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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유한 자의 복 (마태복음 5장 5절)
< 축복의 최대 원천 > 창세기를 보면 이삭의 별명이 있다. ‘우물 파기 명수’란 별명이다. 그는 파는 곳마다 고대의 최대 재산인 우물이 펑펑 터졌고, 또한 창세기 26장을 보면 블레셋 사람들의 땅에서 농사해서 백배의 소출을 얻고 마침내 거부가 된다(12-13절). 그가 얻은 축복의 최대 원천은 무엇이었는가? 바로 ‘온유함’이었다. 이삭이 블레셋 땅에서 거부가 되자 블레셋 사람들은 이삭의 우물을 막고 흙으로 메웠다(15절). 광야에서 우물은 큰 재산이자 생명의 원천이기에 우물을 흙으로 메운 것은 살인행위와 같다. 게다가 블레셍 왕 아비멜렉은 이삭에게 “우리를 떠나가라!”고 했다(16절). 그것은 “당신 땅을 내놓으라!”는 말이다. 그러면 대개 사람들은 사생결단을 하지만 이삭은 조용히 그곳을 떠나 그랄 골짜기로 갔다. 힘이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니다. 당시 아베멜렉은 이삭에게 “네가 우리보다 크게 강성하니까 우리를 떠나라!”고 했다. 그 말은 이삭이 무력을 사용하면 그랄 땅을 점령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이삭은 그냥 떠났다. 그것이 이삭의 위대한 점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삭을 좇아가며 축복하셨다. 힘이 있어도 그 힘을 사용하지 않고 양보하면 놀라운 축복이 펼쳐진다. 물질적인 축복과 지경이 넓혀지는 축복을 원하면 무엇보다 온유함을 갖추라. 아무리 생각해도 분노가 치밀어 오르지만 이삭이 그냥 양보하고 다른 곳에서 우물을 파자 그곳에서 샘이 터졌다(19절).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방법이다. 양보(讓步)하면 진보(進步)한다. 살다 보면 자기 영역을 침범당하는 기막힌 일을 당할 때가 있다. 그때도 최대한 양보하고 손해도 감수하라. 그때 데모하고, 연판장 돌려서 물질을 얻으면 그 물질은 금방 사라진다. 그리고 사라질 때는 그냥 사라지지 않고 마음에 고통을 주며 사라진다. 반면에 이삭처럼 양보하면 곧 빈털터리가 될 것 같지만 오히려 그가 있는 곳에서 하는 일마다 축복의 샘이 터진다. 결국 온유함이 축복을 얻는 최대 비결이다. 한 목사가 있었다. 일찍 하나님 앞에 헌신했고, 설교를 잘해서 30대 중반에 큰 교회를 이루었다. 그런데 그에게는 한 가지 약점이 있었다. 그것은 혈기를 부리는 것이었다. 그에게는 지적할 것이 너무 많았다. 누가 식사를 남기면 “선교지에서는 굶는데 식사를 남기면 되느냐?”고 혈기를 부렸다. 그러면 듣는 사람들이 변화되기보다는 오히려 반발했다. 결국 그 혈기 때문에 교회를 떠났고, 지금은 근육무력증으로 병든 몸과 마음으로 뚜렷한 사역지도 없이 떠돌고 있다. 능력이 많아도 온유하지 않으면 결말이 비참해지만 능력이 부족해도 온유하면 결말이 좋다. 더 나아가 능력과 온유함의 양 날개를 갖추면 높이 비상하게 된다. 그러므로 몸과 마음과 영혼의 건강을 얻고 실질적인 축복을 얻으려면 온유해야 한다. 산상팔복은 대개 하늘의 영적인 축복인데 그 중에서 유일하게 땅의 축복을 내포한 복이 바로 산상팔복의 셋째 복인 온유함의 복이다. 본문 말씀을 보라.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그 말은 온유함이 물질세계 정복에 가장 필수적인 요소라는 뜻이다. 성공하려면 자본과 지식도 필요하고 인맥과 학력도 필요하지만 무엇보다 필요한 것이 온유함이다.< 온유함이 아닌 것 > 온유함이 무엇인가? 많은 사람이 온유함을 오해한다. 그 오해를 바로잡기 위해 먼저 온유함이 아닌 것부터 알 필요가 있다. 첫째, 온유함은 마냥 부드러운 것이 아니다. 온유함이란 주관도 없고 연체동물처럼 흐느적거리며 사는 것이 아다. 온유함이란 외유내강을 말한다. 속으로는 뚜렷한 주관을 가지고 있지만 겉으로는 부드럽게 남을 감싸 안는 것이 온유함이다. 한 이민교회 전도사는 월요일만 되면 배가 아팠다. 나중에 그 원인을 알았다. 알고 보니까 교회사역 때문이었다. 주일에 교회에 가면 전도사가 호인이니까 주일학교 부장집사나 나이 어린 청년 선생까지 별의별 일을 다 부탁했다. 그런 일들을 다 들어주니까 교인들은 호인이라고 했지만 속으로는 자존심이 상했고, 결국 내면 안에 억제된 분노로 수시로 배가 아팠던 것이다. 부드러운 것은 좋지만 주관도 없이 우왕좌왕하는 것은 복된 모습이 아니다. 둘째, 온유함이란 마냥 느긋한 것이 아니다. 온유한 사람은 겉으로는 부드럽지만 어떤 시련에도 굴하지 않고 마음을 잘 다스리기에 느긋함을 잃지 않는다. 그래서 온유하고 능력이 있는 사람은 대개 여유가 있다. 여유는 능력의 표시이고 조급함은 무능력의 표시이다. 그러나 지나친 여유는 게으름과 무책임의 표시일 수도 있다. 진짜 온유한 사람은 여유가 있으면서도 때로는 박력과 추진력도 있고 책임감도 탁월한 사람이다. 셋째, 온유함이란 마냥 참는 것이 아니다. 사랑은 오래 참는 것이지만 끝까지 참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거룩한 분노도 필요하다. 민수기 12장을 보면 모세가 이방인 구스 여인을 취할 때 모세의 누이 미리암이 그 일을 비방하다가 문둥병에 걸렸다. 그때 모세는 전혀 분노하지 않고 오히려 그녀의 치유를 위해 기도했다. 그 모습에 대해 성경은 “모세의 온유함이 지상 최고였다!”고 표현한다(민 12:3). 그처럼 온유한 모세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춤추고 절할 때는 십계명의 두 돌 판을 내던지며 분노했다. 주님도 온유했지만 성전 청소를 할 때는 장사꾼을 몰아내고, 장사꾼들의 상과 의자를 둘러 엎으셨다(막 11:15). 모세와 예수님의 분노의 공통점은 무엇인가? 자기를 위한 분노가 아니라 악에 대한 분노였다는 것이다. 그처럼 온유한 사람도 때로는 악에 대해 분노를 터뜨릴 필요도 있다. < 온유함이란 무엇인가? > 온유함이란 무엇인가? 첫째, 극단에 치우치지 않는 것이다. 성경은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고 했다. 그것이 바로 온유함이다. 온유함은 가장 복되고 아름다운 성품이다. 나는 두 딸의 결혼을 위해 기도할 때 제일 중시하는 덕목이 ‘치우치지 않는 성품’이다. 즉 40일 금식기도를 하면서 치우치는 사위보다 비록 40일 금식기도는 못해도 치우치지 않는 사위를 원한다. 치우치면 일은 잘 진행되는 것 같아도 행복은 잘 진행되지 않는다. 큰 믿음을 구하되 극단적인 믿음은 피하라. 절제가 없으면 대개 실패한다. 너무 모자라도 안 되지만 너무 지나쳐도 안 된다. 지나침은 모자람만 못하다. ‘과(過)’ 자가 들어간 말에 좋은 말은 거의 없다. 고린도전서 9장 25절에서도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한다.”고 했다. 하나님은 절제할 줄 아는 온유한 사람을 축복한다. 둘째, 생각과 언행이 겸손한 것이다. 온유와 겸손은 짝꿍이다(엡 4:2). 주님은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고 했다. 온유한 사람은 겸손하고 겸손한 사람은 온유하다. ‘겸손’이란 자신이 아무 것도 아님을 인정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은혜가 없으면 자기가 꽤 괜찮은 줄 알다가 은혜를 받으면 자기가 아무 가치가 없는 존재인 줄 깨닫는다. 가장 확실한 승리와 축복의 요건은 자신의 부족함을 자각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조금만 알면 판단하지만 어떤 사람은 많이 알아도 판단하지 않는다. 사실 판단이 적은 사람이 대개 판단 받을 것도 적다. 자랑과 판단이 많으면 은혜와 능력은 떠나고 기도도 공허한 메아리가 되지만 자랑과 판단을 줄이면 은혜가 속히 임하고 기도도 능력 있게 된다. 하나님의 능력은 언제나 약한 데서 온전해진다. 그러므로 진정 하나님의 은혜를 원하면 영적인 허영심을 주의하라. 좋은 신앙은 좋은 인격을 만든다. 그렇게 말하면 사단은 ‘인격’이란 얘기를 하면 어느새 영적인 허영심을 부추기며 속삭인다. “기독교는 도덕과 윤리가 아니다! 영성을 추구해야지 인격이 무슨 소용이 있나?” 그처럼 ‘영성과 인격’이 마치 모순 된 개념인 것처럼 한 편인 것을 두 편으로 가르는 묘한 사단의 술책에 넘어가지 말고 치열하게 내면에서 솟아오르는 영적 허영심과 싸우라. 때로는 좋은 일 하고 영적인 허영심 때문에 더 타락할 때가 얼마나 많은가? 사실 가장 좋은 일은 자신이 좋은 일을 했다는 의식도 없이 좋은 일을 하는 것이다. 가끔 보면 인터넷으로 은혜 받은 분 중에 어떤 분은 전혀 이름을 밝히지 않고 헌신하고, 어떤 분은 내가 이름을 알아도 남에게 이름이 공개되기를 원치 않는다. 그처럼 조용히 남이 싫어하는 일을 찾아서 하고, 누구보다 많이 헌신하면서도 “내가 이만큼 헌신한다.”는 의식조차 없을 때 하나님은 더욱 큰 상급으로 함께 한다. 셋째, 말씀에 길들여진 것이다. 온유란 헬라어로 ‘프라우스’라고 한다. ‘프라우스’란 말은 짐승이 잘 길들여진 상태를 뜻한다. 야생마가 길들여져서 주인의 말을 순종할 때 헬라 사람들은 ‘프라우스’란 단어를 썼다. 그처럼 온유란 하나님의 말씀에 잘 길들여진 것이다. 어떤 사람은 말씀대로 살면서 형편이 되지 않을 때도 어떻게 하든지 순종하려고 한다. 그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인가? 어떤 집사는 평소에 십의 이조를 헌금하고, 또 십일조를 떼어 선교헌금을 하면서 수입의 30% 이상을 헌금한다. 그런데 그가 작은 아파트를 팔고 큰 아파트로 이사하게 되었다. 살 때보다 약 2억 원을 더 받고 팔았는데 큰 아파트로 이사하면서 대출을 더 받아야 했기에 계산상으로는 2억원을 벌었지만 손에 쥔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 일로 고민하다가 내게 전화했다. “목사님! 이때도 십일조를 내야 합니까?” 나는 그때 “집사님! 감동되는 대로 하세요.”라고 대답해주었다. 그때 신학적인 정답을 알아내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 어떻게 하든지 말씀대로 살려는 마음자세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보통 사람들은 어떻게 하든지 조금이라도 더 헌금하려는 구실을 만들려고 애쓰는 사람들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나 신실한 성도는 말씀에 최대한 길들여지려고 애쓴다. 그런 마음이 바로 온유한 마음이다. < 온유할 때 얻는 3대 축복 > 온유하면 구체적으로 어떤 복을 받는가? 온유함이 주는 축복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많다. 그 중에서도 대표적인 축복의 내용은 다음과 같은 3가지를 들 수 있다. 1. 번성의 축복 오늘날 사람들은 “힘이 있어야 번성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온유해야 번성한다. 동물세계를 보면 힘 있는 동물들이 자연세계를 지배할 것 같지만 힘 있는 호랑이나 사자나 이리 같은 동물들은 점차 없어진다. 그래서 국가나 동물보호단체가 특별히 보호해도 번식이 잘 안되고 숫자가 점점 줄어든다. 반면에 보호하지 않고 되는대로 놔두는 약한 동물들은 오히려 번식이 잘된다. 순하고 온유하기 때문이다. 맹수들은 인적이 드문 곳에서 잘 나오지 않고 활동도 주로 밤에 한다. 왜 그런가? 남을 해치는 짐승이나 사람은 마음에 평안이 없고 두려움이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평소에는 숨어 있다가 남을 잡아먹을 때만 접근한다. 반면에 사슴이나 양떼나 비둘기들은 숨어서 살지 않고 낮에도 평화롭게 잘 어울려 산다. 맹수들은 사랑도 못한다. 맹수 부부가 정답게 사는 모습을 보았는가? 정답기는커녕 싸움만 하지 않아도 다행이다. 그래서 맹수는 인공수정도 쉽지 않다. 몇 년 만에 수놈을 암놈 우리에 들여보내고 신방을 꾸며주면 “야! 좋다!”라고 해야 되는데 수놈이 다가와도 암놈이 앞발로 할퀴니까 임신이 안 된다. 그처럼 사랑을 모르고 삶 자체가 전투이니까 저주받아 점차 멸종하는 것이다. 반면에 참새나 비둘기 같은 순한 동물들은 서로 사랑하며 행복하게 어울려 사니까 번성한다. 사람도 똑같다. 성격이 강하면 다칠까봐 곁에 가질 않아서 영적인 번식력이 없지만 성격이 온유하면 사람들이 몰려들어서 영적인 번식력이 있다. 그래서 온유하면 번성의 축복이 따른다. 가끔 참기 힘든 일이 생겨도 “온유하면 번성한다!”는 축복을 생각하며 참으라. 인내의 때가 끝나면 축복의 때가 시작된다. 그때는 믿음 때문에 손해 봤던 것들, 교회를 사랑하기에 참았던 것들, 가슴에 큰 상처를 받고도 쏟아내지 않고 주님 앞에 울며 승리했던 것들에 대해서 손해 봤던 것보다 훨씬 더 큰 보상이 주어진다. 사랑은 오래 참는 것이지만 하나님은 “영원히 너만 참고 손해 보라!”고 하지 않는다. 인내하면 언젠가 인내의 끝이 오고 놀라운 번성의 축복이 주어진다. 2. 물질적인 축복 본문에서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는 말은 “땅을 유산으로 얻는다.”는 말이다. 땅을 얻으려면 총칼로 땅을 빼앗을 필요가 없고 부동산 투기를 할 필요도 없다. 온유하게 살면 손해 보고 다 빼앗기는 것 같지만 오히려 땅을 얻고 영향력도 커진다. 특히 본문에서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는 말은 물질적인 축복을 포함하는 개념이다. 그러므로 물질적인 축복을 원하면 반드시 온유해야 한다. 예를 들어, 식당을 운영할 때 어떤 손님이 밑반찬을 지나치게 달라고 한다. 얄미운 사람이다. 그때 기분 나쁘고 얄밉게 생각해서 “오려면 오고 말려면 말라!”는 식으로 대응하면 물질적인 축복을 받지 못한다. 밑반찬을 더 달라고 하면서 성가시게 하는 사람은 대개 목소리가 크다. 그런 사람이 사실상 식당 성공의 키맨(key man)이다. 그런 사람에게 잘해주면 열심히 선전해주니까 결국 물질적인 축복도 따라온다. 남의 호주머니에서 돈이 나오게 하는 것은 쉽지 않다. 자존심을 버리고 끝까지 온유하고 친절해야 손님들이 돈도 꺼내고 좋은 계약도 이루어진다. 요새 각 기업마다 왜 친절 교육에 열심을 내는가? 그래야 돈을 벌기 때문이다. 그처럼 가식적인 친절도 돈을 벌게 하는데 인격 자체가 말씀에 붙잡혀 온유해지면 얼마나 큰 축복을 받겠는가? 그러므로 물질적인 축복을 받고 선교의 큰손이 되기를 원하면 무엇보다 온유한 성품을 훈련하라. 3. 마음의 평안 시편 37편 11절을 보면 이런 말씀이 있다. “오직 온유한 자는 땅을 차지하며 풍부한 화평으로 즐기리로다.” 하나님은 온유한 자에게는 물질적인 축복과 함께 넘치는 평안도 준다. 힘은 외적인 평화(peace)는 주지만 내적인 샬롬(shalom)은 주지 못한다. 그러나 말씀에 길들여진 온유한 사람에게는 내적인 샬롬이 주어진다. 원래 피스(peace)란 말은 팍스(pax)란 말에서 유래했다. 예수님 당시 시대를 흔히 ‘로마의 힘에 의해 이루어진 평화 시대’란 뜻으로 ‘팍스 로마나(Pax Romana, 로마의 평화) 시대’라고 한다. 그때 힘에 의한 일시적인 평화는 있었지만 역사가들은 오히려 그때가 가장 짙은 암흑기였다고 한다. 요새 미국은 팍스 어메리카나(Pax Americana)를 주창하며 세계의 경찰국가로 자임하면서 분쟁 지역마다 개입해서 미국 주도의 세계질서를 만들려고 한다. 그러나 힘에 의한 평화는 진짜 평화가 아니다. 돈과 권력은 외적인 피스(peace)는 줄 수 있어도 내적인 샬롬(shalom)은 주지 못한다. 샬롬은 십자가의 헌신으로 주어진다. 외적인 피스(peace)는 환경과 기분에 따라 주어지지만 내적인 샬롬(shalom)은 말씀 안에 길들여져 있을 때 주어진다. 미국에서 제일 살기 좋은 환경을 가졌다는 시애틀에는 우울증 환자도 제일 많다고 한다. 그처럼 세상에 완벽하게 좋은 곳은 한 군데도 없다. 오직 말씀 안에 있으면서 온유한 마음을 가질 때 깊은 내적인 샬롬을 얻는다. < 온유함이 승리의 길이다 > 결국 온유한 자가 축복 받는다. 온유해야 승리하고, 큰일을 하고, 축복도 받고, 하나님과 사람의 사랑도 받는다. 어떤 분야든지 원숙한 정상급 단계에 이르면 온유해진다. 골프도 초보자는 힘을 주지만 고수는 힘을 빼고 부드럽게 쳐서 멀리 날린다. 그처럼 온유한 사람에게 축복의 바람도 불어온다. 지금 우리나라의 가장 큰 문제는 정치나 경제의 문제가 아니라 국민들의 성품이 강퍅하게 변한 것이다. 왜 영혼이 강퍅해지는가? 죄와 마귀의 역사 때문이다. 반대로 성령님이 역사하면 온유해진다. 이제 남의 허물을 잘 덮어주는 온유하고 성령 충만한 복된 성도가 되라. 하나하나 물고 늘어지면 축복받지 못한다. 사회의 각 분야에서 높게 된 사람들을 보면 대개 온유한 사람들이다. 간혹 강성인사가 높은 자리를 차지해서 강하게 발언하면 오래 그 자리에 못 있고 자신이 한 말이 올무가 되어 결국 그 자리에서 떠나게 된다. 교회에도 똑똑하고 강한 목사가 부임하면 기본인격을 나타내는 최소연한인 3년도 버티지 못한다. 정치에서도 강한 대변인이 당에 공헌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 대변인 때문에 당도 피해를 본다. 결국 강하면 자기도 손해고, 그가 속한 공동체도 손해고, 나라 전체도 손해다. 순한 사람은 나중에 정권이 바뀌어도 괜찮은데 강한 사람은 거의 대부분 크게 다친다. 그래서 “저 사람은 정권이 바뀌면 감옥에 가겠구나!”라고 생각하면 거의 그대로 된다. 순한 사람은 오래 좋은 일이 생기지만 강한 사람은 현재도 좋지 않고 나중에도 좋지 않다. 그러므로 남의 허물과 약점을 이해하고 “저것은 틀렸다.”고 너무 쉽게 큰소리치지 말라. 자신을 진지하게 성찰하면 전혀 큰소리 칠 수 없는 허물 많은 존재가 바로 자신이다. 서로 용서해주고, 서로 불쌍히 여기고, 서로 이해하면서 즐겁게 살라. 그래야 가정과 교회가 진정 복된 공동체가 된다. 결국 온유함은 승리와 축복의 제일 비결이다. 누가 믿음이 좋은 사람인가? 정확한 구별은 힘들지만 믿음이 좋은 사람의 대체적인 공통점이 한 가지가 있다. 그것은 “믿음이 좋은 사람은 부드럽다.”는 것이다. 믿음이 좋은 사람은 얼굴이 부드럽고, 언행이 부드럽고, 성품이 부드럽다. 목도 부드러워서 고개를 잘 숙이고, 얼굴 근육도 부드러워서 잘 웃는다. 그런 온유한 삶과 언행과 미소가 있을 때 하나님은 “네 모습을 보니 정말 기쁘구나!”라고 하시며 큰 축복을 내려주실 것이다. 매년 봄에 산불이 많이 난다. 날씨가 건조하니까 조금만 마찰이 있어도 불이 확 붙어서 산을 다 태운다. 그러나 비가 와서 촉촉해지면 산불이 나지 않는다. 왜 예배를 드리는가? 마음이 은혜로 촉촉하게 젖기 위해 드리는 것이다. 그처럼 말씀으로 은혜를 받고 마음이 촉촉하게 은혜로 젖으면 강퍅한 마음이 사라지고 항의하고 반항하고 저항하고 비판하는 마음이 약해진다. 그것이 바로 은혜 받은 증거이다. 사이비 종교인은 은혜를 받으면 성질이 더 사나워진다. 멀쩡한 사람도 사단이라고 하고, 괜히 갈등을 일으키면서 그것을 십자가라고 한다. 그러나 진짜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고 주님의 보혈에 진심으로 감사하면 마음이 온유해지고 삶도 화합하는 삶이 된다. 그때 그를 통해 아벨의 예배가 드려지고 넘치는 기쁨과 축복이 주어질 것이다. 사람은 천사가 아니다. 다 부족한 존재이다. 그러므로 서로 이해해주고 용서해주는 온유한 성품으로 복된 날을 예비하라.ⓒ 글 : 이한규http://www.john316.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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