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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항해하면서 발견한 다시 읽고 싶은 글을 스크랩했습니다. 인터넷 공간이 워낙 넓다보니 전에 봐 두었던 글을 다시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래서 스크랩할만한 글을 갈무리합니다. (출처 표시를 하지 않으면 글이 게시가 안됩니다.)

하나님의 가족'으로서의 가정

가정결혼양육 김지철 교수............... 조회 수 2629 추천 수 0 2010.05.28 19:3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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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하나님의 가족'으로서의 가정

김 지 철(장로회신학대학교: 신약학)

 

오늘의 한국의 경제적인 위기는 지금까지 한국 사회를 지탱해 온 삶의 전반적인 기반들을 뒤흔들어 놓고 있다. 그 파괴력이란 개인적인 실존에서부터 공동체적인 자리에까지 실로 광범위하게 나타나고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기업 도산과 정리해고 등으로 말미암은 직장을 잃어버린 실업자 수의 증가라 할 것이다. 그들 대부분은 한 가정의 가장들로서 그 동안 이 나라와 가정 경제의 중요한 몫을 감당해 왔다. 그러나 이제 그 가장들이 생계 수단을 잃게 되자 그들이 속한 사회와 그 사회의 기본적인 삶의 질서를 유지해 주는 가정마저 붕괴되는 요인이 되고 있는 것이다. 그로 말미암아 사회적 공동체의 최소 단위로서 경제적인 안정의 최후 보루이며, 진정한 인간성의 산실이고, 따뜻한 삶의 안식처이며, 세상을 향해 새 출발을 할 수 있는 근거인 가정이 그 기능을 심각하게 위협받고 있다는 사실은 무엇보다 중대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가정이란 본래 무엇이며 그 목표는 무엇인가? 여기서 우리는 가정의 의미와 역할을 성서적으로 다시 한번 되새겨 봄으로서 이 위기를 통해 오히려 올바른 가정을 회복하고 그 기초를 새롭게 세우는 기회를 마련해 보도록 하자.

I. 가정이란 사회적 공동체의 최소 단위로서 기본적으로는 혈연을 통해 묶여진 공동체를 의미한다.

 

구약에는 이러한 가정의 개념이 다양하게 나타난다. 넓게는 이스라엘의 '지파(tribe)', 또는 '족속(clan)', 그리고 '대가족(family)'을 의미한다. 예를 들면, 여호수아 7,16-18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개인에서부터 가족(family), 족속(clan), 그리고 지파(tribe)로 구성되어 있음을 보여준다(참조 삼상 10,20.21; 삼상 9,21; 삿 6,15).
이를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지파'란 이스라엘의 사회적이고 지역적인 조직의 기본 단위로서 야곱의 12 아들과 요셉의 아들인 므낫세와 에브라임의 이름에 의해 나뉘어진다. '족속'(부족)이란 지파에 속한 하위 개념으로서 수많은 가족의 연합이라고 할 수 있다. 이스라엘의 족속은 그들에게 속한 땅을 보존하기 위하여 보통 동족 결혼을 통해 그 구조를 이루었다. 따라서 족속이란 친족을 확인할 수 있는 기초 단위를 의미한다. '가족'이란 족속의 하위 개념으로서 문자적으로 이해한다면 '아버지의 집'이라는 뜻으로, 아버지라는 가장 밑에서 보호와 책임, 그리고 서로 자기 정체성을 확인하며 포용하는 단위를 말한다. 다시 말해 가장과 그 밑에 함께 사는 모든 자손들을 총합해 놓은 단위가 가족이다. 따라서 결혼한 딸(남편의 집으로 나간)은 여기에서 제외된다. 하지만 남녀 종들과 그들의 가족들은 가장과 함께 거주하므로 여기에 포함된다. 함께 거주하는 노동자들도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만약 가장이 결혼을 일찍하게 되면 거기에는 자연스럽게 3-4 세대가 함께 사는 대가족을 이루게 되고, 그 규모는 약 50-100명 정도에 이르게 된다. '가족'이란 말하자면 이스라엘 사회 공동체의 기초가 되는 최소 단위를 가리킨다. 그렇다면 하나의 가족으로 구성된 가정의 역할이란 무엇인가?

 

첫째로, 가정을 형성한다는 것은 이스라엘 공동체 내에서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왜냐하면 토지 보유의 가장 기본 단위가 되는 가족이 땅을 유업으로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이 자랑하는 희년법이란 '토지는 다 하나님의 것'이라는(레 25,23) 사상에 기초한 것이지만, 실제로 그것은 생활 터전으로서의 가족의 생존권을 보존하기 위한 조처라고도 할 수 있다. 따라서 "가옥에 가옥을 연하며 전토에 전토를 더하여 빈틈이 없도록 하고 이 땅 가운데서 홀로 거하려 하는 그들은 화있을진저"(사 5,8; 참조 미 2,1-3.8.9)라는 예언자의 말씀은 땅을 함부로 독점하는 자들의 행위가 하나님과 그의 언약의 법을 깨뜨리는 것인 동시에 사회 경제적으로는 가정을 파괴하는 것임을 시사해 준다.

 

이스라엘 공동체에 있어서 가정의 중요성은 모세의 십계명중 3 가지의 계명이 가정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에서도 드러난다(5 계명: 네 부모를 공경하라; 7 계명: 간음하지 말라: 10 계명: 네 이웃의 것을 탐내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제 5 계명이나, '간음하지 말라'는 7 계명은 다 가정을 보호하기 위한 명령으로서 가정의 권위가 유지되고 성적인 순결이 보호되도록 하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도둑질 하지 말라'는 8 계명과 '이웃의 집이나 그에게 속한 것을 탐내지 말라'는 10 계명 또한 가정의 경제적인 본질이 외부로부터의 위협에 의해서 상실 당하는 것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스라엘의 경제 구조는 말하자면 부유한 소수인들의 이익을 위한 것이라기 보다는 사회 경제적으로 낮은 수준의 사람들을 보호하고 그들이 경제적 회생을 할 수 있도록 돕는 구조였던 것이다.

 

둘째로, 가정은 또한 최소한의 사법적인 공동체였다. 이스라엘은 가장으로 하여금 법적인 행동을 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해 줌으로써 그 안에서 내적인 사법권이 유지되도록 했다. 그리고 거기에는 결혼, 이혼, 종의 관리, 자녀 훈련 등이 포함되었다. 따라서 가정이란 그 구성원들이 누릴 권리를 외부로부터 침해당하지 않고 자체적인 질서를 통해 보존되도록 하는 장소였다(참조 신 24,10,11; 삿 6,30.31; 삼하 14,7). 하지만 외적이 침입했을 때에는 이에 대항하기 위한 군대를 동원하는 데 있어서 가장 하부의 조직 단위가 됨으로써(참조 민 1,18) 군사적 기초 역할까지 담당했던 것이다.

 

셋째로, 가정은 이스라엘에 있어서 신앙과 역사, 율법과 전승의 지속성을 유지하고 보존하는 중요한 자리였다. 가정에서 이러한 의무는 특히 아버지의 손에 맡겨졌다. 아버지는 가족 안에서 이스라엘이 역사를 통해서 겪고 배운 그들의 역사와 율법, 믿음과 고유한 전승을 자녀들에게 계속적으로 가르침으로써 그들의 전통을 보존하는 책임을 맡고 있었다. 그리고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율법을 가르치는 것은 또한 이 땅에서 장수할 수 있는 복이 주어지는 하나님의 약속이기도 했다(신 6,7; 11,19; 32,46.47). 따라서 아버지는 자녀들에게 율법을 가르치면서 그들의 조상이 경험한 특별한 사건에 대해서 설명해야 했다. 그리고 이것은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자녀들에 대한 독특한 가르침의 방식이 되었다. 그들은 말하자면 회상을 통해 과거의 사건에 동참하고 그것을 다시 오늘의 사건으로 만드는 교육방법을 사용했던 것이다. 그것은 크게 물음과 대답의 형식으로 되어 있다: "너희 자녀가 묻거든...너희는 이르기를..."(출 12,26.27; 13,14.15; 수 4,6.7.21-23; 신 6,20-24). 마치 오늘날의 교리문답과도 같은 것이다. 이를 통해 이스라엘은 그들의 역사적이며 신앙적 경험이었던 출애굽 사건, 가나안 정복, 땅의 선물, 율법수여 등을 전수하고 보존했던 것이다. 따라서 가정이란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는 교육을 위한 가장 구체적인 공동체의 단위로서 야훼 하나님과의 언약적인 관계를 맺고 유지하는 자리였다.

 

말하자면, 가족이란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서 법률적이고 군사적인 기능뿐 아니라, 토지의 경제적인 활동단위로서의 그 역할을 감당했으며,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과의 언약적인 관계를 경험하고 보존하는 신앙 교육을 위한 결정적인 자리였던 것을 알 수 있다.

II. 가정은 하나님의 창조 질서로서 인간에게 주신 선물이다.

 

한 남자와 한 여자의 결합을 통해 이루어진 가정이란 인간에게 죄가 들어오기 이전에 이미 하나님의 근본의도에 의해 만들어진 창조의 한 부분이었다(창 2,24). 창조의 시작에 결혼제도가 만들어졌다는 것은 결혼이 모든 인간에게 허락된 하나님의 선물임을 보여준다(히 13,4). 결혼에 있어서 일부일처제는 하나님께서 첫 창조 때에 아담을 위해 한 아내를 허락하셨다는 데에 기인한다. '젊어서 얻은 아내'(잠 5,18; 사 54,6; 말 2,14 이하)와 '젊어서 얻은 남편'(욜 1,8)이라는 말도 일부일처가 결혼의 근본 형태인 것을 말해준다. 그러나 일부다처제(라멕의 시대로부터 등장한다: 창 4,19)는 타락한 인간적 제도의 산물로 여겨진다. 따라서 성경에는 일부다처제로 말마암아 공동체 내에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했던 것을 보여주고 있다(참조 아브라함: 창 21; 기드온 삿 8,29-9,57; 다윗: 삼하 11,13; 솔로몬: 왕상 11,1-8).
결혼의 창시자는 하나님이시다. 창세기는 하나님이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그 두 사람의 만남을 주선하고 계신 분으로 나타난다. "사람이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창 2,18)는 말씀은 남자가 동물의 세계에서 자기를 돕는 자를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돕는 배필이란 남자와 같은 존재이면서 남자를 돕는 자의 역할을 하는 사람을 뜻한다. 여자는 남자와 상응하는 동반자로서 남자(2,7)나 동물처럼(2,19) 흙으로 피조되지 않고 남자의 갈비뼈로 만들어졌다. 그리고 여자가 만들어질 때에 남자는 깊은 잠으로 인해 그것을 보지 못하게 함으로써(2,21) 결혼의 신비를 지니게 하셨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여자를 남자에게 인도하고 대면시켰을 때에 남자는 기쁨의 탄성을 외친다. 이로써 남자와 여자의 관계가 다른 어떤 피조물의 관계와도 비교할 수 없는 깊이 있는 친밀성이 있음을 암시해 줄 뿐 아니라, 남자와 여자가 하나로 결합될 때에야 비로소 온전한 인간이 됨도 보여준다(창 2,24). 그런 점에서 성서는 결혼을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하나님의 행위라고 말씀하고 있다(참조 막 10,6-9). 그러나 이 결혼은 어디까지나 지상에서의 삶에만 유효한 것으로 몸의 부활이후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막 12,25; 눅 20,35). 예수 그리스도만이 종말론적으로는 모든 인간의 궁극적인 신랑이시기 때문이다.

III. 가정은 단순히 인간들의 계약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언약인 결혼을 통해 이루어진다.

 

따라서 사랑을 파괴하는 것은 언약을 파괴하는 행위와도 같은 것이다. 이에 하나님은 결혼이라는 언약의 사랑을 파괴시키는 간음과 음행을 죄악으로 여겨 금지 시켰고(출 20,3.14), 또한 이혼을 부당한 것으로 선언하셨다. 사랑으로 만난 결혼은 그러므로 두 사람이 사는 동안 유지되어야 하며(마 19,5-6), 이를 깨뜨리는 이혼이란 결코 용납되어서는 안될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행위인 것이다(말 2,16).

 

이에 따라 지혜문학인 잠언서는 특히 결혼을 파기시키는 음란한 행위들에 대해 엄중히 경고하고 있다(잠 5,2-5; 7,4-27). 이스라엘 예언자들 또한 가나안 거민의 종교에서 음란한 성행위가 종교적인 제사형식으로 제도화되고 고착화되는 것을 보며 그것을 향해 맹렬한 비판을 가하고 있다. 특히 여성이 남성의 성적인 탐욕에서 보호받아야 되는 것은 가난한 자, 겸손한 자가 멸시 당하고 억압받지 않아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매우 중요한 사회적 문제였던 것이다(암 2,7). 성의 왜곡과 남용은 인간성을 위협하고 그 안에 드러나는 사랑의 관계를 깨뜨리며, 결국 하나님이 만드신 결혼 제도를 파괴시키기 때문이다.

IV. 가정은 남편과 아내의 만남을 통해 새롭게 이루어지는 인격적 나눔의 공동체이다.

 

결혼이란 한 남자와 한 여자가 각각 부모를 떠나서 둘이 연합하는 것으로 시작된다(창 2,24). 결혼 전에는 부모와 형제 자매들과 함께 삶을 나누었으나, 결혼 후에는 부모를 떠나 남편과 아내로서 새로운 만남과 결합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연합성은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의 공동체성에 부합되는 것으로 후에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몸에 연합하는 교회 공동체성에 비유되기도 한다(엡 5,22-33). 이 가정 공동체를 통해서 남편과 아내는 하나님이 주시는 삶의 은혜를 함께 나누는 유업자가 된다(벧전 3,7). 하나님께서 부부를 통해 생의 값진 선물들을 함께 나눌 수 있는 특권을 주셨기에 부부란 무엇보다도 진정한 나눔(코이노니아) 공동체라 할 수 있다.

 

이 부부의 나눔의 공동체성은 여러 가지 의미로 확대될 수 있다. 거기에는 육체적인 성적 만남을 비롯하여 기쁨과 슬픔, 신뢰와 사랑, 그리고 존경과 같은 감정적이고 정신적인 만남과 더불어 신앙적 고백을 나누는 영적인 만남도 포함된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는 실제적인 삶을 위한 경제적인 재화(돈/수입), 거주 공간과 시간과 휴식, 그리고 또한 사회적으로 서로가 맺고 있는 인간 관계성의 나눔도 의미한다. 이러므로 남편과 아내는 상호의존적이며 상호보완적인 평생 동지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나눔의 모습은 하나님 자신이 보여주신 아가페적인 사랑으로 부부가 서로 사랑하고 사랑받는 것을 통해 올바로 드러날 수 있다. 따라서 바울은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라'(엡 5,25), 그리고 '아내는 남편을 사랑하라'(딛 2,4)고 아가페적인 사랑을 부탁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랑의 명령에 순종할 때에 부부는 하나님이 주시는 샬롬을 경험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결혼이란 그런 의미에서 공동체의 친밀한 관계성을 표현하는 사회적 단위 중에서도 가장 작은 그러나 가장 뛰어난 특성을 지닌 인격적인 삶의 자리인 것이다.

V. 가정은 무엇보다 부부에게 주어진 기쁨과 즐거움의 자리이다.

 

'둘이 연합하여 한 몸을 이룬다'는 말씀 속에는 새 기쁨의 자리로서의 결혼에 대한 이해가 들어 있다. 성경은 부부간에 성적인 즐거움과 정신적인 만족이 있음을 말해준다. 부부간의 성이란 단지 종족을 보존하고 번성하는 역할을 넘어서서 남편과 아내가 서로 사랑으로 연합되는 구체적인 표현이며, 또한 육체적인 즐거움을 누리는 장임을 뜻한다. 부부는 성적인 결합을 통해서도 서로에게 기쁨을 발견하고 제공하는 존재가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젊어서 얻은 아내와 함께 늙어가는 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일로 묘사된다(잠 5,18; "네 샘으로 복되게 하라. 네가 젊어서 취한 아내를 즐거워하라"; 12,4; 18,22). 전도서 기자도 이렇듯 부부가 인생을 서로 즐기며 사는 것을 한평생 하나님께로 받는 복이라고 선언한다: "하나님이 해 아래서 네게 주신 모든 헛된 날에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즐겁게 살지어다"(전 9,9). 그렇다고 결혼하지 않은 사람들은 인생에서 기쁨을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이 아니다. 다만 결혼 공동체를 통해 인간은 서로 사랑을 주고 받음으로써 보다 더 큰 기쁨과 만족을 누릴 수 있다는 말씀이다.

VI. 가정은 부모의 자녀들에 대한 가르침과 훈련, 그리고 자녀들의 부모에 대한 존경과 순종을 배우는 곳이다.

 

구약(출 20,12; 21,15.17; 신 21,18-21; 27,16)과 신약성경은 이 사실을 한 목소리로 계속 강조한다(엡 6,1이하; 골 3,20).
1. 가정은 결혼을 통해 부모됨을 경험하는 자리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첫 부모에게 이 땅 위에서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창 1,28)고 말씀하셨다. 이는 그의 창조행위를 이 땅위에서 지속시키기를 원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명령은 인간의 성이라는 구체적인 도구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성은 그 자체가 본래 죄와 관련된 것이 아니라 이 땅위에서 종족을 보존하며 번성시키기 위해 마련된 하나님의 방법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부부의 성을 통해 태어난 자녀란 결혼의 열매요 복이라 할 수 있다("자식은 여호와의 주신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 젊은 자의 자식은 장사의 수중의 화살 같으니 이것이 그 전통에 가득한 자는 복되도다": 시 127,3).

 

자녀의 복은 특별히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받는 축복(128 편)으로 표현되기도 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허락하신 언약의 복은 무엇보다도 많은 자녀를 주시겠다는 것이었고(창 12,2이하; 15,5; 28,14), 시내산 언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순종 표시로 주어진 복도 '번성과 창대함'의 복이었다(레 26,9; 신 28,4). 자녀의 풍성함이란 그런 의미에서 '땅을 다스리라'는 하나님의 문화적 위임명령을 지속시킬 수 있는 전제 조건으로, 인류의 번성은 하나님의 축복임을 뜻한다(창 1,28; 12,2). 따라서 자식 없음은 하나님의 총애를 잃어버린 것으로서 불행중의 불행으로 이해되었다. 그리하여 자식이 없는 부모는 하나님께 나아가 자식얻기를 간절히 기도해야 했다. 구약성경은 말미암은 긴장과 갈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이야기는 이러한 갈등 속에서 하나님의 사건을 경험한 이야기라고도 할 수 있다. 거기서 하나님은 자녀 없는 자들에게 자녀의 기쁨을 주시는 분(시 113,9; 144,12 이하)으로 나타나신다.

2. 부모가 된다는 것은 선물로 주신 자녀를 양육할 책임을 부여받았음을 의미한다.

 

여기서 양육이란 자녀를 키우고 가르치는 것을 말한다. 곧 바른 길로 인도하는 교육과 동시에 잘못을 책망하는 훈련이 부모에게 요구된다. 이는 자녀란 부모의 돌봄과 가르침을 통해 비로소 바르게 자라나기 때문이다. 자녀들은 부모를 통해 모든 것, 특히 신앙적으로 하나님의 엄위하심과 그분의 사랑의 보살핌을 배우게 된다. 자녀교육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은 매우 엄중하기까지 하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신 6,4-7). 이에 따라 부모는 말씀을 통한 교훈뿐만 아니라, 자신의 경건한 삶을 통해 자녀들로 하여금 자기 훈련과 책임적인 행위를 할 수 있도록 훈련을 해야 한다(엡 6,4: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 참조 골 3,21; 잠 22,6). 그 가르치는 시기도 중요하다. 부모는 자녀가 어렸을 때부터 시작해야 한다(잠 22,6: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잠 20,11-12: "비록 아이라도 그 동작으로 자기의 품행의 청결하며 정직한 여부를 나타내느니라), 이러한 자녀교육은 인간을 돌보시고 가르치시는 하나님의 교육에 그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다(참조 시 139,1-6; 히 12,5-7).

 

이스라엘의 교육의 틀을 보면, 자녀가 아주 어렸을 때는 어머니가 교육을 담당하나, 그들이 자랄수록 아버지의 역할이 점차 더 중요해진다. 딸은 결혼하기 전까지 어머니가 주로 교육을 하나, 젊은 아들은 대체로 아버지 곁에서 아버지의 직업을 보고 배우면서 자라나게 된다. 이로써 교육과 직업훈련이 아버지의 손에 의해 동시에 이루어진다. 그러나 성경에는 이러한 교육과 훈련에 실패한 예와 성공한 예가 동시에 나타난다. 엘리의 아들들(삼상 2,12 이하)과 사무엘의 아들들(삼상 8,1 이하)은 실패한 예이며, 디모데는 성공한 예이다(딤후 1,5). 이 때에 자녀는 부모의 영광과 자랑이 되는 것이다(시 144,12).

 

부모와 자녀의 이러한 교육관계는 혈연적인 관계성을 넘어 지혜교사들과 예언자들에게까지 확장된다. 지혜교사들은 제자들에게 '아버지'라는 칭호를 받고, 그 교훈을 받는 제자들은 '아들'이라고 불리워진다(잠 1,10.15 등). 예언자인 엘리야나 엘리사 또한 제자들에게 '아버지'라 불리우며(왕하 2,12; 6,21; 13,14), 그 제자들은 예언자들의 '아들들'로 이해되었다(개역은 '무리' 또는 '생도'로 번역한다. 왕상 20,35; 왕하 2,3.5.7; 4,1.38; 5,22; 6,1; 9,1).

3. 가정은 또한 자녀들이 부모에 대해 공경하고 순종하는 것을 배우는 자리이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제 5 계명)는 십계명의 말씀은 하나님을 섬기라는 명령 다음에 인간과 인간관계를 언급하는 내용으로서 나타나는 첫 번째 계명이다. 부모는 자녀들에게 하나님이 위임한 생명을 선물한 분들이며, 자녀들이 스스로를 보호할 수 없을 때 그들을 돌보고 키우신 분들이기에(잠 23,22-25) 이 세상에서 다른 어떤 존재보다 더 중요하다. 그러므로 자녀들은 마땅히 부모에 대한 의무와 책임을 지니게 된다. 따라서 성경은 자녀들이 모든 일에 있어서 부모에게 순종할 것을 요청한다. 이것이 바로 옳은 계명이며(엡 6,1),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골 3,20)이라고 말씀한다. 그러나 이 순종은 한계가 주어진다. 그것은 바로 '주 안에서'(엡 6,1)라는 말이다. 이는 만약 부모가 하나님의 명령에 거슬리는 요구를 할 경우 이에 대해 자녀가 거부를 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이는 부모를 덜 사랑하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을 더 사랑해야 하기 때문이다.

 

자녀가 결혼함으로써 부모로부터 독립하게 될 때에 자녀들은 부모에 대한 직접적인 순종의 의무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그 때에도 자녀에게 있어서 부모를 공경하지 않아도 되는 때는 없는 것이다. 부모에 대한 공경은 평생의 의무요 책임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부모 공경'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부모로서의 영광과 이름에 합당한 경의를 표하는 것을 말한다. 거기에는 그분들이 공경을 받을 만한 외적 조건이 있든지 없든지 상관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부모 되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존중과 존경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도 성인이 된 자녀들이 부모를 돌보아야 할 책임이 있음을 강조하셨다. 성전에 이미 자기의 재산을 다 드려서 더 이상 부모에게 드릴 돈이 없다고 하며 부모가 곤경에 처한 것을 돌보지 않는 자녀들은 마땅히 심판받아야 한다고 경고하신 것도 바로 그런 이유에서이다(마 15,1-9; 참조 구약에서 부모를 때리는 자나 멸시하며 저주하는 자는 사형죄에 해당됐고(출 21,15.17; 레 20,9), 부모를 공경함을 거절하는 것은 사회가 붕괴되고 있다는 구체적인 징조로 이해됐다(겔 22,7; 미 7,6; 잠 20,20; 딤후 3,2)).
성경은 가정에 주어진 부모됨과 자녀됨의 축복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을 기억하시는 하나님을 보여주고 있다. 곧 나그네 된 사람들과 부모 없는 어린이들, 그리고 남편을 잃어버린 과부들에 대해 특별 배려가 있어야 됨을 말씀하신다(출 22,21; 신 16,11; 24,17; 27,19; 사 1,17; 렘 7,6; 겔 22,7; 슥 7,10). 하나님은 과부와 고아와 나그네등 가정을 상실한 자녀에게도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신 10,18).

VII. 신약에 오면 가정은 협의적인 의미를 넘어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타난 '하나님의 가족'(familia dei)이라는 신앙 공동체로 확대 변모된다.

 

1. 원시 기독교 공동체에서 가정은 예배와 기도, 그리고 선교를 담당하는 중심 역할을 수행하는 중요한 자리였다.

 

기독교 첫 공동체는 바로 가정교회라는 형식으로 출발했기 때문이었다. 가정은 곧 하나님의 언약적 사랑을 역사의 현장에서 실현하는 자리로 나아가게 된 것이다.
예루살렘에서의 첫 기독교회는 가정집에서 예배를 드리고 사도들에게 가르침을 받으므로써 시작되었다(행 2,46; 5,42; 12,12). 그리고 기독교 복음이 이방으로 전파되는 중에 로마 백부장인 고넬료의 집(가정) 모두가(행 10 장) 베드로의 복음 증거를 통해 개종되었다는 것은 가정이 지닌 선교적 의미의 중요성을 나타낸다. 바울의 선교 과정에 있어서도 그가 세운 교회는 가정이 하나 둘 모여서 이루어진 것이다. 루디아의 집이나 빌립보의 감옥(행 16,15. 31-34), 그리고 스데바나, 회당장 그리스보, 가이오의 집등은 그것을 말해준다(행 18,8; 고전 1,14-16; 16,15; 롬 16,23).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에베소의 오네시보로(고전 16,19; 딤후 1,16; 4,19), 골로새의 빌레몬(몬 1.2)과 라오디게아의 눔바(골 4,15.16), 로마에 있는 아리드도불로와 나깃수와 그외의 다른 사람들(롬 16,10이하)의 집 또한 그것을 가리킨다. 바울은 그들의 집을 통해 모인 교회를 언급함으로써 그들의 집이 곧 교회였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이 같은 교회로서의 가정의 모습은 이스라엘 신앙의 연속성에서 가족이 중요한 자리를 차지했던 것과 연결된다. 구약에 나타나는 유월절 의식이나 율법의 가르침에 있어서의 가족의 역할이 신약의 가정 교회에서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 그곳에서 복음의 전파와 가르침이 나타나고(행 5,42; 20,20), 세례가 베풀어지며(행 16,15; 고전 1,16), 떡을 나누고, 주의 만찬(행 2,46)이 수행되었던 것이다. 에베소서와 골로새서에 나타나는 가훈표(엡 5,21-6,9; 골 3,18-4,1)는 교회의 이러한 가정 중심적인 성격을 잘 보여주고 있다. 아마도 그 가훈표들은 믿음의 집들에서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아내들과(고전 14,35) 아이들(엡 6,4)의 장소로서의 가정은 여자와 아이들을 새로운 가정교회의 일원으로 수용하는 데 일조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가족으로 칭함 받은 것 같이(민 12,7; 렘 12,7; 호 8,1; 미가 4,2), 교회가 이스라엘의 유업으로서 '하나님의 집'으로 불리운 것은 당연하다 할 것이다(엡 2,19; 갈 6,10; 히 3,2-6; 딤전 3,15; 벧전 4,17).

2. 신약의 가정교회는 구약적 가정의 확대 형태라 할 수 있다.

 

그 안에서 신앙과 전승의 보존, 그리고 가르침이 이어졌다. 그러나 가정이 교회로 확대케 된 중요한 신학적인 근거는 예수 그리스도이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이루어 놓으신 하나님의 화해의 사건을 받아들이게 되면, 그는 더 이상 하나님 나라의 이방인이나 손님이 아니라, 가족과 시민이 되기 때문이다(엡 2,19: "이제부터 너희가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를 통해서 이제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의 가족의 구성원이 되고 약속의 유업을 받을 자가 된 것이다(엡 3,6). 이 하나님의 가족에 속하는 신앙인은 누구나 이제 신앙 안에서 서로 교제하고 도울 의무를 지닌다(행 2,42.44; 4,34; 롬 12,13; 15,26.27; 갈 6,6; 고후 8,4; 9,13; 빌 1,7; 4,15이하; 딤전 6,18; 히 13,16). 그리하여 구약의 가정에 있어서 경제적인 윤리와 가정 윤리에 뿌리를 둔 서로의 나눔과 섬김, 그리고 보살핌등에 대한 요구가 교회 공동체 안에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갈 6,10; 딤전 5,4-8).

3. 이러한 가정교회에 대한 신학적인 보편성과 개방성은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적 삶과 말씀에 근거한다.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은 한편으로 기존적인 가정의 정체성을 위협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더 높은 차원의 새로운 개념으로 그것을 고양시켰다. 그런 점에서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은 가정의 붕괴를 초래하는 경향도 있었다(마 10,35.36; 눅 12,53; 참조 미 7,6). 가장 가까운 부모와 형제 자매 조차도 하나님 나라의 적대자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의 제자가 되려는 사람들은 가정을 떠나야 했고(막 1,16-20 병행구; 10,29; 눅 18,29-30), 부모의 장례를 주관하는 것 보다 더 긴급하게 예수의 뒤를 따라야 했다. 그러나 그렇게 가족의 붕괴를 경험한 사람들에게는 새로운 집과 형제 자매, 그리고 부모와 자녀에 대한 약속이 주어진다(막 10,29.30; 마 19,29; 눅 18,29.30). 곧 혈연적 가족이 붕괴되는 자리에 하나님의 새로운 가족이 탄생됨을 의미한다. 이를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사건이 막 10,31-35에 나타난다. 예수께서는 그를 찾아 온 그의 어머니와 형제들을 보시고는 오히려 그를 둘러싸 말씀을 듣고 있는 민중들을 향하여 "내 모친과 형제와 자매를 보라"(막 3,34)고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예수의 말씀을 통해 나타난 이 하나님의 가족은 하나님이 아버지되시고 예수 그리스도는 맏형이 되시며(롬 8,29),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그의 형제와 자매가 되는 공동체이다. 그리하여 이 하나님의 새 가족 공동체는 세계를 향한 개방성에로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이다. 거기에는 남녀의 차이나, 인종의 구별, 있는 자와 없는 자의 차별도 있을 수 없었다. 다만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신 서로의 사랑과 나눔, 그리고 섬김이 있을 뿐이었다. 하나님의 가족이란 말하자면 하나님의 첫 창조에 의해 생겨진 가정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종말론적으로 완성된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요 1,12-13). 따라서 창조신학과 구원신학이 여기서 만나게 된다. 첫 가정을 통해서 시작된 혈연의 가족이 이제는 교회 공동체를 넘어 마침내는 민족과 국가, 그리고 세계의 모든 사람을 가족으로 만나는 공동체를 꿈꾸는 것이다. 하나님 안에서 인류는 한 가족이기 때문이다.

4. 지상의 가족이 하나님의 가족으로 이양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마음으로 새 공동체를 부양할 인물이 요청된다.

 

영적으로 돌보고 사랑으로 이끌며,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칠 사람이 필요한 것이다. 바울은 이것을 영적인 아버지라고 묘사한다(고전 4,15-17; 살전 2,7.11). 하나님의 가족 공동체를 위해서 성서적인 부모됨은 목회자에게만 제한 된 것이 아니다. 영적인 성숙을 위하여 나아가는 자 모두에게 열려져 있다. 다만 영적 부모됨에 필요한 자세가 있다면, 그것은 억압하고 명령하는 권위가 아니라, 사랑의 나눔과 겸손한 섬김이다. 여기에는 권리 보다는 책임이, 자기 자신의 명예보다는 하나님의 영광이 우선시된다. 이러한 모습이 믿음의 가정 공동체를 지속시키며 성장시키는 원동력이요 추진력이 될 것이다.

어느 나라의 사회도 그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가정의 도덕성, 지성, 영적인 활력성보다 더 높아질 수는 없다. 따라서 그 사회의 도덕성과 영적인 수준을 높이기 위해서는 거기에 속해 있는 가정부터 새로운 변화를 모색해야 하는 것이다. 가정이 신앙으로 바로 서고, 가정에서 올바른 도덕성이 회복되고, 서로를 향한 사랑과 신뢰와 존경이 구축될 때 그 사회는 비로소 바르게 세워질 수 있게 될 것이다. 모든 문제의 근거에는 영적 문제가 있듯이 오늘 우리가 겪고 있는 경제적 위기 또한 그 근저에는 도덕적이고 신앙적 문제가 깔려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므로 사회의 한 부분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나라의 기초단위인 가정이 회복되고 진정으로 '하나님의 가족'으로 거듭날 때에 지금 경제적으로 고난당하며, 도덕적으로 붕괴되고 있는 우리 자신과 이웃의 문제가 해결될 수 있는 전기가 마련될 것이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시 1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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