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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고린도전 최용우............... 조회 수 1161 추천 수 0 2010.06.06 08:5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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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고전12:31-13:3 
설교자 : 한완상 형제 
참고 : 새길교회 2010.1.3 주일설교 

sgsermon.jpg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가장 좋은 길 :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고린도전서 12 : 31 ~ 13 : 3]

한완상 형제

 

경인년 새해를 맞아 우리는 갈릴리 예수의 원초적 열망과 비전을 다시 한 번 확인 할 필요가 있습니다. 국가나 시장이 작년 이맘때 심각한 금융 위기를 낳았습니다. 무한 경쟁이 무한 탐욕을 부추기면서 엄청난 재앙을 가져오게 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새삼 깨닫게 되었습니다. 정말 낙관적 <역사의 종언>은 끝장나야 할 직금의 상황에서도 경쟁과 승리의 가치가 국가권력 주체와 시장의 강자들에 의해 소리 높여 외쳐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때 예수따르미들은 정말 갈릴리 예수계서 엄혹했던 로마지배의 질서 속에서 이룩하시려고 하신 선교적 비전이 무엇이었는지 다시 한 번 성찰해 보아야 합니다.

 한마디로 그것은 하나님나라 세우기였습니다. 여러 가지 지혜의 말씀과 비유 등으로 예수께서는 하나님나라의 참 모습을 드러내 보였지요. 그 가운데 잔치비유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그 잔치를 비유를 통해 말씀하셨을 뿐 아니라, 당신 자신이 그 잔치를 친히 배풀어 하나님 나라의 모습을 드러내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의 잔치를 좀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 먼저 당시 로마제국에서 펼쳐졌던 잔치와 예수잔치가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또 예수보다 한 발짝 앞서 하나님 나라 운동을 펼쳤던 세례요한의 운동과 예수잔치운동 간의 본질적 차이에 대해서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로마식 잔치는 황제를 절대화하고 신성화 했던 상황에서 펼쳐졌던 부강한자들끼리의 잔치였습니다. 무력으로 변방을 정복하면서 승승장구 그 영토를 확장해 나갔던 로마권력은 그들의 승리를 자축하면서 황제의 신적 권위를 더 높였습니다. 로마 주류 세력의 잔치는 화려했고 부강했던 만큼, 그것 또한 배타적이었습니다. 거기에 빈약한자들, 패배한자들, 탈락한자들, 꼴찌들을 위한 공간과 배려는 없었습니다. 하기야 요즘 우리 주변에서 연말연시를 기해 벌어지는 온갖 잔치들, 특히 화려한 호텔 같은 곳에서 펼쳐지는 우리들의 잔치도 상당히 로마식 잔치를 닮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저는 오래 전부터 괴벽 아닌 괴벽을 지니고 있지요. 이런 때 여기저기서 잔치 초청장이 오는데 대체로 저는 사양합니다. 특히 동창회나 고향지역의 유력자들이 초청하는 잔치에는 가지 않습니다. 제가 명문학교를 나왔기에 더더구나 그런 초청에는 가지 않습니다. 그곳에는 성공과 출세, 승리와 부강에 대한 예찬 소리가 소음처럼 시끄럽게 들리기 때문입니다.

 예수 잔치는 이 같은 승리주의자들의 잔치와는 아주 다른 잔치였습니다. 그것과는 너무나 급진적으로 달랐습니다. 왜냐하면 예수의 하나님 나라가 로마강권지배 체재와 달랐기 때문입니다.

 

예수는 세례요한이 처참하게 참수 당하자 곧 요한의 개혁운동과 유사한 것처럼 보이는 운동 깃발을 들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는 것이었지요. 그런데 예수의 하나님 나라는 세례요한의 그것과도 사뭇 달랐습니다. 세례요한은 심판주 하나님이 역사에 기적적으로 개입하여 이 세상을 준엄하게 심판한 뒤 세울 미래의 새 질서가 바로 하나님 나라로 믿었습니다. 그것은 미래의 사건이지요.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그날이 오기를 기다리면서 오늘, 여기서 금욕과 금식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설파했습니다. 한마디로 세례요한의 새 질서를 위한 운동은 경건한 금식 곧 fasting의 삶을 강조했습니다.

 

그런데 예수 운동은 금식이 아니라 즐거운 잔치 곧 feasting의 운동이었습니다. 비록 하나님나라의 그 완벽한 모습은 미래에 나타나겠지만 지금 여기서 우리가 사랑을 실천할 때 아빠(abba)의 나라는 우리가운데서 누룩처럼 번지게 되고, 겨자씨처럼 자란다고 깨우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 잔치는 로마식 잔치와는 아주 다르게, 빈약자들, 꼴찌들, 탈락자들이 주인처럼 대접 받는 사랑과 환희의 잔치였습니다. 비주류들이 더욱 자유롭게 다른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고, 패배한 자들이 우아하게 고개를 쳐들 수 있는 따뜻한 잔치입니다. 여기에선 꼴찌들이 상석에 앉게 됩니다. 그런데 그 상석에 있는 순간 꼴찌의 기쁨을 오래 누릴 수 없어 곧 그 자리를 다른 꼴찌에게 양보합니다. 그러기에 따뜻함과 넉넉함의 기운이 잔치 마당을 가득 채우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잔치가 세례요한과 로마제국의 그것과 달리 기쁨과 자유가 함께 번진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잔치에 초대 받은 사람들은 스스로 자기를 즐겁게 낮추려는 사람들이요, 자기를 비워 남에게 기쁘게 종이 되려는 사람들입니다. 자기의 자유를 스스로 줄여 남의 자유를 더 늘려 주려 하지요. 그러기에 그 잔치에서는 정말 아름다운 역설이 현실이 됩니다. 자유의 아름다운 역설이지요.

 

이것을 다르게 표현한다면, 서로 상대방에게 우아하게 지려고 즐겁게 앞장섭니다. 누구를 사랑하기에 그 사람에게 지고 싶어 몸살하게 되는 그런 관계가 펼쳐지지요. 이 사랑의 역설을 이해한다면, 자유의 역설도 쉽게 이해 될 수 있습니다. 예수잔치에서는 모두가 자기의 자유를 스스로 즐겁게 제한하면서 남을 더 자유롭게 해주지요. 그러면서 마침내 서로가 더욱 자유로운 주체로 살아가게 되지요. 그곳에[서는 스스로 상대방에게 우아하게 지므로써, 마침내 모두 함께 이기는 기막힌 상승(相勝)의 기쁨을 맛보게 되지요. 이것이 바로 예수 잔치 곧 예수의 하나님 나라 비전이라 하겠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 앞에 서게 됩니다. 이 같은 예수의 하나님나라 운동이 초대 교회에서도 지속 되었던 가요? 그의 십자가 처형으로 이 잔치 운동은 끝장나고 말았던 가요? 갈릴리 예수의 운동은 십자가와 부활사건 이후 변질되고 말았던가요? 초대교회를 세우고 초대교회의 신학을 확립했던 사도바울은 갈릴리 예수운동을 추상화 시켰던 가요? 그것을 헌신짝처럼 버렸던가요? 이런 질문들 앞에서 저는 감히 예수잔치의 그 자유와 그 환희는 부활사건이후 그 엄혹한 로마권력의 탄압아래서 더욱 성숙되고 더욱 알차게 진전되었다고 믿습니다. 그 잔치의 자유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과 속죄의 자유와 기쁨으로 심화되고 확대되었다고 믿습니다. 부활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체험하게 된 평화와 은혜를 감사 감격하면서 날로 새로운 존재로 나아가게 되는 자유를 그리고 그 기쁨을 사도 바울은 감동적으로 증거 했습니다. 그에게는 율법주의의 사슬에서 벗어나 새로운 피조물로 태어나는 자유인의 기쁨이 곧 복음의 핵심이지요. 사도 바울은 비록 갈릴리 예수를 직접 만난 적은 없었지만 그의 죽음이 갖는 새롭고 깊은 신학적 깨달음을 통해 갈릴리 예수 운동을 한 차원 더 높게 새로운 상황에서 펼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유대 율법주의로부터의 해방이기도 했습니다. 할례나 코셔(kosher)의 제약으로부터 해방이지요. 이런 외양적 율법준수 행위가 갖다 주는 기쁨과는 견줄 수 없는 소중한 해방의 기쁨을 그는 부활의 그리스도를 만남으로써 체험하게 된 것이지요. 그 엄혹한 로마권력의 탄압 속에서도 굳세게, 의연하게, 우아하게 견딜 수 있었던 힘도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 체험한 성령의 힘, 그 자유케 하는 은총의 힘이었습니다. 그 기쁨과 자유가 결코 갈릴리 예수의 잔치의 자유와 기쁨을 내동댕이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더욱 감동적으로 심화시키고 확산시켰습니다. 여러 가지 어려운 초대교회 상황에서 바울은 그것을 더욱 아름답게 다듬어 내려 했습니다.

 

그런데 그에게 이 잔치의 자유가, 그 구원의 기쁨이 심각한 문제를 던져주었습니다. 그에게 고민이 생겼지요. 그 문제와 고민을 이해하기 위해 먼저 그의 구원신앙이 확고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당시 예루살렘의 모교회, 또는 본부교회의 주역들보다 더 강하게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철저하게 아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의 선물임을 확신했습니다. 그 확신만큼, 그는 할례규범이나 음식을 가려먹는 유대전통이 구원의 조건이 될 수 없다고 믿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은혜와 믿음이 그에게는 구원으로 인도하는 길이었습니다. 바로 이 같은 확신 때문에 바울은 당시 가장 영향력이 컸던 예루살렘 모교회의 지도자들, 특히 베드로와 다툰 적이 있습니다. 그냥 다툰 것이 아니라, 베드로를 위선자로 질책하기까지 했지요.(갈라디아 2:11-14) 바울은 막강했던 예루살렘 교회지도층(그 최고지도자는 바로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였으니까요.)에 대해서 그는 때로 맞서기까지 하면서 부활의 그리스도 안에서 얻은 은혜와 자유의 소중함을 역설했지요.

 

이 같은 그의 신앙적․신학적 원칙은 확고했습니다. 우리가 구원 받게 되는 것은 율법을 지킴으로써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은혜로 아빠 하나님과 의로운 관계를 맺을 수 있다고 확신했습니다. 그래서 아직도 율법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한 듯 행동했던 베드로를 감히 맞서고 그를 나무랄 수 있었지요.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고린도 교인들에 대해서는 사도바울의 사뭇 다른 태도를 보게 됩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예루살렘교회의 거물에 대해서는 자기 원칙을 날카롭게, 매섭게 내세웠던 바울이 자기가 세운 교회 안에서는 부활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드리면서도 아직도 유대 율법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한 형제자매들, 자왕우왕했던 그 연약한 신도들에 대해서는 놀라울 만큼 유연하고 융통성 있는 입장을 취했고 소통의 가치를 역설했습니다. 아직도 자기처럼 급진적인 신앙 곧 은혜와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게 된다는 신앙에 이르지 못한 교우들에 대해서는 깊고 뜨거운 교감과 소통의 가치 그리고 역지사지(易地思之)와 역지감지(易地感之)의 실천을 역설 하셨습니다. 사도바울의 목회신앙과 목회신학은 놀랍게도 소통의 신학이기도 하며, 그러기에 그것은 따뜻한 예수 잔치의 자유와 환희의 신학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바로 이점을 대신해 바로 이 바울의 열린, 따뜻한 마음을 고린도교회의 두 가지 문제와 연관하여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바울의 목회신학은 오늘 21세기를 사는 우리 한국교회에서도 나무나 적절한 메시지를 던져 주기 때문입니다.

 

먼저 우상에게 바친 제물을 먹는 문제를 생각해 봅시다. 바울은 원칙적으로는 만물이 모두 하나님의 것인데, 못 먹을 것이 없다고 생각했지요. 그는 우상에게 바친 제물도 개의치 않고 먹을 수 있었습니다. 이런 뜻에서 그의 신앙은 당시 상황에서는 대단히 급진적이었습니다. 그런데 교회안에서는 아직도 율법의 영향아래 매여 있어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복음의 자유를 누리면서도 다른 한 편 깨럼직 하게 느끼며 고기를 먹는 분들이 있었지요. 바울은 그들의 곤혹스러움과 아픔을 깊이 동고(同苦)했습니다. 그래서 이들 약한 신도들의 이 곤혹스런 아픔과 정체성의 혼란을 악화시키지 않도록, 이미 자유롭게 행동하는 앞서가는 신도들에 대해 신중한 메시지를 던졌습니다. 특히 은혜와 믿음으로 자유를 얻어 기뻐했던 분들의 그 자유가 약한 형제자매들에게 걸림돌이 되지 않아야 한다고 안타까워하며 다음과 같이 강조 했습니다.

 “여러분에게 있는 자유가 약한 사람들에게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 그리스도께서는 그 약한 신도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고린도전서 8:9, 11)

 “나는 어느 누구에게도 얽매이지 않은 자유로운 몸이지만, 많은 사람을 얻으려고 스스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되었습니다.”(고린도전서 9:19)

 한 걸음 더 나아가 바울은 모든 것이 다 자유롭다고(허용된다고) 하여 마음대로 행동할 수 있겠지만, 모든 자유가 모두 유익한 것이 아니다고 했습니다. 모든 자유가 다 덕을 세우는 것은 아니라고 말하면서(고전10:23-24) 이 같은 덕은 새로운 깨달음과 그 지식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사랑실천에서 온다고 했습니다. 지식은 오히려 사람을 교만하게 하지만 사랑은 덕을 세운다고(고전8:1) 깨우쳐 주었습니다. 정말 이 덕이 바로 공동체를 예수잔치처럼 열려 있고 따뜻한 잔치로 변화 시키는 힘이지요. 덕이 바로 사랑의 향기요 사랑의 효험이라 하겠습니다. 이 사랑의 힘으로 자기의 소중한 자유를 남을 위한 더 소중한 자유를 위해 스스로 제약 할 수 있게 되지요. 남의 종이 되는 수준까지 자기 자류를 즐겁게 제한시킬 수 있지요. 이것이 바로 우아하게 패배 할 수 있는 힘이기도 하지요. 이 힘으로 공동체가 따뜻해지고 넉넉해지면서 예수의 잔치, 예수의 하나님나라가 우리 속에 누룩처럼 번지게 되지요. 여기서 우리는 참 자유인 바울의 아름답고 성숙한 모습을 흐뭇하게 확인 하게 됩니다. 바울의 깊은 배려와 그 따뜻한 힘을 새삼 오늘의 상황에서 느낄 수 있습니다.

 

둘째로 교회 안에 자유롭게 발생하는 은사들 간의 충돌에 대해 바울은 마음 아파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로 새로운 능력을 얻게 된 신도들이 어떤 뜻에서는 너무 자유로워져 자기의 은혜(카리스마)와 그 능력을 남의 것 보다 더 우월하고 소중한 것처럼 주장한 듯합니다. 율법의 속박에서 벗어난 신도들 가운데는 치유의 은사, 기적의 능력, 예언의 은사, 방언의 능력 등을 자유롭게 체험하게 된 것 같습니다. 자기의 카리스마가 남의 것 보다 더 중요하다고 주장하게 되면 교회가 잔치 공동체의 그 열린 넉넉함과 그 관용의 따뜻함을 지켜내고 키워가기 힘들게 됩니다. 오히려 분쟁과 혼란이 생길 수 있게 되지요.

 

바로 이런 상황에서 사도 바울은 교회가 예수잔치의 마당일 뿐 아니라 잔치 수준에서 한 걸음 더 깊이 나아가 예수의 몸이라고 선포 했습니다. 교회에 대한 깊은 신학적 성찰이지요. 예수의 몸은 예수잔치 보다 더 의미가 깊습니다. 존재론적으로나, 인식론적으로도 예수 몸은 더 깊은 뜻을 지닙니다. 신학적으로도, 사회학적으로도 몸은 잔치보다 더 적절하고 심오한 표현이요 그리고 그것은 탁월한 신학적, 신앙적 통찰력입니다.

 

 예수의 몸에는 차이는 있되 결코 차별은 있을 수 없습니다. 머리가 결코 발에게 ‘너는 쓸데없다.’라고 말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몸의 지체 가운데 더 약해 보이는 지체들이 더 요긴하다고 했습니다. 덜 명예로운 지체들에게 더욱 높은 명예를 덧입혀주고, 볼품없는 지체들을 더욱 더 아름답게 꾸며 준다고 했습니다(고전12:21-23). 바로 이 같은 바울의 탁월한 해석은 따지고 보면 하나님나라 잔치에서 꼴찌가 첫째가 된다는 갈릴리 예수의 말씀에서 비롯되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역사의 바울 모습에서 역사적 예수 모습을 뚜렷하게 보는 듯합니다.

 

 이제 우리는 사도 바울의 메시지 중 가장 아름답고 감동적인 메시지를 만나게 됩니다. 그는 여러 은사들이야 말로 예수 몸의 여러 지체들의 기능과 같다고 보았지요. 비록 그가 그 은사들의 순서를 매기긴 했으나 그 순서가 중요한 것은 결코 아닙니다. 왜냐하면 제일 약하고 볼품없는 지체가 더 소중한 역할을 해 낼 수 있기 때문이지요. 이 은사들 보다 훨씬 빼어난 은사를 그는 감동적으로 제시 했습니다. 이것이야 말로 참으로 뜻 깊은 제시입니다. 이 은사가 없으면, 다른 모든 은사들이 모두 헛것이 되고 마는 그러한 정말 소중한 은사를 그는 강조했지요. 바로 이 은사의 소중함을 힘주어 강조하고 그것을 열심히 구하라고 권면한 뒤 그는 주옥같은 고린도전서 13장의 메시지를 던진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사랑의 카리스마에 대한 예찬입니다. 흔히들 바울 신학은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이신칭의(以信稱義)의 신학이나 속죄신학으로 좁게 규정하여 바울이 갈릴리 예수의 실천적 삶과 사역을 가벼이 여기거나 무시했다고 보기 쉽습니다. 저는 바울 신학의 핵심과 정수와 본질은 예수의 몸을 몸답게 만드는 힘, 바로 그 사랑의 힘에 대한 그의 신학적 통찰력에 있다고 믿고 싶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랑이 갖는 자기 비움의 힘에 대한 그의 신학적 통찰력이지요. 그래서 자기를 비워 남을 채우면서 전체를 온전케 하는 힘, 곧 구원 하는 힘이라고 그는 믿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케노시스(kenosis)의 기독론이기도 하지요(빌립보2:5-11). 이런 관점에서 우리는 고린도 전서 12장의 끝절(31절)에서 13장의 3절까지의 의미를 새삼 새롭게 되씹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더 큰 은사를 열심히 구하십시오. 이제 내가 가장 좋은 길을 여러분에게 보여드리겠습니다. 내가 사람의 모든 말과 천사의 말을 할 수 있을지라도 내게 사랑이 없으면, 울리는 징이나, 요란한 꽹과리가 될 뿐입니다. 내가 예언하는 능력을 갖고 있을지라도, 또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또 산을 옮길만한 모든 믿음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내가 내 모든 소유를 나누어 줄지라도 내가 자랑삼아 내 몸을 넘겨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는 아무런 이로움이 없습니다.”(고린도전서 12:31-13:3)

 

여기서 바울의 이 감동적인 시어(詩語) 속에서 저는 당시 초대교회 상황에서 생겼던 여러 현상과 현실을 묘하게 느끼는 듯합니다. 사람의 모든 말과 천사의 말이란 표현에서는 당시 수사학의 화려한 표현기법을 생각나게 합니다. 예언하는 능력이라는 표현에서는 당시 혼란스럽게 풍미했던 묵시종말론적 예언들을 생각게 합니다.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이란 시어에서는 당시 번지기 시작했던 영지주의적 신학흐름을 느끼는 듯합니다. 산을 옮길만한 믿음에서는 바울자신의 이신칭의(以信稱義)의 신앙을 생각게 합니다. 그의 신앙 강조조차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자기 비움의 고백, 그 겸손한 고백을 직접 듣는 듯합니다. 소유를 나누어 준다는 표현에서는 초대교회의 원시공산주의 삶의 한 모습을 떠 올리게 합니다. 자기 몸을 불사르는 결단, 그 불타는 정의감은 요즈음의 자살폭탄 같은 결의를 갖고 로마권력에 맞섰던 젊은 열혈 젤롯당을 연상시킵니다. 어떻든, 바울은 이 모든 훌륭한 듯 한 카리스마적인 능력과 헌신도 그것이 사랑에 바탕 하지 않을 때, 그것이 사랑에서 우러나오지 않을 때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장엄하게 선언 했습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마치 0의 숫자가 다른 모든 숫자의 크기를 아무것도 아닌 0으로 되돌리듯, 사랑이 0일 때 모든 능력들은 헛것이 되고 맙니다. 아니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이렇게 저는 외치고 싶습니다. 사랑 없는 정의(正義)는 오히려 독선의 분노로 이어지며 사랑 없는 자유는 분쟁의 자유로 이어지며, 사랑 없는 믿음은 광신의 폭력으로 이어지게 된다고 말입니다. 오늘의 현실에서도 우리는 사랑 없는 종교가 악행을 권장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스티븐 와인버그 교수는 이렇게 증언했습니다.

 “종교가 있던 없던 선한 일을 하는 사람과 악한 일을 하는 사람이 있는 법이다. 그러나 좋은 사람이 악한 일을 하려면 종교가 필요하다.”

 파스칼은 더욱 정곡을 찌르는 증언을 했지요.

 “사람들은 종교적 신념으로 악을 저지를 때 가장 철저하게 그리고 즐기면서 그 악을 저지르게 된다.”

 

이것은 사랑없는 종교가 가장 악마적이 될 수 있다는 증언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러기에 사랑이 가장 큰 은사요, 그 사랑의 은사로 이끄는 길이 제일 좋은 길임을 바울사도는 강조하지 않을 수 없었겠지요. 사랑은 우아하게 짐으로써 함께 이기는 길로 우리를 인도하며 사랑은 그러기에 보복의 악순환을 확실하게 끊어 내는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서로 지려는 사랑의 공동체에서 악순환은 결코 작동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선순환이 작동되면서 그것이 하나님 나라의 아름다운 평화의 모습을 마침내 드러내 보일 것입니다.

 

이 같은 하나님 나라의 평화를 올해 모든 새길의 교우들과 모든 예수따르미들이 체험하게 되길 기도합니다. 그 평화의 은혜를 체험하기 위해서 우리는 갈릴리 예수님이 산위에서 제시해 주신 실천적 가이드, 실천적 힌트에 새삼 주목 합시다. 아내의 결점, 남편의 결점이 보일 때 마다 그 결점이 바로 투명한 영의 거울로 변화되게 해야 합니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느냐고요? 그 결점을 볼 때 그 속에서 엄청나게 큰 자기 결점을 먼저 보게 되면, 상대방의 결점은 곧 은혜롭고 투명한 영적 거울, 도덕적 거울로 변화 될 것입니다. 거울에 비춰진 자기의 부끄러운 모습을 뚜렷하게 보게 되면서 아내와 남편을 더욱 높여 주고 싶은 마음이 생길 것입니다. “역시 내 아내가 나보다 나아.”, “역시 내 남편이 훨씬 더 훌륭해.” 라는 속삭임 소리가 마음 속 깊은 데서 조용히 은혜롭게 우러나올 것입니다. 그 소리는 바로 천사가 속삭이는 소리이기도 하고 갈릴리 예수의 따뜻한 목소리이기도 할 것입니다. 아니 아빠 하나님의 목소리이기도 하지요. 이때 서로 우아하게 지고 싶은 사랑의 힘이 솟아나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하나님 아빠는 항상 스스로 비워 우리에게 다가오시어 우리를 새 존재로 채워 일으켜 세워 주시는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갈릴리 예수와 부활의 그리스도는 골고다의 길로 우아하게 성큼 성큼 걸어가시면서 우리 모두를 부활의 승리로 인도하시는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성령께서 항상 이와 같은 깨달음을 주시어 저희들로 하여금 우아하게 지도록 힘 있게 이끌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새해에 우리 모두 서로 은혜롭게 지므로써 그리스도 예수와 더불어 모두 함께 이기는 기쁨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이것이야 말로 바로 사도 바울이 제시한 가장 좋은 길이 아니겠습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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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71 고린도후 향기가 됩시다 고후2:12-17  우제돈 목사  2010-06-03 2857
3570 마태복음 잃은 양 찾아 마10:5-16  우제돈 목사  2010-06-03 2564
3569 마가복음 믿음 더욱 줍소서 막16:9-18  우제돈 목사  2010-06-03 2395
3568 누가복음 지옥 보내지 맙시다 눅16:19-31  우제돈 목사  2010-06-03 2628
3567 요한복음 믿음과 감사 요5:1-9  우제돈 목사  2010-06-03 2777
3566 데살로전 범사에 감사하시오 살전5:12-18  우제돈 목사  2010-06-03 2555
3565 사무엘상 사울, 왜 이럴까? 삼상15:14-23  우제돈 목사  2010-06-03 2560
3564 마가복음 해봅시다 막9:14-29  우제돈 목사  2010-06-03 2459
3563 마가복음 귀신들린 사람들 막5:1-15  우제돈 목사  2010-06-03 3296
3562 요엘 이제라도 욜2:12-14  우제돈 목사  2010-06-03 2733
3561 시편 회개하는 자의 축복 시32:1-11  우제돈 목사  2010-06-03 2741
3560 마태복음 요단강에 이르러 마3:13-17  우제돈 목사  2010-06-03 2174
3559 고린도후 영원토록 있는 것 고후9:6-11  우제돈 목사  2010-06-03 2075
3558 고린도후 수건 좀 벗으세요 고후3:12-18  우제돈 목사  2010-06-03 2199
3557 사도행전 용기를 주는 사람들 행18:1- 8  우제돈 목사  2010-06-03 2921
3556 마태복음 신앙으로 인한 환난 마10:34-36  강종수 목사  2010-05-30 2040
3555 열왕기상 혼이 돌아오게 하옵소서 왕상17:17-24  박노열 목사  2010-05-28 2536
3554 히브리서 그의 음성을 듣거든... 히3:7-19  박노열 목사  2010-05-28 2311
3553 민수기 쳐다본즉 살리라 민21:4-9  박노열 목사  2010-05-28 2869
3552 사무엘상 한나의 기도와 서원 삼상1:9-18  박노열 목사  2010-05-28 3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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