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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항해하면서 발견한 다시 읽고 싶은 글을 스크랩했습니다. 인터넷 공간이 워낙 넓다보니 전에 봐 두었던 글을 다시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래서 스크랩할만한 글을 갈무리합니다. (출처 표시를 하지 않으면 글이 게시가 안됩니다.)

[빛을따라간사람들] 죠지 뮬러

영성묵상훈련 김연심 전도사............... 조회 수 2739 추천 수 0 2010.04.18 08:4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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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죠지뮬러.jpg

 죠지 뮬러

 

방탕한 그를 기도의 용사로 변화시키다

 

죠지뮬러(George Muller, 독일, 1805-1898)는 1805년 9월 27일 독일 크로펜스타트에서 태어났는데, 그의 아버지는 세무원으로 술과 돈을 좋아했고 세상의 원칙에 따라 자녀들을 키웠다. 그가 14세 되었을 때 어머니가 갑자기 돌아가셨으나, 그날 아버지는 술에 취해 거리를 비틀거리셨고 죠지는 친구들과 함께 새벽 2시까지 카드놀이를 하느라고 집에도 들어오지 않았다. 어머니의 죽음은 그에게 큰 충격을 주지 못했고 그의 생활은 더욱 방탕해졌다. 16세 때에 값비싼 호텔들을 다니며 아버지의 돈을 허비하고, 옷을 저당잡히며 나중에는 지불할 돈이 없어 도망치다가 주인에게 고발당해 24일간 감옥생활을 하기도 했다. 그후 아버지에게 호되게 꾸지람을 들은 뒤 아버지의 신임을 얻기 위해 열심히 공부했으나 그의 마음은 여전했다.

 

뮬러의 죄악된 생활은 계속되었으나 전혀 죄의식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신앙고백과 성찬식이 있기 전에는 자기의 부도덕성에 대해 죄의식을 느끼기도 하고 가끔은 생활을 바꿔보려고 결심도 해 보았지만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말았다. 그는 상습적인 도둑이요, 술꾼이었으며, 거짓말쟁이었다. 그런데도 스무살 때 훌륭한 추천서를 받아 할레대학의 학생이 되었고 루터란교회에서 설교할 수 있는 허가도 받았다. 그러나 여전히 하나님에 대해 아는 바가 없었고 관심도 없었다. 그의 마음 깊은 곳에서는 이 비참한 생활을 진실로 그만두고 싶었으나 타락한 정욕으로 인해 선한 능력이 없는 그에게는 불가능했다.

 

어느 날 친구들과 술집에 있는데 전에는 착실한 신자였던 베타를 만났다. 그와 친구가 되면 자기의 생활이 변할 것이라는 소망을 가져보았으나 베타도 함께 타락의 길로 빠지므로 소망이 사라졌다. 방학동안에 베타와 다른 두 학생과 함께 부모님들의 허락을 받은 것처럼 편지를 위조하여 여권을 얻어 43일간 스위스 여행을 즐기기도 했는데, 친구들의 돈을 맡은 뮬러는 자기 비용의 1/3을 친구들이 부담하도록 꾸몄다. 그는 죄악된 삶으로 하나님을 대적하였으나 하나님께서는 그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기다리고 계셨다.

 

새로운 삶의 시작

 

뮬러는 여러 해 동안 성경을 읽기는 커녕 그가 소유한 300권의 장서에도 성경은 없었다. 예배는 거의 참석하지 않았으며, 복음에 대한 설교를 들은 적도 없었다. 그는 신학생이었지만 교리를 몰랐고 예수님이나 성령의 역사에도 완전 무지했다. 그런 그에게도 하나님의 은혜는 내리기 시작했다.

 

1825년 11월 중순 어느 토요일 오후, 산책을 마치고 헤어지기 전에 베타는 와그너의 집에서 열리는 기도모임에 참석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그순간 뮬러는 이제까지 찾아온 보물을 발견한 것 같은 느낌이 들어 함께 참석하겠다고 했다. 찬송을 부른 후 아프리카 파송 선교사가 될 카이저 형제가 무릎을 꿇고 그 모임을 축복해주십사고 기도했는데, 그는 바로 곁에 위대한 능력으로 서있는 살아계신 하나님께 말하는 것 같이 기도했다. 지금까지 한번도 무릎꿇고 기도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었던 뮬러는 그 형제의 기도하는 모습을 보고 큰 감동과 충격을 받았다. 뮬러는 나가면서 “자신을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 복종시키는 것, 이것이 참된 예배다”고 중얼거리며, 베타에게 “우리가 스위스를 여행하면서 보았던 모든 것과 이전에 느꼈던 모든 즐거움도 오늘 저녁에 비한다면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고백했다. 그날 밤 뮬러는 잠들기 전에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
“하나님! 드디어 제가 오늘 밤 당신의 것이 되었나이다!”

 

하나님을 위해 버리는 생활

 

그날 이후 뮬러는 와그너 집을 정기적으로 방문하여 성경을 읽곤 했는데, 성경말씀이 너무나 흥미로워서 토요일의 기도회까지 기다릴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의 인생은 새롭게 시작되었다. 우선 나쁜 친구들과의 교제를 끊고 술집에 가는 것과 습관적으로 하던 거짓말도 그만두었다. 그대신 성경을 읽고, 자주 기도했으며, 형제들을 사랑하게 되었다. 또한 바른 동기로 교회에 갔다. 비록 친구들이 비웃었지만 공공연히 예수님을 증거하기도 했다. 그의 모습은 점점 신자다워졌다. 그는 파리를 방문하기 위한 경비를 마련하려고 불어 소설을 독일어로 번역했으나 소설의 내용이 세속적이고 또 쾌락을 위해 파리를 방문하려던 불순한 동기가 마음에 걸려 그 원고를 팔지도 않고 태워버렸다. 그는 하나님을 위해 하나씩 악한 것들을 버려갔다.

 

1826년 뮬러는 선교사들의 소식지를 보고 선교사가 되고자 하는 열망으로 뜨거워졌다. 그런 뮬러에게 한가지 고민이 생겼는데, 기도모임에 참석하던 에르머가르데라는 화려하고 매력적인 여자를 사랑하게 되면서 지금까지 누렸던 영적인 기쁨과 평안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기도를 해도 힘이 없었고 허공을 치는 듯 하나님의 응답을 느낄 수 없었다. 뮬러는 괴로워하고 답답해했지만 여전히 그녀를 만나면 의지가 나약해지면서 애정에 빠지게 되었다. 에르머가르데는 너무나 매력적이었지만 초라하고 가난한 선교사의 아내가 되기보다는 안락하고 부한 생활이 보장되어있는 삶을 원했으며, 그의 아버지 또한 같은 마음이었기 때문에 선교사가 되려는 뮬러에게는 그녀가 맞지 않았으나 포기하기 싫었다.

 

그러던 중 폴란드에서 유대인을 상대로 선교활동을 하고 있는 ‘헤르만 볼’이라는 선교사를 만나게 되었는데, 그는 부유한 상인의 아들이었지만 선교사가 되기위해 모든 상속권을 포기하고 선교에 헌신한 사람이었다. “…죠지, 중심을 두가지 일에 두지 말게. 가난과 부귀는 함께 할 수 없네. 설마 내가 너무 많은 것을 포기했다고 생각지 말게. 나는 훨씬 많은 것을 얻고 있으니까 말일세. …내 대신 자네가 바로 그 일을 했으면 하네.” 뮬러는 선교사의 길을 가기로 다시 결심하고 에르머가르데에게 선택하도록 했다. 그녀는 부귀와 안락을 택했고, 뮬러는 그녀를 포기했다. 그순간 6주동안 사라졌던 은혜와 평안이 물밀 듯 밀려왔다. 그는 하나님의 일을 위해 남녀간의 애정을 십자가에 못박은 것이다.

 

선교사가 되려는 뮬러에게 또 하나의 장벽이 있었는데 독일 선교단체에 가입하려면 아버지의 허락이 필요했다. 그는 허락을 받기위해 고향을 방문했으나, 아버지는 뮬러가 존경받는 목사가 되면 함께 노후를 편안하게 지내려고 많은 돈을 들여 공부시켰는데, 모든 기대가 무너졌다고 하면서 화를 내시고 더 이상 도와주지 않겠다고 소리질렀다. 우시면서 마음을 바꾸라고 애원하기도 했다. 뮬러는 마음이 너무 아팠지만, 주님은 뮬러에게 혈육의 정을 정리할 수 있도록 도와주셨다. 아버지의 소망을 이루어 드릴 수 없기 때문에 계속 학비의 부담을 드리는 것이 옳지 않다고 생각되어서 그는 비록 이전보다 더 많은 돈이 필요했지만 아버지에게서는 한 푼도 받지 않기로 결심하였다.

 

첫 번째 기도응답

 

그는 아버지로부터 독립하였다. 이제 이 세상의 그누구에게도 의존해 있지 않은 자유함을 느꼈다. 이제 그는 전우주 안에서 오직 한 인격에 의존해 있었는데, 그분은 바로 하나님이셨다.
그는 처음으로 하나님께 그의 현실적 필요를 진실하게 구했다.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제가 무엇을 해 왔으며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정확히 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제가 필요로 하는 것을 아십니다. 저는 방세를 지불하고, 밥을 사먹고, 책을 사고, 다음 학기에 지불할 등록금이 필요합니다. 하나님, 저는 그러한 돈을 얻기 위해 하나님을 신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뜻하시는 시간에, 하나님께서 뜻하시는 방법으로 저의 소원을 이루어 주소서. 저는 기다리겠습니다”

 

잠시 후 노크소리가 들리며 쏠럭박사님이 그에게 가정교사일을 맡기기 위해 방문했다. 몇몇 미국 교수님들이 연구차 할레대학에 오셨는데, 독일어를 모르기 때문에 독일어 선생이 되어달라는 것이었다. 이 일로 뮬러는 등록금을 제외하고도 용돈으로 쓸 수 있을 정도로 많은 돈을 받았다. 하나님은 자기를 의지하는 자를 반드시 돌봐주시는 신실하신 분이다.

 

선교사가 되려는 열망과 장애물들

 

영혼들을 주님께 인도하고픈 열망으로 뜨거운 뮐러는 매달 300부의 선교보고서와 많은 소책자를 사람들에게 배부하고 죄악에 빠진 친구들에게 전도편지를 쓰면서 선교 사역지를 위해 계속 기도했다. 아무런 응답이 없자 성급하고 인간적인 방법을 사용했는데, 복권을 구입해서 약간의 상금을 타게 되자 이것을 ‘표적’으로 받아들여 즉시 지원서를 냈으나 아버지의 동의가 첨부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거부당했다. 이러한 실수를 통해 하나님의 일꾼은 하나님을 의지하고 기다려야 함을 깨달았다. 베를린 선교 협회의 거부를 받은 후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선교하는 영국의 대륙협회를 통해 ‘부카레스트’의 선교사로 가려고 했으나 그곳에 전쟁이 일어나는 바람에 또 포기되었다. 그는 앞길을 주님께 완전히 맡기기로 하고 런던 선교협회의 뜻에 따르기로 결정하였다.

 

1827년 12월 쏠럭박사가 죠지뮐러를 추천하여 런던협회에 편지를 보냈는데 다음 해 3월이 되서야 서류가 든 답장이 와서 기록하여 보내니 6월 중순이 되서야 또 답장이 왔다. 그런데 그 답장에는 선교사로 받아들이는 조건으로 런던에서 6개월간의 공부를 또 해야 한다는 것이다. 영혼을 구원하려는 열망으로 빨리 선교지로 가고픈 뮐러에게 이러한 런던 선교협회의 더디고 거추장스러워 보이는 절차들은 많은 인내를 요구했으며 불평들을 자아내게 했다. 선교사가 되기 위해 독일을 떠나기 위해서는 2년의 군복무라는 마지막 장애물을 넘어야 했다. 국왕으로부터 군복무를 면제받아야만 여권을 발급받을 수 있었는데, 그에게는 해결책이 없었고 암담해 보였다. 1828년 1월 교인인 소령 한 분의 권면으로 입대 절차를 밟았는데, 병으로 몸이 많이 쇠약해졌기 때문에 의사들은 그를 군복무에 부적격자로 판정내렸고, 그는 평생토록 모든 군대의무에서 완전히 면제받았다. 하나님은 선교사가 되기 전에 그를 여러 장애물로 훈련하시며 연단하셨다.

 

복음진리가 깨달아지는 놀라운 은혜 체험

 

뮐러는 육체적으로 매우 쇠약해져서 영국으로 건너왔고 오자마자 심하게 병을 앓았다. 병을 앓는동안 지금까지 범죄한 죄들이 마음속에 떠올랐고 그는 회개하여 주님의 보혈은총으로 깨끗이 사함받은 확신을 얻게 되었다. 빨리 죽어 예수님과 함께 있고 싶은 소망으로 가득찼다. 병상에서 하나님은 그의 영혼을 씻기셨다. 건강은 차차 회복되었으나 공부를 중단하고 서해안 데븐셔 주의 타인모우스라는 동네로 요양차 갔는데, 이곳에서 그는 성경공부를 많이 하게 되었다. 이 기간동안 하나님의 말씀이 모든 판단의 기준이 된다는 것과 성령님이 가장 훌륭한 성경의 교사임을 깨닫게 되었다. 하나님의 섭리와 공의, 사랑이 확실히 깨달아졌다. 그는 주석책을 비롯한 모든 책들은 다 치우고 순전히 성경만 읽기 시작했는데, 성경말씀에 대해 기도와 묵상을 한 몇 시간 동안에 지난 수개월간 배웠던 것보다도 훨씬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런던으로 돌아와서 선교훈련을 받는 몇몇 형제들과 매일 아침 6시에서 8시까지 경건모임을 시작했고, 형제들과 새벽까지 함께 기도하면서 너무나 기쁨이 충만해 잠못 이룬적이 많았다. 그런데 돌아온지 열흘쯤 되어 건강이 다시 악화되자, 그는 남은 육체의 기력을 공부에다 쏟기보다는 주님을 위해 바치기로 작정하고 협회에 편지를 써서 즉시 사역지로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선교사 협회의 답장을 6주 동안이나 기다리고 있는 동안 런던협회에서 재정지원을 계속 받으며 통제와 지시를 받는 것이 비성경적으로 여겨져 협회와 몇차례 협의하에 관계를 끊고 자유롭게 되었다.

 

성령님을 의지하는 설교자

 

1829년 12월 엑스모우스라는 곳에서 3주간의 설교를 부탁받았다. 그는 ‘성령님의 지시에 매우 민감해지는 법’을 배우기 시작했으며 예수님은 말씀의 비밀들을 많이 깨닫게 해주셨으며 설교할 기회가 더욱 많아졌다. 또 타인모우스 마을의 에벤에셀교회에서 설교를 했는데 교회의 목사가 되어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그러나 반대하는 사람들도 있음을 알고, 공식적으로 결정이 날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그는 성경을 순수하고 밝게 증거했기 때문에 성도들 사이에 갑자기 성경에 대한 의문과 탐구심이 일어났으며, 회개의 운동이 일어났다. 12주간 설교 후 교인들이 만장일치로 그를 목사로 초빙하였다. 그는 하나님께서 명령하시면 언제든지 떠날 것을 조건부로 교인 18명으로 첫 목회를 시작했다.

 

하나님께서 설교에 대한 새로운 길을 열어주셨다. 전에는 듣는 사람들에게 가장 좋은 설교가 무엇인가에 따라 주제와 내용을 정했는데, 이제는 주님께 먼저 ‘그가 가르쳐야 할 주제와 말씀을 가르쳐달라’고 요구했다. 주님께 반복해서 기도한 후 주신 주제를 가지고 설교하였다. 설교하기 불과 몇 분전에 설교 주제를 얻는 경우도 있었지만 항상 설교의 주제를 받았고, 혹 주제를 주시지 않으면 주제없이 설교하기도 했다. 설교자는 회중의 마음과 사정을 모를지라도 성령님께서는 잘 아시므로 그는 자신의 지혜로 설교하기를 포기하고 전적으로 성령님께 의지하여 설교하기 시작했다. 구절을 연구할 때도 성경과 권위있는 외국 성경 몇 권 외에는 다른 참고서적은 거의 이용하지 않았으며 주로 기도와 묵상으로 도움을 얻었다. 주님과 끊임없이 교제하며 규칙적으로 반복하여 묵상하며 설교를 준비하는 과정이 설교를 하는 그 자체보다 훨씬 더 즐겁고 은혜로웠다.

 

말씀과 생활을 일치시키려는 노력

 

1830년 10월 7일 그는 연상이었지만 밝고 정직한 메리 그롭스와 결혼했는데, 많은 기도후에 결혼하기로 결정했으며 메리는 훌륭한 믿음의 동반자가 되었다. 메리는 시집올 때 화려한 은제품들을 가져왔는데, 이것이 죠지의 마음에 걸렸다. 죠지는 자신들의 화려한 생활이 가난하셨던 주님의 생활과 위배되며, 누가복음 12장 33절에 ‘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라’고 하신 말씀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메리는 죠지의 결정에 따랐다.

 

그당시 교회에서는 좌석료를 받는 관습이 있었는데, 가장 비싼 값을 지불하는 사람들에게 교회의 제일 좋은 좌석을 세놓는 비극적인 제도였지만 이 좌석료가 바로 목회자의 사례비가 되기 때문에 폐지되지 않았다. 그러나 죠지는 이 좌석료를 받는 제도가 약2:1-6에 의하면 주님의 마음과는 반대되는 것이며 목회자의 월급과 연관되기 때문에 사람들의 눈치를 보아야 하므로 복음이 방해를 받기 때문에 이 제도를 폐지하기로 했다. 이것은 그들의 생활비를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지하는 불안하지만 대단한 믿음의 결단이었다. 헌금통을 마련하여 목회자의 생활을 돕기 원하는 사람은 무명으로 돕도록 했다.

 

1830년 11월 18일, 가지고 있던 돈이 거의 바닥났다. 아침에 죠지 부부는 기도하면서 주님께 돈이 필요하다고 말씀드렸는데, 4시간 후에 한 자매가 와서 주님께서 목사님께 돈을 갖다 드리라고 했다며 일주일간 생활하기에 충분한 돈을 주고 갔다. 죠지와 메리는 주님의 신실하심에 기뻐서 어쩔줄을 몰랐다. 차차 시간이 감에 따라 주님은 그들의 믿음을 더욱더 많이 시험하셨다.

 

1831년 1월 6,7,8일 사흘간 죠지는 반복해서 주님께 돈이 필요하다고 간구하였으나 아무 것도 받지 못했다. 이번에는 주님을 의지하는 것이 아무 소용없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아마도 내가 믿음에 의해 산다는 것이 너무 도가 지나친 것이 아닌가” 생각하기도 했지만 결국 하나님은 신실하심을 증명하셨다. 헌금통을 관리하는 형제들에게 일주일에 한번씩 헌금통을 열어 갖다달라고 하였지만 잊어버리거나, 금액이 너무 적어 차마 가져오지 못하고 3주 내지 5주만에 한번씩 가져오곤 하였다. 난로에 넣을 석탄이 거의 다 떨어졌을 때, 주님께 헌금통을 관리하는 형제의 마음을 움직여서 돈을 가져오게 해달라고 기도했는데, 얼마 후 그 형제가 돈을 가져왔고 필요한 것들을 살 수 있었다.

 

3월에 나는 다시 한번 주님의 신실하심을 의심하는 시험에 들었다. 비록 돈에 대해 걱정은 하지 않았지만 기쁨으로 승리할 수 있을 정도로 주님을 완전히 신뢰하지는 못했다. 한 시간 후에 주님께서는 또 다른 방법으로 그분의 신실하신 사랑의 증거를 보여주셨다. 주님께서는 내게 직접적으로든지 간접적으로든지 죠지의 필요에 대해 사람들에게 이야기하지 말라고 하셨고 죠지 부부는 절대로 빚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롬13:8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는 말씀대로 빚진다는 것은 성경적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빚을 지기보다는 차라리 없는대로 견디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였다. 한 해를 돌아보며 그들은 정기적인 월급을 받았을 때보다도 훨씬 더 풍성하게 채워졌음을 알게 되었다. 우리가 주님의 뜻대로 행하면 우리는 결코 패자가 될 수 없다. 주님은 당신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이들을 도와주시며 신실하시고 자비로우신 아버지가 되어주신다.

 

전염병과 싸우는 선한 목자들

 

뮐러는 크레익의 도와달라는 편지를 받고 기도 끝에 타인모우스의 사역을 마무리하고 1832년 5월 21일 브리스톨로 이사를 갔다. 에브리스톨에 온지 얼마 되지 않아 전염병이 퍼져 조지 뮐러와 크레익은 감염의 위기 속에서도 어린이들과 병자들을 심방하며 성경을 읽어주고 기도해 주었다. 9월이 되자 피로에 지친 아내 메리는 조지를 걱정하며 곧 태어날 아이를 위해 조지의 외출을 막았다. 그러나 조지는 혈육간의 애정을 극복하고 아내의 호소를 뿌리쳤다. “난 브리스톨을 돌보겠어.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도록 나를 부르셨으니까. 하나님은 결코 좋은 일기와 좋은 건강을 약속하지 않으셨어. 하나님은 브리스톨에 가서 일하라고 말씀하셨을 뿐이야. 메리, 당신에게는 미안해.” 병자심방을 마치고 크레익과 돌아오는 길에 현기증으로 인해 난간에 기댄채 기도했다. “오 주여, 당신의 손으로! 여기 당신의 불쌍하고 하잘 것 없는 소인이 있나이다. 만일 오늘 밤에 우리가 콜레라에 걸린다면 우리가 신뢰할 것은 우리의 많은 죄를 위하여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뿐이옵니다. 오, 하나님 우리를 도우소서!”

 

브리스톨은 10월이 되면서 완전히 전염병이 사라졌다. 기드온 교인 중에서 오직 한 사람만이 죽었다. 그들은 삯군처럼 달아나지 않고 죽음을 각오하고 양을 지키는 선한 목자였다. 메리가 걱정했던 아이는 전염병이 기승을 부리던 9월에 건강한 여자아이로 태어났다. 두 젊은 목사는 병으로부터 지켜주신 하나님께 특별 감사예배를 드렸다. 교회는 계속 부흥되어갔다. 1년만에 109명의 새로운 사람이 등록하였고 그들중 65명이 주님을 영접했으며 하나님을 등졌던 많은 이들이 돌아왔다.

 

성경연구원

 

1834년 조지는 국내외에 복음을 전파할 수 있는 선교기관인 ‘성경연구원’을 설립하였다. 기성 선교단체들은 대부분 빚을 지고 있었는데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런 빚도지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과 대치되는 것이었다. 또한 일정액의 기부금만 내면 그 사람이 불신자든, 죄된 생활을 하든 상관없이 회원이 되고 투표권을 가질 수 있었으므로 여러 면에서 그들은 양심을 깨끗하게 지키면서 선교사역을 하기 위해 새롭게 기관을 만들었던 것이다.

 

‘성경연구원’의 목적은 성경을 가르치는 ‘가난한 아이들을 위한 무료 주간학교’, ‘주일학교’, ‘성인학교’를 세워 원조하며, 성경을 배포하고, 선교사들을 지원하는 것이다. 그들은 빚을 지거나 사람들의 도움을 요청하면서까지 사업을 확장하지 않으며, 하나님의 도우심만을 구하는 것을 경영의 원칙으로 정했다. ‘성경연구원’의 활동이 시작된지 7개월이 지났을 때 무료주간학교에는 약209명의 아이들, 주일학교에 120명, 성인학교에 40명이 교육을 받게 되었으며, 482권의 성경전서와 520권의 신약성경을 배부하였고, 상당한 금액을 선교사들에게 지원했다.

 

신실하신 하나님을 증명하기 위하여 고아원을 설립하다

 

무료 주간학교를 다니던 콜린이라는 총명한 아이가 강제로 빈민 강제수용소로 가야만 했던 가슴 아픈 소식을 듣고 조지는 의식주를 해결해주면서 하나님의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고아원을 설립할 계획을 세웠다. 그당시 영국에는 고아 수용소가 겨우 3개였고 브리스톨에는 없었다. 그는 한달동안 고아원에 대한 생각으로 갈등하였다. 1835년 2월 동인도에 선교사로 갔던 아내의 동생 그롭스씨의 부탁을 받고 통역관으로 독일을 방문하여 선교지원자를 모집하는 일을 도왔는데, 7년만에 만난 쏠럭박사의 따뜻한 대접을 받았으며 프랑케의 고아원을 방문하게 되었다. ‘프랑케 고아원’은 100년 전 신학대학 교수인 프랑케가 세운 고아원인데, 그에게는 유복한 친족도, 아무것도 없었고 가진 것이라고는 하나님께서 실제적인 기도에 응답하신다는 믿음뿐이었다. 그런데 믿음의 기도대로 2,000명의 어린이들을 수용할 수 있는 거대한 고아원이 되었다. 약 10년 전에 그 이야기를 듣고 큰 감동을 받았었는데, 이번에 또 프랑케 고아원을 방문하게 되면서 고아원 설립의 뜻이 확실해졌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희생을 원하셨던 것일까! 집에 돌아온 후 얼마 되지않아 1살된 아들 엘리야가 죽었다. 조지는 그 아이가 그들과 함께 있는 것보다 주님과 함께 있는 것이 훨씬 좋다는 것을 확실히 깨닫고서 감사해서 울어 버렸다.
그의 몸도 좋지가 않고 심장이 약해져 주일 설교도 할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경비와 장소가 마련되어서 와이트 섬에 요양하러 갔다. 그곳에서 기도를 통해 영혼에 큰 힘을 얻고 주님과 깊은 교제를 가졌다. 또한 찬송 ‘나같은 죄인 살리신(405장)’의 작시자 존 뉴톤 생애에 큰 감동을 받고 존 뉴톤처럼 주님과의 교제를 기록하여 책으로 증거해야겠다는 마음이 생겼다.

 

고아원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을 크레익에게 이야기했지만 그는 조지가 돈이 없기 때문에 반대했다. “프랑케도 돈이 없었네. 그는 그의 고아원을 기도하여 세웠었네.” “그는 백년 전에 살았던 사람이야. 조지, 시대가 다르잖아!” “무슨 소릴 하는거야? 하나님께서 그 능력을 잃으셨단 말인가? 만일 하나님께서 1727년에 프랑케의 기도에 응답하셨다면 하나님께선 또한 1835년에도 그에 대해 응답하셔.” 아무도 그의 믿음을 꺽을 수 없었다.

 

조지가 고아원을 세우려는 목적은 첫째, 하나님이 살아계셔서 그를 의지하는 자를 반드시 도우시는 분임을 증명하여 믿음을 더하기 위함이요, 둘째는 가난한 아이들을 도와 하나님의 방법으로 교육하기 위함이었다.
그는 몇 주간 동안 생각하며 기도했다. “하나님, 제가 일을 시작하기 위해서는 일천 파운드가 필요합니다. 저는 30명의 어린이들을 위해 충분히 큰 집을 필요로 합니다. 저는 저의 직원들로서 어린이들을 좋아하고 가르치며 다룰줄 알며 그들을 위해 음식을 만들 줄 아는 그리스도인들이 적어도 3,4명은 필요합니다. 또한 어린이들의 옷과 침구, 식기들이 필요로 합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이 모든 일을 하실 수 있음을 믿사오며 이 일을 온전히 하나님 손에 맡기옵니다. 아멘.” 이렇게 날마다 기도한 후 자신이 너무 뻔뻔스럽지나 않나 의아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네 입을 넓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시81:10)는 말씀을 읽고서 너무나 똑똑히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응답에 기뻐서 큰 소리로 웃었다.

 

조지는 기드온 교인들에게 고아원 계획을 광고했다. 성도들은 조지에게 ‘실현불가능하다’ ‘허세다’ ‘너무 이상적이다’고 냉소했다. 반면 10실링의 헌금을 하고, 무보수로 일하겠다고 하는 부인도 있었다. 그러나 아내 메리는 반신반의였다. 다음날 크리스챤 부부에게서 고아원에 무보수로 봉사하겠으며 모든 가구를 기부하겠다는 내용의 편지를 받았고, 또 어떤 사람이 식기들을 주고 갔다. 발표 하루만에 조력자가 3명, 가구와 10실링, 식기류등이 들어옴을 보고 메리는 믿음이 생겼으며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고아원 사업에 좋은 협력자가 되었다. 조지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용사처럼 나갔고 하나님은 그의 유일하고 적극적인 후원자가 되셨다.
다음달 브리스톨의 한 실업가가 50파운드를 헌금했다. 아이들의 옷에 대해 그들이 기도하자 충분한 옷감이 들어왔다. 또 다른 조력자를 위해 기도하자 한 가정부가 지원을 했고, 또 한 상인이 100파운드를 기부했다. 그리하여 윌슨6가에 오래된 주택을 세들었다. 그들이 기도했던 모든 것은 다 응답받았다. 기도를 들으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을 찬양했다. 조지와 메리는 1달내에 42명의 어린이들의 신청서를 받았고 그의 딸 루디아를 합쳐 43명의 어린이들의 책임자가 되었다. 이리하여 고아원은 1836년 5월 공식적으로 문을 열었다.

 

믿음의 시련들

 

1836 고아원 문을 연지 얼마되지 않아서 윌슨 6가에 두번째와 세번째 고아원이 세들어서 96명의 고아들이 함께 살게 되었다. 조지는 공중 앞에서 돈에 대해 언급하거나 모금도 거부했으나 고아원은 풍성한 기부금을 받아 식품비, 직원 봉급, 의류와 교과서들을 위한 재정이 넉넉했다. 그러나 고아원을 개관한 지 2년 후 조지는 일기장에 “나는 고아들을 위해 수중에 일푼도 가지고 있지 않다! 하루 이틀 내에 많은 파운드를 필요하게 될 것이다!” 하고 몹시 걱정하며 기록했다. 하나님은 그에게 정금같은 믿음을 주시려고 많은 시련을 주시기 시작하셨다. “하나님, 5파운드가 오늘 필요합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그것을 어떻게해서든 능히 제공하시리라 믿습니다.” 얼마 후 실크 드레스 차림의 부인이 고아원을 방문해서 “뮐러 형제, 하나님께서는 이 화려한 보석들을 더 이상 착용하지 말라고 저에게 말씀하셨어요. 그리고 하나님은 이것들도 떨쳐버리라고 말씀하셨어요.” 하고 지갑에서 돈을 책상위에 5파운드 5,6실링을 꺼내 놓았다. 하나님께선 그가 기도한만큼 정확하게 응답하셨다.

 

그후 2주 동안 돈은 단지 조금씩밖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는 일기장에 “우리의 시련의 시간은 계속되고 있다. 주께서는 자비롭게 우리의 일용품을 제공하기에 족할만큼 허락해 오셨다. 그러나 주께서는 이제 하루분씩 주고 계시며 때로는 우리가 필요로 하는 만큼 거의 시간제로 주신다.” 조지는 하나님께서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신다는 것을 입증할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사실을 입증하는 데는 전적으로 인내가 필요했다.

 

헨리 크레익은 그리스도인 친구들에게 도움을 구하며 모금하는 방법을 제안했다. 그러나 조지는 “자네 방법은 하나님의 방법이 아냐, 난 돈에 대해서는 누구에게도 구하지 않겠네. 난 하나님께 구하겠어.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야.” “이 사람아, 자네한테는 먹여살려야 할 아이들이 백명이나 있어. 자넨 그들에게 아버지와도 같은 거야” “아버지가 없는 자들에게 아버지가 되어 주는 것” 조지는 중얼거렸다. 그것은 그가 좋아하는 성경구절이었다. “누가 아버지가 없는 자에게 아버지가 된단 말인가? 내가 아냐. 아버지가 없는 자에게 아버지가 되는 것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야. 공급은 하나님께서 하셔. 하나님은 언제나 실패하는 일이 없으셔. 난 기도하겠어. 그러면 돈이 들어올거야.” “돈은 들어올걸세. 하지만 들어오던 속도보다 빠르게 나가 버릴걸.” 헨리의 비관하는 말을 들었으나 오직 하나님께만 구하겠다고 한 하나님과의 약속을 저버릴수는 없었다.

 

조지는 돈이 들어오지 않자 많은 어려움을 느끼며 며칠동안 고민했다. ‘직원들을 불러모아 그들에게 고아원 재정의 어려움을 사실대로 말할까? ‘하나님께로부터 곧 응답이 올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문을 닫아야만 하겠습니다’라고 말해야 할까? 어떻게 할까? 그들에게 말하는 것은 사람에게 돈을 구하는 것이 아닐까…?’

 

아름다운 동역자들의 헌신

 

마침내 조지는 무거운 입을 열어 직원들에게 말했다. 그러자 한 여직원이 “비용을 줄이면 사태에 다소 도움이 되지 않을까요?” “자매님, 우리는 뼈가 나오도록까지 깎아 왔습니다.” “그렇지 않아요. 목사님은 제 급료를 잊고 계신 것 같아요. 저는 미망인 연금으로도 충분해요. 제가 고아원에서 종사하고 있는 한 목사님으로부터 더 이상 급료를 받지 않겠습니다.” 또다른 직원이 “이걸 먼저 받으세요” 하고 많은 파운드를 건네주었다. “저는 받을 수 없습니다”라고 말하자 “저는 현금을 가지고 있으면서 돈을 달라고 하나님께 무릎을 꿇을 수는 없습니다” 작은 요리사도 떨면서 이야기했다. “저로부터 6파운드를 계산에 넣어 두세요. 은행에 저축해 둔 저의 보잘 것 없는 밑천이에요. 그것을 찾아오겠습니다.”

 

이렇게 해서 그는 결국 그의 직원들과 어려움을 함께 나누며 기도했다. 하나님은 조지로 하여금 더욱 겸손하게 하시며 직원들의 믿음 또한 성장시켜 가셨다. 직원들이 헌신한 돈도 며칠을 가지 못했으나 그는 하나님의 또다른 기적을 믿었기 때문에 실망하지 않고 오히려 기뻐했다.

 

주말이 되자 빈약한 헌금마저 바닥이 나버렸다. 직원들은 모두 뭔가 한 아름씩 안고 말없이 빠르게 나갔다. 그날 밤 한 청년 직원이 대표로 조지에게 봉투를 건내면서 “…모두 고아들을 위한 헌금이에요” 하는 것이었다. 조지는 어리둥절하여 “이것은 어디서 들어 온 거죠? 여러분 모두 한 푼도 없으시잖아요?” “그것은 목사님의 기도에 대한 응답이에요. 그러니 고아원은 문을 닫지 않아도 됩니다.” 조지는 일어서서 “난 이 돈이 어디서 나왔는지 알아야만 되겠어요.” “…우리는 필요없는 물건들을 좀 갖고 있었습니다.” “물건들이라뇨?” “저희들 방엔 은제품, 그림, 대단찮은 가구들이 좀 있었죠.” “그것들을 팔았단 말입니까?” “우리도 기도에 대한 응답을 한번쯤 받아보고 싶어서였죠.” 그들은 영원한 것을 소유하고 싶어서 자신들의 소유를 판 것이다.

하나님의 유우머를 배우다

 

자기의 소유를 팔아 헌신한 직원들의 헌금도 며칠이 못되어 모두 바닥이 나버렸다. 그래서 아슬아슬한 순간들을 지내게 되었는데, 조지는 자기로서는 더 이상 고아원을 관리해 나갈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돈이 될만한 기구들은 모두 다 팔았고, 직원 중엔 아무도 은행에 한푼 예금해 둔 사람이 없었다. 그들의 유일한 재정원은 하나님 뿐이었다.

 

특히 어려웠던 5일이 지나자 한 여성이 멋진 가방을 들고 고아원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옆집에서 5-6일 동안 요양을 했는데, 고아원에 들어오고 싶었지만 모두들 엄숙하고, 바쁘게 움직이며, 무언가 한아름씩 들고 나가는 것이 피크닉이라도 떠나는 줄 알았으므로 이제 왔다고 말하면서 조지에게 2주간의 대금을 지불할 수 있는 많은 금액을 내놓았다.

 

1838년 부터 1843년 까지 5년간 아슬아슬하게 하루 하루를 인내하면서 지냈다.

 

11월 그의 지갑이 다시금 가죽만 남게 되자 직원들과 함께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자신들의 사정을 말씀드렸다. 기도를 마친 후 조지는 “하나님께서 도우실 것입니다. 저는 그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고 말하며 그들이 기도하고 있는 동안 온 편지 한 통을 열었다. 그 속에는 최소한 1주일간의 비용을 충당하기에 족한 10파운드가 들어 있었다!

 

재정난을 겪던 어느 날 한 과부가 찾아왔지만 그녀는 유산으로 받은 5백 파운드를 어디에다 투자해야될지 망설였다. 조지는 그날부터 기도하기 시작했다. 조지가 기도하는 동안 그 과부는 친구들에게서 ‘광신자 조지에게 투자해서는 안된다’ ‘좀 더 돈을 벌 수 있는 건전한 곳에 투자해야 한다’는 등의 이야기를 들었으나 브리스톨 고아들을 기억하고 있었다. 한 달이 지나갔다. 조지는 계속해서 기도했다. “오, 주여 한달이 되었나이다! 저는 24일간을 신실하게 기도했나이다. 당신의 뜻을 그녀의 생활에 나타내 주옵소서. 그녀의 소명을 깨닫게 하소서. 저는 돈의 필요에 대해 사람에게 한마디도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지키겠나이다.” 드디어 그 과부는 조지를 방문했다. “주께서 저에게 제 돈을 내어 주라고 말씀하셨어요. 주님은 제 유산을 고아들이 갖기 원하셔요” 그러나 조지는 자신의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가 아닌 그녀의 순수한 헌신이기를 바랬으므로 ‘2주 동안 기다렸다가 그때도 계속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 그녀의 소명으로 확신한다면 그때 5백 파운드를 받아들이겠다’고 말했다. 그 돈이면 1년 이상 세 고아원의 생활비가 될 수 있는 큰 돈이었다. 고아원은 그 돈을 절실히 필요했다. 마침내 그녀의 유산은 다음 해 3월에 들어왔다.

“진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믿음을 시험하기 위해서 우리를 가난케 하시는 자비로우신 우리 아버지.” 기적적인 기도의 응답은 몇 번이고 일어났다. 조지는 이러한 일들로 인해 하나님의 일하시는 방법과 유우머를 배우게 되었다.

 

새로운 하나님의 뜻

 

조지 뮐러는 거의 10년 동안 고아원을 세우고자 하는 욕망을 가져본 적이 없었고 오히려 들어온 기금들을 현재의 필요에 충당하고, 주님께서 주신 액수에 맞게 확장시키는 것을 더 좋아했다.
그러나 1845년 10월말, 네 개의 고아원이 위치한 윌슨가에 살고 있는 한 신사로부터 고아원 때문에 근처 주민들이 불편을 겪고 있으니 이 일을 해결하는데 최선을 다해 달라고 정중히 부탁하는 편지 한 통을 받고서 조지는 마음이 무거웠다. 그는 고아원이 윌슨가에서 이전해야 하는 이유와 이전하면 안되는 이유를 조목조목 써 보면서, 이 문제에 대해 기도하며 몇시간 동안 깊이 생각했는데, 고아원 입원신청서가 그때 가장 많이 들어오는 것을 보면서, 주님께서 새 건물을 지으라고 인도하시는 것을 보게 되었다. 주님의 뜻은 고아들의 복지를 위하고, 그들의 필요를 주님께 의탁하는 사람들에게 반드시 공급해 주시는 분임을 나타내시는 것이었다.

 

조지가 교회의 동료 사역자들의 의견을 수렴하기 위해 그들에게 이 문제를 털어놓았을 때 그들 모두가 건물 신축에 동의하였다. 다음날부터 아침에 아내 메리와 함께 고아원 신축을 위해 기도드리기 시작했다. 한푼도 들어오지 않았지만 그들이 전혀 실망하지 않았던 이유는 주님께서는 그분만이 정하신 시간에 그분만의 방법으로 그에게 자금을 주시리라는 확신이 점점 커져갔기 때문이다. 기도를 드리기 시작한 지 36일째 되던 날, 1845년 12월 10일. “조지, 이것은 1천 파운드에요! 바로 이 봉투 안에! 우리가 일찍이 보아온 것 중 최대의 것, 1천 파운드! …당신은 어쩌면 그렇게 침착할 수가 있지요?” “내가 침착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고아원을 세워야만 하는가에 대한 증거를 구했을 뿐 아니라 그 증거를 받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야. 하나님의 눈으로 볼 때 그것이 무엇이겠오?” 이제 조지는 하나님께서 그 나머지의 것들을 보내 주시리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더 많은 기도와 인내를 요구하며 신실하게 주님을 의지해야 함을 의미했다.

 

기적을 일으키시는 하나님

 

4일 후 그의 처제가 방문하여 ‘고아원에 대한 조지의 책을 읽은 한 건축가가 조지를 도와 고아원을 세우겠다는 것과 한푼도 받지 않겠다’는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하나님, 당신의 발걸음의 속도에 맞춰 저의 대담함을 받아 주시고 제가 구했던 것을 제가 전혀 꿈도 꾸지 못했던 방법으로 주신 것에 대해 감사하나이다.” 12월 30일 조지는 아침에 에스라서 1장을 읽으면서 하나님께는 필요하다면 수만 파운드라도 공급해주시는 것과, 그 자녀들의 마음을 움직여 그 일을 돕도록 하시는 것이 아주 쉽다는 것을 신선한 충격과 함께 깨달았다.

 

두 달이 지나갔는데, 기부금은 쫄쫄 새어들어 오는 정도였고 건축금은 점점 늦추어져 갔다. 1846년 2월 2일, 그는 애쉴리 다운(Ashley Down)의 경매지에 대해서 들었다. 그것은 약 7에이커 가량의 땅이었는데, 그에게는 안성맞춤으로 여겨졌다. 다음날 그는 그 땅의 소유주를 찾으러 떠났다. 집에 없어서 사무실로 갔는데, 금방 집으로 갔다는 것이다. 기대에 어긋나버린 이런 처사는 어떤 목적을 갖고 있다고 여겼는데, 바로 그에게 ‘그 소유주를 찾는데 고집하지 말라’고 경고하는 하나님의 메시지로 받아들이며 집으로 돌아왔다. 다음날 아침 일찍이 그 소유주의 사무실에 도착하자 그는 “이것봐, 어째서 자넨 어제 밤에 다시 오지 않았나? 난 자넬 기다리고 있었네. 사실 말이지, 뮐러! 난 지난밤 거의 잠을 이룰 수가 없었네. 3시에 깨어서 5시까지 눈을 뜨고 있었으니까. 그시간 내내 한 음성이 들려왔었네 ‘애쉴리 다운을 뮐러에게 팔라!’” 뮐러는 하나님이 하신 일에 놀라고 있었다. “오-!” “사실, 그 성가신 음성은 ‘뮐러에게 지나치게 청구하지 말라. 에이커당 60파운드를 감하라’고 말했네. 그 땅을 에이커당 180파운드로 매기려고 했는데, 그 음성을 듣고 120파운드로 감하기로 했네.” 그들이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금액이었다. “선생님, 제가 어떻게 감사할 수 있을까요?” “감사는 하지 않아도 좋네, 다만 내게 즉시 지불하고 나를 다시는 괴롭히지 말게.”

 

그래서 조지는 땅과 건축가를 얻었다. 건물신축기금 총액은 6월 4일 2,700파운드를 약간 넘어섰다. 그 액수는 필요한 총액의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분이 정하신 시간에 그 총액을 다 보내 주실 것을 믿고 조지는 계속 기도했다. 그는 주님께서 겸손히 이 건물을 짓도록 하신다는 확신을 강하게 느꼈다. 그가 만약 단지 열정만 가지고 고아원신축을 결정했다면 그는 갖가지 난관에 부딪쳐 좌절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일을 하도록 인도하셨다. 하나님은 예전과 마찬가지로 그를 도와주셨고 또 끝까지 도와주실 것이다.

 

인내속에 온전해져 가는 믿음

 

11월 19일 아침 5시에서 6시 사이에 조지는 무엇보다 먼저 건축기금에 대해 기도드렸다. 그리고 오랜 시간 하나님의 말씀을 읽다가 마가복음 11:24을 보게 되었는데,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는 구절을 새 고아원 건축에 적용했다. “주님, 저는 이 일을 하는데 필요한 모든 것을 당신께서 주시리라 믿습니다. 기도한 것은 반드시 응답하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날 저녁 300파운드짜리 수표가 든 등기우편이 전해졌다. 이토록 멋지게 격려해 주신 거룩한 이름이여 찬양받으소서! 건물신축기금은 이제 6,000파운드 이상으로 증가하였다. 12월 9일. 고아원 신축을 위해 하나님의 도움을 구한 지 400일이 지났지만 계속 하나님께서는 조지의 믿음과 인내를 시험하고 계셨다. 주님께서는 “아직도 나의 때가 오지 않았다”고 말씀하신 것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은혜로 그의 믿음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지난 1년 동안 하나님께서는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건물 신축에 적당한 토지와 건물신축기금으로 6,304파운드를 주셨다. 그분의 도우심을 신실하게 믿으면서 뮐러는 이 길을 끝까지 가기로 다짐했다.

 

1847년 1월 고아원 기공 계절이 다가오고 있었으므로 더욱더 열심히 나머지 건축기금을 신속히 보내주시도록 기도드렸다. 그날 아침 하나님께서 그 기금을 곧 보내주실 수 있을 뿐 아니라 그렇게 하실 것이라는 확신 속에서 무릎을 박차고 일어났는데, 기도를 마친 지 약 1시간쯤 지나서 건물 신축용으로 2,000파운드의 돈이 들어왔다. 이 기부금을 받았을 때 하나님 안에서 누린 기쁨은 이루 형언할 수 없을 정도였다. 조지는 그들이 필요로 하는 액수에 대하여 주님의 응답을 447일간 기다려왔다. 그는 감사했다.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인내심을 가지고 응답을 기다림으로써 우리의 영혼이 받은 축복은 얼마나 큰 것인가!”

 

1845년 12월 10일부터 1847년 1월 25일 까지의 전적인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9,285파운드의 돈이 들어왔다. 주님께서는 고아원 신축 후 1년에 경비가 2,500파운드씩 더 증가하더라도 일단 건물이 완공되면 필요한 모든 것을 기꺼이 채워 주실 것이다. 4월 29일 드디어 건물 신축을 위해서 기부받은 총액이 11,000파운드를 넘어섰다. 이 액수로 땅을 사고 건물을 신축하는데 드는 모든 경비를 충당할 수 있게 되었다.

 

1847년 7월 5일, 애쉴리 다운에서 기공식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모든 증서가 지불되었던 2년 후에는 7백 파운드가 기금으로 남았으며 한편 애쉴리 다운의 집이 고아들을 위해 완공되었다. 1849년 6월 18일 300명의 고아들이 그들의 새 집으로 기쁨에 차 들어가는 모습은 참으로 경사스러운 광경이었다. “메리, 난 지난 3년 반을 결코 잊을 수 없을 거야.” “실링과 파운드의 이적, 이것이 우리가 지난 3년 반을 가리켜 이름지어야 할 것이에요.” “너무도 많은 이적들이었어. 하나님 찬양 받으소서!”

 

한계를 모르시는 하나님

 

신축 고아원에는 300명의 고아들과 총 335명이 생활하고 있으며, 조지가 하는 일의 분량도 많다. 그런데도 조지는 불쌍한 고아를 돌보는 일에 더 심혈을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하였는데 10일간 계속 그 문제로 기도하며 1850년 12월에 고아들의 수를 3배로 늘이고 700명을 더 수용할 수 있는 고아원을 세울 것을 결심하였다. 몇몇 사람들에게 그의 계획들을 털어놓자 그들은 그가 미쳤다고 했다. 헨리 크레익도 마찬가지였다.

 

“자네가 1천명의 고아들을 떠맡으려고 한다면 자넨 자네의 한계를 넘어서는 처사가 될 걸세…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고 말씀하셨어. 자네의 계획은 영적인 자만이야!”

“하나님으로서는 어떠한 것에 대해서도 가능하셔. 우리가 지금까지 살아온 것을 생각해 보라구. 그리고 온갖 역경을 통해 하나님은 내 믿음을 확대해 오셨어.”
“그러나 조지, 사람의 힘에는 육신적으로도 한계가 있는 거야.”
“헨리, 나는 16년 동안 단독으로 고아원을 관리했고, 한 명의 조수를 두지 않고도 52주마다 혼자서 3천 통의 편지를 쓰고 있어. 나 조지 뮐러는 주의 이름에 더욱 영광을 돌리기 위해 계속할 걸세. 사람들이 언제든지 모든 것에 대해서 주를 앙망하고 칭송하며 신뢰하고 의지하도록 말이야. 그것이 내 목적일세. 애쉴리 타운에 1천 고아들을 수용하기까지 중단하지 않을 걸세.”

 

조지는 주님의 뜻을 알기 위해 또다시 특별 기도시간을 가졌으며, 계속 추진해야 한다는데는 조금도 의심이 들지 않았다. 조지는 고아원 사업을 확장하는 것에 대해 스스로 해명한 반대 이유들과 찬성하는 8가지 이유들을 종합해 보면서 이 사역을 확장하는 것이 그분의 뜻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조지는 여지껏 받았던 기부금 중 가장 많은 액수인 3천 파운드의 돈을 기부받음으로써 주님께서 이 일을 기뻐하신다는 증거로 받아들였으며 그분께 모든 것을 맡길 때 훨씬 많은 액수의 돈이 들어오리라고 기대했다. 극복해야 할 어려움이 크면 클수록 기도와 믿음으로 얼마나 많은 것들이 성취될 수 있는가를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는 아직 상당한 인내가 필요한 것처럼 보이기 시작했으며 건축 헌금은 그의 인내를 시험하듯 졸졸 새어들어왔다. “내가 참을성 있게 인내하자 기도에 대해 응답을 받았다.” 이것이 1850년 5월부터 1851년까지 그의 고백이었다. 그러자 어떤 사람이 8천 파운드를 기부했다. 이제 돈은 좀 대규모로, 또 소규모로 꾸준히 들어왔으며 조지와 메리와 리디아는 계속하여 기도했다.
조지는 1855년 3월, 4년 반만에 건축에 충분한 기부금을 받았다. 새 고아원 옆에다 큰 고아원을 지으려고 했는데, 그 땅을 살 수가 없어서 반대편에 나누어 2개를 지음으로써 고아원이 3개가 되었다. 결국 참을성 있게 인내하므로 기도에 대한 응답을 받았다. 가을까지 기초가 닦아졌으며, 벽돌공들, 목수들과 인부들이 브리스톨에서 매일 아침 기차를 타고 와 12시간동안 벽돌을 쌓고 대들보를 맞추었다. 해머소리, 망치소리와 인부들의 합세하는 소리가 시끄럽게 들리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서 바로 자기 눈 앞에서 일하고 계시다는 일종의 환희를 느끼게 되었다. 조지는 유리창값이 너무 비싸서 계약서에 서명하기를 지체하고 있었는데, 고아원 모든 창문에 필요한 유리를 무료로 제공하겠다는 편지를 받게 됨으로써 그의 기쁨은 더욱 커졌다. “하나님은 한계란 것을 모르십니다. 그리고 조지 뮐러는 오직 그의 채널일 뿐입니다.” 라고 외치고 싶었다.

 

1856년 2월 그의 처분에 맡겨진 3천 파운드와 건축기금으로 1천 7백 파운드를 받았다. 다음달에는 4천 파운드와 건축기금으로 3천 파운드를 받았다. 하나님은 이제 거액으로 조지에게 돈을 주셨다. 두 번째 고아원은 조지가 기도를 시작한 지 7년 후에야 완성되었다. 그 건물들은 최초의 벽돌로부터 마지막 개스 버너에 이르기까지 3만 5천 파운드의 비용이 들었고, 3만 5천 335파운드가 기부되었다. 하나님께서 조지 자신이 설정했던 한계를 넘어 335파운드를 더 주셨던 것이다. 그뿐 아니라 조지는 누구한테 1실링도 구하지 않고, 오직 기도로써 주님께 구했던 것이다. 할렐루야!

 

다시 450명의 고아들을 수용할 수 있는 가장 큰 세 번째 고아원을 지으려고 하니 7천 파운드의 선물이 들어왔고 한 달 후엔 1천 7백 파운드의 선물이 들어왔으며 새 건물의 390개의 창문을 위해 또 유리가 기증되었다. 1859년 7월부터 시작되어 2년 후에 거의 완공되었고, 4만6천 파운드가 건축기금으로 들어왔음을 알았다. 그들이 기도했던 것보다 1만 1천 파운드가 더 많은 것이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아직도 당신은 한계를 두지 않고 계심에 대하여!” 이것이 그의 기쁜 외침이었다. 1862년 3월에 완공되었다. 6개월로부터 9세까지의, 부모가 없고 집 없는 1천명 이상의 소년, 소녀들이 이제 하루에 세차례의 식사와 입을 옷과 그들이 일찍이 받았던 기독교 교육에 대해서 조지 뮐러를 의지하고 있었다. 직원들 역시 많아졌다. 조지는 이제 신중한 청년 ‘짐 라이트’를 조수로 두었으며 그를 믿고 대화를 나누었다.

 

2천명의 고아들과 조지의 말년

 

그러나 조지는 3개의 고아원도 부족하게 느꼈다. 빈민굴에는 버림당하고 가난에 찌든 어린아이들이 아직도 많기 때문이었다. 그는 두 개의 고아원을 더 세우고 고아들의 수를 배로 늘려 2천명의 고아들을 수용할 계획을 갖고 있었다.
땅을 사기 위해서 소유주와 브리스톨 수도 관리소와 싸워야만 했다. 소개업자는 절망적으로 말했으나 조지는 이미 숱한 기적들을 체험하였기 때문에 어떤 일에도 절망하지 않았고 뒤로 물러서지 않았다. 결국 수도관리소와도 해결이 잘 되었다. 소유주는 7천을 원했으나 조지는 5천 가까이 내렸다. “내 당신에게 헐값을 매기고 있오.” “당신이 아니요. 헐값을 매기시는 분은 하나님이셔요. 자, 서류에 서명합시다.”

 

1866년 5월 7일 삽질이 다시 시작되었다. 이제 애쉴리 타운 전역은 어린이들의 마을이 될 것이다. 조지는 짐 라이트와 함께 그곳에 서서 뜨거운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있었다. 그의 아내 메리는 심한 기침을 하면서도 공사장에 와서 돕는 것을 쉬지 않았다. 넷째와 다섯째 건물을 세우는 데는 4년이 걸려 1870년 1월 6일에 모두 완공되었다. 이제 부모 없는 2천 5십 명의 어린이들이 그리스도인 가정에서 교육을 받을 것이다. 성령님께서는 어린이들 속에서 역사하셨고 많은 아이들이 예수님을 영접하고 기쁨에 참여하였다.
드디어 건축이 끝이 났다. 그 건물들은 그가 죽은 후에도 반세기 이상 서 있을 것이며 그것들에 대해서 아는 사람은 또한 고아원들의 벽돌 하나하나가 기도로 응답받았던 것임을 배우게 될 것이다. 사람들은 조지를 가리켜 독립자, 반역아, 심지어 광신자라고까지 불렀다. 그러나 많은 이들에게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길잡이가 될 것이다.

 

그의 신실한 동역자 메리 뮐러는 한 달 후에 죽었다. 조지는 홀로 그의 딸 리디아와 고아들과 남았다. 그는 비록 65세였지만 아직 그의 인생은 끝나지 않았다. 1년 반 후 그의 딸 리디아와 조수 짐 라이트는 결혼하였고, 조지는 오랫동안 기드온 교회당에서 알아온 40대 초반기의 수산나 그레이스 샌저와 재혼하여 71세부터 함께 유럽, 아시아와 아메리카로 연속적인 선교 여행을 떠났다. 그는 2십만 마일을 여행하였고 42개국에서 설교했는데, 그 일을 88세가 되기까지 계속하였으며, 93세에 애쉴리 타운에서 죽었다. 죽기 전 날까지 그는 여전히 고아원을 질서있게 관리했다. 조지가 죽자 짐 라이트와 리디아가 고아원을 맡았으며 그들 역시 지금은 이 세상에 없지만 브리스톨에서 그 후손들의 일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조지 뮐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일한 참 종으로서, 성경말씀을 그대로 믿고 실천한 순종의 사람이었으며, 또한 사람의 생각이나 관습을 초월하여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창조적인 믿음을 가진 기도의 사람이었다. 조지의 93년의 생애는 끝이 났으나 그의 믿음을 통하여 역사하신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지금 우리에게 전해져 높임을 받고 있으며, 그를 의지하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증거가 되고 있을 뿐 아니라 후세에도 계속 빛날 것이다. 

김연심 전도사    [그리스도복음신문 1999.8-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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