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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의 완성은 인간이 아니라 안식

생명환경자연 김균진 교수............... 조회 수 2195 추천 수 0 2010.05.24 23:24:19
.........
출처 :  

창조의 완성은 인간이 아니라 안식  ("생태계의 위기와 신학" 中 6장)

 

김 균진(연세대 교수)

 

1) 안식일과 함께 끝난 천지창조

 

일반적으로 신학은 하나님의 창조를 육일 동안에 일어난 것으로 보았다. 하나님의 창조는 인가의 창조와 함께 완성된 것으로 보았으며 따라서 인간이 "창조의 완성"이요, "창조의 면류관"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인간중심적 세계관을 형성하는데 기여하였다. 하나님의 천지창조에 있어서 일곱째 날 곧 안식일은 별다른 의미가 없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것은 창조의 수고를 끝내고 쉬는 날로 생각되었고 그 이상의 적극적 의미를 갖지 못하였다. 따라서 하나님은 "일하는 하나님", "창조적인 하나님"으로 표상 되었다. 안식일에 그의 창조를 기뻐하면서 휴식하는 하나님의 모습은 관심의 대상이 되지못하였다.

일하는 하나님에 대한 이러한 표상은 인간에 대한 표상으로 연장되었다. 조물주 하나님이 쉬지 않고 일하는 존재로 표상될 때, 인간도 쉬지 않고 일하여 새로운 재화를 창출해야 할 존재로 표상될 수밖에 없었다. 그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하나님의 모습을 닮아야 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삶의 의미는 노동과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는 데에 있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이러한 생각은 인간을 계속하여 노동하도록 만들며 자연 속에 휴식을 하지 못하도록 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오늘날 현대인은 노동과 생산의 노예가 되었다고 말할 수 있으며, 이러한 현실은 삶의 의미를 노동과 생산에 있는 것으로 보는 표상의 결과이다.

그러나 창조기사를 다시 한번 반성할 때 "창조의 면류관"은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과 모든 피조물들이 평화롭게 안식하는 안식일이라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안식일은 육일동안의 노동 다음에 "쉬는 날"이라기보다, 모든 창조가 안식일을 향하여 진행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로전츠바이크(Fr. Rosenzweig)에 의하면 안식일은 "창조의 잔치"이다. 영원한 하나님의 이 잔치를 위하여 하늘과 땅과 그 위에 있는 모든 것이 창조되었다. 창조기사에 의하면 창조의 매일마다 저녁이 따른다 :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그러나 창조기사는 안식일 다음의 저녁을 말하지 않는다. 달리 말하여 하나님의 안식일은 "저녁"을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안식일의 휴식과 잔치는 영원히 계속된다. 안식일은 모든 고통과 투쟁이 그치고 하나님의 영원한 평화가 다스리는 날이다. 그러므로 폰 라트는 "하나님은 그의 창조를 일곱째날 그의 안식을 통하여 완성했다"고 말한다. 안식일이 어떤 의미에서 "창조의 면류관"이요 "창조의 완성"인가를 보다 더 구체적으로 기술하기로 하자 :

 

(1) 안식일에 인간은 먼저 "하나님과의 평화"를 가진다. 이 날에 인간은 하나님이 "만유의 주"시요 창조자임을 인식한다. 그는 하나님에 대한 교만을 버리고 자기를 하나님의 피조물로 인식한다. 그는 하나님에 대한 교만을 버리고 자기를 하나님의 피조물로 인식한다. 그는 하나님의 계명에 복종한다. 이와 같이 "하나님과의 평화"를 가짐으로써 인간은 안식일에 "자연과의 평화"를 가진다. 자연은 자기의 소유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임을 그는 인식하고 더 이상 노동을 통하여 자연의 세계를 침해하지 않는다. 그는 자연의 세계를 인간이 침해하거나 파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창조"로서 휴식하게 한다. 그는 자연의 세계와 함께 휴식하며 "창조의 사귐"을 나눈다. 이렇게 인간이 "하나님과의 평화" 속에 있는 동시에 "자연관의 평화" 속에 있을 때 그는 안식할 수 있다. 인간의 모든 잘못된 관계들, 인간과 하나님,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의 잘못된 관계 곧 자기중심적이며 지배체제적 관계가 안식일의 도래와 함께 "사귐의 관계"(Verhaltnis der Gemeinschaft), "친구의 관계", "파트너의 관계"로 변화된다. 이리하여 인간은 하나님과 이웃과 자연과의 관계 속에 실존하면서 안식할 수 있다. 안식일은 인간의 모든 수고와 갈등과 투쟁이 끝나고 인간이 하나님과 이웃과 자연과의 사귐 속에서 안식하는 날이다. 이러한 뜻에서 안식일이 "창조의 면류관"이요 "창조의 완성"이지 인간이 창조의 면류관과 완성이 아니다.

(2) 안식일에 하나님도 "안식한다". 그는 피조물을 위한 모든 활동을 완성하고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온다. 그렇다 하여 하나님은 그의 피조물 없이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그의 피조물과 함께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온다. 그의 "안식"은 자기 혼자 가지는 안식이 아니라 피조물과 함께 가지는 안식이다. 그는 피조물과 함께 안식한다. 안식일에 그는 피조물 가운데에 현존하며 이 현존 안에서 안식한다. 피조물 안에 있는 그이 현존과 안식은 더이상 모순되지 않는다. 역사의 과정 속에서 피조물 안에 현존하는 하나님은 안식할 수 없었다. 그는 영 가운데에서 피조물과 함께 고난을 당하며 그의 미래를 향하여 수고해야하만 했다. 그러나 역사의 완성인 안식일이 올 때 그의 수고와 고난은 끝난다. 이제 그는 그의 피조물 안에 현존하면서 자기 안에서 안식한다. 자기 안에서 안식하면서 자연의 모든 피조물 안에 현존하기 때문에 안식일이 "창조의 완성"이다. "창조의 면류관은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지막 날의 '안식하심' 그 자체이다"(이정배).

(3) 안식일은 "주의 날"이다. 인간은 물론 자연의 세계까지 하나님이 그들의 주가 되신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안식일이 올 때 자연도 안식한다.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교만이 사라지고 인간과 하나님, 인간과 자연의 평화가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자연에 대한 인간의 억압과 파괴와 착취가 중지하기 때문이다. 이 날에 하나님도 숨을 쉬지만(출 31:17) 자연의 세계도 숨을 쉴 수 있게 된다.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의 현존과 안식 안에서 그들 자신의 안식에 도달한다. 모든 피조물은 본래 무에서, 다시 말하여 없던 것에서 있게 되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존재하는 한 무의 위협을 당한다. 그들은 다시 무로 돌아갈 수 있다. 그러므로 모든 피조물들은 언제나 불안하다. 인간의 영혼만 하나님 안에서 안식을 얻을 때까지 불안하고 동요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모든 피조물이 이 불안과 동요에 사로잡혀 있다. 그들은 무의 위협과 불안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곳, 안식할 수 있는 곳을 찾는다. 그 곳은 피안의 세계가 아니라 하나님의 안식일이다. 안식하는 하나님의 현존 안에서 그들은 자신의 안식과 존립을 발견한다. 그러므로 안식일은 모든 피조물이 기뻐하는 "주의 날"이다. 이 날은 하나님이 "축복하신"날이요 "거룩하게" 하신 날이다(창 2:3). 하나님과 인간과 모든 피조물이 사귐 속에서 안식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안식일이 "창조의 면류관"이요 "창조의 완성"이지 인간이 창조의 면류관과 완성이 아니다.

침멀리(W. Zimmerli)에 의하면 안식일 계명은 두 가지 동기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① "노동의 휴식"의 동기와 ② "사회적 동기"를 가진다. 신명기 5장 12-15절에 기록된 안식일 계명은 사회적 동기를 출애굽 사건에 근거시킨다. 이스라엘이 에집트에서 노예생활을 하고 있을 때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해방시켰으므로 이스라엘도 노동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안식일에는 쉬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켜라… 그 날 너희는 어떤 생업에도 종사하지 못한다. 너희와 너희 아들 딸, 남종 여종뿐 아니라 소와 나귀와 그 밖의 모든 가축과 집안에 머무는 식객이라도 일을 하지 못한다. 그래야 네 남종과 여종도 너처럼 쉴 것이 아니냐? 너희는 에집트 땅에서 종살이하던 일을 생각하여라. 너희 하나님 야훼가 억센 손으로 내리치고 팔을 뻗어 너희를 거기에서 이끌어 내었다. 그러므로 너희 하나님 야훼가 안식을 지키라고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이다.

 

안식일 계명의 사회적 동기는 출애굽기 20장 8-11절에도 나타난다. 여기서 사회적 동기는 하나님의 천지창조에 근거된다. 하나님께서 육일 동안 일하시고 칠일째에 쉬셨으므로 너희는 남종과 여종, 집 안에 머무는 식객이라도 일을 시키지 말고 쉬게 하라는 것이다. 노동으로 지친 사람들, 종이나 하인들을 안식일에 쉬게 하는 것은 여기서 "창조질서"에 속한다. 이 창조질서는 출애굽의 동기를 통하여 강화된다. 너희가 에집트에서 노예생활을 하고 있을 때 하나님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였으니 너희도 그 하나님의 자비를 따라 너희의 남종과 여종, 집 안에 머무는 식객은 물론 모든 가축도 쉬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계명은 단지 종교적 계명이 아니라 "사회적 동기"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여기서 분명히 발견한다.

김이곤 교수는 안식일의 계명이 지닌 "노동의 휴식"의 동기와 "사회적 동기"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

마지막 날은 야훼를 위한 날로 성별하여 그 날은 쉬어야 한다는 것은 일주일 주기의 하루는 노동을 중단하고 쉬는 것이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부합되고(E) 동시에 하나님의 인간 해방 섭리(D)에 부합된다는… 것이다… 안식일 선언은… 인간 생명과 인간의 기본 권리를 보장하고 인간을 그 모든 얽어 맨 '매임'으로부터 해방시키려는 인간 해방과 인권 수호의 선포이기도 하다.

2)안식일, 안식년, 희년의 생태학적 의미

창조의 일곱째 날 곧 안식일에 근거하여 하나님은 안식일의 계명을 주신다. 우리가 매주 말에 가지는 일요일은 구약성서의 안식일 계명에서 유래하며 주후 312년 콘스탄틴 황제의 칙령을 통하여 휴일로 제정되었다. 일요일의 모체인 안식일의 계명을 다시 한 번 음미하는 것은 노동과 업적과 소유로 찌든 현대사회에 있어서 매우 의미 깊은 일이라 하겠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켜라. 엿새동안 힘써 네 모든 생업에 종사하고 이렛날은 너희 하나님 야훼 앞에서 쉬어라. 그 날 너희는 어떤 생업에도 종사하지 못한다. 너희와 너희 아들 딸, 남종 여종뿐 아니라 가축이나 집 안에 머무는 식객이라도 일을 하지 못한다. 야훼께서 엿새 동안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드시고, 이레째 되는 날 쉬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야훼께서 안식일을 축복하고 거룩한 날로 삼으신 것이다.(출 20:8-11)

십계명 가운데에 이 계명이 제일 긴 계명이요 따라서 그것은 랍비들이 말하는 바와 같이 가장 중요한 계명인 동시에 가장 아름다운 계명이다. 그것은 인간은 물로 모든 피조물의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위한 계명이 때문이다. 이 날은 모든 존재자의 아름다움이 찬양되는 축제의 날이요 창조의 구원과 축복의 날이다.

(1) 이 계명에 의하면 너희는 엿새 동안 힘써 일하고 이렛날은 쉬어야 한다. 너희 아들 딸, 남종 여종뿐 아니라 가축이나 집 안에서 일하는 하인들도 일을 해서는 안된다. 여기서 힘써 일하라는 "노동의 계명"은 이 계명을 받는 사람에게만 해당한다 : "(너희는) 엿새 동안 힘써 네 모든 생업에 종사하고…" 그러나 "안식일 계명"은 모든 사람과 짐승에게 해당한다. 다시 말하여 안식일에는 모든 사람이 똑같이 휴식하며 하나님의 축복을 받으며 똑같은 권리를 가진다 : 남자들과 여자들, 부모들과 자녀들, 고용자와 피고용자, 원주민과 이주민, 인간과 동물이 함께 휴식하며 똑같은 삶의 권리를 누린다. 분업으로 인하여 생성된 사회의 모든 차이들이 매주 칠일째에는 폐기된다. 아무도 다른 사람을 희생하면서 안식일의 휴식을 누리지 않는다. 모든 사람과 짐승이 함께 안식일의 휴식을 누려야 한다. 모든 인간과 동물의 평등이 이 날에 회복된다.

(2) 안식일의 휴식은 인간과 동물은 물론 자연에 이르기까지 해당한다. 고대사회에 있어서 노동은 직접적이며 육체적인 자연의 가공을 뜻하였다. 사람들은 자연을 직접 가공함으로써, 예를 들어 밭을 갈고 씨를 뿌리며 나무를 채취함으로써 양식과 땔감과 집과 옷을 얻었다. 따라서 안식일에 쉰다는 것은 논과 밭과 나무들과 동물들도 휴식하고 자신의 생명력을 회복할 수 있도록 내버려두는 것(Let it be)을 뜻한다. 따라서 안식일의 휴식은 인간을 위한 것일 뿐 아니라 인간에 의하여 가공되는 자연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 그것은 노동으로 지친 인간을 회복시키는 "치료적 의미"를 가질 뿐 아니라 인간에 의하여 가공된 자연을 회복시키는 "생태학적 의미"를 가진다. 안식일에 자연은 인간을 위한 가공된 자연을 회복시키는 "생태학적 의미"를 가진다. 안식일에 자연은 인간을 위한 재료나 노동의 장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로 회복된다. 하나님의 모든 창조와 함께 인간은 휴식하면서 하나님을 찬양해야 한다. 인간을 위한 이용가치에 따라서 관찰되던 모든 사물들이 그들 자신의 고유한 가치를 인정받는다.

(3) 이리하여 인간과 인간, 인간과 동물의 "창조의 사귐"이 회복된다. 인간에 의한 인간의 착취, 인간에 의한 동물의 착취가 중지된다. 모든 인간과 동물이 함께 휴식하며 하나님을 찬양한다. 모든 피조물들의 아름다움이 다시 발견된다. 모든 사물들이 이용가치에 따라 관찰되고 평가되지 않으며 오히려 하나님의 귀한 피조물로 인식된다. 창조기사에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은 동물에 대한 통치의 사명을 부여받는데, 이 사명은 인간과 동물이 함께 휴식하는 안식일에 완성된다. "소유"와 "지배" 대신 참여와 사귐과 나눔이 있다.

(4) 하나님은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킬 것을 명령한다. 그럼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킨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흔히 우리 나라의 교회는 안식일에 노동하지 않고 교회에 가서 예배드리는 것이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물론 안식일에 일하지 않고 쉬면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도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길이다. 그러나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것은 이것을 넘어서서 사람은 물론 모든 동물과 온 자연이 하나님 앞에서 안식하며 그들의 생명을 보호받으며 평화 속에서 그들의 생명력을 회복하도록 하는 데에 있다. 이리하여 하나님이 피조물의 고난에 대한 염려와 고통에서 해방되어 하나님 자신도 휴식하는 데에 있다.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킨다는 것은 단지 기독교의 종교적인 의식과 형식들을 지키는 데에 있지 않고 온 피조물의 생명을 보호하고, 그들이 하나님의 평화 속에서 안식하게 하며, 이리하여 하나님 자신도 평화와 안식을 얻는 데에 있다. 어떤 피조물도 다른 피조물을 파괴하거나 자기를 위하여 희생시켜서는 안 된다. 모든 피조물은 모든 것을 함께 향유해야 한다. 동물과 땅도 안식일을 향유해야 한다. 본래 안식일은 다음 육일의 노동을 위한 새로운 힘을 얻기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과 휴식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며 하나님의 미래를 앞당겨 오기 위한 것이다.

지금까지 신학은 다음과 같이 가르쳤다. 즉 인간은 노동을 통하여 자기를 실현하며 하나님에게 상응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게으르지 않다. 그는 언제나 활동한다. 그는 쉬지 않고 "역사하는 하나님"이다. 그러므로 인간도 쉬지 않고 노동해야 한다. 노동을 통하여 그는 그의 창조주되신 하나님에게 상응한다는 것이다. 물론 그 생각은 타당하다. 그러나 전적으로 타당하지는 않다. 인간은 노동을 통하여 하나님에게 상응할 뿐 아니라 휴식을 통하여 하나님에게 상응하기 때문이다. 창조기사에 의하면 하나님은 육일 동안 천지를 지으시고 칠일째에 휴식하였다. 안식일에 인간은 자신이 안식할 뿐 아니라 온 자연이 안식하게 함으로써 하나님에게 상응한다. 인간의 가치는 노동에 있다. 실업 곧 아무 일도 할 수 없을 때 인간의 가치가 손상된다. "노동의 권리"야말로 인간의 기본적 가치를 형성한다. 이와 동시에 "휴식의 권리"도 인간의 가치를 형성한다. 만일 인간이 노동만 하고 휴식할 수 없다면 그이 인간 가치는 손상된다.

안식일의 계명은 안식년의 계명으로 확대된다. 출애굽기 23장 10-11절에 의하면 이스라엘 민족은 칠년째 되는 해에 땅을 묵혀야 한다. 그 목적은 가난한 자, 힘없는 자들이 생명을 보호해야 할 사회적 관심에 있다 : "칠년째 되는 해에는 땅을 놀리고 소출을 그대로 두어 너희 백성 중에서 가난한 자들이 먹게 하고 남은 것은 들짐승이나 먹게 하여라"(출 23:11). 레위기 25장 1-7절 의 안식년 계명에서는 사회적 관심보다 생태학적 관심이 전면에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다 : "제 칠년에는 땅으로 쉬어 안식하게 할지니…"(레 25:4)

이러한 안식일의 계명은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을 점령하고 그 땅을 소유할 수 있는 보증이 된다 : "너희는 내가 정해 주는 규정을 실천하고 내가 세워 주는 법을 지켜 그대로 해야 한다. 그러면 그 땅에서 안식하고 살 수 있으리라"(레 25:18).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생명과 축복을 보증한다고 믿는 생육의 신들 대신에 안식년의 계명을 지킬 것을 명령한다 : "너희는 우상들을 만들어 모시지 말라. 신상이나 석삭을 너희 가운데 세우지 말라… 너희는 나의 안식일을 지키고…"(레 26:1-2). 안식년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은 많은 수확을 얻을 것이며 평화롭게 살 수 있을 것이다. 이 계명을 지키지 않는 사람은 멸망할 것이다 : "나는 칼을 빼들고 너희를 쫓아 이민족들 사이에 흩어 버리리라. 마침내 너희 땅은 쑥밭이 되고 너희 성읍들은 폐허가 되리라. 너희가 원수의 땅에 끌려 가면 너희의 땅은 쑥밭이 되리라. 그 동안에 땅은 안식을 누릴 것이다. 그제야 숨을 돌리며 제 안식을 누릴 것이다. 너희가 여기에 사는 동안 안식년에도 쉬지 못하던 땅이 쑥밭이 되어 있는 동안에 쉬게 되리라"(레 26:33-35). 역대하 36장 19-21절에 의하면 이스라엘 백성이 안식년의 계명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에 바빌론 포로가 되어 가나안 땅을 잃어 버렸다 : "느부갓네살은 칼에 맞아 죽지 않고 살아 남은 자들을 바빌론으로 붙잡아다가 페르샤 시대가 되기까지 대대로 종으로 부렸다. 이리하여 이 땅은 긴 세월 동안 황폐되어, 밀렸던 안식을 다 찾아 누리며 칠십년을 채우리라고 야훼께서 예레미야를 시켜 하신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졌다"(대하 36:20-21).

이러한 구절들에 의하면 안식년의 계명은 인간과 동물을 포함한 자연의 행복에 대한 기준이 된다. 이 계명을 지키면 땅이 비옥해질 것이며 많은 소출을 낼 것이다. 그리하여 가난한 사람들도 먹고 살 수 있게 될 것이며 그 땅에 하나님의 자비와 평화가 깃들것이다. 그러나 이 계명을 지키지 않으면 땅은 착취되어 생산력을 잃을 것이며 가난한 사람들이 기근을 당할 것이다. 냉혹성과 불의와 불만이 그 땅에 깃들 것이다. 따라서 안식일의 계명을 지키면 백성이 그 땅에 거할 것이며, 이 계명을 지키지 않으면 그 땅을 잃어버리고 거기서 추방될 것이다. 인간의 착취로 말미암아 안식할 수 없었던 땅이 안식을 되찾을 것이며 가난한 자들과 짐승들이 땅에서 자라는 것을 먹고 생존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의 경작으로 말미암아 땅에서 쫓겨난 벌레들과 짐승들도 다시 돌아올 것이다.

농경사회에 있어서 땅은 생명의 근거이다. 땅이 그 생명력을 잃으면 땅 위의 생물들과 사람도 죽거나 땅에서 쫓겨나게 된다. 고고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유프라테스와 티그리스 강을 중심한 바빌론 문화, 북 아프리카의 로마 문화, 유카탄의 마야 문화 등 고대의 문화들은 땅이 착취를 당하고 그 생명력이 장기적으로 파괴됨으로 인하여 몰락하였다고 한다. 인간이 땅을 저주하면 땅이 인간을 저주하고 땅에서 추방한다. 인간이 땅에서 사라짐으로써 땅이 휴식과 구원을 얻으며 가난한 자들이 연명할 수 있다. 그러므로 안식년의 계명은 단지 인간에게 부과된 하나의 종교적 계율이 아니라 인간은 물론 생태계의 행복을 위한 하나님의 가르침 곧 토라(Tora)이다. 그것은 하늘과 땅의 창조자이신 "하나님의 생태학적 지혜"이며 "하나님의 생태학적 전력"이다.

안식년의 계명은 "희년"의 계명으로 확대된다. 하나님의 사회적 관심과 생태학적 관심이 희년의 계명에서 하나로 결합된다 : 안식년에 사람은 땅을 쉬게 해야 하며, 땅은 본래의 주인에게 돌려주어야 하며, 가난한 자들의 빚을 면제해 주어야 하며, 가난하여 자기의 몸을 판 종들을 해방해야 한다. 땅의 권리와 인간의 권리, 모든 자연의 권리가 회복되어야 한다. 사회의 작은 계층에게 편중된 부가 사회로 환원됨으로써 가난한 자들의 인간적 가치와 생명의 권리가 회복되어야 한다. "땅"은 "하나님"의 것이요 인간은 땅 위에 살다가 언젠가 땅을 떠나갈 "나그네"에 불과하다(레 25:23). 그것은 하나님이 모든 인간의 기본 삶을 위하여 모든 인간에게 맡기신 것이다. 그러므로 소수의 사람들이 사들인 땅은 본래의 주인에게 돌아감으로써 인간과 땅, 인간과 자연의 정의로운 관계가 회복되어야 한다. 이 때 하나님의 정의가 그 땅에 깃들 것이며 그 나라가 망하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경외하기 때문에 짐승과 땅도 안식을 얻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희년"은 안식년의 확대이며, "안식년"은 안식일의 확대이며, "안식일"은 창조의 일곱째 날에서 유래한다. 안식일, 안식년, 희년은 하나님의 창조질서이다. 이 질서를 지킬 때 인간을 포함한 생태계는 평화를 누릴 것이다. 하나님의 창조는 인간을 지향하며 인간을 그 목적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모든 피조물의 "안식"을 지향하며 그것을 목적으로 삼고 있다. 그러므로 인간을 창조의 면류관과 창조의 완성으로 보는 인간 중심적 세계관은 인간과 자연이 하나님 안에서 사귐 속에서 있는 세계관을 통하여 수정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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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3 가정결혼양육 행복한 가정의 7가지 열쇠 양은순 교수 2010-05-20 2933
2102 가정결혼양육 제직의 가정생활 임택순 목사 2010-05-20 2358
2101 가정결혼양육 우리들의 자녀교육은 무엇이 문제인가? 장만기 원장 2010-05-20 2259
2100 가정결혼양육 청소년 문제와 상담자의 자세 한승호 교수 2010-05-20 3065
2099 정치건강취미 커피의 매력 file 이상미 기자 2010-05-19 2400
2098 영성묵상훈련 [어거스틴 참회록190] 시간이 창조되기 이전 어거스틴 2010-05-18 2787
2097 영성묵상훈련 [어거스틴 참회록189] 세계가 창조되기 이전 어거스틴 2010-05-18 3121
2096 영성묵상훈련 [어거스틴 참회록188] 하나님의 영원한 시간 어거스틴 2010-05-18 3432
2095 영성묵상훈련 [어거스틴 참회록187] 육적(肉的) 오류에 찬 사람들 어거스틴 2010-05-18 3103
2094 영성묵상훈련 [어거스틴 참회록186] 마음에 주시는 말씀 어거스틴 2010-05-18 2753
2093 성경적재정원리 하나님께서 베팅하시는 자 신상래 목사 2010-05-18 3347
2092 성경적재정원리 성경 최고부자의 재테크 노하우 신상래 목사 2010-05-18 4472
2091 목회독서교육 [나의 서재-김남준 목사 열린교회] 난 치열하게 공부하는 ‘고 3 학생’ file 이태형 기자 2010-05-16 3796
2090 목회독서교육 [나의 서재-민영진(전 대한성서공회)] 평생의 독서는 성서를 읽기 위한 과정 file 이태형 기자 2010-05-16 3254
2089 목회독서교육 [나의 서재-전병욱 삼일교회 목사] 매일 12시간 독서하며 영혼의 양식 캔다 file 이태형 기자 2010-05-16 47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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