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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항해하면서 발견한 다시 읽고 싶은 글을 스크랩했습니다. 인터넷 공간이 워낙 넓다보니 전에 봐 두었던 글을 다시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래서 스크랩할만한 글을 갈무리합니다. (출처 표시를 하지 않으면 글이 게시가 안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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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 권 고백 - 33. 청각의 자극.
귀의 쾌락은 나를 어찌할 수 없도록 꼭 얽어매고 있었지만
당신은 나를 풀어 놓아 자유롭게 해주셨습니다.
나는 지금도 밝고 아름다운 목소리로 노래를 하면
당신의 말씀으로 감동되듯이 항상 즐겁게 마음의 안정을 찾습니다.
그러나 내가 그것에 집착함이 없이 언제든지 필요할 때는 털고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생명을 형성하고 있는 말로써 그 목소리가 내 마음에 들려고
그것의 훌륭한 위엄으로 내 마음속에 자리를 잡으려 할 때
나는 그것에 맞는 응분의 자리를 바로 내어주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때로는 어울리지 않는 명예를 주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거룩한 말씀도 이처럼 노래하면 가락에 맞추어 부르지 않았을 때보다
더 우리의 마음을 생생하게 감동시켜 준다는 것을 나는 느낍니다.
또 우리들의 정신의 모든 자극은 그 종류를 따라
음성과 노래에서 그 본래의 표현을 발견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떻게 저 신비로운 음조와 어울려 나타나는지 나는 알지 못합니다.
정신이 감각의 즐거움에 굴복하면 유약해지고
감각이 이성을 동반자로써 관계하기보다는 가끔 속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감각은 이성때문에 존재할 가치가 있는 것이면서도 순순히 이성을 좇아가지 않고
오히려 앞질러 가려고 이성을 자기의 길로 이끌어 갑니다.
그러나 때때로 내가 이런 속임수를 지나치게 경계하다가
너무나 엄격한 나머지 잘못을 저지를 때도 있었는데
다윗의 시편이 노래로 불려질 때 그 즐거운 음악까지도 모두
내 귀와 교회의 귀에까지 들려지지 않도록 쫓아 냈습니다.
그러므로 내게는 알렉산드리아의 아타나시오스의 말이 떠오르면서
그것이 차라리 안전하게 여겨졌습니다.
내가 들은 것에 의하면 그는 시편을 읽는 사람에게
노래라기 보다는 낭독이라고 생각될 만큼 억양을 되도록 작게 읽으라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신앙을 되찾기 시작한 초기에 교회에서 들려오는 노래를 듣고
눈물을 흘리던 일을 상기하고는 지금도 그것이
밝은 목소리와 정확한 박자로 불려지는 것을 듣거나
가락보다는 가사의 내용에 감격하는 것을 보면
그 습관이 매우 유익했다는 것을 다시금 느끼게 됩니다.
이와 같이 나는 감각적 즐거움의 위험과
그것이 가지고 있는 구원적 효과의 경험 사이에서 동요하고 있었지만
ㅡ 결정적인 판단은 아니지만 ㅡ
교회에서 노래를 부르는 것이 더 좋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귀를 즐겁게 함으로써 마음이 연약한 사람에게도
경건한 감정을 불러 일으킬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어쨌는 내 경우에 있어서는 가사보다는 노래 자체에 더 많이 끌렸으며
그리하여 나는 벌받아 마땅한 죄를 범했다는 것을 고백합니다.
그러한 경우는 노랫소리조차도 듣지 않는 것이 더 좋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것이 지금의 나의 상태입니다.
마음속에 어느 정도의 선을 구하며 선행을 쌓는 사람들이여!
나를 위하여 나와 더불어 울어다오!
나처럼 마음이 아프지 않은 자들은 내 말이 곧이들리지 않을 것이다.
주 나의 하나님이시여!
나의 기도를 들으시어 돌아보시고 나를 보살펴 주십시오
나를 불쌍히 여기시어 고쳐 주십시오
당신이 보시는 앞에서 나는 나 자신에게 있어서 수수께끼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곧 나의 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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