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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기원에 대한 신학적 논의

논문신학성경 이승구 교수............... 조회 수 2583 추천 수 0 2010.05.31 11:1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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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생명의 기원에 대한 신학적 논의

이승구 교수

생명의 기원에 대한 신학적 논의는 "생명이 무엇인가?"하는 문제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성경과 신학에 의하면 생명은 그 본래적인 의미에서 모든 것의 근원이신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에 있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지 않은 것은 죽은 것이라고 여겨진다. 이는 모든 생명에 대해서 타당한 말이다. 그러나 이 논문에서 나는 일단 이 생명을 인간의 생명에 국한해서 논의할 것이다. 이는 우리가 주로 인간의 생명의 문제를 중심으로 논의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인간의 생명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인간이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가져 나갈 때 그 온전한 생명을 누려나가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창조함을 받았어도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가지고 있지 않으면 온전한 생명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없다. 그러나 아주 놀랍게도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에 있지 않은 사람들도 이 세상에서 일정한 기간 생명의 일부를 누려 나간다. 그러나 그렇게 누려 가는 생명은 온전하고 충족한 생명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인간을 위해 의도하셔서 인간들이 누려 나갈 수 있는 생명의 아주 제한된 부분을 누리는 것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생명 개념을 주로 이런 생물학적인 생명, 심리적 생명, 사회학적인 생명 개념을 중심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생명은 그것의 가장 포괄적이고 충족한 의미에 의해서 먼저 규정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시기로 작정하셨을 때에 염두에 두고 있었던 가장 온전한 의미의 생명 개념에서 출발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상태의 인간의 생명과 그들을 향해 요구하신 생명의 상태에 대한 고찰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I. 생명의 과정에 관한 계시사적 고찰

1.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생명

하나님께서는 인류 최초의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셨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하늘과 땅을 바라보고, 땅을 정복하며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잘 다스리며 지키는 아주 귀한 사명과 함께 인간의 생명은 하나님의 창조에 의해서 시작된 것이다(창 1: 26-28). 처음에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그 흙('하아다마'[ ])으로부터 고은 흙(먼지, '아파르'[ ])을 사용하셔서 남자의 형태를 만드시고, 그의 코에 하나님의 생기를 불어넣으시어 그로 살게 하신 것이다. 이 때부터 아담이 "산 존재"(즉, '네페쉬 하야' [ ], 생물, living soul)가 되었다(창 2:7). 여기에 인간 생명의 기원이 있다. 하나님께서 주도권을 잡으시고 목적을 가지고 창조하신 것에서 인간의 생명이 기원한 것이다. 이처럼 인간은 모든 선한 것의 기원이신(약 1:17) 하나님께서 창조하셔서 그 생명을 가지게 된 것이다.

여기서 창조라는 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이거나 유출된 것도 아니고, 하나님께서 낳으신 것도 아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과 인간을 창조하실 필요가 없으셨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당신님의 기쁘신 뜻대로 인간을 창조하셨고, 그로 말미암아 인간에게 생명이 있게 된 것이다. 인간 생명의 근원은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모든 족보적 흐름을 거꾸로 말하면, 그 마지막 말은 항상 누가 복음이 예수님의 족보에 대해서 말하는 대로 "그 이상은 아담이요, 그 이상은 하나님이시니라"(눅 3:38)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셋과 아담의 관계성과 아담과 하나님의 관계성의 차이를 분명히 해야 한다. 아담은 셋을 나은 것이지만, 아담은 하나님에 의해서 당신님의 기쁘신 뜻대로 창조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생명을 창조하실 때 재료를 사용하실 수도 있으셨고, 사용하지 않으실 수도 있으셨다. 그러므로 이때 재료를 사용하셨는지의 여부, 또 어떤 재료를 사용하셨는지 등의 문제는 그 자체로는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다. 흙이라는 재료를 사용하지 않으시고도 인간을 만드실 수 있으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최초의 인간을 만드셨을 때에는 흙('아다마'[ ])으로부터 인간을 만드시고 그 의미를 살려 그를 '아담'( )이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최초의 인간의 경우에는 하나님께서 흙을 사용하셔서 인간을 창조하셨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렇지만 이로부터 인간의 몸은 흙으로부터 나왔고, 인간의 영혼은 직접 하나님에게서 왔다고 추론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인간 전체가 다 하나님의 직접적 창조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사람은 그 영혼과 몸이 분리되어 있거나 분리될 수 있는[즉, 죽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영혼과 몸이 함께 있는 '영혼과 몸이 단일체로 있는 사람'(psycho-somatic unity)인 것이다. 그는 가멸적(可滅的)이거나 가사적(可死的)인 존재가 아니었다. 고귀하게 하나님의 형상대로, 그의 모양을 따라 지어진 존재로 하나님의 대리 통치자였다.

그의 이 통치 행위를 돕도록 그와 상응하게 돕는 배필로 지어진 여자는 이 남자의 갈비뼈를 사용하셔서 하나님께서 창조하셨다(창 2:21-22). 이 경우에도 여자의 몸은 남자에게서 왔고, 그 영혼만을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이 아니고, '몸과 영혼의 단일체'로서의 또 한 사람인 여자를 하나님께서 남자의 갈비뼈를 사용하셔서 직접 창조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의 광점에서는 여자도 남자와 동등한 하나님의 형상이고, '남자에게 필적하며 그에게 상응하여 그를 돕는 자로' ['에제르 케네그도', ] 하나님의 고귀한 창조물이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이 남자와 여자의 한 몸 됨의 실행을 통해서 "생육"하도록, 즉 아이들을 낳도록 하셨다. 물론 이 '창조함을 받은 지위', 즉 '순전한 상태'(status integritatis)에서 인간은 아직 아이를 낳는 일이 발생하지는 않았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명령과 축복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아이들을 낳도록 하셨던 것이다. 그렇게 낳아진 아이들은 그 몸을 그 부모에게서 얻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그 영혼만을 창조하시는 것이 아니라, 영혼과 몸의 단일체로서의 인간을 하나님께서 이 생육의 과정을 사용하셔서 이 땅에 계속 창조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계속적인 창조(creatio continuae)의 과정이 여기 있다.

인간의 생명은 이렇게 모두가 하나님의 직접적 창조의 산물이다. 그리고 그 인간의 생명은 영혼과 몸이 같이 있는 통일체이다. 하나님의 최초의 창조 속에서는 이 영혼과 몸의 통일성이 깨어지지 않도록 되었던 것이다. 이 최조의 창조 속에 있는 생명을 <생명 1>이라고 해 보자.

2. 더 높은 단계의 고귀하고 충만한 생명을 향하도록 창조된 인간

그러나 창조함을 받은 인간은 창조 받은 그 상태에서 영원히 있도록 의도된 것이 아니었다. 이 상태는 온전하고 거룩하며 좋은 상태이었으나,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의 언약적 대표로서 아담이 하나님의 명령과 뜻에 의존하여 온 땅을 하나님의 뜻에 따라 다스리면서 일정한 기간을 잘 지내고 나면 아담뿐만이 아니라 온 인류가 모두 다 "더 높고 온전하며 생명의 의미로 충만한 더 높은 상태"에 이르도록 하셨다. (그래서 이 기간을 "probation period"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처음 창조함을 받은 상태보다 더 높은 단계에로 가도록 하셨던 것이다. 이것은 창조함을 받은 원 상태에 있던 아담의 상태보다 더 높은 단계의 생명이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하나님과 교제하며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서 온 세상을 다스리며 있던 아담의 원 상태보다 더 높은 고귀하고 충만한 생명의 상태는 더 이상 하나님과의 교제의 상태로부터 떨어지는 일이 있을 수 없는 상태이다. 이런 상태의 생명을 <생명 2>라고 해 보자.

그러나 아담의 창조함을 받은 원상태는 이렇게 더 높은 상태에로 올라갈 수도 있는 상태이지만, 또한 그 상태로부터 떨어질 수도 있는 상태이다. 죄를 범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상태요, 따라서 그렇게 되면 죽을 수도 있는 상태인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의도는 이런 가변적 상태 가운데 있는 인간들을 더 높은 상태에로 올리셔서 그들로 하여금 더 이상 타락의 가능성이 없는 온전한 생명을 누리도록 하려 하신 것이다. 그 조건은 인간 전체의 대표인 아담의 개별적이고도 온전한 순종이었다. 이러한 관계와 정황을 종교 개혁 시대 이후로 특히 개혁 신학계에서는 흔히 "행위 언약"(covenant of works)이라고 불러왔었다.

이처럼 아담에게 자유의지를 허락하셔서 그 스스로 이런 순종의 길을 택하여 인격적이고 자발적인 관계를 누리도록 하시는 것이 인간을 로봇이나 기계 장치처럼 다루지 아니하시고 진정 한 독립된 인격으로 대우하시는 하나님의 배려와 사랑이었다.

3. 고귀한 생명에로 오르지 못하고 타락한 인간과 그의 생명

그러나 아담은 하나님의 계시와 그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을 잘 헤아리지 못하고 하나님의 교훈적인 뜻과는 정반대 되는 길을 선택하여 타락하였다. 이로부터 하나님과의 교제와 관계성을 상실한, 영적으로 죽은 생명이 있게 되었다. 이는 "죽음 아래 있는 생명"(life under death)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과 관련 없이 살아가는 인간의 생명은 모두 다 이 상황에 있는 생명이다. 이를 <생명 3>이라고 해 보자.

우리의 대부분의 의료 행위는 이런 물리적 생명과 관련된 행위이다. 그러나 이렇게 영적으로 죽은 사람의 생명도 고귀하고 중요한 것이다. 성경은 이렇게 타락한 사람들, 즉 영적으로 죽은 사람들을 향해서도 계속해서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한다(창 9:6; 약 3:9). 그러므로 우리는 영적으로 죽은 상태에 있는 사람들도 아주 고귀하게 여겨야만 한다. 그리고 이는 다음 단계의 생명을 위한 발판이기도 하다.

4. 구원받은 인간과 그의 생명

타락한 사람들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곧 바로 그의 사랑과 은혜에 근거한 구원 사역을 시작하셨다. 타락한 인간에게 대해 "은혜 언약"(covenant of grace)을 세우시고, 이에 따라서 영적으로 죽은 사람들을 살리시는 일을 하시기 시작하신 것이다. 이를 위해서 타락한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친히 찾아 오셨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고 물으시며 찾아오시는 하나님은 죄를 문제 삼으시고 형벌만 선언하시고 베푸시는 것이 아니라, 그 정죄와 형벌의 선언 한 가운데서 사람들을 구원하시려는 뜻을 나타내 보이시고 인간들로 이 구원의 약속을 믿도록 하셨다.

그 최초의 뜻에 대한 선언이 뱀에게 내리신 형벌의 말 가운데 들어 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창 3:15). "여자의 후손"과 "사단의 후손" 사이의 처절한 전투에서 여인의 후손을 통한 구원이 있을 것임을 보이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반응으로 인간들은 자신들을 구원할 구원자를 기다리며, 이렇게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구원자를 통한 구원을 믿어 왔다.

이 약속에 따라 역사의 한 가운데서 여인의 후손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출생하시고 성장하시어 가르치시고 급기야는 그의 삶과 가르침과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구원을 이루셨다. 예수님께서 이루신 이 구원을 우리에게 적용시키시는 성령님의 역사로 말미암아 타락하여 영적으로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영적으로 사는 일이 발생했다. 영적 생명이 다시 주어지고, 하나님께 대해서 적극적으로 반응하여 하나님의 뜻을 좇아 사는 삶이 다시 시작된 것이다. 이를 중생이라고 부르며, 영적인 부활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생명은 그리스도의 부활 생명에 참여하는 생명이므로 "부활 생명"(resurrection life)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때부터 "영생"이 주어진 것이다. 예수님께서 하신 다음 말씀 가운데 있는 생명이 이를 말하는 것이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요 5: 24-25).

여기에 영적으로 죽은 자들의 살아남에 대한 언급이 있다. 그것을 생명이라 하시고, 영생이라고 하신 것이다. 이는 원리상 아담이 처음 창조함을 받은 그 생명보다 더 고귀한 것이니, 이 영생은 아담이 행위 언약에 순종하여 이르러야 했던 그 고귀하고 더 높은 단계의 삶이기 때문이다. 아담이 불순종하여 얻지 못한 그 영생을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을 통해 얻게 된 것이다. 이 때의 생명은 원리적으로는(in principle) <생명 2>와 같은 생명이나, '아직 아닌' 면을 지닌 생명이다.

5. 극치에 이를 영적인 생명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을 믿음으로서 이미 얻은 영생은 그 영생의 온전함을 다 얻은 영생이 아니라 그 영생의 "아직 아니"를 간직한 영생이다. 그 "악 아니"가 사라지고 우리에게 주어진 영생의 충만함이 다 온전하게, 그 극치와 적정의 모습으로 드러나게 되는 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셔서 우리가 부활체를 가지고 새하늘과 새 땅에서 살게 되는 때이다.

그 때에야 말로 지금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고 있는 영생의 참된 의미가 온전히 다 나타나게 될 것이다. 이 때의 생명은 '아직 아니'적 측면이 제거된 원리적으로나 실질적으로 영생에 온전히 부합하는 생명이다 이는 위에서 살펴 본 <생명 2>와 정확히 같은 생명이다.

II. 생명의 개념과 그 기원에 관한 논의

1. 생명의 개념들과 그 기원

이제까지 우리는 인간의 생명을 그 역사적 과정을 살피면서 다양하게 분류해 보았다. 이를 다시 한 번 정리하면서 그 각각의 기원을 말한다면 다음과 같다. <생명 1>은 처음 창조함을 받은 원상(原狀)의 상태의 생명이다. 이는 우리가 경험하지 못한 것이고, 인류 가운데서 아담과 하와만이 경험한 상태의 생명이다. 그러므로 이는 성경이 아담과 하와에 대해서 묘사하고 있는 부분으로부터 알 수 있는 생명이다.

이 <생명 1>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창조를 통해 시작되었다. 그 기원이 하나님에게 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시는 그 순간이 이 <생명 1>의 시작점이다. 이는 모든 생명의 기반이라고 할 수 있다. <생명 1>이 없으면 그 어떤 다른 생명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생명은 근원적으로 하나님의 역사적인 창조에서 기원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역사적 창조를 부인하는 사람은 결국 생명의 기원을 궁극적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생명 2>는 아담이 그 원상의 상태에서 가야만 하던 생명이고, 결국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영생의 생명이다. 그 기원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성령께서 우리에게 적용시키시는 최초의 일인 중생이라고 할 수 있다. 중생에서 우리는 <생명 2>에 참여한다.

중생은 우리의 의식 밖에서 발생하는 것이기에 우리가 명확히 그 때와 시간을 말할 수 없으나, 중생한 사람은 반드시 하나님께 회개하고, 그리스도의 구속만이 유일한 삶의 길이라고 믿게 된다. 이를 통해서 우리는 어떤 이가 중생했는지 여부를 알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그 중생한 생명의 극치는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있을 몸의 부활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하신 구속 사역과 성령의 중생시키시는 사역과 재림의 실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영생의 근거는 다 상실된다. 우리의 영생은 그리스도의 삶과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 그 사역을 적용시키시는 성령의 사역, 그리고 만물을 충만케 하실 그리스도의 재림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생명 3>은 타락한 인간, 영적으로 죽은 인간의 생명이다. 그는 영적으로는 죽은 사람이므로, 하나님께 대해서 적극적으로 반응하며 그 뜻을 순종하고 그를 추구하며, 그에게 경배하고 그를 높이며, 그를 영화롭게 하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의 물리적인 삶이 일정한 기간 계속되도록 하셨다. 이 또한 하나님의 은총이므로 이를 일반 은총(common grace) 때문에 사는 삶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 때의 생명도 그저 물리적인 삶만이 아니고, 그 정신적인 측면의 삶, 사회적인 측면의 삶, 인격적인 측면의 삶에 대해 고려하고 배려해야 한다. 흔히 물리적인 측면 이외의 문제를 '삶의 질'(quality of life)의 문제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생명 3>은 아담과 하와의 경우에 있어서는 그들의 타락 직후에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엄밀히 말해서 그들은 <생명 1>로부터 타락하여 이 <생명 3>에 이른 것이다. 아담과 하와 이외의 사람들은 그들의 존재의 처음부터 <생명 3>에 참여하고 있거나, 아니면 (언약의 자녀들의 중생을 전제로 한다면) <생명 2>에 참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경우에 있어서 정확히 어떤 순간이 이 생명에 참여하는 순간인가 하는 것이 아마 생명의 기원에 관한 이 논의의 쟁점일 것이다. 사람은 도대체 언제 인간의 삶을 가지는 것일까? 언제 하나님께서는 개별적인 인간을 창조하시는가?

2. 개별적 인간의 생명은 언제 시작되는가?

사람들은 개별적 인간의 생명의 시작에 대해서 여러 이야기를 하여 왔다. 여기서 나는 개별적 인간의 생명이 그가 수태되는 순간부터 시작된다는 논의를 하고자 한다.

(1) 이에 대해 가장 결정적인 논의는 예수 그리스도의 경우로부터의 논의라고 생각된다. 영원 전부터 신성을 가지고 계신 성자께서 정확히 언제부터 인성을 취하신 것으로 여겨져야 하는가? 성경과 신학의 일치하는 대답은 성령의 능력으로 동정녀 마리아에게 수태되는 때부터 성자께서 인성을 취하신 것이라고 한다. 이에 대해서 그것은 그저 일상적인 언어로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장차 마리아의 몸에서 나실 이가 분명한 인성을 취하셨으니, 그저 마리아가 수태한 아기가 인성을 취한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일까?

"성령으로 말미암은 수태"라는 사실은 이런 대답을 불가능하게 한다고 판단된다. 성자께서 마리아에게 수태되는 그 순간부터 그는 온전한 인성을 가진 분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수태된 지 14일 후, 3개월(12주) 후에야 인간적 생명을 가지신다고 말하는 것은 얼마나 기괴한 것인가? 그리스도의 경우에 그러하셨다면 다른 사람의 경우도 같이 말해야 할 것이다.

(2) 이런 기독론적 논의를 보충하는 것으로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모태로부터 지으셨다고 말하는 성경 구절들에 근거한 논의이다. 그 대표적인 예로, 다음 같은 시편 기자와 욥의 말을 들어 보라:

주께서 내 장부를 지으시며, 나의 모태에서 나를 조직하셨나이다. 내가 주께 감사함은 나를 지으심이 신묘막측하심이라. 주의 행사가 기이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 내가 은밀한 데서 지음을 받고, 땅의 깊은 곳에서 기이하게 지음을 받을 때에 나의 형체가 주의 앞에 숨기지 못하였나이다. 내 형질이 이루기 전에 주의 눈이 보셨으며, 나를 위해 정한 날이 하나도 되기 전에 주의 책에 다 기록이 되었나이다(시 139:13-16).

주의 손으로 나를 만드사 백체를 이루셨거늘 ...... 주께서 내 몸을 지으시기를 흙을 뭉치듯 하셨거늘 ...... 주께서 나를 젖과 같이 쏟으셨으며, 엉긴 젖처럼 엉기게 하지 아니하셨나이까? 가죽과 살로 내게 입히시며, 뼈와 힘줄로 나를 뭉치시고, 생명과 은혜를 내게 주시고, 권고하심으로 내 영을 지키셨나이다(욥 10:8-12).

나를 태속에 만드신 자가 그도 만들지 아니하셨느냐? 우리를 배속에 지으신 자가 하나가 아니시냐?(욥 31:15)

이 구절들에서는 인간의 성행위와 그로 말미암는 수태를 암시하면서 그 수태된 것이 주께서 지으시는 것이며, 생명과 은헤를 주신 것이라고 하고 있다. 모태 속에서 자라나는 태아들의 성장을 하나님이 그 아이를 지으시는 것이라고 보고 있음에 유의해야 한다. 이를 그저 모든 생명의 과정에 하나님이 관여하심을 문학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치부해 버리는 것은 계시를 존중하지 않는 태도를 드러내는 것일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수정되는 과정도 하나님께서 관여하시는 것으로 보아야 하며, 위에서 인용한 성경 구절의 관점에서는 이 수태도 명백히 하나님의 창조 행위의 한 측면인 것이다.

(3) 더구나 이 구절들에서는 다른 많은 성경 말씀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렘 1:5, 엡 1:3ff.) 우리는 이렇게 지음 받기 전부터 하나님께서는 이미 우리를 아시고, 우리를 위한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수태되어 생물학적 생명을 부여받기 전부터도 이미 하나님의 관념 가운데서는 존재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존재하지도 않는 것을 아시는 것과 시간과 역사 가운데 있는 것을 아시는 것을 구별하지 못하신다고 오해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러므로 이전부터 작정하시고 아시는 하나님께서 수태시키시는 그 과정에 생명의 시작이 있다고 보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4) 이런 논의에서 흔히 임신한 태아의 생명적 가치를 다른 사람의 생명의 가치보다 낮추어 볼 수 있는 가능성을 시사한다고 오해되는 성경 구절이 하나 있다. 그것은 출애굽기 21:22-25이다. 더구나 우리말 성경의 번역은 이런 해석에 가깝게 번역되어 있어서 우리의 오해를 증진시키기 쉽다. 기독교 윤리학자들은 흔히 이런 번역과 해석을 이 구절에 대한 '낙태 해석'(miscarriage interpretation)이라고 부른다. 이에 따른 우리말 성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옮겨져 있다: "사람이 서로 싸우다가 아이 밴 여인을 다쳐 낙태케 하였으나 다른 해가 없으면 그 남편의 청구대로 반드시 벌금을 내되 재판장을 판결을 좇아 낼 것이니라. 그러나 다른 해가 있으면 갚되 생명은 생명으로 ....... 갚을지니라"(출 21:22-25).
그러나 사실은 이를 이와 같이 낙태를 함의하는 것으로 해석한다고 해도 이는 태아의 생명을 낮추어 보는 구절로 해석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왜냐 하면, 여기서는 낙태를 고의적이지 않은 우발적인 죽음으로 다루어 그런 우발적인 경우의 살인에 대한 모세 율법의 규정에 따라 이를 논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출 21:13-14, 20-21; 민 35: 10-34; 신 19:1-13). 그러므로 이 경우에 벌금을 물게 한 것이 태아의 생명을 덜 가치롭게 여겼기 때문이라고 하기 어려운 것이다.

더구나 이 구절, 특히 22절은 사실 낙태가 유발된 것으로 해석되기보다는 살아 있는 아이를 조산케 한 경우로 해석해야 한다는 강한 논의가 있음을 잊어서는 안된다. 프레임은 첫째로 22절에 나오는 '옐레드'( )란 단어가 성경의 그 어떤 곳에서도 인간의 형체를 갖지 않은 아이나 자궁 밖에서 존재할 수 없는 존재를 지칭하는 데 사용된 일이 한 번도 없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더구나 그런 것을 말하기 원했다면 모세가 사용할 수 있는 다른 단어들이 있다고 한다. 즉, 태아(embryo or fetus)를 의미하는 '골렘'( )이란 단어를 사용할 수도 있고(시 139:16), 또 사산된 경우를 지칭할 때 성경이 항상 사용하는 '네펠'( one untimely born)이란 단어를 사용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욥 3:16; 시 58:8; 전 6:3). 그런데도 이런 단어들을 사용하지 않고 일반적으로 '아이'를 뜻하는 '옐레드'( )란 단어를 사용한 것을 보면, 여기서 아이가 낙태된 것으로 보지 않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고 한다.

프레임은 둘째로 역시 22절에 사용된 "야짜"( )라는 동사는 일반적으로 정상 분만을 사용할 때 사용된 단어이므로(창 25:25, 26; 38:28-30; 욥 3:11; 10:18; 렘 1:5; 20:18), 이로 볼 때도 여기서 낳아진 아이가 죽은 것이라고 볼 이유는 없다고 한다. 민 12:12 외에는 이 단어가 낙태를 지칭하는 데 사용된 일이 없음을 지적하는 것이다. 더구나 구약에서 자연적인 낙태를 지칭할 때 사용된 동사는 '샤콜'( )이라는 것이다(출 23:26; 호 9:14; 창 31:38; 욥 2:10; cf. 왕하 2:19, 21; 말 3:11). 그러므로 여기서 아이는 낙태된 것이기보다는 조산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셋째로 22절과 23에 나온 "해"를 뜻하는 '아손'( )이라는 단어가 그 산모에게 미친 "해"라고 지정되어 있지 않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러므로 이 "해"는 그 아이에게 미친 해나 그 산모에게 미친 해를 모드 뜻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22절은 비록 조산이기는 하나 아이에게도 다른 해가 없고, 산모에게도 다른 해가 없는 상황을 말한 것이고, 23절은 그 둘 중 누구에게든지 해가 있는 경우를 지칭하는 것이라고 해석하는 것이다.

이에 비해서 클라인은 22절에서는 맞은 그 산모가 죽고 아이는 조산한 경우를 말하는 것이고, 이 경우에는 벌금만 내면 되도록 규정된 데 비해서, 23절 이하에서는 아이에게도 해가 가해졌으면 탈리오 법칙에 따라서 해야 한다는 것이라고 해석한다. 이 점에서 해석이 다르지만 클라인의 해석도 결국 22절은 낙태를 함의하고 있지 않다고 해석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해석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태 속에 있는 생명에게 높은 가치가 있음을 분명히 하신 것이고, 사실 이는 우발적인 살인에 사형을 요구하신 유일한 경우가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이 구절은 복중에 있는 태아가 생명임을 분명히 천명하고 있는 구절의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모든 점들을 고려 할 때에 우리는 성경의 관점에 의하면 모든 사람은 수태되는 그 순간에 인간적인 생명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결론지어야만 한다. 이는 성별이 결정되는 수태후 5-9일째로 보는 입장이나, 태아(embryo)가 생성해 내는 호르몬 작용으로 산모의 정상적 월경이 중지되는 14일째로 보는 입장이나, 심장이 형성되고 눈이 발달하기 시작하는 18일째로 보는 입장이나, 심장이 뛰기 시작하는 24일째나, 혈관에서 피가 흐르고 산모의 피의 공급으로부터 분리되는 30일째로 보는 입장이나, 뇌파가 관찰될 때인 43일째로 보는 입장이나, 산모가 태동을 느끼기 시작하는 4-5 개월 째로 보는 입장들 보다 좀더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여겨진다. 다시 말하면 수태되는 그 순간부터 인간의 생명은 시작하는 것이다: "살아 있는 인간적 존재가 수태되는 순간부터 존재한 것이다."

(그러나 이 때 정확히 어느 순간이 수태되는 것으로 보아야 하는가 하는 문제는 의학자들이 결정해야 할 문제라고 생각된다. 정자가 난자에 들어가는 때인가(insemination), 아니면 노르만 포드가 주장하듯이 이 insemination 이후 22시간 정도 후인 그 둘의 염색체가 합쳐져서 하나의 세포를 이루고 분열을 할 수 있게 준비되는 소위 syngamy의 시기(zygote)인가? 그것은 다시 말하지만 의학자들의 결정일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한 비전문가(layman)로서 나는 그저 수정되는 때라고 밖에 말할 수 없다.

신학자들인 파인버그 형제들은 syngamy 이전에는 아직 인간의 세포가 아니라 해도, "인간의 생명을 위한 모든 잠재력을 가진" "인간의 생명을 형성하는 과정을 이미 시작한 것"임을 지적하고 있다. 이것은 그들이 잘 말하고 있듯이 실제적으로는 수정되는 순간에 생명이 시작된다고 말하는 것과 별 차이를 만들지 않는 것이다. 또한 그들이 로버트 벤베르그를 이용하면서 잘 말하고 있듯이 수정이 후에는 그 아버지의 것도 아니고, 그 어머니의 것도 아닌 새로운 세포가 존재하는 것이다. 그 수정적 연합 가운데서 독립적 존재(distinct entity)가 생성된 것이다. 나도 이에 동의한다.)

3. 이러한 신학적 입장의 함의

인간의 생명이 수태되는 그 순간부터라고 하면 그것은 어떤 함의를 가지는 것인가? 그것의 함의는 한마디로 "생명을 옹호하는 입장"(pro-life position)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을 최대한으로 말한다면 수정(fertilization)된 모든 수정란(zygote)은 다 생명으로 여겨져야 한다는 것이고, 최소한으로 양보하여 말한다고 하면 수정되어 어머니 태에 착상된[nidation] 수정란은 다 생명으로 여겨져야만 한다는 함의를 지닌다. 물론 이 최대치와 최소치의 차이는 상당히 큰 것이다. 인공 자궁을 만들어 태아를 그 안에서 키울 수 있는 장래의 의학적 발전 가능성을 생각하면 나는 그 최대치를 주장하는 것이 안전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인간의 '신과 같이 되어 신과 같이 행동하려는'[play God] 모든 시도를 다 제거할 수 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현재의 상황 가운데서는 최소치의 접근을 해도 어떤 점에서는 최대치의 주장과 같은 주장을 할 수 있으며, 오히려 이렇게 보는 것이 몇 가지 난점들에 대해 좋은 해결을 제시할 수도 있다고 생각된다. 예를 들어서, 수정란 중 25% 정도가 월경 시에 자연적으로 자궁에서 배출된다고 하거나 (자연적으로 수정된 수정란 중 30%만이 아이가 된다고 하는데), 이처럼 인공적으로가 아니라 자연스럽게 착상하지 못하고 배설된 경우에는 이런 최소치적 접근 방법을 사용하면 그것을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본인 자신의 의도와 상관없이 일어난 일이니까 말이다. (심지어 어떤 경우에는 여인이 자신이 임신했었는지도 모르고 이런 일이 일어나기도 한다고 한다).

또한 이런 최소치적 접근법은 (1) 아직까지는 성공 확률이 낮으며, (2) 수정란을 다루는 과정에서의 비정상적인 점들이(abnormalies) 나타날 가능성이 높으며, (3) 조산과 유산 가능성이 높아 산모에게 위협적이며, 또한 (4) 수정된 여러 수정란을 고의로 방기하고 파괴하게 되는 점, 그리고 (5) 그것을 위한 실험과 적용에 드는 엄청난 비용으로 인한 문제 등 그와 관련된 모든 기술적 문제가 해결되는 경우에, 그리고 (1) 한번에 오직 한 난자만을 사용해서 수정하고, (2) 그 부모가 잘못될 경우에 대비한 낙태에 대한 동의를 하지 않아도 되는 경우에는 시험관 수정(IVF: In Vitro Fertilization)의 가능성을 좀더 적극적으로 열 수 있는 접근법이 될 수 있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이런 경우의 예를 사용해서 '일난성 쌍둥이가 되는 일'(twining)과 '두 수정란이 합하여 한 태아를 만드는 일'(mosaic)이 가능한 이 단계의 수정란은 아직 생명으로 간주하지 말아야 한다고 논의하거나, RU-486과 같은 약물들을 사용해서 인위적으로 자연 유산을 유도하는 것은 큰 문제가 있는 논의요, 행위라고 여겨진다. 따라서 이 최소치적 접근은 매우 조심스럽게 생각해 보아야 할 접근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이 글이 취한 신학적 입장에 따르면, 수태된 수정란은 이미 생명이 부여 된 것이므로 그 태아도 다른 인간과 동등하게, 아니 더 약한 존재이므로 더 신경을 써서 가장 세심한 배려와 보호 가운데서 다루어져야만 한다. 그러므로 (1) 그 태아가 계속 있다가는 어머니의 생명과 함께 죽을 수밖에 있는 상황과 이와 비슷하게 태아와 산모의 생명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해야만 하는 극단적인 경우에는 인공 유산을 허용할 수 있지만, 그 외의 경우는 허용될 수 없는 것이다. 이렇게 허용되는 경우들로 대개 인정되는 것은 자궁 외 임신의 경우와 암 치료나 종양의 제거의 경우에 수반되는 유산이다. 그리고 (2) 수정란을 가지고 실험을 하는 것은 그 어떤 경우에도 허용될 수 없다(pace Warnock Report).

4. 같은 입장을 표명하는 신학자들의 입장

상당히 많은 신학자들은 다양한 배경에도 불구하고 이 논문에서 취한 입장에 동의한다.

예를 들자면, 1971년 5월 24일-29일에 열렸던 미국의 정통 장로교회(Orthodox Presbyterian Church) 제 39 차 총회에 제출되고, 그 이듬해인 1972년에 총회의 재가를 받은 '낙태 문제 연구 위원회의 보고서'(Report of the Committee to Study the Matter of Abortion)에서는 이와 거의 비슷한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 보고서의 일부를 인용해 보면, "태어나지 않은 아기도 하나님께 속하며"(p. 89), "성경은 태어나기 전의 인간의 생명(prenatal human life)과 태어난 후의 생명(postnatal human life) 사이의 인격적 연속성이 있음을 가정한다"고 하며(p. 93), "인격적 연속성은 수태되는 때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하고(p. 94), "성경에서는 태어나지 않은 아이가 수태된 때로부터 인간 이하라는 최소한의 시사도 주고 있지 않다"고 말하고 있다(p. 95).

또한 이 보고서는 이로부터 (1) 인구 조절을 위한 낙태나 (2) 가족의 경제적 상황을 고려한 낙태, (3) 산모의 정신적 건강을 보호하기 위한 낙태, (4) 원치 않는 아이를 출생을 막기 위한 낙태, (5) 산모의 건강을 보호하기 위한 낙태 (소위 "치유적 낙태", therapeutic abortion), (6) 강간이나 근친 상간에 의한 수태된 태아의 낙태, (7) 기형아를 막기 위한 낙태 모두가 다 허용될 수 없다고 단언한다(pp. 112-17). 단지 산모의 생명의 위협이 있을 경우에 대해서는 좀더 깊은 연구가 필요하다고 하면서 "일반적으로는 이것이 우리가 기독교적 근거에서도 정죄할 수 없는 낙태의 유일한 정당화의 경우"라고 한다(p. 119. Cf. p. 121).

죤 프레임이 중요한 집필자의 한 사람이었던 이 보고서는 전통적 개혁파의 입장을 잘 대변한다고 여겨진다. 프레임 자신은 자궁의 악성 종양을 제거하여 태아가 죽는 것과 자궁외 임신(an actopic pregnancy)의 경우에 인공 유산이 참으로 산모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필수적임을 보일 수만 있다면 허용될 수 있으니, 이는 정당 방위를 정당화하는 성경에 근거해서 추론 될 수 있다고 한다.

같은 개혁파 입장에 서 있는 해롤드 브라운과 고든-콘웰 신학교의 죤 제퍼슨 데이비스의 입장도 이와 상당히 유사하다. 예를 들어서, 브라운은 일반적으로 아이를 뜻하는 히브리어 "옐레드"( )가 출 21:22에서는 태어나지 않은 아이에게도 사용되었으며, 바로가 죽인 아이를 '브레포스'( )라고 하더니(행 7:19), 그 단어가 태중의 세례 요한에게도 사용된 것에 주목한다(p. 120). 그리고 브라운은 태어나지 않은 사람들과 인격적인 방법으로 관여하신 예를 들면서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태어나지 않은 아이가 이미 하나님의 형성으로 만들어졌으며, 법의 보호를 필요로 하는 인간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신다"고 결론내린다(p. 127).

또한 데이비스는 "[태아가] 놀기(quickening) 시작하는 순간이 생명이 처음 있게 된 표가 될 수 없다"고 하면서 "살아 있는 인간이 수태되면서부터 있게 된다"고 하는 것이다. 또한 심지어 강간에 의해 임신된 경우(사례 분석에 근거한 조사 연구에 의하면, 강간에 의해 임신할 확률은 1/200에서 1/50된다고 한다)라도 "낙태를 하지 않는 것이 옳으며, 오랜 기간을 고려해서 판단하면 낙태하지 않는 것이 산모에게 더 유익이 된다"고 한다. 데이비스는 또한 우생학적 낙태에 대해서도 반대하면서 "성경적 전망은 '찾아 죽이는' 윤리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있지 않고"(p. 155), "그리스도의 윤리는 '찾아 죽이는'(search and destroy) 것이 아니라, '찾아 구원하는 것'(to seek and to save)이었다"고 한다(p. 156).

이런 입장을 유지하면서 데이비스는 체외 수정(IVF)은 "아직 알려지지 않은 위험에 인간을 노출시키는 인간 존재에 대한 도덕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실험의 한 형태이다"고 결론짖는다(p. 91). 아마 이런 입장이 개혁파 신학적 유산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일반적인 입장일 것이다.

개혁파의 입장과는 다른 세대주의적 입장을 가진 파인베르그 형제도 생명의 기원에 대한 문제와 이와 관련된 문제에 있어서는 위에서 언급한 이들과 거의 같은 입장을 유지한다. 그들도 수정되면서부터 생명이 시작된다는 분명한 입장을 취하고, 이로부터 관련된 윤리적 문제에 대한 평가와 논의를 다양한 반대 논의들에 대한 적절한 논박과 함께 제시하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인간됨(personhood)이 수태에서 시작되므로" 낙태는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이라고 말한다(pp. 59f.). 우생학적인 낙태에 대해서도 그런 입장을 취하고(p. 77), 심지어 강간이나 근친 상간에 의한 임신에 경우에서도 말이다(p. 79). 또한 위에서 우리가 언급한 바 있는 아주 엄격한 조건의 시험관 수정에 대해서도 그것은 "인간의 생명을 가지고 너무 큰 위험을 무릅쓰는 것"이라고 반대하며(p. 235), 수태시키지 않은 여러 수정란을 냉동시키는 것도 결국 그 생명에 손상을 주는 것이라고 판단하는 것이다(p. 236).

결국 시험관 수정은 "어떤 수정된 수정란들은 결국 아기가 되지 않을 것을 기대하고 의도가 들어 있는 사람에 의해서 조작되는 실험 과정"이라는 것이다(p. 237). 그래서 파인베르그 형제들은 그 모든 것을 알기까지는 더 이상의 시험관 수정에 대해서는 모라토리움을 선언하는 것이 옳다고 한다(p. 237).

루터파 신학자 헬므트 틸리케(Hermut Thielicke)의 신학적 입장도 위에서 제시한 입장에서 멀지 않아 보인다. 그도 인간 생명의 신성함은 수태가 되면서 바로 주어진다고 하면서, "태아는 아무도 침해할 수 없는 그 자체의 생명을 가지고 있다....... 태아는 그 자체의 순환계와 뇌를 가지고 있으며 이 외에도 기본적 생물학적 사실은 그를 한 인간으로 취급하기에 충분할 것이다"고 말한다. 오직 산모의 생명이 위험한 한계 상황에서는 허용할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이런 때에도 우리는 오직 "용서라는 조건에서만 결정을 내릴 수 있다"고 한다.

바르트와 바르트의 신학적 정향에 동감하는 이들 가운데서도 이와 비슷한 입장을 천명하는 일이 많이 있다. 예를 들어서, 바르트는 이렇게 말한다: "태아의 생명을 죽이는 사람은 곧 한 인간을 죽이는 것과 같으며, 따라서 그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생명과 그에게 속한 동료 인간의 생사를 판결하는 극악무도한 일을 감행한 것이다." 그러므로 바르트에게 있어서 인공 유산은 "사람의 생명을 죽이는 것"(the killing of human life)으로 이해되는 것이다. 맹용길 교수도 비슷한 입장을 잘 표현한다:

태아가 인간적이라는 것은 결코 부인할 수 없다. 그것은 태아가 분명히 인격적이기 때문이다. 태아는 적어도 인격이 가지는 질을 함축하고 있음이 확실하다. 그러므로 ..... 인간을 대하듯 태아를 대하여야 한다.

이 모든 인간이 예외 없이 하나님의 피조물과 형상으로서 존엄성과 신성성을 가진다. 인간은 생물학적인 결함이 있고 판단능력이 없다하더라도 다른 어떤 것은 아니고 인간이다. 인간은 자기 생명에 대한 통제력이 없고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태아의 생명을 돌보고 보호하여야 한다.

일단 태아가 하나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아 있는 것이라면 생존할 권리가 있는 것이고 그 생명은 보호를 받아야 한다......다시 말하면 이렇게 소리없는 자들의 개체성과 생명이 보호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우리는 성경에서부터 하나님 중심의 조망의 측면을 정당화하며 사회가 태아의 권리를 보호하는 분위기를 조성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태아가 인격체로서 정상인으로 성장할 때까지 계속되어야 한다.

인간의 생명의 시작은 여러 가지 논란에도 불구하고 수태시부터라는 사실이 점점 분명히 밝혀지고 있다.

태아의 생명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 한, 사회에서 생명에 대하여 많은 불행한 일이 계속 일어나게 하는데 자극제가 될 것이고 태아의 생명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생명인데 인공적으로 만든다는 의식을 심어 주어서는 안될 것이다. 항상 사람의 생명은 사람이 직접 만드는 것 이상의 것임을 이해해야 한다.

생명은 하나님의 영역이다. 함부로 손을 대지 않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논의에는 한계 상황에서의 결단을 설명하는 점에서 모호성을 나타내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바르트는 태아가 죽지 않으면 산모와 태아가 모두 죽게 되는 어쩔 도리 없는 두 생명 사이의 갈등을 내포하는 경우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 산모의 건강과 태아의 생명 중에 양자택일을 하게 되는 경우에도 최후 수단으로(ultima ratio) "산모의 자궁 내에서 태아를 죽이는 것은 허용되거나 명령될 수 있다"고 한다.

그 때에 인간은 하나님의 명령을 듣고 그 앞에 서서, 그리고 하나님께 대한 책임 가운데서 결단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는 아주 의미 있는 말로 들릴 수 있으나, 바르트의 역동적 계시 이해를 고려하면 매우 심각한 상황을 낳을 수도 있는 말이 되는 것이다. 더구나 그들은 개인의 생명의 시작에 대해서는 우리와 입장을 같이 하는 것 같이 보일지라도 인류 전체의 생명의 시작이 아담과 하와로부터라는 역사적 사실을 그대로 받아들이기 주저하고 있다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이점에서 발생하는 차이가 큼을 인정해야만 한다.

III. 결론

이제까지 우리는 생명의 개념을 정리하고, 물리적이고 생물학적인 생명이 과연 언제부터 시작된다고 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를 논의하여 보았다. 우리는 이 논의에서 개개인의 생물학적인 생명은 수태되는 순간부터 시작된다고 보는 것이 바른 견해라고 결론지었다.

정확히 언제 개개인의 생명이 시작되는가 하는 문제는 중요한 문제이고, 우리의 심각한 고찰과 논의를 필요로 하는 문제이다. 그러나 이 문제에만 너무 빠지는 것은 온전한 기독교적 인간관을 가지고 있지 못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기독교적으로는 우리에게는 우리가 <생명 3>이라고 부른 생물학적인 생명 외에 더 중요한 생명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생명 3>도 중요하다. 우리는 이 생명을 돌보고 치료하며, 마치 주님을 섬기듯이 우리와 다른 이들의 생명을 돌아보고 증진시켜야 한다. 그러나 이 생명이 전체인 것처럼 해서는 안되고, 우리는 더 고귀하고 높은 생명인 <생명 2>, 즉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생에로 사람들을 이끌어 가고, 그것을 제시하며, 그것을 희망하도록 하고, 그것을 누리도록 해야 할 것이다. 의료인들도 긍극적으로는 이 영생의 생명을 위해 의료 행위에 참여해야 하는 것이다. 결국 우리의 진정한 생명이 그 영생에 있기 때문이다.

생명의 기원에 대한 우리의 논의는 결국 이런 온전한 생명을 진정한 생명으로 여기는 의식과 풍토를 만들어 내는 작업의 일부가 되어야 할 것이다. "생명"하면 그저 물리적이고 생물학적인 "생명"만을 생각하는 것으로부터 더 포괄적이고 풍성한 생명을 생각하며, 언어의 사용도 그에 부합하게 하는 분위기가 조성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생명"의 진정한 의미는 영적으로 죽은 생명에서가 아니라, 영적으로 산 생명에서 온다는 것을 말과 이론과 학문으로 제시하고, 우리의 의료 행위와 삶으로 증시해 나가야 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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