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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윤리 입장에서 본 복제인간

생명환경자연 안단은............... 조회 수 3133 추천 수 0 2010.05.31 11:2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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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기독교 윤리 입장에서 본 복제인간

안단은 학부 B.Th 졸업논문

< 목 차 >

Ⅰ. 서 론
A. 연구 목적과 논문 개요

Ⅱ. 본 론
A. 인간 복제 기술의 과정
1. 인간 복제 기술이 나오기까지의 역사와 배경
2. 인간 복제 기술이 논란이 되는 이유
3. 복제 인간을 제조하는 방법과 그 문제
B. 생명의 정의와 그 윤리
1. 생명이란 무엇인가?
2. 생명 윤리란 무엇인가?
3. 생명윤리에 대한 기독교 신학의 입장
C.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
1. 인간에 대한 정의
2.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견해
3. 영혼의 기원문제
4. 인간의 창조 목적을 복제 인간에게 적용할 수 있는가?
D. 기독교적 자세와 그 대안
1. 복제 인간에 대한 기독교 창조 신앙의 입장
2. 인간 복제 기술을 반대하는 기독교적 방안들

Ⅲ. 결 론

Ⅳ. 참고문헌

Ⅰ. 서 론

A. 연구 목적과 논문 개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지 1997년이 흘러가고 있다. 20세기의 거의 막바지에 살고 있는 우리는 과학이 이룩해 놓은 엄청난 업적을 보아오고 있다. 과학이 가져온 여러 가지 편리함과 인류에게 주는 혜택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과학의 시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과학이 모든 것의 판단 기준이 되어버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다. 이러한 과학 지상주의의 시대에 과학의 새로운 발명품이나 기술은 무조건적으로 혹은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지기가 쉬운 것이 사실이다. 새로운 발명이나 신기술은 곧 '발전'과 '진보'라는 이름으로 사람들에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새로운 발명이나 신기술은 발전과 진보만을 나타내는 것일까? 그것은 항상 축복이기만 한 것인가?

 

올해 3월 영국에서는 20세기에는 불가능하게 여겨졌던 한 사건이 일어났다. 그 사건은 양을 대상으로 해서 동물 복제를 성공한 것이다. 정말 과학의 놀라운 업적이 아닐 수 없다. 한 동물의 체세포를 떼어내서 그 동물과 똑같은 개체를 또 하나 만들 수 있다니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전 세계가 이 사건에 관심을 집중했다. 그리고 많은 토론과 강연이 있었다. 아울러 수많은 논쟁이 벌어지게 되었다. 왜 사람들은 축하와 환호성을 올리기 보다 토론과 논쟁을 하는가? 그것은 복제기술이 가진 여러 가지 장점과 혜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기술이 가지는 심각한 가능성 때문이라고 사료된다. 그 심각한 가능성이란 그 복제기술을 인간에게 적용할 경우 인간복제가 실현될 수 있기 때문이다. 전 세계의 종교·윤리 단체들은 여러 가지 윤리문제를 제기했고 교황청은 복제기술을 신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하고 규탄했다. 반면 급진적인 과학 추종자들은 복제 기술의 여러 가지 장점과 혜택을 강조하면서 그 기술을 옹호했다. 과연 이 새로운 기술이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발전과 축복일까?

 

여기서 우리는 과학 기술에 대한 기독교의 입장을 확실히 해야 할 필요를 느낀다 개혁주의 신학 입장에서는 과학을 무시하지 않는다. 오히려 과학을 장려한다고 해야 할 것이다 개혁주의가 과학에 대한 이러한 입장을 취하는 근거는 창세기 1:28절에 나타난 모든 것을 정복하고 다스리라는 문화 명령이 그 근거이다. 그리고 또한 하나님께서는 이 세계를 질서 있고 통일성을 갖춘 세계로 창조하셨다는 신앙이 과학을 장려하는 근거라고 할 수 있겠다. 그렇다. 과학은 과연 하나님의 문화 명령을 수행하는데 훌륭한 '도구'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우리는 '도구'를 사용할 때 주의를 해야 한다. 도구는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서 그 결과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과학 기술 그 자체는 악이 될 수 없다는 것이 본인의 생각이다.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한 예로 '칼'의 경우를 보자! 칼이 부엌에 있는 어머니에게 주어질 경우 그것은 맛있는 요리를 만드는데 사용될 것이다. 반면 칼이 강도의 손에 주어질 경우 그것은 살인을 하거나 악한 일에 사용되어질 것이다. 똑같은 '칼'이 누구에 의해서 어떤 의도로 사용되어 지느냐에 따라서 그 결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과학 기술도 마찬가지다. 누가 어떤 의도로 사용하느냐에 따라 악을 낳을 수도, 선을 낳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과학 기술은 진보도 될 수 있지만 퇴보도 될 수 있고, 축복도 될 수 있지만 동시에 재앙도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과학 기술을 사용하는데 있어서 관리와 보살핌이 필요하다고 사료된다. 기술은 올바르게 선용할 수 있도록 인도되어야 하고 악용되지 않게 관리해야 할 책임이 있는 것이다.

 

복제 기술도 마찬가지다 그것이 가지는 악한 가능성 때문에 그 기술 자체를 배격하고 폐기하자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발상이며 반드시 기독교적이라고도 할 수 없다. 그러나 또한 과학을 너무 신봉하는 나머지 그것이 지니는 악한 가능성을 고려해 보지도 않고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것도 올바른 자세가 아니다. 그 기술의 장점과 혜택을 충분히 살리면서 악용 가능성을 배제하고 그에 대한 적절한 방침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그럼 복제 기술이 지니는 장점을 살펴보자. 많은 것을 고려할 수 있는데 우선 가장 요긴한 응용분야는 의학계로서 인간에게 필요하지만 엄청나게 부족한 장기 생산을 들 수 있겠다. 심장이나 신장 혹은 간과 같은 장기는 그것들을 필요로 하는 사람은 많은데 그 수효가 엄청나게 부족한 실정에 있기 때문이다. 복제 기술은 이 같은 장기를 대량생산하여 필요한 사람들에게 공급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불치의 병인 암이나 에이즈등의 질병을 고칠 수 있는 유용한 면이 있으며 양질의 고기를 무한정 복제해서 공급할 수 있고 우수한 혈통을 지닌 동물을 보존하고 번성시키는 데에도 사용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복제 기술이 가지는 치명적인 문제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그 기술이 인간에게 적용될 경우 여러 가지 문제점을 야기하기 때문이다. 여러 가지 사회문제를 들 수 있는데 기존 인간관계를 파괴시킬 수도 있으며 인간을 하나의 기계정도로 보려는 경향이 생길 것이며 이것은 인간 존엄성의 상실을 가져오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기독교 신앙의 입장에서 본다면 기독교 생명관과 인간관에 중대한 조건이 될 것이기에 더욱 더 심각하다. 즉, 인간의 생명은 하나님에 의해서 정해진 방법에 의해 탄생된다는 생명탄생의 원리를 무시하게 되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영혼을 소유한 존재라는 사실을 무시하게 된다는 것이다.

 

본 논문은 인간 복제가 기독교 생명관과 인간관에 심각한 해를 끼칠 수 있다는 사실을 바로 알아서 그 위험성을 알리고 기독교적 입장에서 인간에 대한 바른 이해를 가지게 하며 인간 복제에 대한 적절한 대처방안을 모색하고자 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고로 본론에서는 기독교 생명관과 인간관을 촛점으로 해서 전개해 나가고자 한다. 논문을 전개하는 순서는 우선 포유 동물의 체세포 복제 기술이 나오기까지의 개괄적인 유전공학의 역사와 배경에 대해서 알아보고 복제 기술을 인간에게 적용하고자 하는 생명 경시 풍조를 바로잡기 위해 기독교 생명관을 제시하고 이러한 바른 생명관과 인간관을 제시한 후 인간복제를 반대하는 기독교적 방안들을 다루고자 한다. 아울러 미리 말해둘 것은 복제인간에 대한 자료부족으로 인해 참고도서가 거의 없으므로 여러 정기 간행물과 단행본을 참고해서 종합적으로 정리해서 전개하고자 한다.

Ⅱ. 본 론

A. 인간 복제 기술의 과정

 

1. 인간 복제 기술이 나오기까지의 역사와 배경

 

우선 포유 동물의 체세포를 이용한 동물 복제가 나오기까지의 역사를 간단히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포유 동물을 복제하려는 연구는 사실 수십년 전부터 진행되어 왔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식물 복제의 경우는 그 역사가 1세기를 넘고 있는데 그 이유는 식물 세포는 하나의 체세포로부터 완전한 개체가 발생할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식물 복제에 매력을 느껴 동물복제를 위한 연구가 활발히 진행된 것이다 . 동물 복제를 향한 최초의 연구는 1950년에 차후의 인공수정을 위한 황소 정자의 냉동(영하 79도)에 성공한 것을 시작으로 해서 1952년 로버트 브릭스와 토머스 킹이 올챙이 세포를 이용해 개구리를 만들려고 시도했으며 1961년 옥스포드 대학의 존 거든 박사가 이 시도를 이어받아서 올챙이 창자 세포로부터 세포핵을 추출해 핵이 제거된 미수정란에 이식함으로서 창자세포로부터 핵을 제공했던 올챙이와 유전적으로 똑같은 복제 개구리를 탄생시켰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 개구리 복제에 성공한 이후 동물 복제라는 개념이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후 또다른 영국 데렉 버롬 홀은 복제기법을 통해 네 개의 토끼 배자를 성공했고 1981년에는 미 오리건대 연구팀이 8백 75개의 '제브라 다니오' 라는 얼룩말 무늬가 있는 태생 관상어를 복제하는데 성공했다. 이렇게 동물 복제를 향한 연구가 1950년대부터 활발히 연구되어 오다가 드디어 완전한 포유동물의 체세포 복제가 성공한 것이다. 체세포 복제가 나오기까지에는 형질 전환의 연구와 배자복제의 연구가 기본이 되었음을 또한 언급해야겠다. 형질전환이란 개체의 특정한 유전자를 다른 개체에 이식하거나, 기존의 유전자를 없애버려 그 개체가 갖고 있던 형질을 아예 다른 새로운 개체를 만들어 버리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배자 복제는 난자와 정자가 만나 이루어진 수정란을 똑같이 복제하는 것으로 체세포 복제와는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지만 방법상으로는 아주 유사하다고 할 수 있겠다.

 

이렇게 동물 복제를 위한 끊임없는 노력이 형질전환과 배자복제와 맞물려서 진행되어 왔고 결국에는 포유동물의 체세포 복제 기술이 나오기에 이른 것이다. 지금까지 개괄적으로 동물 복제 기술이 나오기까지의 역사를 살펴보았는데 여기서 본인은 그 과정 속에 내포되어 있는 기계론적 패러다임이라는 배경을 지적하고자 한다. 동물 복제를 하는 실험을 통해서 도대체 생명에 대한 존중이나 엄숙함을 살펴볼 수 없기 때문이다. 마치 기계를 조작하는 것처럼 동물을 다루기 때문인 것이다. 기독교적 입장에서는 모든 동물들을 지배하되 잘 다스려야 한다는 의무가 있는 것이다. 마치 기계처럼 동물을 다룬다면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는 것 뿐만 아니라 생명을 경시하는 것임을 두말할 나위 없다. 바로 이러한 태도의 배경이 기계론적 패러다임이며 더 해로운 것은 이러한 입장을 인간에게도 적용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동물의 생명을 존중하지 않는 배경에서 인간의 생명도 존중되어질 수 없음은 당연한 것이다. 그렇기에 복제기술을 인간에게 적용하려고 하는 과학지상주의자들이 나오게 되는 것이기도 하다. 또 하나 언급할 것은 이러한 기계론적 패러다임은 생명의 존엄성을 무시할 뿐만 아니라 기독교 인간관 부분에서 자세하게 다루게 될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영적인 존재라는 사실마저도 무시하고 있기에 더욱 위험한 것이다.

 

2. 인간 복제 기술이 논란이 되는 이유

 

복제기술을 인간에게 적용하는 것이 논란이 되는 이유는 복제기술이 가지는 방법상의 문제를 우선 말해야 한다. 체세포로 동물을 복제한다는 것은 우선 기존의 생명 탄생의 원리를 완전히 뒤집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정상적인 경우 사람은 난자와 정자가 만나 수정과정을 거쳐야 한 생명이 탄생하게 되는데 체세포로 동물 복제를 한다는 것은 이러한 수정 과정이 없는 무성생식이기 때문이다. 마치 아메바나 박테리아가 번식하듯 자신을 늘려나가는 것이나 다름이 없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에게 주어진 생명 탄생의 질서를 파괴하는 행위인 것이다. 게다가 태의 열매는 하나님이 주시는 소중한 생명인데 이러한 생명을 전혀 존중하는 자세가 없다는 것이다. 결국은 복제기술을 인간에게 적용한다는 것을 생명의 소중함을 느끼지 못하는 데서 오는 과오인 것이다.

 

또 하나 복제기술이 논란이 되는 주요한 이유는 복제기술을 인간에게 적용한다는 의도 자체에 인간 존엄성에 대한 무시가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도대체 복제 인간을 뭐하러 만들겠단 말인가? 어떤 선한것을 기대할 수 없다. 만일 누군가 복제인간을 만들겠다고 하면 나는 도대체 그 이유가 무엇인지 물어 보겠다. 혹 어떤 사람이 자신의 건강을 위해 자신의 장기 중 일부를 공급받기 위해서라고 대답한다면 그 사람은 자신의 건강을 위해 한 사람의 복제 인간을 사용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 복제 인간은 오로지 장기를 제공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복제인간은 마치 기계의 한 부속품 밖에는 되지 않는 것이다. 여기에 무슨 인간에 대한 존중과 가치가 있는가? 말 그대로 인간은 하나의 부속품, 즉 수단이 되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그리고 복제 인간을 또 만들고자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들은 분명 다른 목적을 위해서 복제 인간을 제조하려고 할 것이다.

 

예를 들어, 프로 농구의 구단주들은 마이클 조던이나 샤킬 오닐같은 선수를 복제해 그들의 팀에서 뛰게 하고자 할 것이다. 선수들을 스카웃 하는데 돈을 들이지 않고 그들이 원하는 우승도 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특정국가에서는 훌륭한 게릴라전을 위해 우수한 특수요원을 대량 복제할 수도 있고 어떤 국가의 왕이 독재자일 경우 그는 통제하기 쉬운 인간들을 생산하기 위해 복제 기술을 사용할 지도 모른다. 또 어떤이들은 잘생긴 영화배우를 복제하여 돈을 벌 생각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예는 인간이 상품화된 경우일 것이다. 이 모든 경우 역시 인간은 목적이 아니라 수단으로 전락해 버린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복제 기술을 인간에게 적용하고자 하는 것은 생명의 소중함을 경시하는 입장으로 기존의 생명의 탄생질서를 뒤집으려고 하는 것이며 인간을 그 자체로서 목적으로 여기지 않고 하나의 수단으로 간주하려는 것이다. 즉, 생명의 신성함과 인간의 존엄성을 경시하고 무시하는 기계론적 패러다임이 인간복제에는 들어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복제 인간은 논란이 되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창조 신앙의 입장에서는 어떠한가? 창조신앙에서는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천하보다 소중한 영혼의 소유자인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에 대한 계획을 태초부터 가지고 계시는데 이러한 섭리를 생명 탄생의 원리를 무시하고 만들어진 복제인간에게 적용할 수 있을지 과연 의문이 되는 것이다. 창조신앙 역시 인간의 존엄성과 생명 탄생의 소중함을 경시하는 복제 기술을 용납할 수 없다. 창조 신앙에서 볼 때 인간 복제는 그 자체가 하나님의 신성한 영역을 침범하는 것이 되고 만다. 혹 어떤이가 창조신앙이란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창조되었다는 것을 믿는 신앙이라고 말하며 하나님으로부터 창조된 것을 가지고 우리가 무엇을 만들기에 그것은 하나님의 영역을 침범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조금 더 생각이 필요한 주장이다. 왜냐하면 생명은 분명히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지 우리가 제조하는 것이 아니며 더구나 영혼을 소유한 인간은 하나님의 치밀하시고 영원하신 계획하에 탄생되는 것이지 우리의 조작에 의해 그러한 계획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생명 탄생과 아울러 영혼의 기원 문제에 연결이 되어지는 부분으로 더 자세한 것은 그 부분에서 다루고자 한다.

 

그럼 다음 장에서는 체세포로 동물을 복제하는 기술의 구체적인 절차와 그 방법을 알아보고 그것이 기존의 배자 복제와 궁극적으로 무슨 차이를 가지는지 언급하고 그로 인해서 무슨 문제가 생기는지 알아보자.

 

3. 복제 인간을 제조하는 방법과 그 문제

 

체세포로 동물을 복제하는 기술을 일명 '핵치환 기법'이라고도 언급하는데 우선 이 기술의 과정을 언급하기 전에 배자 복제 기술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이 좋을 듯 하다. 왜냐하면 배자 복제 기술에 대한 언급이 선행되어야 체세포 동물 복제 기술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고 그 근본적인 차이점을 알아 내는데 더 도움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배자 복제는 몇 년전 미국에서 제리 홀 박사등이 사람의 수정란을 복제하는 인간 배자복제에 성공해 이미 논란이 되었었던 문제로서 논란 후에 그 배자 복제된 수정란은 폐기 처분되었다고 한다. 그럼 지금부터 그 과정을 알아보자.

 

우선 배자 복제를 하기 위해서는 난자와 정자가 결합한 수정란을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수정란을 여럿으로 나누어 동시에 분할시켜 서로 똑같은 형질의 유전자를 가진 개체를 만드는 것이다. 따라서 양쪽 부모의 유전자를 받은 똑같은 자손들이 탄생되는 것이다. 그래서 부모와 자식간의 유전자는 다르고 자손들간의 유전자는 똑같게 되는 것이다. 고로 인위적인 조작이 가해지기는 했지만 보통의 부모 밑에서 태어나는 일란성 쌍생아와 다를 것이 없다. 이런 면에서는 정상적인 생명 탄생의 원리, 즉 난자와 정자가 결합한 수정란에 의한 출생은 지켜진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면 체세포 동물 복제인 핵치환 기법은 어떠한가?

 

이번에 핵치환 기법으로 성공한 '돌리'의 경우를 예로 들어 그 과정을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우선 6년된 양의 체세포를 검출한다. 그리고 체세포에서 핵을 분리한다. 다음으로 다른 양에게서 미수정란을 검출한 다음 미수정란에서 핵을 제거한다. 이 핵이 없는 미수정란에 체세포에서 분리한 핵을 삽입한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난자에 전기적 충격을 가해서 난자가 수정이 된 줄로 착각하게 하여 세포분열을 시작하게 한다. 이 난자를 제 3의 대리양에게 이식해서 낳은 것이 바로 '돌리'다. 돌리가 탄생된 과정을 지켜보면 다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핵치환 기법은 생식세포를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체세포를 이용한 무성생식이라는 것이다. 즉, 배자 복제는 양쪽 부모의 유전인자를 받은 개체를 탄생시키는 반면 핵치환 기법은 어느 한 개체를 그대로 복사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핵치환 기법이 가지는 큰 문제인 것이다. 그것은 바로 전통적인 생명 탄생의 법칙을 위배하는 것이다. 이러한 기술로 인해 인간이 탄생된다면 어쩌면 생명 탄생의 정의가 바뀔지도 모를 지경인 것이다. 이것은 생명은 정자와 난자가 결합하는 순간부터 나타나는 것이라는 전통적인 생명관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서 생명에 대한 정의와 그 윤리에 대한 바른 이해가 선행되어야 하기에 다음 장에서 올바른 생명관을 자세하게 다루고자 한다.

B. 생명의 정의와 그 윤리

 

1. 생명이란 무엇인가?

 

생명이란 무엇인가? 이 질문처럼 어려운 질문도 사실 없을 것이다. 생명이란 말은 어떤 입장에 서느냐에 따라 그 정의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우선 먼저 밝혀둘 것은 여기서 말하는 생명은 인간 복제에 관련된 생명의 문제이기에 당연히 생물학적 생명이라는 점을 언급해야겠다. 여기에서 언급하는 생명이 생물학적 생명임을 전제하고 나서는 과연 생명의 시작이 도대체 언제부터인지를 알아보아야겠다.

 

의학은 인간 생명의 시작을 어느 시점이라고 단정하지 않으며 다만 생물학적 현상과 그 상태를 의학적 용어를 사용해 기술하기 때문에 생명을 주로 생물학적 현상으로만 정의하고 있기에 생명의 시작 시점을 논의하는 데는 적절치 못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래서 생명의 시작에 관한 세 가지 관점들을 먼저 다루어 보고자 한다.

 

우선 첫 번째 관점은 유전인자 접근 학파의 관점으로 이 입장은 인간은 유전자가 제 각기 다른 존재로 난자와 정자의 결합에 의해 생기는 유전자 기호에 의해 신체의 모든 특징이 결정되고, 이러한 태아의 유전자는 양쪽 부모에게서 받았으나 부모와는 같지 않는 유전자 기호를 가지기에 태아를 하나의 '인격적 존재'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물론 이들은 그 논리상 생명의 시작을 수정이 이루어 진 때부터라고 볼 것이다. 이러한 면에서 성경적 입장에 가깝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두 번째 입장은 발달 중심학파로서 태아가 인격체라고 말하려면 유전인자 상태로는 충분치 않고 어떤 생리학적인 기능이나 기관의 발달, 혹은 뇌의 발달을 보인 단계부터 인간으로 인정하자는 입장이다." 이 입장의 사람들은 뇌사를 죽음으로 인정하기 때문에 태아도 뇌파를 보일 때부터 생명으로 간주하자는 입장을 취하고 있는데 뇌사를 죽음으로 인정하는 이유가 뇌가 회복이 불가능하다는 가능성으로 인한 판단이기에 뇌파가 곧 발생될 태아는 그 가능성으로 인해 왜 생명으로 볼 수 없느냐는 질문에 적절히 답할 수 없다. 즉, 뇌파를 보이지 않더라도 수정된 순간부터 뇌파를 곧 보일 것이며 인간이 될 것이기에 생명으로 보자는 것이 더 타당하다고 생각되는 것이다. 이러한 면에서 이 입장은 그다지 신뢰할 만한 것이 못된다.

 

"세 번째 입장은 사회적 결과를 중요시하는 학파로 인간의 본질 그 자체보다는 사고, 행동, 감정 등의 기능과 연관된 사회적이고 인격적인 요인을 중심으로 접근한다." 이들은 태아는 사고할 수 없으며 다른 사람들과 인격적인 관계를 성립시킬 수 없기에, 그리고 태아가 자아 개념이 없으므로 인격을 가진 사람이라고 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주장도 별 설득력이 없는 것으로 사료된다. 그 이유는 태아 뿐만이 아니라 이 세상에 태어난 신생아도 사실상 자아 개념이 없으며 진정한 의미의 인격적인 관계를 가지지 못하기 때문이다.

 

위에서 언급한 세 가지 입장이 인간생명의 시작에 대한 주요한 입장들인데 이 세 가지 입장 모두가 나름대로 합리적인 과정을 통해서 도달한 결론이라 할지라도 세 입장 모두 하나의 가설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위에 언급한 것 중 어느 것도 과학에 의해서 사실로 입증된 것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본인도 처음에 위의 세 가지 입장을 소개할 때 '이론'이라고 하지 않고 '관점'이라고 언급한 것이다. 관점이란 그들 나름대로의 신념이기 때문이다. 사실상 위의 내용들은 입증될 수 없는 가설이나 신념에 불과한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생명에 대한 참다운 지식을 어디서 얻어야 하는가? 성경은 어떻게 말하는지 알아보자.

 

성경에서는 인간 생명의 기원이 어떠하다고 말하고 있는가? 우리는 창세기에서 그 기원을 찾아 볼 수 있다. 창세기 1장 27-28절을 보면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라고 되어 있다. 또한 창세기 2장 7절을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고 되어 있다. 위의 두 구절을 보아 알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인간 생명의 기원이 하나님이며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인간의 생명은 하나님께로부터 왔으며 단지 생명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까지 주어졌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위에서 언급한 생명의 기원이 하나님이며 하나님의 형상으로 우리를 만드셨다는 것은 두 가지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사료된다. 우선 인간의 생명은 전적인 하나님의 주권하에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생명은 신성한 것이고 함부로 다루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두 번째로 하나님은 그분의 형상대로 우리를 만드셨다고 했는데, 하나님의 형상은 영혼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물론 하나님의 형상이라 할 때 꼭 영혼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전인적인 면을 말하는 것이지만 역시 영혼은 하나님의 형상에 있어서 필수적인 부분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에 관한 논의는 인간론에서 자세히 다루기로 하고 여기서는 인간이 창조될 때 꼭 육체적 생명만이 아니라 영혼이 창조된다는 것을 말하고자 한다. 즉, 생명과 영혼은 따로 떼어서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생명의 탄생이란 곧 영혼의 탄생이라고 생각된다. 인간 생명의 탄생이란 영혼의 생성인 것이다. 하나님이 인간을 흙으로 만드신 후 생기를 불어 넣으셨다고 했다. 그래서 인간은 생령이 된 것이다. 다시 말해 인간은 살아 있는 영적인 존재가 된 것을 말하는 것이다. 영혼이 있음으로 해서 생명은 시작하는 것이고 그 둘은 사실상 하나인 것이라고 사료된다.

 

이렇게 생명과 영혼을 따로 떼어서 생각할 수 없기에 생명에는 신성함과 신비로움이 있게 되는 것이다. 생명은 영혼의 생성과 더불어 시작되고 영혼은 하나님의 형상을 담고 있기 때문에 생명은 곧 인격이 되는 것이다.

 

그럼 성경이 말하는 생명탄생은 또 어떠한가?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어머니의 배속에 자리잡기 전부터 우리 모두에 대한 계획을 가지고 그 계획에 따라서 우리를 이 땅에 보내주셨다는 것을 말씀하신다. 예레미야 1장 5절을 보면 "내가 너를 복중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태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구별하였고 너를 열방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하시기로"라고 되어 있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가 복중에 잉태되기 전에 그를 향한 계획이 있었다고 말씀하신다. 만세전에 이미 우리를 예정하시고 계획을 가지고 계신 하나님께서 그분의 섭리에 따라 생명을 우리에게 주신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생명을 우리 임의대로 조작할 수 있겠는가?

 

또 생명에 대해서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생명은 또한 하나님의 선물로 묘사되고 있다. 시편 127편 3절을 보면 다음과 같다 ."자식은 여호와의 주신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라." 우리는 결혼을 하면 자연스럽게 아이를 얻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지만 아이가 그렇게 쉽게 생기지 않는 것을 우리 주위에서 볼 수 있으며 성경에서도 그러한 예를 찾아볼 수 있다. 한 예로 한나의 경우 그녀는 수태를 하지 못해 하나님께 간구하는 기도를 올려서 사무엘을 얻게 된다.(삼상2장) 그런데 그 사무엘이라는 이름의 뜻이 무엇인가? 그 뜻은 "내가 여호와께 그를 구하였다."라는 뜻이다. 이것을 통해 자식이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서 주어지는 선물임을 알 수 있다.

 

지금까지 성경에서는 생명을 어떻게 말하는지 살펴보았는데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생명은 전적으로 하나님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며 생명의 탄생은 곧 영혼의 탄생을 의미하는 것이고 그 영혼에는 하나님의 형상이 주어져 있기에 신성한 것이며 인격적이라는 사실이다. 또한 생명은 하나님의 계획하심과 섭리하심에 의해서 주어지는 것이며 동시에 하나님의 선물임을 알 수 있었다.

 

그러므로 생명은 신성하고 소중한 것이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이 생명은 하나님의 것이기에 우리는 소중하게 잘 보존해야 하는 것이다. 즉, 생명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책임이 뒤따르는 것이다. 무엇인가에 대한 책임이 필요하다는 것은 곧 그것에 대한 윤리가 있어야 함을 말하는 것이다. 생명에는 꼭 윤리가 있어야 한다. 만약 생명윤리가 없다면 생명을 아무 거리낌 없이 기계처럼 다루어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고로 다음 장에서는 생명 윤리에 대해서 자세하게 논하고자 한다.

 

2. 생명 윤리란 무엇인가?

 

전 장에서 언급했듯이 생명이란 그 기원이 하나님이며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이기에 소중하게 잘 관리해야 할 책임이 있다. 이러한 이유로 해서 생명 윤리는 꼭 필요한 것인데 먼저 언급해 둘 것은 여기서 말하는 생명 윤리는 하나님이 전적으로 생명의 주인 되시며 우리 인간은 아무런 권리가 없다는 것을 전제하고 다만 생명 보존에 있어서의 의무만 있다는 것이다.

 

그럼 생명 윤리가 왜 필요한지 그 구체적인 이유들을 알아보자! 우선 우리는 일상생활 속에서 생명에 관한 수많은 윤리적인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예를 들어 딸만 있는 집에서 또 여자아이를 임신했을 경우 그들의 부모는 낙태에 대해서 생각해 보기 때문이다. 이밖에도 수많은 문제들이 우리 주위에 있으며 오늘날의 생명윤리는 그 문제들이 아주 다양하며 극에 달해 있는 형편이다. 생명과학의 경우를 보자. 인간이 인간의 생명을 다루는 문제는 치료자가 환자를 '병'만 치료하는 것이 아니라 "병든 인간"을 치료하는 것이기에 그것에는 반드시 생명 윤리가 필요하게 되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 생명과학은 그 기술이 상당히 진보되어 이제는 복제 기술을 인간에게까지 적용하려고 하니 그에 따른 윤리적 기준과 지식이 완비되어야 하는 것이다. 무분별한 과학자들의 실험으로 결국에는 인간을 파괴할지도 모를 행위를 하지 않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기독교 윤리학은 생명 윤리를 어떻게 다루어야 할 것인가? 그것은 생명의 의미를 밝히고 생명으로 나아가는 그리고 보존하는 윤리이어야 한다. 즉, 생명은 하나님의 소유이며, 그렇기에 어떠한 경우라도 생명은 보존되어야 하는 것이 우선이라는 것과 생명은 인간에게 주어진 은혜이기에 반드시 하나님을 위하여 살도록 운명지어진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러한 생명 윤리관을 견지하면서 우리가 피해야 할 윤리관 세 가지를 언급하고자 한다.

 

첫째, 독단적 자유주의, 개인주의로서 이 입장은 개인의 자유를 절대적 가치와 행동규범으로 보며 내가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는 가가 선의 기준이다. 그렇기에 이 이 입장은 객관적인 윤리 규범이 아닌 상황에 따른 윤리를 주장한다. 이 입장은 타인에 대한 배려와 관심이 없기에 이미 생명 윤리의 영역에서 벗어난 입장이며 타인의 자유와 권리를 인정하지 않는 관점으로서 이 입장에서는 타인의 생명은 전혀 존중 받을 수 없는 것이다. 고로 이러한 입장은 강력히 제지되어야 한다.

 

둘째는 사회학주의로서 이는 모든 인간 현상과 행동을 사회학적 도식으로 설명하고 해결하려는 사고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입장에서는 사회를 신격화시키며 사회 규범에 적합한 행동이라면 무조건 윤리적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입장은 인간은 하나의 사회를 위한 도구로 전락해버리며 인간을 이렇게 바라보는 이상 그 생명도 경시 당할 것이 자명한 이치이기에 이러한 입장은 철저하게 배격 당해야 한다.

 

셋째로는 과학 기술주의로서 이 윤리관은 한 마디로 기술적으로 가능한 것은 무엇이든지 윤리적으로도 정당하다고 보는 입장이다. 이러한 입장이야말로 가장 위험한 입장이다. 소위 과학 지상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으로 그들은 과학을 그들의 신으로 삼고 있는 사람들이다. 과학은 단지 '도구'일뿐 절대 신이 될 수 없다.

 

이렇게 기독교 윤리관이 제지해야 할 세 가지 입장을 살펴보았는데 이 입장들을 살펴봄으로써 알 수 있는 것은 결국 생명 윤리는 곧 인간관이라는 사실이다. 인간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서 생명에 대한 자세도 달라지기 때문이다. 고로 생명에 대한 바른 윤리를 가지기 위해서는 바람직한 인간관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생명윤리는 생명이 곧 인격이라는 사실에 기초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올바른 생명윤리의 인간관은 인간이란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소중한 존재로 지, 정, 의를 갖춘 인격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인격체를 대하는 것처럼 생명을 대해야 하는 것이다. 그럼 다음 장에서는 생명 윤리에 대한 기독교의 입장을 구체적으로 다루어 보자.

 

3. 생명윤리에 대한 기독교 신학의 입장

 

생명윤리에 대한 기독교 신학의 입장은 기독교 신학이 취하고 있는 인간관에 따라서 그 입장이 주어지기 마련이다. 기독교의 인간관이 무엇이냐? 성경은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 졌다고 하며 동시에 그 형상을 지닌 영혼의 소유자라고 한다. 그렇기에 인간은 소중하며 신성한 것이다. 그러한 인간이 태어나는데는 하나님의 전적인 계획과 섭리가 작용하며 생명은 이러한 계획과 섭리 하에 주어지는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의 계획 하에 생명이 주어지고 이러한 생명이 인간의 출발이 되기에 생명은 소중한 것이고 잘 보존해야 할 책임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생명윤리에 대한 기독교 신학의 입장은 모든 생명이 하나님께로부터 왔기에 그 권리는 전적으로 하나님께만 있으며 인간은 그것에 대한 보존의 의무가 있음을 강조한다고 하겠다. 이러한 생명에 대해 기독교인의 태도는 어떠해야 하는가? 생명의 소중함과 신성함을 깊이 인식하고 생명에 대한 책임감을 강하게 가져야 할 것이다. 그리고 나서는 생명 윤리에 대한 관심을 가져야 한다. 생명 윤리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면 생명은 전혀 존중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생명 윤리에 관심이 없다면 우리는 낙태나 복제 인간에 대해서도 전혀 윤리적 책임이나 가책을 느끼지 않게 될 것이다. 그렇기에 생명 윤리에 대한 교회의 관심이 필요하고 이러한 관심은 생명 윤리에 대한 바른 가르침으로 나아가야 한다.

 

교회에서는 생명이 소중하다는 것을 따로 시간을 내어서 교육하는데 힘을 써야 할 것이다. 그래서 우선 성도들로 하여금 생명에 대한 바른 시각을 가지게 함으로써 기독교인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생명경시 현상을 제거해야 한다. 한 예로 기독교인 부부의 경우 낙태의 경험이 상당하다는 것으로 보고된 것을 들 수 있겠다. 이런 낙태의 경우는 대부분 교육의 부재였으며 낙태에 대해 그다지 윤리적 책임을 느끼지 않는 이유가 주된 이유라는 것이다. 이렇게 기독교인 사이에서 벌어지는 생명 경시 현상부터 바로잡아야 그 다음에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으리라고 사료된다.

 

그럼 지금부터는 생명 윤리에 대한 기독교 신학의 입장을 총괄적으로 제시하겠다. 우선 언급할 것은 생명은 우리 것이 아니며 하나님의 것이라는 사실과 우리는 생명의 보존에 대한 의무가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생명에 대한 바른 윤리가 필요하며 이 윤리는 바른 인간관에 정초 되어야 한다. 바른 인간관은 성경에 써 있는 대로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영적 존재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입장이다. 이러한 인간관을 가져야지만 우리는 동시에 바른 생명관을 가지고 생명을 잘 보존 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생명은 너무도 소중한 것이다. 생명은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선물로 주신 것이며 또한 사랑의 결실이기에 더욱 그렇다. 이러한 생명을 경시하는 기계론적 메카니즘이나 과학지상주의는 먼저 인간에 대한 참 이해가 없고 그에 따라서 바른 윤리가 없기에 복제 인간을 주장하는 것이다. 이러한 시대에 우리 기독교인은 인간이 어떠한 존재인지를 정확히 알고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할 수 있어야 하겠다. 그리고 바른 생명 윤리를 가르치고 알림으로써 참다운 인간관을 전해야 하는 책임이 뒤따른다고 생각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독교적 바른 인간관을 먼저 알아야 하겠기에 다음 장에서는 기독교 인간관에 대해서 자세히 다루고자 한다.

C.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

 

1. 인간에 대한 정의

 

인간에 대한 정의는 인간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그 입장이 매우 다양할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참된 진리인 성경적인 관점에서 인간을 정의하고자 한다. 우선 인간을 정의하기 위해서는 인간이 어떻게 창조되었는지를 알아야 인간에 대한 바른 정의를 내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 어떻게 창조되었는지를 언급하기 전에 하나님의 섭리를 먼저 언급하는 것이 옳을 것 같다. 왜냐하면 인간의 창조 앞에는 하나님의 계획하심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한 생명도 이땅에 아무 계획 없이 보내시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우리의 머리털까지도 다 세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예레미야 1장 5절을 보면 이러한 하나님의 계획하심을 정확히 알 수 있고, 또 시편 139편 16절을 보면 "내 형질이 이루기 전에 주의 눈이 보셨으며 나를 위하여 정한 날이 하나도 되기 전에 주의 책에 다 기록이 되었나이다."라고 되어 있다. 이렇게 인간은 거저 창조되고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치밀한 계획하심에 태어나는 소중한 존재인 것이다.

 

그럼 지금 부터는 인간이 어떻게 창조되었는지를 알아보자! 첫째, 인간은 다른 피조물과는 다르게 창조되었음을 지적해야 겠다. 다른 피조물들은 성경에 써 있기를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육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고"(창1:24), 또 "물들은 생물로 번성케 하라"(창1:20)고 되어 있다. 이렇게 다른 피조물들은 하나님께서 말씀으로만 창조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반면 인간은 어떠했는지 살펴보자. 창세기 1장 27절 하반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라고 되어 있다. 다른 피조물처럼 '땅은 그 사람을 내라''고 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여기서 인간의 창조에는 하나님의 직접적 사역이 있음을 알 수 있고 더 적합한 구절을 찾는다면 창세기 2장 7절 상반절을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라고 되어 있는데 이것은 하나님이 직접 흙을 빚으셨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창조는 하나님의 직접적인 손길에 의해 이루어 졌으며 그렇기에 인간은 다른 피조물과는 다르게 훨씬 더 소중하고 존엄한 존재인 것이다.

 

또한 인간의 창조에는 또 다른 중요한 특징이 있는데 그것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는 것이다. 창세기 1장 27절을 보면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라고 되어 있다. 다른 피조물들에게는 이렇게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했다고 하지 않으신다. 여기에 인간의 탁월함과 존엄성이 있는 것이다. 인간속에는 하나님의 형상이 있기 때문이다. 아울러 언급할 것은 하나님의 형상은 우리의 영혼과 긴밀한 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이 단지 영혼만을 가리키는 것만은 아니지만 영혼을 배제한 하나님의 형상 역시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형상과 영혼의 관계에 대해서는 다음장인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견해와 그 다음 장인 영혼의 기원문제에서 더 자세하게 다룰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과 영혼의 기원에 관한 논의를 잘해야 되는 이유는 복제인간이 영혼을 가진 존재인지 아닌지를 말해 주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그럼 다음 장에서 하나님의 형상에 대해서 알아보자.

 

2.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견해

 

이 장에서는 먼저 하나님의 형상에 관한 성경 구절들을 살펴보고 하나님의 형상에 관한 몇 가지 대표적인 견해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고는 성경적 증거에 충실한 하나의 견해를 제시하고 그에 따라서 복제 인간을 다루고자 한다. 우선 형상에 관한 대표적인 성경구절은 창세기 1:26-27일 것이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 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의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 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여기에서 형상이란 단어는 세 번이나 사용된다. 또 창세기 9장 6절에 보면 "무릇 사람의 피를 흘리면 사람이 그 피를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었음이니라"고 되어 있다. 이곳에서 한가지 유의할 점은 창세기 9장에서는 이미 인간 타락이 벌어진 후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형상의 효력이 남아있음을 언급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사실은 나중에 형상에 대한 성경적 견해를 제시할 때 다루기로 하자.

 

신약 성경에도 형상에 관한 구절이 많지 않다. 고린도전서 11장 7절을 보면 "남자는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이니 그 머리에 마땅히 쓰지 않거니와 여자는 남자의 영광이니라"고 되어 있으며 야고보서 3장 9절에서는 "이것으로 우리가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나니"라고 되어 있다. 이 말씀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이니 함부로 저주하는 말을 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강조하는 말씀이다. 이밖에도 신약에는 구원의 과정을 언급할때 형상이라는 단어가 사용되어지기도 한다. 예를 들어 로마서 8장 29절은 성도들이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해 미리 정하여 졌다고 기록하고 있다. 고린도후서 3장 18절을 보면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 암음이니라"고 되어 있으며 마지막으로 골로새서 3장 10절을 보면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은 자니라"고 되어 있다.

 

이제부터는 형상에 대한 견해들을 언급하고자 한다. 형상의 본질을 고찰하는 세 가지의 큰 방법이 있는데 이 세 가지 방법들을 개괄적으로 정리하고 나름대로 문제점을 제기한 후에 성경적인 형상관을 제시하고자 한다. 첫째는 실재적 형상관의 입장으로서 형상이 인간의 본성 그 자체안에 있는 어떤 특징들로 구성된다고 생각하는 입장으로 그들은 그 특징들을 육체적이거나 심리적인 혹은 영적인 것들이라고 주장한다. 이 입장에서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하나님의 형상의 본질에 대해서 아주 다양한 개념을 제시하고 있지만 그래도 가장 강조점을 두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의 자리에 관한 것이다. 그들은 형상의 자리가 인간안에 위치해 있다고 하며 더 나아가 형상은 인간의 본성안에 있는 한 자질이나 능력을 가리킨다는 것이다. 이것이 이 입장이 가지는 문제점으로 성경 본문 그 자체는 결코 인간안에 있는 어떤 자질들을 형상과 동일시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더구나 이 입장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형상을 인간안에 있는 한 자질 특히 지성으로 환원하는데 만약 그렇게 되면 사람마다 지성이 다르기 때문에 형상도 각 사람마다 다르게 되어 버린다. 지성적인 사람일수록 더 하나님의 형상을 많이 소유하게 될 것이다. 또한 인간 타락 사건도 하나님의 형상이 많이 손상되었다는 전통적인 견해를 벗어나게 되어 다른 해석을 요구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이 입장은 많은 결함으로 인해 설득력이 없다.

 

둘째는, 관계적 형상관으로서 이 입장은 형상이 인간의 본성안에 본유적으로 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있는 것, 혹은 두 사람이나 더 많은 인간들간의 관계속에서의 경험안에 있는 어떤 것으로 간주한다. 이 견해는 다른 피조물들과는 달리 오직 인간만이 하나님과 관계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간파했다. 타락 이전에 인간은 하나님과 직접적인 대화를 나누었던 것이 사실이고 분명 인간은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형상을 전적으로 관계의 문제로 보게 된다면 여러 가지 문제점이 생길 수 있다. 우선 만약 하나님의 형상이 전적으로 관계에만 있다면 하나님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나 하나님과 관계를 맺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형상이 없게 되어버린다. 그러나 성경은 어디에서도 이렇게 말하지 않는다. 성경은 오히려 모든 사람이 소중하며 그 속에 하나님의 형상이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이런 면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단지 관계적인 관점으로만 보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세번째는, 기능적 형상관으로서 이 입장은 형상이 인간에게 본유적으로 있는 것도 아니요 혹은 경험할 수 있는 어떤 것도 아니고 단지 인간이 행하는 어떤 것이라고 간주한다. 이 견해는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한 후 지배의 명령이 뒤따른다는 사실을 날카롭게 분석했다. 그래서 이들은 형상과 지배사이에 긴밀한 연관이 있다는 사실을 지나치게 강조하여 형상이란 곧 어떤 행위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주장하기에 이른 것이다. 물론 이들은 형상과 지배사이의 관계를 잘 파악했지만 지나치게 나아갔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형상과 지배의 실행을 동일시한 명백한 언급이 없기 때문이다. 이 견해는 형상의 결과를 오히려 형상과 동일시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그래서 이 입장 역시 바람직한 견해는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지금까지 형상에 대한 세 가지 입장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나름대로의 문제점을 살펴보았는데 사실 이 문제는 정확하게 해결해 줄 수 있는 직접적인 성경 구절이 없기에 본인은 개혁파 입장에 서서 개혁파가 제시하는 형상의 본질을 언급하고자 한다. 첫째, 하나님의 형상은 인류안에 보편적으로 있다는 것이다. 최초의 인간인 아담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어졌으며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다는 사실은 성경에 의해서 확실히 지지 받고 있기 때문이다. 둘째 형상의 구성 요소로는 인간의 혼 또는 영과 다양한 기능을 갖춘 지성과 의지, 그리고 불멸성을 공유하는 영혼의 적절한 기관으로서의 인간의 몸을 든다.

 

위의 사실들을 기본으로 해서 개혁파 신학은 하나님의 형상이 인간의 본질을 구성한다고 말한다. 이러한 하나님의 형상은 전인격적인 면을 가리키기에 꼭 영혼에만 적용할 수 없는 것이 사실이고 하나님의 형상은 영혼의 적절한 기관으로서의 몸도 포함하는 것이 사실이나 영혼을 언급하지 않고 하나님의 형상을 논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렇게 영혼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은 만약 복제인간에게 영혼이 없다면 그에게는 당연히 하나님의 형상이 없고 그는 당연히 인간으로서의 본질을 갖추지 않은 것이 되는 것이다. 그럼 다음 장에서는 영혼의 기원에 대해서 알아보자.

 

3. 영혼의 기원문제

 

영혼의 기원문제는 복제 인간에 대한 우리의 입장을 분명하게 해줄 것이기 때문에 매우 중요하다. 영혼이 언제 생성되느냐? 영혼은 어떠한 과정으로 생성되느냐?를 잘 살펴봄으로써 복제 인간에게 영혼이 있느냐? 없느냐?를 추론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영혼의 기원 문제는 상당한 주의를 요해야 한다. 왜냐하면 영혼의 기원 문제 역시 성경이 최초의 인간인 아담을 제외하고는 정확하게 언급을 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본인은 개혁파의 입장에서 창조설을 지지하고자 한다. 먼저 영혼의 기원에 관한 역사적 견해들을 약술하고 영혼의 기원에 관한 세 가지 입장인 선재설, 유전설, 창조설을 다루고 창조설의 입장에 서서 영혼의 기원 문제를 마무리 지으려고 한다.

 

영혼의 기원에 대해서는 희랍철학도 상당한 관심을 보였으며 기독교 신학에도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희랍의 철학자 플라톤은 영혼의 선재를 믿었으며 초대 교회때는 알렉산드리아 학파만이 혼의 선재에 관한 교리를 주장했다. 오리겐이 선재설을 주장하는 대표적인 학자였으며 이 관점은 인간의 타락을 시간 이전에 발생한 것으로 간주한다. 이점은 선재설을 다룰 때 비판하기로 하자 선재설 이외에 두 가지 견해가 있는데 창조설은 개인이 탄생할 때 하나님이 새 영혼을 창조하신다는 입장이며 이 주장은 주로 동방교회에서 지지를 받았다. 한편 서방 교회에서는 영혼 유전설이 득세했는데 이 입장은 인간의 영혼은 몸과 함께 혈통을 통해 전이 된다는 것이다.

 

시간이 흘러 중세 시대에는 어거스틴이 유전설과 창조설 사이에서 고심을 했으나 중세기 끝나갈 무렵에는 점차적으로 개인의 영혼은 창조된 것이라는 방향으로 흐르게 되었으며 종교개혁시대 이후로는 견해차이가 났는데 루터는 유전설을 선호 했으며 칼빈은 창조설을 선호했다. 그래서 루터교회는 유전설을, 개혁파는 창조설을 따르게 되었다. 그러나 물론 개혁교회 내에서도 꼭 창조설을 따르는 것만은 아니다. 그럼 각 입장을 구체적으로 알아보자.

 

선재설은 오리겐, 스코투스 에리게나 등이 주장한 것으로 인간의 영혼은 육체와 결합하기 전에 그들만의 고유한 상태 하에 있었다는 것이다. 오리겐이 이러한 선재설을 주장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오리겐은 인간이 현재와 같은 물질적인 실존 상태에 있게 됨으로써 물리적이고 도덕적인 불평등과 불규칙성에 종속할 수 밖에 없게된 것은 이전의 실존 상태에서 범한 죄 때문이라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스코투스 에리게나 역시 죄를 시간 이전에 있는 영혼들이 죄를 지어 죄인으로서의 생을 시작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입장은 수많은 반론에 직면하게 된다.

 

가장 큰 문제점은 이것이 전혀 성경적인 근거가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입장은 물질과 정신을 따로 보려는 이원론의 입장을 취하고 있어 몸을 열등하고 악한 것으로 보며 영혼만으로 인간은 완전한 존재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 그러나 성경은 몸을 열등하거나 악한 것으로 언급하지 않으며 인간은 혼만이 아닌 육적인 존재라는 것이다. 고로 이 설은 전혀 성경적이지 못하기에 지지할 만한 것이 못된다.

 

다음은 유전설로서 초대교회 시절에는 터툴리안이 주장했으며 중세이후에는 루터가 지지한 입장으로 인간의 영혼은 몸과 더불어 혈통을 통하여 전이된다고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부모에 의해서 영혼이 자식에게 그대로 유전된다는 것이다. 이 입장은 선재설과는 다르게 성경의 지지를 어느정도 받는다. 가장 큰 것으로는 창세기 1장 28절과 2장 7절에 있는 내용으로 하나님은 오직 한번 인간의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시고 이후의 인간에게는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는 것이다. 하지만 창조설의 입장에서 보면 몸의 창조와 영혼의 창조는 엄격하게 구분된다. 몸은 땅에서 취했지만 영혼은 하나님으로부터 왔기 때문이다. 이것은 몸과 혼이 다른 실체로 표현되어 있으며 각각 다른 기원을 가진 것으로 성경이 서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유전설에는 치명적인 결함이 있는데 그것은 그리스도론에서 나타난다. 만약 영혼이 유전된다면 아담이 범한 죄로 인해 죄로 물든 인간 본성이 그대로 유전되며 그 이후에 태어난 그리스도의 인성도 범죄한 상태이기에 죄책을 가지고 있다는 결론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난점으로 인해 유전설은 개혁파의 입장에서는 수용할 수 없다.

 

마지막으로 창조설인데 이 견해는 각 개인의 영혼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창조물이라는 입장이다. 물론 영혼이 언제 정확하게 생성되는지는 말하기 어려우나 대개 한 개인이 탄생될 때 주어진다고 본다. 이 입장은 성경과 잘 부합되는데 성경은 유전설 부분에서 비판했던 대로 몸의 기원과 영혼의 기원을 다르게 서술하기 때문이다. 즉, 영혼이 몸과 함께 유전된다는 것을 지지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 입장은 유전설이 빠졌던 그리스도론에 있어서 심각한 난점에 부딪치지 않는다. 즉, 이 입장은 성경에서 말하는 그리스도는 참된 인성을 가지신 진정한 인간이며, 구체적인 몸과 혼을 지녔으며 여자에게 태어나셨고, 모든 면에서 우리와 같은 자이나 죄는 없으신 분이라는 사실에 잘 부합한다. 왜냐하면 이 입장은 유전설처럼 영혼이 죄를 전해 받은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아닌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죄인이 되느냐는 질문을 하면서 죄가 인간 영혼 자체에 내재하는 것이 아니냐고 반문하고, 또 그렇게 된다면 하나님이 악의 직접적인 창시자가 되지 않느냐는 질문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시점에서 한가지 분명히 해야 할 사실이 있다. 개혁파 입장에서는 유전설을 지지하는 사람들처럼 원죄를 완전히 유전의 문제로 간주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담의 후손이 원죄로 인한 죄인이 되는 이유는 그들이 죄를 지은 영혼을 물려받아서도 아니고 죄악된 육체와 접촉해서도 아니다. 그들이 죄인인 이유는 우리를 대표하는 첫 사람 아담이 죄를 지었고 하나님께서는 이 죄를 우리에게 '전가'시키셨기 때문인 것이다. 여러모로 창조설이 세 견해 중에서 가장 성경적이라고 생각하며 이 견해를 지지한다.

 

영혼의 기원을 창조설의 입장에서 보기 때문에 영혼은 새 생명이 탄생될 때 주어지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렇기에 영혼은 생명과 더불어 시작되고 인간의 생명은 하나님이 정해주신 원리에 의해 생기게 되는 것을 전제한다면 이러한 생명 탄생의 원리에 입각하지 않은 생명체에는 영혼이 있다고 주장할 수 없는 것이다. 고로 그러한 생명체에는 하나님의 형상도 없게 되고 하나님의 계획이나 섭리하고는 무관한 것이 된다. 한마디로 복제 인간은 인간의 모습만 하고 있지 하나님의 형상을 갖춘 참다운 인간 존재가 될 수 없는 것이 확정적이다. 이러한 복제 인간에게 과연 인간 창조의 목적을 적용할 수 있겠는가? 이것이 다음 장에서 다루어질 문제다.

4. 인간의 창조 목적을 복제 인간에게 적용할 수 있는가?

 

인간의 창조 목적이 무엇인가? 하나님은 인간을 왜 창조하신 것일까? 하나님은 만세전부터 우리를 향한 계획을 갖고 계시는데 그 목적은 도대체 무엇인가? 성경은 그 목적이 사람이 구원받고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것이라고 한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 받기를 원하시고(딤전 2:4), 또 고린도전서 10장 31절 보면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되어 있다. 이렇게 인간의 창조 목적은 구원을 받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인데 영혼이 없는 복제 인간에게 복음선포를 통한 영혼 구원이 어떻게 가능하겠으며 영혼 구원이 되지 않은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 수 있겠는가? 복제 인간은 하나님의 인간창조 목적에 완전히 위배되며 절대 적용될 수 없다.

 

만약 복제인간이 탄생된다면 우리는 너무나 난감할 것이다. 우리는 그에게 복음을 전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갈등하게 될 것이다.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를 짐승으로 대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는 복제 인간을 그렇게 대우한다면 참다운 인간도 그렇게 대접받게 될 소지가 많게 되며 그렇게 되면 결국에는 인간 존엄성에도 해를 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복제인간은 철저하게 금지되어야 한다. 다시 말하지만 인간의 창조 목적을 그에게 적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D. 기독교적 자세와 그 대안

 

1. 복제 인간에 대한 기독교 창조 신앙의 입장

 

우리는 이제 복제 인간에 대한 창조 신앙의 입장을 분명히 밝힐 수 있을 것 같다. 왜냐하면 앞서 인간의 생명과 인간이 어떠한 존재인지를 다루는 생명관과 인간론을 다루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생명관과 인간론을 종합해 볼 때 기독교의 창조 신앙은 하나님께서 모든 생명의 기원이시고 창조자이시며 모든 생명의 시작부터 보존하시는 분이라는 것과 그 분이 생명의 주인이라는 것을 믿는다. 이렇게 하나님이 생명의 모든 것을 주관하시기에 우리 인간은 생명을 해할 권리가 없다는 것과 다만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을 보존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생명은 하나님께로부터 왔고 하나님의 계획하심에 의해 탄생되기에 그만큼 소중하고 값진 것이다. 고로 우리는 생명을 잘 간직하고 보존해야 할 책임이 있는 것이다. 우리 생명은 우리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무엇인가에 책임이 있다는 것은 곧 그것에 윤리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바른 생명 윤리관을 가져서 생명이 함부로 이용되어지지 않게 해야할 것이다. 이것이 기독교 창조 신앙의 입장인 것이다.

 

아울러 기독교 창조 신앙은 인간을 어떻게 보는가? 창조신앙은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영혼을 소유한 존재라고 한다. 다른 피조물들과는 다르게 인간에게는 하나님의 형상이 주어져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인간은 다른 피조물보다 신성하고 더 소중한 존재인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을 십자가에 죽게 하시기까지 인간을 사랑하시는 것이다. 어떻게 이러한 인간을 가지고 조작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므로 기독교 창조 신앙은 인간을 기계처럼 다루거나 대하는 것을 죄악으로 여기고 철저히 규탄한다. 복제 인간은 과연 어떤가? 복제 기술을 인간에게 적용하겠다는 발상에서 과연 생명에 대한 존중과 인간에 대한 존중을 볼 수 있는가? 전혀 볼 수 없다. 복제 인간은 생명과 인간을 조작하려고 하고 있다. 복제 기술의 장점은 인류를 위해 봉사 할 것이다. 그러나 그 기술의 인간에 대한 적용은 인간을 하나의 기계정도로 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기독교 창조신앙은 절대 복제 인간의 허용을 용납하지 않고 반대하는 입장을 취한다.

 

2. 인간 복제 기술을 반대하는 기독교적 방안들

 

이런 반인륜적이고 비인간적인 복제인간 제조를 막는 기독교적 방안들이 모색되어야 함은 두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우선 세계적인 흐름을 볼 때 복제 인간을 금지하자는 분위기로 인해서 인간 복제를 막는 금지법이 대부분의 나라에서 채택되었다. 이것은 바람직한 현상으로서 우리 기독교인은 인간 복제 금지법을 주장하고 끝까지 지켜야할 것이다. 그리고 단순히 법으로만 제정할 것이 아니라 그에 대한 처벌도 명확히 규정해야 할 것이다. 법이란 경우에 따라서 바뀔 수도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인간 복제 금지법에 대한 확실한 입장을 취해야 한다.

 

이러한 복제 금지법에 대한 확실한 입장을 견지하기 위해서는 윤리 위원회를 조직해 그때 그때의 상황에 잘 대처해나가야 할 것이다. 아울러 기독교 교육기관이나 교회에서는 생명과 인간에 대한 올바른 가치체계를 교육하여 앞으로 기성세대가 될 청소년을 바르게 선도해야 할 것이다. 이것에 대한 구체적인 방안을 들자면 창조 과학회 등에서는 세미나를 개최하여 저명한 학자들을 초청해 복제인간의 여러 가지 문제점을 토론하고 강연함으로써 복제 인간에 대한 바른 이해를 도울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또한 우리 사회에 깊숙이 스며들어 있는 대중 문화를 통해서도 복제인간의 위험성에 대한 경종을 울릴 수 있어야 한다. 크리스챤 작가들은 소설등을 통해서 복제인간이 실현될 경우 그 폐해를 지적할 수 있고 영화 제작사와 감독들은 복제인간의 폐해를 주제로 다룬 영화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사실 외국의 경우 많이 현실화 되고 있는 것들이다.

 

여기 제시되어 있는 것들 말고도 또 여러 가지 방안들이 모색될 수 있을 것이며 그렇게 되어야 할 것이다. 어찌하든 간에 복제인간의 위험성을 알리고 올바른 가치체계로 인도하는 여러 가지 방안들을 우리 모두 모색해야 할 책임이 있으며 그 방안들을 모색하는데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Ⅲ. 결 론

지금까지 복제 기술을 인간에게 적용하는 것에 반대하고 올바른 생명관과 인간관, 즉 바른 가치체계를 제시하고 알리기 위해 논문을 진행해 왔다. 지금 전세계는 다원주의가 판을 치고 있기에 더욱 더 바른 가치관이 요구된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제 각기 자신이 선호하고 추종하는 사상이나 입장을 견지하고 있으며 그들은 각자의 입장을 존중한다고 한다. 어떤 사람들은 과학의 노예가 되어 버렸으며, 또 어떤 이는 동양의 신비종교에, 또 어떤 이는 특정한 철학의 노예가 되어 버렸다. 그러나 진리는 단 하나일 수밖에 없으며 그것은 배타적인 것이다. 성경만이 참다운 진리이며 그 가르침이 우리의 가치판단 기준이 되어야 한다. 복제 기술을 인간에게 적용하자는 것은 과학의 노예들이 주장하는 것이며 그것은 참 진리에 입각한 것이 아니다. 이것을 본인은 본론을 통해서 계속해서 논증해 왔다.

 

물론 과학 기술이 우리에게 유용한 기술이며 인간 생활을 편리하게 해주는 하나님이 주신 '도구'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서론에서도 언급했듯이 '도구'는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서 그 결과가 달라질 수 있기에 잘 사용해야 하는 것이다. 잘 사용해야 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올바른 가치판단이 있어야 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럼 올바른 가치판단을 위한 근거를 어디서 얻어야 하겠는가? 과학 자체에 올바른 가치판단을 위한 근거가 있겠는가? 도대체 '도구' 자체에 무슨 판단 근거가 있겠는가? 만약 있게 된다면 그 판단 근거는 도구 자체에 있기에 그것은 도구를 위한 판단 근거가 될 것이며 도구가 목적이 되어버릴 것이다. 그러나 본인은 도구는 목적을 위해 사용되는 도구이지 도구 자체가 목적이 되는 도구는 논리적으로 이해할 수 없고 이해하지 않는다. 더군다나 성경이 그렇게 말하지 않으며 성경이야말로 하나님의 말씀이며 그렇기에 모든 것의 판단기준이 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본론에서는 성경에 입각한 바른 생명관과 인간관을 전개해 왔다. 인간 복제 기술의 과정에서는 인간 복제 기술이 나오기까지의 역사와 배경을 살펴봄으로써 그 속에 내재해 있는 생명을 경시하는 기계론적 메카니즘과 과학이 최고라는 과학지상주의를 비판했다. 그리고 생명의 정의와 그 윤리에서는 인간 생명의 주권이 전적으로 하나님께 있으며 그렇기에 우리 인간은 생명에 대한 권리가 있는 것이 아니라 잘 보존해야 한다는 의무를 강조했다. 아울러 생명이 하나님으로부터 왔기에 생명은 소중한 것이며 잘 보존해야할 책임이 있음을 밝혔다. 그래서 생명윤리가 필요한 것이며 올바른 생명 윤리를 개진함으로써 우리는 복제 인간 속에 내재하고 있는 기계론적 메카니즘과 과학지상주의의 폐해를 지적하며 규탄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성경에 입각한 바른 인간관을 제시했는데 인간이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영혼을 소유한 존재이며 이 영혼은 인간에게 있어서 본질적인 부분임을 강조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형상과 그것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영혼은 인간에게 본질적인 요소이기에 형상과 영혼의 기원에 관한 논의를 통해 복제인간이 왜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영혼을 소유할 수 없는지를 주장했다. 그리고 이렇게 영혼을 소유하지 않은 복제인간은 하나님의 인간 창조 목적에 어긋난다는 것을 성경을 예로 들어 설명하였다.

 

그리고 본론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기독교 창조신앙의 입장에서 복제인간을 반대해야 하는 이유를 종합해서 정리하였으며 복제 기술을 인간에게 적용하는 것을 금지하는 법을 제정해야하고 복제인간을 반대하는 구체적인 방안들을 모색해 보았다.

 

그러나 몇몇 사람들은 복제인간을 반대하는 이런 방안들을 모색한다고 할지라도 인간은 언제나 당위성보다는 가능성에 매력을 느껴왔고 과학도 가능성에 투자를 하는 학문이기에 반드시 복제인간이 실현될 것이라고 주장하며 그렇기에 복제인간을 금하는 법과 방안은 별 소용이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물론 본인도 복제인간이 머지 않아 나타나게 될 것이라고 예견한다. 하지만 복제인간이 나오게 될것이 자명하다고 해서 그것을 법으로 제지하는 것이 무용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마치 인간이 살인을 저지르게 될 것이 분명한 사실이기에 그것을 법으로 금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는 것만큼이나 어리석은 주장일 것이다. 그렇기에 복제인간이 나오게 될 것이 자명하다고 해도 우리는 그것을 법으로 제재해야 하며 살인을 죄악으로 여기는 것처럼 복제 기술을 인간에게 적용하는 것도 죄로 정하고 처벌을 규정해야 할 것이다.

 

또한 어떤 사람들은 휴머니스틱한 이유로 복제인간을 그다지 죄악시 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들은 주장하기를 임신을 못하는 부부일 경우 두 사람의 유전자를 다 받지는 못했어도 사랑하는 배우자를 꼭 닮은 아이를 가지고 싶어할 수 있고 또 그것은 그다지 추하게 보이지 않는 다는 것이다. 또 사랑하는 자식이 죽어가고 있을 때 부모는 그 자식을 복제하고 싶을 것이며 또는 사랑하는 연인이 불치의 병이나 사고로 죽어갈 때 역시 복제에 대한 욕망을 느끼는 것은 자연스럽다고 주장하며 그것은 너무나도 인간적이고 당연한 현상이라고 말한다. 물론 하나님의 섭리나 주권이 없다면 이것은 극히 휴머니스틱하다. 그러나 하나님의 인생에 대한 주권과 섭리를 인정한다면 우리는 감히 이런 주장을 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인간으로서의 한계를 인정하고 하나님의 섭리를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기에 그렇다.

 

결론으로 복제 기술 그 자체는 올바르게만 사용하면 인류에게 엄청난 축복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 기술을 인간에게 적용해서는 안된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영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천하보다도 소중한 존재이기에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것이다. 아울러 인간이 가지고 있는 생명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이기에 소중하게 잘 간직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하한 이유로도 인간의 생명에 대한 인위적인 조작을 인정할 수 없고 규탄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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