모든 정열을 쏟아 부었다. 특별히 교회를 세우는데 있어서 들어오는 헌금에 일절 깨끗함을 보였고, 목자의 심정과 바른 양심을 가지고 모든 사람들을 대하였다. 고생하기를 주저하지 않고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양심에 따라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나갔다.

 

제주 전도 때 일이다. 몽비포 군인 강병대 교회에서 집회를 하고 비행기를 태워 준다하여 처음엔 주님의 은혜로 알고 좋아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까지 험산 준령을 헤매면서 몸이 아파 들것에 실려 다니고 발이 부르트도록 걸어다니고 더위와 추위를 온몸으로 부딪쳐가며 쉴새없이 다녔지만, 한번도 편하게 집회장소에 간 적이 없었는데 비행기를 타고 가게되었으니 얼마나 기뻤으리요.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비행기를 타려면 무조건 군복을 입고 군인행세를 해야한다는 것이다. 군인 비행기이므로 민간인은 태울 수 없기에 형식상으로 군복을 둘러야 한다는 것이었다. 따지고 보면 아무 것도 아닌 하찮은 일로 여기고 그냥 눈 딱 감고 비행기를 탈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성봉 목사는 그것조차 타협할 수 없는 거짓말의 죄라고 여겨 도저히 양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주위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었지만 하나님이 보시기에 결코 거짓행세를 할 수는 없었기에 양해를 구하고 배를 탔다. 그리고 18시간이나 풍랑 중에 배 멀미를 해가며 제주를 향해 일진했다. 어떻게 보면 참으로 어리석게 보인다. 자신을 위해 여행을 가는 것도 아니고 주님의 교회를 위해서 복음을 전하려 가는데 옷 바꿔 입고 비행기 좀 탄다고 해서 무엇이 나쁘단 말인가. 그러나 하나님의 시선을 무시하고 육신의 정욕을 채워가면서도 부끄러움을 모르고 살아가는 삯군 목자와는 달랐다. 진리의 밝은 빛은 이성봉 목사의 가슴을 환히 비추고 있어서 예민한 양심으로 거짓의 죄로부터 벗어날 수가 있었다. 세상의 형편에 역행하는 자는 언제나 손해와 불편을 당하기 십상이다. 그러나 거짓말을 합리화하며 육신의 편함을 위해 진리의 복음을 훼손할 수는 없다. 거짓과 속임수로 가득 찬 세상에서 정직하게 행하는 자가 많지 않은 현실을 생각하면, 이성봉 목사님의 이와 같은 빛된 행실은 어두운 이 시대에 참 목자상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주님의 사역을 어떻게 감당해야 하늘에 귀한 상으로 인정되는지를 선명하게 보여준 것이다.

 

충성하라 죽도록

 

해방이 되고 나서 이성봉 목사는 주의 손에 붙들려 무려 900여 교회에 집회를 인도하러 다녔다. 그가 복음으로 낳은 자녀만도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았는데 얼마나 구령의 열정에 불타올랐는지 영혼들을 향한 뜨거운 사랑으로 눈물어린 기도를 쏟아가며 가는 곳마다 구원의 역사가 끊이지 않고 일어났다. 이러한 까닭에 노년에 이르러서는 대부흥사로서의 명성이 전국에 퍼져, 가는 곳마다 환영을 받게 되었다. 집회 때마다 벌어지는 기적의 역사와 신유의 능력이 넘쳐나 성도들은 열광했고 이성봉 목사는 자신도 모르게 더욱 높아져가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자신이 택하신 그릇을 보존하시기 위해서 그의 예민한 양심에 분별력을 주셔서 스스로 깨닫도록 역사하셨다. 이러한 주님의 빛이 심령 깊숙이 비춰오자 인도하고 다녔던 부흥집회 가운데는 주님과 상관없고 또는 주님이 원하시지 않는 경우도 많았음을 알게 되었다. 어떤 곳은 주님이 원해서가 아니라 내가 좋아서 다녔고 그것이 자신의 정욕에 따라 이루어진 일임을 깨닫고 회개하게 되었다.

 

모든 사역자의 사역은 그날에 주님의 평가를 받게 된다. 그가 아무리 열심히 일하고 주를 위해서 최선을 다했다 할지라도 그것이 정말 주님을 위한 것이었는지 그리고 어떠한 재료로 사역을 했는지가 심판의 불을 통과하면서 드러난다(고전3:10-15). 사람이 볼 때는 형편없고 미련했지만 하나님이 보실 때 금은보석같이 귀한 가치를 갖는 사역이 있고, 사람이 볼 때는 대단하고 칭찬받을 만할지라도 그 마음의 숨어있는 동기가 불순하다면 보잘것없는 것이 되어 부끄러운 구원만을 받게 된다. 이것은 사역자가 얼마나 일했는가에 달린게 아니라 어떻게 일했는가에 달려있다. 그러므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마음의 중심을 보시며 결과보다는 순전한 동기를 감찰하시는 하나님 앞에 늘 말씀의 빛으로 자신을 비추어 동기를 바르게 하고 정욕과 쾌락을 멀리해야한다.

 

주님의 뜻을 깨닫고 이성봉 목사님은 중대한 결심을 했다. 모든 사람이 환영하는 길이 아닌 멸시천대 받는 그 길을 걸으려 했다. 평안하고 안전한 길보다는 십자가의 험난한 고생길을 가기 위해 주께 기도하기 시작했다. 기적의 현장에서 일어나는 기적보다 무서운 것은 마음의 교만이며 엄청난 군중이 몰리는 부흥의 장소에서 인기와 명예에 대한 욕심은 영혼에 치명적인 독소다.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고 했던가. 사람이 교만하면 하나님은 그를 대적하시고 높은데서 떨어지면 더욱 아픈 법이다. 얼마나 많은 주의 종들이 여기서 넘어졌는지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은혜로 세움을 입었건만 겸손하여 낮아지기보다는 더 높아지려 하고 인정받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다가 정욕의 올무에 얽매여 결국 흑암의 낭떠러지에 추락하고 버림받은 자들이 초대교회 때부터 있어왔다.

 

고속도로와 비포장 시골길 중에 어느 길이 좋다고 말할 수는 없다. 아무리 넓고 빠른 고속도로라도 끝이 끊어졌다면 멸망로가 되고 험산준령 힙겹게 올라가는 협착하고 좁은 길이라도 목적지에 다다를 수 있다면 좋은 길인 것이다. 이성봉 목사는 열렬한 환영과 사람들의 칭찬이 있는 길은 넓은 길이요, 복음을 전하다가 핍박을 받는 길이야말로 내가 가야할 십자가의 길이며 이 길만이 생명의 면류관을 얻는 좁은 길임을 깨달았기에 묵묵히 순종하며 주님을 따랐다. 큰 교회를 가기보다는 농촌과 산간벽지에 있는, 부흥사를 초청할 수도 없는 작고 가난한 교회부터 가기로 마음먹었다. 사례비도 없고 사람도 몇 안 되지만 주님이 피로 사신 귀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육신적인 편함과 안일함을 멀리했다. 노방전도, 천막전도, 개인전도를 쉬지 않고 하다보니 고열이 오르기도 하고 제대로 쉬지도 못하여 가끔 쓰러지기도 했지만 말로 못하면 죽음으로 설교하리라는 일사각오의 자세로 부름의 상을 향하여 용맹스럽게 달려나갔다. 이 얼마나 착하고 충성스런 종의 모습인가. 사람이란 본디 명예나 권세를 얻으면 더욱 높아지거나 교만해지기 쉬운 법인데 오히려 주님의 삶을 본받아 더욱 섬기고 낮아지는 모습은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정말 본받아야 할 태도이다.

 

차라리 화려한 도시문명을 떠나 그 옛날 천막치고 가마니 깔고 온밤을 지새가며 기도하던 곳이라면, 땀냄새로 숨이 막히고 빈대가 득실거려도 불같은 성령의 뜨거운 역사로 모든 것을 감사와 기쁨으로 견디며 찬양할 수 있던 그때 그 시절의 부흥집회를 한번만이라도 경험할 수 있다면 이 몸에 빈대벼룩보다 더한 거머리를 붙이고 다녀도 좋으련만, 흰 도포자락 휘날리며 철저하게 빛과 어둠을 분별해가며 진리의 말씀을 선포하시던 설교를 들을 수만 있다면 대들보가 무너진다한들 그 자리를 떠날까. 삯군목자가 둔갑하여 영혼들을 노략질해도 선한 목자인 것처럼 활개를 치고, 순간순간 정욕과 죄성에 이끌린 생활을 하면서도 부끄러운 줄 모르고 깨닫지 못한채 그날을 향해 달려가는 안타까운 현실을 보면서 안락함 가운데 병들어가느니 고난 가운데 무르익어 가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고 싶다.

 

미국땅으로

 

하나님의 섭리와 경륜은 오묘하다. 조국강산을 떠나서 복음을 전하는 기회를 얻어 또 다시 환영의 인파와 매스컴 세례를 받으며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다. 어느날인가 백인교회에서 헤인스 목사의 통역으로 설교를 마치고 나니 한국의 빌리그래함을 만났다고 난리법석이었다. 말은 통하지 않지만 얼굴만 봐도 벌써 은혜가 넘친다며 칭찬해 주었다. 그러나 이미 이런 시험은 고국땅에서 연단받아 곧 분별하고 자만을 주는 사탄의 궤악한 술수에 넘어가지 않았다. 또 포클랜드 제이 퀘이커 교회에서 설교할 때 일이다. 설교가 끝나고 나중에 하룻밤 설교하는데 15불씩을 지불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당시에는 하룻밤 설교치고는 괜찮은 금액이다. 그러나 이성봉 목사는 적절한 사례비로 은근히 타협하고 받으려하지 않고 도리어 자본주의 사회에서 복음이 값싸게 매겨지고 있음을 안타까워했다.

 

오늘날처럼 주의 종이 대접받기 좋아하는 시대가 없었다. 흔히 심방을 가면 상다리가 휘어지도록 차려놓거나 목사님이 좋아하시는 음식을 예비하고 있다가 꺼내 놓는다. 집회에 초청을 받거나 부흥강사가 되어 강단 위에 서면 융숭한 대접을 받는 일이 많은데 일부 유명한 목회자는 초특급대우를 받고 사례비가 천문학적 숫자이다. 그리고 보통 이것을 자랑으로 여기고 축복이라고 여기며 오히려 목회자가 대접을 받지 못하거나 궁핍하면 축복을 덜 받고 아직 무언가 부족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쓰시지 않는 것처럼 생각하는게 현실이다. 그래서 그런지 집회에 초청되는 강사들마다 자신이 능력있고 축복받은 종이라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대접받고 먹기에 힘쓰는 것같다.

 

이성봉 목사는 이와는 반대였다. 포클랜드 카인너트 교회에서 ‘죽도록 충성하라’라는 말씀으로 설교할 때 자신이 먼저 모범을 보여 온종일 금식하고 기도하고 난 후 설교했다. 그레샴자유 감리교회에 초청받았을 때는 음식을 절제하고 골방에 먼저 들어가 간절히 기도했다.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더 기도하고 문제가 크면 클수록 더 금식하며 주께 매달렸다. 심지어는 비행기 안에서도 성공적인 집회를 위해서 철야기도를 할 정도였다. 오늘날 금식과 기도로 집회를 준비하는 목회자는 흔치 않으리라. 하나님께서는 골방에서 금식하며 성령 안에서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기도하는 이성봉 목사를 더욱 권능있게 사용하시고 높이셨다.

 

이성봉 목사는 사명과 목표의식이 분명한 사람이었다. 그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결코 주님의 일을 소홀히 하거나 도외시하지 않았다. 오리건주 설립 백년제로 수십만명의 사람들이 몰려들었을 때 시가행진과 박람회로 야단법석이 났지만 이성봉 목사는 초연했다. 그는 한민족뿐만 아니라 모든 민족들의 영혼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사명자는 흔들리거나 헛된 것에 집착하지 않는다.
월드컵 열풍이 전국을 강타하고 있다. 저마다 대한민국을 외치며 유례없는 일치단결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거리 어디서든 월드컵송을 부르고 대한민국을 외치면 곧 하나가 된다. 도대체 둘만 모이면 되는 일도 안된다는 한국인에게 어디서 이런 가공할만한 위력이 나왔을까? 하버드대학교 총장인 나단 푸시의 말처럼 우리에게는 흔들 수 있는 깃발과 부를 수 있는 노래가 필요하다. 사람들은 열광하며 부르짖을 수 있는 무언가가 필요하다. 진리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진리를 갈망하며 휴화산처럼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진리의 혼돈시대에 살면서 진화론에 속고 종교의 다원화와 예수가 없는 신학과 교회까지 등장하면서 무언가 심한 갈증을 느끼고 있던 차에 실컷 몸을 날리며 부르짖고 흔들 수 있는 깃발과 노래가 생긴 것이다. 그래서 저 마다 빨간 티셔츠를 입고 붉은 악마가 되어 월드컵송을 부르고 광기어린 몸놀림을 분출하고 있는 것이다.

 

진리를 알지 못해 월드컵에 열광하는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로 열광하게 할 수 있는 사역이 절실히 필요하다. 월드컵 대신 예수에 미치도록 복음을 전파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성봉 목사님처럼 철저하게 복음적으로 살면서 말씀을 전할 수 있는 제2의 이성봉이 많이 나와야 한다. 아무쪼록 목사님의 빛된 일화가 내 가슴에 비춰져 복음으로 살고, 복음을 전하다가 복음 때문에 죽는 진짜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바란다. 고(故) 이성봉 목사님의 철저한 삶을 본받아서 개인과 가정과 교회와 사회에 깊은 감동을 주고 변화시켜 다시 한번 대한민국에 큰 부흥의 물결이 파도치기를 기원해본다. 

 

한기호 전도사    [그리스도복음신보] 200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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