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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위험성

마태복음 최용우............... 조회 수 2304 추천 수 0 2010.04.21 07:3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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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마21:23-32 
설교자 : 정용섭 목사 
참고 : http://dabia.net/xe/39863 

emoticon2008.9.21

본문설명

 

예수님의 공생애는 3년이 채 되지 않습니다. 그 짧은 시기를 세 부분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갈릴리에서 활동하던 시기,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오는 중간 시기, 예루살렘에 입성해서 활동하던 시기가 그것입니다. 각각의 시기가 다 중요하지만 그래도 마지막 시기가 가장 중요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복음서 기자들도 그 시기를 가장 자세하게 보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유대교 지도층과 크게 대립하고, 급기야 체포당한 후 빌라도에게 십자가 처형 선고를 받고 죽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들어간 직후에 벌어진 사건을 보도하고 있습니다. 크게 보면 두 가지 이야기입니다. 마 21:23-27절은 예수님의 권위에 대한 논쟁이고, 마 21:28-32절은 ‘두 아들의 비유’ 이야기입니다. 그 내용을 간단하게 살펴보겠습니다.

 

1. 예수님이 성전에서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이게 대사제들과 원로들에게 문제가 되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유대교를 대표하는 장소입니다. 아무나 가르칠 수 없는 곳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성전 뜰에서 장사하던 사람들을 내쫓기도 했습니다.(마 21:12-17) 복음서 기자의 이런 보도를 보면 예수님은 과격한 분이었던 것 같습니다. 대사제에게서 공인을 받고 장사하던 사람들을 갈릴리 촌에서 온 일개 랍비가 내쫓는다는 건 말이 안 됩니다. 성전 체제를 근본적으로 허무는 행위였습니다. 예수님들은 장사하는 사람들에게 구약성서를 인용해서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고 불리리라 했는데, 너희는 이 집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다.”고 비판했습니다.

 

이 말이 대사제들의 귀에 들어갔겠지요. 그들은 예수님에게 와서 이렇게 따졌습니다.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들을 합니까? 누가 이런 권한을 주었습니까?”(마 21:23) 예수님은 그 질문에 직접 대답하지 않고, 거꾸로 그들에게 질문했습니다. 요한이 어디서 권한을 받아서 세례를 베풀었느냐, 하늘이냐, 사람이냐 하고 물었습니다. 대사제와 원로들은 아주 곤란한 지경에 빠졌습니다. 왜냐 하면 그들은 세례 요한의 세례를 인정하지 않았지만, 군중들은 인정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모른다고 대답하자 예수님도 자기의 권한이 어디서 왔는지 말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2. 이어서 예수님은 두 아들의 비유를 가르치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큰 아들에게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고 일렀습니다. 큰 아들은 처음에는 싫다고 하더니 나중에 뉘우치고 일하러 갔습니다. 둘째 아들에게 똑같이 일렀습니다. 둘째 아들은 일하러 가겠다고 말만 하고 실제로는 가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두 아들 중에서 누가 아버지의 뜻을 받든 아들이냐 하고 당연한 질문을 하셨습니다. 사람들은 큰 아들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이 대답을 끌어내신 예수님은 이 비유를 조금 더 구체적으로 해석해 주었습니다. 거기 모인 대사제와 원로를 비롯한 유대교 지도자들보다 그들이 무시하는 세리와 창녀가 먼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다고 말입니다. 이를테면 대사제는 작은 아들이고, 세리는 큰 아들입니다. 그 이유를 예수님을 실증적으로 설명합니다. 세리와 창녀는 세례 요한의 말을 받아들인 반면에, 대사제와 원로들은 요한의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위에서 설명한 두 이야기의 공통점은 무엇인가요? 세례 요한이 이야기 전개 과정에서 중요한 인물로 제시됩니다. 첫 번째 이야기에서 예수님은 대사제와 원로들을 향해서 세례 요한의 세례를 인정하느냐 하고 물음으로써 그들이 세례 요한의 세례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폭로하셨습니다. 두 번째 이야기에서는 그들이 세례 요한의 가르침을 믿지 않았다는 사실을 직접 거론하셨습니다. 대사제와 원로들은 요한의 세례 행위도, 그의 가르침도 모두 거부했습니다. 그것은 곧 예수님을 거부한 것과 똑같습니다. 복음서 기자들은 예수님의 길을 예비한 요한과 예수님의 운명을 거의 하나로 봅니다. 양자 모두 결국 젊은 나이에 죽었습니다. 이들을 죽음으로 내몬 인물들이 바로 유대교의 종교 지도자들이었습니다. 본문에 따르면 이 종교 지도자들이 바로 위에서 지적했듯이 둘째 아들에 해당됩니다.

둘째 아들의 ‘예’

 

둘째 아들은 큰 아들과 달리 처음에는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처럼 포즈를 취하더니 결국에는 무시했습니다. 성서사본에 따라서 큰 아들과 작은 아들의 역할이 다르게 나오기도 합니다. 큰 아들이 처음에 예 했다가 나중에 가지 않았고, 둘째 아들이 처음에 아니오 했다가 나중에 갔다고 말입니다. 탕자의 비유를 감안한다면 다른 사본의 보도가 조금 더 사실에 가까운 것 같지만, 그래도 오늘 저는 공동번역에 따라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둘째 아들이 말로는 예 했다가 실제 행동에서는 왜 아니오 했을까요?

 

1) 둘째 아들이 원래 위선적인 인물이었을지 모릅니다. 포도원에 일하러 가라 하는 아버지의 말씀을 들었을 때 일하기 싫었지만 아버지의 말씀이니까 어쩔 수 없이 예 하고 대답했을 뿐이라고 말입니다. 말과 행동의 불일치를 지적하는 말씀인 것 같습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의 위선에 대해서 마태복음 기자는 23장에서도 자세하게 언급했습니다. 그들은 모세의 자리를 이어받아 율법을 말로 가르치기만 하지 실천하지는 않는다고 했습니다. 마 23:13절 말씀은 다음과 같습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아, 너희 같은 위선자들은 화를 입을 것이다. 너희는 하늘나라의 문을 닫아놓고는 사람들을 가로막아 서서 자기도 들어가지 않으면서 들어가려는 사람마저 못 들어가게 한다.”

 

2) 또 다른 이유는 둘째 아들이 일하러 갈 준비를 하다가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이 생겼거나 조금 귀찮은 생각이 들어서 꾀를 피운 것인지도 모릅니다. 처음에는 정말 순수했는데, 어려운 현실과 타협하느라 결국 불순종하게 되었다고 말입니다. 우리의 신앙을 돌아보면 둘째 아들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기자가 에페소 교우들을 책망했듯이 처음의 사랑을 계속 유지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예수님과 크게 충돌한 바리새파 사람들의 율법주의도 결국은 처음의 순수성을 계속 유지하지 못해서 일어난, 즉 현실타협의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둘째 아들이 처음에는 ‘예’ 했다가 결국은 일하러가지 않은 이유에 대한 저의 두 가지 설명, 즉 그가 처음부터 위선적이었을 가능성과 상황의 변화에 따라 어쩔 없이 저지른 현실타협이었을 가능성이 옳은가요? 그것으로 우리는 본문을 충분히 이해한 것일까요? 이 비유는 이런 설명보다 더 심각한 어떤 사태를 담고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알려면 우선 대사제와 원로들, 특히 바리새파 사람들, 더 나아가서 유대교 전체를 사실적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유대교의 율법과 그것을 전문적으로 수행하는 사람들은 위선자도 아니고 현실타협자도 아닙니다. 그들도 인간인지라 그런 요소들이 없지는 않겠지만, 유대교를 대표하는 바리새파 운동의 큰 틀에서 보면 그들은 자신들의 신앙에 철두철미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목숨을 거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자신의 전체 존재, 자신의 운명을 하나님에게 건 사람들이었습니다. 그것을 우리는 세계사에서 실증적으로 발견할 수 있습니다.  

 

3) 무슨 말씀인가요? 하나님의 말씀을 순수하고 진실하게 지키려고 노력했다는 사실이 바로 하나님의 명령을 거부한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참으로 황당한 일입니다. 초지일관 하나님 앞에서 ‘예’ 했는데, 그것이 결국은 ‘아니오’가 되고 말았습니다. 대사제와 원로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은 세례 요한을 일부터 미워한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들을 부도덕하고 파렴치한, 광신자로 매도하면 곤란합니다. 그들은 모세로부터 내려온 율법과 솔로몬부터 내려온 성전이 있었습니다. 그것을 고수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세례 요한은 광야로 나가서 사람들을 선동했습니다. 율법과 성전보다는 새로운 삶을 선포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양쪽의 이해가 전혀 달랐습니다. 진정성이 있는 사람들 사이에 기본적인 종교 이해가 다를 때 어떤 결과가 나올지는 불문가지입니다. 그 와중에 요한은 참수형을 당했습니다. 그들과 예수님 사이에 무엇이 문제였는지는 긴 말을 하지 않겠습니다. 예수님은 세례요한보다 더 극단적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대사제와 직접 부닥치지 않고 광야에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했지만, 예수님은 아예 성전 안에 들어와서 성전을 정화하고, 심지어 성전을 허물라고까지 말씀하셨습니다. 율법과 성전을 절대화하던 유대 종교지도자들에게 예수가 얼마나 위험한 인물인지도 역시 불문가지입니다. 그들은 결국 예수님을 처분할 기회를 찾기 시작했습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대사제와 원로들로 비교되는 둘째 아들은 부도덕하거나 파렴치하거나 위선적이어서가 아니라 거꾸로 너무나 진지하고 건전하고 성실해서 문제였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따랐는데, 그것이 결국은 하나님을 거부하는 것이었습니다.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었습니다. 자신들이 행한 평생의 수고가 헛된 일이었으니, 더 나아가서 하나님에게 적대적인 일이 되고 말았으니 말입니다.

 

지난 기독교 역사에서 이런 일들이 얼마나 자주 반복되었는지는 여러분이 잘 알고 있을 겁니다. 십자군, 마녀사냥, 종교재판, 식민지배 등등이 그렇습니다. 이런 일들은 믿음이 좋다고 인정받고 있는 사람들에 의해서 주로 일어났습니다. 오늘은 어떨까요? 저는 가끔 서울역을 지날 때마다 눈살이 찌푸려지는 일이 있습니다. 확성기를 틀어놓고 찬송가를 부르고 전도하는 사람들이 그것입니다. 지하철 안에서도 그런 일들이 일어나곤 합니다. 경직된 표정으로 예수 믿고 천당 가라고 좁은 지하철에서 전도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믿음의 확신으로 그런 일을 하겠지요. 그런 행동이 오히려 하나님 나라를 가로막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들의 모든 수고는 무엇이 될까요?

 

이런 건 목사들에게 특히 심각합니다. 사람들에게 평생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살았는데 그것이 결국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한 것일 수 있습니다. 교회를 위해서 희생을 강요하는 목사들의 책임은 마지막 심판에서 피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신자들을 죄책감에 사로잡혀 평생 불안하게 살게 했다면 그것은 하나님 나라를 거부한 것과 똑같습니다. 최소한의 합리성도 용납하지 않은 채 사람들의 종교적 열광에 묶여 있는 교회에서 이런 일은 비일비재합니다.

세리와 창녀

 

예수님은 분명하게 선언합니다. 대사제와 원로들보다 세리와 창녀가 먼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고 말입니다. 그들은 요한의 가르침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도대체 무슨 문제가 있기에 가장 종교적인 사람들이라 할 대사제와 원로들은 요한을 거부하고, 세리와 창녀는 받아들였을까요? 앞 사람들의 문제는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율법과 성전을 절대화했습니다. 다시 묻습니다. 세리와 창녀는 어떻게 요한의 가르침을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요? 그 대답도 이미 주어진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대사제와 원로들에게 문제가 되었던 상황을 바꿔 생각해보세요. 세리와 창녀들은 무엇을 절대화하지 않았다는 게 그 대답입니다. 무엇을 절대화하지 않았다는 것은 진리에 마음이 열려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진리를 선포한 세례 요한의 말씀을 받아들인다는 건 아주 자연스런 일입니다.

 

절대화하지 말아야 한다면 결국 모든 것을 상대화해야 한다는 말이냐,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도 상대화해야 한다는 말이냐, 하고 생각할 분들이 있을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당연히 절대적인 존재이십니다. 하나님 나라와 그의 통치인 생명과 사랑은 절대적입니다. 유대 종교 지도자들에게 문제는 율법과 성전을 하나님과 동일시했다는 데에 있습니다. 이것을 오늘 우리의 경우로 바꿔서 말한다면 성서 문자주의가 그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절대적이지만 그것을 담고 있는 성서의 문자는 절대적인 게 아닙니다. 앞에서 잠시 지적했지만 두 아들의 비유도 사본에 따라서 큰 아들과 작은 아들의 역할이 다릅니다. 그뿐만 아니라 성서에는 고대인들의 우주관이 그대로 담겨 있기도 합니다. 극단적인 문자주의와 세대주의자들은 지구의 나이를 6천년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성서를 문자의 차원에서 절대화하면 결국 성서로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기 힘들게 됩니다.

 

절대화를 다른 말로 바꾼다면 자기 강화입니다. 자기의(義)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어떤 사실이나 이념을 절대화한다는 것은 그것이 바로 자기를 강화시켜준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한국교회에서 십일조는 신앙의 절대적인 기준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내면에는 복에 대한 욕망과 화에 대한 두려움이 들어 있습니다. 말하자면 십일조 헌금이 무조건 순수한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해는 마세요. 모든 헌금이 그렇다는 뜻이 아닙니다. 전반적으로는 그런 자기의 종교적 업적과 자기 강화가 이런 헌금에도 작용하고 있다는 건 분명합니다.

 

오늘 말씀을 듣고 혹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는 대사제와 원로가 내가 아닌가 하고 불안하게 생각하는 분들은 없으신가요? 그렇게 염려할 필요는 없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믿음의 결과에 대한 양면성을 말합니다. 대사제와 원로들에게는 자신들이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심판이 임했지만, 세리와 창녀들에게는 자신들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은총과 위로가 주어졌습니다. 그 당시에 하나님의 뜻을 거절하는 사람들로 낙인찍혔던 세리들이 대사제들보다 하나님 나라에 먼저 들어가고 있다는 겁니다. 주님의 놀라운 은총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여러분이 대사제나 원로에 속하는 분들인지 세리나 창녀에 속하는 이들인지, 또는 예 했다가 일하러 가지 않은 작은 아들인지 아니오 했다가 일하러간 큰 아들인지 저는 모릅니다. 그걸 말씀드리려는 것도 아닙니다. 오늘 설교의 결론은 훨씬 더 근원적인 것입니다. 믿음은 우리에게 아주 위험한 어떤 것이라는 사실이 그것입니다. 우리를 생명의 심층에서 살려야 할 믿음이 어느 순간에 종교적 이념으로 변질되면 우리를 죽일 수도 있으니까요. 그것을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도 보았고, 역사에서도 확인했습니다. 그런 위험을 피하려면 우리의 믿음을 말씀과 진리의 빛에 노출시켜야 합니다. 즉 믿음에 대한 객관적 성찰을 놓치지 말아야한다는 뜻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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